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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9일 15시 25분 등록

사기열전 1(91째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사마천 B.C. 145(?) ~ B.C. 86(?)

사마천은 제6대 황제 경제(景帝) 중원(中元) 5(기원전 145. 다른 주장도 있음)에 오늘날의 섬서(陝西) 성 한성(韓城)현에서 태어났다. 10살 무렵 고문(古文)을 깨우치고 10대 초부터 강남, 강북의 여러 지방을 두루 편력한 뒤 산동과 하남을 거쳐 수도 장안에 들어가 낭중에 임명됐다. 이후 황제의 명으로 사천 지방에서 운남의 곤명까지 여행을 하는 등 중국 각지를 돌며 특히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많은 곳을 방문했다. 이러한 경험이 [사기] 편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결코 문헌자료만 파고드는 책상물림의 역사가가 아니었다.

 

기원전 110년 무제가 천지(天地)에 제를 거행하는 봉선(封禪) 의식을 위해 태산을 방문했을 때, 천문역법을 관장하고 황실 전적을 관리하는 태사령(太史令) 벼슬에 있던 아버지 사마담은 낙양 땅에 머물다가 봉선 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를 깊이 한스럽게 여긴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운남에서 급히 돌아온 사마천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역사서 편찬의 꿈을 잇고자 결심했다. 3년 상을 치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황실의 장서를 이용하여 역사서 편찬에 착수했다. 기원전 99년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마천은 이릉의 입장을 변호하다가 투옥되어 이듬해 궁형, 즉 생식기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았다.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사마천은 그러나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굳건히 하며 편찬 작업에 전념했다.

 

사마천은 각 왕조의 역사를 최전성기에서 쇠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중도에 일시적인 중흥기가 있기는 하지만 성()에서 쇠()로 하강선을 그린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탁월하고 영웅적인 인물이 나라를 세우고, 우둔하고 무능력한 황제에 의해 쇠락의 길을 걷다가 폭군에 의해 멸망하는 패턴이 하(), (), (), 이른바 삼대(三代) 왕조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왕조 성쇠의 요인이 황제 한 사람의 도덕적 기질과 능력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사마천은 하, , 주의 정치와 문화의 특질을 각각 충(), (), ()으로 파악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퇴락하면서 그 각각이 야(. 조야함), (. 미신), (. 경박함, 허식) 등으로 변했다고 판단했다.

 

요컨대 하는 충에서 야로, 은은 경에서 귀로, 주는 문에서 시로 변화한 역사라는 점에서 그 내용은 달라도 패턴은 같다고 본 것이다. 결국 전() 왕조의 퇴락하고 부패하는 정치와 문화 상황을 다른 이념으로 대체시킴으로써 극도의 쇠락에서 극도의 번성으로 극적 전환을 이루는 것이 왕조 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관에 따른다면 왕조의 교체는 단순한 왕가(王家)의 교체로만 볼 수는 없으며 정치와 문명의 양식과 본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역사적 요청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이 된다. 사마천은 삼대(三代) 순환설과 함께 문질(文質) 교대설도 언급했다. (문화적 꾸밈, 세련됨)과 질(조야함, 질박함)이라는 상반되는 특질이 교대로 출현한다는 것으로, 문명의 전체적 특성 전환을 말한다는 점에서 삼대 순환설과 궤를 같이한다. 역사를 문명적 순환으로 파악하는 이러한 역사관은 이후 중국의 역사관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김원중

역자 김원중은 성균관대학교 중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만 중앙연구원과 중국 문철연구소 방문학자와 대만사범대학 국문연구소 방문교수, 건양대 중문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학진흥사업위원장과 문화융성위원회 인문특위 위원, 한국중국문화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동양의 고전을 우리 시대의 보편적 언어로 섬세히 복원하는 작업에 매진하여, 고전 한문의 응축미를 담아내면서도 아름다운 우리말의 결을 살려 원전의 품격을 잃지 않는 번역으로 정평 나 있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최고의 번역서인 사기 열전을 비롯해 사기 본기, 사기 표, 사기 서, 사기 세가등 개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사기전체를 완역했으며, 그 외에도 삼국유사, 논어, 명심보감, 손자병법, 한비자, 정관정요, 정사 삼국지(4), 당시, 송시20여 권의 고전을 번역해 냈다. 또한 고사성어 역사문화사전, 한문 해석 사전, 중국 문화사, 중국 문학 이론의 세계등의 저서를 출간했고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2011년 환경재단 ‘2011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학계 부문)에 선정되었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역자 서문

사기중에서도 열전70권은 주나라 붕괴 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5)

예나 지금이나 전쟁만큼 큰 죄악은 없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에는 전쟁이 필요악이었다. (6)

화식 열전은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가며 큰돈을 버는 방법을 언급하고 있는데, 현대판 경영학 원론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놀라운 탁견으로 가득하다. (8)

과연 그 옛날엔 어떤 방법을 이야기하는 지 궁금하다.

각주는 독자가 원전을 읽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원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9)

역자의 생각이 나와 같다.

해제

이 책은 중국 역사의 전범으로 일컬어지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11)

많은 책들이 출처를 밝히는데 사기가 많았던 이유가 있었구나.

