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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6일 11시 47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연암박지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1737년(영조 13)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랐으며, 1752년 16세 때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맹자>와 <사기(史記)>를 배웠다. 22세 때 부터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 실학을 공부하던 이들과 교우하여 영향을 받았으며, 30세 때는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교우하여 서양의 신학문 등을 배울 수 있었다.   

1777년(정조 1)에는 벽파(僻派)로 몰리면서 정치적 위협을 느낀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였다. 그의 호인 연암은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얻은 것이다. 그 곳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요동(遼東)ㆍ요하(遼河)ㆍ북경(北京) 등지를 여행하면서 청나라의 문물과 생활 기술 전반을 자세히 살피고, 그의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생기있는 필치로 기록하였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와 신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배워야 할 점을 논하였고 조선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으로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의 책은 매우 큰 논란이 되었다. 특히 당시 조정에서는 배청론이 주류였기 때문에 그의 책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다. 그러나 재야에서는 그의 생생하고 자세한 여행기록과 재치있는 문체, 참신한 의견 등으로 인해서 즐겨 읽혀졌다고 한다.

1786년 정조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고 이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ㆍ제릉령(齊陵令),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에 사퇴했다가 1797년 다시 면천 군수(沔川 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지어 바쳤다. 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하였으나 다음 해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盤松坊)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해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필균이 양육하였다. 1752년(영조 28) 전주 이씨(全州李氏)보천(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특히 보천의 아우 양천(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를 비롯해 주로 역사 서적을 교훈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했으며,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평생 문우로 지내면서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학문이 뛰어났으나 1765년 처음 과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후로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서상수(徐常修)·유득공(柳得恭)·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 때를 전후해 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懋)·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해 자주 토론했으며, 이 무렵 유득공·이덕무 등과 서부 지방을 여행하였다. 당시 국내 정세는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벽파(僻派)였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1780년(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자, 수행(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 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이 속에서 평소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해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했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1786년에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안설 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와 위의 책들은 그가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특히 ≪열하일기≫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이 때는 명(明)에 대한 의리와 결부해 청(淸)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이 속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적 수용력이 부족했으나 당시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 강한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북학사상(北學思想)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청나라에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해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인식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개선책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역대 중국인들이 우리에게 갖는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방법도 서술하였다.

그는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그가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그가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朱子學)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이 생각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주창이었으나 과감한 개혁 의지의 한 표출로 나타났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을 집약한 것이 곧 이용후생 이후에 정덕(正德)을 이루는 방법이다. 이는 정덕을 이룬 뒤에 이용후생을 추구하는 방법과 비교할 때 발상의 일대전환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창하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요체이며 이를 위해 제시한 것들은 자기 주장의 완성을 위한 방도이다. 그 방도의 구체적 현상은 정치·경제·사회·군사·천문·지리·문학 등의 각 분야에서 나타났다. 특히 경제 문제에서는 토지개혁정책·화폐정책·중상정책(重商政策) 등을 제창했으며 현실의 문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미래의 비전을 찾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남긴 문학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고 있다. 곧 당시 주조를 이루는 복고적 풍조에서 벗어나 문학이 갖는 현실과의 대립적 현상을 잘 조화시켜, 시대의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수렴할 수 있는 주제와 그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의 사고가 고정적 관념에서 벗어나 일대 전환을 시도한 것과 맥락을 이루며, 문학 작품의 매개체인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고 당대에 맞는 문체 개혁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 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 표현되는 이 말은 시속문(時俗文)의 인정을 의미하며 그렇다고 문승질박한 비평소품(批評小品)을 찬양한 것은 아니다. 고법(古法)을 버리는 이유는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문학을 창조하는 데 있었기에 새롭기 위해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표현의 절제와 문장 조직 방법의 운용, 사실적인 표현 등은 그가 생각한 당대의 현실과 문학과의 관계를 연결짓는 방법들이었다. 이는 그의 문집 속에 수록된 당시 그와 교유했던 사람들의 문집서(文集序)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일련의 한문 단편(漢文短篇)들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초기에 쓴 9편의 단편들은 대체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나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 혹은 민족 문학의 맥을 연결하는 것들로서 강한 풍자성을 내포하고 있다.<양반전>의 경우는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의 계급이 가지는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어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었다. 다음으로 북경을 여행한 이후에 쓴 두 편의 단편은 여행기 속에 포함된 것으로 역시 그의 실학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 중에서 <허생전 許生傳>은 중상주의적 사상과 함께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그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와 함께 그것을 실제로 작품화한 실례가 될 것이다.

그의 저술은 모두 ≪연암집 燕巖集≫에 수록되었다. 그가 가진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서, 실제로 1900년 김만식(金晩植) 외 23인에 의해 서울에서 처음 공간된 그의 문집은 책을 초록한 형태였다.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가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음은 문집 내용이 갖는 의미를 짐작케 한다.

