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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일 19시 56분 등록

무경계(114째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켄 윌버 (Ken Wilber, Kenneth Earl Wilber, 1949~ )

오클라호마 시에서 태어났다. 1967년 그는 듀크 대학교(Duke University)에서 예비대학( pre-med) 학생으로 등록했다. 그는 동양 문학, 특히 타오 칭(Tao Te Ching)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그는 듀크를 떠나 링컨의 네브래스카 대학에 입학했으나 몇 년 후 대학을 그만두어 자신의 커리큘럼을 공부하고 서적을 쓰기 시작했다.

윌버는 2011RNase 효소결핍 질환으로 인한 만성 피로 증후군에 오래 앓았다고 밝혔다.

1973년 윌버는 그의 첫 번째 책인 의식의 스펙트럼(Spectrum of Consciousness)을 완성하여 이 분야에서 지식을 통합하고자 했다. 20군데가 넘는 출판사가 거절하였으나 마침내 Quest Books1977년에 이를 받아 들였고, 1년 동안 강의와 워크샵을 통해 글쓰기로 돌아갔다. 그는 또한 1978년에 ReVision 저널을 시작하는 것을 도왔다.

 

1982년 뉴 사이언스 도서관(New Science Library)에서 자신의 선집 <홀로그램 패러다임 및 기타 역설> (David Bohm)을 비롯한 수필과 인터뷰를 선보였다. 자신의 작품을 비롯한 에세이는 홀로그래피와 홀로 그래픽 패러다임이 의식, 신비주의 및 과학 분야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조사했다.

 

1983년 윌버는 트레야 Killam과 결혼했는데 곧 유방암으로 진단되었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윌버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인을 돌보고 글쓰기를 포기했다. Killam19891월에 사망했다. 그들의 공동 경험은 1991Grace and Grit 책에 기록되었다.

 

1987년 윌버는 콜로라도 주 볼더(Boulder)로 이사 왔으며, 그곳에서 그는 코스모스 (Kosmos) 3부작을 연구하고 인테그랄 연구소(Integral Institute)의 작업을 감독했다. 윌버는 현재 콜로라도 주 덴버에 살고 있다.

 

그 후, 윌버는 그의 코스모스 3부작의 첫 번째 책인 Sex, Ecology, Spirituality (1995)를 썼다. Everything of Brief History (1996)는 섹스, 생태학, 영성에 대한 대중화된 인터뷰 형식이었다. Eye of Spirit (1997)ReVision 지에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쓴 기사를 편집 한 것이다. 1997년 내내, 그는 개인적인 경험에 관한 저널을 보관해 왔으며, 1999년에는 단일 의식이라는 용어인 One Taste로 출판되었다. 다음 2년 동안 그의 출판사인 Shambhala Publications는 그의 수집 작품 8편을 다시 편집했다. 1999년에는 Integral Psychology를 마치고 모든 이론을 썼다(2000). 모든 이론에 윌버는 비즈니스, 정치, 과학 및 영성을 연결하고 Spiral Dynamics와 같은 발달 심리학 이론과 어떻게 통합되는지 보여준다. 그의 소설 Boomeritis (2002)는 베이비 붐 세대의 자기중심주의로 인식한 것을 폭로하려고 시도했다.

 

2012년 윌버는 국제 동시 정책으로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상적인 교착 상태를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 국제 동시 정책기구(International Simultaneous Policy Organization)의 자문위원회(Advisory Board of International Simultaneous Policy Organization)에 가입했다.

 

적분이론

"Quadrants All Levels (AQAL)""ah-qwul"이라고 발음하며, 통합 이론의 기본 틀이다. 그것은 "내부 - 외부""개인 - 집단"의 축을 따라 4 사분면 격자로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모델링한다. 윌버에 따르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포괄적 인 접근 방식으로, 학문 분야와 모든 형태의 지식과 경험이 어떻게 일관되게 일치 하는지를 설명하려는 메타 이론이다.

 

AQAL은 네 가지 기본 개념과 휴식 범주를 기반으로 한다 : 네 사분면, 여러 수준 및 개발 행렬, 여러 의식 상태 및 "유형", 이 네 가지 개념에 맞지 않는 주제. "수준"은 사전 개인에서 개인을 거쳐 개인까지의 개발 단계이다. 개발의 "노선"은 다양한 단계를 통해 불규칙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다양한 영역이다. "국가"는 의식의 상태이다; 윌버에 따르면 사람은 더 높은 발달 단계의 일시적인 경험을 가질 수 있다. "유형"은 다른 4가지 개념에 맞지 않는 현상에 대한 휴식 범주이다. Kosmos에 대한 설명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윌버는 이 다섯 가지 범주를 각각 포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윌버는 이러한 계정만 정확하게 "통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에베레는 "발췌 C : 우리가 함께하는 길"에서 윌버는 AQAL"코스모스의 하나의 제안된 건축물"로 묘사한다.

 

모델의 정점은 다양한 동양 전통의 "궁극적인"범위와 동일시되는 형태 없는 인식, "존재의 단순한 느낌"이다. 이 형태 없는 인식은 경이로운 세계를 초월한다. 궁극적으로 초월적인 현실이 드러난다. 윌버에 따르면 AQAL 범주 - 사분면, , 수준, 주 및 유형 -은 불교 의 두 진리 교리의 상대적인 진리를 설명한다. 윌버에 따르면, 그들 중 누구도 절대적인 의미에서 진실이 아니다. 무형 의식, 즉 존재의 단순한 감각만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좌상 (UL)

"I" "나는"
Interior Individual 인테리어 개인
Intentional
의도적 인

eg Freud : 프로이트

Upper-Right (UR)어퍼 - 라이트 (UR)

"It" "그것"
Exterior Individual 외부 개인
Behavioral
행동 적

eg Skinner : 스키너

Lower-Left (LL)왼쪽 아래 (LL)

"We" "우리"
Interior Collective 인테리어 집단
Cultural
문화

eg Gadamer 예를 들어 가다머

Lower-Right (LR)오른쪽 아래 (LR)

"Its" ""
Exterior Collective 외관 집단
Social
사회적인

eg Marx : 마르크스

 

2005년 인테그랄 연구소(Integral Institute)의 지부인 인테그럴 영성센터(Integral Spiritual Center)가 출범하면서 윌버는 두 권의 책을 요약한 118페이지의 요약 초안을 발표했다. 에세이는 "Integral Spirituality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Integral post-형이상학과 Wilber-Combs 격자를 포함한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포함하고 있다. 2006년에 그는 Integral Methodological Pluralism과 발달적 컨베이어 벨트 종교와 같은 다른 것들뿐만 아니라 이 아이디어들에 대해 정교한 "Integral Spirituality"를 출간했다.

