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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일 23시 43분 등록

난중일기

이순신지음/ 김지운편역 / 돌베게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이순신은 이 말 한마디로 영웅을 넘어서서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역사 상 어느 누가 이 보다 더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 내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냈던가?

그래서인지 이순신은 우리나라 역사상 손에 꼽는 역사적 인물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면 언제나 세 손가락안에 든다고 한다. 세종대왕, 안중근, 김구, 광개토대왕 등등이 어깨를 겨루지만 이순신은 단연 언제나 1등을 다툰다. 광화문 광장에도 세종대왕과 함께 두 사람의 동상이 나란히 서있다.

특히나 그의 죽음은 그를 더욱 더 전설적인 영웅의 반열에 올려 놓은 또 하나의 극적인 장치로 강하게 작용한다. 승리로 이끈 전쟁에서 화룡점정을 찍는 마지막 전투에서 사망한 장군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서일까? 모두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인지 그의 죽음은 늘 미스터리한 의심을 사게 되었고 급기야 자살설 또는 전쟁 이후 은둔설까지 나오게 되었다. 한 차례 선조에 의해 백의종군까지 한 마당에 아마도 전쟁 이후 선조나 당시 조정의 성향으로 볼 때 공신으로 추대받기는커녕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이순신의 판단이 있지는 않았을까란 추측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이순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많은 이들이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한다.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다시 찾아온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불과 40여년 후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맞이하면서 결국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는 전쟁에 이기고 지고의 문제보다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당시 조선은 세계적 상황에 둔감하고 그 흐름을 잃지 못하고 또 한번의 패착을 놓게 된 것이다. 이순신이 공신으로 추앙 받지 못하는 임금과 조정, 많은 이들은 이순신의 죽음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이에 대한 불만이 응축된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순신의 일생

이순신은 조선 인종 1(1545) 3 8(음력 기준)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그의 가문은 한미하지는 않았지만 현달했다고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의 선조들은 우뚝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관직과 경력을 성취했다. 우선 6대조 이공진(李公晉)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3)를 지냈다. 가장 현달한 인물은 5대조 이변(李邊, 1391~1473)으로 1419(세종 1) 증광시에서 급제한 뒤 대제학(2)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관직을 지내고 82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그런 신하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소속되는 영예를 누렸고, 정정(貞靖)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증조부 이거() 1480(성종 11)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5)과 병조참의(3)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비교적 순조롭고 성공적인 출세를 이어왔던 이순신의 가문은 그러나 조부 때부터 침체하기 시작했다. 조부 이백록(李百祿)과 아버지 이정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당연히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 주요한 까닭은 이백록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간주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기묘사림이 시행한 별과(別科)에 천거된 120명 중 한 사람이었다. 기묘사림에 포함되는 인물들의 명단과 간략한 전기를 담은 [기묘록 속집]에서는진사 이백록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소했다고 적었다. 이런 가문의 상황에 따라 혼인한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되는데, 외조부 변수림(卞守琳)도 과거와 벼슬의 경력이 없었다.

몇 살까지라는 확실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이순신은 태어난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이순신은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뛰어난 인물을 만났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었다. 서로 세 살 차이인 두 사람은 그 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에서 조선을 구원하는데 각각 문무에서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조선 태종의 가장 큰 치적은 세종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듯이, 유성룡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순신을 적극 천거하고 옹호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의정의 혜안은 나라를 멸망에서 건졌다.

아직 어렸고 나중에는 상당히 다른 길을 걷게 된 두 사람이 그때 어떻게 어울렸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뒤 유성룡은신의 집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선조실록] 선조 30 1 27)”고 선조(宣祖)에게 아뢸 정도로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런 기억에 따라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인상 깊게 회고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인생의 방향 등도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유년 시절에만 국한된 관찰은 아니라고 추정되는데, 유성룡이 기억하는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기개가 넘쳤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은 그 눈을 쏘려고 했다는 대목은 어린 아이로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례하거나 거칠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이순신의 관직생활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였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 동안 근무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운 뒤 1579(선조 12)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 8)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5)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가 반대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즉각 불리한 인사조처로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많은 위인들이 그렇고 바로 그런 측면이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지만, 이순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처음 표출된 그런 자세는 일생 내내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징비록]에서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고 썼듯이, 그런 현실적 불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역사의 보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4)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때의 사건이었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그러나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겨우 9세 차이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했을 때, 부적절한 정실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그 기록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7)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6)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이순신의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3)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 2월 진도군수(4)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3)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3)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변방의 말직만을 전전하다가 삶을 마감했을 장수도 분명히 적지 않았을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역정은 수준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앞에 다가왔지만 거의 대비하지 않았던 거대한 국난을 생각하면, 전쟁 직전 그가 북방의 말단 장교가 아니라 남해의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공교로운 천행이었다. (인물 한국사 중)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끝나기 직전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전사하기까지(1592. 1. 1~1598. 11. 17), 진중에서 있었던 7년간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원래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를 두고 특별히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난중일기》란 이름은 이순신이 전사한 후, 198년이 지난 1798(정조 19)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찬자의 편의상 이름이 붙여진 데에서 연유한다.

