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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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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1일 11시 16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사기 - 동양 역사서의 근간이자 인간학의 보고(寶庫)

 

동양뿐 아니라 세계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사기( 史記)]는 사성(史聖 ) 사마천( 司馬遷)이 아버지 사마담(司馬談 )의 유언에 따라 완성한 역사서로, 전설 상의 황제( 黃帝) 시대부터 자신이 살았던 한 무제(漢武帝 ) 때까지 2000여 년을 다루었다. 특히 주나라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제후국 50개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 戰國七雄), 즉 진( )을 비롯한 한( )ㆍ위( )ㆍ제()ㆍ초( )ㆍ연( )ㆍ조() 등의 흥망성쇠 과정을 주축으로 한 인물 중심의 통사다. 역사 속에 명멸해 간 제왕과 제후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과 각국의 생존사가 [사기]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정점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온 상고( 上古) 시대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생존싸움이 서려 있었고, 그 아래에서 펼쳐진 개개인들의 힘겨운 삶은 [사기]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역사상 많은 지식인들이 이 책을 인간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파헤친 인간학의 보고(寶庫)라고 보는 이유이다.

 

[사기]는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는 사마천 개인이 보여 준 불세출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안목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기]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술과 투철한 역사관으로 동양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책일 뿐 아니라, 행간 행간에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서이자 학문의 전 분야를 아우른 백과전서이다. 이러한 [사기]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려사]도 기전체로 쓰였다.

 

[사기]의 쉼 없는 생명력의 원천은 처절한 인간적 고뇌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데 있다. 사마천이 [사기]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의 언제라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을 [사기]의 완성에 내걸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

 

[사기]는 다른 역사서들과는 달리 국가가 아닌 개인의 노력으로 탄생한 대작으로서, 저자 사마천의 삶과 [사기]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사마천의 출생 시점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한데 대체적으로 한 경제( 漢景帝) 중원(中元 ) 5년인 기원전 145년에 태어났다고 본다. 자는 자장( 子長)이며 용문(龍門 , 지금의 섬서성( 陝西省) 한성시(韓城市 ))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사마담( 司馬談)은 한 무제 때 사관인 태사령( 太史令)에 임명된 역사가였다. 사마천은 아버지가 받들었던 황로( 黃老)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면서 천문과 지리, [주역] 및 음양의 원리 등을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長安 )에 오면서 새로운 세계에 더욱 눈을 뜨게 된다.

 

사마천은 스무 살 때인 한 무제 원삭 3(기원전 126)부터 3년 가까이 전국을 유람하여 오늘날의 호남성, 강서성, 절강성, 강소성, 산동성, 하남성 등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때의 유람은 훗날 [사기]의 현장성을 높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돌아오고 나서 20대 후반까지는 경학대사인 공안국(孔安國)에게 고문을 배워 유학에 대한 식견도 쌓았다. 청나라 학자 왕국유(王國維 )의 고증에 의하면 바로 무제 원수( 元狩) 5(기원전 118), 나이 스물여덟에 사마천은 낭중(郎中)이 되었다. 낭중은 한나라 관료 체계에서 낮은 등급에 속했는데도 한 무제는 순행(巡幸- 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기 위해 돌아다님)과 봉선( 封禪- 중국의 천자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던 일) 의식에 사마천을 데리고 다녔으니 사마천이 무제의 총애를 상당히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원봉( 元封) 원년(기원전 110) 사마천의 나이 서른여섯이 되던 해, 한 무제는 동쪽 태산에 봉선 의식을 거행하러 순행했는데, 그를 수행하던 태사령 사마담이 낙수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그때 사마천은 무제의 사신으로 파촉 이남 지역에 새로운 군( ) 설치 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위독해진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에게 유언을 남겼으니 그 핵심은 역사를 집필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사마천은 원봉 3(기원전108)에 아버지의 대를 이어 태사령이 되니 이때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사마천이 태사령이 된 지 5년 후 한 무제는 태초력(太初曆)이라는 새로운 역법을 발표하고 연호를 바꾸고는 봉선 의식에 참여하게 되는데, 대개 이 무렵 그가 [사기] 집필을 시작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가 [사기]를 온전히 혼자 힘으로 저술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아버지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사기]의 체계를 어느 정도 세워 두었고, 서른일곱 편 정도는 이미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본래 [사기]태사공서( 太史公書)’라고 불렀으니, 이는 태사공이 지은 책이란 의미로서 아버지에 대한 존칭을 드러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음을 보였다.

