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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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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6일 02시 55분 등록

『열하일기』

박지원 지음, 현암사

 

25주차 (9/18~9/24)

티올(윤정욱)

 

1. 작가 분석

 

가.   연암 박지원은 누구인가?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1737(영조 13)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랐으며, 1752 16세 때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맹자> <사기(史記)>를 배웠다. 22세 때부터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 실학을 공부하던 이들과 교우하여 영향을 받았으며, 30세 때는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교우하여 서양의 신학문 등을 배울 수 있었다.

 

1777(정조 1)에는 벽파(僻派)로 몰리면서 정치적 위협을 느낀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였다. 그의 호인 연암은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얻은 것이다. 그 곳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1780(정조 4) 친족 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요동(遼東)ㆍ요하(遼河)ㆍ북경(北京) 등지를 여행하면서 청나라의 문물과 생활 기술 전반을 자세히 살피고, 그의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생기 있는 필치로 기록하였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와 신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배워야 할 점을 논하였고 조선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으로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의 책은 매우 큰 논란이 되었다. 특히 당시 조정에서는 배청론이 주류였기 때문에 그의 책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다. 그러나 재야에서는 그의 생생하고 자세한 여행기록과 재치 있는 문체, 참신한 의견 등으로 인해서 즐겨 읽혀졌다고 한다.

 

1786년 정조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고 이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ㆍ제릉령(齊陵令),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에 사퇴했다가 1797년 다시 면천 군수(沔川 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지어 바쳤다. 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하였으나 다음 해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박지원은 당시 홍대용ㆍ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北學派)의 중심에 있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롭고 재치 있는 문체로 당시의 사회상을 포착,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썼다. 그는 문체반정 때 정조에게 문체를 타락시켰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 백과 참조]

 

 

나.   연암 박지원의 대표적 저서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다.   열하일기(熱河日記) ?

 

1780(정조 4) 연암 박지원은 종형인 금성위(錦城尉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나라 건륭제(고종)의 칠순연(七旬宴) 참석하는 사신의 일원으로 동행하게 되었다중국 연경(燕京)을 지나 나라 황제의 여름별장지인 열하(熱河)까지 기행한 기록을 담았는데 중국의 문인들과 사귀고,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중국의 문물제도를 목격하고 견문한 내용을 각 분야로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이것을 《열하일기》라고 한다.

 

   (연암 박지원의 여정도)

 

연암이 남긴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신문물(新文物)을 망라한 서술, 그 곳 실학사상의 소개로 수많은 조선시대 연경 기행문학의 정수(精髓)로 꼽힌다.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 ·지리 ·풍속 ·습상(習尙) ·고거(攷據) ·토목 ·건축 ·선박 ·의학 ·인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문학 ·예술 ·고동(古董) ·지리 ·천문 ·병사 등에 걸쳐 수록되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상세히 기술되었는데, 경치나 풍물 등을 단순히 묘사한 데 그치지 않고 이용후생(利用厚生) 면에 중점을 두어 수많은 《연행록(燕行錄)》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힌다.

 

 

라.   열하일기(熱河日記) 이름의 유래 (왜 하필 열하일기라고 지었을까?)

 

박지원을 포함한 일행은 열하를 방문한 최초의 조선 외교사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열하에서 보고 들은 진귀한 견문을 자신의 여행기에 집중적으로 서술했을 뿐 아니라, 그 제목까지도 특별히 '열하일기'라 지었던 것이다.

 

 

마.   연암 박지원, 그는 왜 머나먼 이국 땅 중국 그 가운데서도 열하로 갔을까?

 

1780 6 24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데 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 ·성경(盛京)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고, 다시 열하로 가서, 8 20일 다시 베이징에 돌아오기까지 약 2개월 동안 겪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었다. 조선의 사신일행이 열하까지 가게 된 이유는 연경에 도착해보니 나라 황제는 열하에 가고 연경에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까지 가게 된 것이다.

