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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4일 02시 12분 등록

무경계 독서 신비체험


<무경계>를 읽으면서 신비체험(?)을 하였다. 책을 펴면 2페이지 넘어가기도 전에 잠이 들어 버렸다. 같은 말이 되풀이 되니 읽으면서 최면상태로 유도된 모양이다(=어려워서 졸렸다). '의식의 스펙트럼'이라는 개념과 함께 그 스펙트럼을 구분하는 경계를 무너뜨리며 아래로 아래로 하강을 하다가 '합일의식'이라는 의식에 닿게 되는 그 탐구가 내게는 수면과 최면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며 졸렸다. 

 

이 책을 읽고 난(/잠든) 후의 느낌(/)은 이렇다(독서/수면의 경계가 없었다). 해변가에 앉아 모래밭에 내 이름을 쓰고 있는데, 파도가 밀려와 자꾸만 내 이름을 지운다. 그렇게 내 이름을 지우던 파도는 밀려가고 밀려오기를 반복하며 해안의 경계선을 자꾸만 변하게 한다. 파도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파도타기를 하며 논다. 그러다 찰랑이는 파도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에 잠수복을 입고 풍덩!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데 깊은 심연의 바닥에 놓여진 넙대대한 돌을 발견하였다. 더 아래로 내려가니 그 돌이 서서히 눈을 꿈벅거리는 걸 보고 아! 가오리였구나!하고 재발견한 느낌? 가오리가 손짓하는 거 같아서 더 내려가니 입을 오물거린다. 뭔 소리를 하나 싶어 귀 기울이니 그 가오리가 "나는 너다" 하며 알 수 없는 썪소를 날린다. 나는 가오리아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불현듯 저 위의 수면 위에서 어두운 심연 속으로 빛이 꽂히며 빛과 어두움은 하나다라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깜짝 놀라 수면 위로 떠오르니 대양의 파도는 조약돌과 조개껍데기를 적시면서 자유롭게 해변을 넘나든다.’(p. 261) 


가오리아.jpg  

 

켄 윌버 - 인간을 우주 속 무지개로 본 사람


유발 하라리, , 켄 윌버는 천재적인 것은 물론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다. 특히 켄 윌버는 심리학, 정신분석학, 불교, 영적체험, 명상 등등 모든 분야를 마음껏 주무르고 버무리고 아우른 사람이라 하겠다. 본인 스스로 초개아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 사람 자체는 초인이다. 성장기까지는 천재로서의 삶을, 그 이후는 영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1949년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게끔 하는 부모 덕에 비교적 행복한 아이였다고 회상한다. 공군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차례 전학을 갔던 관계로 적응력을 발휘해야 하는 환경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별명이 브레인일 정도로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성격마저 외향적이라 학생회장으로 뽑힐 정도였으니 세속적인 관점에서 가질 것은 다 가졌던 셈이다. 어릴 적부터 자연과학에 대한 재능, 호기심, 열정이 있어 듀크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철학, 심리학, 종교 같은 인문학은 그의 관심사 밖이었고 인생의 의미나 가치 등을 생각하기에는 외향적 성격에 반항적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이 계기를 알고 싶은데 누구 아는 사람? 융에 의하면 우연이란 결국 없다) 노자의 <도덕경>을 접하게 되면서 그의 삶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그는 듀크대학을 관두고 네브라스카 대학으로 진학하여 도교, 불교, 베단타 힌두사상을 비롯한 각종 동양사상, 서양 신비주의 문헌 등을 섭렵 중에 이 모든 이론들이 혼재, 모순되어 있다는 생각에 교통정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네브라스크 대학원에서 생화학 과정을 끝내 관두고 1973 23세 때 3개월 만에 최초의 저서 <의식의 스펙트럼>이라는 책을 토해낸다(토해낸다라는 표현이 맞을 거 같다). 이 책은 그의 출세작이 되어 그는 초개아 심리학 분야의 개척자로 우뚝 선다(그러나 이 책의 출판은 3년 간 20여 개 출판사에 의해 출판을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의 천재적인 삶은 이렇게 20대 초반부터 영적인 삶으로 전환되었다. 그의 영적인 삶을 질적으로 한 단계 높인 것은 사랑과 그로 인한 고통이 아니었을까. <도덕경>이 영적인 세상의 문을 열어주었다면 고통은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는 계단,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의 두 번째 아내 테리는 그와의 결혼 후 불과 10일 후에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켄 윌버는 아내의 간병에 집중하며 무려 5년 간 별 다른 저술활동을 하지 않고 전업 가족 부양자 노릇을 한다. 이 대목에서 남편과 아이들의 일상과 엮인 나의 일상에 다소 짜증을 냈던 최근의 나를 다시금 바라보게 되었다. 가족과 엮여 나만의 시간이 없음에 투덜거렸던 내게, 5년간 절필하고 전업 가족 부양자 노릇을 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핏줄로 연결된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은 다름 아닌 나는 너다라는 의식을 일상에서 깨우칠 수 있게 하는 것 아닐까. 접시닦이도 수행이라는 그의 말처럼 일상의 모든 관계와 행위 자체가 명상이자 수행일 수 있음을 그의 생애를 통해 배운다.


6년간의 결혼생활은 아내의 죽음으로 끝이 났고 다시 혼자가 된 그는 강도 높은 연구와 저술, 명상을 하는 생활로 다시 돌아갔다. 그가 겪은 고통과 슬픔에서 그는 분명 '고통의 해석'을 통해 '삶의 의미'를 파헤쳤을 터였다. 그의 '통합적 시각'은 <의식의 스펙트럼>을 넘어 필생의 역작 <전우주론>을 집필하기게 이른다.


머리말

 

15 한 개인을 성장과 발달로 이끌어주는 동서양의 모든 접근법 중에서 최선의 것을 기술하는 동시에 잠재의식à 자의식à 초의식, 前개아à 개아à 초개아, 본능à 에고à 신성이라는 하나의 완전한 의식의 스펙트럼을 보여준 책이다.

초개아 개념까지 마주하게 되었다. 본능에서 신성까지라는 의식의 스펙트럼이라니! 그 스펙트럼을 내가 품고 있다니!

 

인간은 참으로 놀라운 의식의 스펙트럼 물질로부터 몸, 마음, , 영에 이르는 비상한 잠재력과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무지개 을 지니고 있다.

무지개를 품은 인간이라..멋지다. 몸과 마음만 알고 살아 있는데 이제 혼과 영까지.

