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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일 11시 52분 등록

난중일기 (亂中日記)

 

저자 연구

이순신(李舜臣: 1545.03.08~1598.11.19)

한국의 대표적인 위인. 나도 어렸을 때 그의 위인전을 읽을 때마다 감동했었다. 과거 시험 중에 말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자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싸매고 시험을 마친 장면에서는, 지혜와 투혼을 배웠다. (실제로 버드나무에는 진통 효능이 있으며 현재 아스피린의 주 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32세라는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도 한참 뒤인 47세가 되어서야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빛을 보게 되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어려운 사자성어를 배웠고, 일이 잘 안 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려운 조건에서도 지략과 용기를 발휘하여 싸움마다 이길 때는, 너무 신이 나서 소리를 질러가며 읽기도 했다.

아직 남동생과 사이가 좋던 시절, 칼싸움을 하며 놀 때, 서로 이순신역을 하겠다며 다투고 상대방을 왜놈이라 부르며 놀기도 했었는데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순신은 역사교과서나 동전 앞면에만 나오는 인물일 뿐, 더 이상 관심도 존경심도 없었다. 아마도 옛날 사람들에 대한 부정정인 인식과 한국 사람보다는 외국 사람들이 더 뛰어나다는 사대주의적 발상, 무엇보다도 애국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과도하게 강요하는 현상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현대인들에게 이순신은 그렇게 잊혀지고 과소평가 되어 왔다.

다행히도 다시 이순신에 대한 관심과 올바른 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소설, 드라마, 영화 속의 주인공에서 국민의 영웅으로 사랑받고 있다. 1,700만 명이 봤다는 영화의 경우, 지나친 애국심 마케팅을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세대와 성별을 초월해서 존경받는 위인이란 방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여러 조사에서 이순신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에 늘 1, 2위에 꼽히고 있다.

 

이순신이 이렇게 후손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는 전쟁에서 이긴 무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지략과 용기, 카리스마를 갖춘 훌륭한 무관이었지만, 그 이전에 백성을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미와 어머니에 대한 효심, 가족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아들이자 아버지였다.

또한 여러 사람들의 질시와 모함, 부모와 자식의 죽음, 관리로서 받은 국가의 비합리적인 처우 등 육체적, 심리적으로 극한의 고통스러운 온갖 절망적인 상황을 좌절하지 않고 초인적인 정신력을 바탕으로 이겨낸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며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교과서에서 몇 장만 보았던 <난중일기>.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읽어보고 성웅으로서뿐만 아니라, 병든 아내를 걱정하고, 아들과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며 대신 죽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던, 그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도 잘 알아보자.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간행사

4 생태학적으로 생물 다양성의 옹호가 정당한 것처럼, 문화다양성의 옹호 역시 정당한 것이며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문화다양성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 없이 우리가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동아시아인,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은 인권(人權), 즉 인간 권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고전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관심의 확대가 절실히 요망된다.

 

4. 하지만, 고전이란 건 따분하고 재미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의 상당 부분은 편견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편견의 형성에는 고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 시대적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딱딱하고 난삽한 고전 텍스트를 재생산해 왔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요즘 들어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물론 현재 시대상황과는 안 맞는 부분도 많지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은 작품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책머리에

6 <난중일기>는 어느 조선 장수의 일과와 행적이 기록된 사료(史料)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의 감정이 솔직하게 담겨 있는 내밀한 일기장이기도 하다.

어떤 부분은 너무 솔직하게 담겨져 있어서 공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진짜 개인의 일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6 이순신에게 초월적 능력 같은 것은 없었다. 단아하고 진중한 성격의 이순신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했고 매사를 철저히 대비했다. ~

이순신 역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꽃의 아름다움을 두 눈에 담는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었고, 공정하지 못한 처사에 분개하며 자신을 모함하는 이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가족을 그리며 남몰래 눈물짓기도 하고, 달빛 아래 잠 못 이루고 번민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 모든 내면의 감정을 일기에 적었다.

 

조선을 지키리라

전쟁에 대비하라

22 159224일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북쪽 봉우리의 봉수대 쌓아 놓은 곳에 올라갔다. 참으로 잘 쌓아서 절대 무너질 리 없을 듯했으니,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했음을 알 수 있었다. 종일토록 바라보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내려왔다. 해자 구덩이도 둘러보았다.

 

23 15922 15일 비바람이 거셈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석공(石工) 등이 포구에 새로 다져 놓은 구덩이를 여러 군데 무너뜨렸으므로 벌을 주고 다시 다져 놓도록 하였다.

당시 전쟁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조선 땅에서 유일하게 전쟁에 대비했다고 하던데그 모습이 상세하게 보인다.

 

23 1592 227

아침에 점검을 모두 마치고 북쪽 봉우리에 올라가 땅의 형세를 조망해 보았다. 고립되어 위태로운 외딴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데, 성을 쌓고 못을 파는 일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기와 전선을 점검하라

26 1592 222

먼저 홍양의 전선(戰船) 만드는 곳으로 가서 배와 각종 기구들을 몸소 점검하고 난 뒤에 녹도로 갔다. 곧장 산꼭대기에 새로 지은 문루(門樓) 위에 올라가 경치를 바라보았는데, 그 아름다움이 일대 최고였다. 녹도 만호가 마음을 다하여 정성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흥양 현감, 능성 현령, 녹도 만호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대포 쏘는 것을 함께 보았다.

일기의 여러 부분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모습이 보인다. 몸이 아프셨던 이유 중의 하나로 과도한 음주를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던데아마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전쟁에 대한 스트레스를 술로 푸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7 159236

아침밥을 먹고 관아에 나가 무기를 점고했다. ,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는 깨지거나 훼손된 것들이 많았다.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 담당 아전과 활 만드는 장인, 감고 등의 죄를 논하였다.

 

28 이순신의 승리는 철저한 대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92 2월에는 몸소 관할 지역을 순회하면서 무기와 전선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하였고, 1593년부터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講和) 협상을 벌이며 실제 전투가 뜸하던 시기에도 이순신은 무기와 전선을 새로 만들며 다시 있을지 모를 전쟁을 대비했다.

역시 유비무환(有備無患). 이순신 위인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자 성어 중에 하나다.

 

거북선을 만들다

30 1594 215일 맑음

흥양 배에 부정한 일이 있었는지 캐물었는데 엉성하게 처리한 일이 많았다. ~

날이 저물 무렵 순찰사가 공문을 보내왔다. 조도어사 박홍로(朴弘老)가 순천, 광양, 두치에 복병(伏兵)을 두어 수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임금께 올렸는데, 수군(수군)과 각 고을 수령들이 함께 옮겨 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신하들의 의견이 잇어 공문이 내려왔다고 한다.

 

31 거북선은 이순신과 그 부하들이 판옥선을 개량해 새로이 만든 돌격용 전선이었다. 이순신은 임금님께 올린 보고서에서 거북선에 대해,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해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뾰족한 쇠를 꽂았으며 배 안에서는 밖을 엿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배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수백 척의 적선 가운데라도 뛰어들어 대포를 쏠 수 있는 배라고 설명하였다. <난중일기>에는 거북선이 다섯 번 등장할 뿐이지만, 1592년에 있었던 사천, 당포, 한산도, 부산포 해전 등에 투입되어 활약을 펼쳤다. 거북선은 전투가 시작되면 곧장 적의 진영으로 돌격해 대포를 쏘고, 왜적의 배에 가서 부딪혀 적선을 넘어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오늘도 활쏘기를 연습하고

32 15921 12일 궂은비가 그치지 않음

밥을 먹고 객사의 동헌으로 나갔다. 본영(本營)과 각 포구 진무들의 활 솜씨를 시험해 보았다.

궂은 비가 내리는데 어디서 활 솜씨를 시험해 봤을까? 활을 쏠 정도로 넓은 실내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설마 비를 맞으면서 활을 쐈을까? 비 맞으면 활이 안 나가지 않나? 아니면 잠시 비가 내리지 않는 때가 있었던 걸까

 

32 1592 3 28

활을 열 순 쏘았는데 다섯 순은 잇따라 과녁에 적중했고, 두 순은 네 번 맞고, 세 순은 세 번 맞았다.

 

33 15953 23일 맑음

활터에 자리를 벌이고 앉아 종일토록 돌아가는 것도 잊었다.