 

"완전한 사후 형이상학"은 윌버가 세계의 영적 종교적 전통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대해 그 전통에 대한 현대 적이고 포스트 모던적인 비판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Wilber-Combs LatticeWilberAllan Combs가 개발한 의식의 개념 모델이다. 이것은 x(왼쪽에서 오른쪽으로)x(아래에서 위로)의 의식의 발달 구조 또는 레벨 에 대한 순차적인 의식 상태를 갖는 그리드이다. 이 격자는 의식의 각 구조가 어떻게 신비한 상태를 포함하여 서로 다른 의식 상태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이후로 윌버는 심각한 삶의 결핍으로 공공 생활에서 벗어났다.

윌버는 Marc Gafni 를 지원하여 2011년부터 현재까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가프니는 성적으로 미성년자를 폭행한 언론에서 비난을 받았다. 윌버는 실제로 자신의 블로그에서 Gafni를 공개적으로 지원했다. 랍비 그룹이 시작한 청원서에서 윌버는 가프니를 공개적으로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윌버는 Mariana BozesanAQAL Capital GmbH (Wilber 's Integral Theory 에 기반한 모델을 사용하여 필수 충격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Munich 기반 회사)의 자문위원회에 있다.

윌버의 철학은 Madhyamaka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Nagarjuna 의 철학에 명시되어 있다. 윌버는 Dainin Katagiri, Taizan Maezumi, Chogyam Trungpa Rinpoche, Kalu Rinpoche, Alan Watts, Penor Rinpoche Chagdud Tulku Rinpoche를 포함한 많은 교사들과 간혹 다양한 형태의 불교 명상을 연습했다. Advaita Vedanta, Trika(카슈미르) Shaivism, Tibetan 불교, 선불교, Ramana Maharshi Andrew Cohen이 더 많은 영향으로 언급 될 수 있다. 윌버는 Adi Da의 선생님에 대한 예약을 표현하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가장 높은 평가를 한 Adi Da의 작업을 선별했다. , 생태학, 영성에서 윌버는 플롯 티 누스의 철학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데, 그는 비공식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윌버는 불교 명상법을 연습했지만, 자신을 불교 신자로 밝히지는 않는다.

 

프랭크 비서(Frank Visser)에 따르면 윌버의 4 사분면 또는 존재 차원에 대한 개념은 EF 슈마허(Schumacher)4가지 지식 분야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비서(Visser)는 윌버 (Wilber)의 수준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의 잊혀진 진실 (Forgotten Truth)과 매우 유사한 과학에 대한 윌버의 비판을 발견했다. 비서는 윌버 이론의 비전이 Sri AurobindoAdi Da를 포함한 다른 이론가들의 철학에 근거한다고 썼다

윌버는 트랜스퍼런셜 관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최근에는 철학자로서 뉴 에이지로 분류되었다. 발행인 Weekly는 그를 "동성 영웅의 헤겔 (Hegel of Eastern spirituality)"이라고 불렀다.

 

윌버는 "다년생 철학(Perennial philosophy)"의 호소력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넓혀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빌 클린턴(Bill Clinton), 앨 고어(Al Gore), 디팍 초프라(Deepak Chopra ), 음악가 빌리 코간(Billy Corgan)과 같은 문화적 인물들은 그의 영향력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윌버의 접근법은 지나치게 범주화하고 객관화 , 남성 주의자, 영성을 상업화하고 감정을 폄하하는 것으로 비난 받았다. 수많은 비평가들은 윌버의 해석과 그의 광범위한 출처에 대한 부정확 한 인용뿐만 아니라 반복적 인 반복, 과도한 책 길이 및 과장과 관련된 문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Steve McIntosh는 윌버의 업적을 칭찬하지만 윌버는 자신의 Vedantic Buddhist 종교와 '철학'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토퍼 바쉬(Christopher Bache)는 윌버 작품의 일부 측면을 보완하지만 윌버의 글쓰기 스타일을 부른다.

 

정신과 의사인 Stanislav Grof는 윌버의 지식과 업무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Grof는 윌버의 의식 스펙트럼으로부터 출생 전 및 출산 영역이 누락되었다고 비판했으며 윌버는 생물학적 출생과 사망의 심리적 중요성을 무시했다. Grof는 윌버의 글을 "강력하게 말한 광고 인물 공격을 포함하고 개인적인 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격적인 논쟁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윌버의 대답은 세계 종교 전통이 Grof가 주산기에게 주는 중요성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켄 윌버에 관하여

1967년 가을 듀크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전공했으나 1년도 안 돼 흥미를 잃고 있던 참에,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동서양의 심리학과 철학에 빠져들었다. (5)

노자의 도덕경이 서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다. 융도 그렇고.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 2~4권을 독파해가는 독학의 길을 걷는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에서 활동 중이던 일본의 선사와 티베트 금강승 불교의 린포체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영적 수행에 정진했다. (5)

캠벨이 이랬다고 했을 땐 신선했는데 이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영적 수행을 이야기하니 별 감흥이 없다. 하루에 8시간 이상 책 읽는 건 별거 아니지만 2~4권을 읽었다는 건 속독을 했다는 건가.

약관의 나이(23)에 쓴 그의 처녀작 의식의 스펙트럼, (The Spectrum of Consciousness, 1977)은 동서양의 심리학을 통합시키는 독창적인 사상가로의 입지를 확고히 해주었으며, 이를 요약한 무경계, (No Boundary, 1979)는 지금까지도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그의 저술 중 하나로 남아 있다. (5)

23세에 처녀작을 쓴 것보다 그 책이 지금도 인기 있는 책이란 것이 더 대단하다.

 

옮긴이의 말

책 분량도 만만하고 비교적 평이하게 기술한 책이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만만치 않은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8)

궁금하다. 어떤 심오한 내용일지.

 

머리말

무경계는 거의 30년 전에 쓴 내 두 번째 책이지만, 여전히 가장 대중적인 책으로 남아 있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단순하다. 무경계는 물질로부터 몸, 마음, , 영에 이르기까지 인간 의식이 접근 가능한 전 대역을 제시한 초기 책 중 하나였으며, 최선의 심리학과 최선의 영성을 통합시켜놓은 책이었다. (15)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건 자신감인가.

