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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7일 11시 15분 등록
I.저자에 대해

이부영 박사(1932년 3월 25일 ~ )한국 분석심리학계의 선구


서울대학교 의대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수련을 시작하였다. 1966년 스위스 추리히 융 연구소를 수료, 융학파 분석가 자격을 취득하고 국제분석심리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독일 및 스위스 등 각지 정신병원에서 수련 및 근무하였으며, 귀국 후 서울대학교 의대 신경정신과 주임교수,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장을 지냈다. 그 밖에도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1977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 퇴임 후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추대되었으며 분석심리학 전문수련기관인 한국융연구원을 설립 현재 운영중이다.

한국 융학파의 태두로서 한국에 분석심리학의 씨앗을 뿌리고 분석심리학이 하나의 분과 학문이자 정통한 정신치료술의 하나로 인식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1차적으로는 당연히 환자의 치료에 있겠으나, 학문적 성취가 깊어짐에 따라 문학이나 예술 분야에 나타나는 다양한 상징 체계를 해석하고 그를 통해 한국인의 집단무의식 세계를 해명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동안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단행본 중에서는 분석심리학을 통해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심층을 밝혀보려는 의도를 가진 '분석심리학 3부작'이 유명하며, 그 중에서도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외 한국의 민담을 통해 한국인의 무의식을 탐구한 『한국 민담의 심층분석』도 주목할 만한 책이다.

현재 제대로 된 융 선집을 출간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힘을 모으고 있는데, 번역에 충실을 기하기 위해 해마다 한권씩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작업이 완성되는 날 한국인도 비로소 융의 세계를 좀 더 직접적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분쉬의학상을 비롯하여 국내외 많은 상을 받았으며, 『융 기본 저작집』(전9권, 솔 출판사)을 비롯한 여러 책을 번역하였으며, 분석심리학에 관련한 다수의 책을 저술하였다.


<수상작>

1992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벽봉학술상 

1995년 미국표현정신병리학회 에른스트 크리스은상 

1995년 대한의학회.베링거 잉겔하임사 제5회 분쉬의학상 

1996년 미국정신사회재활협회 알렉산더 그랄닉 기념상 

2000년 미국표현정신병리학회 에른스트 크리스금상 


II.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P.29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마음'의 구조와 기능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 가운데서 그림자라는 개념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지나가야겠다.

P.31~32
프로이트가 처음 환자들 가운데서 발견한 무의식의 내용은 현실의 도덕규범과 맞지 않아서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억압된 여러가지 충동이었다.

P.32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억압된 성적 욕구를 무의식 주된 특성으로 여겼으나 뒷날에는 '삶의 본능' '죽음의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욕구와 파괴적 욕구의 양면이 무의식의 충동을 이룬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무의식은 사람이 태어나 의식이 생긴 뒤 거기서 떨어져나간 내용으로 이루어지며 무의식속에 신화적이고 고태적인 요소가 엿보이기는 하나 그것은 진화의 과정에서 남은 흔적에 불과하며 그 자체가 어떤 큰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P.33
한마디로 무의식은 충동의 창고, 의식에서 쓸어낸 쓰레기장이거나 병적인 유아기 욕구로 가득찬 웅덩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성숙케 하는 찿조의 샘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 융과 프로이드의 가장 다른 점, 잘은 몰라도 융의 관점이 더 마음에 든다

P.35
자아 또는 '나'는 의식의 중심에서 의식된 마음을 통솔하고 또한 무의식의 마음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의식의 특수한 콤플렉스이다.(중략)
내가 아는 모든 것,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 나의 생각, 나의 지각, 나의 느낌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의식, 또는 자아의식이라 한다. 의식의 내용은 모두 나와 연관되고 나는 나의 의식의 영역을 넓히기도 하고 좁히기도 하며 무의식의 작용을 받아 들이거나 거부하기도 한다.

P.36
집단 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조나(Persona :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할 때 쓰던 가면)라 부른다. 그것은 집단정신에서 빌려온 판단과 행동의 틀이다. 집단이 개체에 요구하는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 그 집단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할 여러 유형이다. '나'는 '페르조나'를 배우고 여러 종류의 '페르조나'를 번갈아 쓰면서 사회속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 '페르조나'는 어떤 일정 사회집단에만 통용되는 화폐나 지폐와 같은 것으로 그 집단 밖에서는 인정 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인간의 보편적, 원초적 행동유형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P.37
무의식의 적극적인 성찰의 한 방법은 분석가에게 가서 자기의 무의식을 살펴보는 과정인 분석(Analyse)작업이다.
- 자기 스스로 살펴보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이론이나 실제가 풍부한 제 3자가 더 정확할 것이기는 하지만.

