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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5일 07시 25분 등록

열하일기(93째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박지원(1737 ~ 1805)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盤松坊)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해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필균이 양육하였다. 1752(영조 28) 전주 이씨(全州李氏)보천(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특히 보천의 아우 양천(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사기 史記를 비롯해 주로 역사 서적을 교훈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했으며,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평생 문우로 지내면서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학문이 뛰어났으나 1765년 처음 과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후로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서상수(徐常修유득공(柳得恭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 때를 전후해 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懋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해 자주 토론했으며, 이 무렵 유득공·이덕무 등과 서부 지방을 여행하였다. 당시 국내 정세는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벽파(僻派)였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1780(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자, 수행(1780625일 출발, 1027일 귀국)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 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이 속에서 평소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해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했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1786년에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안설 按說등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와 위의 책들은 그가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 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특히 열하일기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이 때는 명()에 대한 의리와 결부해 청()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이 속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적 수용력이 부족했으나 당시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 강한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북학사상(北學思想)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청나라에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해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인식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개선책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역대 중국인들이 우리에게 갖는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방법도 서술하였다.

 

그는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 하였다.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그가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그가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朱子學)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이 생각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주창이었으나 과감한 개혁 의지의 한 표출로 나타났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을 집약한 것이 곧 이용후생 이후에 정덕(正德)을 이루는 방법이다. 이는 정덕을 이룬 뒤에 이용후생을 추구하는 방법과 비교할 때 발상의 일대전환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창하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요체이며 이를 위해 제시한 것들은 자기주장의 완성을 위한 방도이다. 그 방도의 구체적 현상은 정치·경제·사회·군사·천문·지리·문학 등의 각 분야에서 나타났다. 특히 경제 문제에서는 토지개혁정책·화폐정책·중상정책(重商政策) 등을 제창했으며 현실의 문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미래의 비전을 찾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남긴 문학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고 있다. 곧 당시 주조를 이루는 복고적 풍조에서 벗어나 문학이 갖는 현실과의 대립적 현상을 잘 조화시켜, 시대의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수렴할 수 있는 주제와 그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의 사고가 고정적 관념에서 벗어나 일대 전환을 시도한 것과 맥락을 이루며, 문학 작품의 매개체인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고 당대에 맞는 문체 개혁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 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 표현되는 이 말은 시속문(時俗文)의 인정을 의미하며 그렇다고 문승질박한 비평소품(批評小品)을 찬양한 것은 아니다. 고법(古法)을 버리는 이유는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문학을 창조하는 데 있었기에 새롭기 위해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표현의 절제와 문장 조직 방법의 운용, 사실적인 표현 등은 그가 생각한 당대의 현실과 문학과의 관계를 연결 짓는 방법들이었다. 이는 그의 문집 속에 수록된 당시 그와 교유했던 사람들의 문집서(文集序)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일련의 한문 단편(漢文短篇)들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초기에 쓴 9편의 단편들은 대체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나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 혹은 민족 문학의 맥을 연결하는 것들로서 강한 풍자성을 내포하고 있다.양반전의 경우는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의 계급이 가지는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어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었다. 다음으로 북경을 여행한 이후에 쓴 두 편의 단편은 여행기 속에 포함된 것으로 역시 그의 실학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 중에서 허생전 許生傳은 중상주의적 사상과 함께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그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와 함께 그것을 실제로 작품화한 실례가 될 것이다.

 

그의 저술은 모두 연암집 燕巖集에 수록되었다. 그가 가진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서, 실제로 1900년 김만식(金晩植) 23인에 의해 서울에서 처음 공간된 그의 문집은 책을 초록한 형태였다.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가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음은 문집 내용이 갖는 의미를 짐작케 한다.

 

그의 저술에서 특이한 점은 문집 대부분이 논설을 중심으로 한 문장이 대부분이며, 시는 각체를 합해 42수가 전부이다. 이 점에 대해 아들 종간(宗侃)영대정잡영 映帶亭雜咏(권제4) 말미에 붙인 부기에서 유실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교유한 문인들의 문집 속에도 그가 많은 작품들을 지었다고 하고 있어, 이 역시 유실되었음을 증명하는 한 예일 것이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작품으로는 허생전·민옹전 閔翁傳·광문자전 廣文者傳·양반전·김신선전 金神仙傳·역학대도전 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 鳳山學者傳등이 있다. 1910(순종 4)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받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발췌 내용

 

열하일기(熱河日記)

기행문(紀行文). 조선시대 연경(燕京) 기행문학의 정수(精髓)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중국의 문물제도와 산천풍토를 보고 싶어 하던 차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중국에 갔다가 이 작품을 저술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 · 지리 · 풍속 · 습상(習尙) · 고거(攷據) · 건설 · 인물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종교 · 문학 · 예술 · 고동(古董) 등에 걸쳐 수록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상세히 기술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경치나 풍물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이용후생(利用厚生)적인 면에 중점을 두어 기술하였다. 본서는 모두 26편으로 되어 있다.

 

서문(序文); 서문은 누가 썼는지 미상이나, 여기에는 풍습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이나 건물 · 경목(耕牧) · 도야(陶冶) 등 이용후생에 관계되는 일체의 방법을 이 책에 기록했다고 하면서 아울러 거짓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도강록(渡江錄); 압록강에서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의 15일간, 1780(정조4)624일부터 79일까지의 기행문이다. 당시의 중국인이 이용후생적 건설에 심취하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우리 고전 읽기의 즐거움

시대가 바뀌고 독자가 달라져도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작품 속에는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는 근본적인 가치가 담겨있다. (4)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어울림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우리의 가치관은 생활 속에 그대로 녹아서 문학 작품에 표현되었다. (5)

그 어울림을 현대는 너무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세계의 고전 작품도 그 나라 사람들이 시대마다 새롭게 고쳐 쓰는 작업을 거듭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그런 작업에서 많이 늦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라도 우리 고전을 새롭게 고쳐 쓰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문화 역량이 여기에 이르렀다는 방증이다. (6)

과연 그럴까. 쓰는 사람이 그 역량에 이르렀다고 해도 읽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시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내용에 맞는 그림을 곁들였다. (7)

반가운 말이다.