더 나아가 그 방법들이 잘 조합되어적용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지개 내부에 있는 모든 색깔을 전체 스펙트럼 안의 모든 의식 수준을 자각하도록 함으로써 소위 깨달음’, ‘해탈’, 또는 위대한 해방이라 불리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이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16)

요컨대 무경계의 기본 메시지는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당신 자신의 근원적인 자각과 정체성 자체에는 본래 아무런 경계도 없다는 것이다. (16)

 

초판(1979) 머리말

우리 경험 내에서의 이런 투쟁 갈등, 불안, 고통, 고뇌 은 우리가 잘못 설정한 경계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경계를 만들어내는지, 그 경계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18)

흥미롭다.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는 거네.

나는 이런 다종다양한 관점들을 더 큰 그림(전체0의 일부로 조망하는 일종의 통합을 시도했다. 나는 치료, 치유 및 내적 성장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들을 의식의 스펙트럼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틀로써 화해시켰다. (19)

 

1 서론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 아마도 문명의 여명기부터 인류를 괴롭혀왔을 이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에게 가장 성가신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세속적인 것부터 신성한 것까지, 단순한 것부터 복잡한 것까지, 낭만적인 거부터 과학적인 것까지, 개인적인 것부터 정치적인 것까지, 실로 모든 범위에서 무수한 답이 제시되어왔음에도 말이다. (27)

그러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질문을 던지라고 하는데……. 사실 무수한 답은 있지만 내가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고 내 경우는 다르지 않나.

아마도 당신은 스스로 파악하고 있는 자신의 특성들, 라는 정체감의 토대로 여겨지는 것들 착하다/악하다, 가치 있다/쓸모없다, 과학적이다/시적이다, 철학적이다/종교적이다 등등 을 묘사할 것이다. (28)

스스로 를 묘사하거나, 설명하거나, 또는 내적으로 느낄 때마다 당신은 자각하든 못하든 간에 마음속에 있는 내적 경험의 세계에다가 일종의 정신적인 선이나 경계를 긋는다. 그런 다음 그 경계의 안쪽에있는 모든 것을 라고 느끼거나 라고 부른다. 반면에 그 경계 밖에있는 모든 것을 내가 아닌 것으로 느낀다. 다시 말해, 당신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그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달려 있다. (28)

선이나 경계를 명확하게 그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불분명한 것도 있다. 그래도 더 나 자신 같은 쪽으로 경계를 긋는 거겠지.

즉 정체성이란 자신을 이것과 동일시하고, ‘저것과는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29)

이 경계선에 관해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쉽게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선은 다시 그어질 수 있다. (29)

우리는 일단 피부를 /나 아님의 경계로 인식한 후에, 라는 유기체의 내부에 좀더 의미 있는 또 다른 경계를 긋기 시작한다. (30)

이처럼 사람들은 라는 유기체 속에서도 특정 부분을 좀더 친밀하게 느끼며 강하게 그것과 동일시한다. ‘진정한 나로 느껴지는 그 부분을 우리는 흔히 마음, 정신, 에고, 성격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31)

초개아란 한 개체의 측면을 넘어선어떤 과정이 그의 내부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 중 가장 단순한 예는 초감각적 지각일 것이다. (34)

이런 현상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텐데…….

/나 아님의 경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한 사람에게 가용한 정체성 수준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것이다. (35)

스펙트럼의 수준이 순차적으로 올라감에 따라, 나의 밖에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측면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유기체 수준에서는 환경이 정체성 경계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즉 외부의 이질적 대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르소나 수준에 이르면, 환경과 더불어 몸과 마음의 몇몇 측면들까지 외부의 이질적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 (37)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그 위의 수준까지 이르다니, 감히 생각조차 못해봤다.

자신의 내면을 깊숙한 곳까지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양한 심리학 체계와 종교 체계를 마주하면서, 도무지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어리둥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심리학과 종교의 주요 학파들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 할지라도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상태로 끝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그 다양한 학파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명백히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39)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다 모순이지 않나.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지평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43)

그림에 나온 수준은 저자의 생각 일뿐 아닌가?

 

2 그것의 절반

자연은 옳고 그름이란 대극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이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6)

똑똑한 곰과 둔한 곰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걱정거리인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곰들의 세계에서는 열등감을 찾아볼 수 없다. (46)

개는 미래의 고통에 대해 염려하거나 과거의 고통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47)

자연의 섭리에 순응할 뿐이다.

나는 대자연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상으로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48)

결정한다는 것은 선택할 것과 선택하지 않을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쾌락적인 것과 고통스러운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둘 중에서 쾌락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49)

삶에 집착할수록 죽음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무언가에 가치를 두면 둘수록 그것의 상실이 두려워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 대부분은 경계로부터 비롯된, 경계가 만들어낸 문제라는 것이다. (52)

그럼 불교의 집착하지 않는 삶이 정답이네.

우리는 그 경계 자체는 결코 의문시하지 않는 것 같다. (53)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한 쌍의 대극이 있다면 부정적이고 원치 않는 한쪽을 근절시킬 때라야 비로소 삶을 완벽하게 즐길 수 있게 된다고 상상한다. (53)

그러네. 우린 항상 긍정적인 쪽만을 인정하고 부정적인 쪽은 없애야할 것으로 여겨왔다.

오늘날은 불안의 시대, 미래의 충격의 시대, 역병처럼 유행하는 욕구불만과 소외의 시대, 풍요롭지만 또한 권태롭고 무의미한 시대이다. (54)
부정적인 것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동시에 긍정적인 것을 즐길 가능성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54)

모든 대극은 암묵적인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다. 양극의 차이점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그 양극들은 어느 쪽도 다른 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서로 완전하게 분리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남는다. (55)

마찬가지로 주체 대 객체, 시간 대 공간과 같은 대극도 이제는 상호 의존적인 상태로 단일한 통합 패턴을 형성하고 있는 서로 잘 짜여진하나의 연속체로 여겨진다. (57)

골 없는 마루, 최고점 없는 최저점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골과 마루 실로 모든 대립 는 그 근저에 있는 하나의 현상의 분리 불가능한 측면들이다. (58)

게슈탈트에 따르면, 우리는 대비되는 배경과의 관계없이는 어떤 대상도, 어떤 사건도, 어떤 형태도 결코 인식할 수 없다. 예컨대 우리가 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어두운 배경 위로 부각된 밝은 형상이다. (58)