 

33 159544일 맑음

아침에 경상 수사가 활을 쏘자고 해서 권 조방장, 박 조방장을 데리고 배에 올라 수사가 머무는 곳으로 갔다. 전라 우수사는 벌써 와 있었다. 모두 함께 활을 쏘고 하루 내내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왔다.

 

34 활쏘기는 전통적으로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의 하나로 인식되었고, 활쏘기를 통해 그 사람의 덕을 살필 수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조선 시대 군사들은 매일같이 활을 쏘며 군사 훈련을 하고 체력도 단련했다. 때로는 편을 나누어 승부를 가르면서 활쏘기를 놀이로 즐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조선 시대에 활쏘기가 중시되었던 까닭은 활이 조선군의 대표적인 무기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조총(鳥銃) 사정거리가 길고 발사 속도가 빨랐던 활은 멀리 있는 배 위의 적을 쏘아 맞힐 수 있었으므로 바다 위 전투에서도 매우 유용한 무기였다.

요즘으로 치면 골프 같은 걸까? 군사 훈련도 되고 체력 단련도 되고, 승부 내기도 하면서 즐기다가, 마친 후에는 함께 술을 마시며 친목도 다지고. 전쟁으로 피폐한 몸과 맘에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 조선의 앞날

35 1593 7 1일 맑음

밤기운이 서늘하여 자리에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한 적 없건만 돛 아래 홀로 앉아 있으니 가슴 속에 만 갈래 생각이 일었다.

 

35 159571일 잠깐 비가 내림

홀로 수루 위에 기대어 나라의 형편을 생각해 보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대들보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구원할 기둥이 없으니 종묘와 사직이 끝내 어찌 될는지. 심사가 어지러워 하루 종일 뒤척거렸다.

 

35 왜란이 발발한 뒤 조선 땅은 순식간에 일본군에 점령되어 평양성까지 함락되었고, 임금은 평안도 의주로 피란을 떠났으며, 전쟁은 5년 이상 계속되었다. 나라를 구원할 동량(棟梁)이 없는 현실에 이순신은 울분과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실정 모르는 조정 관원들

38 15962 28일 맑음

가소롭다. 조정의 계책이 이러하다니. 체찰사가 내놓은 대책이 이와 같으니 나라를 구제할 수 있겠는가. 나랏일이 이 모양인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저녁에 거제 현령을 불러 이 일에 대해 묻고 곧 돌려보냈다.

정말 안타까웠던 것 같아서 읽는 나도 마음이 안 좋다.

 

39 임진왜란 내내 조선 수군은 군사가 부족했고, 군사가 사망하거나 도망쳤을 경우 그 군사의 가족이나 이웃을 뽑아 빈자리를 채웠다. 그렇지만 조정에서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가족이나 이웃을 대신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수군에 내렸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병력을 유지하는 일이 급선무였던 이순신은 이러한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몇 번이나 조정에 요청했다.

수군을 이끄는 이순신으로서는 매우 한심한 처사였겠지만, 사실 조정의 입장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한 두 해도 아니고 7년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백성의 삶은 완전 파탄이 나고 민심도 바닥을 쳤겠지. 더 이상 징발할 가족이나 이웃도 없어졌을테고참으로 안타깝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40 1593626일 장대비가 내리고 남풍이 거세게 붊

그렇다. 왜적은 이미 군량이 끊겼고 우리 근대는 느긋한 마음으로 고단한 적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라, 이러한 기세라면 마땅히 백번이라도 이길 수 잇을 것이다. 하늘도 하늘을 따르는 우리를 도와주실 터이니 물길 위에 적이 아무리 오륙백 척 합해 온다 해도 우리 군대를 당해 낼 수는 없으리라.

 

1594 9 3일 비가 옴

여러 장수와 죽음을 각오하고 복수하자는 뜻을 맹세하고서 하루 또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다만 왜적이 험한 곳에 소굴을 지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가벼이 진군(進軍)할 수 없을 다름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저녁,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생각해 보니 나랏일이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자빠지듯 곤경에 처해 있는데, 나라 안에는 구제할 방법이 없을 듯싶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면 좋단 말인가.

 

영의정 유성룡

1594615일 맑다가 오후에 비 뿌림

신경황(申景潢)이 영의정 류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영의정보다 나라를 더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성싶다.

 

44 15961 12일 맑았지만 서풍이 세게 불어 꽁꽁 언 듯 추위가 곱절이나 엄함

새벽 두 시쯤 꿈을 꾸었다. 어딘가에 이르러 영의정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둘 다 겉옷도 벗어 두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나라 위해 애태우는 마음을 터놓고 끝내는 가슴이 무너졌던 일까지 토로하였다. 얼마 후 비와 바람이 사납게 몰아쳤지만 역시 우리 두 사람은 비바람에 휘말려 흩어지지 않았다.

 

45 류성룡(柳成龍, 1542~1607)1593년부터 6년간 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영의정을 맡아 조선 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절을 서울의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서울시 중구 인현동 일대)에서 보냈다. 이때부터 이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지냈던 듯하며, 이후 정치적으로도 운명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1591, 평소 이순신의 자질을 눈여겨보았던 류성룡이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추천하였고, 이 두 사람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난을 함께 해쳐 나갔다.

류성룡과는 어릴 적에 한 마을에서 알고 지내서 서로의 능력과 인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을 알아보고 조정에 추천한 사람도 류성룡이었다고 한다. 긍정적인 네트워킹의 장점의 매우 좋은 예다.

 

왜적의 배를 침몰시켜라

임진년, 전쟁이 시작되다

49 1592415일 맑음

해 저물 무렵 영남 우수사(원균)에게서 기별이 왔다. 왜적의 배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바다에 있는 절영도에 정박해 있다고 하였다. 또 같은 시각 수사가 보낸 공문이 도착했는데, 왜적의 배 350여 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49 1592416

밤 열 시쯤 우수사에게서 공문이 왔는데, 부산진은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얼마나 분하고 원통한지 일기에 날씨를 빠트렸다. 거의 모든 일기에서 매우 상세하게 썼던데이런 작은 부분으로도 그의 심정을 유추할 수 있다.

 

51 1592420일 맑음

영남 관찰사에게서 공문이 왔다. 대규모 왜적의 기세가 너무도 사나워 그 선봉을 대적할 장수가 없는 까닭에 왜적이 승승장구하며 몰아치는데,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와 있는 자들 같다고 하였다. 전선을 수리해 지원하러 와 달라는 부탁도 하였다.

 

51 1592414,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 ~1600)의 군대가 부산을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왜적은 동래성으로 들이닥쳤고,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의 지휘 아래 군사와 백성들이 힘을 합쳐 저항했으나 성은 곧 함락되고 말았다. 왜적의 기세에 겁을 먹어 싸우지 않고 달아난 지방 수령이나 장수들도 많았다고 한다. 사납게 진격한 왜적은 5월 초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첫 출전의 날

52 159251

진해루에 앉아 방답 첨사, 흥양 현감, 녹도 만호를 불렀더니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지 않았다. 의로운 무사(武士)들이라 할 만하다.

 

52 159252일 맑음

“ ~ 등이 왜적의 소식을 듣자마자 돌연 달아나 버렸습니다. 무기 등의 물건도 모두 흩어 버리게 해서 남은 것이 없습니다.”

기가 막힐 뿐이었다.

정오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 진을 친 뒤 여러 장수와 약속을 하였다. 모두 기꺼이 나아가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낙안 군수는 피하려는 뜻이 있는 듯하여 통탄스러웠다. 그러나 본디 군법이 있으니 물러나 도망치려 한들 그리할 수 있겠는가.

전쟁에 나간다는 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나가는 거겠지. 기가 막히고 통탄스러우셨겠지만 두려워서 달아나 버리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나라고 달랐을까? 다만 무기 등의 물건을 모두 흩어 버리게 한 건 정말 잘못한 것 같다. 자기는 도망가더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잘 싸울 수 있도록 최소한의 배려는 했어야 하는게 아니었을까?

 

사천 전투

54 1592529일 맑음

우수사는 오지 않았다. 혼자서 장수들을 이끌고 새벽에 출발해 곧장 노량에 닿았다. ~

왜적들은 재빠르고 견고하게 우리를 막아 싸웠다. 나는 장수들을 지휘하여 일시에 달려 나가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 왜적은 두려워하며 퇴각했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었다. ~

나 또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총알이 등을 뚫고 들어갔지만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활 쏘는 병사와 노 젓는 선원 중에도 총탄을 맞은 자가 많았다. 왜적의 배 13척을 불태우고 물러났다.

