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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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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일 09시 06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하나, 명령에 죽고 사는 해군이 되자.

하나, 책임을 완수하는 해군이 되자.

하나, 전우애로 뭉쳐진 해군이 되자.

하나, 전기를 갈고 닦는 해군이 되자.

하나, 싸우면 이기는 해군이 되자.

 

해군의 다짐이다. 지난 20년간을 내 마음속에서 그리고 내 입 밖으로 수없이 했던 말이다. 그러나 나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젊었을 때 치기어린 다짐이었다.

 

지금까지 난중일기나 충무공 이순신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들어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보다 결코 더 알지 못한다. 부끄러운 사실이다.

 

나는 감히 공()처럼 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분의 십분의 일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너무 부끄러웠다. 대대를 지휘하면서는 더 부끄러웠다. 능력이 부족함은 물론이고 이런 중요한 일을 내가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의 길을 그만둔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충무공 이순신처럼 군 생활을 하지 못할 바에야 안 하는 것이 낫겠다라는 생각도 있었다.

 

연구원 과정에서 충무공을 다시 만날 줄은 생각 못했다. 광화문에 나가면 언제나 공()을 만날 수 있고 나 역시 사관학교에서 매일매일 그 분을 만났다. 그 분만큼 우리 국민들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분은 없을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순신은 덕수 이씨인 아버지 정()과 초계 변씨 사이의 4남 중 셋째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 시아버지로부터 아기가나면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 부르라는 현몽을 얻었다. 그리고 그 현몽에 따라 아기 이름을 순임금의 순()자에 신하라는 뜻인 신()자를 더해 순신이라 지었으며, 커서는 ()를 여해(汝諧)라 불렀다. <서경>에 따르면, 순임금이 여러 신하 가운데 우()임금을 지적하며 오직 너라야 세상이 화평케되리라라고 한데서 여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순신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당시 승지 최유해와 대제학 이식은 이순신을 기려 쓴 행장(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과 시장(임금에게 시호를 내려주기를 칭하는 글)에서 그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공은 엄하고 진중해 위풍이 있는 한편 남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겸손하여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고 식견과 도량이 깊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일찍이 하는 말이 대장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힘을 다해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말아도 또한 족한 것이니,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해 뜬 영화를 탐내는 것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바라.“

 

- 최유해의 행장 중에서-

 

스스로 신념을 지키고 아첨하지 않는 것을 평생의 일관된 신조로 삼았기에 그는 반생을 불우하게 지냈으며, 세상에서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난리를 만나 뛰어난 전공을 세워 임금과 조정신료, 백성들을 감동시켰음에도 속인들로부터 모함을 당하고 옥에 갇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공은 지혜를 내고 일을 지휘함에 한 가지 실수도 없었고, 또 용기를 분발하고 기회를 결단하기만 하면 그의 앞에는 강한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평소의 수양이 밑받침된 것이었으리라.

군사를 다스림에는 간명하면서도 법도가 있어 한 사람도 망령되이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온 군중이 한 듯이 되어 감히 그의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으며, 비록 기운을 뽐내는 억센 자라도 공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만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전쟁에 다다라서도 조용히 생각하며 항상 여유가 있었고, 또 나갈만한 것을 보고야 나가며, 지켜야 할 때는 물러나는데 반드시 신중하게 세 번 나팔을 불고 북을 친 연휴에야 군대를 돌렸다.

마지막 죽던 날에도 군대의 규율과 법도가 평일과 같아 마침내 승첩하게 되었다.

전에 있을 때에는 척후를 멀리까지 보내고 엄중히 경계했기 때문에 적이 오는 것을 먼저 알아내어 모든 군졸이 그의 신명함에 탄복했다. 또 밤마다 군사들을 쉬게 한 뒤 자신은 스스로 화살을 다듬기도 했으며, 적선이 눈 앞에 닥쳐오면 자기도 활을 당기어 사부와 같이 쏘았다. 부하 장수들이 혹시라도 공이 탄환에 상할까 염려되어 어째서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습니까?”하고 말하면 하늘을 가리키며 내 명은 하늘에 있거늘 어찌 너희들만 시켜 적을 대항케 할 것이냐라고 대답했다. 죽음으로써 충서을 다하려고 본시부터 정한 것이 이와 같았다.

우리 역사상 장수로써 보통 때에 조그마한 적을 만나 공로를 세우고 이름을 날린 이가 많다. 하지만 공과 같이 나라가 쇠약해지고 전쟁을 꺼려 하는 때 천하에 더할 수 없이 강한 적을 만나 크고 작은 수십 번 싸움에서 다 이겨내고, 서해를 가로막아 적들이 수륙으로 병진할 수 없도록 만들어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근본을 삼은 장수는 일찍이 없었다. 그러니 한때의 공을 세운 신하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자신의 몸을 세우는 절개와 국란에 죽는 충성, 행군하고 용병하는 묘리와 복잡한 사무를 처리하는 지혜 등은 이미 다 보고 아는 일이라. 비록 옛날의 명장이나 또는 어진 장수로서 100년에 한둘밖에 나지 못하는 그런 인물로도 이분을 넘어설 이는 없을 것이다.

 

이식의 시장 중에서

 

다음으로 와카자카가 본 이순신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장군 탄생 때 우리나라에 온다고 한다.

와키자카가 이순신 장군님을 알게 된건 한산도 대첩 때이다.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요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뭐랄까 그런 묘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에 명장입니다.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한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다.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런 문장이 있읍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 갔다.”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운덕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장군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다.

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 바람 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 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 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10살 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 사람을 보면 누가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장수 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 영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 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게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명()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개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이 간청 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 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며,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 번의 불평 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 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 폐하게 충()을 다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캐(훗날의 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1920년대 일본 해군 전략가 가와다 고오는 <포탄 잠 재우기>라는 그의 저서에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 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지만, 적군에게도 인정받으며 넬슨 제독을 뛰어 넘은 이순신 장군이다.

 

함대와 병력의 지휘통솔력과 전술능력, 충성심에서 이순신을 능가할 인물은 세계 해전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해전사에 불후의 이름을 올린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이순신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걸출하고 가장 존경받는 군사 지도자였다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문도 남지 않는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자신의 조국을 구하고 해전사의 신화가 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 제독에게도 이순신은 유일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1905년 로제스트벤스키(Rozhestvensky Z.P.) 제독의 인솔로 발틱해의 리바우(Libau)항을 출항해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와야 했기에 지친 러시아의 막강한 발틱함대를 대한해협에서 전멸시킨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52~1934) 제독에게도 이순신은 그야말로 신()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는 한국의 진해에 함대를 숨겨두었다가 출항하면서 이순신의 영정을 모셔놓고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을 정도였다. 그는 승전 축하연의 연설에서 말하기를 나를 영국의 넬슨에 비교하는 것은 괜찮으나 이순신에 비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했다.

 

이 밖에도 이순신에 대한 평가자료는 너무나 많아서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한다.

 

난중일기가 없었다면 인간 이순신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온갖 억측이 난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7년간의 기록으로 우리는 장군으로서,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이순신을 만날 수 있다. 그가 평시도 아닌 전시에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난중일기를 쓴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본다. 이 연구원 과정을 하면서도 매일 매일 쓰자고 다짐하지만 쓰지 못하는 것을 이순신은 전쟁 중에, 총탄을 맞고, 아들이 죽은 날에도 썼다. 나는 이순신이 이 기록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것보다는 그 당시 이순신이 전쟁이라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수 있고, 정신적 수양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적지 않았다면 그날 힘든 하루하루를 견딜수 없었을 것이고 내일위한 준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록은 그에게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명량대첩 때 공은 12척의 배로 333척의 배를 상대로 해서 승리를 거뒀다. 아무리 옛날 배라고는 하지만 바다에 300척이 깔려있다고 상상해보라. 거의 새까맣게 보일 것이다. 그런 전력을 12척으로 상대했다.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공의 탁월한 지형정보, 전술 등이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2323승 불패의 기록, 23번의 승리는 그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전 정보를 통한 정보전의 승리, 싸울 곳의 지형을 파악한 뒤의 유리한 지형에서만 싸우는 전략, 준비가 되어 있을때만 싸운다는 전략, 총통 등 대포의 위력, 사정거리 등 우리의 전력을 충분히 활용한 전략 등 모든 고려요소를 생각하고 공께서는 전투에 임했고 그래서 승리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충무공 어록과 일화

 

丈夫出世(장부출세) 用則效死以忠(용즉효사이충) 不用則耕野足矣(불용즉경야족의)

대장부로 세상에 나와 나라에서 써 주면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할 것이요. 써주지 않으면 야인이 되어 밭갈이하면서 살리라.

 

충무공이 1576(선조9) 2월 식년무과에 합격하고나서 임용발령을 조용히 기다리며 한 말로 자신의 보직이나 출세를 위하여 권문세가에 출입하여 아첨하거나 영화를 탐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在下者越遷(재하자월천) 則應遷者不遷(즉응천자불천) 是非公也(시비공야) 且法不可改也(차법불가개야).

승진해야 할 사람이 승진을 못하고 순서를 바꿔 아래 사람을 올리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규정도 고칠 수 없습니다.

 

1579(선조12) 2월 훈련원 봉사(奉事 : 8)였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산하의 교육훈련 담당 부서이다. 그 때의 상관은 병부정랑(丙部正郞 : 5, 지금의 과장급) 서익(徐益)이 자기의 친지 한 사람의 서열을 바꾸어 참군(參軍)으로 승진시켜야 된다면서 인사관계 서류를 잘 꾸며 달라는 청탁을 해왔다. 충무공은 그의 청탁을 들어 주지 않으면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끝내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여긴 까닭에 서익의 청탁을 거절하였다. 공명과 정의로써 불의에 대처한 공의 언동이 당시 한성 훈련원내에 널리 알려졌다. 그후 1581122년째 발포만호로 있을 때 서익은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내려와 허위로 보고서를 만들어 공을 파직시키었다.

 

吾初出仕路(오조출사로) 豈宜托跡權門謀進耶(개의탁적권문모진야)

벼슬길에 갓 나온 내가 어찌 권세있는 집에 발을 디뎌 놓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겠느냐.

 

한때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 : 15191593)이 자기 딸(庶女)을 충무공에게 소실로 시집보내려고 중매인을 보내어 인척관계를 맺으려 한 일이 있었다. 병조판서라는 높은 양반이 충무공을 사위로 맞이하겠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은 이미 공의 인품을 좋게 보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충무공은 그 자리에서 중매인을 돌려 보내었고 권세와 돈을 따라 다니는 아첨배나 부정한 방법으로 출세하고자 하는 일은 일체 하지 않았다.

 

此乃公家物也裁之有年一朝伐之不以公而以私可乎(차내공가물야재지유년일조벌지불이공이이사가호)

이 오동나무는 나라의 땅 위에 있으니 나라의 물건입니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길러 온 것이니 하루 아침에 사사로이 베어버릴 수 없습니다.

 

15807월에 발포만호(鉢浦萬戶 : 4)로 근무하였다. 발포는 지금의 고흥군 남족해안 내발리이다.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 왔다. “내가 거문고를 만들고자 하니 발포영 객사 앞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보내시오.”하였으나 거절하니 성박은 노발대발 하였으나 충무공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我與栗谷同性可以相見而見於銓相時不可竟不往(아여율곡동성가이상견이견어전상시불가경불왕)

나와 율곡은 성이 같은 까닭에 만나 볼만도 하지만 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는 만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선조14년 서익은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내려와 허위로발포만호 이순신이 군기를 전혀 보수하지 않았으므로 파직해야 합니다라고 장계를 올려 공을 파직시키었다.

그러자 당시 율곡선생이 이조판서로 있었는데 사간원 대사간인 서해 유성룡이 율곡선생을 만나보도록 권고한 적이 있었을 때 나눈 얘기.

 

箭筒則不難進納(전통즉불난진납) 而人謂大監之受何如也(이인위대감지수하여야) 小人之納又何如也(소인지납우하여야) 以 一箭筒(이 일전통) 而大監與小人俱受汚辱之名(이대감여소인구소요욕지명) 則深有未安(즉심유미안) 柳相曰(유상왈) 君言是也(군언신야)

화살통(箭筒)을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이를 보고 대감이 받는 것을 어떻다 말하며, 소인이 바치는 것을 어떻다 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이 화살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이 함께 더러운 말을 듣게 될까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서익의 무고로 파직 되었다가 1582(선조15) 5월에 3년 전의 근무지였던 훈련원(訓鍊院) 봉사(奉事)로 재직하게 되었다. 당시 병조판서 유전(? : 15311589)은 충무공이 늘 들고 다니던 화살통을 보고 소유하고 픈 생각에 그 화살통을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을 때 완곡하게 거절하자 유전은 그대 말이 옳다고 하면서 두 번 다시 그러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그도 큰 인물임에 틀림없다.

 

死生有名(사생유명) 飮酒何也(음주하야) 不渴何必飮水(불갈하필음수) 死則死耳(사즉사이) 安可違道求生(안가위도구생)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술은 마셔 무엇하며,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물은 무엇 때문에 마시겠는가?