쾌락과 고통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둘의 상호대비와 교차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59)

어느 한쪽을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선은 양극을 구분 지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결합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진정한선과 면의 본질이자 기능이기도 하다. 자연 속의 선들은 겉으론 나누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내적으로 양극을 합친다. (61)

정신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또는 논리적인 것이든, 하나의 선은 그저 나누고 구분 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묶고 결합시킨다. 반면에 경계는 순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경계는 실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척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실세계에는 은 있지만 실질적인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61)

따라서 선을 긋는 것은 괜찮지만 그 선을 경계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고통으로부터 괘락을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62)

코르지브스키와 일반 의미론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단어, 상징, 기호, 사고, 관념 등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실재의 지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기때문이다. ‘이라는 단어가 갈증을 풀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지도와 언어가 진정한 세계인 것처럼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63)

존재의 조건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66)

 

3 무경계 영토

사실 히브리 전통에서는 지식의 나무가 실제로 감추고 있는 것은 선과 악의 지식이 아니라 유용한 지식과 쓸모없는 지식, 즉 기술적인 지식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70)

피타고라스는 사물을 수 있었다. 이름짓기가 마술처럼 보였다면, 계산은 성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71)

수의 발견(?), 발명(?)은 세상을 새롭게 만들었다. 고대의 피타고라스에 의해 밝혀진 법칙은 지금도 중요하다. 어떻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천재들만 있었나 싶을 정도다.

수를 세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계 위에 세워진 또 다른 경계, 즉 메타 경계였다. (71)

다시 말해 7 이라는 수는 일곱 개로 이루어진 모든집단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범주의 범주, 경계 위의 경계가 된다. (72)

, 계산, 측정과 같은 새로운 메타 경계는 1600년경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자연과학에 의해 실제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리스 시대와 최초의 고전물리학자들 사이의 중간 시기를 유럽 사회에 등장한 교회라는 새로운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3)

간단히 말해, 첫 번째 경계는 범주를 만들어낸다. 메타 경계는 수라고 부르는 범주의 범주를 만들어내고, 3의 메타-메타 경계는 변수라고 부르는 범주의 범주의 범주를 만들어낸다. (74)

아담은 별들에 이름을 지어줄 수 있었고, 피타고라스는 별들을 셀 수 있었지만, 뉴턴은 별들의 무게를 잴 수 있었으니 그 상황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라. (74)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이 메타-메타 경계는 측정을 결론으로, 수를 원리로 바꿔준다. (75)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얻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해내야만 했다. (75)

원자 이하의 소립자들은 아무런 경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메타 경계도, 측정도 있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어떤 정교한 메타-메타 경계와 법칙들도 있을 수 없었다. (79)

새로운 양자물리학자들은 애초부터 경계란 것 자체가 일종의 관습에 불과했음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실재하는 어떤 경계도 전혀 발견해낼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80)

사사무애는 우주의 모든 사물과 사건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 즉 무경계이다로 해석된다. 사물들 사이엔 실제로 분할하는 경계가 없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실체는 다른 모든 실체와 상호침투해 있다는 말이다. (82)

동양인들에겐, 인간이 만든 경계투성이 지도 밑에 잠복해 있는 전체성을 시사하는 오직 하나의 길, , 법만이 있었다. (83)

동양인에 대해 모두 그렇다 할 수 있을까. 동양, 서양으로 나누는 것도 경계 아닌가. 동양에 대해 너무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텅 비었다고 말하는 것은, 서구 물리학자들이 발견한 것처럼 사물이란 단지 경험이 만들어낸 추상적인 경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84)

실재가 무경계라고 하는 통찰의 진수는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단순성 때문이다. (85)

점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단순하면 파악하기 더 쉬운 거 아닌가.

요컨대, 실재가 무경계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곧 모든 갈등이 환상이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이런 궁극적인 지혜를 열반, 해탈, 해방, 깨달음이라고 부르며, 이 이해가 곧 양극으로부터의 해방, 분리라는 마법으로부터의 해방, 내 안의 거짓 정체성이란 사슬로부터의 해방이다. (88)

4 무경계 자각

합일의식이 곧 무경계의 자각이다. (89)

실재는 무경계이다라는 말조차 여전히 경계와 무경계 사이에 구분을 만들어낸다! (89)

곧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그은 최초의 경계이자 우리가 제거할 마지막 경계이다. 이 경계야말로 우리가 만들어 세운 모든 경계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최초의 것이다. (90)

이게 가능한가. 그저 무의식적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은 구분이 되는 건데 그걸 어떻게 제거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실제로는 최초의 경계를 파괴하기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다. ‘최초의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92)

그래서 저자는 합일의식에 이르렀다는 건가?

최초의 경계를 찾아보자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경험과 느낌으로부터 떨어져 분리된 나, 분리된 채로 경험하고 느끼는 나를 아주 잘 찾아보자는 뜻이다. (94)

유체이탈이라도 하라는 건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단일한 작용인 본다는 경험에 대하여 보는 자’, ‘보는 행위’, ‘보여진 대상이라는 세 개의 단어를 갖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단일한 물의 흐름을 흘러가는 물이 흘러가는 행위를 하면서 흐른다라고 표현하는 꼴과 같다. 이는 전적으로 동어반복에 불과하며, 실은 하나밖에 없는 곳에 세 개의 요인을 도입하는 셈이다. (95)

이거 말장난에 불과하다. 물을 보는 내가 있고 물이 있고 물은 흘러가는 거다. 마치 도를 아십니까하는 것 같다.

주관적인듣는 자를 들어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들리는 것은 객관적인소리들뿐이다. 이 말은 당신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그 소리가 하나라는 의미이다. 당신은 한발 물러선 자리에서 듣는 행위로써 들리는 소리듣는 자가 아니라, 그 전부와 하나인 것이다. (97)

그럼 이걸 깨달으면 계속 그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 건가. 아님 매순간을 이렇게 생각하면서 노력해야 하는 건가.

이는 꽤나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경험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좀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98)

아니 곰곰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무경계즉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란 얘기를 하는 거 아닌가.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건데 가능할까. 그리고 꼭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아야 하나. 알면 뭐가 달라지나. 모른 채 살아도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까지 알아야 하나.

