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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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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4일 11시 36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나는 켄 윌버에 대해 이 책을 보기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나 유명한 사람인데 어째서 나는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단박에 작가의 팬이 되었고 그의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도덕경>을 읽고 자신만의 세계의 첫발을 내딛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듯이 그는 <도덕경>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었을 것이다. 그냥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아니라 노자가 근본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켄 윌버의 많은 이론과 말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나는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었다. 그는 이를 세 가지 눈이라고 했다

당신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수행을 통해 진정한 눈을 뜰 떄, 세상은 당신 앞에 그 참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을 보는 진안(眞眼), 관조의 눈을 뜨라!“

 

아마 사람이 세상이나 사물을 인지할 때 후각, 청각, 촉각도 있겠지만 가장 구체적이고 신뢰할만한 감각은 단연코 시각일 것이다. 저자는 본다라는 개념과 이라는 개념의 확장적 재해석을 통해 이 세상에 다가서는 다양한 접근방법과 통찰력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미세한 사물에서 거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개인의 의식에서 종교적 영성에 이르는 영역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세 가지의 눈을 제시한다.

 

그 세 가지 눈이란 무엇인가? 육체적인 감각이나 과학기술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감각의 눈’, 이성과 논리로 대상을 인식하는 이성의 눈, 수행이나 명상으로 종교적인 영역을 체험하는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특히 그는 현대인들이 굳게 닫고 있는 관조의 눈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이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관조의 눈이 절대적임을 강조한다.

 

저자가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어떤 면에서 간곡하게 들리기도 한다. 또한 외짝 눈으로 세상의 전부를 보는 것처럼 행사하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준엄한 비판이기도 하다.

 

관조의 눈을 떠보라. 그러면 그 해답은 마치 시원한 봄날 이른 아침 수정처럼 맑은 연못 위에서 반짝이는 햇살만큼이나 명백하고 완벽하고 틀림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해답이었음을 안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무경계.jpg


켄 윌버에 관하여

번역가가 독자를 위해 준비한 장일 것이다. 번역가가 이렇게 별도의 장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이유가 뭘까. 아마 번역가가 우리 독자들이 이 위대한 사상가(?)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차원이 아닐까 싶다.

 

5.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동서양의 심리학과 철학에 빠져들었다.

같은 <도덕경>을 읽었다. 그러나 그냥 괜찮은 책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이거다라는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 전자는 나이고 후자는 켄 윌버일 것이다.

 

5. ‘세계의 지혜전통을 탐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자신이 세운 계획에 따라 하루 여덟 시간 이상 2~4권을 독파해가는 독학의 길을 걷는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에서 활동 중이던 일본 선사와 티베트 금강승 불교의 린포체로부터 지도을 받으며 영적 수행에 정진했다.

저자도 책에서 길을 찾았다.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책을 읽는 것은 항상 중요하다 생각을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책을 읽는다고 달라지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자괴감이 자주 들곤 했다. 그래서 한동안 외도를 하게 되지만 결국 다시 찾는다. 그래도 답은 책이구나라고 하면서 말이다.

 

5. 1983년 두 번째 부인 트레야와 결혼 후

항상 사람을 평가할 때 그냥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봐야하는데 나는 항상 이런 부분이 눈에 거슬린다.

윌버 역시 전세계적으로 위대한 사상가로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이혼이라니 좀 안 어울린다. 분명 그는 그가 말하는 합일의식에 이르렀을텐데 현실에서의 이혼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생기는 건 어쩔수 없나보다. 아마 나는 작가에 대해 완전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인가 보다.

 

옮긴이의 말

 

8. 한 인간의 성장 과정을 총체적으로 이토록 넓고 깊게 다룬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이제야 알았을까 하고 말이다.

 

8. <무경계>에서 윌버는 정신분석에서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게슈탈트치료에서 초월명상(TM)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에서 베단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심리학과 정신요법과 신비사상을 총망라하여 의식의 스펙트럼이라는 그의 독창적인 스펙트럼 심리학을 제창한다.

 

9. “우리는 스스로 정신과 신체 사이에 혹은 유기체와 환경 사이에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불필요하게 자신의 정체감을 제한해왔기 때문에, 이들 경계선을 하나씩 제거한다면 본래 경계없는 진정한 나(Self)’, 즉 무경계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페르소나(가면) 수준으로부터 건전한 자아, 심신일여의 켄타우로스, 초월적 주시자의 단계를 차례로 거쳐가며 궁극적으로 전 우주와 하나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그 실천법과 함께 쉽고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경계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이론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점점 빠져들었다.

 

11. “부디 이번 생에 영적 스승을 만나는 은총과 지금 이 순간에서 깨달음을 얻는 은총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을 원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채 현실에서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선명해지는 부분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명쾌히 보여준다.

 

머리말

 

15. <무경계>는 물질로부터 몸, 마음, , 영에 이르기까지 인간 의식의 접근 가능한 전 대역(full spectrum)’을 제시한 초기 책 중 하나였으며, 최선의 심리학과 최선의 영성을 통합시켜놓은 책이었다. 한 개인을 성정과 발달로 이끌어주는 동서양의 모든 접근법 중에서 최선의 것을 기술하는 동시에 잠재의식(sub-conscious)자의식(self-conscious)초의식(super-conscious), 전개아(pre-personal)개아(personal)초개아(trans-personal), ’본능에고신성이라는 하나의 완전한 의식의 스펙트럼을 보여준 책이다.

 

15. 나는 독자들에게 이런 고차원의 의식상태 각각에 도달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행법과 훈련법을 한 상 그득하게 제시하였다. 이 책을 더욱 독특하게 해준 것은 이런 접근의 완전성이었으며, 독자들이 계속해서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준 것도 그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만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의 이론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크면 이럴까 생각해본다.

 

15. 인간은 참으로 놀라운 의식의 스펙트럼 물질로부터 몸, 마음, , 영에 이르는 비상한 잠재력과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무지개 을 지니고 있다.

 

16. 그 방법들이 잘 조합되어적용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지개 내부에 있는 모든 색깔을 전체 스펙트럼 안의 모든 의식 수준을-자각하도록 함으로써 소위 깨달음’, ‘해탈’, 또는 위대한 해방이라 불리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이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16. 요컨대 <무경계>의 기본 메시지는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당신 자신의 근원적인 자각과 정체성 자체에는 본래 아무런 경계도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근원적인 정체성은 물질로부터 몸, 마음, , 영에 이르는 의식의 스펙트럼 전체에 걸쳐 있다. 달리 말하면, 가장 깊은 곳 혹은 가장 높은 곳에서 늘 그 전체를 품고 있다. 이 책은 이토록 놀라운 당신 자신의 진정한 무아적본질로 이끌어주는 간단한 지침서이다.

 

초판(1979) 머리말

 

18. 이 책은 우리가 현재의 경험을 여러 부분으로 단편화시키고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외부 세계로부터-심지어는 자기자신으로부터-어떻게 끊임없이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책이다.

 

18. 우리는 자신의 자각을 인위적으로 분할하고 구분하면서 경험과 경험, 삶과 삶이 서로 투쟁하도록 분열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주체 대 객체, 삶 대 죽음, 마음 대 몸, 안 대 밖, 이성 대 본능 들의 분별이 그러하다. 이런 폭력이 불러온 결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한마디로 하자면 불행, 바로 그것이다. 삶은 고통스러운 전쟁터가 되었다.

 

18. 그러나 우리 경험 내에서의 이런 투쟁-갈등, 불안, 고통, 고뇌-은 우리가 잘못 설정한 경계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18. 지금은 이런 갈등과 투쟁을 극복하기 위해 어디서 지원과 지도를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이다. 무엇보다, 정신분석에서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게슈탈트에서 초월명상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에서 힌두교에 이르기까지, 실로 너무나 많은 종류의 접근법들이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동서양의 그 온갖 사상과 학파들의 주장은 일견 상호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통의 원인을 다르게 진단할 뿐만 아니라,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처방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19. 요컨대 심리학자의 의견과 영적 스승의 의견이 따로 보면 충분한 설득력이 있지만, 함께 보면 서로 전적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빈번한 것이다.

 

19. 나는 이런 다종다양한 관점들을 더 큰 그림(전체)의 일부로 조망하는 일종의 통합을 시도했다. 나는 치료, 치유 및 내적 성장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들을 의식의 스펙트럼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틀로써 화해시켰다.

내가 아는한 이런 식으로 접근한 사람은 없었다. 이것은 책 출판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동기들의 문제와 같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이다. 이 작가도 결국은 이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이론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그 방대함에 놀라기도 하지만 이런 새로운 시각으로 인해 책이 나올수 있음을 다시한번 깨달을수 있었다.

 

19. 이런 접근은 서양의 심리학과 심리치료에 있어서 세가지 주요 방향의 핵심을 수용하고 통합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첫 번째 방향은 인지-행동주의(cognitive behaviorism)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포함하는 전통적 자아심리학이고, 두 번째는 생명에너지학과 게슈탈트 같은 인본주의 심리학이며, 세 번째는 정신통합과 융 심리학 및 신비사상 전반과 같은 초개아심리학이다. 이런 식의 포괄적인 관점을 제시한 책은 내가 알기론 이 책 이외에는 없다.

엄청난 자신감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실인 것 같다.