어찌 바른 길을 어기어 살기를 구한단 말이오!

1586(선조 19 1월 함경도 조산원 만호(4)으로 있었다. 15878월에는 함경도 최북단 두만강 입구에 있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이해 겨울 여진족이 기병을 이끌고 대거 침입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특별한 방어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충무공은 적은 병력으로 여진족을 격퇴하였고 포로된 자 60여명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이때 병마사 이일은 호출하여 문초받을 때 선거이에게 한말.그러나 모든 잘못을 것을 충무공에게 전가하여 백의종군케 하였다.

 

勿論有罪無罪(물론유죄무죄) 一國大臣在於獄中(일국대신재어옥중) 而作樂於堂上(이작낙어당상) 無乃未安乎(무내미안호)

죄가 있고 없는 것은 나라에서 가려낼 일이지만 한 나라의 대신이 옥중에 계신데 이렇게 방에서 풍류를 즐기고 있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1589(선조22) 7월 정언신이 나해 귀향지에서 한성으로 다시 끌려와 옥중에 갇혀 있었다. 이분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까닭없이 연루되어 65세에 죽었다. 정언신(정여립과 9)은 충무공에게는 은사요 상관이었으며 또 평소에 존경해 왔던 분이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정읍에서 한성의 옥에 갇혀있는 정언신을 문병하였다.

 

吾寧得罪於濫率(오령득죄어남솔) 不認棄此無依(부인기차무의)

내가 차라리 식구를 많이 데리고 온 죄를 입는 한이 있어도 이 의지할 곳이 없는 것들을 돌보아 주지 않을 수 없다.

 

1580년 둘째형 요신(堯臣)이 먼저 죽고 이듬해에는 큰형 희신(羲臣)마져 죽으니 두형의 자녀들은 할머니가 키우셨는데 마침 충무공께서 정읍현감으로 있을 적에 함께 있게 되었다. 박생원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남솔(濫率)이라고 고발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而爲遮海寇(이위차해구) 莫如舟師(막여주사) 水陸之戰(수륙지전) 不可偏廢(불가편폐)

바다로 침임하는 왜적을 저지하는 데는 수군을 따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수군이나 육군은 그 어느 쪽도 없앨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발발 10개월전 이었는데 즉 15917월 비변사에서 국방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왜적은 수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서는 민활하지 못하다. 그러니 육지 방비에 주력하자고 하고 신립장군은 수군을 폐지하자고 까지 하였고 또한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이유로 방비시설을 중지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러한 의견 충돌상황에서 충무공이 분연히 일어나 행양방어의 중요성과 수군활동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것이다.

 

從事肥己(종사비기) 如是不願(여시불원) 他日之事(타일지사) 亦可知矣(역가지의)

자기 한 몸만 살찔 일을 하고 이런 일은 돌아보지 않으니 장차의 일도 가히 짐작된다.

1592(선조25) 116일 충무공께서 전라좌수영 관할 장수들에 대하여 검열을 하였다. 이 때는 왜군이 처들어 오기 3개월 전으로 우리 병사들은 언젠가 있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쉬지 않고 전비태세 강화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당답의 군관과 색리들이 마땅히 고쳐야 할 병선을 고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벌하여 곤장으로 다스렸다.

 

各有分界(각유분계) 非朝廷之命(비조정지명) 豈宜擅自越境.(개의천자월경)

우리가 각각 책임을 맡은 경계가 있는데 명령이 아니고서 어떻게 임의로 경계를 넘을 수 있겠는가.

충무공은 왜적이 야만적으로 기습공격을 하여 경상도 수군이 대패하였음을 알고 이제는 전라좌수영이 조선을 지키는 제1방어선이 됨을 바로 인식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구원 요청을 일단 보류하였다. 원균의 몇 차례 요청에도 동요하지 않았던 이순신의 출전 지연 문제는 그 후 한때 조정에 까지 문제로 떠올랐다. 우의정이었던 이원익은 충무공의 조치 내용을 보고서 당연한 조치임을 변호해 주었다. 반드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때에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勿令妄動(물여망동) 靜重如山(정중여산)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 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159257일 경상도로 출전하여 처음으로 전개한 옥포해전을 치르면서 한 말씀.

 

毋杻一捷慰撫戰士(무뉴일첩위무전사) 更勵舟楫爲有如可(경려주즙위유여가) 聞變卽赴終始如一亦(문변즉부종시여일역)

한 번 승첩하였다 하여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위무하고 다시 정비해 두었다가 변보를 듣는 즉시로 출전하여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도록 하라.

1592614일 제4차 당항포 해전을 승리하고 나서 한 말씀.

 

臣嘗廬島夷之變(신상여도이지변) 別製龜船(별제구선) 雖賊船數百之中(수적선수백지중) 可以突入放砲 (가이돌입방포) () 白乎等用良(백호등용양) 今行以爲突擊將所騎(금행이위돌격장소기)

저는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고북함을 만들었는데적선이 수백 척이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1592614일 보고한 내용

 

吾不死(오불사) 則賊必不敢來犯矣(즉적필불감래범의)

내가 죽지 않는 동안에는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불의의 일에 대비하여 비상용 전투식량 1,300석을 비축해 놓으며

 

輕敵(경적) 必敗之理(필패지리)

적을 가볍게 여기면 반드시 패하는 것이 원칙이다.

1593222일 충무공은 이억기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이 있는 웅천 등지를 공격하며

 

湖南國家之保障(호남국가지보장)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시무국가) 是以昨日進陣于閑山島(시이작일진진우한산도) () 爲遮按海路之計耳(위차안해로지계이)

호남의 땅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충무공께서 1593716일 사헌부 지평 玄德升{1564(명종19)1627(인조5)}에게 보낸 편지 내용임.

 

見小利而入剿(견소리이입초) 大利不成(대리불성) 姑用停之(고용정지) 乘機剿滅事(승기초멸사)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는 큰 것을 이루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기회를 보아 무찔러야 합니다.

1594213일 영의정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에.

 

欺罔天聽(기망천청) 至於此極(지어차극) 國事如是(국사여시) 萬無平定之理(만무평정지리) 仰屋而已(양옥이이)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국사가 이래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다.

1594216일 암행어사 유몽인이 장계한 내용을 보고 암행어사라는 사람이 국가의 위급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눈앞의 얼버무림만 하고 있다며.

 

與賊相對(여적상대) 勝敗決於呼吸(승패결어호흡) 爲將者不之死(위장자불지사) 則不可臥(즉불가와)

이제 적을 상대하여 승패의 결단이 호흡사이에 걸렸다. 장수된 자가 죽지 않았으니 누울 수가 있겠느냐.

15933월 경 남해에 전염병이 번졌을 때 공도 병에 걸려 12일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며 군무를 보니 아들이 휴양하기를 권하자.

 

三尺誓天山河動色(삼척서천산하동색) 一揮掃蕩血染山河(일휘소탕혈염산하)

석자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충무공은 15944월 한산도에서 태구련과 이무생에게 장도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칼자루에 바로 위의 칼면에 이와 같은 도명을 한 칼에 한 구절씩 금상감으로 새겨 두었다.

 

?功無補於涓埃口誦敎書面有於軍旅(장공무보어연애구송교서면유어군여)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론 교서를 외우나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1595529일 일기에서.

 

獨依樓上(독의누상) 念國勢危如朝露(염국세위여조로) 內無決策之棟樑(내무결책지동량) 外無匡國之柱石 (외무광국지주석) 未 知宗社之終至如何(지종사지종지여하) 心思煩亂終日反側.(심사번란종일반측)

혼자 다락 위에 기대어 나라의 형세를 생각하니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기만 한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인재가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같은 인물이 없으니 사직이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다.

15957월 초1일 난중일기에서.

 

若有心膽(약유심담) 則必自處矣(즉필자처의)

만일 쓸개가 있다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일이다.

159577일 선조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내린 유지를 보고나서 참으로 놀랍고도 죄송함을 가눌 길이 없다면서.

 

深夜使之歡躍非强爲樂也(심야사지환약비강위락야) 欲使久若暢申勞苦之計也(욕사구약창신로고지계야)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한 것은 억지로 즐겁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에게 그 수고를 풀어 주고 싶기 때문이다.

159655일 일기에서.

 

所經一境(소경일경) 蓬藁滿(봉고만) 目慘不忍見(목참불인견) 姑除戰船之整(고제전선지정) 以舒軍民之懸(이서군민지현)

지나온 지역이 온통 쑥대밭같이 폐허가 되어 그 참상한 꼴을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우선 전선을 정비하는 것이라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배겅들의 피로를 풀어 주어야 하겠다.

1596년 윤 814일 일기에서.

 

竭忠於國而罪已至(갈충어국이죄이지) 欲孝於親而親亦亡(욕효어친이친역망) 天地安如吾之事乎(천지안여오지사호) 不如(불여) 早死也(조사야)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 했건만 죄에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만은 어버이마저 돌아가셨다.

어찌하랴 ! 어찌하랴 ! 천지간에 나같은 사정이 또어디 있으랴 어서 죽느니만 못하다.

1597419일 백의종군하면서 아산에 이르러 어머니의 돌아가심을 듣고.

 

晨昏戀慟淚凝成血(신혼연통루응성혈) 天胡漠漠不我燭兮(천호막막불아촉혜) 何不速我死也(하불속아사야)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만은 아득한 저 하늘을 어찌하여 내 사정을 이다지도 살펴주지 못하는지, 왜 어서 죽지 않는지.

159756일 백의종군중 꿈에서 두 분 형님을 꿈에서 보고나서.

 

介峴行來(개현행래) 奇巖千丈(기암천장) 江水委曲且深(강수위곡차심) 路險棧危(로험잔위) 若扼此險(약댁차험) 則萬夫(즉만부) 難過矣(난과의)

개벼리 고갯길을 타고 오는데 기암절벽이 천길이나 되고 굽이 도는 강물이 깊기도 하며 길은 험하고 위태롭다. 만일 이 험고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 명이라도 지나가기가 어렵겠다.

 

159764일 백의종군중 권율 장군의 진지를 찾아가던 곳으로 현재도 개벼리 개비리 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십이) 出死力拒戰(출사력거전) 則猶可爲也(즉유가위야)戰船雖寡(전선수과) 微臣不死(미신불사) 則賊不敢侮矣(즉적불감모의)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597716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였다.83일 충무공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는데 12일 후 선조는 선전관 박천봉이를 시켜서 밀지를 가지고 왔는데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과 합세하여 육전하라는 말에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수군을 없앨 수는 없다며 올린 장계.

 

昏鼻血流出升餘(혼비혈류출승여) 夜座思淚(야좌사루) 如何可言(여하가언)

어둘 무렵이 되어 코피를 한 되 남짓이나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고 눈물 짓곤 하였다. 어찌 다 말하랴 !

15971019일 일기중에서 한 달전 916일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칠천량 패전의 치욕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는데 1014일 막내 아들 면의 부고를 받았다. 그 부고를 받는 순간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자식을 앞세우고 꿈속에서 아들을 본 후 마음이 심란할 때 일기.

 

兵法云(병법운) 必死則生(필사즉생) 必生則死(즉생즉사) 又曰(우왈) 一夫當逕(일부당경) 足懼千夫(족구천부) 今我之(금아지) 謂矣(위의)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한다.”

명량 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597915일 긴박했던 날 일기에서 이 말은 오기병법(오기병법)치병편(치병편)3장에서 연유된 말이다. 무릇 전쟁터란 한 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필사적으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된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은 진나라 左思가 지은 촉도부(蜀都賦)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大將不可不和(대장불가불화) 讐賊不可從遣(수적불가종견)

대장으로서 화친을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이 원수를 놓아 보낼 수는 없습니다.

15987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717(우리나라에서는 818일로 알았다) 죽으면서 철군을 명하였다. 가토 기요마사 등은 비밀리에 철수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부대만 우리 수군이 바다를 가로 막고 있어서 못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뇌물을 바치고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명나라 진 도독은 그 청을 들어 줄려고 하였다.그 뒤 몇 차례의 뇌물을 먹은 진 도독은 결국 충무공께 왜적을 보내주자고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에 진 도독은 부끄러이 여겼다.

 

此讐若除(차수약제) 死則無憾(사즉무감)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15981118일 오후 6시경 왜장 고니시 유니나카가 이끈 적선이 남해에서 무수히 나와 엄목포에서 정박하고 있고 또 노량으로 와서 정박하는 배들도 많았다. 충무공은 명나라 도독 진린과 약속하고서 이 날 밤 10시경에 같이 길을 떠나 19일 밤 2시경에 노량에 이르러 왜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까지 크게 싸웠다. 충무공은 전선 약 150척으로 새로운 각오를 해야만 했고 이번을 최후의 전투로 장식해야 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서 17일 밤 자정에 천지신명께 빌었다.

 

戰方急(전방급) 愼勿言我死(신물언아사) 勿令驚軍(물령경군)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 군사를 놀라게 해서는 않된다.