기전체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시대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행적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중대한 사건을 서술하고, 제왕이나 제후를 보좌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13)

사마천은 아버지와 함께 무제 곁에서 절대 권력자의 영토 확장 야욕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17)

상고 문헌은 전적으로 경전에 기댔고, 당대 자료는 대체로 문헌 검증과 현지 답사 여행 등을 통한 체험에서 나왔다. (18)

그 시대의 고증을 거쳤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마천은 열전에서 인물에 대해 나열식으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그 인물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특징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20)

또한 사마천은 자신이 입수한 문헌 가운데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도덕적 기여도가 높은 인물들을 먼저 고르고 거기에 평가를 더했다. 독자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화를 입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20)

이른바 권선징악으로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기 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21)

이런 시각으로 역사서를 썼기에 그 시대를 살다간 보통 사람들에 대해 잘 알 수 있고 시대적 배경도 알 수 있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24)

게다가 사기가 구십 년 늦게 나온 반고의 한서와 달리, 도가와 병가, 잡가 등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한나라의 국가 이념인 유학에 배치된다는 점도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배척되는 요인이 되었다. (25)

시대에 반하는 내용이 오히려 후대엔 중요한 기록으로 재평가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 사기가 후대에 24의 필두로 거론되게 된 것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무제까지 이르는 유일한 통사체 역사서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이다. (27)

우리도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있다.

 

1. 백이 열전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 백이와 숙제의 고매한 인품을 허유, 무광과 대조 또는 대비하면서 그려 나간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 알려진 게 공자의 칭찬에 의한 것임을 언급하면서 칠십 열전의 인물이 자신의 붓끝을 빌려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59)

엄청난 자부심이다. 사마천 본인 스스로 이 역사서의 의미를 그만큼 크게 두고 있다는 것이겠지.

 

왜 유가 경전에는 허유와 무광 등의 사적이 없을까?

요 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하자, 허유는 받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말을 들은 것을 부끄러워하며 달아나 숨어 버렸다. 하나라 때에는 변수와 무광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세상 사람의) 추앙을 받을까? (61)

사마천은 허유와 무광이 세상 사람의 추앙을 받음에도 경전에 없는 이유를 밝히려고 하는 가보다.

 

백이와 숙제는 정말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나는 백이의 심경이 슬펐을 것으로 본다. (62)

사마천은 백이, 숙제가 공자가 얘기한 것처럼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기보다 슬퍼보였다는 거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지조를 지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다. (63)

신농, , 하나라 때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 (64)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65)

사마천이 살던 최근이다. 지금이라고 봐도 이해가 된다. 사마천은 백이, 숙제, 공자의 제자 안연까지 힘겹게 살았던 것을 비유했다. 아마 거기에 본인도 넣고 싶었을 거다.

 

파리도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 길을 갈 수 있다

세상이 다 흐려졌을 때 비로소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 드러난다. 어찌하여 (세속 사람들은) 그토록 부귀한 사람을 중시하고, 깨끗하고 맑은 사람을 하찮게 여길까? (66)

이 책은 사마천의 해설이 주가 된다. 그러면서 많은 의문문을 넣었다.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이 덕행을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더라도 덕행과 지위가 높은 선비에 기대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67)

본인이 덕행과 지위가 높은 선비라는 거겠지. 자신이 그런 사람들을 널리 알리겠다는 거다.

 

2. ·안 열전

이 편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관중과 안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대적으로 백여 년이나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을 한 열전에 실은 것은 이들이 세운 탁월한 공적 때문이다. (69)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71)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72)

대단한 사람이다.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아랫자리에 있었다니. 아무리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73)

관중은 정치를 하면서 재앙이 될 수 있는 일도 복이 되게 하고, 실패할 일도 돌이켜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해를 분명하게 따지고 득실을 재는 데 신중히 하였다. (73)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아는 게 정치의 비책이다.” (74)

관중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결국 포숙은 이를 알아본 것이라는 거다. 둘 다 대단하다.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낸다

제가 죄인의 몸일 때 옥리들은 저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깨달은 바가 있어서 보석금을 내어 저를 구해 주었으니 이는 저를 알아준 것입니다. 저를 알아주면서도 예의가 없다면 진실로 죄인의 몸으로 있는 편이 낫습니다.” (75)

월석보가 안자에게 한 말이다. 보석금을 주고 구해줬음에도 모른척하고 내실로 들어가 버린 안자에게 차라리 죄인의 몸이 낫다고 한다.

 

3. 노자·한비 열전

이 편은 도가와 법가의 학술원류를 다루고 있는데, 실제로 한나라 초기에 겉은 도가요 안은 법가이며 부제도 겉은 유가요 안은 법가였으니 진나라와 일관된 맥락을 보인다. (79)

사마천의 도가와 법가를 두루 다루는 내용 때문에 그 당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면모를 볼 수 있는 편이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둔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리가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다북쑥처럼 떠돌이 신세가 되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81)

공자의 물음에 노자가 답하는 내용이다. 공자 잡는 노자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라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83)

 

관리가 되느니 더러운 시궁창에서 놀리라

장자는 빼어난 문장으로 세상일과 인간의 마음을 살피고 이에 어울리는 비유를 들어 유가와 묵가를 공격했다. (84)

 

형명지학의 대가 신불해

신불해의 학문은 황제와 노자에 근본을 두고 형명을 내세웠다. (85)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

한비는 날 때부터 말을 더듬어 유세는 잘 못했으나 글을 잘 지었다. (85)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에 의하면 언어지능이 있다. 그 언어지능엔 말하기와 글쓰기로, 둘 다 발달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발달되기도 한다. 한비는 글쓰기의 언어지능이 발달한 거다. 그에 반에 난 말하기의 언어지능이 발달했다. 언어지능이 발달했으니 글쓰기의 언어지능도 욕심이 난다.