내적 주체와 외적 객체는 하나의 느낌에 대한 두 개의 이름일 뿐이다. 이런 사실은 느껴야 할어떤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유일한 것이다. 이 말은, 당신이 깨닫고 있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의 의식상태가 곧 합일의식이라는 의미이다. (100)

결코 대상화하거나 개념화할 수 없는 절대적 주체성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럽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지배되지 않으며, 주체와 객체를 넘어서 가며, 한 개체 안에 살지만 그 개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104)

가장 큰 어려움은, ‘진정한 나란 무경계 자각상태인데 비해 모든 언어와 사고는 경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105)

무어라 명명할 수 없고 명명하는 순간 그 언어의 국한된 경계에 갇히게 된다는 것인데 그럼 그걸 개념화할 수 없다는 거고 그래서 이렇게 같은 설명을 반복하고 있는 건가.

따라서 신비가들은 길을 가리키고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그것을 의지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합일의식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6)

직접 경험해 봐라~

이 시점에서 신비가들이 보편적으로 답하는 핵심은 내면을 보라. 진정한 그대는 내면에 있으니 내면을 깊숙이 보라는 것이다. (106)

내면을 들여다보면 나의 행동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지 좀 알겠더라. 나의 욕망이 보인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어떤 건 부끄러운. 하지만 아직 무경계를 경험하진 못했다. 아마 그래서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하나보다.

우리는 몸, 마음, 성격 등을 진정한 나라고 상상하면서 그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고는 그저 환상에 불과한 그것들을 방어하고, 보호하고, 연장시키려고 애쓰면서 전 생애를 소비해버린다. (108)

탐구를 더 밀어붙이면, 의식 속에서 공중제비와도 같은 묘한 전환이 일어난다. (109)

 

5 무경계 순간

황혼을 바라보며, 바닥을 알 수 없는 수정같이 검은 연못 위에서 유희하는 달빛을 바라뵤며,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황홀한 포옹을 나누며 넋을 잃고 나 자신과 시간으로부터 표류해 떠다닌 순간, 세찬 빗속을 통해 반향하는 천둥소리 후의 고요함에 문득 사로잡힌 순간... 이와 같은 무시간성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115)

신비가는 현재순간에 완전히 몰입한 경험 속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115)

보통 여행을 가서 많이 경험한다. 일상의 일들(시간)에서 벗어나 여행 자체를 느끼고 즐기면 되니 그렇더라. 사람들이 그래서 여행을 가는 것 아닐까.

전적으로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어제에 살면서 끊임없이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라는 고통스러운 사슬에 묶이고, 있지도 않은 유령을 불러내어 스스로를 속박한다. (117)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수많은 행동을 후회하며, 그로 인한 미래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책감과거와 단단히 결합되어 우울증, 쓰라림, 후회라는 고뇌를 가져온다. (118)

모든 불안미래에 대한 생각과 한데 묶여서 두려움과 파멸적 기대라는 먹구름을 가져온다. (118)

죄책감은 과거와 한 쌍, 불안감은 미래와 한 쌍이네. 난 죄책감도 불안감도 안 느끼며 사는데. 지나간 것은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미리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시간을 즐기는 것과 종종거리는 것은 차이가 있다.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미래와 대비되는 현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이다. (121)

당신은 과거나 미래의 어떤 것도 만지거나 보거나 느낄 수 없다. 다시 말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자각 속에는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다. ,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1초도 안 될 만큼 아주 짧더라도, 결코 끝나지 않으며 쉼 없이 변화하는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직접적인 자각은 모두 무시간적인 자각이다. (122)

기억으로서의 과거예견으로서의 미래가 모두 현재의 사실이라는 점은 모든 시간이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124)

모든 기억은 현재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할 경우에는 내가 현재와 동떨어져 존재한다는 생각의 기반이 전적으로 붕괴된다. 그렇게 되면 그저 기억에 불과한 는 다시 한 번 현재경험이 된다. (129)

시간이란 개념이 시계가 생겨나고 산업사회가 됨으로써, 전세계가 같은 시간대를 사용함으로써 견고해졌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시간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공간 역시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고 국경이라는 것이 생겨나고부터 경계가 더 확실시 됐다.

 

6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근원적 경계는 유기체-환경의 통일을 분열시키고 안에 있는 나밖의 세계라는, 언뜻 갈등하는 듯 보이는 유기체 대 환경이라는 양극을 만들어낸다. 그 뒤에 만들어지는 모든 경계는 이 최초의 경계에 의존하게 된다. 장가가 설명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없다면 나도 없을 것이고, 내가 없다면 구별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35)

장자의 설명이 훨씬 쉽다.

옛 진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심신을 초월하여영원히 무한과 하나였기 때문이다. (136)

배타적으로 유기체(근원적 경계)와만 동일시하는 사람은 탄생과 죽음 중 반쪽만을 받아들인다. 나머지 반쪽인 죽음은 거부한다. (138)

남편은 나이 드시고 아프신 부모님을 보면서 나이듬의 서러움을 이야기하고, 아빠의 큰 병을 겪은 엄마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신다. 하지만 난 늙음도 죽음도 그저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누구나 한 번은 겪는 일이라고 여긴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를 보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슬퍼할 뿐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미래를 찾아 나서도록, 미래로 다가가도록, 미래를 향해 움직이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 간단히 말해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강렬한 시간 감각을 만들어낸다. (138)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미래 없이 전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139)

우리는 미래를 요구하기 때문에 매 순간 기대와 미완성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매 순간을 스쳐 보내면서살아간다. (140)

그래. 맞다. 매 순간에 의미를 두고 중요하게 여기면 살지 않고 미래의 준비를 위해 사는 경우가 많다. 성취의 강점을 가지고 있는 나는 특히.

우리는 미래 속에서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만을 원하지 않는다. ... 우리의 지극히 짧은 현재는 우리가 그것이 끝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덧없이 재빨리 지나가 버린다! ... 그러나 그 미래의 순간도 역시 다만 스쳐가기 위해 살게 될 것이다. (141)

자아 내부의 모든 것이 잘 어울려 지내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그는 자아의 어떤 측면과 접촉하기를 거부하게 된다. 자아의 소망과 욕망 중 일부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위협적이며 금기시되는 것처럼 보여서 그 사람은 그것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145)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새로운 경계가 그어질 때마다 정체감은 축소되고 수축되며, 또한 좀더 좁아지고 제한되어 여유가 적어진다. 제일 먼저 환경이, 그다음으로 신체, 그런 다음 그림자가 저 밖에 존재하는 나 아닌 것으로, 이질적인 적으로 보이게 된다. 모든 경계선은 전선이기 때문이다. (148)

