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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6일 00시 10분 등록

열하일기

 

박지원지음/ 허경진옮김 / 현암사

 

새로운 세상을 꿈꾼 조선시대의 경계인

 

박지원은 조선시대의 경계인이었다. 당시 주도권을 쥐고 있던 노론 세력의 일원이면서도 벼슬자리에 오르지 않고 평생을 변방만을 떠돌며, 새로운 신세계를 꿈꾼 변혁가이자 이상주의자였다. 당시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후 사회가 피폐하고 조선사회의 시스템적 한계를 드러내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당대 지식인들은 아직도 명을 숭상하면서 북벌론을 심심치 않게 주장하면서 청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당시 청은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최 절정의 번성 시대였고 서양 문물과 교류가 자유롭게 진행되던 당대 세계 최강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런 세계적 흐름을 보지 못하고 명이 멸망한 마당에 조선이 소화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면서 더욱 성리학의 교리화에 집착하던 시점이었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 박지원은 당시 조선의 상황에 주목하고 실용적인 학문으로 조선 사회를 다시 개혁해야 한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실학사상을 함께 추장했던 박제가나 홍대용 같은 인물들과 어울리면서 그들만의 사상을 조금 더 공고히 해 나아갔다.

얼마 전 자살로 생을 마감한 마광수교수가 갑자기 생각난다. 우리 사회는 아직 마광수교수와 같은 인물을 품을 수 있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10년만 지나간다면 마광수교수와 같은 책이 아주 고전처럼 평가받을 수 있는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박지원도 그 시대의 마광수교수였다.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는 당시 정조임금이 보고 나라의 문체를 어지럽힌다고 했을 만큼 내용과 형식면에서 파격적이었다. 그리고는 정조임금에 의해서 거의 반성문이자 경위서를 쓰는 경고이자 벌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열하일기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 저서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박지원은 그 만큼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에 적응할 수 없었고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새삼 박지원을 보면서 천재란 무엇인가? 시대를 앞서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되 새겨본다. 박지원이 만약 조금만 생각을 바꿔서 과거에 응시를 하고 권력이 있는 자리로 가서 본인의 생각을 사회 전반에 널리 펼쳤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런 자리에 가고자 했다면 박지원이 가지고 있던 재능이 변색되고 탈색이 되었을까? 모를 일이지만, 시대를 앞서간 천재들을 보면 본인도 불행하고 당시 사회적으로도 큰 도움은 안되는 경우들을 많이 본다. 물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 가치와 진가가 비로소 나타나 사회적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역시 시간적인 텀이 생긴다. 그렇다면 천재란 한 개인의 삶을 보자면 어떻게 우리가 받아드려야 할까? 박지원을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박지원의 일생

박지원은 1737(영조 13)에 한양의 서부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박필균이고, 아버지는 박사유였다. 박지원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박필균에게 글을 배웠다. 박지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박지원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과거에도 급제하고 관찰사를 지내는 등 고위 관직에 있었으나 청렴했다. 박지원은 가난했다. 가족은 십여 명이나 되었는데 마땅한 수입이 없었다. 관직에 있던 할아버지마저 물러나자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 박사유는 벼슬이 없었고, 어머니는 살림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형수가 고생하면서 열 식구를 먹여 살렸다. 이씨는 제사를 받들고 손님들을 접대할 때마다 이웃에 돈을 변통했다. 그 일이 2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씨는 애가 타고 뼛골이 빠졌다. 옆에서 지켜보는 박지원의 가슴은 미어졌다. 대가족인 그들은 때때로 식량마저 바닥 나서 마음이 위축되고 기가 꺾여 하루도 편하게 보내는 날이 없었다. 늦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날이 추워지면 겨울을 날 걱정에 병이 더욱 깊어졌다.


박지원이 33세가 되었을 때 박제가와 이서구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으나, 이미 선비들 사이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박제가는 훗날 『북학의』를 집필하고, 이서구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청직을 전전하고 형조판서를 지내는 등 문신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박지원은 34세가 되었을 때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다. 박지원의 문명이 높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과에 급제하게 하여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회시에 응하지 않았고, 회시에 응하더라도 노송이나 괴석을 그려 제출했다. 특히 그가 활약할 무렵은 홍국영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홍국영이 노론을 심하게 미워했기 때문에 박지원은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박지원은 정치 판도가 바뀌면서 정치가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홍국영이 죽었으나 정조는 남인들을 발탁하고 있었고, 노론은 남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50세가 되어서야 유언호의 천거로 선공감역에 임명되었다. 노론 벽파인 심환지와 정일환 등이 찾아와 벽파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후 박지원은 사헌부감찰, 한성부판관, 안의현감을 지냈다.


박지원은 1797년 면천군수,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과 목민관을 지낸 경험에 기초하여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說)』 등을 남겼다. 그가 남긴 많은 저서 중에서 『열하일기』는 북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북학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발전한 문명을 받아들이고 청나라를 통해 서구문명을 인식하여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또한 신분제 혁파 등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 국가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은 서학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천문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방경각외전(閣外傳)』을 지어 당시 세태를 풍자하고 실학적인 입장을 반영했다. 박지원은 1805(순조 5)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조선 사신단 일행의 구성

정사 / 부사 / 서정관의 삼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역, 마두, 군관, 하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도강록

P25 – 당서를 살펴보면 고려의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 머리같이 푸르기 때문에 압록강이라고 불렀다. 하였으니, 백산은 바로 장백산을 말한다.

 

압록강은 연원을 여기에서 알게 되었다. 오리머리가 근데 푸르렀나? 다시 한번 눈여겨 봐야 할 것 같다.