 

우리들 각자는 무지개 안의 그런 수준들또는 색깔들하나하나를 직접 경험하면서, 또한 그 스펙트럼 전체를 통과해가면서, 영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고 발달해 갈 수 있다.

이미지로 상상하면 참 아름다운 과정인 거 같다.

 

16 더 나아가 그 방법들이 잘 조합되어적용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지개 내부에 있는 모든 색깔을 전체 스펙트럼 안의 모든 의식 수준을 자각하도록 함으로써 소위 깨달음, 해탈, 또는 위대한 해방이라 불리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이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17 (당신의 가장 근원적인 정체성은) 가장 깊은 곳 혹은 가장 높은 곳에서 늘 그 전체를 품고 있다. 이 책은 이토록 놀라운 당신의 진정한 무아적 본질로 이끌어주는 간단한 지침서이다.

머리말이 매력적이다. 그런데 사기다. 간단한 지침서는 아니었다. 여하튼 전체를 품고 있는 정체성은 가장 높은 곳에 또는 가장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마음 속으로 상상하며 읽었다.

 

1 서론: 나는 누구인가?

 

23 나는 내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의식이 되었다. 이 말은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내가 그 당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의식이었다는 말이다.

 

24 길가의 먼지와 돌들이 황금처럼 반짝거렸다. / 길에서 뛰노는 아이들 모두가 움직이는 보석이었다.

아름다운 표현이다. 일상을 그냥 흘러 보내지 말고 다시 오지 않을 순간으로 보면 길 가의 먼지와 돌들도 아름답다. 뛰노는 아이들 = 움직이는 보석도 아름답다.

 

25 언젠가 자연스럽게 광대미답의 진정한 영역, 즉 의식의 신세계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섬 같은 각성을 덮쳐올 때까지

 

27 나는 누구인가? – 아마도 문명의 여명기부터 인류를 괴롭혀왔을 이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에게 가장 성가신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 느낌에 주목하라고 한다. 그렇게 경계의 개념을 유도한다.

 

28 아마도 당신은 스스로 파악하고 있는 자신의 특성들, 즉 나라는 정체감의 토대로 여겨지는 것들 착하다/악하다, 가치 있다/쓸모 없다, 과학적이다/시적이다, 철학적이다/정교적이다 등등 을 묘사할 것이다.

얼마 전 누군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스스로를 쓸모 있고 싶은 예술가로 지칭한 것이 참신했다. 춤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찰나의 예술인데, 결국은 사라지는 그 예술 속에서 쓸모 있음을 찾고자 한다는 그녀의 고민이 멋져 보였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존재의 이유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당신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그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달려 있다.

 

29 정체성이란 자신을 이것과 동일시하고, 저것과는 동일시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한국인이고, 나는 여성이고, 나는 기혼여성이고, 나는 엄마이고, 나는 40대다. 여기에서 국적, 성별, 결혼여부, 출산여부, 나이 등의 경계를 지우고 표현하자면, 나는 지구인이고, 나는 인간이고, 나는 인간이고, 나는 인간이고, 나는 인간이다.

 

요컨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당신은 어디에 경계를 설정했는가?라는 의미인 것이다.

 

경계선의 가장 혁명적인 재작도 또는 변경은 지고의 본성 체험에서 일어난다.

지고의 본성 체험이라는 건 어떤 걸까.

 

30 아마도 합일의식에 도달한 극소수 사람이나 희망없는 정신병자를 제외한

합일의식에 도달한 사람과 희망 없는 정신병자가 동일선상에서 취급되네.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할 때의 그 종이 한 장이 경계선.

 

31 실제로 심신의 분리와 그에 수반된 이원론은 서구문명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이글에서조차 필자는 전반적인 인간행동의 연구를 지칭하기 위해 심리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 단어 자체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마음이지 몸이 아니라는 편견을 보여준다.

그러게. 심리학이라는 단어에 이미 심신의 분리가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을 못했네. 그나저나 이걸 쓰면서 주목무좀이라고 입력했다. 주목이라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 사이에 내 머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겨.  

 

32 한편에서 보면, 몸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많은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 성적 희열, 음식의 맛, 황혼의 아름다움 등을 느끼는 것은 바로 몸의 감각들이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보면, 몸은 급작스러운 통증, 지긋지긋한 만성병, 고문과도 같은 암투병 등 무서운 공포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즐거움의 원천과 공포의 근거지 사이에는 나이’(또는 시간)라는 경계가 있다. 청춘을 보내고 시들기 시작하면서 몸은 즐거움의 원천보다는 마음같지 않은한계를 지우는 원인이 되고 만다. 이 때부터는 마음을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아야 할까. 그래서 명상이 필요하게 되는 건가.

 

38 경계선은 잠재적인 전선이기도 하다.

내 안의 휴전선.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수준은 점차 다양한 종류의 적군과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41 마음이나 에고로부터 심신일여의 전유기체로 정체성을 확장시킬 경우, 유기체 전체의 엄청난 잠재력이 해방되면서 그 사람에게 주어진다.

 

43 즉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스펙트럼 상의 하강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44 따라서 자기 성장이란 재분배, 재구역화, 재작도이며, 자기 자신의 좀 더 깊고 넓은 수준을 인식하고 포괄해가는 풍요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우리는 한계와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없는 지금 이 순간,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자각을 탐구할 것이다.

내 표현대로 하면 자기성장=오지랖 태평양 과정이라 하겠다. 결국 너는 나임을 자각하는 것.

 

2 그것의 절반

 

45 삶에 왜 대극이 생겨나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왜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것이 한쌍의 대극 중 어느 한 쪽인 것일까? 왜 모든 결정은 대극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음과 양

 

46 자연은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고 소로우는 말한 바 있다. 자연은 옳고 그름이란 대극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이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때문이다.

 

적어도 곰들의 세계에서는 열등감을 찾아볼 수 없다.

재미있는 표현이네. 곰들도 기뻐하고 두려워하고 화를 낼 거 같긴 한데 열등감은 없을 거 같긴 하다. 그런데 누가 알겠나? 곰들도 기쁨, 슬픔의 감정이 있다면 열등감도 있을지. 동물들이 갖고 있는 감정, 원시인들이 가졌던 감정,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감정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47 병든 울새는 버드나무 가지에 편안히 앉아 황혼을 바라본다. 그러다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조용히 땅에 떨어진다. 인간이 맞이하는 죽음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가.