 

19. 이 책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세우게 된 여러 경계가 어떻게 해서 우리의 의식을 한정-분열, 갈등, 투쟁-시키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경게와 한계가 다수 존재하고 있으며, 그 경계들을 통합할 때 의식의 스펙트럼이 형성된다. 그리고 다양한 치료법들이 이 스펙트럼의 각기 다른 수준에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20. 각각의 치료법은 의식 내부의 특정 경계 또는 매듭을 해소하려는 시도들이다. 수많은 치료법을 비교, 검토해보면 스펙트럼 내의 이곳저곳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유형의 경계들이 드러난다. 또한 이런 장벽을 어떻게 허물고 그것들 너머로 성장해갈 수 있을지도 알게 된다.

 

20. 일반 독자들 편에서는, 이 책은 내적 성장과 변용에 관한-자아심리학, 인본주의심리학, 초개아심리학을 포괄하는-개인적인 입문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각각의 접근법들이 서로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여러 접근법을 스스로 체험해보도록 구체적인 실천법도 소개할 것이다.

내가 변경연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하나였다. 이 책이 나에게 주는 감동은 실로 엄청났다. 최근의 책 슬럼프를 단번에 극복시켜주는 책이었다. ‘그래도 답은 책이다라는 결론까지

 

1장 서론 : 나는 누구인가?

 

25. 미국의 가장 위대한 심리학자였던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가 이성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일상적 의식은 의식의 한 가지 특수한 형태에 불과하다. 이 일상적 의식의 주변에는 아주 얇은 막으로 격리되어 있는 이것과는 전혀 다른 의식 형태가 잠재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의 일상적 자각, 마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지의 광대한 의식의 대양에 둘러싸여 있는 작고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섬과 같다.

 

25. 모든 무한한 우주 속의 유일한 존재! 모든 것을 사랑하는 완벽한 유일자, 천상의 환희라고 부를 만한 놀라운 순간과 더불어 광명이 찾아왔다. ..... 우주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명으로써 재정렬되고 재결합하는 것처럼 보였다. - 버크 0

 

26. 그 안에서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자신과 온 우주가, 높든 낮든 신성하든 세속적이든, 모든 세계와 근본적으로 하나라고 느낀다는 점이다. 이때의 자기정체감은 몸과 마음이라는 협소한 한계를 훨씬 넘어 확장되며, 우주 전체를 감싸 안는다. 버크가 이러한 자각상태를 우주의식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이것을 지고의 본성이라고 부른다. ‘지고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온 우주 그 자체와의 사랑으로 가득 찬 포옹을 우리는 합일의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26. 거리의 길들도, 교회도, 사람들도 내 것이었다. 하늘이, 해와 달과 별들이,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이었다. 나만이 그것을 보고 즐기는 유일한 존재였다. 나는 어떤 사회적 통념도, 어떤 속박도, 어떤 구분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든 통념과 구분조차도 내 것이었다. 나는 그 모든 보물의 주인이자, 보물 그자체였다. 지금까지 나는 온갖 소란 속에서 타락했고, 이 세상의 더러운 욕망을 배웠었다. 하지만 이제는 배운 것을 모두 버리고, 다시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좋을 만한 본래의 어린이로 돌아가리라 T. 트래헌 -

내가 꼭 한번 느껴보고 싶은 것들이다. 정말 이렇게 되면 기분은 어떨까? 도를 깨친다는 것, 해탈한다는 것. 과연 인간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약간은 희망적이다.

 

27. 이런 지고의 본성경험이 워낙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기 때문에, 인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교리를 세우고 거기에 영원한 철학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모든 주요 종교의 중심에 이런 유형의 경험과 지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대단히 많다. 따라서 종교들의 초월적 통합또는 궁극적 진리에 관한 합의라는 우리의 주제는 충분한 정당성을 갖추고 있다.

 

27. 이와 같은 유형의 자각, 합일의식또는 지고의 본성이야말로 모든 지각 있는 존재의 본질이자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를 한계짓고 여러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본래 순수하고 비이원적인 우리의 의식이 서로 다른 경계와 정체성을 가진 수준들위에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다양한 방식은, 기본적으로 이런 수준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27. “나는 누구인가?”-아마도 문명의 여명기로부터 인류를 괴롭혀왔을 이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에게 가장 성가신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진정성 있게 접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본다. 이 물음에 정말 관심 있는 사람은 인생에 대한 태도나 관점이 달라진다.

 

28. 아마도 당신은 스스로 파악하고 있는 자신의 특성들, 라는 정체감의 토대로 여겨지는 것들 착하다/악하다, 가치있다/쓸모없다, 과학적이다/시적이다. 철학적이다/종교적이다 등등-을 묘사할 것이다. 예컨대 나는 이러저러한 재능을 타고난 특별한 사람이다. 친절하지만 때로는 잔인하고, 온화하지만 때로는 공격적이다. 아버지이자 법조인이고, 낚시와 야구를 즐긴다....”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의 느낌과 생각의 목록은 계속 채월질 것이다.

 

28. 나는 이러저라한 사람이다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8. 마음속에 있는 내적 경험의 세계에다가 일종의 정신적인 선이나 경계를 긋는다. 그런 다음 그 경계의 안쪽에있는 모든 것을 라고 느끼거나, ‘라고 부른다. 반면에 그 경계 밖에있는 모든 것을 내가 아닌 것으로 느낀다. 다시 말해, 당신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그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달려 있다.

우와~ 이런 식의 접근을 하다니 놀랍다. 가만 생각하니 진짜 경계를 긋고 있다.

 

28. 당신은 사람이지 의자는 아니다. 그런 앎이 가능한 이유는, 당신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과 의자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자가 아니다. ‘사람과의 동일시가 가능해진다. 만약 당신이 키가 사람이라면, 지금 당신은 큼과 작음 사이에 정신적인 선을 긋고 자신을 편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저것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나는 이것이지 저것은 아니다라고 느낀다. 즉 정체성이란 자신을 이것과 동일시하고, ‘저것과는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29.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나인 것내가 아닌 것사이에 경계선을 긋게 된다.

 

29. 소위 정체성의 위기, 그 선을 어디에 어떻게 그을지 결정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요컨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당신은 어디에 경계를 설정했는가?”라는 의미인 것이다.

 

29.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모든 답은 정확히 나인 것내가 아닌 것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기본적인 절차에서 비롯한다. 전반적인 경계선이 그어진 후에 나오는 답은 과학적, 신학적, 경제적으로 대단히 복잡할 수도 있고 무척 단순하거나 모호할 수도 있다. 어쨌든 가능한 모든 답은 처음 그은 경계선에 달려 있다.

 

29. 이 경계선에 관해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쉽게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선은 다시 그어질 수 있다.

점차 확장, 세분화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렇게 변경될 것이다.

 

29. 경계선의 가장 혁명적인 재작도 또는 변경은 지고의 본성체험에서 일어난다. 그 지점에서는 내 정체성의 경계가 온 우주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경계선이 전부 없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 자신을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와 동일시한다면, 그곳에 더 이상 안팎이 없으므로 그 어디에도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30. 사람들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가장 공통된 경계선은 유기체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피부경계선이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나 아님의 경계일 것이다.

 

30. 우리는 일단 피부를 /나 아님의 경계로 인식한 후에, 라는 유기체의 내부에 좀더 의미 있는 또 다른 경계를 긋기 시작한다.

 

31. “당신은 자신이 이라고 느끼는가, 아니면 몸을 갖고 있다고 느끼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동차나 집 또는 다른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몸은 이라기보다는 나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의 것은 정의상 /나 아님의 경계선 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라는 유기체 속에서도 특정 부분을 좀더 친밀하게 느끼며 강하게 그것과 동일시한다. ‘진정한 나로 느껴지는 그 부분을 우리는 흔히 마음, 정신, 에고, 성격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31. 생물학적으로 몸과 마음, 정신과 육체, 에고와 육신을 서로 떼어놓거나 근본적으로 갈라놓을 어떤 근거도 없다. .... 실제로 심신의 분리와 그에 수반된 이원론은 서구문명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31. ‘심리학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 단어 자체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마음이지 이 아니라는 편견을 보여준다. 성 프란체스코조차 자신의 몸을 불쌍한 나귀형제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나귀나 노새를 타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제 몸 위의 어딘가에 올라타있는 듯 느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31. 마음과 몸 사이의 경계선은 분명히 출생 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묘한 것이다. 그러나 성장과정을 통해 / 나 아님의 경계가 그어지고 그것이 더욱 강화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점차 자신의 몸에 대하여 모순된 감정을 품게 된다.

 

32. 몸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많은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 성적희열, 음식의 맛, 황혼의 아름다움 등을 느끼는 것은 바로 몸의 감각들이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보면, 몸은 급작스러운 통증, 지긋지긋한 만성병, 고문과도 같은 암투병 등 무서운 공포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32. 어린아이에게 몸은 쾌감의 유일한 원천이다. 하지만 몸은 고통의 최초 근원이자 부모와 갈등을 빚게 하는 원흉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몸은 이유를 알수 없지만-부모들이 시종 경계하고 귀찮아하는 대소변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대소변에다 콧물이라니, 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이 몸과 직결되어 있다. 어디에 선을 긋을 것인지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33. 정신영역 중에서도 일부(페르소나)하고만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면, 자연히 그는 내가 아닌그 나머지 영역은 실제로 이질적이고 이상하고 두려운 대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또한 그는 스스로 원치 않는 그 영역(그림자)을 의식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한 시도로써 자신의 영혼을 재작도하려 든다.

 

34. 초개아(trans-personal)란 한 개체의 측면을 넘어선어떤 과정이 그의 내부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34. 이런 경험들의 공통적 특징은 /나 아님의 경계가 유기체의 피부 너머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개아적 경험이 어떤 측면에선 합일의식과 유다하다고 하여 그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합일의식에서는 그의 정체성이 우주 만물과 일체가 되지만, 초개아적 경험에서는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다만 유기체의 피부 너머로 확장될 뿐이다. 우주 만물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유기체에 국한된 정체성도 아니라는 뜻이다.