그의 저술에서 특이한 점은 문집 대부분이 논설을 중심으로 한 문장이 대부분이며, 시는 각체를 합해 42수가 전부이다. 이 점에 대해 아들 종간(宗侃)은 <영대정잡영 映帶亭雜咏>(권제4) 말미에 붙인 부기에서 유실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교유한 문인들의 문집 속에도 그가 많은 작품들을 지었다고 하고 있어, 이 역시 유실되었음을 증명하는 한 예일 것이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작품으로는 <허생전>·<민옹전 閔翁傳>·<광문자전 廣文者傳>·<양반전>·<김신선전 金神仙傳>·<역학대도전 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 鳳山學者傳> 등이 있다. 1910년(순종 4)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받았다.

열하일기의 정의

조선 정조 때에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

열하일기의 내용

26권 10책. 필사본.

간본(刊本)으로는 1901년 김택영(金澤榮)이 ≪연암집 燕巖集≫ 원집에 이어 간행한 동 속집 권1·2(고활자본)에 들어 있고,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A5판 286면의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간행한 신활자본 ≪연암집≫ 별집 권11∼15에도 전편이 수록되어 있다. 보유편도 있고 1956년 자유중국의 대만대학(臺灣大學)에서 동 대학 소장본을 영인한 것도 있다.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 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각 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강록>은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잡지>는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筆談) 중심으로 엮고 있다.

<일신수필>은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관내정사>는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 虎叱>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막북행정록>은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이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이문>은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환연도중록>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금료소초>는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옥갑야화>는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다.

<황도기략>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이다. <알성퇴술>은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앙엽기>는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다.

<경개록>은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황교문답>은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다. <행재잡록>은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선시말>은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이다. <희본명목>은 다른 본에서는 <산장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다. <찰십륜포>는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망양록>과 <심세편>은 각각 중국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필담>은 주로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동란섭필>은 가악(歌樂)에 대한 잡록이며, <산장잡기>는 열하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환희기>와 <피서록>은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산장에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내용이다. ≪열하일기≫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 北學議≫와 함께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다(如出一手).”고 한 평을 들었다.

주로 북학을 주장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고, 당시에 정조로부터 이 책의 문체가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으나 많은 지식층에게 회자된 듯하다.

열하일기의 의의와 평가

종래의 연행록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기묘한 문장력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당시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하겠다.



II.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P.24
우리동쪽 나라 수천리는 두강을 경계로 나라를 이루어 홀로 명나라 왕들의 제도를 지켰다. 이는 명나라 황실이 아직도 압록강 동쪽에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서 몰아내고 중원을 깨끗케하여 선왕의 역사를 다시 빛내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라도 높여서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 의리는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언정, 당시의 정치는 생존의 문제인지라 난감한 문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왕이었다면 의리는 찾되 앞으로의 삶에 관해 충분히 고찰하는게 맞았을 듯 싶다.

P.25
흙탕물이 하늘에 닿았다.
- 얼마나 물이 많았으면 이런 표현을 썼을까?

P.33
중국어를 가장 잘해, 득룡이 아니면 일행의 모든 일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 에이스의 운명 같은 것

P.34
당신네 상전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지?
-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나으리들이 기분이 나쁜거지. 

P.36
남한산성의 남문에 앚아서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마치 물 위의 꽃과도 같고 거울 속의 달과도 같았다.
- 멋진 포현

P.39
쇤네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 두곳을 구경할 때는 제 두손으로 눈알을 꽉 잡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어느 놈이 빼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지.
- 멋적은 말에 참 충직한 종이구나

P.39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차들이 길에 즐비하며, 벌여 놓은 그릇은 모두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였다. 어디를 보아도 시골티라고는 조금도 없다. 지난번에 내 친구 홍덕보가 “규모가 크면서도, 그 심법은 세밀하다.”고 충고하더니 과연 그러했다. 중국의 동쪽 변두리인 책문도 이러한데 북경으로 갈수록 더욱 발전 될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였다.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까 하는 순간 온몸이 화끈거렸고 나는 깊이 반성하였다
- 변방도 이러할진데, 중심으로 들어가면 어떠하겠는가?

P.40
이는 하나의 시기하는 마음이다. 내 본래 성미가 맑아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이제 한 번 다른 나라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아직 만 분의 일도 못 보고 벌써 이런 나쁜 마음이 생기니 어찌 된 까닭일까. 아마도 보고 들은 것이 좁은 탓일 게다. 만일 밝은 눈으로 세계를 두루 살핀다면, 어느 것 하나 평등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평등하다면, 시기와 부러움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 아는 만큼 보이고 배운만큰 산다

P.40
저 사람이야 말로 평등의 눈을 가진 이가 아니겠느냐?
- 평등의 눈은 어쩌면 생각의 깊이만큼에 있지 않을까?

P.47
우리나라가 모두 위만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한다.
- 알지 못함은 가르쳐주가나 찾아주지 않았음 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힘의 논리가 작용했을 것이고...