15981119(약력 1216) 이른 아침 노량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시며 하신 말씀.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책머리에

 

6. 한국인이 존경하는 대표적인 위인이자, 서울 광화문 앞에 동상으로 굳건히 서서 매서운 장수의 눈으로 지금도 나라를 수호하는 민족의 성웅. 이순신의 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이순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도 그의 동상이 그러하듯 거푸집 안에서 딱딱하게 굳은 채 변치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6. 나라를 구한 영웅의 고군분투와 고뇌가 가득한 전쟁 일기. 그러나 이는 어쩌면 후대 사람들의 일방적인 생각이 아닐까 한다. <난중일기>는 어느 조선 장수의 일과와 행적이 기록된 사료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의 감정이 솔직하게 담겨 있는 내밀한 일기장이기도 하다.

 

6. 이순신이 반드시 성웅으로만 미화될 것은 아니다. <난중일기>에 보이는 것은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다. 이순신에게 초월적 능력 같은 것은 없었다. 단아하고 진중한 성격의 이순신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했고 매사를 철저히 대비했다. 그리고 조선 수군 장수로서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 그러했기에 이순신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또 조선을 지킬 수 있었다.

 

6. 이순신 역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꽃의 아름다움을 두 눈에 담는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었고, 공정하지 못한 처사에 분개하며 자신을 모함하는 이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가족을 그리며 남몰래 눈물짓기도 하고, 달빛 아래 잠 못 이루고 번민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 모든 내면의 감정을 일기에 적었다.

 

6. 이 책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가운데 일부를 가려 뽑아 번역한 책이다. 선별한 일기를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역자가 장마다 제목을 붙였다. 1장부터 3장까지는 공적인 인간, 즉 장수로서 전쟁에 대비하고 직접 왜적을 물리치는 이순신의 모습이 담긴 일기가 들어 있다. 4장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이 조선과 조선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일기를 수록했다. 5장과 6장에는 이순신의 사적인 면모, 내면의 감정이 솔직하게 나타나 있는 일기를 실었다. 마지막으로 7장은 이순신이 백의 종군을 거쳐 관직에 복귀한, 정유재란 시기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일련의 시간순서로만 봤는데 이렇게 주제별로 다루니 새롭게 다가오긴 한다. 그러나 시간대별이 아니다 보니 이때는 언제였지, 어떤 시국이었지 이런 의문이 들어 집중을 할수 없어 자료를 찾아보게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7. 수많은 <난중일기> 번역본이 있지만 텍스트를 주제에 따라 재구성해 독자가 내용별로 <난중일기>에 다가갈 수 있게 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좋은 시도인 것 같다. 수 많은 책과 같은 주제가 있겠지만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다른 책이 될수 있는 것 같다.

 

1장 조선을 지키리라

 

전쟁에 대비하라

 

21. 벌써 큰 돌덩이 17개에다 구멍을 뚫었다고 보고했다. 서문 밖의 해자가 네 발쯤 무너져 내렸다.

부실한 성을 보완하기 위한 이순신의 평소 대책과 순찰을 통한 약점을 보완할 줄 알았다.

 

22. 활을 열순 쏘았다.

이 당시 활은 단순히 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효과와 정신훈련에 집중할수 있는 효과만점의 스포츠라고 할수 있다.

 

23. 석공 등이 포구에 새로 다져 놓은 구덩이를 여러 군데 무너뜨렸으모 벌을 주고 다시 다져 놓도록 하였다.

보통은 중간급 장교들에게 위임하면 될 것인데 직접 하나씩 하나씩 세밀하게 살펴보는 공의 열정이 느껴진다.

 

23. 고립되어 위태로운 외딴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데, 성을 쌓고 못을 파는 일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럴만도 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조차 준비됨이 부족한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23. 아우 여필과 조이립이 군관, 우후와 함께 술을 싣고 나와 맞이하였다. 다같이 즐기다가 해가 진 뒤 관아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술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여기 외에도 많은 곳에서 술에 관한 내용이 많은 것을 보면.

 

24. 승군들이 돌줍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 우두머리 중에게 곤장을 때렸다. 아산으로 문안 갔던 나장이 들어와,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다.

비록 승군이지만 다른 군인들과 다르게 대하지 않고 똑같이 군율로 다스렸다. 이런 한가지 흐트러짐이 군 전체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앎이다. 항상 어머니를 생각하는 효심은 곳곳에 드러나 있다.

 

25. 1591,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를 두고 조선 신하들은 의견이 분분하였다. 조선 조정은 만에 하나 일본이 침범해 올 것을 대비해 전국 각지의 성곽을 새로 쌓거나 보수하고, 무기를 점검하여, 능력이 뛰어난 장수를 서열에 상관없이 발탁한다는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때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새로운 임지에서 누구보다 성실히 군사 시설을 살펴보고 군사들을 점검하였다.

대비책을 마련 했는 것이 이 정도란 말인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일본의 전술과 전략이거늘 근본을 보지 않고 수비하는 것에 치중하다니 애석한 일이다.

 

무기와 전선을 점검하라

 

26. 홍양 현감, 능성 현령, 녹도 만호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대포 쏘는 것을 함께 보았다. 등불을 밝히고도 한참 있다가 자리를 끝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문화는 술을 권하는 문화이다. 이순신이 술을 자주 마시기는 하나, 그러한 것이 법도에 어긋나지는 않은 것이다. 만약 그리했다면 충무공은 입에 일절 술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26. 전쟁 대비에 여러 가지로 결함이 많아 군관과 담당 아전에게 벌을 주었다. ..... 사도는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 최하인데, 순찰사는 포상을 내려 달라는 보고를 올리고 잘못을 조사하지 않았으니 가소롭다.

신상필벌이 중요하다. 잘한 사람은 그에 맞는 상을 받아야 하고 못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군대가 바로 서는 것인데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27. 긴 화살과 아기살은 하나도 쓸만한 것이 없어 걱정스러웠지만 전선은 화살에 비해 온전하여 흐뭇했다.

무기는 부족함이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배는 온전하였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27. 아침밥을 먹고 관아에 나가 무기를 점고했다. ,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는 깨지거나 훼손된 것을이 많았다.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 담당 아전과 활 만드는 장인, 감고 등의 죄를 논하였다.

지휘관이라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내 부대를 속속들이 알아야 잘 지휘할수 있고 문제점을 파악해야 개선해야 할 요소도 나오는 것이다.

 

28. 방답은 처음에 15명만 보냈기 때문에 군관과 담당 아전에게 벌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너무도 나를 기만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일을 당하면 기분이 몹시 상한다. 하지만 이를 잘 극복하고 진정으로 충정으로 따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지휘관의 본분이다.

 

거북선을 만들다

 

29.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해 보았다.

 

30. 홍양 배에 부정한 일이 있었는지 캐물었는데 엉성하게 처리한 일이 많았다.

 

30.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지자포와 현자포 등을 전선에 설치하고, 이를 이용해 대형 화살이나 쇠로 만든 탄환을 발사해서 왜적의 배를 공격했다. 조선의 대포는 파괴력이 강하고 사정거리가 길어 멀리서 쏘아도 왜적의 배를 격파시킬 수 있었으므로, 조선 수군이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무기마저 없었으면 해전에서도 우린 패했을수 있다. 이런 무기들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31. 거북선은 전투가 시작되면 곧장 적의 진영으로 돌격해 대포를 쏘고, 왜적의 배에 가서 부딪혀 적선을 넘어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거북선은 혼자서 작전수행을 하지 못한다. 꼭 여러척의 배가 같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단독 기동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큰 약점은 시야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판옥선의 신호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반복과 훈련이 시행되었겠나.

 

32. 우수사 휘하의 장수들과 활을 쏘아 서로의 덕()을 살폈다. 우리 수영의 장수들이 여러 번 이겨서 우수사가 떡과 술을 장만해 왔다.

그 당시 장수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게임이었을 것이다.

 

33. 모두 함께 활을 쏘고 하루 내내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왔다. ..... 경상도 순찰사 편이 162획이나 졌다. 하루 종일 퍽 기분이 좋았다.

논어에서도 얘기하지 않았나. “ 군자는 다툴 일이 없으나, 꼭 해야 한다면 활쏘기일 것이다. 절하고 겸양하며 [활 쏘는 자리에]오르고 내려와서는 [벌주를] 마시니 그런 다툼이야말로 군자의 모습이다. 활쏘기는 육예[()-예의범절,()-음악,()-활쏘기,()-말타기,()-서예,()-산학]의 하나이다. 이것의 핵심은 자기 수양을 위한 정신의 집중이다.”

 

34. 활쏘기는 전통적으로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의 하나로 인식되었고, 활쏘기를 통해 그 사람의 덕을 살필 수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조선 시대 군사들은 매일같이 활을 쏘며 군사 훈련을 하고 체력도 단련했다. 때로는 편을 나누어 승부를 가르면서 활쏘기를 놀이로 즐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조선 시대에 활쏘기가 중시되었던 까닭은 활이 조선군의 대표적인 무기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조총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발사 속도가 빨랐던 활은 멀리 있는 배 위의 적을 쏘아 맞힐 수 있었으므로 바다 위 전투에서 매우 유용한 무기였다.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 조선의 앞날

 

35. 나라에 제사가 있는 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임금의 제삿날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할까 싶다.

 

35.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한 적 없건만 돛 아래 홀로 앉아 있으니 가슴속에 만 갈래 생각이 일었다.

우국충정의 마음이 그대로 와 닿는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기가 아니다. 진짜 충무공의 마음을 알수 있는 부분이다.

 

35. 사직과 위엄 있으신 임금님께서 기대어 보잘 것 없는 공을 조금 세웠을 뿐인데, 임금님의 총애가 남들을 뛰어넘어 분수에 넘치는 영광을 입었다. 이 몸이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있으면서 먼지만큼도 공적을 보태지 못하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지만 얼굴은 군사들 앞에 부끄럽기만 하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함에도 그런 표현을 안한다. 나라면 선조에 대해 욕을 실컷 할텐데. 그래도 이때에는 상도 내리고 하다니 정신차렸나 보다.

 

35. 홀로 수루위에 기대어 나라의 형편을 생각해 보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대들보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구원할 기둥이 없으니 종묘와 사직이 끝내 어찌될는지. 심사가 어지러워 하루 종일 뒤척거렸다.

무인이면서 글이 굉장히 감성적이고 아름답다. 이는 이순신이 무인이 되기전 유학을 공부하면서 얻은 지식을 통해 문인 못지 않게 글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서로 당파싸움이나 일삼는 조정에서 무력감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36. 임진년, 첫 출전을 앞둔 이순신은 신하된 자로서 마음과 힘을 다해 나라의 수치를 씻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이순신은 언제나 나라를 가슴에 품고 걱정하던 조선의 신하였다. 그러나 왜란이 발발한 뒤 조선 땅은 순식간에 일본군에 점령되어 평양성까지 함락되었고, 임금은 평안도 의주로 피란을 떠났으며, 전쟁은 5년 이상 계속되었다. 나라를 구원할 동량이 없는 현실에 이순신 울분과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실정 모르는 조정 관원들

 

37. 순찰사에게서 공문이 왔는데, 군사들의 일가족에 관한 일 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침범하지 말라고 하였다. 새로 부임하여 사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러게 말이다. 원칙도 있어야 하지만 나라가 있고 난 다음에 원칙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병사들이 부족한데 일가족에 대해 침범하지 말라는 말은 그냥 닥치고 부족한대로 싸우라는 얘기다. 미칠 노릇 아니겠는가. 내가 대대장이었을 때 부대 편제대비 항상 인원은 80%수준으로 채워졌다. 평시였지만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물며 전시에는 오죽하랴.

 

37. 그런데 담양, 진원, 나주, 창평 수형은 악행을 덮어 주고 상을 내려 달라고까지 하였다. 임금님의 귀를 속이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나랏일이 이러하니 왜적이 평정될 리 만무하다. 천장만 올려다볼 따름이다. 또 수군의 일가족에 관한 일과 장정 넷 중 두 사람이 전쟁에 나가는 일에 대해 논하며 몹시 잘못된 처사라고 하였다. 나라에 갑자기 닥친 어려움은 생각지 않고 한갓 눈앞의 미봉책 마련에만 힘을 쓰니, 나라를 위하는 마음만 더욱 아파온다.

신상필벌이 답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올바른 길을 가려 할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안 되는 것이 이 신상필벌이다. 신상은 그나마 괜찮은데 필벌은 진짜 어렵다. 정이 많은 민족이라 그런지 필벌 대상자를 보면 필벌하기가 너무 힘들다. 나도 신상은 많이 했지만 필벌은 거의 못한거나 마찬가지다.

 

38. 전라도 수군 가운데 전라우도 수군은 전라좌도와 우도를 왕래하면서 제주도와 진도를 성원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전했다. 가소롭다. 조정의 계책이 이러하다니. 체찰사가 내놓은 대책이 이와 같으니 나라를 구제할 수 있겠는가. 나랏일이 이 모양인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저녁에 거제 현령을 불러 이 일에 대해 묻고 돌려보냈다.