 

35. 한 사람에게 가용한 정체성 수준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 수준들은 그저 이론적인 가설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검정해볼 수 있는 관찰가능한 실재이다. 그리고 이렇듯 서로 다른 수준들을 감안할 때, ‘의식이라는 현상-익숙하지만 여전히 신비한-은 마치 수많은 정체성 수준 또는 대역으로 구성된 무지개 모양의 스펙트럼처럼 보인다.

 

35. 스펙트럼 아랫부분, 즉 초개아적이라고 불리는 영역으로 내려가면 경계선은 점선이 되고, 합일의식 수준에선 완전히 사라진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궁극의 수준에선 /나 아님의 경계 자체가 사라져서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가 되기 때문이다.

 

38. 스펙트럼의 어느 수준에 있느냐에 따라 정체성 경계는 서로 다른 곳에 그어지기 때문이다. ....경계선은 잠재적인 전선이기도 하다. 하나의 경계선은 두 개의 대립된 영토, 전투 가능성이 있는 두 진영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예컨대 유기체 수준에 있는 사람은 환경을 적으로 보게 된다. 그에게 환경은 이질적인 것이자 자신의 생명과 안녕을 위협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에고 수준에 있는 사람은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도 똑같이 이질적인 대상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그의 갈등과 불화는 유기체 수준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경계선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적 갈등과 전쟁의 전선도 바뀌었다. 그에게 있어 몸은 이미 적진으로 넘어가 버렸다.

 

38. 중요한 점은, 자신의 영혼에 경계선을 그음과 동시에 영혼의 전쟁터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39. 자신의 내면을 깊숙한 곳가지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양한 심리학 체계와 종교 체계를 마주하면서, 도무지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어리둥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 예컨대 선불교에서는 자아을 잊으라고, 초월하라고, 혹은 자아의 정체를 꿰뚫어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자아를 강화하고, 공고히 하고, 확립시키는 일을 돕는다.

 

40. 다양한 심리학파와 종교사상들이 한 인간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수준에서 상보적으로 접근하고 있었음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또한 스펙트럼의 주요 대역 중 어떤 수준에서 뚜렷한 목표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심리학과 종교라는 방대한 분야을 대여섯 집단으로 크게 나눠볼수도 있게 된다.

이제야 좀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정말 나도 헷갈렸다. 이 책을 읽는 순간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의 엄청난 통찰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이 책은 출발했다.

 

40. 정신분석과 종래의 심리치료 기법들 대부분은 의식과 무의식적 측면들 사이의 근본적인 분열을 치료하여 환자로 하여금 마음 전체와 만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치료법들은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재통합시켜서 강하고 건전한 에고, 말하자면 정확하고 받아들일만한 자아상을 만드는데 목표를 둔다. 그러나 인본주의적 치료의 대부분은 그 목표가 대개 이 지점을 넘어서 에고신체사이의 분열을 치료하는 데 있다. 즉 정신과 육체를 재통합시켜서 전 유기체를 드러내는 데 목표를 둔다. ....마음이나 에고로부터 심신일여의 전유기체로 정체성을 확장시킬 경우, 유기체 전체의 엄청난 잠재력이 해방되면서 그 사람에게 주어진다.

 

40. 좀더 깊이 내려가면 선불교나 베단타 힌두교 등이 있다. 이들은 유기체외부환경간의 분리를 치료해서 온 우주와의 정체성, 즉 지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목표를 둔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전부 합일의식 수준을 목표로 한다.

 

43. 각기 다른 잠재력과 문제를 갖고 있는 스펙트럼 상의 여러 수준에 익숙해지면, 자기 이해와 자기 성장을 위한 여정에서 스스로 어디를 지향해야 할지 방향 설정이 용이해질 것이다. 현존하는 문제나 갈등이 어느 수준에서 연유하는지를 더욱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되고, 또한 자신이 어떤 잠재력과 수준에 접촉하고자 원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성장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장 적합한 치료법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기준 설정이다. 방향이 명확해진다. 이런 관찰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자 역시 명상과 참선을 했다고 한다. 명상에 대한 배움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하라리때부터 기회가 된다면 위빠사나 명상을 하려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더 간절해진다.

 

43.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지평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스펙트럼 상의 하강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스펙트럼에서 하나의 수준을 하강할 경우, 실제로는 자신의 영혼을 재작도하여 그만큼 영역을 확장시킨 것이다. 따라서 자기 성장이란 재분배, 재구역화, 재작도이며, 자기 자신의 좀 더 깊고 넓은 수준을 인식하고 포괄해가는 풍요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44. 합일의식만이 진실로 우리가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유일한 수준이기 때문에 이런 하강은 실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2장 그것의 절반

 

45. 삶에 왜 대극이 생겨나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왜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것이 한 쌍의 대극 중 어느 한쪽인 것일까? 왜 모든 결정은 대극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왜 모든 욕망은 대극에 기초해 있는 것일까?

솔직히 별로 생각해 본적 없다. 고민한 적은 있었지만 대극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45. 당신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과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한 쌍의 대극 중 한 극이라는 사실을 주목해보라. .... 논리학은 진실대 허위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인식론은 외관 대 실재, 존재론은 존재 대 비존재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마치 거대한 대극의 집합체인 것처럼 보인다.

 

46. “자연은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고 소로우는 말한 바 있다. 자연은 옳음과 그름이란 대극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이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6. 자연세계에서도 당연히 삶과 죽음이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세계에서와 같은 끔찍한 면을 가진 것으로로는 보이지 않는다. 늙은 고양이는 죽음이 임박했다고 새서 공포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는다....병든 울새는 버드나무 가지에 편안히 앉아 황혼을 바라본다. 그러다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조용히 땅에 떨어진다. 인간이 맞이하는 죽음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가.

죽을 때는 이런 동물들처럼 죽고 싶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죽음의 방식과 다른 이유는 죽는 이유가 달라서이지 않을까. 인간만큼 욕망이 없으니 그럴수도 있을 것이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많으니 그 고통이 동물들과 다르지 않을까.

 

49. 결정한다는 것은 선택할 것과 선택하지 않을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쾌락적인 것과 고통스러운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둘 중에서 쾌락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50. 경계를 긋는 순간 대극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극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곧 경계선 긋기과정이기 때문인 것이다.

 

51. 아담이 선과 악이라는 대극의 차이점을 알아차리게 되자, 즉 하나의 결정적인 경계를 설정하자, 그의 세계는 산산조각이 났다. 아담이 죄를 짓는 순간, 그가 창조하려고 그토록 애썼던 대극의 세계 전체가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고통/쾌락, /, /죽음....갈등하는 대륵 전체가 인류를 급습해왔다.

 

52. 경계를 확고하게 다질수록 전쟁터 역시 점점 더 확고하게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처해 있는 곤경이다. 쾌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어쩔 수 없이 고통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선을 추구하면 할수록 악에 대한 강박관념은 더욱더 강해진다. 성공을 추구하면 할수록 실패를 더욱더 걱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삶에 집착할수록 죽음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무언가에 가치를 두면 둘수록 그것의 상실이 두려워진다. 다시말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 대부분은 경계로부터 비롯된, 경계가 만들어낸 문제라는 것이다.

 

53. 의학과 농업의 명백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세기에 걸쳐 긍정적인 것은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해 온 결과로서 인류가 더 행복하고, 더 만족스럽고, 더 평화롭게 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훨씬 더 많다.

 

54. 모든 대극은 암묵적인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다. 양극의 차이점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그 양극들은 어느 쪽도 다른 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서로 완전하게 분리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렇게 볼 대 이 세상에 밖 없는 안’, ‘아래 없는 위’....‘죽음없는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61. 중요한 점은, 우리가 자연 속에서 발견한 모든 선은 단지 대극을 구분 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눌 수 없는 일체로서 둘을 함께 묶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은 경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또는 논리적인 것이든, 하나의 선은 그저 나누고 구분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묶고 결합시킨다. 반면에 경계는 순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경계는 실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척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실세계에는 은 있지만 실질적인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점이다. 결국 경계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허구임을 알아야한다.

 

62. 안쪽은 바깥쪽과 공존한다는 점을 망각할 경우, 선은 그저 나누기만 할 뿐 통합시키지 않는다고 상상할 경우, 그 선은 경계가 되고 만다. 따라서, 선을 긋는 것은 괜찮지만 그 선을 경계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다.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고통으로부터 쾌락을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64. 대극을 분리시켜놓고 긍정적인 쪽으로의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초월하면서 감싸 안는 하나의 토대를 발견해냄으로써 대극을, 긍정과 부정 모두를 통합시키고 조화되게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바로 그 토대가 합일의식이다. 해방이란 부정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극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점에 유념하도록 하자.

 

66. 존재의 조건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만물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66. 대립과 투쟁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서로 투쟁하고 있는 양극 중 긍정적인 쪽을 취해 진보시키는 재주 부리기가 아니다. 모든 경계를 허무는일이다. 대극의 투쟁은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생긴 하나의 증상이며, 그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경계란 본래 환상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67. 경계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볼 때, 우리는 지금 여기,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보았던 우주, 곧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 양극의 조화, 음과 양의 화음, 진동하는 우리 존재의 즐거운 유희를 목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양극이 실은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불화는 조화로 녹아들고, 투쟁은 춤이 되며, 오랜 숙적은 연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주의 절반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과 친구가 된 자리에 있게 된다.