 

P26 – 그래서 일행 중(경험 많은) 역관들이 다투어 옛일을 끌어 대어 날짜 늦추기를 굳이 청하고, 의주 부윤 역시 비장을 보내어 며칠만 더 묵으라고 붙들었지만, 정사는 기어이 오늘 강을 건너겠다고 하여 장계에 벌써 날짜를 써 넣었다.

사신단 일행이 급하긴 급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리 하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지 모르겠다.

 

P29 – 황금, 진주, 인삼, 초피와 팔포를 넘는 은자가 중요 물품이었다. 하찮은 물품들은 새것이나 옛것을 통틀어 수십 가지나 되었으므로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짐 보따리를 뒤지지 않으면 나쁜 짓을 막을 수 없고, 뒤지면 이같이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것도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의주의 장사꾼들은 짐 보따리를 뒤지기 전에 남몰래 강을 건너가니, 누가 그를 막을 수 있으랴. 금지된 물품이 발견되면 세 가지 형벌을 내린다. 첫째 문에서 걸린 자는 큰 곤장으로 때리고 물건을 몰수했다. 둘째 문에서 걸리면 귀양 보내고, 셋째 문에서 걸리면 목을 베어 달아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만들어진 법은 엄하기 짝이 없다.

밀수, 무역에 대한 처벌은 언제나 엄하기 짝이 없으나, 가장 지켜지지 않는 법 중에서 하나인 것같다. 위험에 비해 이익이 아마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P33 – 먹을 것이 없어서 양가죽 옷을 불에 구워 나뭇잎에 싸 먹으며 두어 달 동안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렇게 하여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회령까지 굴러 들어가 조선 여자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을 둘 낳고 팔십이 넘어서 죽었다. 그 자손이 퍼져서 100여명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한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단한 생존력이다. 어떤 목표가 있었던 것일까? 무엇이 이렇게 삶을 연명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일까? 궁금하다.

 

P37 – 사신들이 갈 때는 으레 정관에게 팔포를 내렸다. 정관은 비장과 역관까지 모두 30명이다. 예전엔 나라에서 정관에게 출장비를 주지 않고 인삼을 몇 근씩 주어 중국에서 팔아 쓰게 했는데, 이 짐 보따리를 팔포라고 한다. 지금은 나라에서 주지 않고 각자 은을 가지고 가게 하는데, 다만 짐 보따리의 액수를 제한하여 당상관은 3,000, 당하관은 2,000냥을 허락하였다. 이 은을 가지고 북경에 가서 여러 물건을 바꿔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너무나 불합리한 제도가 아닐까? 이러니 비리가 생기고 밀수가 생기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P39 – 중국의 동쪽 변두리인 책문도 이러한데 북경으로 갈수록 더욱 발전될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였다. 여기서 그만 발길을 둘릴까 하는 순간 온몸이 화끈거렸고 나는 깊이 반성하였다. 이는 하나의 시기하는 마음이다. 내 본래 성미가 맑아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이제 한 번 다른 나라에 발을 들여놓자 마자 아직 만 분의 일도 못 보고 벌써 이런 나쁜 마음이 생기니 어찌 된 까닭일까. 아마도 보고 들은 것이 좁은 탓일 게다. 만일 밝은 눈으로 세계를 두루 살핀다면, 어느 것 하나 평등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평등하다면, 시기와 부러움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런 자세가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 같다. 박지원은 책문말을 보고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지원이 동 시대의 지식인들과는 달리 청나라에 대한 열린 마음 그리고 편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P40 – 이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은 오로지 상판사의 마두에게 달린 것이다. 만일 그가 일처리에 서툰 풋내기라든지. 중국말이 시원찮다든지 하면, 그자들과 시비를 따지지 못하고 달라는 대로 줄수밖에 없다. 올해에 이렇게 하면 내년엔 어느새 전례가 되기 때문에, 끝까지 아귀 다툼을 해야 한다. 사신들은 이 내막을 모르고 다만 책문에 들어가기에만 급급하여 반드시 역관을 재촉하고 역관은 또 마두를 재촉한다. 그러니 그 폐단이 오랫동안 계속된다.

이런 것을 볼 때면 정말 답답하다.

 

P45 – ‘황새라 하고 뱀을 배암이라 한다. 그러니 수나라나 당나라 때에 이 나라의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을 백암성으로 고쳤다.”는 전설이 자못 그러한 것 같기도 하다.

 

P46 – 그러나 [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는 이런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도 그들이 중국의 부끄러움을 감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믿을 만한건 아니건 간에 다 빠뜨리고 말았다.

 

P47 – 그들은 아직도 요동이 본시 조선땅이며, 숙신, , 맥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한다. 또 오라, 영고탑, 후춘 등의 땅이 본래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을 모두 압록강 이쪽에 몰아넣어서, 사실을 억지로 이끌어다 제멋대로 분배하였다.

지금도 이 땅이 우리땅이었던 누구 땅이었던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은 우리나라 및 민족의 과거를 정확하게 아는 의미일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키가 될 것이다.

 

P49 – ‘기씨가 애초에 영평, 광녕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나라 장군 진개에게 쫓겨 2,000리 땅을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겨 갔다. 마치 중국의 진나라와 송나라가 남쪽으로 옮겨 가던 사정과 비슷했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P52 – 그러므로 우리나라 온돌은 항상 불을 내뿜고 방이 골고루 데워지지 않으니, 그 잘못이 모두 굴뚝에 있다.

 

P54 – 한바탕 승강이에 잠을 못 자고, 이어 벼룩 때문에 시달렸다. 정사 역시 잠을 잊고 촛불을 켠 채 날을 지새웠다.

정사와 사대부마저 그 시대엔 벼룩에 시달릴 정도였다고 하니 새삼 눈 앞에서 두 사람이 벼룩을 잡고 있는 모습이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느껴진다.