P.49
차츰 동쪽으로 옮겨갔다. 마치 중국의 진나라와 송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가던 사정과 비슷했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 지금 생각하면 억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P.57
고려는 안으로 삼국을 통일 했다고는 하지만, 그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했다. 후세에 올졸한 선비들은 부질없이 평양의 옛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역사책만을 믿고 흥미롭게 수나라와 당나라의 예 자취를 이야기 한다. "이곳이 패수요, 이곳이 평양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어긋난다. 그러나 이 성이 안시성인지, 봉황성인지 어떻게 분간하겠는가?
- 지금은 이러한 역사적 고증을 하고 있을까? 오히려 더 어려울 것 같기도 한데...지금의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궁금해 진다.

P.58
내 자신이 이토록 재빠를 줄 몰랐다
- 위급해 지면 초인적인 힘으로 대응하게 된다

P.60(++)
내 오늘에야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에게도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 가끔 혼자가 되어봐야 혼자서 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더라

P.60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
이렇게 천지간의 큰 시야를 만나 별안간 울고 싶다니 웬 말씀이오
- 나도 넓은 평야를 만난다면 울고 싶을 만큼 감정이 북받쳐 올라올까?

P.60~61(++)
사람이 다만 질정중에서 슬플 때에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되며,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된다오.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 버릴 때에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으니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오. 정에 이르러 우러나오면 저절로 이치에 맞으니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겠소.
- 연암선생님의 멋진 통찰이시다. 울음하나에 깃든 인간의 모든 감정을 짚어낼 수 있다니

P.61
저 갓난아기에게 물어보시오 그가 처음 날 때 느낀것이 무슨 정일까. 그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에는 부모와 친척들이 앞에 가득한 것을 보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겠소(중략)
인생이란 신성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마침내는 죽어야만 하고, 태어나고 죽어가는 중에도 모든 근심 걱정을 골고루 겪어야 하기 때문에, 그 아기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며 저절로 울음보를 터뜨려 자신을 위로하는 것은 아닐까요?
- 언제부터 인생의 슬픔과 죽음을 알 수 있었을까?

P.78
하늘 위엔 술별
- 늦게까지 술마시다가 본 별이라는 거겠지?

P.83
남이 말한 것을 들은 것만으로 말하는 자들과는 서로 학문을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평생 동안 생각지 못한 것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만일 어떤 이가 “성인이 태산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생각하였다.”고 한다면,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시방세계를 보살핀다고 하면, 그는 곧 황당한 일이라며 배격할 것이다. 서양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 밖을 돌아다녔다고 하면, 그는 괴상하고도 허황한 이야기라고 꾸짖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와 함께 크나큰 세상 구경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 맞다. 그 깊이가 다른 것이다. 남의 말을 전할 뿐이지, 깊이를 이야기하다보면 알 수가 있다.

P.84(++)
어젯밤 나는 구름과 비 너머로 밝은 달을 껴안고 누웠다
- 외워뒀다가 한번은 써먹고 싶은 구절이다

P.90
참으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천하를 위해 일하는 자는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 본 받으려고 한다(중략)
우리 백성에게 이롭게 해야 한다.
- 흰고양인들어떻구, 검은 고양인들 어떠리. 귀만 잡으면 그만인것이지. 그렇지만 명분도 중요했을 것이다. 그 명분을 만들고 함께가려 노력하는게 통치자의 몫이지. 연암선생이 정치를 했다면 어떠했을까?

P.90
나같이 미천한 선비도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와조각에 있고, 똥 부스러기에도 있다" 고 하겠다.

P.91(++)
저 기와 조각이나 똥 부더기가 모두 장관이다. 반드시 성곽, 궁실, 누각, 시장, 잘간, 목축이라든지 또는 저 광막한 들판이나 안개 어린 나무가 기이하게 마뀌는 모습만 장관이 아니다.
- 작은 것안에서 전체를 더듬어 이후를 짐작하는게 연암선생님의 추론방식인거 같다. 아마도 페르미추론과 같은 방식을 연암선생께서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 같다.

P.95
수레는 천리로 만들어져 땅위에 기어다는 것이며, 물을 다니는 배이고, 움직이는 방이다. 나라에서 쓰는 것 중 수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주례]에서 임금의 재산에 대해 수레가 많은지 적은지로 대답했으니 수레가 물건을 싣고 사람을 태우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P.95~96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만일 수례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테니, 어찌하여 길거리가 좁고 산길이 험하다고 걱정하랴
-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보다, 도움이 되는 일을 한후 훗일을 도모해야 한다.

P.97
이는 사대부들의 잘못입니다
- 열받은 용기일까?

P.97
그들의 연구가 정미하고 행하기도 간편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랴. 이는 참으로 민생의 살림에 이익이 되고, 나라의 큰 그릇이 되지 않겠는가. 이제 날마다 내 눈에 놀랍고 반가운 것이 나타나는데, 수레의 제도로 미루어 모든 일을 짐작할 수 있겠다. 어렴풋하게나마 몇 천 년 동안 모든 성인이 고심한 것도 이해할 수 있겠다.