결국 한 사람보고 두사람 몫까지 하라는 얘기이니 충무공 입장에서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이겠나. 답답한 노릇이지만 뾰족한 답이 안보이는 충무공의 마음이 헤아려져 아련하다.

 

39. 지난번에 전라우도 수군을 돌려보내라고 한 일은 회계내용을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전했다. 우습다.

그래도 자기가 내린 지시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철회하는 것 역시 용기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잘못된 명령이 우스웠을 것이다.

 

39. 임진왜란 내내 조선 수군은 군사가 부족했고, 군사가 사망하거나 도망쳤을 경우 그 군사의 가족이나 이웃을 뽑아 빈자리를 채웠다. 그렇지만 조정에서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가족이나 이웃을 대신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수군에 내렸다. 전쟁의 한 가둔데서 병력을 유지하는 일이 급선무였던 이순신은 이러한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몇 번이나 조정에 요청했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40. 그렇다. 왜적은 이미 군량이 끊겼고, 우리 군대는 느긋한 마음으로 고단한 적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기세라면 마땅히 백번이라도 이길 수 잇을 것이다. 하늘도 하늘을 따르는 우리를 도와주실 터이니 물길 위의 적이 아무리 오륙백 척 합해 온다 해도 우리 군대를 당해낼 수는 없으리라.

현상에 대한 정확한 해석능력이 돋보인다. 이순신은 절대 질 싸움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2323승 아니겠나.

 

41. 곧바로 나대용을 수사 원균에게 보내 작은 이득을 보고 공격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일단 머물고 있다가 기회를 타서 무찔러 전멸시키자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원균의 성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수군마저 왜적에게 당한다면 그야말로 나라가 순식간에 망하는 것이니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42. 새벽에 임금님께서 비밀리에 내리신 분부가 도착했다. 수군과 육군 장수들이 팔짱을 끼고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한 가지 계획이라도 세워서 나아가 적을 토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3년동안 바다 위에 있으며 이런 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여러 장수와 죽음을 각오하고 복수하는 뜻을 맹세하고서 하루 또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다만 왜적이 험한 것에 소굴을 지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가벼이 진군할 수 없을 따름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부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리면 참고 기다릴줄 알아야 한다. 선조임금처럼 지시를 내려놓고 독촉 교서를 내린다는 것은 부하 장수들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42. 초저녁,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생각해 보니 나랏일이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자빠지듯 곤경에 처해 있는데, 나라 안에는 구제할 방법이 없을 듯 싶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마침 흥양 현감이 내가 혼자 앉아 있는 걸 알고 찾아와 자정 즈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나 답답하겠나. 자신이 처한 위치가 있어 얘기는 못하고 조정이 돌아가는 일을 듣고는 사람과 조정에 대한 불만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42. 이순신은 언제나 철저하게 준비하는 장수였으며, 조선 수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신중하게 움직이는 지휘관이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작전을 세우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운주당(運籌堂)’을 짓고 밤낮으로 머물면서 여러 장수와 군사적인 일을 의논했다고 한다.

 

42. 또한 하급 병졸이라도 군대에 관한 일이라면 직접 이순신에게 가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전투에 나갈 때는 부하장수들과 더불어 전략을 정한 뒤에 출전했기 때문에 패하는 법이 없었다고 류성룡은 술회했다.

 

영의정 류성룡

 

43. 그 편에 좌의정 류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책을 보니 바다 전투와 육지 전투 및 불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방법 등이 하나하나 논의되어 있는데, 진실로 이 세상에 비길 데 없이 신통한 이론이었다.

류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다. 둘 사이가 얼마나 막역한 사이인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43. 신경황이 영의정 류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영의정 보다 나라를 더 걱정하는 사람을 없을 성싶다.

 

45. 영의정 류성룡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순변사에게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필시 영의정을 시샘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 해코지를 하는 것일 게다.

 

46. 영의정에게 유자 서른 개를 보냈다.

인간적이지 않나. 고작 유자 서른 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하는 충무공의 마음을 엿볼수 있는 일기이다.

 

46. (꿈속에서) 만일 서쪽의 적이 위급한 상황이고 남쪽에서도 적이 일어난다면 임금께서 어디로 가시겠는가라고 되뇌며 걱정하다가 할 말을 잊었다. ..... 척자점을 쳤다. ...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휴으이 조짐을 들을지 점을 쳐 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물을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참말로 길하고 길한 괘였다.

이순신은 꿈과 척자점을 자주 치는 것 같다. 예지몽을 가지고 있는 이순신이다.

 

45. 류성룡은 1593년부터 6년간 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영의정을 맡아 조선 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설을 서울의 건천동(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에서 보냈다. 이때부터 이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지낸 듯하며, 이후 정치적으로도 운명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1591, 평소 이순신의 자질을 눈여겨보았던 류성룡이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추천하였고, 이 두 사람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난을 함께 헤쳐 나갔다.

오늘날의 이순신을 이 자리에 있게 만든 류성룡이다.

 

2장 왜적의 배를 침몰시켜라

 

임진년, 전쟁이 시작되다

 

50. 양산과 울산 수령은 조방장이 되어 성으로 들어갔지만 전부 왜적에게 졌다고 하였다.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말로는 다할 수가 없다.

 

첫 출전의 날

 

52.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지 않았다. 의로운 무사들이라 할 만하다.

나라를 잃어가는데 격분하지 않을 수 있나. 그 장군의 그 부하들이다.

 

52. “남해 현령과 미조항 첨사,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등이 왜적의 소식을 듣자마자 돌연 달아나 버렸습니다. 무기 등의 물건도 모두 흩어지게 해서 남은 것이 없습니다.” ..... 낙안 군수는 피하려는 뜻이 있는 듯하여 통단스러웠다. 그러나 본디 군법이 있으니 물러나 도망치려 한들 그리할 수 있겠는가.

이게 조선의 현실이다. 어떻게 왜적이 쳐들어왔는데 도망을 칠 수 있지.

 

사천 전투

 

54. 나는 장수들을 지휘하여 일시에 달려 나가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화살을 빗발처럼 퍼붓고 여러 화포를 폭풍 치듯 우레 치듯이 어지러이 쏘아 댔다. 왜적은 두려워하며 퇴각했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었다.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고, 나 또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총알이 등을 뚫고 들어갔지만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활 쏘는 병사와 노 젓는 선원 중에도 총탄을 맞은 자가 많았다. 왜적의 배 13척을 불태우고 물러났다.

이때 입은 상처가 전쟁하는 내내 이순신을 괴롭히는 것이 된다.

 

당포해전

 

56. 크기는 우리나라 판옥선만 하고 배 위에 높이가 두 길쯤 되는 누각을 꾸며 놓은 큰 배가 한척 있었다. .... 아기살과 승자총통 큰 것, 중간 것으로 비를 퍼붓듯 어지러이 쏘아 댔더니 왜적 장수가 화살이 맞아 추락하였다.


판옥선

세키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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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소나무를 재료로 전나무나 삼나무로 만든 왜군의 배에 비해 매우 튼튼했고 3층 구조에 크기도 20~30m로 당시 한--3국의 수군 군함 중 가장 큼. 판옥선은 3층구조로 만들어졌는데 상갑판(병사들이 화살과 포를 쏘는 곳)까지가 수면에서 약5~6m 가량으로 매우 높아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주력 전함이었던 세키부네의 상갑판높이 3~4m 정도에서는 최대2m 가까이 차이가 나면서 두 배들이 맞붙으면 조선수군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활이나 대포를 쏠 수 있어 훨씬 유리한 상태에서 전투가 가능한 반면 왜군들은 자신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하기 위해 상대편 배 갑판위로 뛰어오르기가 무척 어려워서 매우 고전할 수 밖에 없었다.

 

판옥선은 이외에도 또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바다위에서 안정성이 높은 배였다. 반면 왜군의 세키부네는 배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선' 쪽에 가까워서 빠른 기동성이 장점인 대신 회오리물살등에 대한 안정성은 상대적으로 약한 배이다.

임진왜란시기에 이와 같은 거대한 몸집의 판옥선을 조선수군이 적게는 70척에서 많게는 무려 180척까지 보유하면서 수군에서만큼은 일본에 대해 상당한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57. 왜적 장수의 목도 일곱 개 베었다. 살아남은 왜적들은 뭍으로 올라가 도망쳤지만 그 수가 매우 적었다. 우리 군대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군대는 사기를 먹고 사는 집단이다. 몇 번을 패하더라도 한번의 승리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연전 연승이니 부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할 것이다.

 

적을 유인하라

 

58. 웅포에는 왜적의 배가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왜적을 또다시 유인해 보았는데, 전부터 우리 군대에 겁을 먹고 있는 터라 나올 듯하다가 이내 돌아가 버렸다.

왜군은 나가봐야 질 것이 뻔하니 육지에서의 싸움을 원했을 것이다. 우리도 수심이 얕은 지역에 들어갔다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면 큰일이기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유인해서 바다 가운데에서 싸울려고 했지만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59. 왜적 중에 죽은 자가 몇인지 헤아릴 수 없었고, 적들은 기세가 푹 꺾여 다시는 나와서 맞서지 못했다.

 

60. 발포 배 두척과 가리포 배 두척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돌진하다가 바닷물이 얕고 좁은 곳에 부딪쳐 배가 걸리고 말았다. 왜적이 그 배에 올라타도록 만들어 버렸으니 분통함에 쓸개가 찢어지는 듯하였다. 얼마 후 진도의 큰 전함이 적에게 포위되어 구출할 수 없을 듯했는데, 우후가 곧바로 들어가 구해냈다. 경상 좌우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체하며 끝끝내 배를 돌려 도와주지 않았으니 그들의 형편없음은 말할 거리도 못 된다. 원통하고 분하다. 오늘의 분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 경상 수사(원균)아 이렇게 만든 것이다.

배 한척 한척이 얼마나 소중한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가슴 아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전우애란 무엇인가. 어려움이 있더라도 발벗고 나서 도와주는 것인데 전우의 어려움을 못 본체 한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니 원균이 원흉이 된 것이다.

 

수군의 기세에 왜적이 달아나고

 

62. 경상 우후 이의득이 와서 이야기하기를, 수군들이 적을 많이 붙잡아 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사(원균)에게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사가 군사들의 발바닥까지 때리려 했다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이 장수였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부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절대 무인을 하면 안되는 사람이다.

 

63. 적의 무리는 우리 군대의 위세를 두려워 해 밤을 타 도망쳤고 빈 배 17척은 남김없이 태워 없앴다고 하였다.

 

64. 사도 배 두척이 육지에 배를 매는 사이 작은 왜선이 침입하여 불씨를 던졌다. 비록 불은 붙지 않고 꺼졌지만 너무도 분통이 터졌다. 우수사 휘하의 군관과 경상 수사의 군관에게는 그 잘못을 가벼이 물었지만, 사도 군관은 중죄로 다스렸다.

벌을 내릴 때에도 그 경중에 따라 구분하여 한다. 도대체 어떻게 감시를 했기에 왜선이 침입하게 두었을까. 그 근본이 무너짐에 이순신은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아마 이순신이 연전연승을 했기에 더욱더 병사들의 마음이 갈수록 해이해져 갔을 것이다.

 

66.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에게 패배만 당하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자 가능한 한 조선 수군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수군은 섬나라 군대이기는 했지만 실제 해전을 치러 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활약에다 전선이며 화공무기, 군사들의 역량까지 모든 면에서 전력이 앞섰다. 한편 일본군은 1593년 가을 무렵부터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주로 성안에 머물렀다. 아무리 이순신이라 해도 이처럼 피하기만 하는 일본 수군을 공격해 무찌르기란 쉽지 않았을 터다.

 

나에게 항복한 왜인들

 

67. 전라 좌도와 우도에 나누어 보냈던 항복한 왜인들을 전부 모아 화포 쏘는 연습을 하게 하였다.

부족한 병사들을 충원하기 위한 이순신의 고육지책.

 

67. 아침 일찍 아들 울, 조카 뇌, 조카 완이를 어머니 생신에 음식을 올려 드리라고 내보냈다.

전쟁 중에서도 어머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저 대단할 뿐이다.

 

67. 망기시로는 조금도 꺼리는 기색 없이 죽으러 나왔다. 지독한 놈이라 할 것이다.

우리로 봐서는 지독한 놈. 일본으로 봐서는 기개가 있는 놈

 

67. 항복한 왜인들이 와서 자기들 무리중에 산소라는 자가 흉악한 일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베어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왜인들에게 산소의 목을 베개 하였다.

포로 사회에서도 알력이 생기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68. 아침 일찍 수루에 올라가 토목 공사를 감독하였다.

내가 한 일이었는데 충무공께서도 하셨구나. 팔방미인이셨구나.

 

68. 투항한 왜인 여문련기와 야시로 등이 와서 왜인들이 도망치려 한다고 아뢰었다.

이들도 고자질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도망친 왜인들로 인해 자기들에게 피해가 갈것이기 그랬을 것이다.

 

69. 아침에 보고서 초안을 수정했다.

보고서는 중요하니까. 오탈자도 확인하고 문장도 다시 한번 보고.