이 때 벌써 한 번 총을 맞으셨구나. 예전 총은 지금의 총처럼 부상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다고 하나 그만큼 그 때는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으니 치료도 잘 안 됐었겠지.

 

당포 해전

159262일 맑음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왜적의 수를 셀 수 없었으니 적군은 모두 섬멸되어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얼마 후 왜적의 큰 배 20여 척이 부산에서 줄지어 들어오다가 멀리서 우리 군대를 보고는 개도로 도망쳐 갔다.

 

적을 유인하라

58 1593 2 10일 아침에 흐리다 오후 늦게 갬

웅포에 왜적의 배가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왜적을 또다시 유인해 보았는데, 전부터 우리 군대에 겁을 먹고 있는 터라 나올 듯하다가 이내 돌아가 버렸다. 끝내 왜적을 사로잡아 섬멸하지 못했으니 원통하고 분할 따름이다.

58 1593 2 12일 아침에 흐리다 오후 늦게 갬

왜적의 무리는 어제와 같았다. ~ 왜적은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을 추격하고도 두 번 다 사로잡아 없애 버리지 못했으니 통탄스럽고 화가 난다.

 

59 58 1593 2 18일 맑음

왜적의 배가 열 척쯤 우리 뒤를 쫓아 나왔다. 경상도 복병선 다섯 척이 재빠르게 앞서가 그들을 추격하는 사이, 다른 복병선들이 돌진하여 왜적의 배를 둘러싸고 화살을 셀 수 없이 쏘았다. 왜적 중에 죽은 자가 몇인지 헤아릴 수 없었고, 적들은 기세가 푹 꺾여 다시는 나와서 맞서지 못했다.

 

60 1593 2 22

전부 섬멸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발포 배 두 척과 가리포 배 두 척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돌진하다가 바닷물이 얕고 좁은 곳에 부딪쳐 배가 걸리고 말았다. 왜적이 그 배에 올라타도록 만들어 버렸으니 분통함에 쓸개가 찢어지는 듯하였다.

얼마 후 진도의 큰 전함(戰艦)이 적에게 포위되어 구출할 수 없을 듯했는데, 우후가 곧바로 들어가 구해 냈다. 경상 좌위장(慶尙左衛將)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며 끝끝내 배를 돌려 도와주지 않았으니 그들의 형편없음은 말할 거리도 못 된다. 원통하고 분하다. 오늘의 분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 경상 수사(원균)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얼마나 분하며 쓸개가 찢어지는 듯하다고 하셨을까. 말만 들어도 안타깝다.

 

수군의 기세에 왜적이 달아나고

61 15936 28일 비가 오락가락함

견내량에 이르자 왜적의 무리는 멀리서 우리 군대를 보고 깜짝 놀라 겁에 질려 후퇴하였다.

 

62 15943 3일 맑음

경상 우후 이의득(李儀得)이 와서 이야기하기를, 수군들이 적을 많이 붙잡아 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사(원균)에게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사가 군사들의 발바닥까지 때리려 했다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66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에게 패배만 당하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남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자 가능한 한 조선 수군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수군은 섬나라 군대이기는 했지만 실제 해전을 치러 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활약에다 전선이며 화공(火攻) 무기, 군사들의 역량까지 모든 면에서 전력이 앞섰다.

한편 일본군은 1593년 가을 무렵부터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주로 성안에 머물렀다. 아무리 이순신이라 해도 이처럼 피하기만 하는 일본 수군을 공격해 무찌르기란 쉽지 않았을 터다.

 

나에게 항복한 왜인들

67 1595424일 맑음

나는 즉시 망기시로를 잡아 오라 명했다. 그리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나누어 맡고 있는 항복한 왜인들을 모두 불러 모아 망기시로의 머리를 베게 하였다. 망기시로는 조금도 꺼리는 기색 없이 죽으러 나왔다. 지독한 놈이라 할 것이다.

 

68 159618일 맑음

항복한 왜인 다서 사람이 들어왔다. 조선 편으로 온 까닭을 물었더니, 자기들이 따르던 장수가 성질이 포악하고 일을 자꾸 고되게 부려 나와서 투항했다고 대답하였다.

 

71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군 가운데 일부는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또는 상관의 혹독한 매질을 견디다 못해 조선 진영으로 와서 항복을 하였다. 조선이 항복한 왜인들을 후하게 대접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항복한 왜인들은 모여 있으면 음모를 꾸밀지 모른다는 이유로 조선 땅 여러 곳에 나누어 두었으며,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자나 검술에 능숙한 자는 조선군에 편입시켜 그 기술을 전수하게 하였다. 1594년 가을 무렵부터 항복한 왜인들의 상당수는 이순신이 다스리던 한산도로 보내져 노 젓는 선원이 되었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도 얼마간 도움이 되었다.

전쟁은 우리 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왜인들에게도 끔찍한 일이었겠다. 몇 사람의 정복욕 때문에 수십, 수백만 명이 피해를 당한다. 그래서 어떤 전쟁도 좋은전쟁은 없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

74 15947 17일 맑음

나는 장 파총과 함께 앉아 만리나 되는 바닷길을 고생스레 와 주시어 감사한 마음 끝이 없다고 먼저 인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작년 7월 절강에서 출항하여 요동에 이르렀을 때 요동 사람들이 앞으로 지나갈 바닷길엔 돌섬과 숨어 있는 곶이 많다 하고 또 앞으로 일본과 강화(講和)를 맺는다 하니 가서는 안 된다며 간곡히 힘써 만류하기에 그대로 요동에 머물다가, 시랑 손광(孫鑛)과 총병 양문(楊文)에게 긴급 보고를 올리고 올해 3월 초 배를 띄워 왔으니 어찌 수고와 어려움이 없었겠느냐고 답했다. 나는 차를 드린 다음 작은 술잔에 술을 대접했는데, 사뭇 비분강개한 심정이 되었다. 또 왜적의 형세를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75 1592 527, 일본군이 임진강을 넘어오자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명나라 조정은 장수 조승훈(祖承訓)과 군사 4천 명을 조선에 파병했지만 명나라 군대는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했다. 같은 해 12, 이번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0~1998)4 3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왔다. 명나라의 지원으로 평양과 개성을 되찾고,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왜적까지 물리칠 수 있었지만 명나라 군사들이 고맙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과 소, 말 등을 바쳐야 했고, 식량을 빼앗긴 백성들은 더욱 굶주려 갔다. 더욱이 명나라 군대는 조선에 부족한 군사까지 보충해 달라고 요구하여 조선이 젊은 남성은 대부분 전쟁터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정유년, 다시 왜적과 맞서다

76 1597913

꿈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임진년 왜적을 크게 이겼을 때 꾸었던 꿈과 거의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이순신은 꿈을 참 많이 꾸셨던 것 같다. 왜 안 그랬을까. 전쟁 중인데 잠자리가 편했을리가 없으니 항상 꿈을 많이 꾸셨던 것 같다.

 

77 1597 915일 맑음

장군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였다.

병법(兵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잘 맡으면 천 명도 충분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에 따라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엄숙히 맹세하였다.

오늘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가르쳐 주었다.

 

78 1597 916일 맑음

왜적의 무리는 당해 내지 못하고 다가섰다 물러났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왜적이 우리를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까닭에 전세를 예측할 수 없어 한배에 탄 사람들끼리도 서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적선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곧바로 침범해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다시 마음과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적을 쏘아라!”

돌아보니 장수들이 탄 배는 물러나 먼 바다 위에 있었다.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적들이 내가 돌아서는 틈을 타서 배를 붙잡고 올라탈까 염려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뿔나팔을 불라 명하고, 중군에게 명령을 내릴 때 쓰는 깃발을 세우게 했다. 또 초요기도 올리게 했다. 그러자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점 내가 탄 배를 향해 다가왔다.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으므로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렀다.

안위야, 군법에 따라 죽고 싶으냐? 안위 네가 군법에 따라 죽고 싶은 게로구나. 도망간들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안위는 당황하여 허둥지둥 왜적의 배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벌러 말했다.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몸을 피해 대장을 구원하지 않았으니 그 죄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느냐! 처형하고 싶지만 왜적의 형세 또한 급박하니 일단 공을 세우게 해 주마.”