자연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최후다. 누군가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있다면, 누군가 옆에서 귓가에 노래나 시를 들려준다면, 누군가 눈을 감겨 준다면 인간으로서는 역시 아름다운 최후이겠다.

 

48 과연 완전한 얼간이가 진정한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과학자들이 결국은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는 것.

 

49 그는 다양한 동물 집단 사이에 마음 속에서 경계를 긋는일을 배워야만 했다.

 

51 현실의 대상을 직접 다루는 대신, 그 대상을 나타내는 마술적 이름을 머릿속에서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담은 언어의 마술을 통해 이브를 보고 세상에, 자기는 꼭 당나귀처럼 바보같아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52 아담이 배운 것은 어디에 선을 그을 것인가?”는 실제로 어디서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를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무언가에 가치를 두면 둘수록 그것의 상실이 두려워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 대부분은 경계로부터 비롯된, 경계가 만들어낸 문제라는 것이다.

 

53 경계에 의해 만들어진 그 대극을 조작하려고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 경계 자체는 결코 의문시 하지 않는 것 같다.

1장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에 매달리지 말고 그 질문으로 인해 발생하는 과정과 느낌에 주목하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 경계로 인한 대극에 매달리지 말고 그 경계 자체를 의문시 하라. 이런 새로운 시각, 관점 배울 만 하다.

 

이처럼 천국은 모든 대극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한 쌍의 대립 중 좋은 쪽만을 전부 모아놓은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결국 진보란 단순히 부정적인 것에서 멀어지고긍정적인 것을 향해 다가가는것이 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긍정적인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해온 결과로서 인류가 더 행복하고, 더 만족스럽고, 더 평화롭게 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유발하라리도 지적한 것. 유발하라리까지 갈 것도 없이 세탁기와 각종 청소기의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있어도 가사는 여전히 힘들고 현대인의 바쁜 생활에 여유가 보태진 것은 아니다. 

 

54 오늘날은 불안의 시대, <<미래의 충격>>의 시대, 역병처럼 유행하는 욕구불만과 소외의 시대, 풍요롭지만 또한 권태롭고 무의미한 시대이다.

 

부정적인 것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동시에 긍정적인 것을 즐길 가능성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진보라는 모험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의 실패는 더욱 두드러진 것이 되고, 그렇게 해서 총체적인 욕구불만은 훨씬 극심해진다.

 

56 마찬가지로 땅의 존재 없이 하늘의 존재를 말하거나, 양 없는 음의 원리를 말하기도 하나, 그런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말을 되풀이한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바보 멍청이거나 무뢰한임이 틀림 없으리라.

그림자를 품어라.

 

예컨대, 상대성 이론에서는 정지 대 운동이라는 해묵은 대극이 전혀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즉 한 관찰자에겐 정지된 것으로 보이는 대상이 동시에 다른 관찰자에겐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기때문에 각각은 둘 다이다가 되었다.

 

57 우리가 주체와 객체라고 부르는 것은, 사고파는 행위처럼 그저 단일한 과정에 접근해가는 두 가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시공간적 사건만을 논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과 공간을 떼어 놓을 수 없고 시공간을 함께.

 

현대 물리학자들은 실재란 오직 대극이 합일된 상태로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58 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도 모든 궁극적 요소들은 본질적으로 진동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유기체와 진동적 존재의 철학을 공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의 파도는 그 자체로 단일한 사건이지만 마루와 골, 최고점과 최저점이라는 대극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대극의 내적 일체성을 게슈탈트 지각이론보다 확연하게 설명해주는 틀도 없을 것이다.

 

59 세계를 분리된 대극으로 볼 때 삶이 왜 그토록 불만스러운 것이 되는지, 왜 진보가 성장이 아니라 암적인 것이 되는지를 이젠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립하는 양극을 떼놓으려고 애쓰면서 소위 고통 없는 쾌락, 죽음 없는 생명, 악 없는 선 따위의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것들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실체가 없는 유령을 쫓는 꼴이 되고 만다.

 

우리의 목표가 너무나 고상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환상이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립되지 않는 난센스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60 앨런 왓츠가 자주 지적했던 것처럼, 소위 나누는선들은 동시에 육지와 물이 만나는지점을 나타낸다.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과 이집트, 남한과 북한. 이웃으로 만나느냐 적으로 싸우느냐. 나눔과 만남은 종이 한 장 차이.

 

61 이것이야말로 도가의 현자 노자가 모든 대극은 상호적으로 동시에 발생한다고 말했을 때 의미한 바로 그것이다. 오목면과 볼록면의 예와 같이, 대극물은 함께 생겨난다.

융의 동시성 이론. 자기(self)의 자아(ego)에 대한 전체성에의 요구.

 

62 그런데 우리는 아담이 원래 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경계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조상의 죄가 후손들에게 지금까지도 대물림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에덴동산이라는 낙원과 비낙원의 경계는 신이 만든 거 아닌가요? 선악과도 그렇고 아담과 이브를 만든 것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보니 애초에 신이 그랬구만. 그걸 왜 아담한테 뒤집어 씌워서. 그건 신의 그림자를 아담에게 투사한 거 아니야?

 

이런 오류는 우리가 그 범주의 안과 밖에다 이름을 붙이고 단어나 상징을 부여해감에 따라 더욱 가중된다.

 

63 그러나 우리는 마치 지도와 언어가 진정한 세계인 것처럼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64 여기서는,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방이란 부정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극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점에 유념하도록 하자.

바가바드 기타도 조셉 캠벨 때부터 꽤 인용되네. 시적으로 표현된 것 같아서 관심이 가긴 하는데 일단 관심 끄자.

 

67 다만 행복이 진보에 달려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행복이 진보에 달려 있다는 환상은 나는 애초에 품지 않았음.

 

진동하는 우리 존재의 즐거운 유희

춤 추는 인간. 요새 어쩌다 무용하는 분을 알게 되어 시간예술, 그리고 오직 몸으로 구현되는 춤에 관심이 가게 되었다. 

 

3 무경계 영토

 

69 아담은 세상을 뜨면서 인류에게 자신의 지도와 경계선 구축법이라는 유산을 물려주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아담의 죄가 아니야. 신이 그랬어.

 

70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단편화로의 타락을 원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담의 원죄 = 신의 그림자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인물, 즉 위대한 지도제작자와 경계선 구축자들이 출현한 것은 그리스에서였다.