 

70. 우수사, 경상 수사와 함께 앉아 아우 여필이 준비한 술을 마셨다. 가리포 첨사와 방답 첨사도 어울려 함께하다가 밤이 되어 자리를 끝냈다.

오랜 전쟁기간 오랜만에 거나하게 한잔 술로 피로를 달랬을 것이다. 무인에게 술은 빠질수 없는 것이니까.

 

70.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이 자기 동료인 신시로를 죽여 달라고 청했다 하므로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유도 물어보지 않고? 이 부분은 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이순신다워 보이지 않는다.

 

71. 1594년 가을 무렵부터 항복한 왜인들의 상당수는 이순신이 다스리던 한산도로 보내져 노 젓는 선원이 되었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도 얼마간 도움이 되었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

 

73. 예단을 전하자 처음에는 기어이 거절하는 듯하다가 받고는 몹시 좋아하면서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결국은 받을 것을. 그나저나 이순신은 평소 이런 뇌물이라면 질색을 하는데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생각해본다. 임금의 지시였거나 아니면 불의의 길인지 알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니였을까.

 

74. 장 파총에게 수루 위로 나가 술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였다. 내년 봄에는 배를 이끌고 제주도로 갈 일이 많을 것이라 하며 우리 수군과 힘을 모아 추악한 무리들을 모두 무찌르자고 간절하게 이야기했다.

 

75. 명나라 지원으로 평양과 개성을 되찾고,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왜적까지 물리칠 수 있었지만 명나라 군사들이 고맙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과 소, 말등을 바쳐야 했고, 식량을 빼앗긴 백성들은 더욱 굶주려 갔다. 더욱이 명나라 군대는 조선에 부족한 군사까지 보충해 달라고 요구하여 조선의 젊은 남성은 대부분 전쟁터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나라의 힘이 약하니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를 봐도 마찬가지 아닌가.

 

정유년, 다시 왜적과 맞서다

 

76. 꿈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임진년 왜적을 크게 이겼을 때 꾸었던 꿈과 거의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이순신은 예지몽을 많이 꾼 것으로 알려져있다.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어떻게 싸워야 되는지를 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어쩌면 하루종일 싸우는 것만 생각하다보니 몰입의 효과처럼 자는 동안 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77.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했고, ‘한사람이 길목을 잘 맡으면 천 명도 충분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에 따라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필생즉사, 필사즉생이다. 싸움을 앞 둔 이순신의 비장함을 엿볼수 있다. 군의 사기를 어떻게 끌어올려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77. 오늘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가르쳐 주었다.

얼마나 신념과 이기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면 꿈에서 이런 방법을 생각해냈을까.

 

77. 왜적의 배 130여 척이 우리 편 배를 둘러싸자, 장수들은 스스로 우리 수군이 적은 숫자로 많은 왜적을 대적하는 형세라 여기고는 회피할 계책만 내어놓았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두 마장이나 벗어나 있었다.

 

78. “적선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곧바로 침범해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다시 마음과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적을 쏘아라!” 돌아보니 장수들이 탄 배는 물러나 먼 바다 위에 있엇다.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적들이 내가 돌아서는 틈을 타시 배를 붙잡고 올라탈까 염려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감히 대장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회피할 기색을 보이는 부하들을 봤을 때 이순신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수 없을 것이다.

 

79. “안위야, 군법에 따라 죽고 싶으냐? 안위 네가 군법에 따라 죽고 싶은 게로구나. 도망간들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안위는 당황하여 허둥지둥 왜적의 배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했다.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몸을 피해 대장을 구원하지 않았으니 그 죄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느냐! 처형하고 싶지만 왜적의 형세 또한 급박하니 일단 공을 세우게 해 주마.” 안위와 김응함의 배가 선봉이 되었다. ..... 왜적은 한 놈도 살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구나. 12척 대 133. 세계 그 어느나라 해전을 찾아봐도 이런 압도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승리한 해전은 없다.

 

80. 우리 배들은 왜적이 침범할 수 없음을 알고 동시에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갔다.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쏘자 강과 산에 천둥이 울리는 듯했고, 화살을 비처럼 쏟아부어 왜적의 배 31척을 격파했다. .... 오늘 일은 참으로 하늘이 주신 큰 행운이다.

 

81. 정유년에 치른 해전 가운데 이순신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전투는 명량해전이 아니었을까 한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159783일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으며, 복귀한 지 한달여만에 명량해전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 남은 것은 12척뿐이었지만 통제사 이순신은 장수와 군사들을 모아 다시 전쟁을 준비하였다. 소규모 군대로 많은 적을 막아 내기 위해 이순신은 명량이라는 좁은 길목을 택했고, 이곳으로 왜적을 끌어들인 뒤 전투를 치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진린과의 연합 작전

 

82. 왜적이 타고 왔던 배와 이러저러한 물건들을 빼앗아 와서 진 도독에게 바쳤다.

 

83. 파총 이천상이 1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우리 진영에 이르렀다. 등불이며 촛불이 휘황하여 적들은 틀림없이 간담히 서늘했을 것이다.

 

83. 자정에 이르도록 공격을 퍼부었는데 명나라 사선 19척과 호선 20여 척이 불에 탔다. 도독이 넘어지고 거꾸러지던 모습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84. 이어서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나가 왜적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어 버리자고 말했다.

 

84.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가 처음부터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진린을 극진히 대접하고, 진린이 이순신의 인간됨을 알게 되면서 점차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갔다. 더욱이 진린은 이순신과 노량 해전에 출전함으로써 이순신의 마지막을 함께 한 명나라 장수가 되었다.

진린은 이순신의 성품과 능력을 알아보고 명나라 황제에게 서신을 한통 보낸다. 전쟁이 끝나면 이순신을 요동으로 부르라고. 전쟁이 끝나면 조정대신들은 온갖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되어 목숨이 위태로울수 있으니 도와달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도 이순신을 보고 존경하지 않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3장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87. 나의 지휘에 따르지 않고 왜적이 일으킨 변고를 재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때렸다.

 

88. 해남 현감 위대기를 명령에 거역한 죄로 처벌했다.

 

88. 그런 다음 방비할 수군들을 한꺼번에 보내지 않은 일과 전선을 만들어 오지 않은 일로 이 셋을 처벌했다. 영암 군수 역시 죄를 논했다.

 

89. 두 번이나 기한안에 오지 않은 하동 현감에게 곤장을 아흔 대 쳤다.

90대면 거의 초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분노의 감정을 짐작할수 있다.

 

89. 광양 사람 김두검이 복병으로 있을 당시 순천 부사와 광양 현감에게서 이중으로 삯을 받아 그 벌로 수군에 나왔으면서 칼을 차지 않고 활도 매지 않은채 무척이나 거만을 떨기에 곤장 일흔 대를 쳤다.

 

90. 이순신은 군대의 안정을 위해 언제나 군율을 엄격히 적용했다. 왜적이 침입해 온 실전 상황에서 군율을 철저히 다스리지 않고는 군사들을 통솔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잇속만 차리는 아전들

 

91. 여러 관아의 아전 11명을 처벌하였다. 옥과의 향소에서 작년부터 군사들을 불성실하게 통솔하더니 빠져나간 군사들이 늘어나 거의 100여 명에 이르렀다. 매번 거짓말로 둘러대며 일을 넘겼으므로 오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다.

 

92. 수영 아전들이 백성의 것을 빼앗아 가지는 폐해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너무도 기가막힌 일이어서 양정언, 수영 아전 강기정, 이득종, 박취 등을 중죄로 다스렸다.

 

93. 삼도수군통제사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는 아전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이순신은 이러한 아전들을 무겁게 처벌하였다. 아전들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군사들을 징발해 보내지 않은 것과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등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다.

 

도망친 군사에겐 죽음이 기다릴 뿐

 

94. 수군 황옥천이 제 집으로 달아났다. 황옥천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높은 곳에 걸었다.

탈영병은 언제나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 2, 3의 탈영병이 생기기 때문이다.

 

95. 배가 떠나기 직전, 도망갔던 발포 수군을 군율대로 처형했다. 순천의 이방 역시 군사들을 급히 방비할 곳으로 보내지 않은 일이 있었으므로 전부 군율에 부쳐 처벌하고 싶었지만 일단 그만두었다.

 

97. 이순신의 휘하에서도 수많은 군사들이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도망치다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군들이 계속 탈출하려 했던 까닭은, 전쟁이 두렵고 수군으로 복무하는 일이 너무나 고되고 위험했기 때문일 터다. 수군은 한 번 편입되면 대대손손 수군으로 복무해야 했기 때문에 천한 역으로 여겨진데다, 육군에 비해 복무 기간이 두배나 길고 배 위에서 생활해야 하는 등 복무 여건도 상당히 열악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군대의 안정을 위해 도망친 군사는 처형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전쟁 기간 내내 이 원칙을 엄격히 지켰다.

 

배에 여인을 태운 남해 현령

 

98. 기효근은 배에 어린 여자를 태워 놓고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니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일을 당한 때에 어여쁜 여자를 데리고 다닐 정도이니 그 심사가 형편없고도 형편없다. 그런데 기효근의 대장인 수사 원균 또한 똑같은 짓을 하니 어쩌겠는가?

 

전쟁터에 첩을 데려운 순변사

 

100. 새벽꿈에서 순변사 이일을 만났는데, 내가 쓸데없이 말이 많았다..... 음탕한 계집을 끼고서 관아에도 들어오지 않고 성 밖의 사저에 지내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으니 당신 생각에 어떻소?

 

100. 장흥 부사가 와서 그 편에 들으니 순변사 이일의 일처리가 너무도 형편없다. 나를 해치려 힘을 쏟는다니 우습고 우습다. 이일은 서울에 있던 첩까지 관아에 데리고 왔다 한다. 더욱 놀랄일이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전쟁중인데 여자를 데려오다니. 이들의 안일한 태도를 알겠다. 처벌하지 못하는 이순신의 분노도 같이 느껴진다.

 

싸우지 않고 도망친 경상 우수사

 

102. 배설이 겁을 내던 모양새에 대해 들었는데, 탄식을 억누를 수 없었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하여 감당치도 못할 자리에 분수넘치게 올라앉아 나랏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는데도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니 어찌할꼬!

 

102. 배설은 교유서를 공경히 맞이하지 않았다. 너무도 기막힌 일이라 이방과 수영 아전에게 곤장을 때렸다.

 

103. 왜적의 배 여덟 척이 생각지 않게 들어와 여러 배가 겁을 먹고 두려워했다. 경상 수사 배설은 적선을 피해 후퇴하려고 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뿔나팔을 불게 하고 깃발로 지휘하며 추격했더니 왜적의 배는 물러가 버렸다.

 

103. 배설은 왜적이 크게 몰려올 것을 염려해 도망치기로 계획하고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자기를 따르게 했다. 나는 그 속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아직 제 뜻을 명백히 드러내지 않은 때에 앞서 나가는 것은 장수의 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103. 배설이 달아났다.

배설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이 달아날 때 전력인 12척 때문에 이순신이 명량대첩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전력이 없어 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104. 1597716, 칠천량에서 또 한 번의 해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무리한 출전을 감해했던 조선 수군은 상대의 계략에 휘말려 처음으로 일본 수군에 참패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통제사 원균은 물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등이 전사했다. 그렇지만 경상 우수사 배설은 자기 휘하의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배설이 지금의 전력으로는 일본 수군에게 반드시 질 것이며 칠천량은 바다가 얕고 좁아 배를 움직이기에 좋지 않으니 진영을 옮겨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원균이 이를 묵살했다.”고 씌어 있다. 아무리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에 달아났다고 한들 배설이 장수로서 전투를 패해 도망친 죄를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자신을 문책할 것이 두려워 병을 핑계 대고 또 한번 달아났던 배설은 결국 1599년 권율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산에 숨은 무안 현감

 

105. 바람이 너무나 차가워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추위 때문에 몸이 얼지는 않을지 걱정하느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아침 여덟 시쯤 세찬 눈보라가 일었다.

그 당시 배에 무슨 난방장치가 있을리 만무하다. 그들에게 겨울은 혹독했으리라. 그걸 견디게 해야 하는 이순신의 마음도 힘들었을 것이다.

 

106. 전쟁의 와중에 제 한 목숨 보전하려고 자기가 맡은 고을과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난 지방 수령은 상당히 많았다. 남언상은 이순신 앞에 나타난 며칠 뒤 의금부로 압송되었는데, 이때 남언상과 같은 죄목으로 잡혀 온 수령만 30여 명 달했다. 언제나 사()보다는 공()이 우선이고, 자신의 목숨보다는 나라를 지키는 일이 먼저였던 이순신에게 남언상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선조는 이순신에게 어떠했을까? 자기 고을 버리고 간 수령은 벌을 받아야 하고 서울을 버린 왕은 이해해야 되는건지. 백성들이 도망간 왕을 보고 어떤 희망을 가지겠는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울을 사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 백성들은 그런 왕을 원하지 목숨 부지를 위해 서울을 버리는 왕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선조는 14명의 후손이 있었다. 말해 더 무엇하랴. 어차피 광해군이 있었는데.