P.38
무의식은 자아가 무의식을 경시하고 그것과의 내면을 피할 때, 자아로 하여금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자극함으로써 무의식의 경향을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자아에게 준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무수히 격고 지나가야 하는 시련, 고통, 갈등, 절망, 사일의 아픔이 아기설찰의 귀중한 기회이며 성숙에의 의미있는 고통이듯이 우리는 언제나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창조적 자극의 영향 아래 있고 때로는 그것이 고통스런 체험, 심지어 신체적 정신적 병고의 시련으로 표현된다. 자아가 그 고통의 의미를 알아차리느냐 모르고 자나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자아의 문제이다.

P.41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심리적 내용들이다.(중략)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다. 그것은 나,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로 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측면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와는 대조되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열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림자는 그 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
그림자는 본래 의식에 가까운 개인적인 무의식의 내용이다. 그래서 그림자가 다른 사람에게 투사될 때는 나와 비슷한 부류의 나와 같은 성의 대상에 투사되며 거기서 그는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을 본다.

P.42
원형적 그림자상이 외계로 투사되면 그 대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 느끼는 감정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강한 증오감, 혐오감,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마귀' '사탄'이라 부르는 것들이 자기 원형의 그림자 상이 될 수 있다.

P.43
아니마, 아니무스란 무엇인가? 아니마는 독일의 제엘레(Seele, 심령)에서, 아니무스는 가이스트(Geist, 심혼)에서 빌려온 라틴어 용어이다. 제엘레니 가이스트니 하는 말이 가리키듯 그것은 우리 마음 속의 혼과 같은 것이다. 혼이나 넋, 또는 심령이란 모두 자아의식을 초월하는 성질의 표현이며 '나'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고도의 자율성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와 같은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그와 같은 독자적 인격이라 할만한 것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내적인격이라 불러 집단사회에 적응하는 가운데 형성된 외적 페르조나에 대응하는 무의식적 인격이라고 보았다.

P.45
'자기'란 자기 실현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다. 자기란 전체정신,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정신이다. 그것은 인격성숙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그것은 의식의 중심인
'나'(자아)를 휠씬 넘어서는 엄청난 크기의 전체정신 그 자체, 혹은 그 전체정신의 중심이며 핵이다. 우리가 자아실현이라 하지 않고 자기실현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체정신의 중심핵이라는 뜻에서 자기를 말할 때 특별히 이것을 자기원형이라 한다

P.46
음양이 합쳐 도(道)를 이룬다는 것은 밝오 어두운 심리적 대극의 합일로서 전체정신에 도달한다는 융의 대극합일, 즉 자기실현의 상징과 일치한다

P.47
자기 원형이란 모든 인간이 무의식에 그 사람의 마음을 통일하여 숨은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도록 하는 기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의식의 의식화 작업을 통하여 그림자와 아니마, 아니무스를 의식하고 자기를 실현한다고 해서 무의식의 세계가 낱낱이 밝혀지고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은 궁극적으로 무의식이다. 자아가 전일의 경지인 자기의 경지에 근접할 수 는 있으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할 수 는 없다. 왜냐하면 자기는 언제나 자아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실현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곳에는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실현을 통해서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P.48
선천적으로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데 두가지 서로 다른 일반적 태도와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를 내향적 태도, 외향적 태도라고 이 둘 중 어디에 더 많이 의지하며 사느냐에 따라 각각 내향형, 외향형이라 이름한다. 또한 사람의 정신에는 사고, 감정, 직관, 감각의 네 가지 기능이 있다. 이를 판단기능에 관여하는 사고, 감정 기능을 한 묶음으로 하는 합리적 기능과 직관, 감각을 한묶음으로 하는 비합리적 기능으로 나눌 수 있다.

P.52
(그림자란) 우리가 가지고 있으나 모르고 있는 인격부분을 깨달아가면서 성숙해 가는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무의식의 요소이다. 그것은 성숙한 마음에 이른 첫 관문에 버티고 있는 수문장이다. 우리는 그 험악한, 비굴한, 또는 야비한 자신의 그림자의 모습을 보고 기겁하여 도망칠 수도 있다.

P.53
무의식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곳에 어두운 그림자 - 파괴적, 부정적 열등성 - 만 있는 것이 아니고 창조적 능력, 즉 빛의 원천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의 전체성이란 빛과 그림자의 융합으로 이루어진다. 겉보기에는 열등한 그림자 속에 또한 창조와 성숙의 씨앗이 있다는 점을 융은 강조하고 있다.

P.65~66
그림자는 살아 있으며 그것으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결고 크림자로부터 떠나 있으면 안된다는 것 - 이와 같은 여러 나라의 그림자에 대한 믿음은 분석심리학에서 보는 그림자의 개념과 매우 유사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림자와 떨어져 있다는 것은 무의식과의 분리를 의미하고 그림자를 통해 보배를 찾는다든가 병을 고친다는 관념(상당히 드물기는 하나)은 그림자가 해로운 영향뿐 아니라 매우 긍정적인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림자의 인식을 통하여 보다 깊은 무의식의 '뜻'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분석심리학의 설명과 유사하다.