 

그런데 사마천은 한 무제의 눈 밖에 나면서 크나큰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천한(天漢 ) 2(기원전 99) 한나라의 장수 이릉(李陵)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이씨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나라 조정의 체면도 깎아내린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마천만은 그의 투항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이릉을 변호하여 결국 무제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 돈 오십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취하고 싶었으나 중인(中人 )에 불과했던 그가 그런 거액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마지막 것을 선택했다. 목숨만이라도 부지하여, 역사서를 쓰라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를 택한 것이다.

 

궁형의 처절한 고통을 체험한 사마천은 한 무제에 대한 원망을 [사기] 전편에 스며들게 했고,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통해 역사란 결코 왕후장상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후에 무제에 의해 중서령( 中書令)을 제수 받아 다시 무제의 곁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때 [사기] 저술 작업은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 사마천이 [보임소경서( 報任少卿書)]를 쓴 기원전 91년경에는 [사기]가 거의 마무리되었으니,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었다.

 

사마천의 가족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는 않다. 같은 마을 출신의 아내 양씨(楊氏 )가 있다고 전해지며 사마천이 겪어온 길을 함께 동고동락한 현명한 조력자였다고 한다. 아내 이외에 첩도 한 명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마림( 司馬臨)과 사마관(司馬觀 )이라는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사마천이 죽은 시기도 불분명한데, [사기]를 집필하고 나서 바로 그 해 혹은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라는 명칭의 유래

 

사기( 史記)’라는 글자는 [사기] [주 본기( 周本紀)], [십이 제후 연표(十二諸侯年表)], [천관서(天官書 )], [진섭 세가( 陳涉世家)], [공자 세가(孔子世家 )], [유림 열전( 儒林列傳)] 등에 등장한다. 여기서사기는 춘추전국시대 각국의사관의 기록이라는 의미와 한대의 문장학( 文章學)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일컫는 [사기]라는 명칭은 사마천이 붙인 것이 아니다.

 

[사기]의 후기 격인 [태사공자서( 太史公自序)]에서 사마천이무릇 130편에 52 6500자이니태사공서(太史公書 )’라고 한다.”라고 밝혔듯, 본래 [사기]태사공서또는태사공기( 太史公記)’라고 일컬어졌다. 태사공기( 太史公記)’의 약칭이 바로사기(史記)’. ( )나라 건안(建安 ) 연간에 순열( 荀悅)이 지은 [한기(漢紀)]라는 책의 권30태사공사마천사기( 太史公司馬遷史記 )’라는 구절이 등장함으로써 정식으로사기라는 말이태사공서라는 명칭을 대체하게 되었으니, 사마천이 세상을 떠난 지 대략 3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기]의 집필 과정

 

[사기] 집필을 가능케 한 사마천의 자료 취재 범위는 어떠하며 그는 그러한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얻은 것인가? 사마천이 사료를 수집하여 그의 책에 반영한 방식은 그 이전과 그 이후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작업과는 달랐다. 그가 사료를 채집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사마천은 황가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나 문서를 열람했다. 예를 들어 [오제본기]태사공왈(太史公曰 )’에서는 [춘추( 春秋)], [국어(國語 )] 등 자신이 본 도서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기] 전체에서 언급된 참고 도서를 통계 내 보면 사마천이 열람한 책은 모두 103종이며, 그 중에서 육경(六經)을 비롯한 서적이 24, 제자백가서가 52, 역사ㆍ지리 및 한나라 왕실의 문서가 20, 문학서가 7종이다. 따라서 사마천이 문헌과 전적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금석문( 金石文)과 문물(文物 ), 회화(繪畫), 건축 등에서 자료를 찾았다. [진시황 본기]를 보면, ‘태산석각(泰山石刻 )’, ‘낭야석각( 琅邪石刻)’, ‘지부석각(之罘石刻)’ 등의 글을 모두 그대로 수록했다.