저 밖에 있는 대상이 실은 나 자신의 한 측면이라는 발견은 그 자체가 적을 친구로, 싸움을 춤으로, 전투를 놀이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148)

 

7 페르소나 수준 : 발견의 출발점

삶의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은 동시에 보다 심층적이고 진정한 실재로서 깨어나기시작한다. 고통은 현실에 대한 소위 표준적인 자기만족에 대한 위안을 산산조각내며,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회피해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과 세계를 세심하게 보고 깊이 느끼고 접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의미에서 살아 있게끔 강요하기 때문이다. (149)

고통을 부정하거나 회피하거나 경멸해서도 안 되지만, 미화하거나 집착하거나 과장해서도 안 된다. 고통의 출현은 단순히 하나의 좋은 신호이다. (150)

고통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겪어내고 마침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고통을 올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고통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고통의 한가운데서 꼼짝 못하게 된다.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허우적거리게 된다. (150)

처음엔 허우적거리는 게 정상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이해하고 알고 나니 이젠 편하다. 나를 먼저 인정하고 나니 그렇게 연연해할 필요가 없는 거였다.

누가 옳은가?” 라는 흔한 논쟁에 내포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일반인과 전문가들 모두 고집스럽게 다양한 영혼의사들이 인간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추측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인간 각성의 다른 수준들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152)

앞의 의식의 스펙트럼 그림을 나타낸 페이지에 보면 서로 다른 수준들에서 제시하는 치료법을 써놓았더라. 저자가 그 치료법이 각 수준에 해당한다는 걸 모두 배워서 안다는 건가. 이 책이 23살에 썼다고 하던데 그 많은 걸 다 알고 있다니 대단하다. 아니 그 수준들을 알고 있었다니 그게 더 대단하다.

이전의 과 진정한 친구가 되고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전선을 제거하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영토를 확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렇게 되면 투사된 부분들이 곧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게 될 것이다. (154)

페르소나란 다소간 부정확하고 허약해진 자기상을 일컫는다. 페르소나는 분노, 자기주장, 성적 충동, 환희, 적대감, 용기, 공격성, 충동, 흥미 등과 같은 자신의 특정한 성향을 스스로 부정할 때 만들어진다. (155)

그림자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원상태로 되돌리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되돌릴 때 우리는 가장 소중히 여겼던 환상 중 몇 가지를 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156)

모든압력은 투사된 충동의 결과이다. (159)

모든 압력의 그 밑바닥에는 그 사람 자신으로부터 쫓겨난 충동이 깔려있게 마련이다. (159)

사실상 저항은 투사의 주된 원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에 저항하고, 자신의 원치 않는 측면에 저항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밖으로 투사한다. (161)

저항감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억제할 수 없는 열성으로써 자신의 그림자를 혐오하고 저항하며 또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려고 애쓰는 만큼, 그는 자신의 그림자가 투사된 상대방을 똑같은 열성으로써 경멸하게 된다. (163)

그렇더라. 나의 투사로 상대방을 그렇게 싫어했던 거더라. 그 사람에게서 나의 모습과 욕망을 보고 나서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계를 회복하진 않았다.

끊임없이 의무감을 느끼는 것은 지금 스스로 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하나의 신호이다. (165)

남을 돕고자 하는 욕망이 정말로 없다면 그는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65)

그럼 나는 책임의 욕망이 있다는 거다. 하고 싶어 한다는 거다.

강력한 열등감과 거부감을 느낄 때마다 먼저 자신의 투사를 찾아보고, 자신이 세상에 대해 생각보다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168)

중요한 것은, 아무리 불쾌하더라도 증상을 거부하거나 혐오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증상들 자체가 해결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169)

두 번째 단계의 핵심은, 모든 증상이 단지 무의식적인 그림자 경향성의 신호’(또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 데 있다. (171)

그림자란 단순히 자신의 무의식 속에 대립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의식적으로 의도하거나 염원하거나 욕망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반대로 상정하는 것이 그림자와 만나는 간단한 방법이 된다. 그러면, 자신의 그림자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173)

자신의 욕망을 아는 것도 쉽지 않고 욕망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 반대가 자신의 그림자라는 것까지 아는 것, 이 수준이 가장 낮은 단계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과연 이게 낮은 단계일까. 이것만이라도 제대로 해도 괜찮은 삶, 인간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반대의 것에 기초해서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라, 단지 대극을 자각하라는 뜻이다. (173)

매 순간 대극을 자각하면 피곤하지 않을까. 거부감이 들어서 행동은 할 수도 없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투쟁이 실은 자신과 자신의 투사와의 투쟁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174)

맞다. 그래서 간혹 나의 투쟁에 다른 사람을 동참시키기도 한다. 나의 투쟁이 틀리지 않았다는 지지를 받고 싶어서다.

이 장에서 인용한 많은 예들은 나는 그들 책에서 인용했으며, 그들에게 진 빚에 감사드린다. (177)

어쩐지. 임상경험이 없는 저자가 어떻게 사례를 실었나 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책에서 사례를 가져와 실어도 되나? 안 될거야 없겠지만 피상적일 수밖에 없을 텐데... 나도 다른 사람의 책에서 사례를 가져올까 했지만 거기에 실린 내용밖에 없어서 한계가 느껴지기도 하고 도의적으로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8 켄타우로스 수준

페르소나와 그림자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고 분열을 치유하면, 더욱 크고 안정된 자기 정체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비좁은 아파트에서 안락한 단독주택으로 이사 간 것과 흡사하다. (179)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편해진다.

한마디로, 신체는 그림자가 그랬던 것과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대상 또는 하나의 투사물이 된다. (180)

신체를 회피하는 것은 그것이 죽음의 제단이기 때문이다. (182)

육체를 무감각하게 하는 일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달성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체는 고통의 근원인 것이 확실하지만, 동시에 쾌락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84)

요가 달인들이 왜, 철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감각적인 의미에서 호흡을 생기라고 부르는지를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7)

호흡, 명상으로 육체와 영을 느껴보는 것. 난 이게 잘 안되더라.

마음과 신체는 둘로 나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심리적으로 투사가 일어날 때, 동시에 신체적으로도 뭔가 일어날 것임이 틀림없다. (189)

호흡이 변화할 것이고 체온의 변화도 생길 것이다. 팔다리를 움직여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 즐거울 때와 슬플 때, 화가 날 때 다 다른 신체변화가 생긴다. 이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블록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자신에게 능동적으로 하고 있는 어떤 것이며, 또한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그런 블록을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수의적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블록은 전적으로 수의근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193)

난 어느 부위에 블록이 생겼을까. 여기서 제시한 호흡법을 해보지 않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은 눈을 많이 사용하고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 목과 어깨가 많이 아프다. 오랜 기간에 거쳐 생긴 블록과는 다른 건가?