한비는 유학자는 글로 나라의 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협객은 힘으로 나라의 금령을 어긴다고 하였다. (86)

군주에게 허물이 있을 때 유세자가 주저 없이 분명하게 바른말을 하고 교묘한 주장을 내세워 그 잘못을 들추어내면 그 몸은 위태로워진다. (87)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 줄 아는 것이다. (88)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91)

 

4. 사마 양저 열전

이 편은 사마(군사 업무를 책임짐)를 지낸 양저를 다루었다. 사마 양저는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 대부로 재상 안영의 추천을 받아 장군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분에 비해 높은 자리를 부여받은 것이었다.

사마천은 병기의 인물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각양각색의 전례를 기록하면서, 뛰어난 장수는 기술로써 전쟁을 치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97)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장수가 군영에 있을 때에는 왕의 명령도 받들지 않을 수 있소.” (101)

대단한 배짱이다. 군법에 아무리 그리 되어있어도 왕명을 받지 않다니.

 

병사들을 감동시킨 용병술

양저는 병사들의 막사, 우물, 아궁이, 먹거리를 비롯하여 문병하고 약을 챙겨 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몸소 보살폈다. 또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재물과 양식을 모두 병사들에게 풀고, 자신은 병사들 중에서도 몸이 가장 허약한 병사의 몫과 똑같이 양식을 나누었다. 이로부터 사흘 뒤에 병사들을 다시 순시하자 병든 병사들까지도 모두 앞다투어 싸움터로 나기기를 바랐다. (102)

리더란 카리스마(결단력)만 보고 따르지 않는다. 리더로서의 베품과 포용이 없으면 카리스마는 횡포일 뿐이다. 양저는 두 가지를 모두 겸비한 사람이다.

 

5. 손자·오기 열전

이 편은 세 명의 뛰어난 병법가 손무, 그보다 백여 년 뒤의 후손 손빈, 오기의 이야기에 방연을 덧붙인 것이다.

손무, 손빈, 오기 세 사람은 춘추전국시대의 저명한 군사가이자 병법가로서 그들의 저적은 후세에 전해진다. (105)

그 유명한 손자병법이다. 사마천은 병법이 아닌 사람에 초점를 맞추었을 테니 더 기대된다.

 

군령을 따르지 않는 병사에게는 죽음뿐이다

왕께서는 한갓 이론만 좋아하실 뿐 그것을 실제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109)

앞에 나온 양저와 비슷하다. 아니 더 대단하다. 왕이 아끼는 궁녀 2명의 목을 베고도 저리 당당할 수 있다니. 왕이 경솔한 것도 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노려라

방연은 손빈의 두 다리를 자르고 얼굴에 글자를 새겨 숨어 살게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아려지지 않도록 했다. (110)

어지럽게 엉킨 실을 풀려고 할 때는 주먹으로 쳐서는 안 되며, 싸우는 사람을 말리려고 할 때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찔러 형세를 불리하게 만들면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111)

방연이 시기해서 손빈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 오히려 다른 나라의 군사까지 되었다. 방연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다.

 

아내를 명성과 바꾸다

제나라 사람들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에서는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여자이므로 의심을 품었다. 그러자 오기는 이름을 얻기 위해 자기 아내를 죽여 제나라 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114)

아무리 병법이 뛰어나도 이건 아니다.

오기는 탐욕스럽고 여색을 밝히지만 병사를 다루는 일만은 사마양저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115)

나라의 보배는 험난한 지형이 아니라 임금의 덕행이다

문후는 오기가 병사를 다루는 일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청렴하고 공정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서하 태수로 삼아 진나라와 한나라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116)

이 글을 보면 집안 식구는 챙기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챙겼다는 거다. 그럼 타고난 군인인건가.

 

남보다 윗자리에 있는 이유

왕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신하들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백성은 그분을 믿지 못하고 있소. 이런 때에 재상 자리를 당신에게 맡기겠소, 아니면 내게 맡기겠소?”

본인이 오기보다 낫다는 말을 당연하다는 듯 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어지러운 때라 그런지 고위직을 오랜 기간 유지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죽은 시체 위에 엎드린 오기

옛말에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꼭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121)

 

6. 오자서 열전

오자서는 춘추시대 오나라의 대부로 합려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뒤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부차에게는 월나라와 화친을 맺지 말고 멸망시켜 뒤탈을 남기지 말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오나라 왕은 오자서를 헐뜯는 간사한 신하의 말만을 듣고 그를 멀리하더니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123)

 

소인배의 참언을 믿고 친자식을 내친다

왕께서는 어찌 참소를 일삼는 하찮은 신하 때문에 골육 같은 자식을 멀리하려고 하십니까? (126)

제대로 된 왕이라면 처음부터 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들의 부인으로 점지한 사람을 자신의 부인을 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간신이 옆에 있을 수밖에.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안고 떠난다

나 역시 그곳으로 가더라도 끝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살기 위해서 나를 부르셨는데 가지 않았다가 나중에 원수도 갚지 못하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싫어서 가려고 한다.”