 

 

바.   열하일기의 특징 I (형식상)

 

청나라를 다녀온 여행기인 연행록(燕行錄)에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일기 형식을 취해 여행 체험을 날짜순으로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연행록들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비교적 드물지만, 인물·사건·명승고적 등 견문의 내용을 주제별로 나누어 기록하는 유형으로서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첫째 유형은 여행의 전 과정을 충실히 기록할 수 있는 반면, 중요한 사항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하기는 어려우며, 중복되는 내용이 많아 산만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 쉽다. 둘째 유형은 주제에 따른 집중적인 논의를 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여행의 전 과정을 제대로 전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è 『열하일기』가 기존의 다른 연행기와 비교해 돋보이는 것은 두 가지 유형의 연행록들이 지닌 장점을 종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행의 전 과정을 충실히 기록 (형식상 객관적 기술)하면서도 중요한 사항이나 자신이 느꼈던 감정 그리고 신문물에 대한 소개도 충실히 담아낸다 (내용상 주관적 기술). 어떻게 보면 정작 자신이 하고 싶었던 풍자나 해학을 담아내기 위해 객관적 기술이라는 형식을 빌렸는지도 모르겠다.

 

 

사.   열하일기의 특징 II (내용상)

 

# 실학사상의 기반 #

 

내용상으로 볼 때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현실에 대한 풍부한 견문과, 이에 기초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하일기』의 곳곳에서 박지원은 청나라가 눈부신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청나라가 한족(漢族)뿐만 아니라 몽골·티베트 등 주변의 강성한 민족들의 저항을 억누르려고 무척 고심하고 있음도 놓치지 않고 꿰뚫어본다.

 

# 상업을 중심으로 조선의 낙후된 현실 개혁 방안 제시 #

 

또한 박지원은 상업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발전상을 다각도로 증언하면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할 구체적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열하일기』에서 그는 도시마다 시장이 번창하고 있으며, 도로와 교량이 잘 정비되어 있어 수레와 선박을 이용한 교통이 원활한 점, 궁전을 비롯한 각종 건축들이 크고 화려하며 벽돌을 사용하여 견고한 점 등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청나라처럼 벽돌을 널리 활용하고 수레를 전국적으로 통용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청나라와 통상(通商)한다면, 국내의 산업을 촉진할 뿐 아니라 문명의 수준을 향상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 발상의 전환 #

 

이러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은 청나라의 선진문물 수용을 통한 부국책(富國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양반들은 경제보다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으로 인해 상공업이나 농업의 실무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또한 청나라는 오랑캐요,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라는 의식이 골수에 박혀 청나라의 선진문물조차 싸잡아 배격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반들의 고루한 사고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사물을 새롭게 인식할 것을 역설하고 있음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박지원은 주체적이고 개방적인 인식을 강조할 뿐 아니라, 개인의 제한된 관점을 고집하지 말고 더욱 높은 차원에서 사물을 보도록 촉구하기도 한다. 「일신수필(馹汛隨筆)」편 7 15일자 일기에서 그는 중국 여행 중에 본 장관(壯觀)을 논하면서, 남들처럼 명승고적이나 산천 풍물, 웅장한 건축과 번창하는 시장 따위를 꼽지 않았다. 그 대신 관점을 완전히 달리하여, 하찮은 '기왓조각'이나 '거름 똥'이야말로 중국의 첫째 가는 장관이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편다. 중국인들은 깨어진 기왓조각으로 집의 담과 뜰을 아름답게 꾸미고, 버려진 똥을 남김없이 수거하여 알뜰히 비축하니, 청나라의 문물이 발달하게 된 비결은 이처럼 하찮은 물건이라도 철저히 활용하는 그 실용정신에 있다고 본 것이다.

 

#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여행기 #

 

『열하일기』에는 유명한 「호질(虎叱)」과 「허생전(許生傳)」이 실려 있다. 이 두 작품은 오늘날 박지원의 대표적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지만, 실은 우언(寓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호질」에서는 '' '북곽(北郭)선생', 「허생전」에서는 '허생'과 대장(大將) '이완(李浣)'이라는 다분히 허구적인 존재들이 주고 받는 문답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을 뿐더러, ''이나 '허생'이 작자를 대신하여 펼치는 도도한 웅변에 작품의 흥미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러한 우언의 형식을 빌어, 가급적 물의를 피하면서도 당시 양반들의 위선과 무능을 통렬히 풍자하는 한편 자신의 실학사상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곳곳에 일종의 복선을 설정하여 가급적 사건의 서술을 짜임새 있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그 한 예로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편 8 5일자 일기에서 북경에 막 도착한 일행에게 열하로 급히 오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져 소동이 벌어진 대목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박지원은 자초지종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먼저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이 간밤에 열하로 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부터 그린다. 그러고 나서, 숙소에 난데없는 소란이 일어나 그 원인을 알지 못한 일행이 법석을 피우고 청나라 통역관들이 허둥대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묘사하여 독자들의 궁금증을 잔뜩 돋운 뒤에야 비로소 열하 여행이 갑작스레 결정된 경위를 밝힘으로써, 사건을 한층 더 흥미 있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 탁월한 인물 묘사 #