P.69
그림자의 상실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생각은 심리학적인 무의식의 '그림자'가 정신적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하는 분석심리학 관념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P.72
무의식을 보는 첫 단계의 시작에서 그림자란 내가 직접 모르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신화학적‘인 이름일 따름이다. 오직 우리가 우리 인격의 그림자 영역 속으로 파고 들어가 여러 측면을 살펴갈 때,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후 꿈에서 그 꿈을 꾼 사람과 같은 성의 인격화된 무의식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P.75
우리가 자아의 그림자세계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 그림자의 측면을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문명된 사회에는 그림자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 그림자를 제거해 버린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오직 이차원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제3의 차원을 잃어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신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신체는 가장 의심쩍은 친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몸에 대해서는 말로 언급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몸은 자아의 이런 그림자의 인격화이다(중략)

P.76
다른 한편으로 그림자는 무의식의 ’다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며 그 ’열등한‘ 인격 속에는 의식생활의 법과 규칙을 따르지 않으려는 온갖 ’불순종‘이 들어 있다고 융은 말한다.

P.78
’그림자 없는 사람‘이란 통계적으로 가장 흔한 인간유형으로, 자기가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그런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 완벽한 사람이 어디있겠어. 정도의 차이만 있는것이지.

P.79
거의 해마다 우리는 전에는 몰랐던 어떤 새로운 것이 우리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본다. 우리는 늘 이젠 우리의 내면적 발견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계속 우리가 이것이라는 것, 우리가 저것이라는 것, 또는 그밖의 다른 것임을 발견하고 때로는 깜짝 노랄 만한 경험을 한다. 이것은 바로 언제나 거기서 아직 무의식적인 우리 인격의 한 부분이 있다는 것, 그것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것, 우리는 미완성이라는 것, 우리는 자라고 변화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 해를 거쳐 이루게 될 미래의 인격은 이미 그곳에 있다. 다만 그것은 그림자 속에 있을 뿐이다.

P.80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안다. 그러나 그 무엇이 될것인지는 모른다. 
우리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아는 출발의 첫 단계에 그림자가 있다.

P.81
융은 <아이온>에서도 겉보기에 낮고 열등한 성격을 띠는 그림자가 사실은 창조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P.83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함께 걸머지고 있다. 즉 원시적이며 탐욕스럽고 격졍적인 열등한 인간을 걸머지고 있다. 이 짐을 벗으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림자의 억압으로 노이로제가 되면 우리는 현저히 강화된 그림자와 직면하게 된다. 환자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의식된 인격과 그림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발견되어야 한다.(중략)
그림자는 인격의 살아있는 한 부분이며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 함께 살고자 한다. 우리는 그것을 내 쫓을 수도 없고 순진하게 궤변을 농할 수도 없다. 이 문제는 비길 데 없이 어렵다.

P.89
그림자는 무의식의 이미지이다. 자아는 자신이 어떤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자아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그늘에 속하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의식으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성격,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바로 그 성격이다(중략)
만일 당신의 친구 중 한 사람이 당신의 결점을 비난할 때 마음속에 심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당신 그림자의 일부를 발견할 것이다

P.90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버럭 화부터 내는 것은 우리 무의식의 ’아픈 곳‘이 건드려졌기 때문이며 ’아픈 곳‘이란 곧 격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무의식의 콤플렉스인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반응을 일으킨다. 다만 무엇에 의해서 마음 소의 어떤 부분이 자극을 받느냐가 다를 뿐이다.

P.91
전문가에 의한 무의식의 분석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자기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무의식의 그림자를 밖으로 투사 하였을 때, 그 투사 대상을 향한 자기의 감정을 살펴보는 일이다. 무의식적인 것은 무엇이든 투사될 수 있다.
나쁜 것은 남에게만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괴로운 마음을 피하려는 자기방어의 수단으로서 뿐 아니라 자기의 무의식적인 마음의 일부를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목적으로도 투사현상이 일어난다. 투사는 자신을 돌이켜 보고 다른 대상으로 떨어져 나간 자신의 분신을 되찾아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아직 밖으로 투사되지 않은 무의식의 내용도 있다. 꿈의 분석처럼 무의식의 심층을 들여다 보는 특수한 방법을 쓰지 않는 이상, 우리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P.91~92
사람은 투사 현상의 특성을 알고 자기 마음을 성찰하는 태도를 가지면 어느정도 자기의 그림자를 일시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P.93
투사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강력한 감정반응을 일으키고 자아가 그 대상에 집착하게 만든다. 투사가 일어났을 때 자아는 그 대상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도 무관심할 수도 없다. 이것이 투사현의 특징이다. 투사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므로 자신은 그것이 투사된 자시의 마음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그를 잘 아는 사람 눈에는 그가 비난하고 싫어하는 성격의 경향이 바로 그 사람 성격의 일부라는 것이 보인다.