 

아첨으로 지위를 얻은 김억추

 

107.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일개 만호 자리에나 겨우 적합할 뿐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좌의정 김응남이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해 보냈으니 조정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아무리 이순신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를 뒷받침할 만한 부하 장수가 있어야 하건만 명령도 제대로 수행 못하는 자가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들을 지휘해야 하는 이순신의 고통은 얼마나 크겠는가.

 

107. 김억추는 임진왜란 중에 여러 번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왜적과 맞서 보지도 않고 미리 달아나 버린 장수이자, 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정을 저지른 지방 수령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이 좌의정의 비호 아래 전라우도 수군을 이끄는 수사로 임명되었으니, 이순신의 분개는 무리는 아닌 듯하다.

 

4장 모두에게 참혹한 전쟁

 

피란 떠나신 임금님

 

111. 피란 떠나신 임금님의 사정을 자세히 전해 주는데 통곡을 억누를 수 없었다.

통곡만이 있었을까. 선조에 대한 실망은 전혀 없었을까?

 

112. 피란가신 임금님 형편과 명나라 군대가 저지른 일에 대해 들었다.... 경상 수사 원균도 왔는데, 술을 지나치게 마셨음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장수들이 하나같이 괴로워하고 또 못마땅해했다. 원균이 남을 헐뜯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다. 영산령은 술에 취해 거꾸러져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우스웠다.

아무리 원균이 나이가 많다지만 수군통제사 앞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무인의 수치이다. 내치고 싶고 벌을 주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순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113. 임금님의 비밀편지는 바다 위에서 해를 넘기며 나라를 위해 고생하고 있음을 내 항상 잊지 않고 있다. 공을 세운 장수와 군사들 가운데 큰 상을 받지 못한 자를 서둘러 보고하라.”.......위에서 밤낮으로 나라를 위해 근심하시고 부지런하게 애쓰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북받쳐 오르는 감정과 그리운 마음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113. 1592년 이순신이 임금께 올린 보고서에 그 정황이 보인다.

어가가 관서 지방으로 옮겨 갔다는 소식을 처음 알고, 놀라고 원통한 마음 끝이 없어 종일토록 서로 붙들고 오장이 다 타고 찢어진 듯 울음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군사들

 

114. 각도의 군대에 말이 5천 필을 넘지 못하는 곳이 많고, 군량도 거의 바닥났다고 한다. 왜적들이 방자하게 독기를 부리는 것이 날로 더해 가는데, 일마다 이 지경이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114. 소비포 권관에게서 들으니 영남에 속한 여러 배의 활쏘는 군사와 노 젓는 선원들이 다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마음이 아파 차마 듣고 있기 어려웠다. 수사 원균과 공연수, 그리고 이극함은 눈길을 주었던 여자들과 전부 사통하였다고 한다.

자기 수하들은 배고픔에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여자와 사통을 한 원균과 그 무리들은 아마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115. 옷 없는 자들이 이 배 저 배에서 거북처럼 웅크리고 추위 때문에 신음하는데, 그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군량이 도착하지 않으니 이 또한 걱정이다. ....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두어 묻을 차사원으로 녹도 만호를 정하여 보냈다.

전쟁에서, 전투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보급이다. 부하들이 못입고 못먹는 것을 보는 지휘관은 가슴이 찢어진다. 그리고 도대체 이런 상태로 전투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115. 지붕이 새는 탓에 마른자리가 없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배에 머물며 고생하고 있으니 몹시 염려가 된다.

이런 지휘관과 근무하고 싶었다. 나도 그런 지휘관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하였다.

 

115. 지붕이 세 겹이나 말려 올라가 비가 삼대처럼 새는 탓에 앉은 채로 밤을 새고 새벽을 맞았다.

 

116. 조형도가 수군은 군사 한 사람에게 매일 식량 다섯 홉과 물 일곱 홉을 준다고 임금님께 거짓으로 고했다한다. 인간사 놀랍고 어처구니없기도 하지. 하늘과 땅 사이에 어찌 이처럼 남을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녁에 정찰선이 들어와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고 전했다. 답답한 마음에 눈물이 난다.

한 홉은 180ml이니까 350ml 생수 반병이다. 다섯홉이면 생수 두병하고도 반병이다. 진짜 이정도를 줬다면 괜찮은 편 아닌가.

 

116. 군량이 모자란다는 말을 여러번 하였다. 어쩔 도리가 없으니 참으로 근심스럽다. 박 조방장도 와서 술을 몇 잔 마셨는데, 몹시 취하였다. 깊은 밤 수루 위에 누웠더니 초승달 빛이 수루를 가득 채웠다. 마음에 이는 생각들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상상을 해본다. 같은 수루에 누워 달을 쳐다보면서 이순신 되어본다. 착잡하다. 이런 상황들이. 뚜렷한 답들이 보이지 않는다.

 

117. 이 편에 어머니께서 안녕히 계다는 편지를 받았다. 한없이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눈이 두 치나 내렸는데 근래에 없던 일이라고 한다. 밤에 몸이 많이 좋지 않았다.

 

117. 군사들의 굶주림과 헐벗음의 실상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하였다. 이순신은 군사들이 전염병으로 수도 없이 사망하고, 남은 군졸들도 하루에 고작 두세 홉의 양식을 먹을 뿐이라 배고픔과 고달픔이 극에 달해 노를 저을 수도 활을 당길수도 없는 지경이며, 바다에 떠 있는 배 위에서는 추위도 더욱 혹심하여 군사들이 모두 귀신 모양으로 변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게다가 명나라 구원병이 도착한 후 조선의 군량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조선군의 굶주림은 더욱 심해졌다.

두세홉이면 내가 먹기에도 부족한 양이다.

 

왜적의 손에 부하를 잃고

 

118. 광양 현감이 진주에서 죽임을 당한 장수와 군사들의 명단을 보내왔는데, 보고 있자니 아프고 또 참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업었다.

 

118.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한 마음 어찌 말로 할수 있겠는가.

제일 아끼는 부하가 죽었다. 공자에게 안위가 떠난 것처럼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118. 녹도 만호 송여종에게 죽은 군졸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 주라고 흰쌀 두 섬을 주었다.

 

119. 체찰사는 백성을 위해 병폐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계셨다. 그런데 호남 순찰사는 남을 헐뜯어 말하는 기색이 다분해 한탄스러웠다.... 군사들이 싸우다 패한 곳을 둘러보았는데, 비통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119. 다시 무씨를 뿌리라고 명했다.

자급자족이다. 가장 쉽게 추수가능한 무를 택한 것 같다.

 

119. 보성 군수 안홍국이 총탄을 맞아 죽음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랍고 안타까운 마음 글할 길이 없었다. 왜적은 한 놈도 잡지 못했는데 장수 둘을 먼저 잃고 말았으니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어찌하겠는가.

120. 이순신은 왜적과의 전투가 끝나고 조정에 보고서 올릴 때면 언제나 사상자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고 그 유가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사망자의 시체를 고향으로 보내 장사 지내게 하고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애썼다. 그는 부하들의 죽음을 가슴으로 애통해하는 상관이었다. 일기에 언급된 어영담은 돌림병에 걸려 진영 안에서 사망했는데, 이순신이 유달리 신뢰하여 모든 일을 의논하는 부하 둥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순신의 상실감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된다.

 

피란길에 돌아가신 숙모

 

121. 몸이 많이 불편하여 자리에 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시간을 끌며 머물고 있는데, 교묘한 꾀가 없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고 많은데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더 한숨이 나오고 눈물이 흐른다.

 

121. 통곡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어째서 요즈음 세상일은 이다지도 참혹한가, 장례는 누가 주관할지, 대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돌림병으로 죽은 금산이

 

122. 수영의 사내종 금산이. 그 처와 자식까지 모두 세사람이 돌림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 눈 앞에서 믿고 부리던 자들인데 하룻저녁에 죽고 마음이 놀랐다.

사내종이지만 이순신의 그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엿볼수 있다.

 

123. 설날에 아산 선산에서 차례를 올리려는데 무려 200여 명이 몰려들어 산을 둘러싸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바람에 제사를 나중으로 물렸다고 한다..... 의능을 천민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공문도 함께 봉해 올렸다.

 

123. 백성들이 굶주릴 대로 굶주리다 서로 잡아먹는 참상에 대해 물었다. 백성들은 앞으로 어떻게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갈는지.

 

124. 성 안팎으로 사람사는 집이 하나도 없고 인적도 없었다.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아팠다.

 

나라 안의 적

 

125. 남해 현령이 또 와서 왜적들이 이미 광양과 순천을 분탕질하였다고 전했다. .... 이소식을 듣고는 뼛속까지 쓰라려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실은 왜적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영남의 파란민들이 왜적 차림으로 가장하여 광양에 쳐들어가 집집마다 분탕질을 한 것이라고 하였다. 진양에서 있었다던 일도 거짓이라고 했다.

 

126. 밖에서 온 적도 섬멸하지 못했는데 나라 안의 적이 이와 같으니 너무나 놀랍고 마음이 아프다.

국난 극복을 위해 온나라 국민이 하나가 되어야 하건만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126. 나는 보자기가 사람들을 속인 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거짓 경보를 퍼뜨린 두 놈을 잡아다 곧장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군대 안의 질서가 크게 안정되었다.

 

128. 왜적을 물리치는데 온 힘을 기울여도 모자란 때에 나라 안의 적과도 싸워야 했다니, 당시 조선 사회가 얼마나 혼란했는지 눈앞에 선하다.

 

백성의 부역을 줄여 주어야

 

129. 지나온 곳마다 눈앞에 쑥대밭만 가득해 참혹한 모습을 차마 보기 어려웠다. 우선 전선을 정비하는 부역을 면제해 군사들과 백성들의 노고를 들어 주어야겠다.

부하들과 그 가족을 위해 이순신의 마음을 알수 있다.

 

5장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새해 첫날에

 

133. 어머니를 보시고 한 살을 더 먹었다. 이는 난리 가운데 다행한 일이다.

 

133. 촛불을 환히 켜고 홀로 앉아 있다가 생각이 나랏일에 미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렸다. 또 여든의 병드신 어머니가 떠올라 애를 태우며 밤을 지새웠다. ......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새해면 언제나 한해의 계획을 세우고 가족의 건강을 기원한다. 이순신은 여기에 나라를 먼저 떠올렸다.

 

134. 새벽 두세 시쯤 어머니 앞에 인사를 올렸다..... 저녁에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수영을 돌아왔다. 심사가 어지러워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수영(水營)에도 봄은 오고

 

135. 때마침 수장안에 피라미 떼가 구름처럼 몰려들기에 그물을 펼쳐 2천여 마리를 잡았다. 장관이라 할 말하였다. 그러고는 전선 위에 앉아 술을 마시며 우후와 함께 새봄의 경치를 감상하였다.

갓잡은 피라미에 술한잔 걸치면서 봄을 만끽하는 이순신

 

135. 해운대로 자리를 옮겨 활을 쏘다가 다들 꿩 사냥 구경에 빠져 주위가 몹시 조용하였다. 군관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은 시를 읊었다. 저녁이 되어 돌아왔다.

멋지다. 무인들이 모여서 시를 읊고 춤도 추고. 덩실덩실~ 풍류를 즐길줄 아는 충무공. 더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135. 승평 부사가 아우를 데리고 나와 기다리는데, 기생들도 와 있었다. 비온 뒤라 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풍경이 아름다웠다.

술자리에 꽃이 있으면 더 좋아겠지. 날짜를 보니 임진왜란 전이구나. 그렇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 않는데.

 

136. 황숙도도 와서 함께 취했다. 배수립이 나와서 술잔을 주고받으니 더없이 즐거웠다. 밤이 깊어서야 자리가 끝났다. 신홍헌에게 술을 걸러 어제 심부름하던 관아 하인들에게 나누어 먹이라고 하였다.

 

137. 군관 등이 어제 내기 시합을 하여 진 쪽에서 한 턱을 냈는데, 거나해진 뒤에야 자리를 끝냈다. 오늘 밤은 많이 취한 탓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앉았다 누웠다 하다 보니 새벽이 되었다. 봄날의 나른함이 나에게까지 찾아왔구나.

봄을 만끽하는 충무공을 볼 수 있다. 영웅은 술을 좋아한다.

 

전장에서 보낸 명절

 

138. 오늘은 바로 봄놀이를 하는 날인데, 모질고 고약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에 떠 있어야 했다.

 

138. 새벽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고, 군사들에게 팥죽을 먹였다.

 

139. 전라좌도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하루 종일 장수들과 술을 마셨다. 오늘 밤 달빛이 희미하게 수루를 비춘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들지 못하고 긴긴 밤 시를 읊조렸다.

진짜 멋있다. 거나하게 취한 다음 읊는 시라. 무인과 시는 너무 잘어울린다.

 

139. 오늘은 삼짇날이라 방답 첨사, 여도 만호, 녹도 만호, 남도 만호 등을 불러 술과 떡을 먹였다. 송희립을 우수사에게 보내 후회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게 했는데, 정중히 답하였다고 한다.