 

돌아다니며 방문하거나 실지 조사를 했다. [태사공자서]에도 사마천이 스무 살 남짓부터 남쪽으로 유람하는 길에 올랐다고 적혀 있다. 그는 동서남북으로 전국을 유람하면서 상고 역사에 관한 전설을 수집했고, 서주 건국 경영의 상황을 탐구했으며 학자들이 그에게 전해 준 오류도 바로잡았다. 그는 전국 시대의 이야기, 한나라 초기의 이야기, 옛 전쟁터의 형세, 역사 인물의 삽화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는 일반 백성의 말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중시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기]의 모든 편에 걸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오제 본기] [주 본기]를 보면 본인이 실지 답사를 통해 얻은 구체적 정보가 생동감 있게 살아 있다.

 

그러나 [사기]에 사료적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많은데, 서술이나 인물 설정에 있어 소설적 색채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대표적 예로 [조 세가( 趙世家)]를 들 수 있다. 이 편은 네 명의 군주가 꾼 꿈을 통해 조나라 발전사를 서술하는데, 사마천이 주로 의지했던 [좌전( 左傳)]이나 [전국책(戰國策)]에는 없는 내용들도 수록되어 있다. 특히 널리 알려진조씨고아( 趙氏孤兒)’에 관한 대목은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지만, 이 편의 백미라고 할 만큼 상당한 비중으로 서술되어 있다. [육국 연표( 六國年表)] 서문에서 진나라가 분서를 단행하면서 모든 사료들이 소실되었다고 언급한 데서 보이듯, 역사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소설적 구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태사공왈( 太史公曰)’이라는 부분을 보면 사마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나 생각이 상당 부분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론( 史論) 체계가 사마천의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좌전], [국어], [전국책] 등에도군자왈이라는 말이 있으며, ‘군자위( 君子謂)’라든지군자이위(君子以爲 )’라는 식의 논평이 84가지나 있다. 이러한 형식의 평론은 사론( 史論)의 원형임에 틀림없고 사마천이태사공왈이라고 한 것도 [좌전]군자왈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사공왈에서 사마천은 고대 역사에서 증거를 찾아 제시하거나 사적을 유람하면서 얻어들은 것을 서술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인물을 포폄( 褒貶- 옳고 그름이나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함)하기도 하고 또는 역사적 사실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가의 존재가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태사공왈 [사기]를 읽는 진정한 묘미를 주며, 역사가의 일관된 평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책 전체를 혼연일체가 되게 만드는 매개의 구실을 한다.

 

주목할 점은 사마천의 생애와 집필 시기가 한 무제의 통치 시기와 겹쳐 있다는 사실이다. [사기]는 당시로는 현대사라고 말할 수 있는 무제 시대의 사건과 인물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무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황제이고 사마천 자신은 그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 기록은 무제와 그의 치세를 비판적으로 그려내는 일과 연관되었으며, 여기에는 사마천 개인이 무제에 대한 사적인 감정도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네이버에서 발췌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479&cid=59020&categoryId=59035

  

 

II.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P.72

허유는 받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말을 들은 것을 부끄러워하며 달아나 숨어 버렸다

  •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선뜻 받아들였다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었을까

 

P.75

"하늘의 도는 사라로움이 없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은가?(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인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 막연한 착함과 우직함으로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러다고 권모술수를 부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식과 이를 해결하려는 목표의 실행력이 필요했던건 아니었을까

 

P.76

요즘 시대에 들ㄹ어서면서 하는 행동은 규범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편안하게 즐거워하며 대대로(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 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이러한 것이)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

  • 하늘의 도는 분명있을진데,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뜻이 분명있을 듯 하다. 그렇지만 나쁜놈이 잘사는 꼴은 분통이 터진다

 

P.84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자(포숙)이다

  • 재혁이가 그때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때가 문득 그리워 지네.

 

P.88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펼친다고 합니다.

 

P.88

뜻이 깊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 겸손은 항상 강조되는 덕목이다. 나는 지금 겸소한가?

 

P.101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멀리할 것이며, 만약 큰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속으로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꺼릴 것이다.