 

P59 – 밤에는 낭자산에서 묵었다. 이날 큰 고개를 둘이나 넘었다. 80리를 걸었다. 마운령은 회령령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 함경도의 마천령 못지않게 높고 가팔랐다.

강행군이었음이 느껴진다.

 

P60 –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온 지극하고도 참된 소리는 참고 눌러서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감히 나타내지 못한다오.

이제 이 울음 터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당신과 함께 한번 슬피 울어야겠소. 우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느 것에 해당할까요.”

왜 이 요동땅이 울어 볼만한 땅이라고 칭하게 된 것일까?

 

P65 – 이사 장전은 청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혔으나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누르하치가 나라 위해서 죽으려는 그의 뜻을 이루게 하였다. 홍타시가 장전을 아껴서 살리려고 여러 번 타일렀으나 결국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목매어 죽이고 장사를 치러 주었다.

그 뜻은 높이 사겠으나, 그 죽음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성경잡지

 

P76 – 심양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다. “한나라가 사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의 군청이었으며, 원위, , 당 때에는 고구려에 속했다.’ 고도 한다. 지금은 성경이라고 부른다.

 

P79 – 형부 (刑部) 앞을 지나는데, 관아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 앞에는 나무를 어긋나게 하여 난간을 둘러,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외국인이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뿐 아니라, 여러 관아 가운데 이 문만 열려 있으므로 관청의 제도를 속속들이 봐 두리라 생각하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박지원 답다. 용감하고 대차다. 거기서 호기심에 들어가볼 용기가 어떻게 났는지 궁금하다.

 

P80 – 손바닥으로 따귀를 네다섯번 때리고, 다시 예전 자리로 돌아가 곤장을 들고 섰다. 다스리는 법이 아무리 간단하다지만, 따귀 때리는 형벌은 옛날부터 들어 본 적이 없다.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치욕을 주기 위한 법이었던가? 어떻게 보면 학생들에게 벌주는것 같기도 하다.

 

일신수필

P83 – 아아! 슬프다. 글을 빨리 쓰다가 생각해 보니, 먹 한 점을 찍는 사이는 하나의 순과 식에 지나지 않건만, 눈 한번 감고 숨 한번 쉬는 사이에도 벌써 짧은 옛날이고 짧은 지금이 이룩된다. 그러면 하나의 이나 지금도 대순과 대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사이에 온갖 명예와 사업을 세우고자 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P86 – “자네 이번 여행에서 제일 볼만한 것이 무엇이던가. 가장 볼만한 것을 골라서 말해 주게.” 그러면 그들은 자기가 본 것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다.

요동 1,000리의 넓디 넓은 들판이 장관이지요.”

구요동 백탑이 장관이지요

그 길가의 시가와 점포가 장관이더군요.”

산해관이 장관이더군요.”

 

P88 – 이는 [춘추]를 잘 읽는 사람의 말이다. [춘추]는 중화를 높이고 이족을 낮추어 보는 사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글이다.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긴 지 200년 동안 한결같이 충성하여, 이름은 속국이라 하지만 실상은 한 나라나 다름없었다. 임진왜란 때에 신종황제가 천하의 군사를 이끌고 우리를 구원하니, 우리나라 사람의 이마에서 발뒤꿈치까지 머리털 하나도 은혜가 아닌 게 없었다.

당대 지식인, 지도층들의 전체적인 생각을 애둘러 비판하고 있다. 한족만이 명나라만이 오직 숭상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 역사의 비극이었다.

 

P90 – 참으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천하를 위해 일하는 자는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 본 받으려고 한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이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한다면 중화가 끼친 법을 모두 배워서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부터 먼저 열어야 한다. 밭 갈기, 누에치기, 그릇 굽기, 풀무질 등으로부터 공업이나 상업에 이르기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나같이 미천한 선비도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고 똥 부스러기에도 있다.”고 하겠다.

열하일기를 유명하게 만들고 역사에 남는 기행문으로 만든 박지원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청나라가 오랑캐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당대의 주류 사상과는 달리 열린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박지원이란 이름이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P95 – 수레는 천리로 만들어져 땅 위에 다니는 것이며, 뭍을 다니는 배이고, 움직이는 방이다. 나라에서 쓰는 것 중 수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주례]에서 임금의 재산에 대해 물었을 때 수레가 많은지 적은지로 대답했으니, 수레가 물건을 싣고 사람을 태우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수레는 나라의 부를 상징하는 하나의 큰 사회적 자산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공자의 논어에서도 그 나라를 칭할 때 만대의 수레를 동원할 수 있는또는 천대의 수레를 동원할 수 있는이런 표현들이 계속 나왔던 것 같다.

 

P95 – “수레는 무엇보다 궤도를 똑 같이 만들어야 하네, 궤도를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나. 두 바퀴 사이에 일정한 본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라네. 그렇게 하면 수레가 천 대고 만 대고 간에 바퀴 자리는 하나로 통일되니, 이른바 천하의 수레가 같은 궤도로 달린다.’는 뜻의 거동궤라는 말이 바로 이걸세.

 

P95 – 그러므로 애쓰지 않고도 같이 되는 것을 일철이라하고, 뒤에서 앞을 가리켜 전철이라 한다. 성 문턱의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 패어서 홈통을 이루니, 이게 바로 성문지궤이다.

전철이라는 숙어의 정확한 어원이 쉽게 이해가 된다.

 

P96 – 그러므로 중국의 재산이 풍족할 뿐만 아니라, 한 곳에 쌓이지 않고 골고루 유통되는 것이 모두 수레를 사용할 때 생기는 이익이다.

그래서 영남 어린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 백성은 산사나무를 절여서 장 대신 쓰며, 서북 사람들은 감과 감자의 맛을 분간하지 못한다.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건만 서울에서는 한 줌에 한 푼이나 하니, 이렇게 귀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물품이 유통이 안되었나? 새삼 놀랍다.