 

71 이름짓기가 마술처럼 보였다면, 계산은 성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5 무경계 순간

 

113 성 디오니시우스는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과 영원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과 함께 모든 신비통찰의 난제에 손을 댔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깨달은 현자들이 합일의식은 시간의 산물, 즉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무시간적인것이라는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엔간한 책에서 멀어지는 대신 성경을 읽어볼까 한다. 생각해보니 성경에 영원이라는 말이 종종 등장했던 것 같다.

 

마음을 고요케 함으로써, 오고감 없이 늘 머물러 있는 영원이 어떻게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을 드러내는지를 들여다 볼 자 과연 누구인가?

이건 한 편의 시네. 결국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고 하네. 주역에 이어 이젠 명상으로 이끌고 있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땡김이 있어. 이런 땡김에서 구본형 선생님을 느낀다.

 

114 합일의식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무시간적 순간 속에서 무시간적 순간으로 산다는 것과 같다.

 

115 세찬 빗속을 통해 반향하는 천둥소리 후의 고요함에 문득 사로잡힌 순간이와 같은 무시간성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태국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깐자나부리였나. 동남아 특유의 무섭게 쏟아지는 비와 천둥소리. 마침 강가 위의 숙소라서 그 소리를 온 몸으로 느꼈다. 무섭기도 했지만 신이 느껴지는 것 같은 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신기하기도 했다. 그 자연을 또 접하고 싶다. 내년에는 아이들과 여행하며 자연 속에서 명상하고 싶다.  

 

신비가는 현재순간에 완전히 몰입한 경험 속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현재순간을 잘 검토해보면, 분명 그 안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왜 여기에서 미분과 접선이 생각나는지. 화제를 돌려서, 연습에 몰입하다 보면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을 잊는다고 한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몰입은 시간도 정지시키고 (부정적인) 감정도 얼게 하나보다. 그렇게 몰입할 수 있는(집착이나 매달리는 것이 아닌) 대상이 나에게는 무얼까.

 

따라서 이런 현재순간으로 깊숙이 발을 내딛는 것이 곧 영원으로 뛰어드는 것이고, 거울을 통과해 불생불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몰입, 황홀경, 무아지경

 

117 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의 이름의 현현이요, 하늘나라의 임장이다. 이런 까닭에 이슬람 신비가인 루미는 수피는 이 순간의 자녀라고 말한다.

수피댄스로만 수피에 대한 느낌을 어렴풋하게 갖고 있었는데그런데 수피댄스에서 받았던 그 강렬한 감정과 분위기가 어떤 맥락에서 생겼는지 알 것도 같다.

 

우리는 어제에 살면서 끊임없이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라는 고통스러운 사슬에 묶이고, 있지도 않은 유령을 불러내어 스스로를 속박한다. 기억과 기대라는 공상의 안개 속에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로써 현존하고 있는 근원적 실재를 박탈하고는 그것을 허울 좋은 현재 또는 빈약한 현재, 즉 고작 1-2초 정도 머물다 사라져버리는 영원한 현존의 창백한 그림자로 전락시킨다.

 

118 무시간적 순간 속에 살지 못하는 무능력과 영원의 기쁨 속에 잠기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우리는 현재 순간의 무기력한 대용품인 시간의 약속’ – 지금 갖지 못한 것을 미래에 갖게 되리라는 을 계속 추구한다.

이 표현 정말 좋다. 순간 속에 살지 못하는 무능력과 기쁨 속에 잠기지 못하는 무능력이라. 능력/무능력의 재정의.

 

우리의 모든 문제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의 걱정은 언제나 과거 또는 미래에 걸쳐 있다.

 

119 왜냐하면 죄책감이란 과거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고, 불안이란 미래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감정과 시간을 매치하니 와 닿는다. 죄책감-과거/ 불안-미래. 그렇다면 현재는 주로 어떤 감정과 연결되어 있을까? 감정과 시간의 연결, 이거 좀 더 파고들어보자. 나중에.

 

에머슨이 멋지게 지적한 것처럼, 이 깨어남은 우리가 현재에 현존하게 될 때에만 일어난다.

 

이와 같이 시간 너머 현재 속에 살기그리고 순간의 자식으로 존재하기는 영원과 합일의식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걸 좀 실감나게 하려면, 나의 아버지는 순간입니다. 나는 순간의 자식입니다. 보통은 태고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120 왜냐하면 과거와 미래란 단지 영원한 지금 위에 덧씌워진 상징적 경계라는 환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영원 위에 덧그은 경계로서의 시간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경험하는 모든 것에,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이 무시간의 현재에 접촉하려고애쓴다.

이게 명상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한가. 보면 들숨, 날숨 어쩌구 하던데.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 결국 순간에 집중하는 것 같다.

 

122 당신이 듣는 유일한 소리는 오직 현재이다. 당신은 과거나 미래를 듣고 있지 않으며 들을 수도 없다. / 쉼 없이 변화하는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미래의 소리, 과거의 소리라는 것은 없네. 내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오직 현재의 소리이다. 그리고 냄새도! 냄새도 오직 현재의 냄새만 맡을 수 있다. 그나마 소리는 녹음할 수 있지만 냄새는 잡아둘 수도 없다. 냄새와 현재에 대해, 나중에 파헤칠 것.

 

123 과거에 대한 현재의 흔적을 보고 있는 것

 

124 예견/ 기억으로서의 과거와 예견으로서의 미래가 모두 현재의 사실이라는 점은 모든 시간이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125 많은 사람들은 과거가 그들 뒤에 놓여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기 때문인지, 왼쪽에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아랍어는 반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데 아랍 사람들은 과거를 오른쪽에 있다고 생각할까. 언어와 사고의 관계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그래서 테드 창은 우주인의 언어로 시제가 없는이미지로서의 언어를 소설에 쓴 바 있다.

 

126 열린 순간이 아니라 짓눌린 순간, 압착된 순간, 즉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덧없는 순간이 된다. / 샌드위치 속의 고기인 현재의 순간은 단지 얇은 종잇조각처럼 축소되고 우리의 실재는 이내 내용물 없는 두 조각의 빵이 되어버린다.

인생 = 두 조각의 빵

 

앞뒤로 우리를 짓누르는 듯했던 무게 전체가 순식간에 갑자기,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더 이상 가두어진 순간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채울만큼 확장된다. 그리하여 스쳐가는 현재가 영원한 현재로 펼쳐진다.

 

현재 안에 세상의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과 함께 우주가 존재한다.