그러고는 오운에게 또 말했다.

너는 달아나거라. 너는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를 같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 죽음을 맞이하겠다.” (128)

 

때를 기다려라

오자서는 공자 광이 오나라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속셈이 있어, 아직은 나라 밖의 일을 이야기할 때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공자 광에게 전제라는 사람을 추천하고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지었다. (131)

때를 알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

 

오나라의 힘을 빌려 초나라를 깨뜨린다

수나라 사람들이 소왕을 죽이려고 했는데, 왕자 기가 소왕을 숨겨 둔 채 자신이 소왕을 대신해 죽으려고 하였다. 수나라 사람들이 점을 쳐 보니 오나라에 소왕을 넘겨주는 것은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오나라의 요청을 거절하고 소왕을 내주지 않았다. (134)

이런 문제를 점을 쳐서 결정하다니. 그 당시는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지금으론 이해가 안 된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당신의 복수는 너무 지나친 것 같소. 나는 사람이 많으면 한때 하늘도 이길 수 있지만, 일단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깨뜨릴 수도 있다.’라고 들었소. 일찍이 평왕의 신하가 되어 평왕을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보이니, 어찌 이보다 더 천리에 어긋난 일이 있겠소?” (135)

 

악의 씨가 자리지 못하게 하라

월나라 왕은 아무리 힘든 고통도 잘 견뎌 내는 사람입니다. 지금 그를 없애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나라 왕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태재 백비의 계책에 따라 월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137)

충신의 직언은 멀리하고 간신의 간언은 따르는 우매한 왕이다.

태재 백비는 이미 월나라 왕이 주는 뇌물을 여러 차례 받았기 때문에 월나라 왕을 유달리 좋아하고 믿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나라 왕에게 월나라 왕을 좋게 이야기하였다. 오나라 왕은 백비의 계책을 믿었다. (138)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하라. 아울러 내 눈을 빼내 오나라 동문에 매달아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라.”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140)

 

성공하면 충신이고 실패하면 역적이다

구 년 뒤에 월나라 왕 구천은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를 죽였다. 태재 백비도 자기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고 다른 나라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고 구천 자신과 내통하였다는 구실로 죽였다. (141)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원한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독은 정녕 심하구나! 임금이라도 신하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야 어떠하겠는가? ” (143)

7. 중니 제자 열전

기원전 500년부터 250년에 이르는 기간은 제자백가의 전성 시대이다. 당시 사상가들은 각국을 돌아다니며 유세를 하였고, 의기투합하여 봉건 제후의 고문이 되거나 외교관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위대한 지적 전개와 성과는 문화적 진보를 가져왔다.

이 편은 본래 공자의 제자 일흔일곱 명에 관한 내용을 실은 것으로서 공자세가와 자매편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인용된 말은 대부분 논어에 있는 것이다. (145)

 

공자의 제자들과 공자가 존경한 사람들

공자는 내 문하에서 학업에 힘써 육예에 통달한 사람은 일흔일곱 명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들은 모두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147)

일흔일곱 명이라니, 정말 많은 숫자다.

공자가 존경한 인물로는 주나라의 노자, 위나라의 거백옥, 제나라의 안평중, 초나라의 노래자, 정나라의 자산, 노나라의 맹공작 등이 있었다. (147)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즐거워하는 안회

안회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이며 공자보다 서른 살이 적었다.

안회는 스물아홉에 머리가 하얗게 세더니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자는 제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고 소리 내어 울면서 탄식했다. (148)

앞에서 사마천이 안회를 거론하며 어진 사람이 힘들게 살고 일찍 죽은 것이 하늘의 뜻인가 반문했었다.

 

효성스러운 민자건

그는 대부를 섬기지 않았으며, 옳지 못한 일을 한 군주의 봉록을 받지 않았다. (149)

 

덕행은 훌륭하나 몹쓸 병에 걸린 염경

공자는 그의 덕행을 칭찬했다. 백우가 문둥병에 걸렸을 때 공자는 문병을 갔다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을 잡으며 탄식했다. (150)

논어를 읽어봐서 다 아는 내용이다.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으면 제물로 쓸 수 있다

중궁의 아버지는 미천한 사람이었으나 공자는 이런 말을 했다.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제물로 쓰지 않으려고 하여도 어찌 산천의 신들이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151)

 

사람의 성격에 따라 조언도 달라야 한다

자화가 공자의 대답이 다른 것을 의아해 하며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어째서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 (152)

 

좋은 말을 듣고 실행하지 못했는데 또 좋은 말을 들을까 두렵다

그는 한때 공자를 업신여기며 포악한 짓을 했다. 그러나 공자가 예의를 다해 조금씩 바른길로 이끌어 주자, 나중에는 유자의 옷을 입고 예물을 올리고 공자의 문인들을 통해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152)

자로는 나보다도 용맹을 더 좋아하지만 그것을 적절히 쓰지 못한다. 이 때문에 자로는 제명에 살다가 죽기 어려울 것이다.” (153)

공자가 여러 사람을 만나봐서 이렇게 확언을 할 수 있는 걸까. 공자가 자로를 좋아하진 않은 것 같다.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지 않는다

공자는 죽은 자로를 그리며 탄식했다.