 

P97 – 이는 멀리 보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겨우 몇 천리밖에 되지 않는 나라에서 백성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한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허생전을 쓰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P97 – 이제 날마다 내 눈에 놀랍고 반가운 것이 나타나는 데, 수레의 제도로 미루어 모든 일을 짐작할 수 있겠다

 

P102 – 중국의 모든 일이 간편함을 위주로 하여 하나도 헛됨이 없는데, 이 상여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본 받을 것이 못 된다.

연암이 모든 것을 다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아닌가 보다.

 

관내정사

P109 – 범이 수염을 부르르 떨고 얼굴빛을 붉히면서 말했다.

(醫 의원)는 의(疑 의심스러움)이다. 자기도 의심스러운 처방으로 여러 사람에게 시험해서, 해마다 남의 목숨을 끊은 자가 몇 만이나 된다. (巫 무당), (誣 속임)이다. 귀신을 속이고 인민을 미혹시켜, 해마다 남의 목숨을 끊은 자가 몇 만이나 된다. 그래서 뭇사람의 노여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금잠으로 화하였으니, 독이 있어서 먹을 수가 없다.”

범이 의원과 무당을 비꼬면서 비난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보다 현명한 범이다. 아마도 연암은 당시 사대부들의 반발을 생각하여 이런 풍자와 우화 형태로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P110 – “음양이라는 것은 한 기운이 죽고 사는 것인데, 그들이 둘로 나뉘었으니 그 고기가 잡될 것이야. 오행도 제 바탕이 있어서 애당초 서로 낳은 것은 아니었는데, 이제 그들을 구태여 자, 모로 가르고 심지어는 짜고 신맛까지 들여서 분해했으니, 그 맛이 순하지 못할 거야. 육기도 제각기 행하는 것이라서 남이 이끌어 주기를 기다릴 것도 없었는데, 이제 그들이 망령되게 재성 보상이라고 일컬으면서 사사롭게 자기 공을 세우려고 한다. 그러니 그런 고기를 먹다 가는 너무 딱딱해서 체하거나 구역질이 나지 않겠느냐?”

 

P113 – 그러나 범은 이 말을 듣고 꾸짖으며 말했다.

앞으로 가까이 오지 마라. 지난번에 내가 들으니 유(儒 선비)는 유(諛 아첨쟁이)이다.” 하던데 과연 그렇구나. 네가 평소에 천하의 나쁜 이름을 모두 모아서 망령되게도 내게 덧붙이더니 이제 다급하니까 낯간지럽게 아첨하는구나. 그 말을 누가 곧이듣겠느냐?

연암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당시 지도층 선비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P114 – 말이나 소는 너희에게 공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도 너희는 말이나 소가 태워 주고 일해 주는 공로도 다 저버리고, 사랑하고 충성하는 생각까지 다 잊어버리며, 날마다 푸줏간이 미어지도록 이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그 뿔과 갈기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더구나. 게다가 우리의 노루와 사슴까지도 토색질하여 산에게 우리 먹을 것을 없애고 들에서 끼니를 굶게 하였다. 그러니 하늘이 공평하게 처리한다면 너를 먹어야 하겠느냐? 아니면 놓아주어야 하겠느냐?

 

P115 – 너희는 이를 말하고 성을 논하면서 걸핏하면 하늘을 일컫지만, 하늘이 명한 바로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 다 한가지 동물이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 인으로 논하더라도 범과 메뚜기, 누에, , 개미와 사람이 모두 함께 길러졌으므로, 서로 거스를 수가 없다. 그 선악으로 따지더라도 뻔뻔하게 벌과 개미의 집을 노략질하고 긁어 가는 놈이야말로 천지의 거도가 아니겠으며, 함부로 메뚜기와 누에의 살림을 빼앗고 훔쳐가는 놈이야말로 인의의 대적이 아니겠느냐?

선비뿐만 아니라 인간사회, 우리들이 잊고 무심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잔인함까지 일깨워주고 있다. 곰곰히 잘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참으로 자연에게 잔인한 존재이다.

 

P119 – 아아, 슬프다. 명나라의 왕택이 끊어진 지 벌써 오래되어서 중원의 선비들이 머리 모양을 고친 지도 100년이나 되는 요원한 세월이 흘렀지만, 자나깨나 가슴을 치며 명나라 왕실을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중국을 차마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세계적 현실을 정확히 보지 못했던 당시 사대부들을 볼 때마다 답답함을 넘어서 화가 난다. 그들 때문에 공자까지 미워진다.

 

P120 – 이 작품은 애초에 제목이 없었으므로, 이제 그 글 가운데 호질이란 두 글자를 다서 제목으로 삼는다. 저 중원의 혼란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혹정필담

 

P132 – 만약 우리가 달에서 지구를 쳐다본다면 역시 이 땅에서 저 달빛을 바라보는 것과 똑 같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P134 – 사람은 모든 벌레 중 한 족속에 불과합니다. 만일 달 세계가 음성으로 땅덩이가 되었다면 그물은 곧 띠끌이고, 그 눈은 곧 흙입니다.

 

P136 – “당신 두 분이 별세계로 떠나신다면 저도 팔짝팔짝 뛰는 토끼나 펄쩍펄쩍 뛰는 두꺼비 노릇을 할지라도 사양하진 않겠소.”

그러자 온 좌석의 사람이 왁자하게 웃었다.

그 시절에도 이런 유머가 있었던가? 달나라 토끼는 무척이나 기원이 길구나.

 

P137 – 혹정이 또 내게 말했다.