현재 전해오는 《난중일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순신이 진중에서 친필로 기록한 초고본으로서 7 205장이 전해지며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실려 있는 것인데 4(5~7)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무공전서》는 정조대왕의 명에 의해 규장각(奎章閣) 문신(文臣)인 윤행임(尹行恁)과 예문관(藝文館) 검서관(檢書官) 유득공(柳得恭) 1793년부터 3년간에 걸쳐 그의 모든 행적을 모으고 기록한 것으로 시()ㆍ장계(狀啓)ㆍ난중일기(亂中日記)ㆍ잡저(雜著)ㆍ기타 자료 등이 총 1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난중일기》의 내용은 초고본과 전서본 사이에는 내용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서의 편찬자들이 충무공의 친필 초고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생략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초서본의 내용이 전서본에 있지 않은 부분도 있는 것이다. 반면 초고본에 비해 전서본 《난중일기》가 더 많은 기록을 가진 부분도 있다. 초고본 《난중일기》에는 임진년 1 1일부터 4 30일까지의 기록과 을미년의 1년 및 무술년 10 8일부터 12일까지의 기록이 전서본보다 더 빠져 있다. 이는 곧 《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당시에는 일기의 초고가 있다가 후에 없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개인적 전장 체험뿐만 아니라 전쟁전의 상황과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알 수 있는 객관적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임진년의 일기를 간단히 살펴보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전쟁준비에 충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국가의 제삿날에도 업무에 임하는 열정과, 진지와 병영관리에 태만하거나 소홀한 부하관리를 문책·처벌하는 엄중함도 보인다. 거북선의 제작과정과 개전초기의 전황, 4차 출전(부산포해전)까지의 전투기록 등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부산포해전 이후 8차 출전까지의 해전상황과 전적, 가족과 친지들과 관련한 개인사, 관리들의 인사조치, 정치군사에 관한 서신교환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 개인으로서, 그것도 전쟁 상황에서 7년간이나 일기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깊은 인내와 투철한 자기관리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더구나 《난중일기》는 단순히 자신의 개인사만이 아닌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료로서 전란(戰亂)의 전반에 대해 기록했으며, 군사에 대한 전략·전술회의·지형정찰·군사훈련·비밀훈련 등의 기록이 생생히 담겨있다.
비록 그것이 조선의 국난 중에 생사를 걸고 싸운 전쟁기간의 기록이지만, 그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진실 하여 충효(忠孝)와 신의(信義)의 표본을 제시함으로써 후인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일기의 내용을 보면 이순신의 인품과 인간적인 고뇌, 나라에 대한 깊은 충정 등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공사(公私)의 구분과 공무의 처리가 매우 빈틈이 없으며, 부하에 대한 사랑과 상벌이 분명하고 엄정하다. 이외에도 국정에 대한 솔직한 감회의 기록 등이 무인다운 웅혼(雄渾)한 필치(筆致)로 그려져 있어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도 뛰어나다한 영웅적인 인물의 전기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난중일기》는 손색이 없다. 전쟁기간에서 출세의 과정·투옥·고문·백의종군 등의 모진 풍파와 역경의 인생에서도 끝내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의 정치·경제·사회·군사 등 여러 부문에 걸친 기사와 자신이 출전한 해전에서의 상세한 전투기록 등은 임진왜란과 수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이러한 이유로 《난중일기》는 전쟁을 이겨낸 장수이자 전쟁 수행자의 수기(手記)이므로 그 자체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의 사적을 연구하거나 임진왜란을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이 7년전쟁의 과정을 일기로 기록한 《난중일기》를 통하여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출처 : 이순신 홈페이지)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책머리에

P00– 이순신 역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꽃의 아름다움을 두 눈에담는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었고, 공정하지 못한 처사에 분개하며 모함하는 이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가족을 그리며 남몰래 눈물 짓기도 하고, 달빛 아래 잠 못 이루고 번민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 모든 내면의 감정을 일기에 적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서 정말 놀랄 때가 많았다. 정말 일기 같았다. 본인이 겪은 일을 아주 사소한 것부터 개인적인 기쁨, 슬픔, 분노, 미움 모든 감정을 담았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더욱더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P00 – 수 많은 [난중일기] 번역본이 있지만 텍스트를 주제에 따라 재 구성해 독자가 내용별로 [난중일기]에 다가갈 수 있게 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아무쪼록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인간 이순신의 마음을 느끼고, 이순신이 조선을 지키고 영웅이 된 까닭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주제별로 묶어 놓다 보니 시간 순서대로 이순신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조선을 지키리라.