 

127 기억으로서의 과거와 기대로서의 미래가 그 주변이 아니라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영원한 현재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

이 표현도 좋다. 기억으로서의 과거, 기대로서의 미래.

 

130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앞뒤 어디에도 시간이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게 해서 무시간적 현재 이외에 달리 서 있을 곳이 없게 되고, 영원 이외에 달리 있을 곳이 없게 된다.

 

6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131 자아를 진정한 나로 정의하는 정통심리학에서는 합일의식을 정상성의 상실로, 의식의 착란 또는 변성된 의식상태로 묘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합일의식을 자연스러운 나, 유일한 진정한 나로 본다면 자아는 합일의식의 부자연스러운 억제나 제약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33 이 모든 의문 중에서 가장 궁금한 측면은 도대체 왜 근원적 경계가 발생하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왜 원죄가 존재하는가? 왜 윤회의 세계, 환영의 세계, 경계의 비참함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경계조차 신이 만들었기때문이다. 선과 악, 천사와 악마는 신이 만들었는데 왜 의문과 그로 인한 고뇌는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합니까.

 

7 페르소나 수준: 발견의 출발점

 

149 스펙트럼 상의 하강과 발견의 태동은 삶에 대한 불만이 의식되는 순간 시작된다.

 

고통은 현실에 대한 소위 표준적인 자기만족에 대한 위안을 산산조각내며,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회피해 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과 세계를 세심하게 보고 깊이 느끼고 접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의미에서 살아 있게끔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통이야말로 최초의 은총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나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특수한 의미에서, 고통은 거의 환희의 순간이기도 하다. 고통은 창조적인 통찰력이 탄생하는 기점이기때문이다.

고통은 창조적인 통찰력이 탄생하는 기점이라. 그래서 조창인 선생님이 소설을 쓰려면, 창작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고통에 대한 통감이 중요하다고 한 건가.

 

150 우리는 감각을 상실케 하는 보상이나 주의분산, 마술 등의 온갖 방식을 통해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고뇌라는 바퀴의 근본원인인 환상 속의 경계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기로 동의한다. 그러나 완전히 무감각해지지 않는 한, 조만간 방어적 성격의 보상물은 달래고 감춰주는 성능을 잃기 시작한다.

 

따라서 고통은 거짓 경계를 알아차리는 최초의 움직임이다. 그렇기에 올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고통은 해방을 준다. 고통은 모든 경계를 넘어선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은 병들어서가 아니라 지성적 통찰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고는 끝이 있는 고통이고 결국은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고통이기에 슬픈 고통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통찰의 탄생이 유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고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겪어내고 마침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고통을 올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 조창인 선생님이 한 말을 부연설명 해주고 있는 거 같네. 고통의 존재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통감 여부가 중요하다고 한 것, 결국은 고통을 올바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 통찰의 탄생이 유산되지 않도록 산고를 제대로 겪어내야 한다!

 

151 고통을 넘어선 삶을 살기 위해 고통을 바르게 살아내는 최선의 길을 제시해왔다. / 그것은 각자 자신의 고통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그 고통을 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영혼의사들은 신과 접촉할 것을 권했고, 현대의 영혼의사들은 무의식과 접촉할 것을 권한다.

표현 재미있다. 그런데 결국 무의식=내면의 신

 

고통 속에 얼어붙은 상태에서는 실재를 꿰뚫어볼 심층적인 통찰력이 출현하지 않으며 출현할 수도 없다. 그런 때는 깨어 있는 의식으로써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통찰을 꺼내올 수도 없다.

 

우리는 한 때 순수한 믿음을 갖고 성직자나 현자 혹은 주술사를 영혼의사로서 추앙했던 적이 있다.

원시인의 심리학이 궁금하다.

 

153 이것은 독자들에게 의식의 심층을 보여주는 약도를 제공해줄 것이고, 이 약도는 경계에서 비롯된 혼란을 통과해가도록 돕는 지침이 될 것이다.

 

154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의 투사를 재소유한다는 것은 곧 하나의 경계를 해체시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저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투사의 대상이 실은 자신의 반영이자 자기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서 그 특정경계를 제거한 셈이 된다.

그림자 품기

 

따라서 스펙트럼을 하강한다는 것은 (1) 투사를 재소유함으로써 (2) 경계를 해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일이 하강의 매 단계마다 일어난다.

이미지/

 

159 실로 모든 압력은 투사된 충동의 결과이다.

이분법적인 것은 좋지 않다면서요. 모든 압력=투사된 충동이라는 등식은 무리가 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싱크대 위의 그릇을 보며 나는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지만 그게 내가 설거지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는데? 다만 그렇게 반대로 생각하며 대극을 품는 일종의 훈련, 습관 차원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겠다.

 

동인이 없으면 압력도 없다. 모든 압력의 그 밑바닥에는 그 사람 자신으로부터 쫓겨난 충동이 깔려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녀를 좋은 밥이라고 부른다. 잭이 그녀에게 투사하려는 것과 똑 같은 성향을 때마침 그녀가 드러냈기 때문이다.

 

160 현명한 사람은 상사, 배우자, 학교, 친구, 동료 또는 자녀로부터 어떤 압력을 느낄 때면 언제나 그 압력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어떤 에너지와 동인을 현재 자신이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나는 압력을 느낀다를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많은 동인을 갖고 있다로 변환시키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변환, 전환, (주역에서의) 체용 등의 단어가 연상된다. 100% 동의는 못하지만 훈련은 해보겠다. 어떤 압력을 느낄 때 나에게 그 동인이 있다고. (그런데 여전히 압력=동인/충동이라는 등식은 납득이 안간다. 이것도 저항인가)

 

그것은 일종의 부메랑 효과이며, 자신의 에너지로써 자신에게 사정없이 고통을 가하는 결과를 빚는다.

정신의 자가면역질환

 

162 유대전통에 의하면 인류가 권태로움 때문에 멸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써 태초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속에 이런 변덕스러운 성향, 별나고 심술궂은 경향을 심어놓았다고 한다.

러셀도 권태로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의 변덕스러운 성향은 나의 멸망을 막기 위함인가.

 

165 의무감, 즉 나는 너를 위해 ~를 해야 한다는 느낌은 가족관계에서 가장 흔히 발생한다.

 

이런저런 일을 하는 데 엄청난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은 단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진정한 욕망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 남을 돕고자 하는 욕망이 정말로 없다면 그는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68 따라서 강력한 열등감과 거부감을 느낄 때마다 먼저 자신의 투사를 찾아보고, 자신이 세상에 대해 생각보다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일단 그림자를 투사하면, 나는 그것을 하나의 증상으로서만 느낀다.