경험은 지혜로운 스승이다. 지난 시간 속에는 수많은 경험이 농축된 거대한 지혜의 바다가 출렁이고 있다. 고전은 그 바다에 떠 있는 배라고 할 수 있다. (7)

 

저자서문

외전이라면 참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겠고, 우언이라 하더라도 미묘함과 드러냄이 쉴 새 없이 변하여, 사람으로는 그 원인을 측량할 수 없으므로 이를 궤변이라고 했다. (18)

 

도강록

들어가기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서 몰아내고 중원을 깨끗케하여 선왕의 역사를 다시 빛내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라도 높여서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24)

이런 거 보면 우리 후손이 선조에 비해 역사의식이 없는 걸까. 양력이란 세계 공통의 년도 표기가 있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고유의 표기인 단기가 있다. 단기를 같이 병기하기도 하지만 일부일 뿐이다.

 

도강록

당서를 살펴보면 고려의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 머리같이 푸르기 때문에 압록강이라고 불렀다.” 하였으니, 백산은 바로 장백산을 말한다. (25)

오리 머리가 푸른가?

이 강은 천하의 큰 물줄기라서 그 발원하는 곳이 지금 가문지 장마인지, 천 리 밖에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26)

물줄기의 발원지는 항상 물이 있다는 거겠지.

멀리 앞길을 바라보니 무더위가 사람을 찌는 듯했다. (26)

날짜는 626일이라 했는데 아마 음력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럼 지금의 7월 중순이면 덥기도 하겠다. 역자가 날짜에 대한 설명을 해줬으면 좋았을 걸 싶다.

중국 가는 것을 평생의 장유라고 하여 툭하면 꼭 한 번 구경해야지.” 하며 평소에 벼르던 것도 이제는 둘째가 되었다. (26)

둘이서 주머니를 털었더니 스물여섯 푼이 나왔는데, 우리 돈을 가지고 국경을 넘지 못하는 법이라, 길에 버리기도 아깝다며 술을 샀다는 것이다. (28)

예전에도 국경을 넘을 땐 엄격한 기준들이 있었구나. 하고많은 것 중에 술이라...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리며 말을 위해 빌었다. (28)

새 차를 사면 고사를 지내고 막걸리를 자동차 바퀴에 뿌리던 남편 모습이 떠오른다.

금지된 물품이 발견되면 세 가지 형벌을 내린다. 첫째 문에서 걸린 자는 큰 곤장으로 때리고 물건을 몰수했다. 둘째 문에서 걸리면 귀양 보내고, 셋째 문에서 걸리면 목을 베어 달아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29)

 

명나라 장수 강세작이 조선에 귀화한 이야기

세작은 고향길이 이미 끊어졌으니 차라리 동쪽 조선으로 나가서 머리를 깎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저 되놈의 신세를 면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고는 싸움터를 탈출하여 금석산 속에 숨었다. (33)

세작은 조선에 처음 나왔을 때 득룡의 집에서 자고, 득룡의 할아버지와 친하여 서로 중국말과 조선말을 배웠다. 득룡이 그처럼 중국어를 잘하는 것도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학문이라고 한다. (33)

그래서 득룡이 결국 통역을 하게 됐다.

 

청나라 첫 고을 책문의 모습

어떤 사람이 초목이 윤기 나는 기운이 공중에 어리는 것이 바로 왕기이다.” 하였다. (36)

상공이란 장사꾼끼리 서로 높여 부르는 말이다. (37)

한씨나 안씨 같은 장사꾼은 해마다 북경에 드나들어, 북경을 제집 마당처럼 여긴다. 저쪽 장사꾼과도 마음이 맞아서, 물건 갑이 오르내리는 것도 모두 그들의 손에 달려 있다. (38)

보따리상인데 중간 상인으로 이득이 많았겠다.

그 두 곳을 구경할 때는 제 두 손으로 눈알을 꽉 잡고 있겠습니다.“ (39)

박지원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는 건 내가 보기엔 뭘 모르거나 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하튼 재미있다.

이는 하나의 시기하는 마음이다. 내 본래 성미가 맑아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이제 한 번 다른 나라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아직 만 분의 일도 못 보고 벌써 이런 나쁜 마음이 생기니 어찌 된 까닭일까. 아마도 보고 들은 것이 좁은 탓일 게다. 만일 밝은 눈으로 세계를 두루 살핀다면, 어느 것 하나 평등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평등하다면, 시기와 부러움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39)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고 또 겸손하다. 그 시기에 평등을 이야기하다니 대단해 보인다.

올해에 이렇게 하면 내년엔 어느새 전례가 되기 때문에, 끝까지 아귀다툼을 해야 한다. 사신들은 이 내막을 모르고 다만 책문에 들어가기에만 급급하여 반드시 역관을 재촉하고 역관은 또 마두를 재촉한다. 그러니 그 폐단이 오랫동안 계속된다. (41)

박지원이 중국을 처음 가는데 이걸 어찌 다 알았을까?

 

벽돌과 기와

기와를 이는 법은 본받을 만한 점이 많다. (43)

실학자답다. 앞에선 벽돌에 대해 관찰하고 좋은 점을 쓰더니.

맑은 흙이나 나무도 들이지 않고, 못질이나 흙손질을 할 필요도 없다.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은 어느새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다. (44)

이걸 보고 와서 조선에서도 사용했을까.

 

안시성과 요동 땅의 평양성

우리 본토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믿을 만하건 아니건 간에 다 빠뜨리고 말았다. (46)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이 당시에도 비판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전쟁도 없이 저절로 줄어들었다. (47)

정말 적절한 표현이다.

옛 조선과 고구려의 경계를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으로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48)

옛 지명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문제다. 사실 지명이란 겹치기 마련이다.

 

중국의 구들과 조선의 온돌

이곳의 벽돌 장판이 우리나라의 종이 장판보다 못하다는 말은 그럴듯하네. 그러나 이 구들 놓은 방법을 배워 가서 우리나라 온돌에 쓰고, 그 위에 기름 먹인 장판지를 깐다면 누가 말리겠는가.” (52)

맞다. 서로의 장점을 살리면 된다.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고 좋은 점을 수용하려는 자세를 볼 수 있다.

 

꿈속에 고향집을 찾아

아까부터 가위에 눌린 지 오랠세.”