P.98
뜻있는 이가 잘 연구하여 그 제도를 본 받는다면 극에 달한 우리나라 백성의 가난병도 얼마쯤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 백성의 어떤점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는 문구이다. 그런데 연암선생께서 백성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알수가 없다.

P.107
저는 오래전부터 부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부질없는 말을 삼가고 있습니다.

P.107
돌아가면 우리날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서 모두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하려는 거지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가고, 튼튼한 갓끈도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거요.

P.114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는 자를 도라고 하고 남을 못살게 굴다가 목숨까지 빼앗는 자를 적이라고 한다.

P.115
범이 사람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저희낄 서로 잡아먹는 것만큼 많지는 않을 것이다
- 참으로 그렇네...

P.119
자나 깨나 가슴을 치며 명나라 왕실을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중략)
사람이 보면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이 뚜렷하겠지만, 하늘이 본다면 은나라의 우관이나 주나라의 면류관도 제각기 때를 따라 변했으니, 어찌 반드시 청나라 사람들의 홍모만을 의심하랴.


P.125
조는 이는 졸고 이야기하는 이는 이야기하는 것이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 원래 사람이 다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지. 다 내맘같지 않아. 그걸 알면서도 마음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

P.131
모든 물건 자체에는 빛이 없음을 보아서, 그 본질은 어둡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어두운 밤중에 거울을 보더라도 목석과 다름없으니, 비록 빛을 받아들일 성격은 있지만 그 자체가 밝을 수 있는 바탕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햇빛을 빌린 뒤에야 빛을 낼 수 있으므로 만사하는 곳에 도리어 밝은 그림자가 생기니, 물이 밝아짐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구의 밖에 바다가 둘러져 있는 것은, 비유하건대 한 개의 큰 유리 거울과 같습니다. 만일 달 세계에서 이 땅의 빛을 본다면 역시 상현달, 하현달, 보름달, 그믐달, 초하루 등이 있겠지요. 해를 맞댄 이쪽저쪽에는 큰물과 큰 땅덩이가 서로 잠기며 비춰져서, 그 빛을 받아 반사되어 바꾸어 가며 밝은 그림자를 토하는 거지요. 마치 저 달빛이 이 땅덩이에 고루 펴졌으나 햇빛을 받지 못한 곳이 저절로 어두워져서 상현달이나 하현달이 되기 전 초승달처럼 빈 둘레만 걸려 있고, 그 흙의 깊은 곳이 마치 달 속의 검은 그림자처럼 엉성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 맞아. 그렇군.

P.137
저는 하늘이 만든 것 중 모난 물건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기 다리, 누에 궁둥이, 빗방울, 눈물, 침 같은 것까지 둥글지 않은 게 없지요. 산과 강, 큰 땅덩이, 해와 달, 별들도 모두 하늘이 창조한 것이었으나 아직 모난 별을 본 적이 없으니, 지구가 둥근 것은 의심할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 이 말이 왜 그리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걸까?

P.143
서학이 어찌 불교를 헐뜯을 수 있겠습니까. 불교는 참 교모하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다만 불교에는 비유가 많아서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 없다가 겨우 깨달아 봤자 결국은 환이라는 글자 한 자만 남는게 결점이지요.

P.145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바둑 두는 걱과 같아서 임금은 바둑을 두는 당국자요, 신하들은 옆에 앉은 구경꾼입니다.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당국자보다 낫다.’는 선생의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 잘보이는게 사실인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자신의 고집을 부리다가는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다.

P.154
만일 천자가 소심하게 이런 것을 자로 재고 깊이 추궁한다면 도리어 깊숙한 곳에 숨어 살다가...
- 알면서 모른척 해주는게 권력인거야.

P.170
"건륭 45년인 경자년(1780년) 8월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 그런 뒤에 크게 웃음 말했다.
내가 서생으로서 머리가 희어져서야 장성밖을 한번 나가 보는 구나.
- 장난으로 남기고 싶으셨던 것일까? 진짜로 다녀가심을 기록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P.172
우리나라 선배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조극 강토를 떠나지 못했지만...
- 선비들이 많이 보고 많이 접했어야 했었는데, 이점이 아쉽네.

P.176(++)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자는 귀나 눈에 얽매이지 않고 귀나 눈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할 수록 더욱 명이 되는 법이다.
- 이 두가지를 알았다면 나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것인가가 내 숙제

P.179
코끼리의 어진 성품은 바로 눈에 있다
- 그 눈에서 연암선생님은 어진성품을 보셨구나!

P.190
냄새가 몹시 나쁜 것을 고린내라고 한다. 고려 사람들이 목욕을 하지 않으므로 발에서 나는 땀내가 몹시 나쁘기 때문이다.
- 처음 알았네.