 

8 켄타우로스 수준


켄타우로스의 개념도 좋긴 한데, 나는 아래 이미지를 마음에 그렸다. 날개 달린 정신(새)이 말의 고삐를 잡았다.   


새의조종.jpg


180 정말로 신체는 그저 내 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더 이상 신체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체 위에서 살아간다.

말을 탈 때의 느낌으로 접근.

 

182 수의 대 불수의의 대극

여의(如意)-뜻대로-라는 것이 좋은 말이네.  

 

반면 신체는 기본적으로 혈액순환, 소화, 성장과 발달, 신진대사 등과 같은 불수의적 과정들의 잘 조합된 결합체이다.

 

184 이렇듯 만연한 감각의 결핍은 신체로부터의 위축과 켄타우로스의 분열이 가져온 치명적인 충격의 일반적인 결과이다.

 

9 초월적인 나

 

207 현대 종교의 전반적인 빈혈상태와 더불어, 우리는 사회적으로 접근 가능한 직접적인 초월수단을 대체로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개별성을 초월하고 관습적인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있는 세계와 이어져 있는 초개아적 자기가 존재의 심연에 잠들어 있음을 알려줘도 믿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융도 이런 상황을 개탄했던 것 같다. 빈혈상태라는 표현 좋네. 나의 심연에 잠들어 있는 초개아적 자기는 나에게는 바닥에 누워 있는 가오리로 상상된다.

 

208 그러나 억압된 것은 결코 진정으로 제거되지 않으며, 단지 힘을 비축하면서 잠복해 있거나 위장된 형태로 표면에서 새어나오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 억압된 초월성의 확대된 분출을 목격하고 있다.

 

또한 초월성에 대한 이런 충동은 일반적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억압되어왔기 때문에 때로는 흑마술, 강신술, 향정신성 약물의 오남용, 사이비 종교파의 교주숭배와 같은 기이하고 과장된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209 스펙트럼 상의 특정 수준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라면 어떤 학자라도 일반적으로 자신의 관심 수준과 그 위의 수준이 모두 실재한다고 인정하지만, 그 수준보다 심층적인 수준에 대해서는 흔히 실재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병적인 것이라거나 환상적인 것이라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융과 프로이트의 갈등이 결국 여기에서 발생한 거지.

 

융은 인간 자각의 초개아적 영역의 주요 측면들을 발견하고 탐구했던 최초의 저명한 유럽 심리학자였다.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스펙트럼의 상위 수준에 한정시켰기 때문에 이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서로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었으나 차원 간 교집합의 수준에서는 잠시의 허니문이 있었던 셈. 그런데 부부도 이런 유통기한이 있을 수 있겠다 싶다.

 

그렇다면 융은 특별히 어떤 것과 마주쳤던 것일까?

, 유발 하라리, 켄 윌버는 도대체 어떤 것과 마주쳤던 것일까.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얼까. 모두 이른 나이에 깨달음이 있었던 것을 보면 후천적 교육이나 경험보다는 선천적인, 또는 외부의 또 다른 자극의 흐름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한 사람 안에있는 동시에 그 사람 너머에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210 융을 놀라게 한 것은 이들 원시적인 신화적 심상들이 현대의 문명화된 유럽인의 꿈과 환상 속에서도의심의 여지 없이 규칙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211 이 신화적 초월성은 모든 사람의 존재 심층에 파묻혀 있으며, 이 강력한 층을 무시할 경우 가장 후회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히려 집단무의식에는 인류 공통의 주제들이 저장되어 있다.

고전이 모든 나라에서 읽히는 경우를 보면, 주인공의 국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인생이 품고 있는 주제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그것이 인류 공통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융에 의하면, 우리가 그런 사실을 알든 모르든, 그것들은 거기에 계속해서 살고 있으며, 창조적이거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계속해서 교묘히 조종한다고 한다.

 

212 이런 원형적 자각이라는 맥락 속에서 심층적 나’, ‘초개아적 나로의 이행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검토해보자. 인류 공통인 원형과 신화적 심상의 눈을 통해 자신의 삶을 곰곰이 되새겨보기 시작하면, 그의 자각은 좀 더 보편적인 관점으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언제 한번, 돗자리 깔고 그 눈을 통해 내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집단적인 인류정신의 눈이라는 전혀 다른 관점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본다!

유체이탈 + 왓칭.

 

어떤 의미에선, 자신의 개인적인 근심걱정들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어서, 창조적인 초연성을 유지한 채 그것들을 지켜볼 수 있다.

창조적인 초연성이란 어떤 것일까. 근심걱정조차 낯설게 하며 그냥 흘러가도록 하라는거지. 이건 뭐 득도한 사람일 듯.

 

사적인 나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 심층의 나는 그것들을 초월하고, 또한 그것에 전혀 오염되지 않고 활짝 열린 상태에서 그것들을 인식한다.

마음 속 심층의 나를 나는 가오리아로 이미지화 하겠다. 가오리아는 바닷 속 깊은 바닥 위에 대자로 누워 무심한 듯 하면서도 보고 듣는 것을 다 한다. 여하튼 리아의 모든 문제를 인식은 하되 그 문제를 파도 위로 흘러가게 냅둔다.

 

213 의식표면의 파도는 고통과 불안과 절망이란 급류에 휩쓸릴지라도 깊은 바닷 속과 같이 평정을 유지하는 고요한 내적 힘의 근원을 발견하게 된다.

찰랑거리는 나와 나로부터 떠나는 리아(離我)

 

세계신화의 광대한 미궁과 자신의 원형층을 통과하도록 안내해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215 처음엔 동요하는 감정의 파도 밑으로 그다지 잠수하지 못할 테지만, 끈기를 갖고 계속하다 보면 영혼의 고요한 심연으로 깊이 잠수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스쿠버 다이빙 이미지를 품자. 명상할 때 떠올리기 좋은 이미지이다. 유유자적 오고 가는 우아한 물고기들의 꼬리침.  

 

합일의식 속에서는 초개아적 주시자 자체가 주시된 모든 것과 함께 붕괴된다.

 

216 불안이 현존해 있더라도 더 이상 그 불안에만 묶여 있지는 않기 때문에, 압도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불안의 존재 여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압도여부가 문제되는 것.