일어나 앉아서 이를 부딪치고 머리를 두드리며 정신을 가다듬으니, 그제야 제법 상쾌해졌다. (57)

 

말꼬리를 붙들고 강물을 건너

마침 앞에 말꼬리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그것을 붙들고 몸을 가누어 고쳐 앉아서 겨우 떨어지기를 면했다. 내 자신이 이토록 재빠를 줄 몰랐다. (58)

기행문이라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재밌다. 박지원이란 인물이 매력적이다. 솔직함이 으뜸이다.

 

한바탕 울어 볼 만한 요동 벌판

내 오늘에야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에게도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60)

44세의 나이에 이런 감정을 처음 느꼈다고 하니, 이는 낯선 곳에서 보는 풍광에서 오는 감정이었을까.

,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 (60)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며,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된다오. (60)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온 지극하고도 참된 소리는 참고 눌러서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감치 나타내지 못한다오. (61)

 

구요동

태자하를 끌어와 해자를 만들었다. 해자 위에는 고기잡이배 서너 척이 떠있고 성 밑에는 낚시질하는 이가 수십 명이나 되는데, 다들 좋은 옷을 입었고 그 생김생김이 귀공자 같다. 모두 성안의 장사치이다. (66)

해자가 얼마나 넓고 크면 고기잡이배 서너 척이 다닐 정도일까. 규모가 대단하다.

 

관제묘

그 정전에는 관운장의 소상을 모셨고, 동쪽에는 장비, 서쪽에는 조자룡을 모셨으며, 촉나라 장군 엄안의 굴복하지 않는 모습도 만들어 세웠다. (68)

관운장은 한국에서도 모시는 사당이 있다.

까막눈이건만 익숙하게 외워서 입이 매끄럽게 내려갔다. 꼭 우리나라 네거리에서 국문소설 임장군전을 외는 것 같았다. (69)

전기수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입말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로 기생부터 서민들까지 꽤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요동백탑

층마다 처마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는데, 크기가 물통만 하였다.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울려서 그 소리가 멀리 요동벌에 울렸다. (70)
그만큼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는 거겠지.

 

성경잡지

심양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다. “한나라가 사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의 군청이었으며, 원위. . 당 때에는 고구려에 속했다.”고도 한다. (76)

지난해 하은군을 모시고 왔을 때에도 행궁을 두루 구경했지만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아주 마음 놓고 구경하시지요. 사람을 만난다 한들 쫓겨나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네 말이 맞아.” (77)

그냥 구경하자는 광록도, 맞다며 대답하는 박지원도 배짱 한 번 좋다.

골동품 파는 가게에 들어갔는데, 예속재라는 집이었다. 수재 다섯 명이 동업으로 가게를 냈는데, 모두 나이가 적고 얼굴이 아리따운 젊은이다. (79)

옛날이 아니라 지금 얘기 같다. 5명이 협동조합으로 만든.

또 한 가게에 들렀는데, 이곳은 먼 곳에서 온 선비들이 방금 개업한 비단 가게였다. (79)

먼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에서 가게를 하기 어렵지 않았나보다.

다스리는 법이 아무리 간단하다지만, 따귀 때리는 형벌은 옛날부터 들어 본 적이 없다. (80)

성경잡지 편은 마치 지금의 민속촌이나 궁궐을 외국인이 다니며 쓴 글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일신수필(빨리 달리며 쓴 글)

들어가기

아아! 슬프다. 글을 빨리 쓰다가 생각해 보니, 먹 한 점을 찍는 사이는 하나의 순과 식에 지나지 않건만, 눈 한 번 감고 숨 한 번 쉬는 사이에도 벌써 짧은 옛날과 짧은 지금이 이룩된다. 그러면 하나의 이나 지금도 대순과 대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사이에 온갖 명예와 사업을 세우고자 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83)

빨리 글을 쓰다가 이런 걸 느끼고 그걸 글로 쓰다니, 멋있고 부럽다.

 

중국의 큰 볼거리

물론 성인 공자가 춘추를 지을 때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내쳤지만, 그렇다고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힌 것을 분하게 여겨 중화의 숭배할 만한 진실까지 내쳤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나라 사람이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한다면 중화가 끼친 법을 모두 배워서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부터 먼저 열어야 한다. (90)

그러나 나같이 미천한 선비도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고, 똥 부스러기에도 있다.”고 하겠다. (90)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실학자, 그저 무조건 암기했던 말이었는데 이렇게 모든 것을 보는 눈 자체가 달랐구나. 읽을수록 감탄하게 된다.

 

수레 제도

태평차는 겉바퀴로 돌고, 대차는 속바퀴로 돈다. 그리고 쌍바퀴가 똑같이 둥글기 때문에 고루 돌아가고 빨리 달릴 수 있다. (94)

관찰력도 대단하고 그걸 또 기록에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걸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에 쓸 수 있을지 고민했다.

수레는 천리로 만들어져 땅 위에 다니는 것이며, 뭍에 다니는 배이고, 움직이는 방이다. (95)

사람들이 늘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95)

박지원은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답답하게 여긴 것 같다.

중국의 재산이 풍족할 뿐만 아니라, 한곳에 쌓이지 않고 골고루 유통되는 것이 모두 수레를 사용할 때 생기는 이익이다. (96)

이곳에서 천한 물건이 저곳에서는 귀할뿐더러 그 이름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된 까닭일까. 이는 멀리 보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97)

이런 생각들을 모아 양반전허생전을 썼구나.

수레를 맡았던 벼슬 이름은 외웠지만 수레를 만드는 기술이 어떠하며 움직이는 방법이 어떠한지는 도무지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97)

뜻있는 이가 잘 연구하여 그 제도를 본받는다면, 극에 달한 우리나라 백서의 가난병도 얼마쯤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보았던 불 끄는 수레의 제도를 대략 적어서, 우리나라에 돌아가 이를 전하고자 한다. (98)

조선으로 돌아와 전하기는 했겠지만 받아들여졌을까. 불 끄는 수레라고 들어보지 못한 거보니 안 받아들여졌나 보다.

사람의 손놀림이 타고난 바탕 제대로의 성질에 맞지 않고, 또 빠르다 더디다 하여 고르지 않다. (101)

사람 손과 기계는 당연 차이가 난다. 계속 궁금한 게 그래서 이 모든 수레를 보고 왔는데 적용하지 못했다는 건가? 지금 설명을 봐도 편해 보인다.