P.93~94
이렇게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열등한 인격의 측면은 자신의 그림자의 투사로써 상대방이 실제로 가진 약간의 성격상의 열등성을 훨씬 과장하여 그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그런데 ’그 나쁜 사람‘의 상당부분은 사실 그 사람의 무의식에 자기도 모르게 도사리고 있던 자기 마음 속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향해 짖듯이 남의 잘못과 나태함과 위선은 질타하면서도 자기 마음 속에 든 도둑심리는 보지 않는다.

P.94
’의식‘과 ’무의식‘, ’나‘와 ’자기‘가 하나된 마음의 표현일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거룩한 분노일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분열된 상태에서 내리는 세계에 대한 판단은 나의 마음과 객체가 뒤섞인 분열된 세계상일 수밖에 없다. 의식과 무의식이 따로따로 노는 것이 정신의 해리상태이고 하나로 합치는 것이 전체 정신의 실현이라면 전체정신은 오직 각자의 무의식 –자기가 평소에 못 보고 있는 자기의 속마음-을 살펴보는 자기인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P.96
그림자의 투사는 직장동료나 선후배, 청소년 친구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크든 작든 자주 일어난다.(중략)
사람들 사이의 오해는 항상 무의식적 투사에서 비롯된다. 가족 중에 온 가족이 미워하는 구박둥이이며 ’미운 오리새끼‘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족성원의 그림자의 투사에서 비롯된다. 이 경우에는 그림자의 개인적인 투사라기보다 집단적인 투사의 결과이다.

P.97
어머니가 잘 숨겨진 그림자를 무의식간에 의식표면에 노출하여 딸이 그것을 눈치채고 실행에 옮기는 수도 있고 이신전심으로 무의식간에 딸에게 전달되는 수도 있고 이를 발견한 어머니가 딸의 '방종한' 행동을 비난함으로써 더욱 그런 행동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딸의 '부도덕한' 행동을 고치기 전에 어머니의 부도덕한' 그림자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예를 볼 수 있다.

P.98~99
우리의 그림자는 그와 같은 ’나‘의 어두운 반려자, ’나‘의 검은 대리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의식의 그림자를 의식하여 그것을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언젠가 그림자의 열등한 성격은 ’나‘를 사로잡고 내가 규탄하는 오물을 스스로 뒤집어쓰게 된다. 아니면 분열된 그림자가 가까운 사람을 통해 연출됨으로써 곤혹을 치르게 된다. 그러니 인간이 투사 없이 남의 죄를 심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성경게 ’너희는 심판하지 말라‘ ’칼로 심판하는 자는 스스로 그 칼에 망하리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가.

P.102~103
이러한 상호간의 비난은 사실 조금씩은 상대방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자, 즉 열등기능의 투사 때문에 상대방 성격의 부정적 측면만이 두드러지게 과장되어 내향, 외향 두 유형이 가지고 있는 건설적인 측면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무르이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자신의 열등기능을 인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P.105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열등기능은 때로 우월기능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보상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내향형은 외향형보다도 더 대담하게 외부세계에 도전하고 객관성을 강조하고 외향형은 내향형 이상으로 내면의 정신세계에 집착하여 거의 신비주의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모두 열등기능을 의식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P.114
인간은 어떤 ’유향‘에 속하기 이전에 전체정신을 가지고 있는 개성적 존재이다. 유형론은 그 전체정신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적 관점이다. 유형설을 자세히 보면 전체정신에 이르는 길이 보인다. 가령 내향형이라 하지만 외향적 태도가 무의식에 있어 그것을 의식화함으로써 전체에 접근해야 하고, 합리적 유형이라고 해서 비합리적 기능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고 무의식에 비합리적 기능이 대극을 이루어 의식을 보상하고, 비합리적 유형에서는 또한 합리적 기능이 무의식에 있으면서 의식의 기능에 포함되고자 작용하고 있다.

P.115
상반된 심리학적 유형을 가진 경우라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장단점을 인식하고 보충하며 지내는 사람도 많다.(중략)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사람이 수많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 심리학적 유형이나 열등기능에 관한 융의 학설은 그 다른 가치체계르 ㄹ다소나마 체계적으로 설명해본 것이 뿐 이것만으로 모든 인간을 정의하고 분류할 수 는 없는 것이다.

P.116
오늘날 '악'은 대중매체에서 없어서는 안될 보도 자료일 뿐아니라 인간들이 살아가는데 또한 없어서는 안될 먹이의 하나가 되었다. '악'은 '선'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존재였다. 대중매체는 그것을 만들어 제공하고 사람들을 흥분시키며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를 조장하기도 한다.