 

217 어떤 상태를 주시하는 것은 이미 그 상태를 초월한 것이다. 그것들을 앞에 놓고 정면에서 보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들이 뒤에서 습격해 올 염려는 없다.

어릴 때 어떤 애니메이션의 대사였던 거 같은데. 주인공이 무대에 오르기 전 너무 떠니까 관중들을 다 호박으로 생각하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있었다. 관중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시선이 긴장을 준다면, 관중을 호박으로 변신시켜 주인공이 호박들을 주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긴장상태를 초월.

 

218 어떤 경우이든, 새롭고 폭 넓은 정체성으로 확장해갈 뿐만 아니라, 낡고 협소한 정체성을 깨뜨리기도 한다.

창조적 파괴

 

219 그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다.

 

거울이 그 앞을 스쳐가는 어떤 것이든 공평하고 온전하게 비춰주는 것처럼, 우리는 일어나는 어떤 감각이나 생각이라도 붙잡거나 밀쳐내지 않고 단지 비춘다.

 

220 나는 몸과 마음과 감정을 갖고 있지만, 나는 마음과 몸과 감정들이 아니다.

 

그는 페르소나와의 접점을 잃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에 집착하지 않게 될 뿐이라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221 그러나 이제 그는 상황과 자신의 재량에 따라 그 외관을 사용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동경하는 스타일은 민낯과 풀메이컵을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하는 사람이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니까. 어떤 때엔 수더분한데 어떤 때는 화려한 사람.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측면들을 자신 안에서 인식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을 밖으로 투사하지 않는다.

 

222 환경 속의 모든 대상을 마치 나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런 자세에는 세계란 사실상 자신의 몸이며 또한 몸으로서 대해야 한다는 직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가르침은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네 이웃을 진정한 너 자신으로서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또한 그저 네 이웃 뿐만 아니라 모든 환경을 사랑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223 초개아적인 나를 근원적으로 직관하게 된 사람이라면,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진정한 나 뿐이며, 그 하나의 나가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224 다른 몸, 다른 기억, 다른 감각을 갖고 있더라도 그 동일한 나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환생이란 자신의 자아가 전생(轉生)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샹카라가 말한 것처럼 유일하게 전생하는 것은 오직 초월적인 나뿐이다.

, 기억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유명한 역설이 생겨난 것

그 유명한 역설을 나는 왜 몰랐나.

 

226 그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에 간섭받지 않는 초개아적 주시자이자 초개아적인 나이다.

가장 무섭고 엄격한 소리, 시간이 흐르는 소리.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관점, 다른 기억, 다른 느낌이나 감각을 갖고 있는 단일한 나 또는 진정한 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닐까?

 

당신이 아무런 의심 없이 20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동일한 사람이라고 느낀다면 기억, 마음, 몸은 변했다 하더라도 나라는 느낌의 측면에서 마찬가지로 200년 전에도 그것과 동일한 나가 있었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

소설 소재. 조상, 할머니의 한과 꿈. 대를 이어 흐르는 한 영혼의 恨과 꿈!

 

만일 그 느낌이 기억이나, 마음, 몸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20년 전이나 200년 전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227 우리는 방금 나란 느낌은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주시자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것들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은 내면의 초월적인 나를 외적이고 개인적인 기억, 마음, 그리고 몸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때문이다. 그런 것들이야 물론 다르다.

그림자도 나라고 하니 할 말 다 했지.

 

228 반면에 보는 자, 주시자, 진정한 나로서 계속 머문다면 제약과 문제들로부터 한발 비켜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발을 빼게 된다.

표현 좋다.

 

229 초월적인 나는 모든 전통에서 신성의 빛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원리적으로 초월적인 나는 당신이 신을 어떻게 인식하든 신과 동일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궁극적, 근본적으로는 심오한 곳에서 오직 신만이 당신의 눈을 통해 보고, 당신의 귀를 통해 듣고, 당신의 혀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생 클레망이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10 궁극의 의식상태

 

234 그러나 파도 하나하나는 다른 모든 파도와는 다르며, 그렇기에 파도타기를 할 경우 자신의 능력에 따라 특정한 파도를 선택하고, 그 파도에 올라타 재주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 맞는 변화를 골라라

 

236 왜냐하면 궁극에는 모든 곳과 모든 때에 존재하는 편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함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명상이 필요한가? 진짜 어떤 특정한 상태를 1분 이상 유지하는 것도 힘들긴 하더라. 1분만 눈 감고 있으라고 해도 온갖 잡념이 떠오른다. 1분의 고요함도 유지하지 못하는데 현재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내일부터 기도라는 형태로라도 눈을 감고 고요함을 유지해봐야겠다. 자기 전 또는 기상 후 시도. 정 안되면 식전 기도라도.

 

236 우리가 찾고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언제나 바로 이 현재경험

파랑새이자 무지개인 현재경험.

 

237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 완전하게 접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이 순간이라는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젖은 낙엽처럼.

 

마조선사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표현이 너무 웃긴다.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말한다라니 ㅋ

 

도에 있어서는 자신을 수행해야 할 아무것도 없다. 만일 거기에 수행할 것이 있다면, 그 수행의 완성은 도의 파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도에 아무런 수행이 없다면, 그 사람은 무명상태로 머물게 될 것이다.

 

, 합일의식의 실현에는 특별한 상태가 마땅하다는 것이다.

특별한 행동/행위가 아니라 특별한 상태라고 한 것에 주목.

 

238 합일의식은 언제나 현존한다는 자각이 바로 우리의 본증, 즉 본래의 깨달음이다. 본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먼 옛날에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근원이자 기반이기 때문에, 현재 형상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묘수, 즉 영적 수행이란 바로 이 근원의 움직임, 활동이며, 그것은 본래의 깨달음의 마땅한 기능이다.

 

따라서 본증묘수는 진정한 영적 수행이란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으로부터 샘솟아 나오는 것임을 뜻한다. 수행이 합일의식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수행은 처음부터, 사실상 언제나, 합일의식이다.

 

239 이와 같이 모든 의미에서 우리의 영적 수행은 그 자체가 이미 목적지다. 결과와 수단, 길과 목적지,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이다.