중국의 모든 일이 간편함을 위주로 하여 하나도 헛됨이 없는데, 이 상여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본받을 것이 못 된다. (102)

 

관내정사

728일 일기

자세히 보니 비취 바탕에 금무늬가 진짜 나비였다. 꽃잎 위에 다리가 붙어 있었는데, 말라 버린 지 벌써 오래된 것이었다. (106)

박제한 나비인가 보다. 그때도 박제를 했나보다.

돌아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서 모두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지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가고, 튼튼한 갓끈도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거요.” (107)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호질이 만들어졌구나.

 

호질

동리자는 이렇게 수절 잘하는 과부였지만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저마다 다른 성을 지녔다. (111)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앞으로 가까이 오지 마라. 지난번에 내가 들으니 (선비)는 유(아첨쟁이)이다.’ 하던데 과연 그렇구나.” (113)

그뿐만 아니라 메뚜기에게서 그 밥을 빼앗고, 누에한테서 옷을 빼앗으며, 벌을 막질러 꿀을 긁어먹고, 심한 경우에는 개미의 알로 젓 담아서 그 조상께 제사하니, 너희보다 더 잔인하고 덕이 적은 자가 있겠느냐? (114)

사피엔스의 소설판 같다. 인간만큼 해로운 동물이 없다. ‘사기열전을 본 다음에 읽어보니, 춘추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서로 죽였는지 알기에 더 와 닿는다.

 

호질 뒤에 쓴다

이 작품은 애초에 제목이 없었으므로, 이제 그 글 가운데 호질이란 두 글자를 따서 제목으로 삼는다. 저 중원의 혼란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120)

 

옥정필담

들어가기

어제는 윤공과 이야기하느라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다. 윤공이 가끔 졸며 머리로 병풍을 들이받곤 하였다. (125)

밥을 먹으며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종이 수십 장을 썼다. (125)

글로 쓰며 대화하려니 시간도 많이 걸렸겠다.

 

달에서 이 지구를 바라보면

그가 말하기를, 달 가운데 한 세계가 있다면 마땅히 이 땅과 같을 것이고, 지구가 공중에 걸려 있으니 작은 별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또 지구 자체에서 빛이 생겨 달 가운데에 가득 들었다고 하더이다.‘ 합디다.” (127)

우주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지구의 밖에 바다가 둘러져 있는 것은, 비유하건대 한 개의 큰 유리 거울과 같습니다. 만일 달 세계에서 이 땅의 빛을 본다면 역시 상현달, 하현달, 보름달, 그믐달, 초하루 등이 있겠지요. 해를 맞댄 이쪽저쪽에는 큰물과 큰 땅덩이가 서로 잠기며 비춰져서, 그 빛을 받아 반사되어 바꾸어 가며 밝은 그림자를 토하는 거지요.” (131)

당신 두 분이 별세계로 떠나신다면 저도 팔짝팔짝 뛰는 토끼나 펄쩍펄쩍 뛰는 두꺼비 노릇을 할지라도 사양하진 않겠소.” (146)

이 세 사람이 인간이 로켓으로 달나라를 갈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전설

저는 하늘이 만든 것 중 모난 물건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기 다리, 누에 궁둥이, 빗방울, 눈물, 침 같은 것까지 둥글지 않은 게 없지요. 산과 강, 큰 땅덩이, 해와 달, 별들도 모두 하늘이 창조한 것이었으나 아직 모난 별을 본적이 없으니, 지구가 둥근 것은 의심할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137)

지구가 둥글다는 걸 세상에 둥근 것들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구나.

저는 이 땅덩어리가 한 번 구르면 하루가 되고, 달이 한 번 땅덩어리를 돌면 한 달이 되며, 해가 한 번 땅덩어리를 돌면 한 해가 되고, 세성이 한 번 땅덩어리를 돌면 1(12)가 되며, 항성이 한 번 땅덩어리를 돌아가면 1(10,800)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38)

도는 게 지구가 아니라서 그렇지 기간은 맞다.

다행히 대인 선생과 교제하여 많은 가르침을 받아 비록 나의 큰 소망을 이뤘으나, 저 멀리 사는 서양 사람을 만날 길이 없는 것이 나의 한입니다.” (140)

박지원은 열하보다 더 멀리 갈수만 있었다면 갔을 것이다.

 

야소교(천주교)

그는 비록 부처를 배격했지만, 윤회설을 믿었다고 합니다.”(141)

죽고 사는 것과 같은 큰일을 예비하여 걱정 없는 것이 목적입니다. 서방의 모든 나라가 이 교를 믿은 지 이미 천여 년이 되었으므로 나라가 아주 편안해졌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과장스럽고 황당한 편이어서 중국 사람은 믿는 이가 없답니다.” (141)

서로 다른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1371년 날고륜이라는 사람이 로마제국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고황제를 뵈었으나, 야소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142)

로마사람에게 예수는 이단이니 얘기하지 않은 것 아닐까.

 

제왕과 신하

일이란 당했을 때와 말할 때가 서로 같지 않은 법이고, 바둑 이란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직접 두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144)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바둑 두는 것과 같아서 임금은 바둑을 두는 당국자요, 신하는 옆에 앉은 구경꾼입니다.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당국자보다 낫다.’는 선생의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145)

바둑에 대해 잘 모르지만 원래 당사자는 잘 안 보이는 것이 옆에 있는 사람은 잘 보이는 법이다.

 

문묘의 십일철

유약에 대한 말이 네 번이나 논어에 보이는데, 공자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자하와 자장 같은 무리가 심지어 공자를 섬기던 예법으로 그를 섬기려고 했다니, 그가 어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47)

사기열전에선 비슷하게 생겨 섬겼는데 아니었다고 했는데.... 이상하다. 문묘 십일철에 들어갔다는 걸 보면 후대에 평가는 또 다른가보다.

 

지전설을 받아들인 혹정

우리나라의 글 짓는 법이 중국과 다른 것을 알았다. 중국은 무자로 바로 말을 삼고 있으므로 경, , , 집이 모두 입속에서 흘러 나는 성어였다. (150)

 

환희기

들어가기

날마다 사람들이 장난삼아 구경하게 하면, 아낙네나 어린이까지도 이것을 요술로 알게 되어 마음과 눈이 놀라지 않을 테니 이게 바로 임금 된 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겠소.” (154)

무조건 못하게 막는 것보다 낫다는 거다. 일면 맞는 말이다. 요술이라고 하는데 아마 마술인가보다.