P.117~118
사람이, 그들이 규탄하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부정부패의 소인, 즉 그림자를 안고 있는 민중들의 그림자의 집단투사를 통한 찰나적인 한풀이를 부추기고 희생양을 만들고 쾌재를 부르게 하고 박수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사정을 한다면, 혹은 부정부패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아니라 정적에 대한 사적인 복수심이 조금이라도 개입된 사정이라면 진정한 개혁을 이루기 어렵다. 개개인 마음 속의 부패심이 없어지지 않는 한 부패는 아무리 법적인 조치를 마련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P.119
평화는 승리와 패배가 그 의미를 잃을 때 오직 그때라야 가능하다. ’나는 평화를 주기보다 칼을 주러 왔노라‘하고 우리의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는 무엇을 생각했겠는가?

P.120
진정한 평화는 다른 말로 개개인이 자기 안에 있는 그림자를 인식할 때, 원형의 매혹적이며 무시무시한 여향에 휩씁리지 않을 만큼 지각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집단 속에서 모두 약한 존재가 된다. 건전한 윤리적 책임감을 가진 사람도 집단 속에 파묻히면 책임감이 느슨해지며 결국 다른 사람처럼 ’타락한 폭도‘ ’무자비한 망나니‘가 될 수 있다. 집단 속에서 집단적 무의식의 파괴적 세계에 전염되는 것이다.

P.122
무의식적, 원시적 세력이 급격하게 집단적으로 의식을 엄습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P.125
독일인이 히틀러속에서 자신의 그림자, 자신에게 처한 최악의 위험을 보아야 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 도대체 히틀러는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P.127
무의식의 그림자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이미 중세 서양에서 집단 정신병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 하나가 선한 의지를 내세워 이교도를 칼로써 징벌하고자 했던 십자군의 원정이며 다른 하나는 마녀사냥이다. (중략)
’마녀‘는 높은 정신적 경건성과 도덕적 금욕주의를 표방하던 중세의 신앙 깊은 사람들의 무의식에서 의식의 일방성을 보상하기를 기다려온 본능적 충동의 표현이었다.
- 그랬구나.

P.129
질보르그가 말하듯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통일체에 깊이 숨은 불안의 표현이었을 것이며 <마녀의 망치>는 기성질서가 불안정하게 되어간다고 우려할 만한 징후 대한 반동이었다. 

P.130
마녀는 그 당시 남성들의 여성혐오, 여성학대의 표본으로서 남성들의 내적 인격 무의식의 여성성, 아니마의 왜곡된 이미지를 대변한다고 하는 쪽이 더 합당한 설명이 될지 모른다.
어쨋든 마녀 사냥과 같은 집단 투사로 인한 집단 처형의 역사는 그뒤로 인류역사 속에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없애기 위해서 종교혁명을 거쳐 등장한 개신교의 나라 독일, 마지막으로 마녀의 처형이 있었던 1775년의 독일땅에서 2백년도 못되어 나치의 '유태인 사냥'이 일어난 것은 우연한 알이 아니다.

P.131(++)
서슬 퍼렇게 적을 규탄하는 것은 불안때문이다. 스스로 확신이 없을 때 사람들은 더 길길이 날뛰고 하나의 이념, 하나의 신앙, 하나의 주의에 매달린다(중략)
투사는 곧 불안을 보지 않을 수 있는 방어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싸우고 죽은 숫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것보다 많을 것이라고 융은 말한적이 있다. 그림자의 위험한 영향은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않을 때 인간의 생명과 질존을 위협한다

P.136
낯선 것은 배척의 대상이 되지만 그 마음 뒤에는 전염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의 일본인 그림자, ’왜놈‘ 그림자를 인식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우리의 의식을 동화하여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면서도 자아의식은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모르는 장님과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집단적 그림자는 의식과 의식적인 통합이 필요한 것이다.

P.138
사람들은 흔히 '모르는 것' '낯선 것' 앞에서는 공포감을 가지기 쉽고 그 속에에 알 수 없는 부정적인 영향력이 있지 않나 의심한다
- 그래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지

P.147
그림자상이 반드시 역겹고 추잡하거나 고집스러운, 부정적 성격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정치적 지도자, 사회명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융이 지적한 대로 사람들은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거나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차를 나누기도 한다. 의식상황에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때 꿈에서는 그러한 식으로 과대관념을 표현한다. 그것은 흔히 조용한 내향형 인간들의 무의식에서 잠자는 권력 콤플렉스, 허영심, 명예욕과 같은 것이다.

P.165
정신적 해리현상이 일어나는가. 대개 의식에서 억압된 콤플렉스들에 의해서 일어난다. 무의식의 여러 콤플렉스가 의식계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억압되는 것은 의식이 용납하지 않는 것들이다. 사회규범에 맞지 않는 것을 모두 무의식에 억압해 버릴 경우, 그 정도가 지나치면 의식의 분리가 일어나기 쉽다.