P23 – 1592 2 27

해 질 무렵 배를 타고 경도에 이르렀다. 아우 여필과 조이립이 군관, 우후와 함께 술을 싣고 나와맞이하였다. 다 같이 즐기다가 해가 진 뒤 관아로 돌아왔다.

아직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이라서 그런지 조금은 분위기가 가벼운 것 같다.

 

P26 – 1592 2 25일 흐림

전쟁 대비에 여러 가지로 결함이 많아 군관과 담당 아전에게 벌을 주었다.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사도는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 최하인데 순찰사는 포상을 내려 달라는 보고를 올리고 잘못을 조사하지 않았으니 가소롭다.

조정에서 하는 일이 이러한데 과연 전쟁 준비가 잘 되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전쟁초반 밀린 이유가 다 있는 듯 하다.

 

P27 – 1592 2 26

긴 화살과 아기살은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어 걱정스러웠지만 전선은 화살에 비해 온전하여 흐뭇하다.

이순신장군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 전해져 온다.

 

P27 – 1592 3 6

아침밥을 먹고 관아에 나가 무기를 점고했다. ,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는 깨지거나 훼손된 것들이 많았다.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 담당 아전과 활 만드는 장인, 감고 등의 죄를 논하였다.

이순진장군 마음만큼 준비가 잘 안되는 것이 느껴진다. 얼마나 답답 했을지 약간은 상상이 된다.  

 

P28 – 1593 6 22

방답은 처음에 15명만 보냈기 때문에 군관과 담당 아전에게 벌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를 기만하는 태도를 보였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나조차 화가 난다. 도대체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일까?  

 

P29 – 1592 3 27일 맑고 바람이 없음

일찌감치 밥을 먹고 배에 올라 소포로 갔다. 쇠사슬을 가로질러 매는 일을 감독하고 종일 나무 기둥 세우는 것을 보았다.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해 보았다.

드디어 거북선이 나왔다.

 

P33 – 1596 7 2일 맑음

경상도 진영으로 가서 순찰사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새로 지은 정자에 올라 편을나누어 활쏘기를 했는데, 경상도 순찰사 편이 162획을 졌다.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이순신장군의 순수한 모습이다. 이런 하찮은 내기에서 이겨서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고 그것을 일기에 까지 남길 정도로 참 인간적인 모습이다.

 

P35 – 1593 7 1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한 적 없건만 돛 아래 홀로 앉아 있으니 가슴속에 만 갈래 생각이 일었다.

 

P35 – 1595 7 1일 잠깐 비가 내림

홀로 수로 위에 기대어 나라의 형편을 생각해 보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대들보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구원할 기둥이 없으니 종묘와 사직이 끝내 어찌될는지. 심사가 어지러워 하루 종일 뒤척거렸다.

나라의 현실이 답답한 이순신장군의 마음이 시적으로 표현되었다. 이순신장군의 감성적인 면이 느껴진다.

 

P37 – 1593 9 3일 맑음

순찰사에게서 공문이 왔는데, 군사들의 일가족에 관한 일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침범하지 말라고 하였다. 새로 부임하여 사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몇 번 언급이 되는 것 같은데, 당시 최 전방에서 군사의 수급 군량의 보급, 군자금의 마련까지 모든 것을 나라의 도움없이 책임져야 하는 이순신장군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사사건건 방해만 놓은 조정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정말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목숨을 바쳐서 싸운 것인지 그게 더 신기할 따름이다.

 

P37 – 1594 2 16일 맑음

순천부사는 탐관오리 중 첫째라고 거론하였다. 그런데 담양, 진원, 나주, 창평 수령은 악행을 덮어 주고 상을 내려 달라고 까지 하였다. 임금님의 귀를 속이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나랏일이 이러하니 왜적이 평정될 리 만무하다. 천장만 올려다볼 따름이다.

전쟁으로 엄중한 와중에서 서로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애쓰는 자들이 있다니 적보다 더 악질적인 인간들이다.

 

P39 – 1596 3 26일 맑음

제찰사의 명령을 전하는 군사가 와서 지난번에 전라우도 수군을 돌려보내라고 한 일은 회계 내용을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전했다. 우습다.