아무리 뛰어난 무관이라도 혼자 잘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의 부하를 잘 지휘하는 카리스마가 지략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순신은 훌륭한 무관이지만 그를 상관으로 모시는 사람들은 참 힘들었을 듯 하다.

 

80 우리 배들은 왜적이 침범할 수 없음을 알고 동시에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갔다. ~ 나머지 적선을 싸움을 피해 달아나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

오늘 일은 참으로 하늘이 주신 큰 행운이다.

자신의 뛰어남을 하늘이 주신 행운으로 돌린다. 겸손함까지 갖추셨다.

 

81 1597년 일본은 조선을 또 한 번 침략했으며,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정유년에 치른 해전 가운데 이순신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전투는 명량(鳴梁) 해전이 아니었을까 한다. ~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159783일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으며, 복귀한 지 한 달여 만에 명량 해전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는 사이,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15977월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참패하며 수많은 군사와 전선을 잃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전선 12척뿐이었지만 통제사 이순신은 장수와 군사들을 모아 다시 전쟁을 준비하였다. 소규모 군대로 많은 적을 막아 내기 위해 이순신은 명량이라는 좁은 길목을 택했고, 이곳으로 왜적을 끌어들인 뒤 전투를 치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진린과의 연합작전

83 1598 10 3일 맑음

진 도독이 유 제독의 비밀 편지에 따라 초저녁에 진격하였다. 자정에 이르도록 공격을 퍼부었는데, 명나라 사선 19척과 호선 20여 척이 불에 탔다. 도독이 넘어지고 거꾸러지던 모습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84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陳璘, 1543~1607) 1598 7월에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을 도우러 왔다. ~ 진린 이순신의 관계가 처음부터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진린을 극진히 대접하고, 진린이 이순신의 인간됨을 알게 되면서 점차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갔다. 더욱이 진린은 이순신과 노량 해전에 출전함으로써 이순신의 마지막을 함께한 명나라 장수가 되었다.

진린은 성격이 아주 괴퍅하고 같이 하기 힘든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마저 이순신을 이대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89 15955 15일 궂은비가 그치지 않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음

새벽꿈이 몹시 어수선했다. 어머니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 벌써 이레째라 속을 태우고 마음을 졸였다. ~

아침을 먹고 동헌에 나갔더니 광양 사람 김두검이 복병으로 있을 당시 순천 부사와 광양 현감에게서 이중으로 삯을 받아 그 벌로 수군에 나왔으면서 칼을 차지 않고 활도 메지 않은 채 무척이나 거만을 떨기에 곤장 일흔 대를 쳤다.

 

90 1596620일 맑음

평산포 만호에게 뒤쫓아 진영에 이르지 않은 책임을 추궁했더니, 기한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해괴하기 짝이 없어 곤장을 서른 대 때렸다.

 

90 이순신은 군대의 안정을 위해 언제나 군율을 엄격히 적용했다. 왜적이 침입해 온 실전 상황에서 군율로 철저히 다스리지 않고는 군사들을 통솔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잇속만 차리는 아전들

91 1592 116일 맑음

방답의 전선을 관리하는 군관과 담당 아전이 배를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때렸다. 우후와 임시 수령이 단속하지도 정비하지도 않은 까닭에 이 지경이 되었으니 놀랍고도 괴상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한갓 제 몸 살찌우는 일이나 하고 이처럼 맡은 일을 돌아보지 않으니 다른 일도 알 만하다.

성 아랫마을에 사는 병사 박몽세는 석수장이인데, 선생원에 잇는 쇠사슬 박을 돌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의 개에게까지 해를 끼쳐 곤장 여든 대를 쳤다.

도대체 이웃의 개를 어떻게 했길래 곤장을 여든 대나 치셨을까? 동물까지도 사랑하는 이순신의 따뜻한 마음이 보인다.

 

91 159368일 날씨가 잠깐 갰지만 바람이 온화하지 않음

여러 관아의 아전 11명을 처벌하였다. 옥과의 향소에서 작년부터 군사들을 불성실하게 통솔하더니 빠져나간 군사들이 늘어나 거의 100여 명에 이르렀다. 매번 거짓말로 둘러대며 일을 넘겼으므로 오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다.

 

92 1594 84일 비가 흩뿌리다 늦게 갬

경상 수사 아래에 있는 군관과 아전이 명나라 장수를 대접하면서 여인들에게 떡과 같은 먹을거리를 이고 가게 한 일이 있어 벌을 주었다.

 

도망친 군사에겐 죽음이 기다릴 뿐

94 1592 5 3일 아침 내내 가랑비 내림

오늘 여도 수군 황옥천이 제 집으로 달아났다. 황옥천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높은 곳에 걸었다.

이런 내용만을 모아 놓으니 이순신이 좀 잔인한 성정을 가졌던 걸로도 보인다. 군법이 엄중하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너무 과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날짜별로 배치했더라면 이렇게 과해 보이지 않고 전쟁 중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걸로 보였을텐데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97 이순신의 휘하에서도 수많은 군사들이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도망치다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군들이 계속 탈출하려 했던 까닭은, 전쟁이 두렵고 수군으로 복무하는 일이 너무나 고되고 위험했기 때문일 터다. 수군은 한 번 편입되면 대대손손 수군으로 복무해야 했기 때문에 천한 역()으로 여겨진 데다, 육군에 비해 복무 기간이 두배나 길고 배 위에서 생활해야 하는 등 복무 여건도 상당히 열악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군대의 안정을 위해 도망친 군사는 처형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전쟁 기간 내내 이 원칙을 엄격히 지켰다.

 

 

배에 여인을 태운 남해 현령

98 1593530

남해 현령 기효근이 내가 탄 배 옆에다 배를 대었다. 기효근은 배에 어린 여자를 태워 놓고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니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일을 당한 때에 어여쁜 여자를 데리고 다닐 정도이니 그 심사가 형편없고도 형편없다. 그런데 기효근의 대장인 수사 원균 또한 똑같은 짓을 하니 어쩌겠는가.

본인도 부끄러운 걸 알았었나 보다. 전쟁터에 따라온 어린 여자는 또 무슨 잘못.

 

99 기효근(奇孝謹, 1542~1597)1590년부터 남해 현령으로 재직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균의 부하로서 여러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 그리하여 왜란이 끝난 뒤 전쟁을 다스린 공이 있는 신하로 표창을 받았다. 그런데 1592 52일의 일기를 보면 남해 현령은 왜적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을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하였고, 전쟁 중에 어린 여자를 배에 태우고 다녀 이순신의 비난을 샀다. 전투에서 세운 공과는 별개로,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나라가 위급한 때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순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일기다.

 

전쟁터에 첩을 데려온 순변사

100 1594 11 25일 흐림

나라가 어려운 일을 당한 이때, 막중한 책임을 몸에 지고 있으면서 임금님 은혜에 보답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고, 꿋꿋이 음탕한 계집을 옆에 끼고서 관아에도 들어오지 않고 성 밖의 사저에서 지내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으니 당신 생각에 어떻소? 또 수군 소속의 여러 관아와 포구에 나누어 배정된 육지 전투용 무기를 그쪽에 달라고 독촉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이건 또 무슨 이치요?”

순변사는 말문이 막혀 대답을 못했다. 하품하고 기지개 켜며 일어났더니 한바탕 꿈이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며 꿈 속에서기가 막히긴 했겠다.

 

100 1595121일 종일 가랑비 내림

장흥 부사가 와서 그 편에 들으니 순변사 이일의 일처리가 너무도 형편없다. 나를 해치려 힘을 쏟는다니 우습고 우습다. 이일은 서울에 있던 첩까지 관아에 데리고 왔다 한다. 더욱 놀랄 일이다.

 

싸우지 않고 도망친 경상 우수사

102 1597 8 12일 맑음

저물녘 거제 현령과 발포 만호가 와서 명령을 들었다. 그 편에 배설이 겁을 내던 모양새에 대해 들었는데, 탄식을 억누를 수 없었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하여 감당치도 못할 자리에 분수 넘치게 올라앉아 나랏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는데도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니 어찌할꼬!

 

103 1597 9 2일 맑음

배설이 달아났다.