  • 결국 득이 핵심, 소통이란 서로 득이 되는 쪽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득만을 쫒다가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

 

P.103(++)

그 사람을 칭찬하며(중략)

잘못이 없음을 명확히 설명하고 덮어주어야 한다

  • 리딩은 칭찬에서 시작하고 감싸주면서 깊어진다. 리더가 해야 할일은 지시가 아니라 칭찬과 책임져 주는 것이다

 

P.104

안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 실천이 문제인것이지.

 

P.123

왕께서는 한갓 이론만 좋아하실 뿐 그것을 실제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이해했지만 이용할 수 없는 지식은 죽어가는 지식일 수 있다

 

P. 129

오기는 탐욕스럽고 여색을 밝히지만 별사를 다루는 일만은 사마야저도 능가할 수 없습니다

  • 누구나 잘하는 대목은 있는거 아닌가?

 

P.129(++)

오기는 장수가 되자 병사들 가운데 가장 낮은 자와 똑같이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누울 때에도 자리를 깔지 못하게 하고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식량은 직접 가지고 다니면서 병사들과 함께 수고로움을 나누었다

  •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

 

 P.135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받드시 행동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 말도 안하고 행동도 안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답답하지. 말도 안하고 행동도 안하는 사람과 어떻게 같이 갈 수 있을까. 그렇다고 얍삽하지는 않은데

 

P.140

태자 건을 헐뜻었다(중략)

태자의 허물을 이렇게 말하였다

  • 인간관계에서 서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그리고 비난, 비평, 불만... 그리고 항상 핑계를 대는 행동. 그에게는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P.153(++)

그대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도 그를 의심하고 있었소

  • 의심은 외부의 적보다 가장 무서운 적이다.

 

P.156

원한의 해독이 사람에게 끼치는 것은 심하구나!

  • 인간관계의 모든것이지

 

P.163

공자가 존경한 인물로는...

  • 공자에게도 존경한 인물들이 있었구나

 

P.164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가 행동하는 것을 살펴보면 (내가 해 준 말들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안회는 어리석지 않구나!

  • 어떨때 보면 공자보다 안회가 더 현명한 사람 같다. 그가 더 지조 있어 보인다

 

P.168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물러나게 한 것이다

  • 제자들을 사랑하는 세심함이 있으시다. 이런 디테일이 있으시기에 옳은 말과 행동보다 제자들의 마음에 더 오래 남은게 아닌가 생각들기도 한다.

 

P.168

(백성보다) 앞장서서 하고, (백성의 일을 위해) 몸소 애쓰는 것이다

  • 서번트 리더십. 리더는 지시하는게 아니라 보여줘야 한다. 그 행동이 신뢰가 되고 신뢰가 생겼을 때 그를 따를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앞장서서 움직여야 하고 몸소 애써야 하는 것. 지시만 으로는 리더로 존재할 수 없다.

 

P.169

(좋은 말을) 듣고 아직 실행하지 않았는데 또다시 (좋은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워 한다

  • 하나를 실천하고 또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 말만이 쌓이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P.170

몸가짐을 겸손하게 하면 그 지방의 힘센 자들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너그럽게 올바르면 그곳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공손하고 바르게 정치를 하여 그곳을 안정화시키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P.173

그렇게 하면 네 마음이 편하겠느냐?

그것이 편하면 너는 그렇게 해라

  • 소신있는 건 좋다. 그러나 상대가 삐지지는 않게...

 

P.173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년상이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의식인 것이다

  • 1년이 지나서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은 역시나 맞지 않다. 적어도 3년은 같이 부모와 있어야지

 

P.174(++)

말재주가 뛰어났지만 공자는 늘 이 점을 꾸짖어 경계시켰다

  • 말이 많은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P.176(++)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 겸손과 예 어쩌면 관계 맺기의 가장 시작

 

P.177(+)

제가 듣기에 나라 안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강한 적을 공격하고, 나라 밖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약한 적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골칫거리는 나랑 안에 있습니다.

- 이의제의, 공동의 적. 차라리 정면 돌파 한다면 저항이 너무 심했다는 건가?

 

P.178(++)

왕이 교만해지면 제멋대로 하고 신하들이 방자해지면 권력을 다투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위로는 왕과 틈이 벌어지고, 아래로는 대신들과 권력을 다투게 될 것입니다.