 

P40 – 1593 6 26

왜적이 밖으로부터 군량이나 지원병을 공급받던 길도 다 사라졌으니 만일 대 규모 군대가 힘을 합쳐 공격한다면 한번에 섬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 왜적은 이미 군량이 끊겼고 우리 군대는 느긋한 마음으로 고단한 적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라, 이러한 기세라면 마음으로 고단한 적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기세라면 마땅히 백번이라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늘도 하늘을 따르는 우리를 도와주실 터이니 물길 위의 적이 아무리 오륙백 척 합해 온 다 해도 우리 군대를 당해 낼 수는 없으리라.

왜 이렇게 안된 것일까? 기세를 잡았을 때 왜군을 왜 물러나게 하지못한 것일까?

 

P42 – 1594 9 3일 비가 옴

새벽에 임금님께서 비밀리에 내리신 분부가 도착했다. 수군과 육군 장수들이 팔짱을 끼고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한 가지 계획이라도 세워서 나아가 적을 토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셨다. 3년 동안 바다 위에 있으며 이런 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여러 장수와 죽음을 각오하고 복수하자는 뜻을 맹세하고서 하루 또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다만 왜적이 험한 곳에 소굴을 지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가벼이 진군을 할 수 없을 따름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전쟁 현장의 사정을 모르는 선조와의 갈등, 아니 사실 알면서도 질책을 했는지 모르겠다.이 갈등으로 인해 이순신장군은 계속 곤욕을 치르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선조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것이기에 그 해결책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P43 – 1592 3 5일 맑음

저녁에 서울 갔던 진무가 돌아왔다 그 편에 좌의정 류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책을 보니 바다 전투와 육지 전투 및 불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방법 등이 하나하나 논의되어 있는데, 진실로 이 세상에 비길 데 없이 신통한 이론이었다.

 

P43 – 1594 6 15일 맑다가 오후에 비 뿌림

신경황이 영의정 류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영의정보다 나라를 더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성 싶다.

 

P44 – 1595 9 17일 맑음

식사를 마치고 서울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김희번이 조정에 올릴 보고서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영의정에게 유자 서른 개를 보냈다.

이순신도 이런 면이 있었던가? 아무리 유자 서른 개라지만 위 사람에게 이런 것을 보내기도 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다른 면이 아닌가 싶다. 달리 생각하면 류성룡에 대한 개인적 친분, 친밀함 때문인가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공과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던 이순신장군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이순신장군에 모습이 더 인간적이다. 너무 기계적인 공과사의 구분은 숨막히지 않는가.

 

왜적의 배를 침몰시켜라

P49 – 1592 4 16

밤 열 시쯤 영남 우수사에게서 공문이 왔는데, 부산진은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드디어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P52 – 1592 5 2일 맑음

정오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 진을 친 뒤 여러 장수와 약속을 하였다. 모두 기꺼이 나아가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낙안군수는 피하려는 뜻이 있는 듯하여 통탄스러웠다. 그러나 본디 군법이 있으니 물러나 도망치려 한들 그러할 수 있겠는가.

 

P54 – 1592 5 29일 맑음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고, 나 또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총알이 등을 뚫고 들어갔지만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순신장군은 본인의 부상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담담히 적고 있다. 그러나 이순진장군은 이 부상으로 인해 계속 고생을 했다. 처음 부상을 입었을 때도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간단하게 부상입었음을 간단하게만 서술하고 있다. 이순신장군답다.

 

P56 – 1592 6 2일 맑음

그러자 왜적들은 하나같이 놀라 흩어졌고, 조선 장수와 군사들은 일제히 모여 활을 쏘았다.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왜적의 수를 셀 수 없었으니 적군은 모두 섬멸되어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얼마 후 왜적의 큰 배 20여척이 부산에서 줄지어 들어오다가 멀리서 우리 군대를 보고는 개도로 도망쳐 갔다.

승리에 대한 기술도 담담하다. 아주 간단하게 적을 이겼음을 적고 있다.

 

P56 – 1592 6 5

중간 크기의 배 12척과 작은 배 20척으로 일시에 쳐부수었다.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왜적 장수의 목도 일곱 개 베었다. 살아남은 왜적들은 뭍으로 올라가 도망쳤지만 그 수가 매우 적었다. 우리 군대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약간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이순신장군은 평소와 달리 우리 군대의 위세가 널리 크게 떨쳤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P59 – 1593 2 22

발포 배 두척과 가리포 배 두 척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돌진하다가 바닷물이 얕고 좁은 곳에 부딪쳐 배가 걸리고 말았다. 왜적이 그 배에 올라타도록 만들어 버렸으니 분통함에 쓸개가 찢어지는 듯하였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며 끝끝내 배를 돌려 도와주지 않았으니 그들의 형편없음은 말할 거리도 못 된다. 원통하고 분하다 오늘의 분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 경상 수사(원균)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이순신장군은 원균을 향해서 거침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P61 – 1593 6 28일 비가 오락가락함

견내량에 이르자 왜적의 무리는 멀리서 우리 군대를 보고 깜짝 놀라 겁에 질려 후퇴하였다.