 

스무 가지 요술 이야기

여러 사람은 가슴이 섬뜩하여 똑바로 보지 못하고, 어린애들은 무서워 울면서 보지 않으려고 엎어져 기어서 달아났다. (158)

칼을 삼키고 뱃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옛날에 이런 마술을 했다니 신기하다.

요술쟁이가 바늘 한 줌을 입에 넣고 삼켰는데, 근지럽지도 아프지도 않은지, 말하는 것이나 웃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 가느다랗게 질질 끌려 빠지는 실이 자꾸만 길어지더니, 백 개 천 개 바늘이 한 실 끝에 꿰어지거나 밥알이 바늘 끝에 붙어 있었다. (161)

이 정도의 마술은 지금도 신기한 마술이다. 박지원은 이걸 일일이 보면서 썼을까? 한 번 보고 이렇게 자세히 쓴다는 것도 신기하다.

입을 벌리고 한 번 토하자, 붉은 불이 입에 가득 찼다. 젓가락으로 집어내어 보니 반은 숯이요, 반은 타고 있었다. (164)

잠자던 사람은 기지개를 켜면서 깨려다가 또 잠이 드는데, 갑자기 두 다리가 수레바퀴로 변하였다. 바퀴살이 아직 덜 되어서, 구경꾼들 가운데 징그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두 거울을 가리고, 등을 지고 달아났다. (166)

마술이 이 정도라면 보통 솜씨가 아니다.

바라건대 이 거울을 표준 삼아 덥다고 나아가지 말고 춥다고 물러서지 말며, 있는 돈을 흩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지어다. (166)

역시 박지원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마술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신장잡기

밤에 고북구를 나서면서

몽골이 중국을 드나들 때에 항상 목구멍이 되므로, 겹으로 된 관문을 만들어 그 요새를 지키는 것이다. (169)

중관을 나와서 만리장성 아래 말을 세우고, 그 높이를 헤아려 보니 열댓 길이나 되었다. 곧 붓과 벼루를 꺼내고 술을 부어 먹을 간 뒤에, 성벽을 어루만지면서 글을 썼다. “건륭 45년인 경자년(1780) 8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 그런 뒤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서생으로서 머리가 희어져서야 장성 밖을 한번 나가 보는구나.” (170)

아니 한국 사람이 어딜 가든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 오늘날만 그런 게 아니구나. 연암 박지원도 그랬다니.

 

밤에 고북구를 나서면서에 붙여 쓰다

지금 내가 이번 열하 여행을 더욱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은 장성을 나와서 사막 북쪽까지 이르렀던 선배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172)

나는 어려서부터 배짱이 없고 겁이 많아서, 어쩌다 낮에 빈 방에 들어가거나 밤에 조그만 등불을 보더라도 머리털이 움직이고 핏줄이 뛰었다. 올해 내 나이 마흔넷이 되었건만, 무서움을 타는 성질은 어릴 때나 마찬가지다. (172)

초상화는 호랑이처럼 무섭게 생겼던데 겁이 많다니, 그것도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마찬가지라니 의외의 성격이다.

 

하룻밤에 한 강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면서

어떤 사람은 이곳이 옛날 전쟁터였기에 강물이 그렇게 운다고 한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달려 있다. (174)

알맞은 불길 위에서 찻물이 끓는 듯한 소리는 흥취 있게 들린다. ... 종이 바른 창문에 바람이 우는 듯한 소리는 의아스럽게 들린다. (175)

계곡이나 강가에 살지 않아 이렇게 다양한 소리를 듣진 못했지만 비가 많이 와 물이 많을 때 물소리는 무섭기는 하더라.

낮에는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은 위험함을 보는 데만 쏠린다. 벌벌 떨면서 도리어 눈 가진 것을 걱정해야 할 판에 무엇이 들리겠는가. 지금은 밤중에 강물을 건너기 때문에, 눈으로 위험한 상황을 보지 못한다. 위험한 생각이 오로지 귀로만 쏠려, 귀가 벌벌 떨면서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176)

소리와 빛은 사람의 바깥에 있는 사물이다. 그런데 사람의 바깥에 있는 사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한다. (176)

자연 현상을 이렇게 세상사와 연결해서 생각하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 보통사람과의 차이다.

 

코끼리

내가 북경에서 코끼리 열여섯 마리를 보았는데, 모두 쇠사슬에 발이 묶여 움직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코끼리 두 마리를 열하의 행궁 서쪽에서 다시 보았는데, 온몸을 꿈틀대며 걸어 다니는 품이 마치 비바람이라도 치는 듯했다. (178)

코끼리의 걷는 모습이 이런가. 난 그냥 느리게 걷는다 싶었는데.

어떤 사람은 코를 입부리로 알고서 따로 코끼리의 코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기도 하는데, 코의 모양이 이렇게 생겼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8)

코끼리를 눈으로 보면서도 이처럼 이치를 알 수가 없다. 하물며 코끼리보다 만 배나 더 큰 천하의 사물에 대해서는 어떠하랴.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에 코끼리 상자를 따서 지은 까닭도 코끼리 같은 형상으로 만물이 변하는 이치를 궁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던가. (181)

언젠가 과학자인 사람이 상상을 한자로 코끼리 상자를 쓰는데 아마 중국에서 코끼리를 보지 않고 상상했기 때문에 그 글자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구외이문

조선 진주

이건 조개껍데기를 둥글게 간 것이지, 진주가 아니라오. 우리가 그대 나라의 진주를 보배롭게 여기는 까닭은 조개 기운이 없이 천연적으로 보배로운 빛깔이 나기 때문이지요.” (186)

 

조조의 물속 무덤

조조가 자신의 무덤이 도굴당할까 봐 거짓 무덤을 70개나 만든 사실을 통쾌하게 깨쳐 준 일이기도 하다. (187)

도굴당할까 봐 70개의 거짓 무덤을 만든 것도 기이하지만 물속에 무덤을 만들었다니 이는 기발하다.

 

양귀비의 사당

이같이 음란한 사당을 헐어 버리지 않는 까닭은 뒷사람들을 경계하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188)

 

입정한 스님

그의 육신은 아직까지도 허물어지지 않았고,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으며 부드러운 윤기가 흐른다. 다만 눈을 감은 채로 숨을 쉬지 않을 뿐이다. (189)

기이한 이야기가 맞기는 하다.