 

139. 밤 늦도록 군사들을 뛰놀게 한 것은 내가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애쓰고 있는 군사들의 노고를 풀어주려는 생각에서 그리한 것이다.

계속해서 긴장감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날카로워진다. 적절한 휴식이 필요한 시점을 충무공은 아는 것이다.

 

140. 오늘은 바로 99일이니 1년 중의 좋은 명절이다. 나는 비록 어머니 상을 당해 상복을 입었지만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먹이지 않을수 없는 터라, 제주에서 내온 소 다섯 마리를 녹도 만호와 안골포 만호에게 주어 먹이도록 하였다.

99일은 중구절또는 중양절이라 한다. 옛 어른들은 양수인 홀수가 중복되는 것을 좋아했다. 99일은 추수의 마무리 시점으로 농사 짓는 사람들에겐 가장 중요한 날이다.

 

항복한 왜인의 광대놀이

 

141. 저녁에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가 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한 왜인들이 간절히 마당놀이를 하고 싶다 하기에 금하지 않았다.

 

141. 이순신은 엄격했지만, 한편으로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항복한 왜인들에 대해서도 도망치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엄중하게 처벌했지만, 한 번쯤은 광대놀이를 허락하여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줄도 아는 장수였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잠 못 이루고

 

143. 하루 종일 텅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수백 가지 생각이 마음을 뒤흔든다. 괴롭고도 심란한 이 마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흐리멍덩하여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 같기도 하고 정신나간 사람 같기도 했다.

 

143. 달빛은 흰 비단 같고 바람도 파도를 일으키지 않았다. 해에게 피리를 불게 하다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끝냈다.

, 춤에 이어 음악까지 잘 알고 즐길줄 아는 충무공.

 

144. 밤 열시가 되자 바다 달빛이 수루에 가득 찼다. 가을을 맞은 마음이 퍽 답답해져 오기에 수루 위를 배회하였다.

수루가 가장 달이 잘 보이는 곳이 아닐까. 그렇기에 이렇게 이순신이 자주 방문하는 것이 아닐까.

 

144. 오늘 저녁 달빛이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홀로 앉아 마음에 고민을 품고 있으니 잠이 올리 없다. 신홍수를 불러 퉁소 연주를 들었다.

 

145. 오늘은 바다 위로 달빛이 어렴풋이 비치고 밤공기가 꽤 차가웠다.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해 앉았다 누웠다 하느라 편히 쉬지 못했다. 다시 몸이 불편해졌다.

 

145. 이순신은 자주 불면에 시달렸다. 나라를 구할 책임을 짊어진 장수로서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밤 번민에 휩싸여 뒤척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순신은 잠 못 이루는 밤에 종종 시슬 지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일실되고 한산도가 한편이 현재전한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閑山島月明夜上戍樓(한산도월명야상수루)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撫大刀深愁時 (무대도심수시)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何處一聲羌茄 更添愁 (하처일성강가 갱첨수)

 

앞일을 일러 준 꿈

 

146. 새벽에 남자아이를 얻는 꿈을 꾸었다. 포로로 잡혀간 아이를 되찾을 징조다. .... 그리고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홀로 앉아 무엇을 가리켜 보였는데 나는 옷소매를 뿌리치고 대꾸하지 않았다. 가소로운 일이다.

 

147. 명나라 유격군 심유경이 벌써 일본과 강화를 맺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씌어 있었다. 그렇지만 왜적의 간사한 꾀와 교묘한 속셈이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지난번에도 그놈들의 술수에 빠진 적이 있지만 또 이렇게 빠져들고 마니 한숨만 나온다.

 

147. 밤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곡을 하는 꿈을 꾸었다. 아주 좋은 징조라 한다.

 

148. 바다 가운데 있던 외딴섬이 달려와 내 눈앞에 멈춰 서는데, 그 소리가 천둥이 치는 듯하여 사방이 놀라 달아나는 꿈이었다. 그러나 나만은 그 자리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매우 기뻐했으니, 이는 왜놈들이 조선에 화친을 빌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에 올라 천천히 가는 꿈도 꾸었는데, 임금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명을 받고 올라갈 조짐이다.

 

148. 새벽에 꿈을 꾸었다. 왜적들이 항복을 빌며 구멍이 여섯 개인 총통 다섯 자루와 환도를 바쳐왔다. 왜적의 말을 전해 준 자는 김서진이라 했다. 왜놈들은 무기를 전부 바치고 투항하였다.

 

149. 한참을 어루만지며 감상했는데, 용의 빛깔이 변하고 형상이 움직였으니 기이하다고 할만했다. 유달리 상서로운 점이 많아 적어둔다.

 

150. 잠 못 들고 뒤척이던 밤이 많아서였을까. 이순신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주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꿈속에서도 나라 걱정을 하고, 더욱이 꿈에 보인 일들을 나라의 앞날과 연관지어 좋은 징조로 해석하려고 하였다. 나라에 닥친 어려움이 어서 해결되기를 바라는 그 간절함이 여기서도 보인다.

자나깨나 나라 생각, 전략 수립, 부하 생각들을 하다보니 꿈속에서도 이리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예지몽으로 나타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몸이 아파 신음하여도

 

151. 식후에 몸이 썩 좋지 않더니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밤새도록 신음하였다.

 

151. 이른 아침 몸이 몹시 불편해 온백원 네알을 먹었다. 얼마후 배 속에 가득 차 있던 것들을 시원하게 쏟아냈다. 그러자 몸이 편안해지는 듯하였다.

 

153. 하인더러 패문에 대한 답서를 쓰게 하였는데, 모양새가 격에 맞지 않았다. 수사 원균이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게 했지만, 그 또한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아픈 와중에도 일어나 앉아서 글을 짓고 정사립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보냈다.

자신의 글 외에는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일수도 있다.

 

154. 찬 기운을 쐬어서 그런가 하여 소주를 마시고 몸조리를 했는데, 인사불서잉 되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구토을 여남은 번 했고, 밤새 고통에 시달렸다.

이 고통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다시는 안 마셔야지 하면서도 어느새 술을 찾고 있다. 다시한번 인간적인 이순신을 볼수 있는 부분이다.

 

점괘에 위안을 얻고

 

156. 혼자 앉아서 아들 면이의 병세가 어떤지 염려하다 척자점을 쳐 보았다. ‘임금을 뵙는 것 같다는 점괘를 얻었다. 참으로 길한괘였다. 다시 점을 치자 밤중에 등불을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점괘 모두 길해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또 영의정 류성룡의 일로 점을 쳤는데, ‘바다에서 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두 번째 점에서는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으니 매우 길하다.

척자점은 어떤 점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괘를 얘기하는건 주역과 관계되어 있지 않을까. 이순신은 무과시험 합격전에 유학을 공부했다고 하니 아마 그때 배운 것이 아닐까.

 

6장 멀리서 그리는 가족

 

꿈에 뵌 아버지

 

161. 홀로 앉아서 꿈에 뵌 아버지를 떠올리니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이순신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봐도 그렇고 아버지한테도 다르지 않다. 반대로 부모님이 이순신에게 각별히 대했나 보다.

 

162.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곧장 아산으로 달려가 삼년상을 치렀지만, 이순신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기일이나 생신이 되면 더욱 애통한 심정을 느꼈을 것이다.

 

머리 흰 아들의 어머니 생각

 

163. 오늘은 어머니 생신인데, 어머니께 가서 오래 사시기를 빌며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163. 아침에 흰 머리카락을 여남은 올 뽑았다. 머리 세는 것이 꺼려져서가 아니라,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그리하였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이런 세심한 부분까지 생각하는 건 쉽지 않다. 나도 흰머리가 있는데 이거 뽑으면 머리가 없는데. 난 그냥 염색하는 걸로.

 

164. 어머니께선 안녕하시다 한다. 그렇지만 아내는 집에 불이 난 뒤로 마음과 몸이 많이 상해서 가래가 끓고 숨이 차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고 하니 염려가 된다.

어머니는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정작 아내는 너무 일기에 없다. 아내는 어련히 잘 있을거라 해서 그런 것인가. 아내가 섭섭해했겠다.

 

165. 그렇지만 잠시라도 어머니 안부를 알지 못하면 걱정이 그치지 않아 종 옥이와 무재를 본영으로 보내고 전복, 밴댕이젓, 어란을 어머니께 보냈다.

 

어머니의 당부

 

166. 어머니 앞에서 아들이 왔다고 인사를 올리자 어머니께선 숨이 곧 끊어질 듯하셨지만 말씀에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물리치는 일이 다급하므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66.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잘 가라고 하시며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 내야 한다고 두 번 세 번 당부하실 뿐, 이별의 슬픔 때문에 한숨지으시는 모습는 조금도 없으셨다.

 

166. 백발에 갸날픈 어머니께서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셨다. 어머니와 나는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부둥켰다. 밤새 어머니 마음을 달래 드렸다.

 

167. 곁에서 시중들며 아침밥을 올리니 어머니께서 퍽 기쁘고 즐거우신 기색이었다.

 

167. 어머니를 모시고 일행과 함께 배에 올라 본영으로 돌아왔다. 종일토록 어머니를 모셨으니 다행하고 다행한 일이다.

 

167. 아침일찍 어머니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어머니께서 종일 기뻐하시니 다행이다.

 

병든 아내

 

168. 아들 울이가 보낸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심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회를 내보냈다.

 

168. 아내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한다. 생사가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한 지경이라 다른 일은 미처 생각할 수 없지만,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는지. 마음이 아프고 아프다..... 수사 원균의 일은 너무도 해괴하다. 내가 머뭇머뭇하면서 전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니 천년을 두고 탄식할 일이다.

 

169. 아내가 나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원기가 몹시 쇠약해졌을 텐데 몹시 걱정이 된다.

 

아비의 마음

 

171. 아들과 헤어지니 마음이 착잡하여 텅 빈 동헌에 홀로 앉아 있어도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171. 오늘은 바로 큰아들 회가 혼인하는 날이다.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염이 걱정

 

175. 수사 원균이 나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해서 좋지 못한 일들이 많다고 했는데, 죄다 허튼 짓이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상관없다고. 나만 똑바로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지만 어디 세상일이 그러한가. 꼭 영웅을 시기하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175. 아침부터 염이의 병세가 어떤지 알지 못하고 왜적을 물리치지는 일도 지체되는 까닭에 마음의 병 또한 깊어져 밖으로 나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있는데, 정찰선이 들어왔다. ... 며칠 늦었더라면 목숨을 구하기 어려울 뻔했다.

 

면아,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177. 새벽 두시쯤 이런 꿈을 꾸었다.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지나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고꾸라지지는 않았고, 막내 면이가 나를 부축해 안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러다 잠에서 깼는데 이 꿈이 대체 무슨 징조인지.

 

177. 면이가 전쟁터에서 죽었구나. 나도 모르게 간담이 내려앉고 목이 메었다. 통곡하고 통곡할 뿐이었다. 하늘은 어찌 이토록 어질지 못하신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무슨 이치가 이리도 어그러졌느냐. 하늘은 어둡고 땅은 컴컴하니 한낮의 해도 빛을 잃었구나. 슬프다! 우리 낙내,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영특한 기질이 범상치 않아 하늘이 너를 세상에 남겨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그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남아 있은들 마침내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냐. 네 이름 부르며 울부짖을 따름이구나. 하룻밤이 1년 같았다.

피를 토하는 심정이 느껴진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너무 구구절절하다. 이런 아버지를 만났으니 면이도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178. 누워도 보고 앉아도 보고 하루 내내 뒤척였다. 장수들이 와서 조문했지만 어찌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

 

178. 내일이면 막내가 세상을 떠낫다는 소식을 들은지 나흘째가 되지만 마음대로 슬피 울지도 못하는지라 수영 안에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178. 새벽에 향을 사르고 곡을 하였다. 흰 띠를 두르고 있는 이 비통함을 어찌 견디겠는가.

 

178. 죽은 막내가 생각나 슬피 울었다.

 

179. 저물녘에 코피를 한 되 남 짓 쏟았다. 밤에 앉아서 면이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마음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이번 세상에선 영혼이 되었으니, 결국 제 불효가 이리 막심한 줄도 모를테지. 슬픔에 울부짖는 꺾이고 찢어진 심정 어찌 억누를 수 있으리오.

 

7장 백의종군의 길

 

감옥 문을 나와

 

183. 감옥문을 나왔다. .... 마음으로 내게 술을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억지로 마셨더니 몹시 취하였다.

감옥문을 나설 때 기분이 어떠했을까. 하지만 그 어떤 분노와 원망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속에 담아둔채로.