P.166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자아와 페르조나가 극단적으로 동일시되면 될수록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교류는 단절된다. 그리되면 의식의 해리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한 분리 또는 해리의 시초에 나타나난 것이 불안, 공포, 강박 등 노이로제의 증상이다(중략)
사회집단이 요구하는 규격화된 태도와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자기의 내면세계를 전혀 돌보지 못하고 내버려두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외부사회에 대한 적응 못지 않게 내면세계에 대한 적응을 필요로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의 요구뿐 아니라 자기 내면정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내면의 소리를 듣고 실천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균형을 유지한다.(중략)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사회적 요구만을 일방적으로 충족시키다 보면 마음 속에 살지 못한 채 억압된 무의식의 부분이 점차 힘을 더하여 자동적으로 의식을 압박하기 시작하며, 의식의 일방적인 외적 적응이 극에 다다르면 무의식의 보상기능도 상대적으로 격화되어 불어난 강물이 둑을 무너뜨리며 마을을 덮치듯 무의식의 콤플렉스들이 의식을 휩쓸어버린다.

P.167
치료란 결국 쪼개진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 사람이 본래 가지고 나온 정신의 전체정신을 실현시키는데 있다.

P.168
자기에게 그림자 따위는 없다고 자처할 때, 그림자가 자기 속에 있는데 보지 않으려 할 때 그것이 노이로제의 온상이 된다.

P.177
투사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인간관계란 없다. 문제는 투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림자를 어떻게 의식화하느냐 하는 것이다.

P.182
특수한 상황에서 그림자는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친구를 시험해 보기를 원한다면 그와 함께 만취하도록 술을 마셔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한 마리의 짐승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볼 수 있지. 그렇지만 아닌 사람도 있긴 있더만

P.182~183
살아가는 가운데 나이가 먹으면서 여러가지 대인관계 우여곡절, 오해, 모함, 실망, 질투 등 각종 불쾌한 경함과 자신의 실수를 통해서 자기 안의 그리맞와 그 투사현상을 어느정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는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삶이 그림자를 교육‘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젊은 날 극력한 흑백판단으로 남의 잘못이나 사회적 부패를 규탄하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남이나 자기자신의 실수에 관대한, ’부드러운‘ 성품으로 변하는 것도 어느 정도 자기 내부의 그림자를 인식한 바탕에서 남들이나 사회에 더 이상 그림자 투사를 하지 않게 된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P.183
개체의 삶이 그 개체의 전체정신을 전개시키는 것이라면, 그리고 융이 말하였듯이 삶을 움직이고 형성하는 것이 전체정신의 핵심, 자기 그 스스로를 개현하는 것이라면 그림자의 형성이나 투사, 인식과 의식화가 모두 인간의 정신 속에 내재하여 있는 자기의 커다란 기획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중략)
융의 그림자에 관한 여러 가지 언급을 종합해볼 때 융은 그러한 낙관주의를 가장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자의 인식은 일생일대의 과업이다. 그것은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인식되는 것은 아니고 ’삶의 고통‘을 통해서 만날 수 있으며 그 고통 속에서 의식화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림자의 인식과 의식화가 그림자의 투사를 삼가고 자신의 그림자를 용인하는 ’부드러운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림자의 의식화에는 저 ’찬장 속의 해골‘을 내놓고 진지하게 그 처리를 고민하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P.189
그것은 말하자면 선택된 기회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신문이나 TV에서 지탄하는 부정부패, 비리의 규탄에 맞장구치고 아우성치면서 조금도 자기자신을 들여다보거나 자기의 그림자를 통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융이 분석 이외에는 그림자를 무의식을 보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데는 무의식을 보는 분석작업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P.192
앞에서 그림자에 대한 인식은 곧 그림자를 답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림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의 마음 속에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의식에 수용함을 말한다.