 

104 15977 16, 칠천량에서 또 한 번의 해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무리한 출전을 감행했던 조선 수군은 상대의 계략에 휘말려 처음으로 일본 수군에 참패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통제사 원균은 물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등이 전사했다. 그렇지만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 1551~1599)은 자기 휘하의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배설이 지금의 전력으로는 일본 수군에게 반드시 질 것이며 칠천량은 바다가 얕고 좁아 배를 움직이기에 좋지 않으니 진영을 옮겨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원균이 이를 묵살했다고 씌어 있다. 아무리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에 달아났다고 한들 배설이 장수로서 전투를 피해 도망친 죄를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자신을 문책할 것이 두려워 병을 핑계 대고 또 한 번 달아났던 배설은 결국 1599년 권율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배설(裵楔). 어디서 들어봤다 싶었는데, 영화 명량에서 배신자이자 이순신을 암살하려던 것처럼 묘사되어서 역사의 왜곡이라며 그 후손들이 제작사를 고소했다는 인물이다. 고소된 것까지만 있지 그 후에 소송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안 보인다.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다.

 

산에 숨은 무안 현감

105 1597 1021

새벽 두세 시쯤부터 비가 오다 눈이 내리다 하였다. 바람이 너무나 차가워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추위 때문에 몸이 얼지는 않을지 걱정하느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105 남언상은 원래 수군에 소속된 벼슬아치인데, 자기 한 몸 지키려고 꾀를 내어 수군 부대로 오지 않고 산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달포가 지났는데, 왜적이 후퇴하고 나자 무거운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비로소 나타났으니 그 정황이 너무나 어이없다.

너무나 어이없고 용납될 수 없는 인물이겠지만, 임금부터 도망갔던 걸 생각하면 그 아래 관리나일반 백성들이 도망갈 생각을 한 것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이순신은 너무 뛰어난 인물이라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됐겠지만

 

106 전쟁의 와중에 제 한 목숨 보전하려고 자기가 맡은 고을과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난 지방 수령은 상당히 많았다. 남언상은 이순신 앞에 나타난 며칠 뒤 의금부로 압송되었는데, 이때 남언상과 같은 죄목으로 잡혀 온 수령만 30여 명에 달했다. 언제나 사()보다는 공()이 우선이고, 자신의 목숨보다는 나라를 지키는 일이 먼저였던 이순신에게 남언상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첨으로 지위를 얻은 김억추

159798일 맑음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일개 만호 자리에나 겨우 적합할 뿐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좌의정 김응남이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해 보냈으니 조정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모두에게 참혹한 전쟁

피란 떠나신 임금님

111 1593 5 12일 맑음

선전관 성문개(成文漑)가 왔다. 피란 떠나신 임금님의 사정을 자세히 전해 주는데 통곡을 억누를 수 없었다.

 

112 15935 14일 맑음

이들 편에 피란 가신 임금님 형편과 명나라 군대가 저지른 일에 대해 들었다. 마음이 아파 한숨이 나왔다.

우수사의 배로 자리를 옮겨 선전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을 몇 잔 주고 받았다. 경상 수사 원균도 왔는데, 술을 지나치게 마셨음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장수들이 하나같이 괴로워하고 또 못마땅해 했다. 원균이 남을 헐뜯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다. 영산령은 술에 취해 거꾸러져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우스웠다.

역시 원균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다. 이렇게 싫어하는데 대쪽 같은 성품으로 어떻게 한 배에서 같이 술을 마셨을지괴로워하고 못마땅해 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좀 재미있기도 하다.

 

113 1594 2 12일 맑음

유지 안에서 나온 임금님의 비밀 편지는 바다 위에서 해를 넘기며 나라를 위해 고생하고 있음을 내 항상 잊지 않고 있다. 공을 세운 장수와 군사들 가운데 큰 상을 받지 못한 자를 서둘러 보고하라는 말씀이셨다. ~

위에서 밤낮으로 나라를 위해 근심하시고 부지런하게 애쓰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북받쳐 오르는 감정과 그리운 마음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정말 장수와 군사들이 고생하고 있음을 항상 잊지 않고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이순신의 마음을 북받쳐 오르게 했으니 비밀편지는 성공했다고 하겠다

 

113 15924 14일 부산을 침공한 왜적은 25일에는 경상도 상주를, 28일에는 충청도 충주를 점령하며 무서운 기세로 북진했다. ~ 4 30일 밤 선조는 궁궐을 떠났고, 사흘 뒤 서울은 왜적에게 함락되었다. 임진강 방어선마저 무너지자 선조는 평양에도 머물 수 없어 의주에 임시 행궁을 설치했다. 그리고 다음 해 10월에야 조선의 임금은 서울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임금께서 피란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통곡했다고 하는데, 1592 510일 이순신이 임금께 올린 보고서에 그 정황이 보인다.

어가(御駕)가 관서 지방으로 옮겨 갔다는 소식을 처음 알고, 놀라고 원통한 마음끝이 없어 종일토록 서로 붙들고 오장이 다 타고 찢어진 듯 울음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군사들

114 1594 1 19일 흐리다 오후 늦게 날이 갰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 저물녘에 더욱 사나워짐

소비포 권관에게서 들으니 영남에 속한 여러 배의 활 쏘는 군사와 노 젓는 선원들이 다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마음이 아파 차마 듣고 있기 어려웠다.

수사 원균과 공연수, 그리고 이극함은 눈길을 주었던 여자들과 전부 사통(私通)하였다고 한다.

배불리 먹고 전쟁에 임해도 힘들었을텐데, 굶어 죽을 지경이라니노 젓는 게 또 팔은 얼마나 아팠을까? 듣기만 해도 안타깝고 마음이 아픈데 실제로 그 모습을 봐야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우리 조상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우리 나라는 왜 그렇게 아픈 역사가 많은지

 

114 1594 120일 맑았지만 거센 바람이 너무 차가움

옷 없는 자들이 이 배 저 배에서 거북처럼 웅크리고 추위 때문에 신음하는데, 그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군량이 도착하지 않으니 이 또한 걱정이다.

아이고 군사들이 옷도 없었다고 한다. 추워서 신음하고 있었다니, 춥고 배고프고아무 것도 안 해도 힘들 상황인데,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전쟁을 했을까. 다시 한번 이 죽일 놈의 왜놈들이 미워진다.

 

116 1595 69일 맑음

몸이 여전히 개운치 않아 걱정스럽다. ~

조형도가 수군은 군사 한 사람에게 매일 식량 다섯 홉과 물 일곱 홉을 준다고 임금님께 거짓으로 고했다 한다. 인간사 놀랍고 어처구니 없기도 하지, 하늘과 땅 사이에 어찌 이처럼 남을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녁에 정찰선이 들어와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고 전했다. 답답한 마음에 눈물이 난다.

 

117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형도(趙亨道, 1567~1637) 1595 5월경 비변사 낭청(郎廳)으로서 영남 수군의 상황을 살피고, 수군이 처한 상황이 열악하다는 뜻에서 수군은 군사 한 사람에게 매일 식량 다섯 홉과 물 일곱 홉을 준다고 보고를 올렸다. 조형도의 보고가 있은 뒤, 비변사에서 임금께 수군을 구휼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군사들의 굶주림과 헐벗음의 실상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하였다. 이순신은 군사들이 전염병으로도 수도 없이 사망하고, 남은 군졸들도 하루에 고작 두세 홉의 양식을 먹을 뿐이라 배고픔과 고달픔이 극에 달해 노를 저을 수도 활을 당길 수도 없는 지경이며, 바다에 떠 있는 배 위에서는 추위도 더욱 혹심하여 군사들이 모두 귀신 모양으로 변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게다가 명나라 구원병이 도착한 후 조선의 군량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조선군의 굶주림은 더욱 심해졌다.

 

왜적의 손에 부하를 잃고

118 1593 719일 맑음

저녁에 광양 현감이 진주에서 죽임을 당한 장수와 군사들의 명단을 보내왔는데, 보고 있자니 아프고 또 참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1594 49일 맑음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한 마음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119 촉석루(矗石樓):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남강(南江)가에 있는 누각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는 진주성 방어의 지휘 본부로 쓰였다. 15936 29일 왜적이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진주 백성 6만여 명을 학살한 일이 있다.

촉석루는 논개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는데, 진주에서 백성 6만여 명이 학살됐었구나. 진주 남강에도 한 때 피가 흘렀겠다.

 

120 이순신은 왜적과의 전투가 끝나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릴 때면 언제나 사상자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고 그 유가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사망자의 시체를 고향으로 보내 장사 지내게 하고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애썼다. 그는 부하들의 죽음을 가슴으로 애통해하는 상관이었다. 일기에 언급된 어영담은 돌림병에 걸려 진영 안에서 사망했는데, 이순신이 유달리 신뢰하여 모든 일을 의논하는 부하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순신의 상실감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된다.