내가 자로를 제자로 삼은 뒤로 남의 험담을 듣지 않았거늘.” (156)

왜 남의 험담을 듣지 않았다는 걸까. 자로 얘기를 들을 까봐 그런 건가.

 

자식은 태어난 지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난다

재여는 참으로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 년상은 세상의 합의된 예의이다.” (157)

공자가 지금에 와서 본다면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하겠다. 삼오제를 지내는 것으로 상을 끝내는데... 자식이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손이 그만큼 안 간다는 건가?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 (158)

중니 제자열전은 공자의 육예의 통달한 일흔일곱 명 제자를 다루는 내용인 줄 알았는데 제자로 맘에 들지 않은 사람도 다루고 있다.

종묘의 제사 그릇 같은 자공

자공은 말재주가 뛰어났지만 공자는 늘 이 점을 꾸짖어 경계시켰다. (158)

자공이 물었다.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160)

 

한 번 움직여 세상의 판도를 새로 짠다

남에게 보복할 뜻이 없으면서도 그런 의심을 받는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고, 남에게 보복할 뜻이 없는데 이것을 알아차리게 한다면 이는 위태로운 일입니다. 또 계획을 옮기기도 전에 새어 나간다면 이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일을 꾀하는 데 큰 걱정거리입니다.” (165)

자공아 한 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십 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68)

그런데 왜 공자는 자공에겐 노나라를 구하라 나서는 걸 허락했을까.

그는 남의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덮어 주지는 못하였다. (169)

남을 칭찬 안 하는 게 더 낫지 잘못을 덮어 주지 못하는 게 더 안 좋은 것 같긴 하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랴

전에 저는 선생님께 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사람을 부리기 쉽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169)

도를 배우는 것 자체가 어렵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공자는 자하에게 말했다.

너는 도에 힘쓰는 군자의 선비가 되어야지, 명성을 좇는 소인의 선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171)

 

많이 듣고 삼가면 실수가 적다

많이 보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172)

행동에 뉘우침이 적다는 건 행동을 뉘우치지 않게 조심하라는 거겠지.

 

명망과 통달의 차이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173)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다

나라에 도가 제대로 시행되는데도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다만 녹이나 먹고 있고, 나라에 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데도 벼슬자리에 연연하여 녹이나 먹고 있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이라는 것이다.” (176)

 

말만 잘하는 자를 미워한다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는데, 어찌 꼭 글 읽는 것만을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꾸짖었다.

그래서 나는 말만 잘하는 자를 미워한다.” (181)

위의 질문하고 답이 안 맞는 것 같다.

 

어진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살펴보아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183)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번지가 인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184)

공자는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 듯하다.

 

얼굴이 닮았다고 하여 공자가 될 수는 없다

제자들은 유약의 얼굴이 공자와 닮았다고 하여 그를 스승으로 추대하고 공자를 모시듯이 섬겼다. (185)

웃긴다. 얼굴이 닮았다고 스승으로 추대하다니...

 

군자는 가난한 사람만 돕는다

자화는 제나라로 갈 땐 살찐 말을 타고 좋은 갖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군자는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고 부자에게는 보태 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186)

자기 신분에 가마를 타고 다니지 않는 것은 안 돼서 가마를 팔 수 없다며 아들이 죽었을 때도 잘 치러주지 않았다고 했던 공자가 생각난다. 이 경우와는 다른 건가?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예이다.” (187)

유가가 법가에게 공격당했던 것 중 하나가 자식이 죄를 지으면 숨겨주어야 한다는 유가의 옳음이었다.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숨겨주는 것, 남을 잘못을 덮어주는 것을 높이 치는 거다.

 

8. 상군 열전

상군은 중국 선진 시기 법가를 대표하는 정치가 상앙을 말한다.

상앙은 사회 개혁법을 통하여 봉건적인 옛 제도를 철저히 없애고 군주의 절대 권력 확립에 필요한 혁신적인 조치를 강구하였다.

법가 사상 자체가 지식인을 탄압하는 전제주의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상앙의 사상은 지식인과 관료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는 거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사마천도 그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혹평을 했다. (193)

 

죽음의 문턱에 있는 자의 말은 믿을 수 없는가?