우리 유학자 중에도 요즘은 땅이 둥글다.’는 서양인의 지구설을 믿는 사람이 제법 많아졌지요. “땅은 모나고 고요하며 하늘은 둥글고 움직인다.’고 하는 게 우리 유학자의 명맥임에도 불구하고, 서양 사람이 이러한 혼란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선생은 어떤 학설을 좇으십니까?”

선생은 어떤 것을 믿으십니까?”

내가 반문하자 혹정이 답하였다.

전 비록 손으로 동서남북 천지 상하의 등마루를 어루만지지는 못했습니다만, 지구가 동글다는 설을 믿었지요.”

혹정도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대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에도 지구자전설을 주장하기에는 아무래도 여러가지로 어려웠을텐데 말이다. 그리고 중국은 지구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었던 때였을 텐데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당시의 주류 사상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뜻도 될 것이다.

 

P601 – 고양이 눈동자가 열두 시간마다 변하니, 한번 변하는 순간에 땅덩어리는 벌써 7,000여 리나 달리는 것입니다.

자정이 너털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야말로 토끼 주둥이에 달린 건곤이요, 고양이 눈에 돌아가는 천지라고 이를 만 합니다.”

참 색다른 비유이다. 언젠가 다른 곳에 활용해서 써 먹어 봐야 겠다란 생각이 든다.

 

P139 – “공중에 떠 있는 삼환, 즉 큰 덩어리 세 개란 해와 지구와 달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논하는 이는 저 별은 해보다 크고, 해는 지구보다 크며, 지구는 달보다 크다.’ 하였습니다.

 

P140 – 지정은 워낙 이 말을 믿었으므로, ‘자잘한 작은 별이라는 구절에다 어지럽게 동그라미를 쳤다. 혹정도 내게 칭찬하며 말했다.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이론이며, 상쾌한 이론입니다. 앞사람이 못했던 것을 발명하였습니다.”

 

P141 – “서방의 모든 나라가 이 교를 믿은 지 이미 천여년이 되었으므로 나라가 아주 편안해졌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과장스럽고 황당한 편이어서 중국 사람은 믿는 이가 없답니다.”

당시 중국사람들의 시선으로 본다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P142 – 로마제국의 또 다른 이름은 불름이라고도 하니, 구라파는 곧 서양의 전체 이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구라파의 어원이 이런 것이었다니, 신기하다. 구라파가 어디서 나온 말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지만 여기서 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듯 하다.

 

P143 – “그야 서학이 어찌 불교를 헐뜯을 수 있겠습니까. 불교는 참 교모하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다만 불교에는 비유가 많아서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 없다가, 겨우 깨달아 봤자 결국은 환이라는 글자 한 자만 남는게 결점이지요.

불교를 한 마디로 이렇게 잘 정의한 말이 없는 듯 하다.

 

P145 –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바둑 두는 걱과 같아서 임금은 바둑을 두는 당국자요, 신하들은 옆에 앉은 구경꾼입니다.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당국자보다 낫다.’는 선생의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P147 – “강희황제 시절에 올려 모신 것인데, 십철은 원래 공자 문하에서도 적당한 정론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한때 공자와 함께 진,채 사이에서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당에서 공자와 함께 모시는 것인데, 당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딴 의견을 내놓지 못했지요.”

 

P150 – 더러는 동쪽을 가리키다가 서쪽을 치고, 때로는 자기 말을 고집하되 견을 백이라 하면서 나를 추켜올리고 억눌러 내가 말을 꺼내게 했다. 굉장히 박식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선비였다. 그러나 백두의 궁한 처지라 초목으로 돌아가려 한다니 정말 슬픈 일이다.

내가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두루 이말을 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했다. 탄식이 날 뿐이다. 엄계우옥에서 심심풀이로 쓰다.

중국에서 숨은 선비를 만나고 돌아와 다시 우리나라의 현실을 돌아본 연암의 답답함이 느껴진다.

 

환희기

P154 – “이런 술법을 팔아서 생계를 꾸미는 자를 스스로 왕법 밖에 두어서, 이들을 죽여 없애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중국 땅이 커서 넉넉하고 끝이 없어 이런 것도 길러 내므로, 정치에 병이 되지 않게 때문이지요. 만일 천자가 소심하게 이런 것을 자로 재고 깊이 추궁한다면, 도리어 깊숙한 곳에 숨어 살다가 때때로 나와서 세상을 흐려 놓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근심이 더 커질 겁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장난삼아 구경하게 하면, 아낙네나 어린이까지도 이것을 요술로 알게 되어 마음과 눈이 놀라지 않을 테니 이게 바로 임금 된 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겠소.”

오히려 숨겨 놓거나 금지할수록 음지로 들어가서 더 큰 악행을 끼친다는 연암의 의견인 듯 하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마술과 요술, 해괴한 것을 가늠하지 못해서 더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 글을 보자니 영화 엑스맨이 생각난다. 돌연변이들의 집합, 사실 그때도 지금도 그런 돌연변이들이 있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정말 어디엔가 그들을 가둬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은 그대 이런 돌연변이들을 넉넉함으로 구경거리 삼으면서 품어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순간 혼란스럽다. 그리고 갑자기 궁금해진다.

 

산장잡기

P170 – 곧 붓과 벼루를 꺼내고 술을 부어 먹을 간 뒤에, 성벽을 어루만지면서 글을 썼다. “건륭 45년인 경자년(1780) 8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 그런 뒤에 크게 웃음 말했다.

그 당시의 선비들도 이렇게 본인 이름 석자를 새기고 싶었나 보다.

 

P172 –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의 동생인 소철은 중국 선비인데도 서울에 이르러 천자의 궁궐이 웅장한 것과 창고, 성곽, 정원이 크고도 넓은 것을 우러러 보고 나서, 천하가 크고 화려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하물며 우리 동방 사람이 크고 화려한 모습을 한 번 보았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겼으랴.