 

피란길에 돌아가신 숙모

121 1593 516일 맑음

몸이 많이 불편하여 자리에 누워 끙끙 앓았다. ~

낮에 윤 봉사로부터 서울 관동 사시던 숙모께서 양주의 천천(泉川)으로 난리를 피해 가셨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곡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어째서 요즈음 세상일은 이다지도 참혹한가. ~ 대진(大進)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12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조선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일본군이 엄청난 수의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순신의 숙모처럼 피란길에 사망한 사람이나 왜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은 사람, 돌림병에 걸려 죽은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살아남아도 산 게 아니었겠지. 다시 한번 좋은 전쟁은 없다.

 

돌림병으로 죽은 금산이

122 1594 65일 맑음

밤 열 시경 수영의 사내종 금산이, 그 처와 자식까지 모두 세 사람이 돌림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 눈앞에서 믿고 부리던 자들인데 하룻저녁에 죽고 마니 마음이 놀랐다.

 

사람 고기까지 먹는 백성들

123 1594 1 14일 흐리고 바람이 셈

아침에 조카 뇌가 보낸 편지를 보았다. 설날에 아산 선산에서 차례를 올리려는데 무려 200여 명이 몰려들어 산을 둘러싸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바람에 제사를 나중으로 물렸다고 한다. 경악할 일이다.

 

1594 29일 맑음

아침에 고성 현감이 왔다. 당항포에 왜적의 배가 드나드는지 묻고, 또 백성들이 굶주릴 대로 굶주리다 서로 잡아먹는 참상에 대해 물었다. 백성들은 앞으로 어떻게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갈는지.

 

124 왜적이 침입해 온 뒤 조선 백성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져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데다, 곡식이 있다면 명나라 군사들에게 우선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배고픔에 지친 조선 백성 가운데 일부는 실제 사람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형제나 자식을 죽여 그 고기를 먹은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명나라 군사가 술을 마신 뒤 토한 찌꺼기를 핥아 먹기 위해 굶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었다는 기록까지 전한다. 몇몇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결국 무고한 백성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 전쟁의 참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전쟁은 몇몇의 정복욕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우리 나라 백성은 물론 왜의 일반 백성들의 삶도 비참하게 한 건 마찬가지다.

 

나라 안의 적

125 1593 7 9일 맑음

남해 현령이 또 와서 왜적들이 이미 광양과 순천을 분탕질하였다고 전했다. ~

밤 열두 시쯤 수영의 정찰선이 들어와 왜적의 소식을 전했는데, 실은 왜적이 그런 것이 아니고 영남의 피란민들이 왜적 차림으로 가장하여 광양에 쳐들어가 집집마다 분탕질을 한 것이라고 하였다.

 

128 왜적이 일으킨 난리를 틈타 약탈을 자행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조선 사람도 여럿 있었다. ~ 이몽학 일당은 1596 7월 초 새 왕조를 수립해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며 홍산 일대의 여러 고을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홍주 목사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이 이몽학 일당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고, 이몽학의 일당 가운데 한 사람이 이몽학을 죽임으로써 반란은 일단락되었다. 왜적을 물리치는 데 온 힘을 기울여도 모자란 때에 나라 안의 적과도 싸워야 했다니, 당시 조선 사회가 얼마나 혼란했는지 눈앞에 선하다.

 

백성의 부역을 줄여 주어야

129 1596년 윤8 14일 맑음

지나온 곳마다 눈앞에 쑥대밭만 가득해 참혹한 모습을 차마 보기 어려웠다. 우선 전선을 정비하는 부역을 면제해 군사들과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어야겠다.

 

129 이순신은 부하들은 물론 주변의 백성에 대해서도 늘 마음을 썼다. 전쟁으로 인해 갖은 고생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이 일기에서처럼 부역을 줄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전리품으로 얻은 쌀과 옷감을 피란민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갈 곳 없는 백성들을 거두어 수영에 속한 둔전에서 농사를 짓게 해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새해 첫날에

133 1594 1 1일 비가 퍼부음

어머니를 모시고 한 살을 더 먹었다. 이는 난리 가운데 다행한 일이다.

 

1595 1 1일 맑음

촛불을 환히 켜고 홀로 앉아 있다가 생각이 나랏일에 미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또 여든의 병드신 어머니가 떠올라 애를 태우며 밤을 지새웠다.

이순신은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성이 풍부했던 분 같다. 어머니 걱정에 애를 태우며 밤을 지새웠다니. 나는 어머니 걱정에 밤을 새웠던 적이 있던가?

 

수영(水營)에도 봄은 오고

135 1592 2 19일 맑음

비 온 뒤라 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풍경이 아름다웠다.

 

135 1592 220일 맑음

느즈막이 출발해 영주에 도착했더니 좌우의 산에 핀 꽃과 교외의 향기로운 풀들이 마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던 영주도 그 경치가 이러했을까.

아직 전쟁 전이라도, 전쟁 준비에 마음에 여유가 없을 텐데도, 꽃을 보니 감성이 폭발하신 것 같다. 꽃과 봄에는 이런 힘이 있다.

 

137 15962 16일 맑음

오늘 밤은 많이 취한 탓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앉았다 누웠다 하다 보니 새벽이 되었다. 봄날의 나른함이 나에게까지 찾아왔구나.

 

전장에서 보낸 명절

138 159333일 아침에 비 내림

오늘은 바로 봄놀이를 하는 날인데, 모질고 고약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에 떠 있어야 했다. ~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또 내렸다.

전쟁만 아니었더라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봄놀이를 즐기고 있었을텐데전쟁 중이라 바다에 떠 있어야 했다. 마침 추석을 이틀 앞둔 오늘, 명절을 명절로 즐길 수 있는 일상의 평화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139 1596 5 5일 맑음

오늘 새벽 억울하게 죽은 넋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 ~

밤늦도록 군사들을 뛰놀게 한 것은 내가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애쓰고 있는 군사들의 노고를 풀어 주려는 생각에서 그리한 것이다.

 

140 159799일 맑음

오늘은 바로 9 9일이니 1년 중의 좋은 명절이다. 나는 비록 어머니 상을 당해 상복을 입었지만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먹이지 않을 수 없는 터라, 제주에서 내온 소 다섯 마리를 녹도 만호와 안골포 만호에게 주어 먹이도록 하였다.

 

항복한 왜인의 광대놀이

141 15967 13일 맑음

저녁에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가 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한 왜인들이 간절히 마당놀이를 하고 싶다 하기에 금하지 않았다.

 

141 이순신은 엄격했지만, 한편으로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항복한 왜인들에 대해서도 도망치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엄중하게 처벌했지만, 한 번쯤은 광대놀이를 허락하여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줄도 아는 장수였다.

앞 부분에 군령을 엄격하게 적용해서 처형하는 내용의 일기만 계속 될 때는, 아무리 전쟁 중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사실 좀 읽기 힘들었었다. 이런 부분과 적절하게 섞였더라면 전쟁 중에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일부로 이해했을 텐데다시 한번, 비슷한 내용끼리 묶은 건 나에게는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잠 못 이루고

142 1593 513일 맑음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는데, 바다 달빛이 배를 가득 채웠다. 온갖 근심이 가슴을 두드려 홀로 앉아 뒤척대다 닭이 울고서야 잠깐 잠이 들었다.

 

143 1594 5 9일 비가 오고 또 옴

하루 종일 텅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수백 가지 생각이 마음을 뒤흔든다. 괴롭고도 심란한 이 마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흐리멍덩하여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 같기도 하고 정신 나간 사람 같기도 했다.

이런 일기를 보면 내가 쓴 글 같기도 하다. 너무나 뛰어나서 초인적이고 약한 마음은 없을 것 같은 이순신에게도 이런 날이 있었다. 이런 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일기에 적었던 것도 대단한 것 같다.

 

144 1596 1 13일 맑음

오늘 저녁 달빛이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홀로 앉아 마음에 고민을 품고 있으니 잠이 올 리 없었다. 신홍수를 불러 퉁소 연주를 들었다.

 

145 이순신은 자주 불면에 시달렸다. 나라를 구할 책임을 짊어진 장수로서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밤 번민에 휩싸여 뒤척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茄)는 남의 애를 끊나니.