 

소설식의 사실적인 표현은 여행 도중에 마주친 청나라 각계각층의 인물들과 조선 사행의 구성원들을 묘사한 대목들에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각종 상인, 직업적인 연희인(演戱人), 시골 훈장, 점쟁이, 도사, 승려, 창기, 하녀, 거지 그리고 조선 사행 중의 병졸이나 말몰이꾼, 박지원 자신의 하인 등등, 다른 연행록에서는 거의 무시되기 일쑤인 하층 민중들을 자못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 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박지원 자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비대한 몸집이나, 농담 좋아하고 겁 많은 성격조차 솔직하게 그려 보인다. 그리하여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물을 탐구하고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진지하고 사려 깊은 선비일 뿐만 아니라, 소탈하고 인정이 많으며 인간적 약점도 지닌 인물로 매우 개성 있게 부각되어 있다.

 

# 해학과 풍자의 재미 #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씌어졌을 뿐더러 해학과 풍자가 넘치기에 더욱 재미가 있다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목격한 우스운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할 뿐 아니라, 수시로 일행들을 웃기는 자신의 익살스러운 언동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그려낸다. 그러나 『열하일기』에서 해학은 그러한 가볍고 유희적인 웃음으로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해학과 풍자를 즐겨 구사한다. 진지한 사상적 논의를 펼 때마다 돌연 우스운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그러한 대목에 여유와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도강록」편 6 28일자 일기에서 박지원이 동행인 정진사(鄭進士)를 상대로, 성을 쌓는 데에는 벽돌이 돌보다 낫다고 조목조목 논하는 장광설을 펴자, 그 사이 졸고 있던 정진사가 깨어나, "내 이미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면서"라고 대꾸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열하일기 [熱河日記] -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라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휴머니스트) 참조

 

 

II.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저자 서문>

 

(15) 열하일기는 여러 종의 이본이 전하는데, 대부분 중간 중간에 작은 서문만 몇 편 실렸을 뿐이지, 전체 서문은 없다. 20세기에 처음 간행된 활자본에도 전체의 서문이 없이 『도강록』부터 시작 되는데, 연민 이가원 선생이 발견한 연암산방본에만 이 서문이 실려 있다.

 

[명나라 장수 강세작이 조선에 귀화한 이야기]

 

(31) 6 26일 계유,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야 개었다. 구련성을 떠나 30리를 가서, 금석산 아래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다시 30리를 지나 총수의 길가에서 잠을 잤다.

 

[청나라 첫 고을 책문의 모습]

 

(34) 6 27,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 걷혔다.

 

(35) (박지원의 마부 일행이 청나라 갑군들에게 장난을 치는 것을 보고)

너희가 중국에 들어갈 때마다 여러 가지로 말썽을 일으킨다더니, 이제 내 눈으로 보기에도 정말 그렇구나. 아까 한 일은 부질없는 짓이니, 앞으로는 괜한 장난으로 말썽이나 일으키지 마라.”

 

(37) ‘상공(相公)’이란 장사꾼끼리 서로 높여 부르는 말이다. 사신들이 갈 때는 으레 정관(正官)에게 팔포를 내렸다. 정관은 비장과 역관까지 모두 30명이다. 예전엔 나라에서 정관에게 출장비를 주지 않고 인삼을 몇 근씩 주어 중국에서 팔아 쓰게 했는데, 이 짐 보따리를 팔포라고 한다.

 

(39) (책문 밖에서 책문 안을 들여다 보며)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차들이 길에 즐비하며, 벌여 놓은 그릇은 모두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였다. 어디를 보아도 시골티라고는 조금도 없다. (중략) 중국의 동쪽 변두리인 책문도 이러한데 북경으로 갈수록 더욱 발전될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였다.