개인의 문제는 이런 식의 인식이 중요한 건 알겠다. 하지만 국가대 국가, 이념대 이념은 어떻게 봐야할까. 남과 북은 지금 서로 대립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도 대극이라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적용할수 있을까

저자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3장 무경계 영토

 

69. “이 우주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경계는 실재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를 작도하고 편집한 방식의 선물, 즉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영토를 지도화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둘을 혼동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된다. 단순히, 양극 사이에 실은 아무런 경계도 없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이 우주 어떤 곳에도 사물이나 생각 등을 구분짓는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70. 모든 경계는 기술적인 힘과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는 동시에 소외, 단편화, 갈등도 일으킨다. 무언가에 대한 통제력을 얻기 위해 경계를 설정할 경우, 동시에 그 통제하려는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소외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단편화로의 타락원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71. 수를 세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계 위에 세워진 또 다른 경계, 즉 메타경계였다.

 

72. 이 새롭고 강력한 경계가 기술의 발전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이와 동시에 광범위한 소외와 단편화 역시 가져왔다.

이것은 단지 경계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발전이 있다면 하나의 쇠퇴와 갈등이 있고 그 발전으로 인해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어버렸다. 스마트폰, 자동차, 컴퓨터 등 이들이 우리에게 끼친 편한함과 발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로 인한 부작용도 우리는 감수해야한다.

 

73. 17세기 과학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전혀 새롭고 독자적인 경계를 도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메타 경제 위에 또 하나의 새로운 경계를 끌어올렸다. 그들은 대수학으로 알려져 있는 메타-메타 경계를 발명해낸 것이다.

 

74. 간단히 말해, 첫 번째 경계는 범주를 만들어낸다. 메타 경계는 수라고 부르는 범주의 범주를 만들어 내고, 3의 메타-메타 경계는 변수라고 부르는 범주의 범주의 범주를 만들어낸다.

 

74. 초기 과학자들은 대수학을 사용함으로써 여러 요소의 계산과 측정뿐만 아니라, 이론, 법칙 및 원리로 표현되는 측정치들 사이의 추상적인 관계를 밝히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이들 법칙은 첫 번째 유형의 경계로 분할된 모든 사물과 사상을 어떤 의미에선 마치 지배하거나 통제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항상 착각을 하지. 어쨌든 피타고라스 때문에 나는 학창시절에도 머리가 아팠다. 더군다나 뉴턴같은 사람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이런 경계가 없었으면 더 재미있는 학창시절이 되지 않았을까.

 

74. 새로운 유형의 메타-메타 경계는 새로운 지식은 물론이고 엄청난 기술력과 정치적인 힘을 가져다 주었다. .... 아담은 별들에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었고, 피타고라스는 별들을 셀 수 있었지만, 뉴턴은 별들의 무게를 잴 수 있었으니 그 상황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라.

 

75. 각각의 경계는 이전의 경계 위에 좀 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형태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첫째로, 우리는 분류를 위한 경계를 긋고 서로 다른 사물과 사건들의 차이를 인식한다.

둘째로, 분류된 요소들 중에서 측정가능한 것들을 찾아낸다. 이 메타 경계는 질을 양으로, 범주를 범주의 범주로, 요소를 측정치로 바꾸어 놓는다. 셋째로, 두 번째 단계의 여러 숫자와 측정치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그것을 전부 포함하는 대수공식을 만들어낸다. 이 메타-메타 경계는 측정을 결론으로, 수를 원리로 바꿔둔다.

 

75. 자연에 대한 이런 지식과 힘, 통제력은 그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경계는 언제나 양날의 칼이며, 그 칼로 잘라낸 자연의 열매는 필연적으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것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얻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해내야만 했다.

 

76. 과학계에는 두 번째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혁명이 1925년경 마침내 이를 때까지 아무도 이 혁명이 고전 물리학, 최초의 경계와 메타 경계와 메타-메타 경계를 뛰어넘는 신호가 되리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다. 고전적 경계로 이루어진 세계 전체가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에딩컨, 도보로이, 보어, 그리고 하이젠베르크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무너져내린 것이다.

다시 한번 저자의 지식의 깊이에 대해 놀랐다. 단순히 심리학으로 접근할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수와 물리학으로 설명을 했다. 오히려 이런 연구는 말로 하는 심리학적 접근보다 우리에게 너무나 쉽게, 한방으로 다가온다. 이런 것이 인문학적 사고 아니겠나 싶다.

 

77. 그들은 이 우주를, 서로 분리된 사물둘이 맹목적으로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당구공처럼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뉴턴의 당구대처럼 보였다. 그리고 입자물리학의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할 때 역시 양자, 중성자, 전자에도 당연히 기존의 뉴턴의 법칙이나 그와 유사한 법칙들 모두가 그대로 적용되리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충격은 어느 날 장갑을 벗으면서 거기에 손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가재의 앞발을 본 것에 필적할만한 것이었다.

 

78. 모든 현실의 궁극적인 재료인 원자 차원의 것들의 위치를 설정할수 없는 것은, 한마디로 그것이 경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분명한 경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측정할 방법조차 없다.

오히려 과학이 경계를 허무는 꼴이 되어버렸다.

 

78. 이처럼 궁극적 실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완전하게 측정될 수 없다는 사실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라 불리며, 그것은 고전물리학을 내리친 마지막 치명타였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그것을 딱딱한 틀의 붕괴라고 불렀다. 낡은 경계들이 붕괴된 것이다.

 

79. 원자이하의 소립자들은 아무런 경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메타 경계도, 측정도 있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어떤 정교한 메타-메타 경게와 법칙들도 있을 수 없었다.

 

79. ‘궁극적 실체자체가 여전히 무경계 상태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물리학자들이 이제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옛 물리학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을 쉽게 알 수 있다. 옛 물리학은 자신이 그은 메타 경계와 메타-메타 경계의 성공에 너무나 도취해서, 경계 자체의 본질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80. 고전 물리학자들은 분리된 사물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달시켜왔지만, 뜻밖에도 분리된 사물이란 것이 아예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80. 물리학자 에딩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과학이 가장 멀리 발전해간 곳에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끌어낸 것은 결국 우리가 자연에 부여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미지의 해변에서 이상한 발자국 하나를 발견했고, 그 발자국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심오한 이론들을 하나씩 차례로 개발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발자국을 만든 존재를 재구성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보라! 그 발자국은 우리자신의 것이었다.”

허무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분명 그 과정에 우리 인간이 성장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 부작용도 있겠지만

 

81. 진정한 영토로서의 세계는 당구공의 집합체가 아니라, 단일하고 거대한 우주장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천의무봉의 우주;라고 불렀다.

 

81. 상호의존하는 이 연결망은 모든 모서리를 닳아 헤지게 하지 않고는, 그 어느 한 부분도 조각내고 고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82.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것이다(多卽一 一卽多)”

예전에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역시 깊은 뜻은 모르나 그 말에 담긴 심오한 뜻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 같다.

 

83. 본질적으로 현대과학과 동양사상의 커다란 유사성은 양쪽 모두 실재를 경계나 분리된 사물로서가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패턴의 비이원적 네트워크, 하나의 거대한 원자이자 무경계의 천의무봉으로 보고 있다는데 있다.

 

83. 동양인들에겐, 인간이 만든 경계투성이 지도 밑에 잠복해 있는 전체성을 시사하는 오직 하나의 길, , 법만이 있었다. 실재가 비이원적이고,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동양인은 모든 경계가 환상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84. ‘眞如라 불리는 그 본성에 관해서는 어떤 예측도 불가능하다. 이 보편적이고, 무분별적이며, 不可知진여’, 그것이 유일한 실재이다.

 

85. 스즈키 선사는 공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공은 다양성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산이 있고, 벚꽃이 만발하며, 가을밤 달빛은 휘영청 밝게 빛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개별적 존재 이상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더욱 깊은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그것들은 자신의 아닌 것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된다.”

동양적 사상은 관계론이라는 말이 새삼 크게 느껴진다.

 

85. 실재가 무경계라고 하는 통찰의 진수는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단순성 때문이다.

 

87. 당신의 손은 분명 머리와 다르고, 머리는 다리와 다르고, 다리는 귀와 다르다. 하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데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신체가 다양한 부분들로서 스스로를 표현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라는 것이다.

 

87. 모든 경계는 본래 있지도 않은 분리(와 결국은 갈등)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순전히 환상이며, 사물과 사건 사이의 경계뿐만 아니라 대극들 간의 경계도 궁극적으로 철저한 속임수라는 것이다.

 

88. 차라리 무경계는 일상적이며 구체적인 삶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삶과 경험 그리고 자신의 실재를 제한시켜왔기때문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모든 경계선은 전선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동양적-그리고 서양의 신비사상적-해방법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을 경계로부터 구해내어 그 전장의 뒤엉킨 갈등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그들은 투쟁 자체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피로 피를 닦아내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은 단지 투쟁을 만들어낸 경계가 애초부터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따라서 투쟁은 해결(solved)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해소(dissolved)된다.

 

88. 요컨대, 실재가 무경계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곧 모든 갈등이 환상이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이런 궁극적인 지혜를 열반, 해탈, 해방, 깨달음이라고 부르며, 이 이해가 곧 양극으로부터의 해방, 분리라는 마법으로부터의 해방, 내 안의 거짓 정체성이란 사슬로부터의 해방이다. 이 점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통상 합일의식이라고 불리는 무경계 자각을 탐구할 준비가 된 셈이다.

매트릭스의 키아누 리브스처럼 빨간약을 먹을 준비가 되었다.