 

고린내와 뚱이

냄새가 몹시 나쁜 것을 고린내高麗臭라고 한다. 고려 사람들이 목욕을 하지 않으므로 발에서 나는 땀내가 몹시 나쁘기 때문이다. (190)

고린내의 어원이 이렇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비하하는 말이었구나.

 

젊다고 늙은이를 업신여기다니

저 늙은이는 손자가 다섯이고, 증손자가 둘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날마다 몸소 와서 강의를 듣고는, 돌아가서 여러 손자에게 다시 가르친답니다. 이토록 부지런하답니다.”

이렇듯 늙은이라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린아이라고 업신여기지 않았다. (192)

 

신라호

북경 동북 지방의 고을 가운데 고려장高麗庄이라는 이름이 많다. (194)

 

옥갑야화

옥갑 여관방에서 돌아가며 이야기하다

북경은 옛날에 풍속이 순박해서 역관들이 말하면 아주 많은 돈이라도 쉽게 빌려 주었는데, 요즘은 모두 속이기를 능사로 삼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었다. (197)

한국 사람들이 태생적으로 이런 걸까.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심어준 잘못된 의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민족성이란 것도 강점과 약점이 있다. 그걸 인정하고 강점을 키우는데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근년에 이르러서는 역관들이 화물을 스스로 단속하고, 단골집 주인에게 맡기지 않는다고 한다. (201)

허생은 끝내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윤영의 이야기는 이렇다. (202)

허생의 이야기가 실화라는 건가. 열하일기에 실린 허생 이야기를 따로 [허생전]이라 해서 만든거였구나.

 

허생

덕 있는 자에게는 사람이 저절로 찾아드는 법이야. 오히려 내가 덕이 없는 게 걱정이지, 사람 없는 걸 어찌 걱정하겠소?” (206)

[사기열전]에서 객식구가 3000명이었다던 게 생각난다. 공자고 그랬고 알아서 찾아왔다. 나도 덕을 쌓아야 되겠네. ~ 쉽지 않다.

어린애가 태어나서 숟가락을 잡을 만해지면 바른손으로 쥐게 가르쳐라. 하루가 앞서도 먼저 먹도록 사양하게 해라.“ (208)

재물 때문에 얼굴빛이 윤택해지는 것은 그대들이나 하는 일이지. 만 냥이 어찌 도를 살찌게 하겠는가? 내가 한때의 굶주림을 참지 못해 글 읽기를 마치지 못했으니, 그대에게 빌린 만 냥이 부끄러울 뿐일세.” (209)

우리 조선은 배가 외국과 통하지 못하고, 수레가 나라 안에서 두루 다니지 못하거든. 그래서 온갖 물건이 이 안에서 생겼다가 이 안에서 사라지지.” (210)

예전에 [허생전]을 읽었을 땐 그냥 지나쳤던 부분인데 [열하일기]를 읽고 보니 박지원의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게 보인다. 수레에 관해선 특히나.

바닷속에다 그 돈을 다 던져 버리고 온 까닭은 우리나라가 좁아서 아무 데도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네.” (212)

중국에 비하면 좁긴 하다. 게다가 외국과 통하지 못하니 더욱 그렇다. 박지원이라면 외국과의 소통에 힘을 쏟았을 텐데, 신문물을 도입하고 나라를 발전시켰을 텐데, 그럼 일본에 지배를 받지도 않았을 텐데....

사대부들이 모두 삼가 예법을 지키는 판인데, 누가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으려고 하겠습니까?” (214)

아마 박지원이 이러고 싶었을 거다. 그 시대엔 너무 앞서간 혁신이다.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그래서 죽고 80년이나 지나 1911년에야 출판이 되었다.

 

허생뒤에 붙여 쓰다 1

어떤 사람은 허생은 명나라 유민이다.”라고 했다. 명나라가 망한 숭정 갑진년(1664) 이래로 명나라 사람들이 많이 동쪽으로 나와서 살았다. 허생도 혹시 그런 사람이라면, 그 성이 분명 허씨는 아니리라고 생각된다. (216)

 

허생뒤에 붙여 쓰다 2

나는 그제야 비로소 이 노인이 이상한 도술을 지닌 사람임을 알았다. (221)

허생의 아내 말이야. 참 가엽더군. 결국 다시 굶주릴 거야.” (222)

박지원도 윤영인지, 신색인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가 허생이라는 거다. 참 뭐에 씌인 건지....

 

황도기략

서관

정양문 오른쪽에 있는 것은 남관이니, 모두 우리나라의 사신이 묵는 객관이다. (225)

 

천주당

동쪽을 바라보니, 지붕 머리가 종처럼 생겨 여염 위로 우뚝 솟아 보이는 것이 바로 천주당이었다. (228)

제일 위에 종탑을 보고 하는 말인가 보다.

뜻을 세우는 것이 너무 고답적이고 이론이 교묘한 데만 쏠려서, 도리어 하늘을 빙자하여 사람을 속이는 죄를 범하였다. (229)

1769년에 천주당이 헐렸으므로, 풍금은 남은 것이 없었다. (229)

앞에 묘사한 걸로 봐서 아마 파이프 오르간이지 않았을까 한다.

 

서양화

내 눈으로 이것을 보려고 하자,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내 눈을 뽑는 것 같은 무엇이 있었다. 나는 그림 속에 있는 그 인물들이 내 가슴속을 꿰뚫고 들여다보는 것이 싫었다. (231)

또 사람 머리와 몸뚱이에 새 날개가 돋아난 자도 있었다. 온통 기괴망측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232)

종교화는 상상화이니 눈으로 본 적이 없는 모습들일 것이다.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벌렸다. 떨어지면 받들 듯이 고개를 젖혔다. (233)

서양화의 입체적인 표현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다.

 

유리창

유리창은 정양문 밖 남쪽 성 밑에서 가로 뻗치어 선무문 밖까지 이르는 지역이니, 곧 연수사의 옛터이다. (234)

난 유리창이라고 해서 진짜 유리창인 줄 알았지, 지명일 줄 몰랐다. 유리와 관련있는 지명이긴 하다.