 

(40) 때마침 한 소경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걸고 손으로 월금을 연주하며 지나갔다. 나는 크게 깨달아 저 사람이야말로 평등의 눈을 가진 이가 아니겠느냐?’ 하고 생각하였다.

 

è 지금까지 논어, 삼국유사 이러한 고전들만 보다 보니, 『열하일기』가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번역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체가 옛 고문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원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행문이라는 소재도 독특하지만, 행선지 곳곳에서의 연암 자신의 감정들이나 생각들을 드러내는 것들이 아주 인상적이다.

 

(40) “저 수염 좋고 쌍학 무늬 놓은 관복을 입은 이가 얼대인(乙大人)이지하였고,

서장관을 보고는 산대인(山大人)인데, 모두 한림 출신이지.”

 

è 중국어 2()의 발음에 해당하는 을 우리 한자음 ()’로 가져온 것이 인상적이다. 중국어로 얼따런은 두 번째 연장자라는 뜻이다. 발음이 들리는 대로 음차(音借)한 것을 한글로 얼따런이 아닌 다시 한자로 을대인(乙大人, 얼대인)으로 쓴 것이 새롭다. 중국어 3()의 발음에 해당하는 은 우리 한자음 ()을 가져와 세 번째 연장자로 쓴 것이 인상적이다.

 

[벽돌과 기와]

 

(42-43) 청나라 사람들은 대개 집을 지을 때에 벽돌만 쓴다. (중략) 또 동백기름을 타서 우유처럼 번드럽고 미끄럽게 하여 떨어지거나 터지는 탈을 막는다. 기와를 이는 법은 본받을 만한 점이 많다. (중략) 우리나라에서 기와를 이는 법은 이와 아주 다르다.

 

è 이용후생(利用厚生).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쓴 가장 큰 목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왕조를 세운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열하일기』 서문에도 날짜를 표기함에 있어,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후삼경자(後三庚子)라고 하여 명나라 마지막 황제 송정의 연호를 사용하여, 송정이 죽은 지 세 번째 경자년 (1780)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청나라 황제에게 매년 공물을 보내는 길에도 만나는 사람들을 된 놈들 이라며 무시했다. 다시 말해 명나라는 중국의 전통을 잇는 황제의 나라고 본받을 나라지만, 청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 황실의 전통을 잇는 명나라는 망해야만 했고, 청나라는 명나라를 대신해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 우리 조선의 지식인들은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기울어져 이미 사라져 버린 왕조()의 옛 추억만 붙들고 살 것이 아니라, 왜 명나라는 망했고 청나라는 강성해 질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뒤바뀐 천하의 맹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청나라 처럼 강성해 질 수 있는지 그런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어쩌면 이러한 고민을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유효한 것이고,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반역이나 패륜에 가까운 사상으로 취급 받았을 수도 있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역사는 항상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항상 경계에 있던 사람들이다. 바로 연암 박지원 같은 사람들이다. 그의 문체는 이전의 당대 조선 시대 지식인들이 닳고 닳도록 보던 중국의 예전 고문들과는 다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용후생적 사고는 당시 조선이 겉으로는 매년 공물을 바치는 굴욕적인 상황 속에서도 속으로는 청나라를 무시하는 표리부동한 조선에 충격을 던졌을 것이다. 아무리 청나라를 속으로 욕해도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청나라는 이미 변했다. 우리 조선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눈 가린 채 이론에만 빠져 있을 때, 천하의 새로운 주인은 이론은 물론 실전에도 강한 진짜 강한 존재가 되었다. 동쪽 국경 끝 책문에서 보이는 풍경부터 그의 두 눈을 압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청나라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도 허투루 짓지 않는다.

 

『열하일기』가 연암의 조선의 왕에게 바치는 해외 출장 보고서라고 하자. 연암은 사실 청나라 사람들이 그것도 일반 평민들이 집을 어떻게 짓고 있는지를 출장 보고서에 쓸 필요는 없다. 우리의 왕이나 국내의 위정자들은 그것을 궁금해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연암은 구태여 집을 어떻게 짓는지, 흙은 어떤 흙을 쓰고 어떻게 섞어 이겨야 하는지 아주 상세하게 서술한다. 심지어 “(청나라의) 기와를 이는 법은 본받을 만한 점이 많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기에 이른다. 분명 그는 보았고 느꼈을 것이다. 조선은 배워야 한다는 것을. 더 나은 점은 보고 배우고, 조선에 전달해서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고, 이를 통해 생활을 더욱 두텁게 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용후생(利用厚生)’ 정신이다. 또한 열하일기를 쓰는 가장 큰 목적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용후생 정신이야말로 조선을 강하게 하는 비결임을 연암은 믿었을 것이다.