 

4장 무경계 자각

 

89. 합일의식이란, 진정한 실재에는 경계가 없다는 단순한 자각이다..... 합일의식이란 바로 그것을 깨닫는 자연스러운 자각상태이다. 한마디로, 합일의식이 곧 무경계 자각이다.

 

89. 말은 쉬워 보이지만 무경계 자각이나 합일의식을 올바로 논하는 것은 물론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논의의 매개체인 우리의 언어자체가 경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단어와 상징 그리고 사고 자체는 실제로 경계 이외의 무엇이 아니다.

경계의 언어로 무경계를 논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합일의식 전까지는 괜찮겠지만 열반, 깨달음의 경지를 언어로 설명할수 있을까?

 

90. 우리는 그 경계를 강화하고 방어하려 안정되고 안전한 것으로 만드는 데 오랜 세월을 투자해왔다. 이 경계야말로 우리에게 분리된 나라는 존재감을 부여하는 바로 그것이며, 우리가 늙어 추억만을 간직한 채 무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지막으로 포기하게 될 바로 그것이다. 곧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그은 최초의 경계이자 우리가 제거할 마지막 경계이다. 이 경계야말로 우리가 만들어 세운 모든 경계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최초의 것이다.

 

91. 최초의 근원적 경계란 경험자경험된 세계사이의 간극으로 볼 수 있다. 근원적 경계의 안쪽에는 주체, 생각하는 자, 느끼는 자, 보는 자인 가 있고, 그 반대쪽에는 외부 대상의 세계, 나로부터 분리된 낯선 환경, 나 아닌 것이 존재한다.

 

93. 우리는 최초의 경계를 찾아내서 그것을 제거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엄청난 오류이거나 적어도 어마어마한 시간낭비다.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파괴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환상을 뿌리째 뽑아 근절시킬 수는 없다. 환상 그 자체를 이해하고 꿰뚫어볼 수 있을 뿐이다.

 

96. 듣는 자를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듣는 자가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96. 어떤 노선사는 깨달음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원의 종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거기엔 종도 없고 나도 없었다. 단지 종소리만 있을 뿐

 

97. 이것은 보는 자인 내가 광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인 내가 지금 나타나 있는 모든 광경과 한 덩어리임을 의미한다. 소위 보는 자보여진 사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99. 생각하는 자가 그 생각과 하나이고, 맛보는 자가 그 맛과 하나이듯, 느끼는 자도 그 느낌 이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다. 현재의 느낌과 분리된 느끼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이렇게 해서 세계와 떨어져 분리된 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피할 수 없는 결론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을 경험과 분리된 경험자라고 상상해왔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찾으려는 순간, 그것은 경험 속으로사라져 버린다.

이런 어려운 선문답같은 내용을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이 실로 대단하다. 저자 또한 대단하지만 이런 어려운 말을 쉽게 우리말로 번역한 번역가도 대단하다.

 

100. ‘는 곧 나의 경험이고, 또한 내가 경험한 세계이기도 하다. 내가 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새를 보는 경험 그것이다. 내가 책상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천둥소리를 드는 경험 그것이다. ‘라고 부르는 내적 감각과 세계라 부르는 외적 감각은 하나의 동일한 감각이다.

 

101. 고통이 있을 뿐, 고통받는 자는 없다.

행위가 있을 뿐, 행위하는 자는 없다.

열반이 있을 뿐, 열반을 구하는 자는 없다.

길이 있을 뿐, 그 길을 가는 자는 없다.

 

101.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곧 우주임을 깨달을 때 내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외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104. 결코 대상화하거나 개념화 할 수 없는 절대적 주체성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지배되지 않으며, 주체와 객체를 넘어서 가며, 한 개체 안에 살지만 그 개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105. 경계 없는 언어는 이미 언어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합일의식은 논리적, 형식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신비가는 대단히 역설적이거나 모순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운명에 처해 있는 셈이다. 문제는 어떤 언어 구조든, 포크로 바닷물을 퍼올릴 수 없듯이, 합일의식의 본질을 포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5장 무경계 순간

 

113.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깨달은 현자들이 합일의식은 시간의 산물, 즉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무시간적인 것이라는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진정한 실재가 우리를 교묘히 피해 다니도록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영원성의 본질을 철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114. 영원과의 만남이 그토록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원이란 단어 그 자체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영원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전적으로 시간 밖에 존재하는자각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순간이란 과거도 미래도, 이전도 이후도, 어제도 내일도, 탄생도 죽음도 알지 못하는 무시간적인 순간이다. 합일의식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무시간적 순간속에서 무시간적 순간으로서 산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오염만큼 신성한 빛을 철저히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도 없기 때문이다.

 

115. 우리들 대부분은 과거와 미래가 모호한 어떤 것으로 사라져가는 순간들, 참으로 시간 너머에 너무나 멀리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과 절정의 순간들을 알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황혼을 바라보며, 바닥을 알 수 없는 수정같이 검은 연못 위에서 유희하는 달빛을 바라보며,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황홀한 포옹을 나누며 넋을 잃고 나 자신과 시간으로부터 표류해 떠다닌 순간, 세찬 빗속을 통해 반향하는 천둥소리 후의 고요함에 문득 사로잡힌 순간.... 이와 같은 무시간성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듣고 보니 그러네. 이런 순간들은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충 무슨 느낌인지 감이 잡힌다.

 

115. 이 모든 경험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신비가는 현재순간에 완전히 몰입한 경험 속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 이런 현재순간으로 깊숙이 발을 내딛는 것이 곧 영원으로 뛰어드는 것이고, 거울을 통과해 불생불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118. 시간 속의 삶은 고통 속의 삶이다..... 우리의 걱정은 언제나 과거 또한 미래에 걸쳐 있다.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수많은 행동을 후회하며, 그로 인한 미래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과거와 미래! 이 둘이 우리을 고뇌라는 족쇄로 채우고 있음은 분명하다.

 

119. 인간은 현재에 살지 않고 과거를 비탄하거나, 자신을 둘러싼 풍요로움에 무관심한 채 습관적으로 눈을 뒤로 돌리거나 미래를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한다. 인간은 시간 너머 현재 속의 자연과 함께 살 때까지 행복할 수도 강해질 수도 없으리라.

과거는 당연히 과거이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그 기억과 아픔 때문에 나를 괴롭힌다. 아무리 망각의 선물을 가졌지만 강렬한 기쁨과 슬픔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미래 때문에 괜한 고민을 한다. 현재의 순간.

 

120.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에는, 달리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미래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미래와 대비되는 현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순간이다. 간단히 말해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시간을 시간으로써 부수려고 애쓰지만 그렇게 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비가들은 환상을 깨부수라고 하지 않고, 다만 환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만 권고하는 것이다.

 

122. 집이 삐걱대는 소리, 자동차 소리 등 이 모든 소리현재의 소리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당신은 과거의 소리도, 미래의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당신이 듣는 유일한 소리는 오직 현재이다. 당신은 과거나 미래를 듣고 있지 않으면 들을 수도 없다.

명확하게 이해된다. 글을 쓸 때는 이런 명쾌한 설명이 필요하다.

 

122. 모든 소리가 오직 현재의 소리인 것과 똑같이, 모든 맛은 오직 현재의 맛이며, 모든 냄새도 현재의 냄새이고, 모든 광경 역시 현재의 광경이다. 당신은 과거나 미래의 어떤 것도 만지거나 보거나 느낄 수 없다. 다시 말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자각 속에는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다.

 

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시간, 그 중에서도 지나간, 자신의 과거사, 예전에 존재했던 사물들을 모두 자각하고 있다는 압도적인 인상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123. 그 답은 기억이다. 과거는 직접 보거나 느끼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생각해낼 수는 있기 때문이다.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보증해주는 것은 기억뿐이다. ..... 따라서 나는 과거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더라도 기억이 실제 과거에 대한 지식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비가들은 바로 여기서 내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내가 과거를 생각할 대 실제로 알고 있는 것 모두는 특정 기억일 뿐이며, “그 기억 자체도 현재 경험이라고 신비가들은 말한다. ....... 당신은 전혀 진정한 과거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대한 현재의 흔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124. 이와 같이 내가 아는 것은 실질적인 과거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과거에 대한 기억일 뿐이며, 그런 기억들은 오직 현재 경험으로서만 존재한다. 게다가,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역시 그것은 현재의 사실이었다. 따라서 어떤 시점에서 보더라도 나는 결코 실질적인 과거를 직접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결코 미래를 알지 못한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단지 예전이나 기대일 뿐이며, 그것들도 두말할 필요 없이 현재경험의 일부이다. ‘기억으로서의 과거예견의로서의 미래가 모두 현재의 사실이라는 점은 모든 시간이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124. 단테가 왜 모든 시간이 곧 지금 이 순간이다

 

125. 우리는 영원이란 영토에 경계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두어버린다.

 

126. 우리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낀 샌드위치가 되어 모든 면에서 제한된다. 현재는 한정되고, 담으로 둘러싸이고, 제한된다. 열린 순간이 아니라 짓눌린 순간, 압착된 순간, 즉 그저 스쳐지나갈 뿐인 덧없는 순간이 된다.

 

126. 기억으로서의 과거가 언제나 현재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뒤쪽에 있는 경계는 무너진다. 지금 이 순간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마찬가지로, 예견으로서의 미래가 언제나 현재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앞쪽에 있는 경계도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은 더 이상 가두어진 순간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채울 만큼 확장된다. 그리하여 스쳐가는 현재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 펼쳐진다. 이것을 기독교 신비가들은 눙크 스탄스(nunk stans)라고 부른다. 눙크 플루엔스, 스쳐가는 현재가 눙크 스탄스, 영원한 현재로 되돌아간다. 현재는 단지 실재의 한조각이 아니다. 현재 안에 세상의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과 함께 우주가 존재한다.