왕께서 당신 말을 듣고도 저를 임용하지 않는데, 또 어찌 당신 말을 들어 저를 죽이겠습니까?”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야 성공적인 유세를 할 수 있다

제가 공에게 오패가 나라를 다스린 방법을 설명드렸는데 이것을 쓸 만하다고 생각하셨군요. 그러면 꼭 한 번만 더 뵙도록 해 주십시오. 이제 저는 공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습니다.” (198)

옛것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남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성인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며 구태여 옛것을 본뜨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옛날의 예악 제도를 좇지 않았습니다.“ (199)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입니다.” (200)

옛날 법을 반대한다고 해서 비난할 것도 아니고 옛날 예법을 따른다고 하여 칭찬할 것도 못 됩니다.” (200)

새로 만든 법은 믿음 속에서 꽃필 수 있다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오십 금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겨 놓자 즉시 그에게 오십 금을 주어 나라에서 백성을 속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고 나서 새 법령을 널리 알렸다. (202)

새 법령이 엄격한 법이었음에도 잘 지켜졌을까 싶다.

 

법은 위에서부터 지켜야 한다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위에서부터 이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법에 따라 태자를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군주의 뒤를 이을 태자를 처벌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태자의 태부로 있던 공자 건의 목을 베고 태사 공손고의 이마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 날부터 진나라 백성은 모두 새로운 법령을 지켰다. (203)

법에 대한 것은 요즘도 각각 의견이 다르다. 법이 너무 약해서 그렇다. 더 강하게 해야 한다. 일견 맞기도 하다.

 

뱃속에 있는 질병을 없애라

위나라 공자 앙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만나 맹약을 맺고 나서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때 위앙은 미리 숨겨 두었던 병사들에게 위나라 공자 앙을 덮치게 하여 사로잡고 위나라 군대를 쳐서 모조리 깨뜨리고 진나라로 돌아왔다. (205)

위나라 혜왕은 이제야 자기가 위앙을 등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돌이켜 자기 마음속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총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을 명이라고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이라고 합니다.” (207)

당신은 왕의 명령보다도 깊게 백성을 교화시키고 백성은 왕이 명령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당신이 하는 일을 본받습니다.” (209)

당신의 파멸은 한 발을 들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깐 사이에 다가올 것입니다.” (210)

군주의 총애를 받고 있던 태감을 이용하고, 자리에 오른 뒤에는 공자 건을 처형하고, 위나라 장군 앙을 속이고, 조량의 충언을 따르지 않은 것도 그가 덕이 부족한 인물임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212)

법가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 있다. 강력한 법 집행이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그 당시 시대적으론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9. 소진 열전

내용상 이 편은 소진이 합종에 성공하여 잠시나마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되어서 혁혁한 사적을 세우는 부분과, 소대와 소려가 연나라를 위해 모사를 꾸며 제나라를 깨뜨리는 사적을 기록한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세상에서는 소진을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의 신하로 일컫지만, 합종에 성공하여 진나라 병사가 십오 년 동안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215)

모든 역사적 사건은 그 시대에서도 중요하지만 후대에 어떻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지느냐가 더 중요하다.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은 좋게 평가받지 못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이 열전으로 남겼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다

일 년쯤 되어서야 (유세할)상대방의 심리를 알아내어 설득하는 방법을 터득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217)

과연 이런 방법이 있을까.

당시 진나라는 상앙을 죽인 뒤라서 유세하며 변론하는 선비들을 싫어하여 소진을 등용하지 않았다. (218)

 

천 리 밖의 근심을 버리고 백 리 안의 근심을 해결하라

당신이 반드시 합종을 통하여 연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면 과인은 온 나라를 들어 당신 견해에 따르겠소.“(220)

합종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찌 어두운 곳에서 큰일을 결정하랴?

백성을 편안히 하는 근본적인 계책은 친하게 사귈 만한 나라를 고르는 데 있습니다.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알맞게 고르면 백성은 안정될 수 있고,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잘못 고르면 백성은 안정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221)

설득하는 방법이 풍수지리를 익혀 각 나라별 지리적 위치로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백성이 나라를 고르는 것이 가능한 시기였나.

현명한 군주는 밖으로는 적의 강함과 약함을 헤아리고 안으로는 병사의 자질이 뛰어난지 모자란지를 헤아려, 두 군대가 서로 싸울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이기고 지는 것과 죽고 사는 관건이 이미 가슴속에 있게 됩니다.” (224)

여섯 나라가 합종하여 함께 진나라에 맞서면 진나라 군대는 틀림없이 감히 함곡관으로 나와 산동을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226)

합종이 힘을 합하여 모이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닭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

왕의 땅은 다함이 있지만 진나라의 탐욕스러운 요구는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228)

설득을 제대로 익힌 것이 맞긴 하다.

 

싹이 돋아날 때 베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

위나라는 천하의 강대한 나라이고 왕께서는 천하의 현명한 왕입니다.” (230)

설득의 시작이다. 상대를 세우고 결국 자신의 말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왕이라는 거다.

주서에서는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물어온다면 당연, 말한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다.

 

과장된 몸짓 속에 가려진 진실을 보라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제나라는 멀리 치우쳐 외진 곳에서 바다에 의지하고 있으며, 길이 끊긴 동쪽 변두리 나라이기 때문에 여태까지 남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소.” (234)

왕들이 말이 비슷하다. 본인의 어리석음을 밝히며 소진의 말을 따른다.