 

[안시성과 요동 땅의 평양성]

 

(46)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역사책에서 한 번 골라 베끼면서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용하였고, 유공권의 소설을 끌어와서 당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까지도 입증하였다. (중략)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믿을 만하건 아니건 간에 다 빠뜨리고 말았다.

 

(47) 그들은 아직도 요동이 본시 조선 땅이며, 숙신, , 맥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조선에 예속 되었던 것을 알지 못한다. 또 오라, 영고탑, 후춘 등의 땅이 본래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중략)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전쟁도 없이 저절로 줄어들었다.

 

(48) 옛 조선과 고구려의 경계를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으로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패수의 위치가 분명해진 뒤라야 우리나라의 강토가 밝혀지고, 강토가 밝혀진 뒤라야 고금의 사실이 맞아 들어간다. (중략)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è 연암의 『열하일기』가 중요한 이유 두 번째, 바로 자주정신의 확립이다. 우리의 역사를 중국에 속한 일부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자주성을 가진 역사의 주체로서 인식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에 다소 수동적인 자세로 중국의 고전 역사서를 대체적으로 인용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역사인식에는 인색했던 김부식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주체적 역사의식은 자국의 영토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평양을 한반도 내에 있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수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본 것도 인상적이다.

 

[중국의 구들과 조선의 온돌]

 

(51) 7 5, 맑게 개다. 물에 막혀서 또 숙소에 묵다.

 

(52)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이 가난해도 글 읽기를 좋아해 겨울이 되면 수백 명의 형제 코끝에는 항상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니, 이 방법을 배워 가서 삼동의 고생을 덜었으면 좋겠다.

 

è 중국의 구들이 조선의 온돌에 비해 장점이 많은 것을 보고 말한 연암의 반어적 표현이다.

 

[꿈 속에 고향집을 찾아]

 

(55) 7 6, 개다. 시냇물이 약간 줄었으므로 길을 떠났다.

 

(55) 이미 건너왔다 다시 건너가려는 이도 어깨에 무엇을 지고 물에 들어가므로 이상하여 물으니 빈손으로 물에 들면 몸이 가벼워 떠내려가기 쉬우므로, 반드시 무거운 것으로 어깨를 눌러야 한다하였다.

 

è 매번 길을 나설 때 마다 하나씩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것을 부끄럽다 여기지 않고 꼼꼼히 기록으로 남기는 연암의 노력이 정성 가득하다. 물가를 건너는 것이 어려웠던 탓일까, 연암은 이 날 가위에 눌려 고향집 형님을 찾아가는 꿈을 꾼다.

 

[말꼬리를 붙들고 강물을 건너]

 

(58) 7 7, 개다. 2리를 가다가 말을 타고 그냥 물을 건넜다. (중략) 밤에는 낭자산에서 묵었다. 이 날 큰 고개를 둘이나 넘었다. 80리를 걸었다. 마운령은 회령령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 함경도의 마천령 못지않게 높고 가팔랐다.

 

[한바탕 울어 볼 만한 요동 벌판]

 

(60) 내 오늘에야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에게도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이후 소제목 생략)

 

(63) 20리 떨어진 곳에 성을 옮겨서 신요양이라 하였으므로, 이 성은 폐하여 구요동이라고 부른다. 성의 둘레는 20리인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66) 아아! 슬프다. 명나라가 망할 때가 되어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이 거꾸로 되었고, 공과 죄가 밝지 못했다. 웅정필과 원숭환의 죽음을 보면 조정 스스로 만리장성을 허물었다고 하겠으니, 어찌 후세의 놀림을 받지 않겠는가.

 

è 조정에 대한 본인의 아쉬운 마음도 이 글에 기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요동백탑]

 

(71) 탑 아래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만주 사람인데 약을 사러 영고탑에 가는 길이었다. 땅에 글자를 써서 문답하자, 한 사람이 『서경』이 있는지 물었다. 또 한 사람은 안회가 지은 책과 자하가 지은 악경이 있는지 물었다. 모두 내가 처음 듣는 책이었으므로 없다고 대답하였다. 두 사람은 아직 청년인데, 처음으로 이곳을 지나며 탑을 구경하러 온 것 이다.