P.193
그림자의 인식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고 자기 마음속에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인한다고 해도 아직 그림자의 ’의식화‘가 완수된 것은 아니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도 자기가 남을 비난하는 성격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이것만 해도 큰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비난의 화살이 이제는 밖에서 안으로 와야 할 차례이고 최소한 그는 남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무디게 함으로써 그림자의 부질없는 상호투사를 종식시키는데 첫 번째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중략)
그림자의 통찰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데 필수적인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한다.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의식된 인정과 배려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P.195(++)
그림자의 인식은 그림자의 의식화로써 완결되어야 한다. 그림자의 내용이 개인적 무의식인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그것은 그림자의 존재를 알고 인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살려내 의식의 내용으로 동화하는 작업이다.
융이 여러곳에서 말했듯이 “그림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 것, “그림자가 개인의 의식된 삶에 실체화되는 정도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의 그림자는 더욱 검고 더욱 진하며, 열등성이 의식화되면 그것을 교정할 기회가 생긴다” “그림자의 동화로써 인간은 어느 정도 실체성을 갖게 된다” “그림자의 깨달음은 전체인간에 미치는 체험과 고통을 의미한다” “통찰되고 동화되어야 할 성질로서의 그림자” 등등에 관한 설명은 모두 그림자가 단순히 그 존재의 확인만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P.205
그림자의 의식화에는 적당한 자아의식의 안정성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림자가 원형적 요소를 내포할 경우, 우리는 그 존재에 경악하고 전율하고 조심할 뿐, 섣불리 대결한다든가 없애려 한다든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원형은 자아의식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는 콤플렉스이므로 자칫 잘못하면 자아가 여기에 휩쓸려 원형의 영향 아래 꼼짝없이 사로잡혀 지리멸렬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P.208
앞에서도 이미 말한 대로 처음에 그림자를 표현할 때 얼핏 생각하기에는 ’나쁜 사람‘이 되라는 것 같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주저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어둠이 아니라 어둠을 통한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림자 속에 숨은 빛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검은 그림자는 살림으로 써(표현함으로써) 변하여 환한 실체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비록 그대로 표현 할 수는 없으나 전율과 경악과 때로는 감동으로 원형적 그림자를 직시하는 작업도 한편으로 인간이 얼마나 '악'해 질 수 있는가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그 반대극이자 창조적인 '선한' 측면을 인정하는 작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210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밝은 것, 선한 것, 정의로운 것, 깨끄한 것, 지혜로운 것만 향하여 달려간다.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처럼 이상을 추구하다가 억제된 그림자의 세계를 무시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선한 것은 선한 집단적 행동규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전체정신을 실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P.211
밝은 것을 상상한다고 밝아지지 않는다. 어둠을 의식화함으로써 밝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쾌하고 그래서 인기가 없다.(중략)
밝음을 위한 밝음이 아니라 어둠을 통한 밝음이 진정한 밝음이다. 어둠의 바다를 통과한 태양만이 아침의 바다 위에 떠오르는 일출의 환희와 구원을 주는 존재로서 인정된다. 그럼으로써 이상은 이상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 발을 붙인다. 그러나 무의식의 의식화는 끝없는 작업이다. 전체정신인 자기는 항상 자아의식을 넘는 크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을 의식화해도 거기에는 항상 나믐 것이 있다. 무의식을 의식의 그림자라고 볼 때 그림자는 언제고 남아서 의식화를 기다리고 있다

P.216
평소에 근엄한 사람들이 그날만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이를 테면 그림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분장의 주인공에 완전히 부합되어 포복절도할 지경이었으나 본인들은 아랑곳없이 마음껏 복수인간의 연기를 멋지게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P.218
한국에서도 5월 단오에 전국 각지에서 민속놀이의 하나인 탈춤놀이가 실시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유교사회의 도덕규범에 위배되는 온갖 부도덕한 그림자가 연출되는 것을 본다. 바보 같은 양반, 파계승, 살인, 탐욕, 음란 등이 가면을 쓴 춤꾼에 의해 묘사되었다. 가면극이 민중의 양반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며 울분의 해소라는 점에서 심리적 세척의 목적이 있다고는 보지만, 비단 민중뿐 아니라 지배계급에게도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림자를 공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사회의 통기구로서 의식, 무의식 대극간의 건강한 균형을 이루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P.239
그래서 여기에는 이야기를 전하는 민족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그런데 여러 민족의 이야기를 모아서 비교해 보면 뜻밖에도 그 속에는 공통된 주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P.252
획일적인 일정한 처방이란 없다. 왜냐하면 의식상황은 항상 변하며 우의식 또한 변하고 의식상황에 따라 보상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오늘은 그림자와의 용감한 대결을,
내일은 그와의 타협을 제안할 수 있다. 물론 그 둘은 모두 옳다. 의식화해야 할 것들은 그때그때 다르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p255~256
그림자를 억압하지 않고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인정함으로써 음성적인 그림자는 조절 가능한 상태로 변할 것이다.

P.258
모든 고등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융은 각 고등종교가 최고의 것으로 지향하는 상징들, 도, 그리스도, 불성 속에서 자기원형의 상징을 발견하였다. 종교는 결코 프로이트가 본 것처럼 본질적으로 소아의 강박신경증 같은 것, 마르크스가 주장한 아편과 같은 것이 아니고 종교적 인류로서의 인간의 마음의 근원에서 생겨난 것이며 의식으로 하여금 자아를 넘는 커다란 신화적 원형층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기실현에 기여한다고 융은 보았다.

P.262
그런 변화는 선전선동이나 대중집회나 압력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변화로 시삭된다. 그것은 개개인의 개인적인 친화 또는 혐오, 그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의 변화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변화만이 집단적인 해결을 가져다 줄 수 있다.

P.270
분석 심리학에서 발견한 마음의 중심, 자기 원형은 요가나 동양종교에서 한결같이 중요시하는 마음의 핵심 - 그것을 도라 부르든 붓다라 부르든, 일심, 또는 태극, 만달라로 표현되든 - 과 일치하며 그 핵심에
이르는 길목에 그림자와의 갈등과 극복이라는 과제가 - 그것을 또한 무엇이라 부르든, 무명이라 하든, 미망이라 하든, 번뇌라 하든 - 주어져있다.