따라서 핵심은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는지를 직접 느껴보는 데 있다. , 근육긴장을 이완시키려고 노력하지는 말라.’ 이완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그 역을 시도해야만 한다. (194)

뭘 애써하지 않아도 되지 않아 좋다. 아니 오히려 하지 말란다.

이들 블록을 완전히 해소시켜 없어지게 하려면, 근육에 갇혀 깊숙이 파묻혀 있는 감정에 대하여 자신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5)

그런 블록들은 흔히 눈물을 흘리거나, 한두 차례 비명을 지르거나, 억제되지 않은 성적 절정감을 체험하거나, 예전부터 써온 그다지 해롭지 않은 울화통 풀기 또는 베개에 대한 화풀이만으로도 해소되는 것들이다. (195)

그럼 난 경주 가서 한바탕 운 것으로 어느 정도 풀렸겠다.

우리의 일상적인 문제와 근심걱정 대부분은 자아가 간섭하지 않는다면 유기체가 완벽하게 처리할 과정들을 통제하고 조작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199)

자아든 신체든 무의식이든 자율적일 수 없다. 그런 것들은 다만 전체성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또한 의지와 자유가 자신의 기반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이 전체성이다.” (200)

자아를 넘어선 곳에는 그런 종류의 의미를 넘어선 무엇이 있다. 행위는 감소하고 존재가 증가하는 그런 의미 말이다. (202)

9 초월적인 나

억압된 것은 결코 진정으로 제거되지 않으며, 단지 힘을 비축하면서 잠복해 있거나 위장된 형태로 표면에서 새어나오기 마련이다. (208)

이것과는 다른 얘기일 수 있으나 치매로 나타나는 모습이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것들이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참고만 살았던 사람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소유하지 않고 절제를 한 사람은 자꾸 가지려고 하고. 이도 억압의 반대적인 모습이 아닐까 한다. 신화가 없어진 현대사회이다 보니 드라마에 자꾸 귀신, 도깨비, 영혼의 바뀜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프로이트는 자신의 용기 있고 뛰어난 연구를 자아, 페르소나, 그림자에만 한정시켰다. 한편 융은 이런 수준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연구를 초개아 대역까지 밀고 나갔다. (209)

풍부한 상상력으로써 현실을 파악하는 방식 그 자체가 바로 원형이다. 모든 사람의 뇌 구조는 기본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융은 누구라도 내면에 동일한 신화적 원형들을 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211)

그는 편파적인 자신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집단적인 인류정신의 눈이라는 전혀 다른 관점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본다! (212)

아하~ 이거구나.

초개아 대역의 모든 치료법과 실천법의 주된 목적은, 어떤 형식으로든, 이런 초월적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213)

초개아라는 용어가 낯설다. 그냥 초자아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그 뒤에 남아 있는 순수한 자각의 중심이며, 모든 생각, 감정, 느낌, 욕구에 대한 부동의 주시자이다.” (215)

한때 자신을 꼼짝 못하게 붙잡고 있던 혼란을 해저에 편안히 누워 빈틈없이, 그러나 초연한 상태로 응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215)

이런 상태가 해탈의 경지 아닐까. 합일의 과정은 그럼 어느 경지를 말하는 걸까. 모든 것이 인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모든정신적, 감정적, 육체적인 대상과 탈동일시함으로써, 즉 그 모든 것을 초월함으로써 이 초개아적 주지자를 발견하게 된다. (216)

인도의 요가경 집성자인 파탄잘리가 어째서 무지란 보는 자와 보는 도구의 동일시이다라고 말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페르소나, 자아 또는 켄타우로스와 배타적으로 동일시하거나 그것에 집착할 때마다, 그 각각의 존재나 기준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진정한 나를 위협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217)

해야 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어떤 행위가 나타나든 단지 그것을 주시할 뿐이다. (219)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괴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동일시한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곤경이다. (219)

자신의 심신과의 관계가 다른 모든 대상들과의 관계와 동등하게 된다는 것이다. (220)

만일 멋진 가면을 쓰기로 결정할 경우에는, 그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또한 일시적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억제한다.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측면들을 자신 안에서 인식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을 밖으로 투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페르소나 자체는 그것이 유일한 정체성이 아닌 한, 적응을 훼방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221)

~ 알았다. 행동이 바뀌는 게 아니구나. 완전 초연해져서 도인처럼 행동하는 건줄 알았다. 하긴 그럼 현세를 떠나서 살아야지.

불사의 초월적 존재로 깨어나기 위해서는 허구의 분리된 자아로부터 죽지 않으면 안 된다. (224)

간단히 말해 당신의 내면에는 기억이나 생각, 마음, , 경험, 환경, 느낌, 갈등, 감각, 기분과는 다른, 무언가 깊숙한 나라는 느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해도 그 느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에 간섭받지 않는 초개아적 주시자이자 초개아적인 나이다. (226)

전 우주에 오직 하나뿐인 그 는 새로 태어나는 모든 존재에서 깨어나는 똑같은 나, 선조 때부터 보았고 자손 대대로 볼 똑같은 나, 하나이자 동일한 나이다. (227)

이건 좀 비약 아닐까. 계속된 설명대로라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받아들이기엔 무리다.

이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인내심이 필요한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름 아닌 이생에서 이루는 해탈이다. (229)

해탈 맞네.

 

10 궁극의 의식상태

합일의식은 무시간적 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할 방법은 분명히 없다. 이미 그런 것에 새삼 도달할방법이 달리 있을 리 없다. (233)

드디어 마지막이다. 합일의식.

합일의식이란 다른 의식 상태이거나 다른 상태와 분리된 별개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상태의 조건이자 진정한 본성이다. (234)

스펙트럼의 각 수준은 하나의 특정한 파도와 같은 것이며, 그렇기에 올바른 기술과 충분한 훈련을 통해서 그들 중 어떤 것을 붙잡을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합일의식은 특정한 파도라기보다는 그 자체에 가깝다. 물과 파도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어떤 차이도, 어떤 분리도 없다. , 어떤 파도도 다른 파도보다 더 축축하지 않다는 점에서 물은 모든파도에 동등하게 존재한다. (235)

합일의식은 언제나 현존한다는 자각이 바로 우리의 본증’, 본래의 깨달음이다. (238)

몇 페이지에 걸쳐 비슷한 말만 하고 있다. 마치 합일의식에 대해 몰라 이 말 저 말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진짜 핵심은, 영적 수행의 특별한 상태들을 취하는 것이 합일의식의 마땅한 표현 중 하나라는 점이다. (239)

우리의 길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앉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240)

그렇다면 영적 수행의 특별한 상태에 몸을 맡길 경우, 합일의식 수준에 목적을 둔 요법이라면 어느 것을 해도 좋을 것이다. (240)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접시 닦기조차 요법일 수 있다면 수행을 위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은 필요 없다는 건가.