P.191
사람이 젊을 때에는 앞길이 매우 멀어서, 마치 자기에게는 늙은 날이 없을 것처럼 생각한다.
- 그러나 나이를 먹게되면 젊음은 정말 한 순간임을 안다

P.192(++)
물건은 하찮으나 정은 깊고 의리는 온 세계에 무거울 것입니다.
- 참 멋진 말이구나

P.198
돌아와 보니 역관의 집은 벌써 전염병으로 몰사했다
- 말은 씨가 된거지.

P.204(++)
대개 남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 자는 자기 계획을 과장하여 먼저 신의를 나타내는 법이야. 그러면서도 얼굴빛은 부끄럽고도 비겁하며, 말은 중복되곤 하지. 그런데 이 손님은 비록 옷과 신이 다 떨어졌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매가 오만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는 물질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야.
- 그렇다.

P.206(++)
덕 있는 자에게는 사람이 저절로 찾아드는 법이야. 오히려 내가 덕이 없는 게 걱정이지, 사람 없는 걸 어찌 걱정하겠소?
- 덕이 없음을 걱정할 일이지. 그런데 돈의 논리는 꼭 그런것 같지만은 않아. 덕이 없어도 돈이 있는걸 보면 말이야

P.211
요즘 사대부들이 지난번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으려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슬기로운 선비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지혜를 펼칠 때이지요. 그런데 그대 같은 재주를 지니고도 어찌 괴롭게 어둠 속에 잠긴 채로 이 세상을 마치려고 하시오

P.214
대개 대의를 천하에 외치려고 할때 먼저 천하의 호걸과 사귀지 않고 서는 성공한 적이 없었소. 남의 나라를 치려고 하면서 먼저 간첨을 쓰지 않고서 성공한 적도 없었소
- 3C 분석, 경쟁은 간첩과 철저한 조사로...

P.244
천고에 흥하고 망할 때에는 하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늘의 뜻이 요망스러운 재앙과 상서로운 경사로 나타날 때에는 이를 반드시 좇기도 하고, 알뜰하게 힘써 붙들기도 하여, 비록 부녀자와 어린아이라도 하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을 것이다.

P.245
후세에 와서 천하를 차지한 사람은 모두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확실한 자신이 없었기에 하늘을 믿지 않았고, 하늘을 믿지 않았기에 사람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의 힘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 자는 모두 자기의 강적이므로, 언제나 그들이 정의로운 군대를 규합하여 옛날의 질서를 회복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천하를 차지한 자들은 차라리 그 사람을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천하를 통일하려 한 대의 명분이 있었을텐데, 결국 자기의 연명만 생각하는 모습들이 안타깝다.

P.264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비록 심부름하는 하인 하나 없더라도, 자기 발로 장터에 나가 막 굴러먹는 장사치를 상대하여 물건 값이나 흥정하는 것을 아직 좀스럽고 더러운 짓으로 친다.
-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일런지도. 그렇지만 이런 부분은 회사내에서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

P.274
학문을 하려고 하면, 중국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 중국을 지배하는 자들은 오랑캐이니, 그들을 배우기가 부끄럽다.’고 하면서 중국의 옛 제도까지 아울러 더럽게 여긴다. 그러나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아무리 오랑캐라 할지라도 떳떳하게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III.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1)아쉬운 점


2. 보완이 필요한 점
1)아쉬웠던 부분
  • 열하일기의 전편인줄 알았는데, 몇몇부분을 간추린 부분이라고 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 이왕 편집할 부분이었으면 각 편의 상황을 설명해주거나 간추려 주는 장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 연암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의 계보도가 있었으면 좋았겠다.
2)이해가 안된 부분


3. 이 책의 장점
  • 연암선생님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 지도와 작품의 해설이 있어서 이해를 돕는데 좋았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 책 페이지를 숫자로 썻으면 좋았었을 법했다

5. 기타 자료조사(네이버 발췌)

열하를 찾아서

조선조 1780년(정조 4)에 박지원(朴趾源)은 청나라 건륭(乾隆)황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단에 참가하여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 해 음력 5월 말 한양을 출발해서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遼東) 벌판을 거쳐, 8월 초 드디어 북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건륭황제의 특명이 내려,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까지 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약 한 달 동안 머문 뒤 그해 10월 말에 귀국했다. 당시 박지원이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전한 청나라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여행기가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열하는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약 230km 떨어진 하북성(河北省) 동북부, 난하(濼河)의 지류인 무열하(武烈河) 서쪽에 있다. 열하라는 지명은 무열하 주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 데에서 유래했다. 건륭황제는 이곳에다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는 거대한 별궁을 짓고 거의 매년 행차하여 장기간 체류함으로써, 열하를 북경에 버금가는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청나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의 치세 중에 열하는 황제를 알현하러 모여든 몽골·티베트·위그르 등의 외교사절들로 붐볐다.
박지원을 포함한 일행은 열하를 방문한 최초의 조선 외교사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열하에서 보고 들은 진귀한 견문을 자신의 여행기에 집중적으로 서술했을 뿐 아니라, 그 제목까지도 특별히 '열하일기'라 지었던 것이다.