 

[성경잡지]

 

[일신수필]

 

(83) 남이 말한 것을 들은 것만으로 말하는 자들과는 서로 학문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큰 볼거리]

 

(86) 715, 개다. 내원과 태의 변관해, 주부 조달동 등과 더불어 새벽에 소흑산을 떠라 중안포까지 30리를 와서 점심을 먹었다.

 

[구외이문]

 

(185) 1765년에 황후가 그 진주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회회족 출신의 후궁이 이 사실을 왕에게 고자질했다. 수사한 끝에 궁중을 호위하던 군사의 집에서 진주가 나왔으므로, 황후가 진주를 그 군사에게 정표로 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폐출되어 냉궁에 갇혔다.

 

è 황후를 시기한 회회족 출신의 후궁이 황후의 진주를 훔쳐 궁중 호위 군사에게 전해 준 것은 닐까.

 

(189) 요나라 때 만리장성 바깥 백운탑의 감실 속에 입정한 스님이 있다. 그의 육신은 아직까지도 허물어지지 않았고,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으며 부드러운 윤기가 흐른다. 다만 눈을 감은 채로 숨을 쉬지 않을 뿐이다.

 

[고린내와 뚱이]

 

(190) 역졸이나 마부들이 배운 중국말 가운데는 잘못된 것이 많다. 그들 자신도 모른 채 그대로 쓰고 있다. 냄새가 몹시 나쁜 것을 고린내라고 한다. 고려 사람들이 목욕을 하지 않으므로 밭에서 나는 땀내가 몹시 나쁘기 때문이다.

 

è 처음 안 사실. 고린내가 고려라는 말에서 나왔다니.

 

[젊다고 늙은이를 업신여기다니]

 

(191) 사람이 젊을 때에는 앞길이 매우 멀어서, 마치 자기에게는 늙을 날이 없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늙은이를 업신여기는 실수를 쉽게 저지른다. 이것은 버릇 없는 불량배의 경박한 짓일 뿐만 아니라, 앞 날에 복도 받지 못할 짓이니 조심해야 한다.

 

(192) 이렇듯 늙은이라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린아이라고 업신여기지 않았다. 중국의 예의가 빛난다는 말은 예전에도 들었지만, 변방의 풍속까지도 이처럼 순박하니 더욱 볼만한 일이다. (중략) 그래서 여기에 함께 기록하여 젊은이들이 늙은이들을 업신여기는 현상을 경계하고자 한다.

 

è 불치하문(不恥下問)

 

[옥갑야화]

 

(198) 친구는 얼떨떨했지만, 벌써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00냥을 받았다. 돌아와 보니 역관의 집은 벌써 전염병으로 몰사했다. 그는 크게 놀라는 한편 두렵기도 하여, 100냥으로 단골 주인을 위해 재를 올렸다. 그러고는 죽을 때까지 연행(燕行)을 그만두었다.

 

[허생]

 

(204) 허생이 나가자, 모두 크게 놀라며 변씨에게 물었다. (중략)

그러시다면 하루아침에 평소 알지도 못하던 자에게 만 냥을 헛되이 던져 주시면서 그 이름자도 묻지 않으셨으니, 왜 그러셨습니까?”

그건 너희가 알 바 아니야. 대개 남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 자는 자기 계획을 과장하여 먼저 신의를 나타내는 법이야. 그러면서도 얼굴빛은 부끄럽고도 비겁하며, 말은 중복되곤 하지. 그런데 이 손님은 비록 옷과 신이 다 떨어졌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매가 오만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는 물질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야.”

 

(205) 허생이 서글프게 탄식하며 말했다.

겨우 만 냥을 가지고 온 나라의 경제를 기울였으니, 이 나라 경제의 깊이를 알 수 있구나

 

(206) 사공이 물으니 허생이 대답했다.

덕 있는 자에게는 사람이 저절로 찾아드는 법이야. 오히려 내가 덕이 없는 게 걱정이지, 사람 없는 걸 어찌 걱정하겠소?”

 

(208) 글을 아는 자가 있었는데 배에다 태우고 함께 나오면서 말했다.