 

앞일을 일러 준 꿈

146 1593 729일 맑음

새벽에 남자아이를 얻는 꿈을 꾸었다. 포로로 잡혀간 아이를 되찾을 징조다.

147 1594 727일 흐리고 바람이 붊

밤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곡을 하는 꿈을 꾸었다. 아주 좋은 징조라 한다.

불면에 시달리셨다고 하는데, 꿈도 많이 꾸셨던 듯 하다. 나도 꿈을 많이 꾼다. 꿈을 많이 꾸면 좋은 꿈일지라도 잠을 깊게 못 자서 그런지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을 때가 많다. 전쟁 중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의 고통이 느껴지는 듯해서 더욱 안타깝다.

 

148 15949 20일 새벽바람이 그치지 않고 비도 잠깐씩 내림

홀로 앉아 밤에 꾸었던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바다 가운데 있던 외딴섬이 달려와 내 눈앞에 멈춰 서는데, 그 소리가 천둥이 치는 듯하여 사방이 놀라 달아나는 꿈이었다. 그러나 나만은 그 자리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매우 기뻐했으니, 이는 왜놈들이 조선에 화친을 빌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에 올라 천천히 가는 꿈도 꾸었는데, 임금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명을 받고 올라갈 조짐이다.

각종 꿈들이 그래도 좋은 징조라고 하니 다행이다 싶다.

 

몸이 아파 신음하여도

152 1593 812일 비가 오다 맑았다 함

몸이 많이 좋지 않아 하루 종일 누워서 끙끙 앓았다. 식은땀이 시도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셨지만 온 힘을 다해 앉아 있었다.

 

153 1593 9 7일 맑음

하루 내내 홀로 앉아 있었더니 심사가 편치 못했다. ~ 해 저문 뒤에 가슴이 답답하도록 열이 나서 창문을 열어 두고 잤더니 머리에 바람을 많이 쐬었다. 몹시 아플 듯하여 걱정이다.

 

155 <난중일기>에는 몸이 좋지 않았다는 일기가 여러 편 실려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순신은 육체적으로도 상당한 고통을 겪었던 듯하다. 50세 즈음의 나이에 7년 동안 배 이에서 생활하며 수도 없이 해전을 치러야 했으니, 그 얼마나 고된 날들이었을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동안 이순신의 초인적인 면을 부각하는 일들만 알고 있었어서 그런지 이순신이 이렇게 몸이 아팠다는 게 좀 생소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7년이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불면증과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텐데 이 정도 아픈게 당연하지 싶다. 그런데도 그렇게 뛰어나게 전쟁에 임하셨다니진짜 초인적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정신적인 면은 그랬던 것 같다

 

점괘에 위안을 얻고

156 15947 13일 비가 주룩주룩 내림

임금을 뵙는 것 같다는 점괘를 얻었다. 참으로 길한 괘였다. 다시 점을 치자 밤중에 등불을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점괘가 모두 길해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 ‘바다에서 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두 번째 점에서는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으니 매우 길하다.

밤새 비가 내렸다. 혼자 앉아 있자니 마음속에 이는 생각들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점이라도 봐서 위안을 얻는 모습에서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랬을까.

 

멀리서 그리는 가족

꿈에 뵌 아버지

161 1595 1 12

홀로 앉아서 꿈에 뵌 아버지를 떠올리니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머리 흰 아들의 어머니 생각

163 15936 12일 비 오다 개다 함

아침에 흰 머리카락을 여남은 올 뽑았다. 머리 세는 것이 꺼려져서가 아니라,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그리하였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

종 갓동이와 철매 등이 병들어 죽었다 하니 가엾다.

 

164 1595515일 궂은비가 그치지 않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음

새벽꿈이 몹시 어수선했다. 어머니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 벌써 이레째라 속을 태우고 마음을 졸였다. 게다가 조카 해가 잘 갔는지도 알 수 없다.

 

어머니의 당부

166 1594 112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잘 가라고 하시며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 내야 한다고 두 번 세 번 당부하실 뿐, 이별의 슬픔 때문에 한숨지으시는 모습은 조금도 없으셨다.

역시 훌륭한 아들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

 

167 1596 10 7일 맑음

아침 일찍 어머니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어머니께서 종일 기뻐하시니 다행이다.

 

병든 아내

168 1594830일 맑고 바람 없음

오늘 아침 정찰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몹시 위중하다고 한다. 생사가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한 지경이라 다른 일은 미처 생각할 수 없지만,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는지, 마음이 아프고 아프다. ~

수사 원균의 일은 너무도 해괴하다. 내가 머뭇머뭇하면서 전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니 천년을 두고 탄식할 일이다.

곤양 군수가 병에 걸려 돌아갔는데, 얼굴도 못 보고 보낸 것이 못내 아쉽다.

아내가 아파서 죽을 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나랏일 때문에 당장 갈 수도 없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아팠을까. 글에서 절절히 묻어난다.

 

169 1594 9 1일 맑음

앉아도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아 촛불을 켜놓고 뒤척이다가, 이른 아침에 손을 깨끗이 씻고 단정히 앉아서 아내의 병세가 어떠한지 점을 쳤다. ‘승려가 환속하는 것 같다는 괘가 나오고, 다음에는 의심하다가 기쁜 일을 만난 듯하다는 괘가 나왔으니 참으로 길하다. 또 병이 덜한지 어떤지, 그 소식이 나에게 전해질는 지를 점쳤더니 귀양 길에 친척을 만난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또한 오늘 안에 좋은 소식을 듣게 될 기미다.

당장 찾아갈 수도 없고, 소식을 들을 수 없으니 점이라도 쳐본 마음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승려가 환속하는 것 같다는 괘가 좋은 괘인가? 그 밖에도 좋은 괘가 나왔다며 안심할 모습이 그려져 나도 웃음이 났다.

 

아비의 마음

171 1594 6 11일 맑고 쇠도 녹일 것처럼 더움

아들과 헤어지니 마음이 착잡하여 텅 빈 동헌에 홀로 앉아 있어도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해 질 무렵엔 바람이 몹시 사나워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

얼마나 더웠으며 쇠도 녹일 것처럼덥다고 했을까. 지금처럼 냉장고나 에어컨은커녕 얼음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니 훨씬 더웠겠지. 아니 옷만 좀 가벼이 입었더라도 덜 더웠을텐데바람이 불면 시원하다고 좋아했을 법도 한데 아들이 배를 타고 나갔나?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고 하신다.

 

172 15962 17일 흐림

저녁부터 서풍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더니 밤새도록 잦아들지 않는다. 면이가 뱃길에 오른 것을 생각하니 걱정스런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애타는 이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봄 날씨가 사람을 괴롭혀 몸이 몹시 노곤하다.

 

172 15962 19일 맑고 바람이 셈

아들 면이가 잘 갔는지 밤새 마음을 졸였다. ~

오늘 새벽, 우리 진영에 있는 난여문 등에게 경상도 진영에 머물고 있는 항복한 왜인들을 묶어 와 머리를 베라고 하였다.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와 전쟁 중인 엄격한 장수의 모습이 너무 확확 바뀌어서 따라가기 어렵다. 왜인들도 누군가에게는 아들이자 아버지일텐데전쟁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을 그렇게 다룰리는 없었겠지. 전쟁에 참여한 일반 왜인들도 안 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침략의 주동자가 더욱 미워진다.

 

염이 걱정

175 1593 82일 맑음

아침부터 염이의 병세가 어떤지 알지 못하고 왜적을 물리치는 일도 지체되는 까닭에 마음의 병 또한 깊어져 밖으로 나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있는데, 정찰선이 들어왔다. 염이의 통증 부위에 종기가 생겨 침으로 째자 고름이 흘러나왔다고 전했다. 며칠 늦었더라면 목숨을 구하기 어려울 뻔했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조금이나마 살아날 길을 얻은 셈이니 기쁘고 다행스런 마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면아,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177 1597 10 14일 맑음

저녁에 천안서 온 어떤 사람이 본가에서 보낸 편지를 전해 주었다. 봉투를 열기도 전에 살과 뼈가 먼저 후들거리고 정신이 어찔했다. ~

하늘은 어찌 이토록 어질지 못하신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무슨 이치가 이리도 어그러졌느냐. 하늘은 어둡고 땅은 컴컴하니 한낮의 해도 빛을 잃었구나. 슬프다! 우리 막내.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영특한 기질이 범상치 않아 하늘이 너를 세상에 남겨 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그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남아 있은들 마침내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냐. 네 이름 부르며 울부짖을 따름이구나.