독특한 유형의 연행록

청나라를 다녀온 여행기인 연행록(燕行錄)에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일기 형식을 취해 여행 체험을 날짜순으로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연행록들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비교적 드물지만, 인물·사건·명승고적 등 견문의 내용을 주제별로 나누어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첫째 유형은 여행의 전 과정을 충실히 기록할 수 있는 반면, 중요한 사항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하기는 어려우며, 중복되는 내용이 많아 산만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 쉽다. 둘째 유형은 주제에 따른 집중적인 논의를 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여행의 전 과정을 제대로 전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열하일기』는 이와 같은 두 유형의 연행록들이 지닌 장점을 종합하면서, 아울러 그 나름의 창안을 가미하여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우선, 주요 여정은 첫째 유형의 연행록처럼 날짜별로 충실히 기록해 나가되, 해당 일자의 기사에 포함시키기 힘든 중요한 사항은 독립된 한 편의 글로 서술해 두었다. 이는 둘째 유형의 연행록이 지닌 장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열하일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특색은, 열하나 북경에 장기간 머물 때 얻은 잡다한 견문들을 시화(詩話)·잡록(雜錄)·필담(筆談)·초록(抄錄)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열하일기』는 「도강록(渡江錄)」부터 「금료소초(金蓼小抄)」까지 모두 2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시화와 잡록에 해당하는 것은 「행재잡록(行在雜錄)」, 「피서록(避暑錄)」, 「구외이문(口外異聞)」, 「황도기략(黃圖紀略)」, 「알성퇴술(謁聖退述)」, 「앙엽기(盎葉記)」, 「동란섭필(銅蘭涉筆)」 등이다. 이러한 시화나 잡록을 통해 박지원은 당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청나라 학계와 문단의 최신 동향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속재필담(粟齋筆談)」, 「상루필담(商樓筆談)」, 「황교문답(黃敎問答)」, 「망양록(忘羊錄)」, 「혹정필담(鵠汀筆談)」 등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필담들을 『열하일기』에 원고 그대로 싣지 않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현장감을 살린 대화록으로 교묘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그밖에도 중국 여행 중에 입수한 청나라의 공문서, 도서목록, 비문(碑文), 신간 서적 등 각종의 희귀한 자료를 초록하여 소개해 놓았다. 예컨대 『열하일기』의 마지막 편인 「금료소초」는 청나라 문인 왕사정(王士禎)이 지은 『향조필기(香祖筆記)』란 책에서 의약(醫藥)에 관한 내용을 초록한 것이다.

1830년대 초에 중국을 다녀온 바 있는 김경선(金景善)은 역대 연행록 중 가장 뛰어난 저술로 김창업의 『연행일기』, 홍대용의 『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꼽으면서, 『열하일기』는 '입전체(立傳體)'적 특징을 지닌 독특한 유형의 연행록이라고 보았다. 그가 말한 입전체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이후 중국 정사(正史)의 체제로 계승되어 온 기전체(紀傳體), 그 중 특히 열전(列傳) 형식을 가리킨다. 김경선은 『열하일기』가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라 여행 도상에서 마주친 수많은 인간들을 생생하게 형상화한 일종의 '열전'이기도 하다는 점을 통찰한 것이라 하겠다.

중국 견문과 실학사상

내용상으로 볼 때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현실에 대한 풍부한 견문과, 이에 기초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하일기』의 곳곳에서 박지원은 청나라가 눈부신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청나라가 한족(漢族)뿐만 아니라 몽골·티베트 등 주변의 강성한 민족들의 저항을 억누르려고 무척 고심하고 있음도 놓치지 않고 꿰뚫어본다.
또한 박지원은 상업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발전상을 다각도로 증언하면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할 구체적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열하일기』에서 그는 도시마다 시장이 번창하고 있으며, 도로와 교량이 잘 정비되어 있어 수레와 선박을 이용한 교통이 원활한 점, 궁전을 비롯한 각종 건축들이 크고 화려하며 벽돌을 사용하여 견고한 점 등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청나라처럼 벽돌을 널리 활용하고 수레를 전국적으로 통용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청나라와 통상(通商)한다면, 국내의 산업을 촉진할 뿐 아니라 문명의 수준을 향상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발상을 전환하라