이순신장군이 자부심이 느껴진다. 이쯤 일본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절대로 조선의 수군과는 대결하지 말라는 교지를 내린 상태였다고 한다. 그 만큼 조선의 수군을 어려워하고 두려워 했다는 것이다.

 

P65 – 1594 10 3

내가 직접 장수들을 거느리고 아침 일찍 장문포로 갔다. 하루 종일 적과 싸워 보려 했지만 적들은 겁을 내어 나와서 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P67 – 1595 4 24일 맑음

나는 즉시 망기시로를 잡아 오라 명했다. 그리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나누어 맡고 있는 항복한 왜인들을 모두 불러 모아 망기시로의 머리를 베게 하였다. 망기시로는 조금도 꺼리는 기색 없이 죽으러 나왔다. 지독한 놈이라 할 것이다.

 

P72 – 1593 5 25일 비가 오락가락함

배에 오르도록 청한 뒤 명나라 황제의 은혜에 두 번 세 번 감사를 표했다. 이쪽으로 와서 마주 앉자고 하였지만 굳이 사양하므로 한참을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리 수군의 훌륭함을 여러 번 칭찬했다. 예단을 전하자 처음에는 기어이 거절하는 듯하다가 받고는 몹시 좋아하면서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새삼 이순신장군의 여러 모습에 감탄한다. 그렇게 융통성이 없을 듯 하면서도 또 이런 면이 있다.

 

P77 – 1597 9 15일 맑음

장군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였다.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잘 맡으면 천 명도 충분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에 따라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순신장군 휘하의 병사들도 그 어려움이 말도 못했을 것이다. 별 다른 지원없이 몇 년간 전쟁을 지속해 나간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런 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을 치뤄 나가야 하는 이순신장군도 그 자체 가장 큰 전투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P77 – 1597 9 16일 맑음

장수들은 스스로 우리 수군이 적은 숫자로 많은 왜적을 대적하는 형세라 여기고는 회피할 계책만 내어놓았다.

 

P79 – 1597 9 16일 맑음

안위야 군법에 따라 죽고 싶으냐? 안위 네가 군법에 따라 죽고 싶은 게로구나. 도망간들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안위는 당황하여 허둥지둥 왜적의 배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했다.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몸을 피해 대장을 구원하지 않았으니 그 죄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느냐! 처형하고 싶지만 왜적의 형세 또한 급박하니 일단 공을 세우게 해 주마.”

명량해전 그 날의 긴박함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12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왜군을 맞이하는 병사들의 마음이 오직했을까? 또한 이런 부하들을 다독거리고 싸움에 나서야 하는 리더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P79 – 1597 9 16일 맑음

무상 김돌손에게 그 시신을 갈고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라고 하였다. 준사는 이자가 바로 마다시라면서 펄쩍 뛰었다. 곧바로 시체를 토막 내라고 명령하였더니 왜적의 기세는 푹 꺽이고 말았다.

우리 수군은 왜적과 싸우던 바다에 배를 세워 두고 싶었지만 물살이 너무 험하고 바람도 거꾸로 불어 위태롭게 고립될 형편이라 당사도로 건너가 배를 대고 밤을 보냈다. 오늘일은 참으로 하늘이 주신 행운이다.

어찌 행운으로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철처히 파악하고 한정된 전력으로 배이상 차이가 나는 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고민했던 이순신장군의 지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겠는가. 다만, 진실로 그날의 일은 하늘의 도움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와 같은 대단한 전적을 배우고도 진실로 하늘이 주신 행운이라고만 서술하고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대 전투를 마친 날의 일기가 이리도 담백하다.

 

P83 – 1598 9 30일 맑음

오늘 저녁 명나라 유격 왕원주, 복승, 파총 이천상이 100여척의 배를 이끌고 우리 진형에 이르렀다. 등불이며, 촛불이 휘황하여 적들은 틀림없이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합류한 원군에 대한 든든한 마음이 배어 나오는 듯 하다.

 

P84 – 1598 11 8

명나라 도독부에 가서 위로연을 베풀고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잠시 후 진 도독이 나를 보자고 청했다. 곧장 갔더니 순천 왜교에 주둔하고 있는 적들이 10일쯤 철수할 것이라는 기별을 육지에서 보내왔다고 하였다. 이어서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나가 왜적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어 버리자고 말했다.

왜군은 미리 진도독에게 선을 써서 퇴군 시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장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이 이를 순순히 인정할 리 없다. 이순신장군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애잔하다.

 

군율을 엄히 다스리리라.