이처럼 선명하게 머리에 각인되기도 어렵다.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철학적인 해답에 처음으로 이해가 되었다. 그만큼 원문과 번역이 좋다는 뜻이겠지.

 

127. 이런 영원한 현재, 눙크 스탄스가 바로 무경계 순간이다.

 

127. 이 순간에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도 없다. 고로, 종말을 초래할 탄생과 죽음이란 없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은 절대적인 평화이다. 그것은 이 순간에 있지만, 이 순간에는 경계도 제한도 없다. 여기엔 영원한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육조단경>

 

128. “영원이 지금이 하나의 의식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영원한 현재가 곧 합일의식이다.

 

129. 모든 기억은 현재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할 경우에는 내가 현재와 동떨어져 존재한다는 생각의 기반이 전적으로 붕괴된다. 그렇게 되면 그저 기억에 불과한 는 다시 한번 현재 경험이 된다. 이제는 현재경험을 하고 있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게 된다. 과거가 현재와 일체가 되면, 관찰자로서의 나도 마찬가지로 현재와 일체가 된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지금 이 순간에서 분리된 곳에서 서 있을 수 없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이외에 달리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130. 모든 기억을 현재경험으로 본다는 것은 현재순간의 경계를 붕괴하는 것이며, 현재순간을 환상적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과거대 미래라는 대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앞뒤 어디에도 시간이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게 해서 무시간적 현재 이외에 달리 서 있을 곳이 없게 되고, 영원 이외에 달리 있을 곳이 없게 된다.

 

6장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131. ‘자아를 진정한 로 정의하는 정통심리학에서는 합일의식을 정상성의 상실로, 의식의 착란 또는 변성된 의식상태로 묘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31. 자연은 경계라고 하는 살짝 미친 세계에 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자연 속에는 어떤 장벽도 담장도 없다.

 

132. 이 근원적 경계는 보는 자와 보여진 대상, 아는 자와 알려진 대상, 즉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이다. 일단 이 근원적 경계가 선행경계 위에 세워지고, 다른 많은 경계들이 계속해서 그 뒤를 잇게 된다.

 

133. 최초의 원인을 과거 속에서 탐구하더라도, 충분한 이유로 해서, 과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 최초의 원인은 어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현재의 사건이자 현재의 사실이며 현재의 활동이다. 나아가 이 최초의 원인을 우리 존재와 동떨어지닌 하나님에게 돌릴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있어 실로 진정한 나이기 때문이다. 이 영속적으로 활동하는 최초의 원인인 근원적 경계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의 우우리의 행위이다.

 

133. 이 모든 의문 중에서 가장 궁금한 측면은, 도대체 근원적 경계가 발생하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왜 원죄가 존재하는가? 왜 윤회의 세계, 환영의 세계, 경제의 비참함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134. 왜 근원적 경계가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답은 , ‘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근원적 경계는 우리 자신의 현재의 활동으로서, 원인 없는 활동 그 자체로서, 스스로 발생한다.

 

135. 저 밖에 있는 환경은 지금 내가 진정한 나라고 느끼고 있는 나의 유기체, 곧 나의 심신을 소멸시킬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 이렇게 해서 그야말로 새로운 요소가 최초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압도적인 의미를 갖게 될 운명을 타고난 요소이다. , 의식의 내부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출현하는 것이다.

 

136. 옛 진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심신을 초월하여영원히 무한과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진인이야말로 임제선사가 지적했듯이 우리의 참된 장, 즉 합일의식이다. 근본적인 나우주로서의 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외견상의 개인적 죽음은 단지 받아들일수 있는 현상이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바라는 것이 되기도 한다.

윌버는 이런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는가? 나는 사실 죽는 것에 대한 크게 두려움이 없다. 다만 두려움이 있다면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다. 그냥 자다가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지 않는 그런 자연스러운 죽음이 좋다. 아니면 이 책에 나오는 병든 울새처럼 울다가 떨어져 죽는 그런 죽음이면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다.

 

137. 그리고 나는 의도적으로 나를 잠재웠다.

오직 부분만이 죽음을 맞는다. 전체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나 나 스스로를 배타적으로특정 유기체에만 국한된 존재로 상상하게 되면, 그 유기체에 죽음에 대한 불안이 너무나 절실해진다.

 

137. 죽음에 대한 이런 근원적인 공포감은 분리된 나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일체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했던 다른 모든 대극들과 마찬가지로, 존재와 비존재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외견상 다른 것처럼 보이는 그 둘은 심층에서 볼 때 동일한 것이다. 삶과 죽음, 탄생과 사망은 단지 현재라는 무시간적 순간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137. 탄생이란 과거를 갖고 있지 않은상태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막 죽은, 이제 막 존재하기를 멈춘 것에게는 그 앞에 아무런 미래도 없다. 즉 죽음이란 미래를 갖고 있지 않은상태이다. .... 지금 이 순가에도 어떤 과거도, 어떤 미래도 동시에 모두없다. , 탄생과 죽음은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138. 지금 이순간에서는 결코 과거를 발견할 수 없으며, 그 이전의 무언가를 절대로 찾아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은 막 죽어간다. 지금 이 순간에서는 결코 미래를 볼 수 없으며, 그 이후의 무언가를 절대로 볼 수 없다. 돌연히 존재하고 동시에 사라진다. 따라서 현재순간은 대극의 합일, 탄생과 죽음, 죽음과 비존재, 삶과 죽음의 합이다. 잇펜 선사가 말한 것처럼 모든 순간이 마지막 순간이고, 모든 순간이 부활의 순간이다.”

 

138. 죽음이란 미래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죽음을 거부하는 것은 실제로 미래 없이 살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사실상 우리는 현재순간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지 않기 위한 하나의 약속으로서 미래를 요구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이런 공포는, 공공연히 작용하든 미묘하게 작용하든, 언제나 내일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동경하도록, 최소한 내일을 의도하도록 내몬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미래를 찾아 나서도록, 미래로 다가가도록, 미래를 향해 움직이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 간단히 말해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강렬한 시간 감각을 만들어낸다.

 

138. “죽음이라는 것은 환상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생전 두려워 떠는 것은 그 환상에 대한 인상일 뿐이다.”

 

139. 우리도 죽음이라는 환상을 내쫓기 위해 시간이라는 환상을 사용한다.

 

139. 영원한 지금에는 어떤 미래도, 어떤 경계도, 어떤 내일도 없다.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 앞에도 그것 뒤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죽음의 상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미래도, 내일도, 다가올 어떤 시간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는 곧 미래 없이 전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140. 근원적 경계의 생성과 함께, 인간은 죽음을 거부하고, 그로써 미래 없이 살기를 거부한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시간 없이 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요구하고, 시간을 창조하며,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살아남는 것이 희망이 되고, 시간은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 되며, 미래는 유일한 목표가 된다. 따라서 모든 궁극적인 근원인 시간은 상상 속 구원의 원천이 된다. 최후의 시간이 다가돌 때까지....

 

142. 우리가 전유기체 수준을 더 단순한 이름, 즉 켄타우로스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켄타우로스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말인 전설적인 동물로서, 몸과 마음의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잘 보여준다. 켄타우로스는 말을 조종하는 기수가 아니라 말과 한몸인 기수이다. 육체와 떨어져 나와 육체를 조종하는 정신이 아니라, 스스로 통제하고 스스로 관리하는 심신의 통일체이다.

 

143. 몸과 마음 사이에 새로운 경계가 생기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그 사람이 여전히 죽음으로부터 도주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죽음을 떠올릴 만한, 죽음을 체현할 만한 또는 죽음을 암시할 만한 모든 것을 회피한다. 그런데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면서 자신의 현실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신의 몸이다. 육체는 죽음의 궁극적인 거처인 것처럼 보인다.

 

144. 신체는 부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자신에 대한 하나의 그림, 죽음에 대한 어떤 참된 관계도 무시된 하나의 그림인 자아로서만 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자아 수준이 탄생한다. 마음과 몸 사이의 자연적인 선이 이제는 환상적 경계, 요새화된 장벽이 된다. 사실상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시키는 무장된 성벽이 되고 만다.

 

146. ‘/나아닌 것의 경계를 놓고 볼 때, 금기된 소망은 나 아닌 것의 편으로 넘어가거나 적어도 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 이제는 그것이(소망이) 마치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는 자신의 소망을 밖으로 투사한다고 말한다. .... 그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147. 자아 안의 수용 불가능한 모든 측면을 외적인, 이질적인, ‘나 아닌 것들처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런 것들은 그림자로서 밖으로 투사된다. 자아 내부에 또 하나의 경계가 세워진 것이다. 그 결과 는 협소해지고, 반면에 위협적인 나 아닌 것들은 더 많아진다. 이렇게 해서 페르소나 수준이 확립된다.

 

147. 새로운 경계가 그어질 때마다 정체감은 축소되고 수축되며, 또한 좀더 좁아지고 제한되어 여유가 적어진다. 제일 먼저 환경이, 그 다음으로 신체, 그런 다음 그림자가 저 밖에 존재하는 나 아닌 것으로, 이질적인 적으로 보이게 된다. 모든 경계선은 전선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그림자, 페르소나 이런 수준의 것들 중 가장 단연코 명쾌하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148. ‘저 밖에 있는 대상모두는 단지 나의 투사에 불과하므로 그 모든 것은 나의 한 측면들로 재발견될 수도 있다. .... 매 번의 발견은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마침내는 기쁨이 된다.