비록 전속 기술자라도 모두 4개월 동안 먹을 식량을 가지고 들어가는데, 한 번 들어가면 마음대로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234)

왜 그랬을까? 아마 그 당시는 유리가 보석만큼 비싸서이지 않을까.

 

알성퇴술

순천부학

그들이 군사들에게 공자묘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했으므로, 중이 절을 지키기 위해 공자의 위패를 황급하게 빌려다가 성전 속에 모셨다. (238)

 

학사

밤에 내원과 함께 계산해 보니, 전부 580여 칸이다. (240)

이제 청나라도 세워진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 안이 태평하고 문물의 교화가 혁혁하여 제 스스로 한나라나 당나라보다야 낫겠지.’ 생각하면서 자랑하지만, 오늘 내가 여러 학사를 돌아보니 십중팔구는 텅텅 빈 방뿐이었다. (240)

그러나 여기서도 오히려 본받을 일이 없지는 않다. 이곳의 서재와 학사들이 텅텅 비어 있다면 응당 먼지에 파묻히고 잡풀이 돋아났을 터인데, 어디든지 씻고 닦아 맑게 정돈했으며 탁자들이 가지런했다. (241)

박지원의 마음자세를 엿볼 수 있다. 어디서든 배울 점을 찾아 발견하고 기록했다.

 

문승상의 사당

송나라가 원나라에게 망할 때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송나라의 재상 문천상의 사당은 땔나무 시장에 있는데, 동네 이름은 교충방이다. (242)

승상 발라가 초헌례를 행하는데, 별안간 회오리바람이 불어 신주를 구름 속으로 휩싸서 올라가 버렸다. 할 수 없이 신주에 전송승상이라고 고쳐 썼더니, 하늘이 비로소 맑게 개었다. (243)

중국 역사나 인물에 대해 다 아는 것이 아니니, 문천상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낼만한 인물인지 모르겠다.

 

문승상의 사당을 참배하고서

후세에 와서 천하를 차지한 사람은 모두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확실한 자신이 없었기에 하늘을 믿지 않았고, 하늘을 믿지 않았기에 사람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245)

그러면 당시 하늘의 명령을 받았다는 임금으로서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나는 그를 백성으로 대하되 신하로 삼지 말고, 존경하되 직위는 주지 말며, 봉작도 조회도 하지 않는 반열에 둘 뿐이다.’하고 대답하겠다. (246)

박지원이 얘기하듯 했으면 문승상이 받아들였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관상대

우리나라 전라도 강진현 북쪽 끝에 나온 곳은 북극 몇 도인데, 회수가 황하를 들어오는 어구와 직선으로 되어 있으므로, 제주도의 귤이 바다를 건너 강진에만 오면 탱자가 된다.” (248)

귤화위지, 사람이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인데, 여기선 기후가 변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 같다.

 

시원

. . . . . 경 등의 차례로 하지도 않았고, 비록 낙제한 시험지라도 채점이 친절하고 상세하여, 응시자가 낙제한 이유를 똑똑히 알도록 해주었다. (250)

그럼 조선은 어땠나? 안 그랬으니 이렇게 썼겠지.

 

조선관

조선 사신이 묵던 곳은 원래 옥하관이었는데, 옥하교 위에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러시아 사람이 차지했다. (251)

조선 사신이 묵던 곳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에서 사신이 많이 왔었나보다.

 

앙엽기

들어가기

겨우 비석 하나를 읽는데도 어느새 몇 시간이 지나가므로, 자개와 구슬처럼 찬란한 궁궐 구경도 문틈을 지나가는 말이나 여울을 달리는 배처럼 되고 보니, , , , , 마음의 오관이 함께 피로해지고, 아울러 종이, , , 벼루의 사우가 맥이 풀렸다. (255)

그만큼 제대로 알려면 힘이 들었다는 거다.

 

흥인사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이 없고, 그린 해나 날짜나 낙관이 없으니, 구경하는 사람들도 무슨 인연으로 시주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이 그림이 송나라 충신 육수부가 임금을 안고 바다로 가는 모습이라 생각했다. (257)

밥이 없으면 죽고, 군사가 없으면 망하지만, 성인은 죽고 망한 뒤에까지도 오히려 신의를 지키려고 하였다. (258)

 

백운관

기이하고 오래된 그릇과 병풍이며 글씨나 그림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보물이었다. (260)

사찰인데 화려한 사찰인가 보다.

 

법장사

가운데는 텅 비어 나선형으로 층층대를 놓았는데, 한밤중같이 캄캄했다. 손으로 더듬으면서 발을 떼어 놓는데, 마치 귀신 동굴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261)

탑이 얼마나 크면 사람이 들어가서 계단으로 올라가게 만들었을까.

1층에는 우리나라 김창업의 이름이 있고, 아래에는 내 친구 홍대용의 이름도 있는데, 먹빛이 방금 쓴 것만 같았다. (261)

지난 번 만리장성에서 붓으로 썼다고 하더니, 그 당시엔 이렇게 쓰는 게 당연한 거였나 보다.

 

융복사

온갖 물건이 뜰에 가득 찼으며, 구슬과 보물이 이리저리 발길에 채이다시피 굴러다녀서 걷는 사람의 발길을 조심스럽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송구스럽게 했으며, 사람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263)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비록 심부름하는 하인 하나 없더라도, 자기 발로 장터에 나가 막 굴러먹는 장사치를 상대하여 물건 값이나 흥정하는 것을 아직 좀스럽고 더러운 짓으로 친다. (264)

조선의 이런 반상의 도리라는 것 때문에 새로운 걸 받아드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기들 마음대로 물건을 선택하면서 오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들의 소박하고 솔직한 면을 볼 수 있다. 이래서 중국 사람은 저마다 물건을 감상할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64)

 

관제묘

관운장의 사당은 천하 어디를 가든지 있다. (265)

관우는 전사의 신, 전신이다. 그러니 당연하다.