지금 내가 이번 열하 여행을 더욱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은 장성을 나와서 사막 북쪽까지 이르렀던 선배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 조차 북경을 보고 놀라는 데 하물며 조선에서 온 연암이야 말로 얼마나 놀랍고 볼 것이 많았을 것인가? 더군다나 아무도 가 본적이 없는 중국 황제의 별장지 열하까지 갔으니 말이다.

 

P173 – 나는 어려서부터 배짱이 없고 겁이 많아서, 어쩌다 낮에 빈 방에 들어가거나 밤에 조그만 등불을 보더라도 머리털이 움직이고 핏줄이 뛰었다. 올해 내 나이 마흔넷이 되었건만, 무서움을 타는 성질은 어릴 때나 마찬가지다. 한밤중에 홀로 만리장성 밑에 서 보니, 달은 떨어지고 강물은 울며 흘렀다. 바람은 처량하고 반딧불이가 날아다녀서, 부딪치는 모든 경치가 놀랍고 두려우며 기이하고 이상했다. 그렇지만 두려운 마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P174 – 어떤 사람은 이곳이 옛날 전쟁터였기에 강물이 그렇게 운다고 한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달려 있다.

 

P175 – 물을 건너는 자가 물이 소용돌이 치기도 하고 용솟음치기도 하면서 콸콸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몸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눈길은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문득 현기증이 나서 물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까닭은 하늘에 기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예 물을 외면하고 보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어찌 목숨을 위해 기도할 겨를이 있었으랴.

도강의 무서움과 두려움을 생생하게 표현한 문장인 듯 하다. 검푸르고 깊은 한 밤중에 물살이 내앞에서 나를 감싸고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P176 – “요동 들판이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이 성내어 울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강물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요하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밤중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은 위험함을 보는 데만 쏠린다. 벌벌 떨면서 도리어 눈 가진 것을 걱정해야 할 판에 무엇이 들리겠는가. 지금은 밤중에 강물을 건너기 때문에, 눈으로 위험한 상황을 보지 못한다. 위험한 생각이 오로지 귀로만 쏠려, 귀가 벌벌 떨면서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자는 귀나 눈에 얽매이지 않고, 귀나 눈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할수록 더욱 병이 되는 법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것이 과연 사실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진실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눈과 귀에 얽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이해해야 한다. 느껴야 한다.

 

P177 – 소리와 빛은 사람의 바깥에 있는 사물이다. 그런데 사람의 바깥에 있는 사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한다. 게다가 인생을 살아 나가려면 강물보다 더 험하고 위태로운 곳이 있지 않던가? 보고 듣는 것들이 자주 병통이 되지 않던가?

 

P181 – 코끼리를 눈으로 보면서도 이처럼 이치를 알 수가 없다. 하물며 코끼리보다 만 배나 더 큰 천하의 사물에 대해서는 어떠하랴.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에 코끼리 象 자를 따서 지은 까닭도 코끼리 같은 형상으로 만물이 변하는 이치를 궁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던가.

 

구외이문

P187 – 황제의 면류관과 옷차림까지 갖추었으니, 바로 조조의 시체였다. 황제가 친히 관왕묘와 소열제 유비의 소상 앞에 나아가 조조의 시신을 무릎 꿇리고 목을 잘랐다. 이는 천고 신인의 분통을 씻어 준 통쾌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조조가 자신의 무덤이 도굴당할까 봐 거짓 무덤을 70개나 만든 사실을 통쾌하게 깨쳐 준 일이기도 하다

청나라에 까지 유비를 존중하고 조조를 낮게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던가? 근래 와서야 조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듯 하다.

 

P190 – 냄새가 몹시 나쁜 것을 고린내라고 한다. 고려 사람들이 목욕을 하지 않으므로 발에서 나는 땀내가 몹시 나쁘기 때문이다. 물건을 잃어버리고는 뚱이라고 한다. 동이가 훔쳐 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나쁜 냄새가 나면 아이고 고린내.”하고 어떤 사람이 물건을 훔쳤다고 생각하면 아무개가 뚱이야.” 한다. 그래서 뚱이가 바로 물건을 훔친 자의 별명처럼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 고린내에 이런 우리 조상에 대한 비하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서글프고 안타깝다.

 

P191 – 1품 벼슬인 찬성 민형남이 칠십이 넘은 뒤에도 과일나무에 손수 접을 붙이자,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젋은 벼슬아치들이 웃으면서 물었다.

공께서는 아직도 백년 계획을 하십니까?”

바로 그대들에게 선물할 것이라네.”

그 뒤에 공은 94세까지 살았는데, 벼슬아치들의 제삿날이 되면 언제나 손수 과일을 따서 부조하였다.

통쾌한 이야기이다. 결국 그 벼슬아치들은 선물로 받기는 받았구나.

 

옥갑야화

P198 – 친구는 얼떨떨했지만, 벌써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00냥을 받았다. 돌아와 보니 역관의 집은 벌써 전염병으로 몰사했다. 그는 크게 놀라는 한편 두렵기도 하여, 100냥으로 단골 주인을 위해 재를 올렸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연행을 그만두었다.

연암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권선징악의 사례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일 것?

 

P202 – “내가 일찍부터 공경들을 섬긴 적이 많은데, 그 가운데 나라의 권세를 잡고서 사사로운 이익을 꾀한 사람치고 권세가 3대를 이은 사람이 없더란 말이야. 그리고 온 나라 사람 가운데 재물을 늘리는 이들이 으레 우리 집 거래를 표준 삼아서 오르내리는 것이 국론인 만큼, 이 재물을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재앙이 미칠 거야.”