이 섬나라에 화근을 뽑아 버려야지.”

 

(211) “나를 쓸 줄 아는 자는 복이 있는 자이니, 반드시 더욱더 부자가 될 거야. 이는 하늘이 명하신 것이니, 어찌 안 줄 수 있겠나? 이미 만 냥을 얻은 뒤에는 그의 복에 의지해서 행하기 때문에, 움직였다 하면 바로 성공하는 법이지. 내가 만약 사사롭게 일을 시작했다면 성패 또한 알 수 없겠지.”

 

(214) 그러니 그들에게 우리 자제들을 귀국에 보내어 학문도 배우고 벼슬도 하여, 옛날 당나라, 원나라 시절처럼 해주고, 장사치들이 드나드는 것도 막지 말아 주시오하고 청하시오.

 

(214) “소위 사대부란 게 도대체 어떤 놈들이오? (중략) 그런데 지금 당신들은 명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면서, 그까짓 상투 하나를 아낀단 말인가?”

 

 

III.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을 분석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기행문이다. 내가 『열하일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저자가 연암 박지원 이라는 것과 그가 중국 어디쯤을 다녀오면서 있었던 일들을 글로 옮겨 적은 것이라는 것이 전부다. 처음 책을 펼쳐 들고 목차를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본문을 읽기 전에 먼저 목차를 훑어보는 것은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목차를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신기한 것은 어떤 책은 목차를 보아도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것들 것 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그랬다. 목차에 실린 내용이 빈약해 본문을 유추할 수 없는 경우다. 반대로 어떤 책들은 목차를 훑어보는 것에만 삼십 분은 족히 걸린다. 목차가 길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독자로 하여금 수 많은 질문을 던지게끔 유도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목차란 바로 독자로 하여금 본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하는 목차가 좋은 목차다.

 

『열하일기』의 본문의 구성은 이렇다. <도강록>, <성경잡지>, <일신수필>, <관내정사>, <혹정필담>, <환희기>, <산장잡기>, <구외이문>, <옥갑야화>, <황도기략>, <알성퇴술>, <앙엽기>. <도강록>을 제외하고는 딱히 본문에 대한 짐작이 가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강(아마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는 배경지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연상 된다.

 

# 연암 박지원, 그는 왜 머나먼 이국 땅 중국 그 가운데서도 열하로 갔을까? #

출장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여행이었을까?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저자분석에서 따로 기술)

 

# 본문 12페이지에는 그의 여정도가 나온다. 지금의 편리한 교통 수단을 이용하더라도 광활한 중국 대륙임을 감안한다면 쉽지 않은 거리다. 그 머나 먼 거리를 그는 어떻게 갔을까? 혼자 갔을까? 아니라면 누구와 함께 갔을까? #

 

# 열하를 다녀 온 후 그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차이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

# 그가 열하를 다녀 온 것이 당대 사람들에게 혹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것일까?

 

# 왜 열하일기는 온전한 원본이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 내가 생각하는 열하일기의 의의?

 

질문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우선 본문을 훑어서 봐야겠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독자의 눈으로)

 

가.   전체 원문 열하일기 가운데 이번에 발췌 및 수록된 분량은 어느 정도인지?

(본문에 수록되지 않은 열하일기 원문은 어느 정도 되는지?)

 

 

3) 이 책의 장점 (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등

 

가.   매 편의 여정에 대한 지도 첨부 (여정을 지도 상에서 한 눈에 보듯)

 

각 장 마다 박지원이 직접 걸었던 길을 지도 상에 표시를 해준다. 이 내용 만으로도 그가 걸었던 길을 머리 속으로 떠올려 볼 수 있다. 오늘 날의 교통 수단을 타고서도 쉽게 다녀오기 힘든 길이다. 그 옛날에는 이 길을 어떻게 갔을까. 본문 내용에 보면 예전에는 출장비를 은이나 홍삼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것을 현지에서 팔아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는데 보탰다고 하는데, 그러한 물건을 흥정하고 계산 할 때의 모습도 왠지 떠오르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저자의 눈으로)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가.   권 말에 각 장별 요약 첨부

 

권 말에 각 장의 주요 내용에 대해 약술한 내용이 있다면 전체 내용을 개략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래 예시)

 

1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도강록(渡江錄)>:서문은 필자 미상이나, 풍습 및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 ·건물 ·경목(耕牧) ·도야(陶冶)  이용후생에 관계되는 일체의 방법을 거짓없이 기술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도강록> 압록강에서 랴오양[遼陽]까지 15일간(1780.6.247.9)의 기행문으로 중국인이 이용후생적인 건설에 심취하고 있음을 서술.