그림자가 부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창조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이 이런 의미이겠지.

 

148.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 모두가 그 핵심에 있어서는 진정한 나의 본래면목이라는 점을 명심하면서, 경계들을 일소하여 우리의 그림자, , 환경과 다시 한번 접촉할 수 있도록 해보자.

 

7장 페르소나 수준 : 발견의 출발점

 

149. 스펙트럼의 상의 하강과 발견의 태동은 삶에 대한 불만이 의식되는 순간 시작된다. .... 삶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 내부에 감춰져 있는 것은 흔히 엄청난 무게의 사회적 위선에 매몰되어 있는 특별한 지성, 성장하는 지성의 싹이기 때문이다.

 

149. 삶의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은 동시에 보다 심층적이고 진정한 실재로서 깨어나기시작한다. 고통은 현실에 대한 소위 표준적인 자기만족에 대한 위안을 산산조각내며,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회피해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과 세계를 세심하게 보고 깊이 느끼고 접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의미에서 살아 있게끔 강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특수한 의미에서, 고통은 거의 환희의 순간이기도 한다. 고통은 창조적인 통찰력이 탄생하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고통은 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얼마든지 감내할 자신이 있다. 그리고 무슨 의미인지도 대충은 알겠다. 하지만 유기체 수준에서 신체의 고통을 환희의 순간이니, 창조적인 통찰로 봐야 한다.

 

150. 고통의 출현은 단순히 하나의 좋은 신호이다. 합일의식을 벗어난 삶이란 궁극적으로 고통스럽고, 비참하며 슬픔으로 가득 찬 것임을 알아채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경계로 이루어진 삶은 투쟁의 연속이며 공포, 불안, 그리고 마지막엔 죽음으로 점철된다.

 

150. 고통은 거짓 경계를 알아차리는 최초의 움직임이다. 그렇기에, 올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고통은 해방을 준다. 고통은 모든 경계를 넘어선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은 병들어서가 아니라 지성적 통찰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50. 이런 통찰의 탄생이 유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고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겪어내고 마침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고통을 올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고통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고통의 한가운데서 꼼짝 못하게 된다.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허우적거리게 된다.

 

151. 예전의 영혼의사들은 신과 접촉할 것을 권했고, 현대의 영혼의사들은 무의식과 접촉할 것을 권한다. 전위적인 영혼의사들은 신체와 접촉하라고 충고한다. 초자연적인 영혼의사들은 신체를 초월하라고 충고한다.

 

151.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통이 발생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고통이 주는 열매를 생각하며 참고 견뎌낼 수도 없다. 우리가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진심으로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영혼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152. 다양한 영혼의사들이 인간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추측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인간 각성의 다른 수준들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153. 존재의 다양한 층, 즉 의식의 스펙트럼에 전반적으로 친숙해지면, 우리는 각자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수준뿐만 아니라 현재의 고통이 발생하는 수준의 위치까지도 좀더 쉽게 찾아낼 수 있게 된다.

 

154. 이 스펙트럼의 하강은 대극의 조화’, ‘의식의 확장’, 또는 콤플렉스의 초월등의 다양한 관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하강은, 가장 근본적으로는 단순히 경계의 해체이다. 우리는 앞에서 새로운 경계가 구축될 때마다 자아감이 제한되고 한정되고 왜소화되면서 원래의 정체감이 우주로부터 유기체로, 다시 자아로, 페르소나로 점차 변경된다는 사실을 보았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는 점점 더 작아지는 반면 나 아닌 것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이다.

 

154. 스펙트럼을 하강한다는 것은 (1) 투사를 재소유함으로써 (2) 경계를 해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56. 이처럼 소외된 성향들은 그림자로서 투사되며, 그 사람은 오직 그 나머지, 즉 협소하고 빈약하고 부정확한 자기상인 페르소나와만 동일시하게 된다. 새로운 경계가 설정됨과 동시에 페르소나 대 그림자라는 대극의 투쟁이 시작된다. 그림자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원상태로 되돌리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되돌릴 때 우리는 가장 소중히 여겼던 환상 중 몇 가지를 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160. 그림자 투사에는 두 가지의 주요 결과가 있음을 알수 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이 자신의 충동, 특질, 성향 등을 결코 외부로 투사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둘째로, 그것은 저 밖의환경 속에, 흔히 다른 사람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는 더 작아지고 나 아닌 것은 더 커진다.

 

161.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데 이처럼 강한 저항감을 갖고 있다. .... 사실상 저항은 투사의 주된 원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에 저항하고, 자신의 원치 않는 측면에 저항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밖으로 투사한다.

 

161. 마녀사냥은 투사의 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를 제공해준다. , 우리가 싫어하는 다른 사람들의 일면은 단지 우리가 우리의 내면에서 은밀히 싫어하고 있는 일면일 뿐이라는 진실 말이다.

 

162. 유대전통에 의하면, 인류가 권태로움 때문에 멸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써 태초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속에 이런 변덕스러운 성향, 별나고 심술궂은 경향을 심어놓았다고 한다.

 

163.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심지어 욕설까지 퍼붓는다. 다른 모든 점에서는 대단히 예의 바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오직 동성애에 관해서는 극심한 혐오감을 보인다. .... 이상하게도 동성애자를 미워하는 것은 그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혐오하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비밀스런 두려움의 일면을 동성애자에게서 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자연스러운 약간의 동성애적 경향을 몹시 불쾌히 여기며 밖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동성애적 성향을 혐오하게 된다.

적절한 사례를 통해 간접 체험할 수 있다. 나 자신도 동성애자를 혐오한다. 세상에 할 짓이 없어서. 여자라는 아름다운 인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저자 얘기한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렇게 아니다라고 반대를 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속에는 동성애가 자리잡고 있는지 모른다.

 

165. 이런저런 일을 하는데 엄청난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은 단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진정한 욕망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런 사실을(그림자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정반대로 말할 것이다. ..... 남을 돕고자 하는 욕망이 정말로 없다면 그는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신경 쓰겠는가! 그는 돕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돕고 싶어하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무감, 책임감 때문에 많은 일을 하면서 불만이 많이 쌓였다. 왜 이런 일을 해야하나 생각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했다. 생각해보면 저자의 말처럼 의무감이라는 표현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내가 그것을 하고 싶어서였을 지도 모르겠다.

 

169. 페르소나 수준에서의 치료의 첫 단계는 증상들을 받아들이고 여유를 갖는 것이며, 지금까지 혐오해왔던 증상의 불쾌감과 친해지는 것이다..... 특정 증상에 집중하여 그것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숨 쉬도록 내버려두면서, 다만 그 증상 자체의 모습에 지속적인 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170. 만일 증상이 지속될 경우, 페르소나 수준의 치료에서는 두 번째 단계로 진행해간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진행방식이 간단하지만, 실천하는 데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두 번째 치료는 의식적으로 모든 증상을 원래의 형태로 해석/변환하는 작업이다.

 

171. 두 번째 단계의 핵심은, 모든 증상이 단지 무의식적인 그림자 경향성의 신호’(또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 데 있다.....이유가 무엇이든, 압박감이라는 증상은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당신 자신이 더 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신호이다. 따라서 그 증상을 원래의 올바른 형태로 되돌려 변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나는 해야만 해나는 하고 싶어가 된다. 변환이 치료의 열쇠이다.

 

175. 자신의 투사를 거둬들인다는 것은 경계를 허물고 이질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을 자신의 일부로서 자기 내부에 포함시키는 일이다. 또한 여유를 갖고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 면, 좋은 면과 나쁜 면, 사랑스러운 면과 야비한 면을 막론하고 모든 다양한 잠재력을 이해하고 수용해서 자신의 정신-신체적 유기체 전반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심상을 발달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경계를 변경시켜 오랜 숙적이 동맹국이 되고, 암암리에 서로 싸우던 대극이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영혼을 재작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모든 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좋아할 만은 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8장 켄타우로스 수준

 

179. 자아와 육체 사이의 경계는 보통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너무나 깊이 파묻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둘 사이의 분열을 치유하는 일에 대해서는 당혹감과 권태가 혼합된 묘한 반응을 보인다. 마음과 신체사이의 경계를 꼼짝없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경계의 해체는 고사하고 왜 경계에 간섭하려 드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180. 나의 의식은 거의 전적으로머리 의식이다. , 나는 내 머리이고, 나는 내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 내 신체는 나의 소유물, 가 아니라 나의 것으로 전락했다. 한마디로, 신체는 그림자가 그랬던 것과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대상 또는 하나의 투사물이 된다.

거의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나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인데 결국 나는 페르소나 수준에 머물러있다는 결론

 

181. 신체와 자아의 통합체야말로 어느 한쪽보다 더 심층적인 실재이다. .... 우리가 신체를 버리고, 이제 다시 신체를 되찾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는 많은 종류의 이유가 있다.

 

182. 가장 중요한 것은 수의대 불수의라른 대극이다. 자아는 통제와 조작의 지위에 있으며, 수의적이고 의지에 의한 활동의 장이다. 실제로 자아는 정의상 오직 수의적인 과정하고만 동일시한다. 반면 신체는 기본적으로 혈액순환, 소화, 성장과 발달, 신진대사 등과 같은 불수의적인 과정들의 잘 조직된 결합체

 

183. 상식과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자기 존재 전체의 일부와만 동일시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고작해야 유기체 전체의 절반만을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184. 자아는 고통의 근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신체를 마비시키고 동결시켜서 신체의 고통에 대한 무방비 상태를 완화시키려고 한다.