그러므로 그의 자손들이 지금 번창하고도 모두 가난한 까닭은 승업이 만년에 재산을 많이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P203 – 그런데 이 손님은 비록 옷과 신이 다 떨어졌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매가 오만해.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는 물질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야. 그가 시험해 보겠다는 것도 작은 일이 아니겠지만, 나도 그에게 시험해 볼 일이 있는 거지. 주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이미 만냥을 주었으면 이름은 물어서 무엇하겠나?

과연 대부호의 사람보는 눈은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 돈을 쓸 줄 알아야 다시 돈이 모이는건가 보다.

 

P205 – 안성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어우르는 곳이요, 삼남의 길목이렷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 대추, , 감자, 석류, , 유자 등의 과일을 모두 갑절의 값으로 사서 간직하였다. 허생이 과일을 독점하자, 온 나라 사람이 잔치나 제사를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지난번에 허생에게서 갑절의 값을 받았던 여러 장사치가 도리어 열배의 돈을 싣고 왔다. 허생이 서글프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겨우 만냥을 가지고 온 나라의 경제를 기울였으니, 이 나라 경제의 깊이를 알 수 있구나.”

유명한 허생전의 이야기이다. 나중에 경제학을 배울 때도 회자되는 에피소드이다. 물론 지금의 현실에선 불가능하지만, 연암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그 당시에 하게 되었을까? 과연 연암은 시대의 천재라 이를만 하다.

 

P209– “재물 때문에 얼굴빛이 윤택해지는 것은 그대들이나 하는 일이지. 만 냥이 어찌 도를 살찌게 하겠는가? 내가 한 때의 굶주림을 참지 못해 글 읽기를 마치지 못했으니, 그대에게 빌린 만냥이 부끄러울 뿐일세.”

 

P214 – 이완이 부끄러워하면서 말하자 허생이 큰 목소리로 꾸짖었다.

소위 사대부란 게 도대체 어떤 놈들이오? , 맥의 땅에 태어나서 제멋대로 사대부라고 뽐내니, 어찌 앙큰하지 않겠소? 바지저고리를 온통 하얗게만 입으니 이는 참으로 상복이고 머리털을 한데 묶어서 송곡처럼 만드니 이것도 남쪽 오랑캐의 방망이 상투에 불과하오. 어찌 예법이라고 뽐낼 게 있겠소? 옛날 번오기는 자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머리를 자르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무령왕은 자기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오랑캐 옷을 입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당신은 명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면서, 그까짓 상투 하나를 아낀단 말인가?

연암의 당시 시대적 상황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한 마디로 축약해서 담아낸 문장이 아닌가 싶다. 그 당시의 사대부, 세력가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이 말을 소설이란 형식 속에서 담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황도기략

P228 – 이제 내가 중국에 들어와서 풍금 만드는 방식을 생각할 때마다 이 말이 마음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선무문 안으로 가서 천주당부터 찾았다.

연암의 호기심 어린 표정과 들뜬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P233 – 멀리 바라보이는 곳은 까마득하고도 깊숙하여 끝까지 간 데가 없는데, 뭇 귀신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온갖 도깨비가 나타나 멱살을 붙잡고 소매를 뿌리치며, 어깨를 비비고 발등을 밟았다. 가까운 놈이 멀어 뵈기도 하고, 얕은 데가 깊어 뵈기도 하며, 숨은 놈이 드러나기도 하고, 가렸던 놈이 나타나기도 했다. 뿔뿔이 따로 서있으니, 모두가 허공에 등을 대고 바람을 모는 형세였다. 대체로 구름이 서로 간격을 두어 이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천장을 우러러 보니 수많은 어린애가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살결을 만지면 따듯할 것만 같았다. 팔목이며 종아리도 살이 포동포동 쪘다.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벌렸다. 떨어지면 받들 듯이 고개를 젖혔다.

성당을 처음 보는 연암의 호기심 어리며 상세한 서술을 볼 수 있다.

 

알성퇴술

P240 – 송나라 경력 연간에 왕공신이 국자감을 맡고 있을 때에 한나라 태학이 1,800칸에 생도가 3만명이나 되었고, 당나라 시대에는 6,200칸이나 되었다.” 했으니, 당시 학사의 넓이와 생도의 수는 뒷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중국의 크기와 스케일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다. 대륙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모든 스케일이 조선과 달랐다.

 

P240 – 이제 청나라도 세워진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 안이 태평하고 문물의 교화가 혁혁하여 제 스스로 한나라나 당나라보다야 낫겠지.’ 생각하면서 자랑하지만, 오늘 내가 여러 학사를 돌아보니 십중팔구는 텅텅 빈 방뿐이었다. 더구나 며칠 전에 간신히 석전을 지내는데, 대성문 왼쪽 극문의 왼쪽 벽에 써 붙여 둔 참례자들의 명단을 보니 겨우 400명도 넘지 못했다. 그것도 모두 만주인과 몽골인뿐이니, 한인이 하나도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연암이 생각한 청나라의 한계가 아니었나 싶다. 만주족의 풍습을 강조하다보니 정작 한족들을 이용하지 못하니 결국 그 끝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P244 – “천고에 흥하고 망할 때에는 하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늘의 뜻이 요망스러운 재앙과 상서로운 경사로 나타날 때에는 이를 반드시 좇기도 하고, 알뜰하게 힘써 붙들기도 하여, 비록 부녀자와 어린아이라도 하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신이나 의사들은 자기 한 몸으로 하늘에 버티는 셈이니, 어찌 억지놀음이 아니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시대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역시 역사의 큰 흐름을 혼자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다. 도도한 큰 흐름 속에 한 몸을 초개와 같이 던지는 의인들이 있다. 허망하고 부질없다 할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역사의 흐름이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방향을 잡아간 것이 아닐까 싶다.