P87 – 1593 4 16일 맑음

경상 수사 휘하의 군관 고경운과 도훈도 및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수영 아전들을 잡아 와 나의 지휘에 따르지 않고 왜적이 일으킨 변고를 재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때렸다. 저녁에 송두남이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임금님께서 내가 올린 보고서에 써 올린 사안에 대해 하나하나 신하들과 의논하여 시행하셨다고 알려 주었다.

 

P89 – 1595 5 15일 궂은 비가 그치지 않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음

아침을 먹고 동헌에 나갔더니 광양 사람 김두검이 복병으로 있을 당시 순천 부사와 광양 현감에게서 이중으로 삯을 받아 그 벌로 수군에 나왔으면서 칼을 차지 않고 활도 매지 않은 채 무척이나 거만을 떨기에 곤장 일흔대를 쳤다. 저물녘 우수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거나하게 마시고 돌아갔다.

곤장을 일흔대가 맞고도 괜찮은가? 큰 벌을 내린 듯 한데 이 역시 이순신은 담담히 밝히고 있다.

 

P91 – 1592 1 16일 맑음

방답의 전선을 관리하는 군관과 담당 아전의 배를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때렸다. 우후와 임시 수령이 단속하지도 않았으므로 곤장을 때렸다. 우후와 임시 수령이 단속하지도 정비하지도 않은 까닭에 이 지경이 되었으니 놀랍고도 괴상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한갓 제 몸 살찌우는 일이나 하고 이처럼 맡은 일을 돌아보지 않으니 다른 일도 알 만하다.

 

P91 – 1593 6 8일 날씨가 잠깐 갯지만 바람이 온화하지 않음

여러 관아의 아전 11명을 처벌하였다. 옥과의 향소에서 작년부터 군사들을 불성실하게 통솔하더니 빠져나간 군사들이 늘어나 거의 100여 명에 이르렀다. 매번 거짓말로 둘러대며 일을 넘겼으므로 오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다.

이순신이 얼마나 엄하게 군을 통솔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날씨가 아마도 이순신장군의 심기를 조금이나마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P94 – 1592 5 3일 아침 내내 가랑비 내림

오늘 여도 수군 황옥천이 제 집으로 달아났다. 황옥천을 잡아 다가 목을 베어 높은 곳에 걸었다.

 

P94 – 1593 2 3일 맑음

그러나 이들은 도망친 자들에게서 뇌물을 많이 받은 까닭에 붙잡아 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몰래 군관 이봉수와 정사림 등을 보냈더니 70여명을 찾아서 데리고 왔다. 잡혀 온 자들은 각 배에 나누어 보내고 김호걸과 김수남 등은 당장 처형했다.

 

P98 – 1593 5 30

남해 현령 기효근이 내가 탄 배 옆에다 배를 대었다. 기효근은 배에 어린 여자를 태워 놓고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니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일을 당한 때에 어여쁜 여자를 데리고 다닐 정도이니 그 심사가 형편없고도 형편없다. 그런데 기효근의 대장인 수사 원균 또한 똑 같은 짓을 하니 어쩌겠는가.

모범을 보여야 하거늘 그 위 리더가 그러한데 어찌 밑에 사람들에게 금할 수 있겠는가. 이순신장군은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P107 – 1597 9 8일 맑음

그런데 좌의정 김응남이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해 보냈으니 조정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모두에게 참혹한 전쟁

P112 – 1593 5 14일 맑음

원균이 남을 헐뜯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다. 영산령은 술에 취해 거꾸러져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우스웠다. 저녁이 되어 선전관 두사람은 돌아갔다.

 

P114 – 1594 1 19일 흐리다가 오후 늦게 날이 갰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 저물녘에더욱 사나워짐

활터 정자에 앉아서 여러 장수와 이야기를 나누었은데, 저녁 때 수사 원균도 왔다. 소비포 권관에게서 들으니 영남에 속한 여러 배의 활 쏘는 군사와 노 젓는 선원들이 다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마음이 아파 차마 듣고 있기 어려웠다. 수사 원균과 공연수, 그리고 이극함은 눈길을 주었던 여자들과 전부 사통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장군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많이 함축하여 기술한 문장이 아닌가 싶다. 원균은 부하 병사들이 배고픔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여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자신이 관심을 갖는 여인들을 취하였다. 이를 어찌 전쟁에 나선 장수라 할 수 있을까!

 

P122 – 1594 6 5일 맑음

밤 열 시경 수영의 사내종 금산이, 그 처와 자식까지 모두 세 사람이 돌림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 눈앞에서 믿고 부리던 자들인데 하룻저녁에 죽고 마니 마음이 놀랐다.

오늘 무 밭을 갈았다.

이순신장군은 어떤 마음으로 무 밭을 갈았을까?