우리나라 남관 왕묘 바람벽 위에 걸린 그림도 대개 이곳을 모방한 것이다. (265)

 

숭복사

당나라 태종이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와 전쟁에 죽은 장수들을 불쌍히 여겨, 이 절을 짓고 명복을 빌었다. (266)

벽 사이에 서 있는 효녀 조아의 비석을 보고 울면서, ‘한갓 여인의 몸으로도 오히려 이렇거든.’ 하고는 끝내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라고 기록했다. (266)'

 

이마두의 무덤

이곳에 있는 것은 모두 서양 선교사의 무덤인데, 동서 양쪽에 잇따라 장사 지낸 것이 모두 70여 기나 되었다. (268)

빗돌을 세워 야소회사이공지묘라고 글을 새겼고, 왼편 옆에는 잔글씨고 이 선생의 이름은 마두이다. 서양 이탈리아 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참다운 수양을 했다. 명나라 만력 신사년(1581)에 배를 타고 중화에 들어와 천주교를 널리 펐다. (269)

이마두가 사람이름이었구나. 그런데 선교사의 무덤을 따로 만들어준 것을 보면 중국은 천주교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나보다.

 

작품 해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한 여행기

명나라 왕조가 망한 지 200년이 되도록 망한 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비현실성을 풍자했다. 청나라를 야만시하는 풍조 속에서, 그는 노론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명분론에서 벗어나 현실을 곧바로 보았던 것이다. (270)

20세부터는 친구들과 어울려 산속의 절간이나 시골집을 찾아다니며 글공부를 했다. 그러나 우울증이 생겨, 사나흘씩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이야기꾼들을 불러다 밤새 시중의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이러한 이야기들이 뒷날 그의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271)

책상머리에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이야기이기에 힘이 있었고 독자의 반응이 있었던 거다. 나도 살아있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글을 써야겠다.

벼슬에 관심 없던 그가 팔촌형 박준원을 따라 연행에 자제군관으로 따라나선 까닭은 벼슬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평생소원이었던 중국 유람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를 계기로 해서 천하의 명문장을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272)

유럽의 18세기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백과전서를 편찬하여 지식의 범주를 넓혀 가던 시대였다. (272)

집권층에서는 몇 차례 당파싸움 끝에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여,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북벌책을 집권의 명분으로 이용하였다. (272)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집권층은 북한을 자신의 집권으로만 이용하고 적대시하며 국제정세에서 주도적인 모습보다는 강대국에 끌려다닌다. 조선시대에 우물안 개구리로 정보도 없어 대처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왜 이러고 있나 답답하다.

조선과 명나라가 비슷한 시기에 개국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국경의 장벽을 높이 쌓았다. 사신 외에는 국경을 넘어갈 수 없어, 유학생이나 무역상이 끊어졌다. (273)

그가 왕민호와 지루할 정도로 지전설에 관해 토론한 것은 이미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중국 학자에게 설득하기 위한 장치인데, 왕민호는 결국 지전설에 동의하였다. (274)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열하일기가 출판되지 못한 사실만 보더라도, 기득권층이 얼마나 열하일기를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275)

[허생]의 주인공은 물론 역관이 아니라 허생 자신이지만, 그를 믿고 거금 만 냥을 빌려 준 부자는 역관 변씨이다. (276)

[호질][허생]은 둘 다 남의 이야기를 가져온 형식이다. 그러한 장치를 위해서 옥전현의 상점과 옥갑의 여관방이 등장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임을 밝혔다가는 사회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생길까 봐 조심했던 것이 아닐까. (276)

그래서 [열하일기]안에 넣어서 썼구나.

이가원이 연암소설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리자, 열하일기원본을 소장하고 있던 박지원의 후손 박영범이 원본을 연구 자료로 삼으라고 이가원에게 기증하였다. (278)

후손 중에 연구자가 없었나보다. 방계 후손인 박영철은 출판에 비용을 댔는데 원본을 주지 않은 걸 보면 박영범과 연결이 없었나보다.

선생의 글이 비록 훌륭하기는 하지만, 경학의 본도에 맞는 고문체가 아니고, 이야기책 투의 글입니다. 열하일기때문에 우리나라의 문장이 모두 고문을 버리고 이야기책 투의 글이 되지 않을까 크게 걱정됩니다.” (281)

정조가 반성문을 쓰게 할 정도였으니, 그 당시엔 파격적인 문체이긴 했나보다. 위의 이야기를 한 박남수가 열하일기를 태워버리려고 했단다.

박지원이 풍자와 해학의 이야기 투가 아니라 고문 투로 열하일기를 써서 정조에게 조선 후기의 병폐를 고칠 처방전으로 바칠 수는 없었을까. (282)

고문 투로 썼으면 항소글이 되지 않았을까. 박지원의 글이 반영됐다면 조선이 그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일본이 식민으로 삼을 수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는 건 확대해석일까.

 

박지원 생애

1737마갈궁. 한유. 소동파와 격이 같으며 반고와 사마천 같은 문장력을 지녔지만 남의 훼방을 받을 사주였다는 기록이 전해짐. (283)

사주가 맞았는지 결국 훼방을 받긴 했다.

1805(69) 1020일 세상을 떠남. 제자 박제가가 문병하러 갔다가 연암의 운명을 보고 몹시 슬퍼하였으며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박제가도 이듬해 세상을 떠남. (287)

얼마나 슬펐으면 병을 얻었을까. 나이 차이도 많이 난 걸로 아는데 박제가는 이른 나이가 세상을 떠났겠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열하까지 기행한 순서대로 목차를 정한 것이라 따로 거론할 것이 없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수레에 관한 내용은 설명을 보고서 상상을 할 수는 있으나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림이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성에 관한 글이 많은데 실려 있는 지도는 어떤 지도인지도 표시되어 있지 않고, 글에 있는 건물이 없는 것도 많다. 좀 더 자세한 지도를 넣었으면 좋겠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를 갈 당시 조선과의 관계도 포함해서. 중국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뒷부분 해설에 다루긴 했다. 앞부분에 넣는 게 낫겠다.

 

3. 이 책의 장점

무엇보다 연암 박지원에 대해, 그의 생각에 대해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중국 모습이나 여러 가지 조선과의 비교로, 어떻게 달랐는지도 알 수 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열하일기]의 코스로 가보고 비교하며 책을 써도 좋겠다. 이미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나 [허세욱 교수의 속 열하일기]가 있다. 2008년 신동아에 연재하던 걸 묶어서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이란 책이 있다. 고전을 소개하고 저자와 시대적 배경, 후일담 등을 같이 엮은 책이다. 재미와 유익 등 여러 마리 토끼를 잘 잡은 책이다. 물론 이 책엔 양반전도 있다. 하지만 좀 더 여행에 맞추고 두 나라의 현 정치적 상황까지 넣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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