P.271
여자와 소인을 중국의 하녀나 머슴을 일컫는다고는 하지만 이를 비천하게 여긴 것은 사해 안에 모두 형제가 있고 덕으로서 야만인도 교화시킬 수 있으며 인간은 교육이 문제일 뿐 신분의 차이는 문제가 안 된다는 공자의 말에 비추어 매우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P.276~277
원효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매우 의미가 깊다.
우리는 제법(諸法)(모든 사물)의 맑음과 흐림을 가리지만 그 본성이 둘이 아니며 또 참됨과 거짓됨이 두문을 세우지만 그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라고 한다. 둘이 아닌 이 자리에서 모든 사물은 알찬 것이 되며, 그것은 조금도 헛되지 않아 그 스스로 모든 것을 환히 아는 까닭에 이를 불러 ’마음‘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가 있으랴! 하나란 가짐이 없다는 말이니 어찌 마음을 누구의 것이라고 하랴! 이러한 마음의 도리는 언설과 사려를 절한 것이므로 무엇이라고 지목할 바를 몰라 구태여 일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P.277
마음속의 열등한 것, 미숙한 것은 통제와 억제, 혹은 승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살림'으로써, 즉 움지깅게 함을써 발전 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선의 그림자의 의식화는 바로 무의식의 열등기능인 그림자를 의식이 받아들이고 의식에 동화시켜 나감으러써 그 바라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P.278
’악‘의 대극으로서가 아닌 ’절대선‘을 분석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곧 전체로서의 삶, 즉 자기실현이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의 목표는 사회규범으로서의 도덕적 인간의 구현이라기 보다는 건강한 사람, 성숙한 사람을 향한 노력이다.

P.282
나는 내가 소유하고 행하고 체험하지 않은 것으로 부터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탈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때, 그것을 하였을 때, 내가 전적으로헌신하며 전적으로 참여하였을 때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융에게 붓다는 물론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의 상징이다.

P.289
성인은 욕심이 없으므로 그 지혜가 밝아진다. 그런데 그 밝은 지혜를 써야 할 길을 충분히 알면서 그 지혜를 꺼내지 않고 묵묵히 혼자 어둡게 하여 어리석음을 지키는, 즉 ’빛을 고르게 하고 티끌과 함께 하는‘ 화광동진의 덕이 있으므로 천하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P.300
그런데 이제 동양은 ’서양‘이라는 그림자의 세계를 받고 있다. 그것은 동양의 전통적 사고방식과는 정반대의 외향적 태도, 객관주의와 논리성이라는 특징을 가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동양인은 서양인보다도 더 외향적이 되었다. 서양인보다 더 외적 효과, 외적 화려함에 심취하게 되었다. 노자의 무위자연과 소박함이, 공자의 눌변이 무색할 만큼 물질주의, 공리주의, 감각적 향락주의, 외화내빈, 허영의 심성에 휩쓸리고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필요한 무의식적 보상작용의 결과일지 모른다. 열등한 그림자의 보상은 항상 과장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소홀히 해온 냉철한 객관적 증명, 객관세계에의 적응능력, 기계의 치밀성, 물질의 중요성, 육체감각의 충족을 더 많이 경험함으로써 이 부분을 재발견하고 발전시켜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양인의 이와 같은 변신이 그러한 서양 그림자의 통합과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직 동양의 전통적 사고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알고자 하며 ’서양‘의 이름으로 들이닥친 자기내부의 그림자를 보는 사람만이 이 변화의 의미를 알고 이 변화를 창조적인 통합으로 이끌 수 있다.

P.302
비록 매우 더디고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기실현은 오늘날과 같은 집단유행, 집단정신의 흐름에 전염되지 않는 면역성을 그 사람에게 확실히 부여한다. 그런 개인이 모일 때 그 집단은 성숙한 집단이 될 수 있다. 자기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의 책임으로 걸머질 수 있는 용기 있는 시민의 집단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림자의 의식화는 결국 집단의 성숙에 이바지하고 그 튼튼한 기반을 마련한다. 개인의 통찰 없는 제도상의 어떠한 개혁도, 어떠한 집단운동도 그 실효를 거두기 어렵고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



III. 내가 저자라면

1. 이 책의 장점
  • 지난번 <내면아이>의 책처럼 내 안에 가지고 있었던 아픈 경험과 기억을 돌아봄으로 써 내 자신을 조금더 이해할 수 있었다.
  • 타인과의 관계에서 말이나 행동을 먼저하기 전에, 생각의 브레이크가 작동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 자녀를 키울 때 부모로써 조심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

2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 어려운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동영상 강의를 만들어 유튜브에 배포하거나 CD를 넣어서 저자 직강을 넣어두겠다
  • 종교나 신화 무속에 관한 내용은 따로 엮어 '신화속 심리분석'이라는 책으로 출간해도 좋을 듯 했다.

IV. 네이버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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