 

P125 – 1596 7 17일 비가 흩뿌림

충청도 홍산에서 역적이 크게 일어나 적도들에게 홍산 현감 윤영현이 잡혀가고 서천 군수 박진국도 끌려 갔다고 한다. 밖에서 온 적도 섬멸하지 못했는데 나라 안의 적이 이와 같으니 너무나 놀랍고 마음이 아프다.

적은 오히려 내부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조선 사대부와 지도층으로 인해 일본이 너무도 쉽게 조선 침략을 결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P136 – 1596 2 16일 맑음

오늘 밤은 많이 취한 탓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앉았다 누웠다 하다 보니 새벽이 되었다. 봄날의 나른함이 나에게까지 찾아왔구나.

이순신장군도 때론 감성적이고 시인 같다.

 

P138 – 1593 3 3일 아침에 비 내림

오늘은 바로 봄놀이를 하는 날인데, 모질고 고약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에 떠 있어야 했다.

 

P146 – 1593 8 1일 맑음

새벽꿈에서 웅장한 대궐에 다다랐는데 그 모양이 꼭 서울의 궁궐 같았다. 나는 영의정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임금님께서 피란 가신 일에 미쳐 눈물을 뿌리며 탄식하였다. 왜적의 기세가 이미 사그라들었다고도 했다. 영의정과 이런저런 일을 의논하는 사이 우리 주위로 무수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다 잠이 깼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꿈 하나 하나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순신장군을 보면 그 역시 인간이었구나란 생각이 든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순신장군은 이런 심리적인 압박감을 꿈을 통해서 해소하고자 한 것 같다.

 

P148 – 1594 9 20

바다 가운데 있던 외딴섬이 달려와 내 눈앞에 멈춰 서는데, 그 소리가 천둥이 치는 듯하여 사방이 놀라 달아는 꿈이었다. 그러나 나만은 그 자리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매우 기뻐했으니, 이는 왜놈들이 조선에 화친을 빌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에 올라 천천히 가는 꿈도 꾸었는데, 임금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명을 받고 올라갈 조심이다.

선조가 화가 나서 이순신장군을 다시 불러들여 감옥에 가 두는 것만 맞춘 것 같다.

 

P154 – 1597 8 21일 맑음

새벽 두세 시경 구토와 설사가 났다. 찬 기운을 쐬어서 그런가 하여 소주를 마시고 몸조리를 했는데,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구토를 여남은 번 했고, 밤새 고통에 시달렸다.

그 당시의 중압감을 이겨내면서 몸이 멀쩡한 것이 어쩌면 더 신기한 일이었을 것이다.

 

멀리서 그리는 가족

P161 – 1594 11 15일 맑음

봄날처럼 따뜻하니 음과 양이 질서를 잃었다.

오늘은 아버지 기일이라 동헌에 나가지 않고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애통한 이 마음을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P163 – 1593 6 12일 비 오다 개다 함

아침에 흰 머리카락을 여남은 올 뽑았다. 머리 세는 것이 꺼려져서가 아니라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그리하였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이순신장군의 마음, 본 받아 마땅한 효심이다.

 

P166 – 1596년 윤8 12일 맑음

하루 종일 노 젓기를 재촉해 밤 열 시쯤 어머니 앞에 도착하였다. 백발에 가날프신 어머니께서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셨다. 어머니와 나는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부둥켰다. 밤새 어머니 마음을 달래 드렸다.

 

P168 – 1594 8 30일 맑고 바람 없음

오늘 아침 정찰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몹시 위중하다고 한다. 생사가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한 지경이라 다른 일은 미처 생각할 수 없지만,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는지. 마음이 아프고 아프다.

본인의 마음은 애써 감추는 것일까? 아내의 죽음 앞에서 자식들의 마음만을 걱정하고 있다.

 

P171 – 1595 1 21

오늘은 바로 큰 아들 회가 혼인하는 날이다.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아비로서 당연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만은 이순신장군이 또 이런 이야기를 하니 색다른 느낌이다. 역시 아버지로서의 어쩔 수 없는 심정의 토로이다.

 

P177 – 1597 10 14일 맑음

하늘은 어찌 이토록 어질지 못하신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무슨 이치가 이리도 어그러졌느냐 하늘은 어둡고 땅은 컴컴하니 한낮의 해도 빛을 잃었구나. 슬프다! 우리 막내,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영특한 기질이 범상치 않아 하늘이 너를 세상에 남겨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그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남이 있은들 마침내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냐. 네 이름 부리며 울부짖을 따름이구나. 하룻밤이 1년 같았다.