 

그러나 진짜 핵심은, 영적 수행의 특별한 상태들을 취하는 것이 합일의식의 마땅한 표현 중 하나라는 점이다. 아무리 귀한 보석이라도 그것을 사용하고 표현하고 드러낼 수 없다면 그 세속적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영적 수행이란, 그것이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단지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240 단지 좌선, 찬송, 예배, 진언명상, 경전암송, 성경봉독 뿐만 아니라 접시 닦기부터 세금 내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이미 수행이며 기도가 된다. 접시를 닦으면서 본래의 깨달음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접시 닦기 자체가 본래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필사, 탕전, 살림 등을 본래의 깨달음이라 생각하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필사와 약 달이는 작업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가사도 수행이자 기도라고 여기려면 도를 더 닦아야겠는데.

 

241 실제로 우리는 언제나 합일의식에 저항하고 신을 피해 달아나며 도와 싸우고 있다.

 

그러나 합일의식과 현재경험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므로 둘 중 하나에 저항하는 것은 다른 것에도 저항하는 것이다.

 

243 아무리 터무니없고 대수롭지 않고 불합리한 것이라도 머리에 떠오른 것이면 무엇이든 모두 말하게 하는 것이다. 지시에 따라 자유연상을 시작하면 연상, 회상, 공상의 연쇄로 이런저런 상념들이 줄줄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지껄이듯 쓰기, no filter, flow writing.

 

자유연상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만성적인 검열인 저항을 완화시켰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방심한 그에게 잠시 동안 그림자로 존재하던 생각이나 충동이 자연스럽게 표면으로 떠올라왔다.

글쓰기 훈련 시에도 지껄이듯 글쓰기를 하면 도움이 되는 거 같다. 물론 습작단계에서의 훈련.

 

244 이런 저항의 일부는 일정 시간 동안 진정한 현재 중심의 자각(또는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능력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자아는 기본적으로 시간 속에서 기능하면서 과거를 뒤져보고 미래를 갈망하기 때문에, 사고 자체가 켄타우로스에 대한 저항이 되는 경향이 있다.

 

245 따라서, 나는 자유연상법이나 관념의 비상 대신에 회피의 해독제인 집중을 그 방법으로 대치시켰다.

 

펄스는 곧이어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집중이란 용어를 버리고, 지금 여기에 대한 자각으로 바꾸었다.

몰입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246 그리고 한때 그림자와의 통합에 저항하고 전유기체인 켄타우로스와의 통일에 맞서 싸웠던 것처럼, 지각된 대상 전체와 합일된 자각과 싸운다. 한마디로, 우리는 합일의식과 싸우는 것이다.

오지랖 펄럭이며

 

247 하지만 다른 모든 수준에서도 저항에 대한 이해가 전환을 촉진시키는 통찰이었던 것과 똑같이, 이것은 그 자체가 결정적인 통찰이다.

저항à전환à통찰을 명심. 저항감이 들 때엔 (논리적으로) 딴지를 걸려고 하지 말고, 일단 그 저항이라는 느낌을 붙잡을 것.

 

251 우리는 자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경향이 있다.

나는 현재를 살며 미래를 끌어 오고자 하는 것일 뿐, 미래의 꿈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가능한 최소화 하려고 한다.

 

이 합일의식의 상실은 우리를 경계의 세계, 공간과 시간, 고뇌와 죽음의 세계로 빠뜨린다.

 

252 우리는 왠지 모르게 이 현재는 정말 올바른 것이 아니고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가 한가위같은데. 시간은 흐르고 나는 늙어가고. 그저 지금이 제일 젊을 때.

 

영원히 탐구한다는 것은 영원히 탐구대상을 놓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가슴 뛰는 삶 어쩌구 하는 글들이 좀 어색하게 다가왔나.  

 

259 그러나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저항, 외면, 달아남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는 시점이 오면, 내맡김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게 된다.

내려놓음

 

261 본증묘수. 본래의 깨달음이 곧 영묘한 수행이다. 영원한 지금이 바로 그 움직임이다. 대양의 파도는 조약돌과 조개껍데기를 적시면서 자유롭게 해변을 넘나든다.

이 말 하고 싶었던 거야, 경계는 없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 분석

소제목이10개로 똑 떨어진다. ‘의식의 스펙트럼이라는 주제에 맞게 <1 서론: 나는 누구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수준을 하강하며 경계를 무너뜨리고 끝내 <10 궁극의 의식상태>로 용해(퍼짐)하는 흐름이 좋다.  

 

2 보완이 필요한 점(독자의 눈으로 – 이런 내용은 아쉬웠다. 이런 부분은 이해가 안됐다)

<무경계><의식의 스펙트럼>의 대중판이라고는 하지만 낯선 개념들이 소개되는만큼 쉽지 않다. 아마도 그래서 저자는 작은 따옴표를 남발하고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를 좀 더 활용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림자’, ‘내면아이는 그 자체로 결합/연상 되는 이미지가 있어 개념의 이해와 전달이 용이한 편이지만 초개아와 같은 개념은 읽는 이에게 와 닿기 쉬운 개념은 아닌 것 같다.  

 

3 이 책의 장점(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또 한번 깨야 할 내면의 껍질(경계선)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일반인 입장에서는 페르소나/자아/자기/그림자/무의식/집단무의식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 경계에 대한 의문과 함께 더 깊은 층에 대한 인식이라니. 너무 깊이 내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 정도의 두려움, 저항이 있었다. 다소 버겁게 압도된 느낌 그 자체가 이 책의 미덕이라 하겠다. 이 책을 통해 를 하나의 형상이 아닌 스펙트럼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되었고, 나와 연결된 그 모든 것의 경계를 허물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지속될 지 모르나 연기자비에 대한 막연한 자각을 한 것 같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을 글로 표현하자니 작은 따옴표의 남발과 '같은 내용의 반복'이 생긴 것 같다. 나라면 개념전달에 이미지를 활용하겠다. 파도, 해안선, 수면, 심연 등의 단어를 저자는 이미 여러 번 언급했다. 내면 깊이 하강하는 스킨스쿠버 다이버의 시선으로 의식의 스펙트럼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

 

 

IP *.18.2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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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14:16:18 *.106.204.231

저는 작은 따옴표가 오히려 좋았는데 또 이렇게 느낌이 다르네요.

소설 한편 잘 읽고 갑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수더분한 모습인가요? 화려한 모습인가요?

다음 모임에는 화려한 모습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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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14:19:13 *.18.187.152

기상씨 이번 주 탄력 피크인갑네. 댓글공헌에 ㅋ

전 이번 주 아플 예정이라 '초췌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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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08:43:54 *.129.240.30

무경계의 체험.. 문뜻 눈떠보니 내가 가오리?? 와 상상력이  ㅎ 문학적이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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