  • P.129,168과 연결해서 볼 것
  • 서번트 리더십이 필요한 타이밍이지

 

P.183

신은 생각이 먼저 정해지지 않으면 돌발 사태에 잘 대처할 수 없고, 군대가 먼저 잘 갖춰지지 않으면 적을 이길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 이순신 장군님이 생각나네. 치열한 애달픈 그 분의 삶

 

P.185

닭을 잡는데, 어찌하여 소 잡는 칼을 쓰느냐

  •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겠느냐? 그렇지만 그만한 이유도 있는 법이지요.

 

P.186

예는 (인보다) 나중에 온다는 것입니까?

  • 그렇다.

 

P.187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P.188(++)

말은 진실 되고 미더우며, 행동은 독실하고 공경스러우면 비록 오랭캐의 나라에서도 통용될 것이다. 말에 진실과 믿음이 없고 행동에 독실함과 공손함이 없다면 비록 자기가 태어난 마을이라 하더라도 통용되겠는가?

  • 요즘 누구의 행동과 비슷하다. 그를 어떻게 설득해서 데려갈까. 과연 데려갈 수 있는 걸까.

 

P.189(++)

대체로 달한 사람은 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만드시 달하게 된다.

  • 그다음은 실력을 쌓아야 하는 것이지. 착하고 옳기만 하다고 그와 같이 갈 수는 없는게 비즈니스의 세계이다.

 

P.191(++)

(다른 사람을) 이기려 하는 것, (자기가 이룬 공을) 자랑하는 것,(남을) 원망하는 것, 탐욕스러운 것,(이런 것들을)하지 않으면 인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 매일 되새겨야 하는 말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P.202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예이다

  •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 사람의 잘못을 헤아려 주지 않는 다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

 

P.214

법이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위에서부터 그것을 어기기 때문이다.

  • 그렇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아지는 법이지. 내가 남을 속이는데 남이 나를 안속이겠는가

 

P.230

100리 안의 근심거리를 걱정하지 않고 1000리 밖을 중시한다면 이보다 더 잘못된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

  • 100년도 못살면서 1000년의 근심에 사로 잡히지 말라는...

 

P.245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스리고 (해로운 일은) 일어나기 전에 대비책을 세워 마강야 한다고 합니다. 우완이 닥친 뒤에 걱정하면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이 점을 빨리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 평상시 항상 대비해 놓으라는 가르침은 알겠다. 그런데 왜 왕들은 이런점들을 몰랐던 것일까? 왜 항상 신하나 책사들이 말을 했던 것일까?

 

P.251

여기저기에 나라를 팔아먹고 다니면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신하이니 앞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 그러니까. 어떻게 소진을 믿었단 말인가? 논리로만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말은 당연히 나오지.

 

P.268

소진의 형제 세사람은 모두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이름을 드날렸으며, 그들의 술수는 권모와 변화에 뛰어난 것이었다. 소진이 제나라 에서 반간의 협의를 받고 죽으니 천하 사람은 모두 그를 비웃고, 그 술수 배우기를 꺼려했다

  • 나도 그랬을 것 같다. 그렇지만 현장의 설득에서 내가 로왔다면 그건 배울만 하지 않는가?

 

P.281

신이 듣건대 깃털도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 바위에 물이 계속떨어지면 바위도 뚫을 수 있다.

 

 

III. 내가 저자라면

 

보완이 필요한 점

  • 각 열전에 들어가기 전에 지도도 있었으면 좋았었을 법했고, 시대적 상황을 알려줘서 이해를 도와주면 줬으면 좋았었을 거 같다. 여러 나라들이 등장하다보니 중국의 역사적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는 나라 이름들이 헷갈린다
  • 왕의 계보도도 있었으면 좋았겠다. 그래야 비슷한 시대의 활동인물들의 시간적 공간을 맞춰볼 수 있었을 거 같다

 

이해가 안된 부분

  • 왕들이 만나서 서로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는 없었던 것일까? 왕이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였을 터인데, 중간지점쯤에서 만나 노력은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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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1 14:20:38 *.18.187.152

ㅎㅎ 이해가 안된 부분에서 빵 터졌네요

그러게 제 3의 지점에서 왕들끼리의 정상회담 없었으려나?

괜히 유세가들 수레바퀴만 닳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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