 

우환이 닥친 뒤에는 걱정해도 소용없다

신이 듣건대 (모든 일은)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스리고 (해로운 일은) 일어나기 전에 대책을 세워 막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환이 닥친 뒤에 걱정하면 이미 늦습니다.” (235)

대체로 신하된 자로서 자기 군주의 땅을 쪼개 밖에 있는 강한 호랑이 같은 진나라와 사귀어 천하를 침략하게 하고, 마침내 진나라 때문에 걱정거리가 생겨도 그 재앙을 돌아보지 않으며, 밖으로 강대한 진나라의 위세를 끼고 안으로 자기 군주를 위협하여 토지를 나누어 주도록 요구하는 것은 나라를 등지고 충성하지 않는 일입니다.” (236)

각 나라의 왕을 만나 현명한 왕은 어떻게 했으며, 만일 합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합종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나라마다 달리 설득했다. 1년간 연구한 사람답다.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이렇게 하여 여섯 나라는 합종하여 힘을 합치게 되었다. 소진은 합종 맹약의 우두머리가 되고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였다. (238)

한 나라의 재상이 되기도 힘든데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원수를 버리고 든든한 친구를 얻어라

신이 듣건대 굶주린 사람이 굶주리면서도 오훼라는 독초를 먹지 않는 까닭은 그것으로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굶어 죽는 것과 똑같은 해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40)

신이 듣건대 옛날에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들은 화를 복으로 바꾸고 실패를 기회로 삼아 성공했다고 합니다. 왕께서 진실로 신의 계책을 들으려 한다면 즉시 연나라의 성 열 개를 돌려주십시오. 연나라는 이유 없이 성 열 개를 돌려받게 되면 틀림없이 기뻐할 테고, 진나라 왕도 자기 때문에 연나라의 성 열 개가 되돌려졌음을 알면 또한 틀림없이 좋아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원수를 없애고 돌처럼 단단한 친구를 얻는 길입니다.” (241)

충신만이 죄를 짓는가?

소진은 여기저기에 나라를 팔아먹고 다니면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신하이니 앞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242)

이런 소리가 나올 만하다.

 

사람을 속여 원수를 갚는다

소진은 연나라에서 죄를 지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 제나라로 망명했다. (245)

신이 죽으면 신을 거열형으로 다스려 시장 사람들에게 도려 보이시고 소진이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라고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신을 죽이려던 자를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246)

소진은 죽는 순간까지도 머리를 썼다. 왠지 불쌍하다.

 

소진이 남긴 사업을 이은 소대와 소려

소진의 동생은 소대이고, 소대의 동생은 소려이다. 이 두 사람은 형의 성공을 보고 모두 학문에 정진하였다. (246)

신은 자주 싸우면 백성이 피로해지고 오래 싸우면 병사들이 지친다고 들었습니다.” (248)

자기의 말이 아닌 다른 이의 말에 빗대어 설득한다.

대체로 교만한 군주는 반드시 이를 좋아하고 멸망하는 나라의 신하는 반드시 재물을 탐한다고 합니다.” (249)

 

자주색 비단이 흰색 비단보다 열 배 비싸다

제나라 사람들의 자주색 비단은 질이 나쁜 흰색 비단을 물들인 것이지만 그 값은 열 배나 비싸고,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회계산으로 쫓겨났지만 오히려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재패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일입니다.” (252)

사마천이 소진 열전을 쓴 것은 소진과 형제들의 유세가 그 당시 나라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대체로 진나라와 한편이 되는 것은 중요한 외교이고, 제나라를 치는 것은 정당한 이익입니다. 중요한 외교 사무를 진지하게 처리하고 정당한 이익에 힘쓰는 것은 성왕의 사업입니다.” (254)

소진 형제의 말을 계속 보니 왕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본인들의 안위를 유지하려는 것 같다.

 

정의로운 행동만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진나라는 천하를 얻는 데 정의를 따르지 않고 폭력을 썼습니다. 진나라는 폭력으로 정치를 하면서 천하에 공개적으로 경고했습니다.“ (255)

소진 형제가 진나라를 제외한 나라들에게 합종하라고 한 이유가 이것일까?

 

10. 장의 열전

이 편은 연횡가들의 전기로서 장의, 진진, 서수 세 사람의 사적을 수록하고 있다. 합종파의 대표 인물이 소진이라면 장의는 연횡파의 대표 인물이므로, 합종파와 연횡파의 인물들을 합쳐 각각의 열전을 만들면서 두 사람으로 대표성을 갖게 한 것이다. (263)

합종파에 대해 연횡파는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다.

 

작은 이익을 탐내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

나 대신 소 선생에게 소군이 살아 있는 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소군이 있는 한 내가 감히 무엇을 할 수 있겠소.’하고 전해 주시오.“ (268)

 

싸울 때는 명분과 실속을 모두 얻어야 한다

신이 듣건대 명분을 다투는 자는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을 다투는 자는 저잣거리에서 다툰다고 합니다.” (270)

정치에서 중요한 것이 대의명분이다. 무슨 일을 할 때 명분이 있어야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깃털도 쌓으면 배를 가라앉힐 수 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끼리도 서로 재물을 다투는 일이 있는데, 간사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소진의 술책을 믿으려고 하니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음은 또한 명백합니다.“ (274)

진나라가 약화시키려고 하는 나라는 초나라뿐이고 초나라를 약화시킬 수 있는 나라는 위나라밖에 없습니다.” (275)

그래서 진나라만 견제하는구나.