실제로는 저항을 무너뜨림으로써 저항을 드러내 보여준다. 저항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런 저항이 있으리라고 의심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249)

저항에 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미 초개아에서 해탈인데 무슨 갑자기 저항을 다루는지 의아하다. 차라리 요법에 대해 알려주는 게 나을 뻔했다.

우리는 자각이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에 자연스럽게 머물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경향이 있다. (251)

사실상 이 달아남이 시간을 창조해낸다. 무시간적인 현재경험으로부터 달아나기 때문에(또는 달아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 자체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253)

이와 같이 모든 측면에서 볼 때, 달아나는 것은 현재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며 스스로를 시간, 역사, 운명, 죽음에 투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근원적 저항이다. (254)

자신이 하려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했던 모든 일이 틀린일이었고, 단지 더 큰 저항이자 달아남에 지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내가 한 모든 행동이 잘못이었던 것은 그 행위자가 였기 때문이다. 가 곧 저항이며, 따라서 나는 저항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257)

그럼 어쩌라는 거지.

이 저항의 내려놓음 자체가 합일의식의 열림이며 무경계 자각의 실현이다. (258)

모든 것이 이미 영원히 올바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자 애써온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261)

그럼 원래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는 건가. 괜한 헛수고만 한 건가. 내가 보기엔 저자가 합일의식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그저 참고도서에서 나온 말들을 짜깁기 한 것 같다.

 

켄 윌버의 사상 291

윌버는 23세 되던 1972년 겨울 네브래스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자신의 첫 번째 저술 집필에 전력투구한다. 하루 열 시간 이상을 오직 집필에 전념한 끝에 불과 석 달만에 육필 원고를 완성하고 74년 가을엔 타이핑까지 마무리 짓는다. (291)

완전 놀랠 일이다. 23세에 박사과정도 그렇고 열 시간 집필도 석 달만에 원고 완성도 그렇다.

의식의 스펙트럼심리학과 심리치료에 관한 동서양 접근법의 종합일 뿐만 아니라, 서양의 심리학과 심리치료에 관한 종합이자 통합인 스펙트럼 심리학의 해설서이다. (291)

곧 그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다시 접시 닦기와 엄청난 양의 독서 그리고 하루 두 시간 이상의 명상이라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292)

아하~ 본인이 접시 닦기를 했구만. 캠벨도 그러더니 자기 스스로 은둔한 사람들이 많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낭만적 모델이 유아기적, 전자아적 구조원초적 기반, 완벽한 전체성, 신과의 합일, 온 세계와의 통일로 보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음을 찾아낸다. (298)

낭만주의는 전단계와 초단계를 혼동했기 때문에 전단곌르 초단계의 영광으로 끌어올리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302)

1995년부터 시작된 Willber/Phase 4에서 윌버는 역사는 최후의 심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전체성을 향해 가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307)

새벽 3~4시경에 일어나 한두 시간 명상을 한 다음, 5~6시경에 책상 앞에 앉습니다. 오후 2시 무렵까지 쉬지 않고 꽤 많은 작업을 합니다.” (307)

역시나 새벽에 일어나는군. 8~9시간을 쉬지 않고 작업을 한다는 건데, 대단하다.

하루에 보통 두 권 내지 네 권을 읽는 편인데, 필요한 곳은 메모해가면서 아주 빠르게 읽어나갑니다. 중요한 책을 발견하면, 읽는 속도를 늦추고 상세히 메모해가면서 일주일 또는 그 이상에 걸쳐 읽습니다.” (307)

앞에 빠르게 읽는다는 건 필요한 부분만 읽는다는 걸 거다.

때로는 하루 15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집필할 때도 있습니다. 대단히 피곤한 일이지요. 육체적으로 탈진상태가 됩니다. 운동을 하는 주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308)

책을 쓰기 전에 1년여에 걸쳐 수백 권의 책을 읽고 머릿속에서 한 권의 책을 구성하는 것이 나의 일반적인 집필방식입니다.” (308)

이건 저자의 방식인 것 같은데 다른 저자들도 이런지 궁금하다. 물론 관련 도서를 읽는 건 똑같을 거다.

일단 하루종일 주시하는 것이 안정적으로 가능해지면, 그 거울 같은 명상적 자각은 꿈꾸는 상태로 확장되고 일종의 자각몽처럼 됩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꿈 없는 깊은 잠으로 확장되고, 마침내 투리야, 즉 고차의 순수한 주시, 깨어 있고 꿈꾸고 잠자는 세 가지 상태를 초월한 4의 상태가 됩니다.” (311)

명상은 전혀 시도조차 해보지 않아 모르겠다. 앞으로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저자는 명상을 통해서 합일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니 난 합일의식에 가진 못하겠군. 난 페르소나 그림자 단계인 첫 단계만 넘어서도 인생을 살기 좀 낫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 이르는 욕심은 내지 않는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1~6장 까지는 전반적인 무경계에 대한 이야기이며, 7장부터 스펙트럼을 하강하며 페르소나와 그림자, 켄타우로스, 초개아, 합일의식까지 다루고 있다, 의식의 스펙트럼으로 접근해서 순서대로라서 좋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너무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3장이 가장 그랬다.

 

100페이지쯤 읽었을 때 그만 읽고 싶었다.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1~6장의 내용을 좀 줄였으면 좋겠다.

 

추천도서가 번역되어 있는 책인지 모르겠다. 번역가가 주기로 보완해주면 좋겠다. 번역가 역시 이 분야의 전문가이니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다른 책을 추천해도 좋겠다.

 

3. 이 책의 장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내용들이다,

 

7장부터 매 장의 추천도서를 실었다. 좀 더 알아보고 싶으면 다른 책을 보라고 친절하게 제시되어 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내가 저자라면 이런 책 자체를 쓰지 않는다. 아니 쓸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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