 

184. 육체를 무감각하게 하는 일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달성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체는 고통의 근원인 것이 확실하지만, 동시에 쾌락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고통의 근원을 죽이는 동시에 쾌락의 원천도 말살시킨다. 더 이상 고통은 없지만....더 이상 즐거움도 없다.

 

186. 처음에 신체와의 결합을 시도하는 한가지 방법은 담요나 매트 위에 팔다리를 쭉 편 채 위를 향해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깊고 편안하게 숨을 쉬면서 신체의 느낌을 탐색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느끼려고 노력할필요는 없다. 느낌을 강요하지 말고, 단지 신체를 통해 주의가 흐르도록 자유롭게 놓아둔 채 신체의 다양한 부위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느낌이 있는지만 알아차린다.

 

195. 첫 번째 관련된 근육을 더 경직시킴으로써 압력이나 긴장을 고의로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블록은 특정 감정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들 블록을 완전히 해소시켜 없어지게 하려면, 근육에 갇혀 깊숙이 파묻혀 있는 감정에 대하여 자신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7. 마음과 신체, 수의와 불수의, 의도된 것과 자발적인 것 사이의 분열이 치유됨에 따라 정체감과 현실감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변경연 과정이 끝나면 요가든 명상이든 바로 시작해야겠다는 배움의 의지가 불끈.

 

200. 이 수준을 지향하는 어떤 치료법이든, 그 치료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미묘하면서도 넓게 스며드는 자각의 변화이다. 이런 변화는 켄타우로스를 부활시키고 켄타우로스 이전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시작함에 따라 일어난다. 이런 잠재력은 자아의 잠재력과 신체의 잠재력을 단지 결합해 놓은 정도가 아니라, 부분의 합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의 전체성이다.

 

203. 켄타우로스 수준은 (1) 자아실현 (2) 의미 (3) 실존, 곧 생사문제의 본거지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해소하는 데는 신체와 마음의 충만한 각성이 요구된다...... 자아와 신체 전체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 각각을 새로운 맥락 위에다 갖다놓음으로써 양쪽 모두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자아는 자신의 기반이자 지원처인 지상으로 내려갈 수 있고, 신체는 자신의 빛이자 공간인 천상으로 올라설 수 잇다. 자아와 신체 사이의 경계와 전쟁은 해소되었고, 한 쌍의 대극이 새로이 재통합되었으며, 더욱 심층적인 일체성이 발견되었다.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신체를 구현시키고, 신체에 마음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다.

 

9장 초월적인 나

 

209. 프로이트는 자신의 용기 있고 뛰어난 연구를 자아, 페르소나, 그림자에만 한정시켰다. 한편 융은 이런 수준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연구를 초개아 대역까지 밀고 나갔다..... 융은 특별히 어떤 것과 마주쳤던 것일까? 인간 영혼의 심층부에서 융이 발견한, 초개아 영역을 명백히 가리키는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사람 안에있는 동시에 그 사람 너머에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213. ‘초월적 나란 자신의 사적인 마음, , 감정, 생각, 느낌들로부터 초연한 자각의 창조적 중시이자 확장된 자각이다.

 

216. 가장 근본적인 방식에서, 불안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철저히 수용하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허용한다. 불안이 사라져가는 것을 단지 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불안이 존재하든 안하든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229. ‘초월적인 나는 모든 전통에서 신성의 빛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원리적으로 초월적인 나당신이 신을 어떻게 인식하든 신과 동일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궁극적으로, 근본적으로는 심오한 곳에서 오직 신만이 당신의 눈을 통해 보고, 당신의 귀를 통해 듣고, 당신의 혀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생 클레망이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할수 있었겠는가?

바로 이것이 융의 메시지이고, 또한 미대륙의 원주민, 도가,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를 막론한 모든 성인과 현자, 신비가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당신의 영혼의 심연에는 인류의 영혼이 존재한다. 속박에서 해방으로, 마법에 걸린 상태에서 깨어남으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죽음에서 불사로 이끌어 주는 신성한 초월적 영혼 말이다.”

 

10장 궁극의 의식상태

 

233. 합일의식은 무시간적 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지금 이순간에 존재한다.

 

235. 합일의식은 특정한 파도라기보다는 그 자체에 가깝다. 물과 파도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어떤 차이도, 어떤 분리도 없다. , 어떤 파도도 다른 파도보다 더 축축하지 않다는 점에서 물은 모든파도에 동등하게 존재한다.

 

235. 합일의식을 찾아다니는 것은 물을 찾아 경험의 파도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과 같다. 길도 없고 성취도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236. 불교의 황벽 선사는 얻을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다라고 말한다. .... 크리슈나무르티는 진리는 가까이 있다. 진리를 찾으려 할 필요는 없다. 진리를 찾는 자는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늘 이런 식이었다. 예전에는 그러려니 넘겼는데 이번 책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곱씹고 있다. 이런 일화도 있다. “길을 가다 도반을 만났다. 스님 도가 무엇입니까? 도반이 물어 왔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도반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길을 걸어 갔습니다. 도반은 한참 후에야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237. 그것을 획득하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합일의식의 가장 큰 역설이다..... 그러나 만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경우, 지금과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리라는 것 또한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239. “그대 자신을 책망하지 마라. 그대가 나를 찾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그대가 나를 찾았다는 뜻이니라.” 이와 같은 모든 의미에서 우리의 영적 수행은 그 자체가 이미 목적지다. 결과와 수단, 길과 목적지, 알파와 오케가는 하나이다.

 

241. 자신도 모르게 그럴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적극적으로 합일의식에 저항하고 그것을 부정한다.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이와 같은 저항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궁극적인 열쇠이다.

 

246. 적절한 영적수행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그저 자신이 합일의식에 어떻게저항하는지를 깨닫기 시작한다. 영적 수행은 이 근원적인 저항을 자각의 표현에 떠오르게끔 만든다. 우리는 합일의식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며, 늘 그것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든 다른 수준에서도 저항에 대한 이해가 전환을 촉진시키는 통찰이었던 것과 똑같이, 이것은 그 자체가 결정적인통찰이다. 합일의식에 대한 저항의 파악은 처음으로 그것을 다룰 수 잇게 해주고, 마침내는 저항을 떨쳐낼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신의 해방을 가로막고 잇는 감춰진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249. 모든 진정한 영적 수행의 특별한 상태들은 저항을 드러내고 무너뜨려 해소시킨다. 우리가 접근해가야 하는 것은 합일의식 자체가 아니라 합일의식에 대한 이 근원적 저항이다. 합일의식에 대한 자신의 저항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합일의식을 성취하려는 모든 노력은 허사로 끝날 것이다.

 

261. 모든 것이 이미 영원히 올바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자 애써온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브라만 이외에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브라만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처럼 보였던 것조차 실제로는 브라만의 움직임이었다. 지금이외에 다른 시간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결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최초의 달아남처럼 보였던 것도 실은 지금의원초적 움직임이었다. 본증묘수. 본래의 깨달음이 곧 영묘한 수행이다. 영원한 지금이 바로 그 움직임이다. 대양의 파도는 조약돌과 조개껍데기를 적시하면서 자유롭게 해변을 넘나든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장점(독자의 눈으로-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 등)

인류의 역사를 경계의 발전으로 풀어낼수 있는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아담은 별들에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었고, 피타고라스는 별들을 셀 수 있었지만, 뉴턴은 별들의 무게를 잴 수 있었으니 그 상황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라라는 저자의 예처럼 이 책은 심리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그 예가 시의적절하다.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쉽게 읽히는 책이 잘쓰는 책이라는 진리! 독자가 어렵다고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저자가 무언가를 잘못쓰거나 사례를 잘못든 경우이다. 여러번 생각나게 하는 것과 읽히기 어려운 것은 차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물리학자 에딩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과학이 가장 멀리 발전해간 곳에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끌어낸 것은 결국 우리가 자연에 부여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미지의 해변에서 이상한 발자국 하나를 발견했고, 그 발자국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심오한 이론들을 하나씩 차례로 개발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발자국을 만든 존재를 재구성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보라! 그 발자국은 우리자신의 것이었다.”(80페이지)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저자는 저자의 주장을 아주 손쉽게 객관적으로 그리고 아주 신뢰할만한 사람들을 배치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꼼짝못하게 만든다. 때론 자신의 주장을 줄기차게 적어대는 것보다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의 주장을 끌어오는게 훨씬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결국 새로운 것은 없으니까.

 

마지막 궁극의 수준은 아무래도 저자가 많은 예를 들면서 얘기를 했지만 이해가 될 듯 될 듯 하면서 어려웠다. 합일의식을 경계의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얘기지만 이 부분은 내가 만약 초월적인 나의 수준에 접근한다면 자연히 풀릴 숙제라고 생각한다.

 

항상 나는 누구인가?를 마음속에 담아왔다. 이 과정을 통해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지만 이번 책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고민들을 통합적으로 고찰할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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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12:15:41 *.18.187.152

최근 살짝 슬럼프인 거 같더니 다시 기상씨표 북리뷰를 보게 되어 반갑네요. 나는 수면, 최면상태에 이어 가사상태까지 갈 뻔 했는데 기상씨가  책 좋다고 해서 어제 각 잡고 정주행 했어요. 덕분에 좋은 책 잘 읽었다우~~ (근데 입문자에게는 어려운 책이긴 한 듯. 그의 사상의 넓이와 깊이에 압도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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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08:52:52 *.129.240.30

관조의 눈을 뜰 수 있을까? 갑자기 읽다가 죽음의 순간이 상상이 되었음.. 동물처럼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것 역시 관조의 눈을 떠야 가능한 일이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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