이러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은 청나라의 선진문물 수용을 통한 부국책(富國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양반들은 경제보다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으로 인해 상공업이나 농업의 실무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또한 청나라는 오랑캐요,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라는 의식이 골수에 박혀 청나라의 선진문물조차 싸잡아 배격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반들의 고루한 사고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사물을 새롭게 인식할 것을 역설하고 있음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산장잡기(山莊雜記)」편 중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그는 마음을 차분히 다스림으로써 격류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자신의 체험담을 소개하며, 사물을 인식할 때 선입견이나 감각에 현혹되지 말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난생 처음 코끼리를 본 충격을 표현한 「상기(象記)」에서는, 이 세계가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면서, 이처럼 광활하고 경이로운 현실 세계에 대해 편견을 버리고 개방적인 자세로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이와 같이 박지원은 주체적이고 개방적인 인식을 강조할 뿐 아니라, 개인의 제한된 관점을 고집하지 말고 더욱 높은 차원에서 사물을 보도록 촉구하기도 한다. 「일신수필(馹汛隨筆)」편 7월 15일자 일기에서 그는 중국 여행 중에 본 장관(壯觀)을 논하면서, 남들처럼 명승고적이나 산천 풍물, 웅장한 건축과 번창하는 시장 따위를 꼽지 않았다. 그 대신 관점을 완전히 달리하여, 하찮은 '기왓조각'이나 '거름 똥'이야말로 중국의 첫째 가는 장관이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편다. 중국인들은 깨어진 기왓조각으로 집의 담과 뜰을 아름답게 꾸미고, 버려진 똥을 남김없이 수거하여 알뜰히 비축하니, 청나라의 문물이 발달하게 된 비결은 이처럼 하찮은 물건이라도 철저히 활용하는 그 실용정신에 있다고 본 것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여행기

『열하일기』에는 유명한 「호질(虎叱)」과 「허생전(許生傳)」이 실려 있다. 이 두 작품은 오늘날 박지원의 대표적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지만, 실은 우언(寓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호질」에서는 '범'과 '북곽(北郭)선생', 「허생전」에서는 '허생'과 대장(大將) '이완(李浣)'이라는 다분히 허구적인 존재들이 주고 받는 문답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을 뿐더러, '범'이나 '허생'이 작자를 대신하여 펼치는 도도한 웅변에 작품의 흥미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러한 우언의 형식을 빌어, 가급적 물의를 피하면서도 당시 양반들의 위선과 무능을 통렬히 풍자하는 한편 자신의 실학사상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설로 알려진 「호질」과 「허생전」에 소설적인 속성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특징이 다분한 반면, 『열하일기』에는 얼핏 소설과 거리가 먼 형식을 취한 듯한 부분들에서 도리어 소설적인 특징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도강록」 이하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에 이르는 전반부 7편은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에 갔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식 표현 기법을 종횡무진 구사하여 소설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열하일기』에 나타난 소설적 특징으로서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여행 중에 겪은 아무리 사소한 사건일지라도 이를 장면 중심으로 교묘하게 구성하여 매우 풍부하고도 흥미있는 체험담으로 재현해낸 점이다. 또한 이와 같이 장면 묘사를 추구한 대목들에서는 육성을 방불케 하는 생기 있는 대화를 구사하고 있다. 중국인과의 대화는 반드시 구어체인 백화(白話)로 표현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으며, 우리말 대화 장면에서는 조선식 한자어와 우리 고유의 속담을 구사하여 토속어의 맛을 살리면서 해학적 효과도 거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곳곳에 일종의 복선을 설정하여 가급적 사건의 서술을 짜임새 있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그 한 예로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편 8월 5일자 일기에서 북경에 막 도착한 일행에게 열하로 급히 오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져 소동이 벌어진 대목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박지원은 자초지종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먼저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이 간밤에 열하로 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부터 그린다. 그러고 나서, 숙소에 난데없는 소란이 일어나 그 원인을 알지 못한 일행이 법석을 피우고 청나라 통역관들이 허둥대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묘사하여 독자들의 궁금증을 잔뜩 돋운 뒤에야 비로소 열하 여행이 갑작스레 결정된 경위를 밝힘으로써, 사건을 한층 더 흥미 있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정밀한 세부묘사를 통해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열하일기』의 도처에서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보고 겪은 자연 풍경과 기상(氣象) 변화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역만리의 낯선 땅을 직접 여행하는 듯한 실감을 자아내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또한 그는 수레와 기계류, 벽돌을 이용한 건축물, 선박과 교량 등 청나라의 갖가지 문물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엄밀성을 갖추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열하에서 구경한 중국의 신비로운 마술들이나 청나라 황제에게 진상한 세계 각국의 기이한 새와 짐승 따위를 여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이 세계가 경이로운 현상들로 가득 차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식의 사실적인 표현은 여행 도중에 마주친 청나라 각계각층의 인물들과 조선 사행의 구성원들을 묘사한 대목들에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각종 상인, 직업적인 연희인(演戱人), 시골 훈장, 점쟁이, 도사, 승려, 창기, 하녀, 거지 그리고 조선 사행 중의 병졸이나 말몰이꾼, 박지원 자신의 하인 등등, 다른 연행록에서는 거의 무시되기 일쑤인 하층 민중들을 자못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 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박지원 자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비대한 몸집이나, 농담 좋아하고 겁 많은 성격조차 솔직하게 그려 보인다. 그리하여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물을 탐구하고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진지하고 사려 깊은 선비일 뿐만 아니라, 소탈하고 인정이 많으며 인간적 약점도 지닌 인물로 매우 개성 있게 부각되어 있다.