애닮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특히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아들이다. 막내 아들의 죽음은 이순신장군에게 더욱 더 삶에 대한 구구절절한 애착이 없어지는 큰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막내 아들의 죽음은 이순신장군이 마지막 전투에서도 꺼리낌없이 목숨을 내 걸고 전투에 임하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P179 – 1597 10 19

저물녘에 코피를 한 되 남짓 쏟았다. 밤에 앉아서 면이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마음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이번 세상에선 영혼이 되었으니 결국 제 불효가 이리 막심한 줄도 모를테지. 슬픔에 울부짖는 꺽이고 찢어진 심정 어찌 억누를 수 있으리오

 

백의 종군의 길

P183 – 1597 4 1일 맑음

비변사 낭관 이순지가 와서 보고는 몇 번이나 탄식하였다. 지사는 돌아갔다가 저녁 식사 후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는데, 그 아들 기헌도 함께 왔다. 마음으로 내게 술을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억지로 마셨더니 몹시 취하였다.

 

P188 – 1597 4 13일 맑음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아뢰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고…. 하늘의 해조차 캄캄했다. 곧장 게바위로 달려가 보니 배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슬픔으로 찢어진 이 마음, 글로 다 적을 수 없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 그것도 백의종군 가는 길에 들었으니, 불효한 마음이 얼마나 컸겠는가! 이순신장군은 본인의 상황이 너무나 원망스럽고 답답했을 것이다.

 

P189 – 1597 4 17일 맑음

의금부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 남쪽으로 떠날 것을 제촉했다.

법이 이런 경우에만 어찌 이리도 엄준하단 말인가.

 

P191 – 1597 5 6일 맑음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뵈었다. 두 분이 서로를 붙들고 통곡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천리 밖에서 중군하고 있으니 누가 어머니 장례를 주관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겠니.”

하늘은 어찌 이리 무심하게 나를 비춰 주지 않으시는가. 나는 어째서 빨리 죽지도 못하고 있단 말인가.

이순신장군은 이미 이때부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칠 것을 결심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막내아들의 죽음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P193 – 1593 5 21

수사 원균이 거짓 공문을 보내 군사들을 동요시켰다. 군대안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다니 그 사람됨이 음흉하고 분별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P196 – 1597 5 8일 맑음

자신이 데려온 서리를 곡식 사 오라는 명목으로 육지에 보내 놓고 서리의 처와 사통하려 했는데, 서리 처가 악을 쓰며 따르지 않고 밖으로 뛰쳐 나와 고함을 지른 일도 있다고 했다. 원균이 온갖 술수로 나를 모함하는 것, 이 또한 내 운명이다. 서울로 끝도 없이 짐을 실어 보내고 구실을 만들어 나를 헐뜯기가 날로 심해진다. 좋은 세상 만나지 못한 이 신세를 나 혼자서 한으로 여길 뿐이다.

 

P197– 1597 7 21일 맑음

또 대장의 잘못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요, 그 살점을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라고들 하였다.

원균에 대한 이순신장군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하다. 원균과의 반목은 어쩌면 이순신장군과도 같은 사람에겐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오히려 이런 사람이 없다면 그 만큼 공이 크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P205 – 1598 11 17

어제 복병장인 발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선 한 척을 추격했다. 왜선은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던 차였다.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은 해안에 배를 대고 뭍으로 올라가 도망쳐 버렸다 한다. 포획한 왜적의 배와 군량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빼앗겨 빈손으로 왔다고 보고했다.

이순신장군의 마지막 일기라고 한다. 이 일기 후 다음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 출전하여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어쩌면 이순신장군은 정말로 전쟁 후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난중일기를 시간 순서대로가 아니라 주제별로 엮어 놓다 보니 임진왜란을 쫓아가는 이순신장군의 심리적 상황과 시대적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고 헛갈리게 되어 있다. 차라리 시간 순대로 목차를 재 구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각 주제별로 일기를 구분하여 분류하다 보니 각 장별로 시간 순서상 엇갈리고 전후 사정이 이해가 안되는 일기들이 있다. 다시 앞 뒤를 읽어보고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찾아봐야 이해가 잘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난중일기는 시간 순서대로 이순신장군의 마음과 감정을 쫓아가면서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 이 책의 장점

장점과 단점은 어떻게 보면 동전의 양면이다. 장점을 뽑아야 한다면 각 주제별로 이순신장군의 마음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점이다.

어머니에 대한 애뜻한 마음, 막내에 대한 안따까움, 그리고 엄격한 규율 운영에 대한 이순신의 단호한 모습, 원균에 대한 속 마음까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4. 내가 저자라면

앞서 말한 보완점과 비슷한데 난중일기는 시간순서대로 엮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시간 순 대로의 일기를 각주를 달아서 유사한 날짜의 일기를 언급하여 비교해서 같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더 좋은 구성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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