 

2 <성경잡지(盛京雜識)>: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까지 5일간의 기록

 

3 <일신수필(馹汛隨筆)>: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하이관까지 9일간의 기록으로, 그 서문 중의 이용후생학에 대한 논술이 독특함

 

4 <관내정사(關內程史)>:산하이관에서 연경까지 11일간의 기록으로, 여기 수록된 한문 고대소설 <호질(虎叱)>은 연암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작품의 하나이다.

 

5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연경에서 열하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열하에 대하여 소상히 기록하였고, 그곳을 떠날 때의 아쉬운 심경을 그렸다.

 

6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열하에 있는 태학(太學)에서 6일간 지낸 기록으로 당시 중국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나눈 한 ·중 두 나라 문물제도에 관한 논평 및 지동설(地動說) ·달세계 등에 관한 토론이다.

 

7 <구외이문(口外異聞)>:구베이커우[古北口] 밖의 기문이담(奇聞異談)을 적은 것으로, 반양(盤羊)에서 천불사(千佛寺)에 이르는 60여 종의 이야기이다.

 

8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간의 기록으로, 대개 교량 ·도로 ·방호(防湖) ·방하(防河) ·탁타(橐駝:庭園師) ·선제(船制) 등에 관한 논평이다.

 

9 <금료소초(金蓼小鈔)>: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으로 《연암집(燕巖集)》에서는 이를 <보유(補遺)>라 한다.

 

10 <옥갑야화(玉匣夜話)>:이본(異本)에 따라서는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된 것도 있다. 여기 수록된 <허생전(許生傳)>은 연암 소설뿐만 아니라 한국 소설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11 <황도기략(黃圖紀略)>:황성(皇城)의 구문(九門)에서 화조포(花鳥鋪)까지 38종의 문관(門館) ·전각(殿閣) ·도지(島池) ·점포(店鋪) ·기물(器物) 등에 관한 기록이다.

 

12 <알성퇴술(謁聖退述)>: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한 기록이다.

 

13 <앙엽기(盎葉記)>: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20개의 명소(名所)를 두루 구경한 기록이다.

 

14 <경개록(傾蓋錄)>:열하의 태학(太學)에서 6일간 머물며, 그곳 학자들과 응수한 기록이다.

 

15 <황교문답(黃敎問答)>:황교와 서학(西學者)의 지옥(地獄)에 관한 논평이다. 끝에는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는 가운데 특히 몽골과 아라사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16 <행재잡록(行在雜錄)>:나라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의 자세한 견문록이다. 여기서 특히 나라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연유를 밝혔다.

 

17 <반선시말(班禪始末)>: 황제의 반선(班禪)에 대한 정책을 논하고, 또 황교(黃敎) 불교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18 <희본명목(戱本名目)>.

 

19 <찰습륜포(札什倫布)>:찰습륜포란 티베트어()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열하에 있을 때의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20 <망양록(忘羊錄)>:음악에 관하여 중국 학자들과 서로의 견해를 피력한 기록이다.

 

21 <심세편(審勢編)>:당시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한 기록이다.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을 펼쳤다.

 

22 <곡정필담(鵠汀筆譚)>:중국 학자 윤가전(尹嘉銓)과 더불어 전날 태학(太學)에서 미진하였던 토론을 계속한 기록이다. ,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흡하였던 이야기인 월세계 ·지전(地轉) ·역법(曆法) ·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술이다.

 

23 <동란섭필(銅蘭涉筆)>:동란재(銅蘭齋)에 머물 때 쓴 수필이다. 주로 가사 ·향시(鄕試) ·서적 ·언해(諺解) ·양금(洋琴) 등에 대하여 쓴 것이다.

 

24 <산장잡기(山莊雜記)>:열하산장에서의 여러 가지 견문기이다.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상기(象記)> 등은 가장 비장하고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25 <환희기(幻戱記)>: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아래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한 소감을 적은 이야기이다.

 

26 <피서록(避暑錄)>: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지낸 기록이다. 주로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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