 

184. 저녁에 성안으로 들어가 영의정 류성룡과 밤새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다시 남쪽으로

 

186. 마을 사람들 여럿이 술병을 들고 찾아와 먼 길 떠나는 이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술에 흠씬 취한 뒤에야 자리를 끝냈다. 홍군우와 이 별좌가 노래를 했는데, 나는 듣고 있어도 즐겁지 않았다. 금오랑은 술을 잘했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을사람들에 둘러쌓여 있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충무공을 위로해주고 술한잔씩 올리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하였다. 거의 왕과 같은 대접이다.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188.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아뢰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고..... 하늘의 해조차 캄캄했다. 곧장 게바위로 달려가 보니 배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188. 저녁에 입관을 하였다. 오종수가 마음을 다해 장례를 도와주니 내가 죽어 가루가 되어고 그 고마움은 잊지 못할 것이다.

 

189. 이른 아침 길을 나서며 어머니 영전에 곡하고 인사를 올렸다.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일이 또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못하다. 뇌의 집으로 가서 조상님 사당에 하직을 고했다.

 

190.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다. 서럽게 울밖에, 오늘을 어찌 견딜지. 닭 울 때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190. 원균의 어그러지고 터무니없는 행태를 많이 전해주었다. 또 충청도 진영의 장수와 군사들이 이반을 하여 앞으로의 정세를 예측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191.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장례를 주관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겠니.” ..... 새벽부터 해 저물 때까지 어머니가 그리워 슬피 우니 눈물이 엉켜 핏방울이 되었다. 하늘은 어찌 이리 무심하게 나를 비춰 주지 않으시는가. 나는 어째서 빨리 죽지도 못하고 있단 말인가.

 

원균

 

193. 수사 원균이 왔다. 그의 사람됨은 음흉하고 간악해 형편없기 짝이 없다.

정말 원균과 이순신은 물과 기름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폄하하기도 힘들 것이다.

 

193. 영공 원균의 사리에 어긋난 행동에 대해 들었다. 한탄을 금할 수 없다.

 

193. 수사 원균이 거짓 공문을 보내 군사들을 동요시켰다. 군대안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다니, 그 사람됨이 음흉하고 분별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4. 원균은 도무지 공문을 따르려 하지 않을뿐더러 이치에 닿지 않는 말만 늘어놓으니 가소롭다. 명나라 조정에서 천자를 모시는 신하가 보내준 화공 무기인 1530개를 나누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만 쓰려고 하다니, 그 간계는 입에 올릴 가치조차 없다.

 

195. 수사 원균이 와서 영등포로 가자고 독촉하는데 음흉스럽다하겠다. 원 수사가 지휘하는 배 25척은 전부 내보낸 터라 일고여덟척만 거느리고 있을 뿐인데, 이런 말을 꺼내다니 그 마음 씀과 일 처리가 대개 이런 식이다.

 

196. 임금님의 유지를 가지고 왔다. 수군 장수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니 이제부터 구습을 모조리 고치라는 말씀이셨다. 황송한 마음에 한숨이 그치질 않는다. 이는 원균이 술에 취해 경거망동하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누구를 이렇게 미워한 것을 본적이 없다. 얼마나 사무치면 겉으로는 표현 안하지만 임금님의 교서를 받고 얼마나 황망했을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196. 원흉(원균)이 조의를 표하는 편지를 보냈다. .... 자신이 데려온 서리를 곡식 사 오라는 명목으로 육지에 보내 놓고 서리의 처와 사통하려 했는데, 서리 처가 악을 쓰며 따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와 고함을 지른 일도 있다고 했다. 원균이 온갖 술수로 나를 모함하는 것, 이 또한 내 운명이다. 서울로 끝도 없이 짐을 실어 보내고 구실을 만들어 나를 헐뜯기가 날로 심해진다. 좋은 세상 만나지 못한 이 신세를 나 혼자서 한으로 여길뿐이다.

 

198. 대장의 잘못은 입에 담을수 없을 정도요, 그 살점을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라고들 하였다.

 

198.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전라 좌수사였던 이순신이 경상도 바다로 지원을 나가 함께 왜적을 물리칠 때만 해도 경상 우수사 원균과 이순신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전라도와 경상도 수군이 연합작전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출전을 두고 자주 대립하였다. 원균이 대부분 곧바로 진격해 왜적과 싸우자는 주장을 하였던 반면, 이순신은 신중한 자세를 취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들이 속한 당파의 입장과도 유사했는데, 원균이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서인이었고, 이순신은 일본과의 강화를 도모했던 남인과 가까웠다. 전쟁이 계속되고 원균에 비해 공을 많이 세운 이순순이 15938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나이도 다섯 살 위인 데다 무관으로서 경력도 많았던 원균은 이순신을 더욱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수 없게 되었다.

원균마저 품으로 안았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나름 고집있고 강단있는 이순신도 타협은 애당초 불가능 했을 것이다.

 

나의 자리로 돌아와

 

199. 밤에 꿈을 꾸었는데 무언가 명을 받을 조짐이 있었다.

 

199. 임금님의 교유서를 가지고왔다. 바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이였다. 교유서에 절한 다음 조심스레 서장을 받아들고 임금님의 명을 잘 전해 받았다는 편지를 써서 봉하였다.

 

200. 순천과 낙안의 피란민들이 도로에 한가득 쓰러져 있었다. 남녀가 서로 부축하며 가는데 마음이 아파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또께서 다시 오셨으니 저희들은 살길을 얻었습니다.”

.... 나는 병을 빙자한 현감을 잡아다 곤장을 치려고 했는데, 현감 홍요좌가 먼저 눈치를 채고 급히 나왔다.

 

202. 낙안에 다다르니 사람들이 5리 밖가지 나와 인사하였다. 백성들이 달아난 까닭을 묻자, 왜적이 닥쳐온다고 병사가 겁을 내어 창고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였기 때문에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모두들 대답했다. 낙안군 관아에 도착해 보니 창고의 곡식은 모두 불에 타 버린 채였고, 아전과 백성들이 와서 인사하는데 눈물을 뿌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오후에 다시 길을 떠나 10리쯤 가자 노인들이 길가에 줄지어 서서 다투어 마실 것을 바쳤다. 받지 않으면 통곡하면서 억지로 권하였다.

얼마나 백성들이 이순신을 존경하고 흠모하고 따랐는지를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두 번 다시 바다를 빼앗기지 않으리

 

203. 조선이 믿는 바는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 모양이라면 다시 희망을 걸 곳이 없다.

 

204. 16일 새벽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통제사 원균이며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뿐만 아니라 여러 장수까지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터져 나오는 통곡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나는 직접 바닷가로 가서 상황을 보고 들은 다음 방법을 정해 보겠다고 했고, 원수도 흔쾌히 동의하였다.

모든 것은 현장에 답이 있는 법이니까.

 

205. 오늘밤 반드시 야간 공격이 있을 것이다. 장군들은 미리 알고 대비하가.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군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밤 열시경이 되자 예상대로 왜적이 몰려와 대포며 총탄을 퍼부어 댔다. 내가 탄 배에서 곧바로 앞을 향해 지자포를 쏘았더니 산과 바다가 들썩하였다.

 

해설

 

209. 이순신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바다에 나가 왜적과 전투를 치른 날도, 왜적이 쏜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한 날도, 감옥에서 풀려나온 날도, 아들의 부음을 들은 날도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순신은 왜 일기를 썼을까? ‘전쟁이라는 너무도 비일상적인 상황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의지가 이순신을 일기 쓰기로 이끌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09. 일기는 말 그대로 그날의 기록이므로 이순신은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잊히기 전에 전선에서 몸소 겪은 일을 일기에 적었다. 이순신의 일기가 있었기에 우리는 역사적인 사건의 실상에 가까이 접근할수 있고, 왜적을 물리치고 조선을 지킨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인물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 볼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순신의 기록 정신은 기려져야 할 것이다.

 

214. 이순신은 출전한 해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주변의 지형과 물살, 조수 등을 고려하여 조선군에 유리한 해전 장소를 택하고, 일본군이 전투 태세를 갖추기 전에 기습 공격을 하는 등 전략 면에서 앞섰다는 것이 승리의 한 요인일 것이다. 또한 학익진과 같은 전술의 사용, 일본군 무기보다 성능이 뛰어난 조선의 화포, 모든 부하가 자신을 따르고 분발하여 싸울 수 있도록 독려한 이순신의 지휘력 또한 승리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215. 그러나 무엇보다 이순신이 늘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그가 언제나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는 데 있다. 이순신은 전쟁에 직면하여 사사로운 나를 버리고 오로지 공적인 나, 즉 나라를 지킬 임무를 지닌 조선군 장수로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 이순신은 부하들의 상처에도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었지만 도망치거나 군율을 어긴 군사는 가차 없이 처벌하여 군대 안의 기강을 세웠다. 또한 점검과 훈련을 통해 언제 있을지 모를 전투에 늘 철저히 대비했다.

 

218. 이순신의 여러 가지 감정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다. 장수로서 언제나 공적인 것, 즉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철저한 준비로 빈틈없이 행동하던 이순신도 일기에는 그리움이나 기쁨, 분노, 슬픔, 절망과 같은 감정을 솔직하게 적었다. 이순신의 일기에 가장 빈번히 표현되는 감정은 그리움이다. 이순신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생활하며 언제나 가족을 그리워했다.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에 대하여

보통의 난중일기는 시간순으로 되어 있는데 역자는 7가지 주제로 나누어 재구성하였다. 일견 신선하기는 하였지만 단점으로는 이때는 언제였지, 이순신의 직책은 무엇이였지 하는 궁금증 때문에 자연스러운 읽는 흐름을 방해하였다. 하지만 분명 장점도 있었다. 시간순으로 읽을 때 놓치기 쉬운 하나의 감정들이 주제별로 잘 드러났기 때문에 이순신의 생각과 감정들이 잘 와닿았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불필요한 설명이 될수도 있겠지만 일기마다 상황과 사건, 이순신의 상황에 대한 부분이 추가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보완이 필요한 점

주제별로 난중일기를 재구성한 것은 상당히 신선하였다. 하지만 이 주제별 난중일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옆에는 이순신 연보를 펼쳐 놓고 읽어야 할 것이다. 연도가 왔다 갔다 하니 이건 언제였지 이건 언제 해전이었지 이때 이순신의 직책은 어떤거지 이런 궁금증이 계속 유발되어 흐름이 끊기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주제마다 반복이 되더라도 해당연도의 이순신의 상황, 직책 이런 것을 매번 추가해서 어떤 상황인지를 알고 읽을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각 절마다 요약이 되어 있어 좋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이 축약이 되어있어 아쉬웠다. 좀더 많은 에피소드, 상황설명 등을 넣어주면 훨씬 좋은 책이 되었을 것 같다.

 

이 책의 장점

중복되는 얘기지만 역자 말대로 지금까지의 난중일기는 단순히 시간대 순으로 나열하는 식이다. 그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이 책과 같이 특정주제도 그냥 흘러갈수 있는데 이 책처럼 주제별로 묶으니 난중일기가 다시 보이게 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렇게 재구성해볼 생각은 안한 것 같다.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시간대순이 좋기는 하겠지만 시중에 너무나 많이 나와있기 때문에 지금의 저자처럼 주제별로 가되 시간이 헷갈리지 않게 중언부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시대적 배경, 상황, 이순신의 처지, 직급, 어떤 해전이 되는지 설명하겠다. 주제부분을 더 추가하겠다. 이순신은 술과 음악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술과 음악에 대한 일기를 정리하고 이순신의 에피소드를 더 추가하는 방식으로 할 것이다. 또다른 주제는 여자이다. 난중일기에 보면 여자가 꽤 많이 나온다. (), 여진, 덕이, 최귀지 그리고 이름 모를 기생들과의 야사도 포함하면 더 인간적인 이순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의 사람들도 하나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이순신의 사람들과 원수. 이순신의 사람들은 작은 이순신, 어영담, 진린, 류성룡, 이억기, 나대용 등이 될수 있을 것이고 원수편에는 원균, 선조, 이산해, 윤두수, 김응남 등이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주제는 정하기 나름이다고 생각한다. 단순 시간 나열에서 각 주제별로 이순신을 들여다본다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순신에서 아버지로서,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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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2 21:40:09 *.18.218.234

오늘의 비상을 위해 기상씨는 가을부터 그렇게 울적했었나보다. 저자연구 도입부(충무공의 후예) 활기차고 이후 전개는 정말 미쳤다는 말밖에 안나오네요. 기상씨가 본 난중일기 기대하기는 했지만서도 이 정도일 거라곤. 


와이키키인지 와키자카인지는 또 어케 알았어요?  검색어 조합을 어케 하길래. 저번에 '아무개가 본 연암'의 구성이 좋아서 나도 이번에 김훈이 본 이순신 뭐 이렇게 할까 생각했는데 안하길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ㅋ 우리 나중에 각자 '아무개가 본 김기상' 뭐 그런 식으로 다각도로 동기연구 해보는 건 어떨까요?


* 그리고 기상씨는 최상화, 공정성, 책임 테마가 top 5안에 들 거 같은데 테스트 후 알려줘요. 궁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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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5 19:37:06 *.44.153.208

와우~! 또 한권의 책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네요 ^^. 기상의 충무공에 대한 자긍심, 남 다른 애정, 그리고 또 존경하는 마음이 잘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충무공을 따라 갈 수 없었다는 그말에 공감하면서도 사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겠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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