해학과 풍자의 재미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씌어졌을 뿐더러 해학과 풍자가 넘치기에 더욱 재미가 있다.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목격한 우스운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할 뿐 아니라, 수시로 일행들을 웃기는 자신의 익살스러운 언동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그려낸다. 그러나 『열하일기』에서 해학은 그러한 가볍고 유희적인 웃음으로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해학과 풍자를 즐겨 구사한다. 진지한 사상적 논의를 펼 때마다 돌연 우스운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그러한 대목에 여유와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도강록」편 6월 28일자 일기에서 박지원이 동행인 정진사(鄭進士)를 상대로, 성을 쌓는 데에는 벽돌이 돌보다 낫다고 조목조목 논하는 장광설을 펴자, 그 사이 졸고 있던 정진사가 깨어나, "내 이미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면서"라고 대꾸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해학과 풍자는 당시 사람들의 고루한 사상을 깨뜨리는 데도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망양록」편에서 왕민호(王民皞)는 박지원이 양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선생은 제(齊)·노(魯) 같은 대국(大國)을 즐기지 않습니까?"하고 농담을 했는데, 이는 고사(故事)를 이용하여, 박지원이 소국에서 왔기 때문에 대국의 음식 맛을 모른다고 놀린 말이었다. 그러자 그는 즉시 "대국은 노린내가 나서요" 하고 응수함으로써 왕민호를 무안케 하고 만다. "양고기는 노린내가 나서 싫다"는 뜻의 이 해학적인 답변은 "청나라가 비록 대국이지만 노린내 나는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냐"는 풍자의 의미도 함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계화시대에 다시 주목받는 고전

지난 1990년대 이후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담은 사상서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문학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예작품으로도 재인식되면서, 그에 관한 연구가 학계에서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언론사에서도 『열하일기』에 주목하고, 압록강을 건너 열하까지 갔던 박지원의 여행길을 추적하는 기획을 다투어 추진했다. 그 결과물로 여행기들이 잇달아 신문에 연재되거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TV 다큐멘터리도 이미 여러 차례 제작·방영되어 대중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로 인해 『열하일기』 번역본을 찾는 독자들이 날로 늘고 있으며, 열하 여행도 이제 관광코스의 하나로 정착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른바 세계화시대인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열하일기』는 어떤 현대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필자는 『열하일기』 「도강록」 7월 8일자 일기 중의 일부를 소개해 두었다. 광활한 요동 벌판을 처음 대면하고 감격한 박지원이 이곳이야말로 "통곡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외친 대목이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좁은 국토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를 숙명으로 알고 살았다. 그런 실정에서 더욱이 박지원은 일찍부터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연구해 왔던 만큼, 꿈에도 그리던 중국 여행이 실현되었을 때 그 감격이 어떠했겠는가. 저 요동 벌판과 같이 한없이 드넓은 세계로 나선 해방의 기쁨은 통곡으로밖에는 표현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박지원과 달리, 해외여행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게다가 전 세계가 급속히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식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반면 세계화의 도도한 물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에 표류하지 않고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話頭)라고 한다면, 『열하일기』는 그에 대해 훌륭하게 응답하는 고전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도록 깨우치는 『열하일기』야말로 세계화시대에 다시 주목되어야 할 값진 문학적 유산이 아닐까 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박지원은 「황교문답」의 서문이나 '심세(審勢)편'에서 청나라를 여행할 때 중국인에게 취해서는 안 되는 행동과 청나라의 실정을 관찰할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낯선 외국을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실정을 관찰할 때에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는지 알아보자.

2. 박지원이 열하를 방문했을 당시 마침 티베트 불교계의 지도자인 판첸 라마도 건륭황제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묵고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티베트 불교와 판첸 라마에 관해 소개한 부분을 찾아보고, 청나라가 이처럼 판첸 라마를 융숭하게 대접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자.

3. 박지원의 중국 여행을 상상하기 위해 중국 지도를 펴 놓고 그의 여행길을 짚어 보자.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 벌판을 지나고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북경과 열하에 장기간 머물면서 그가 보았던 중국의 명승고적들을 조사해 보자.

4.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처음 접한 소감을 토로한 「도강록」 6월 27일자 일기나, 중국의 신비로운 마술을 소개한 「환희기(幻戱記)」에 덧붙인 글 등에서 박지원은 앞을 못 보는 장님이야말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역설적 주장을 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5.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등에서 박지원은 새로운 천문학설로서 지구가 둥글 뿐만 아니라 스스로 돌고 있다는 지구자전설(地球自轉說)을 주장하면서, 아울러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무수한 별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중국의 지식인들을 상대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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