 

178 15971016일 맑음

내일이면 막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지만 마음대로 슬피 울지도 못하는지라 수영 안에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자식의 죽음에 맘대로 슬퍼하지도 못하고, 장례식을 치뤄주지도 못하고. 그 마음이 어땠을지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다.

 

179 15971019일 맑음

저물녘에 코피를 한 되 남짓 쏟았다. 밤에 앉아서 면이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마음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이번 세상에선 영혼이 되었으니 결국 제 불효가 이리 막심한 줄도 모를테지. 슬픔에 울부짖는 꺾이고 찢어진 심정 어찌 억누를 수 있으리오.

 

백의 종군의 길

감옥 문을 나와

183 15974 1일 맑음

감옥 문을 나왔다.

 

184 1996년 가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침략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간첩 요시라를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진격하는 시기를 거짓으로 알렸다. 요시라의 말을 믿은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이 정보를 의심한 이순신은 출전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이순신을 게으른 장수로 여겨 왔던 선조는 이순신의 태도에 격노해 이순신을 옥에 가두라 명하였고, 평소 호감을 갖고 잇던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1597 2 26일 압송되기 시작해 3 4일 서울의 감옥에 갇혔다. 정탁 등이 구명을 위해 애쓴 끝에 4 1일 감옥 문을 나왔지만, 이순신은 더 이상 삼도수군통제사가 아니요, 관직 없는 무관이었다.

 

다시 남쪽으로

187 감옥에서 나온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 받는다. 백의종군이란 죄를 지은 장수나 관리에게 관직이 없는 상태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게 하는 처벌인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가서 종군하게 된다. 이순신은 아직 죄인의 신분이었으므로 도원수가 머무는 남쪽으로 가는 길에 호송하는 의금부 관리들이 동행했다.

개인의 삶을 희생하며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렇게까지 열심히 싸웠는데 결국 돌아오는게 이거라니나라면 전쟁이고 뭐고 그냥 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인으로 살았을 것 같다. 뭐가 그를 이렇게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을까?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188 1597413일 맑음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아뢰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고…… 하늘의 해조차 캄캄했다. ~

슬픔으로 찢어진 이 마음, 글로 다 적을 수 없다.

 

189 15974 16일 궂은비가 내림

고향 마을을 바라보니 눈물이 나고 가슴이 찢어진다. 이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는데, 빗줄기가 거세졌다. 남쪽으로 갈 일도 다급하니 부르짖고 통곡하며 다만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189 1597419일 맑음

이른 아침 길을 나서며 어머니 영전에 곡하고 인사를 올렸다.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일이 또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못하다.

 

원균

193 15932 23일 흐림

수사 원균이 왔다. 그의 사람됨은 음흉하고 간악해 형편없기 짝이 없다.

 

193 1593521

수사 원균이 거짓 공문을 보내 군사들을 동요시켰다. 군대 안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다니, 그 사람됨이 음흉하고 분별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5 1593 8 7아침엔 맑더니 해 지고 나서 농민들의 기대에 크게 흡족할 만큼 비가 내림

저녁에 경상 우수사 원균 휘하의 군관 박치공이 와서 왜적의 배가 퇴각했다고 아뢰었다. 그렇지만 원균이나 그 아래 있는 군관들은 평소 허튼 소리를 잘 전하니 믿을 수 없다.

전쟁의 와중이고, 원균을 욕하는 일기인데도 날씨에서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매우 세심한 분이었던 듯하다.

 

196 15975 8일 맑음

원균이 온갖 술수로 나를 모함하는 것, 이 또한 내 운명이다. 서울로 끝도 없이 짐을 실어 보내고 구실을 만들어 나를 헐뜯기가 날로 심해진다. 좋은 세상 만나지 못한 이 신세를 나 혼자서 한으로 여길 뿐이다.

시기와 질투는 너무 뛰어난 인물들의 운명인 것도 같다.

 

나의 자리로 돌아와

199 159782일 잠깐 갬

홀로 앉아서 집을 지키고 있자니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어 비통할 따름이었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무언가 명()을 받을 조짐이 있었다.

 

202 15978 9일 맑음

일찌감치 출발하여 낙안에 다다르니 사람들이 5리 밖까지 나와 인사하였다. 백성들이 달아난 까닭을 묻자, 왜적이 닥쳐온다고 병사가 겁을 내어 창고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였기 때문에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모두들 대답했다.

낙안군 관아에 도착해 보니 창고이 곡식은 모두 불에 타 버린 채였고, 아전과 백성들이 와서 인사하는데 눈물을 뿌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오후에 다시 길을 떠나 10리쯤 가자 노인들이 길가에 줄지어 서서 다투어 마실 것을 바쳤다. 받지 않으면 통곡하면서 억지로 권하였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본 거겠지. 그들의 절심함과 삶의 의지가 느껴진다.  

 

202 이순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배한 후 각지로 도망쳤던 수군 장수들도 다시 이순신 아래로 모였다. 장수들은 물론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임 위에서 이순신은 12척의 배 밖에 남지 않은 조선 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두 번 다시 바다를 빼앗기지 않으리

205 1597 97일 맑음

밤 열 시 경이 되자 예상대로 왜적이 몰려와 대포며 총탄을 퍼부어 댔다. 내가 탄 배에서 곧바로 앞을 향해 지자포를 쏘았더니 산과 바다가 들썩였다. 왜적들은 우리를 범할 수 없음을 알고 네 번이나 진격했다 퇴각했다 하면서 대포만 쏠 따름이었다. 그러다 새벽 한 시쯤 영영 물러갔다.

 

205 1598 11 17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은 해안에 배를 대고 뭍으로 올라가 버렸다 한다. 포획한 왜적의 배와 군량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빼앗겨 빈손으로 왔다고 보고했다.  

 

206 159811 17일 일기는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일기다. ~

1598 11 19, 고니시를 구원하러 순천으로 향하던 시마즈의 수군 부대를 공격한 것이 바로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가 된 노량 해전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시마즈 부대를 크게 이겼지만, 이순신은 이날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으로 빠져나가면서 사실상 정유재란은 끝이 났다. 이순신은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선을 구하며 두 번 다시 조선의 바다를 왜적에게 내주지 않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일부러 이렇게 하려해도 안 되겠지. 우리의 삶은 영화보다 더 극적인 경우가 많다.

 


 

내가 저자라면

 

l  목차에 대하여

주제에 따라 소제목과 순서를 재구성했다. 한 주제 아래 같은 내용을 묶어서 독자가 내용별로 <난중일기>에 다가갈 수 있게한 시도는 새로웠지만 별로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한 소제목에 비슷한 내용이나 심정의 일기가 반복적으로 나와서 지루하기도 하고 감정 및 사건 진행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또 날짜가 왔다갔다해서 좀 뒤죽박죽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냥 날짜순서대로 하는게 좋았을 것 같다.  


l  보완이 필요한

그냥 날짜순서대로 하는게 좋았을 것 같다.


l  책의 장점

-      한 사람의 일기가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역사적 유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일기의 주인공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평범한 사람의 일기나 가계부도 제대로 기록할 경우, 당시의 트렌드, 시대상이나 물가를 보여주는 기록이 되기도 한다.

-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했다. 어려운 한자 투가 아니라 쉬운 한글, 게다가 실제 일기를 쓴 것처럼 번역해서 쉽게 읽힌다.

-       매 장 마지막 부분에 상황 설명이 있어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l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솔직하게 쓸 수 있었을까? 매일 어떤 공무를 처리했고, 누가 왔으며 누구에게 상벌을 내렸다 정도만 기록했을 것 같다. 인물에 대한 평, 특히 원균에 대한 평은 너무 솔직하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의 감정도 무관이 쓴 글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섬세하고 감정이 살아있다. 공무에 관한 부분을 보면 역사와 전쟁에 관한 기록을 적어 후손에게 남기기 위한 공적인 글로 보이는데, 인물에 대한 솔직한 평이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 부분을 보면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쓴 글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아마도 나라면 분리해서 작성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난중일기>는 공적인 기록으로서의 사적 가치는 있을지언정, 인간 이순신을 알기는 어려웠겠지. 역시 나 같은 범인(凡人)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계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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