 

P245 – 무왕이 기자를 방문한 것은 기자 개인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의 도를 찾은 것이요, 도를 찾아간 까닭은 그것이 천하에 이익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무왕이 기자를 강박하여 신하로 삼았다면, 기자도 자신이 쓴 글 [홍범구주]를 껴안고 땔나무 시장을 갈 뿐이었을 것이다. 도를 전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기에게야 무슨 손색이 있겠는가.

 

P245 – 후세에 와서 천하를 차지한 사람은 모두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확실한 자신이 없었기에 하늘을 믿지 않았고, 하늘을 믿지 않았기에 사람을 꺼릴 수 밖에 없었다. 자기의 힘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 자는 모두 자기의 강적이므로, 언제나 그들이 정의로운 군대를 규합하여 옛날의 질서를 회복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천하를 차지한 자들은 차라리 그 사람을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천하를 얻은 그들의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될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면 큰 흐름에서 그들 역시 그런 끝마침을 원했는지 모르겠다

 

P246 – 원나라 세조가 친히 문승상의 여관을 찾아가 그가 쓴 칼을 손수 벗기고, 동쪽을 향해 절하면서 오랑캐를 중화로 변화시키는 방도를 물으며, 천하의 백성과 함께 그를 스승으로 섬겼더라면, 이 역시 옛날 임금의 아름다운 법도일 것이다.

 

P250 – 정성스럽고 간곡한 태도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 일깨우고 가르치는 태도 그대로이다. 이 답안지를 통해서 큰 나라 시험의 깊은 점을 보았으며,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유감없도록 충분히 갖춰 놓았음을 보았다.

 

앙엽기

P255 – , , , , 마음의 오관이 함께 피로해지고, 아울러 종이, , , 벼루의 사우가 맥이풀렸다. 언제나 꿈에 부적을 보는 것 같고, 눈은 신기루를 보는 것처럼 의아하게 거꾸로 기억되며, 명승고적 가운데 잘못 안 것도 많았다.

 

P258 – 이때는 송나라의 운명이 넓은 바다 위에 떠 있어서, 임금이나 신하나 위아래 없이 하루살이 같은 생명을 고래 등 같은 파도 속에 붙였다. 그야말로 물이 아니면 하늘인지라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대학장구]를 써서 날마다 어린 임금을 가르쳤다. 조용하고 한가한 품이 바로 전각 속 털방석 위에서 강의하는 것만 같으니, 어찌 수수께끼가 아니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과 상통하는 경우인가? 나라가 위급할 때일수록 임금이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임금을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P261 – 1층에는 우리나라 김창업의 이름이 있고, 아래에는 내 친구 홍대용의 이름도 있는데, 먹빛이 방금 쓴 것만 같았다. 서글픈 생각을 하면서 거닐다 보니, 마음을 털어놓고 마주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지식인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풍습이 있었던가?

 

P264 –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비록 심부름하는 하인 하나 없더라도, 자기 발로 장터에 나가 막 굴러먹는 장사치를 상대하여 물건 값이나 흥정하는 것을 아직 좀스럽고 더러운 짓으로 친. 그러니 이런 모습이 우리나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당연하다,

남을 대신 시켜 군색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 자기 손으로 유쾌하게 골라내는 것보다 못하기에 직접 장터에 나가서 흥정하는 것이다. 자기들 마음대로 물건을 선택하면서 오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들의 소박하고 솔직한 면을 볼 수 있다.

명분과 허울만 남은 조선의 양반과 비교하는 문장이 아닌가 싶다. 명나라가 망하고 우리 조선에만 성리학이 더욱 더 심화된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P266 – 이렇게 두 역적이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은 천년 고적이라 하여 아직까지 그대로 남겨 두었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목차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 중에서 옮긴이가 조금 축약한 것들이 있다고 한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열하일기의 풀 버전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열하일기가 정조에 의해 거의 금서로 꼽히다 보니 그 당시 출판을 못하고 필사본만 돌아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는 1932년에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고 하니 이 또한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보완이 필요한 점이라기 보다는 이 책이 완역본이 아닌 것을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쉽기도 하고 어떤 부분, 내용이 빠졌는지 간략하게 만이라도 소개해 놓으면 좋을 것 같다.

 

3. 이 책의 장점

열하일기는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서술로 연암과 함께 동행하여 북경을 왔다 온 듯한 느낌이다. 또한 오히려 지금의 기행문보다 더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다.  열하일기는 지금으로 보자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하나의 파격적인 텍스트였다. 그 의미를 이해하면서 한 문장 한 문장 보다 보면 연암 박지원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더욱 더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4. 내가 저자라면

앞서 말한 보완점과 비슷한데 저자라면이라기 보다는 역자의 입장에서 아니 출판사의 편집자의 입장에서 말한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사실 열하일기를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읽는 다면 그 의미를 처음부터 다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암 박지원이란 인물, 그리고 당시 청나라가 갖는 의미 등을 이해해야 진정 열하일기의 진 면목을 할 수 있다. 이런 열하일기에 대한 배경 설명이 우리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란 서문보단 휠씬 더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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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8 01:16:37 *.18.218.234

오~ 저자연구에 모닝의 시선이 들어가서 좋은데요?  조선의 경계인 연암.

요새 확실히 탄력 받으신 듯. (다만..마광수 교수와 연암이 함께 하기엔...다소 무리가..물론..이건 개인적 생각)


환희기에서 떠올린 '돌연변이의 집합'  좋네요. 그러게요. 정말 어딘가에 가둬둔 거 아닐까. 

중국은 그들을 품을 넉넉함이 있었던 거고? 이 궁금증을 칼럼으로 풀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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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1 23:43:07 *.144.58.236

조금은 과한 비유였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연암을 보니 갑자기 마광수교수가 생각나면서 우리사회의 미숙함에 울컥 화가 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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