또 합종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과정되게 큰소리만 쳐 믿을 만한 내용이 적습니다.” (275)

신이 듣건대 깃털도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중시하는 까닭

신은 근상과 사이가 좋은데 그는 초나라 왕의 부인인 정수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초나라 왕은 정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줍니다.” (280)

부인이나 첩의 청을 잘 들어주었나보다. 정치적인 것까지.

 

호랑이와 양은 적수가 못 된다

합종에 참가하는 나라들은 양떼를 몰아 사나운 호랑이를 공격하는 꼴과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와 양은 서로 적수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왕께서는 사나운 호랑이와 손잡지 않고 양떼 편에 섰습니다.” (282)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말을 부풀려 꾸미고 거짓말로 임금의 절개를 높이 추켜올리면서 이로운 점만 말하고 해로운 점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은 진나라의 공격을 받는 재앙을 불러오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282)

합종과 연횡가 사람들이 서로를 헐뜯는다. 서로 마찬가지다.

 

달콤한 말은 나라를 망친다

산동의 군사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싸우지만, 진나라 군사들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맨발에 어깨를 드러낸 채 적진으로 뛰어들어 왼손으로는 적군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오른쪽 옆구리에는 포로를 잡아 낍니다.” (286)

묘사대로 상상해보니 진나라 군사들은 사람이 아닌 듯하다.

 

한때의 이익에 끌려 백대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는다

합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붕당을 만들어 서로 두둔하면서 합종하는 일을 옳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289)

연횡가에선 끊임없이 합종을 주장하는 유세가들을 비난한다.

비록 전쟁에서 이겼다는 명성은 얻었지만 실제로는 나라가 망했습니다.” (289)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보다 나라의 존재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오른팔을 잘리면 싸울 수 없다

왕께서 합종을 신뢰하는 것은 소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제후들을 현혹시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291)

 

사람 됨됨이는 그 주위 사람이 제대로 안다

노비가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팔리면 좋은 노비입니다. 소박 맞고 쫓겨 온 여자가 그 마을에서 다시 결혼한다면 좋은 아내입니다. 지금 신이 자기 임금에게 충성스럽지 않다면 초나라도 어떻게 신을 충성스럽다고 여기겠습니까? 충성을 다해도 버림받으려 하는데 신이 초나라로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299)

 

병들었을 때는 고향이 가장 그립다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가 싸움을 벌인 지 한 해가 넘도록 해결이 나지 않았다면 큰 나라는 타격을 입고 작은 나라를 멸망할 것입니다. 타격 입은 나라를 치면 한꺼번에 둘을 얻는 이득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변장자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것과 같은 일입니다.” (3030

오히려 두 나라의 싸움을 지켜보다 쉽게 이기는 싸움을 하는 거다. 자꾸 볼수록 합종과 연횡가가 둘 다 치사하고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자기보다 나은 자를 밟고 일어선다

삼진에는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한 유세가가 많았다. 합종론과 연횡론을 주장하여 진나라를 강하게 만든 자들은 대체로 모두 삼진 사람이다. 장의가 일을 꾸민 것은 소진보다 더 심한 데가 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소진을 더욱 미워하는 까닭은 그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장의가 그의 단점을 부풀려 들추어내고 자신의 주장을 유리하게 하여 연횡론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두 사람은 참으로 나라를 기울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305)

합종과 연횡가를 모두 비중 있게 다루지만 저자는 둘 다 좋게만 본 것은 아니다.

 

11. 저리자·감무 열전

전국시대 진나라의 대표적인 종횡가의 면모를 보인 사람으로는 저리자, 감무, 양후, 사마조, 백기, 왕전, 왕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진시황이 여섯 나라를 통일하기까지 매우 큰 공을 세운 자로는 단연 저리자와 감무를 꼽을 수 있다.

진나라 속담에 힘은 임비요, 지혜는 저리자.‘ 라는 말이 있듯이 저리자는 동쪽의 여섯 나라 사이에 싸움을 붙여 진나라가 가만히 않아서 그 이익을 챙기도록 하였다. (307)

 

지혜주머니라고 불린 저리 자

무왕은 장의와 위장을 내쫓고 저리자와 감무를 좌승상과 우승상으로 삼았다. (309)

호연은 포읍에서는 금을 받고 위나라에서는 저절로 귀한 신분이 되었다. (312)

지혜주머니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일화에선 전혀 알 수 없다. 오히려 호연에게 당한 것 아닌가?

 

아들이 살인했다는 말을 듣고 북을 내던진 어머니

어머니는 어진 증삼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세 사람이나 그를 의심하자 정말인가 싶어 겁을 먹었습니다. 지금 신은 증삼처럼 어질지 못하고, 왕께서 신을 믿는 마음도 증삼의 어머니가 아들을 믿는 마음만 못합니다. 또한 신을 의심하는 자가 어디 세 사람뿐이겠습니까? 신은 왕께서 북을 내던진 증삼의 어머니처럼 신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314)

시기적으로 혼란스러워서인지 서로 헐뜯고 속이는 것이 다반사였나 보다. 왕도 현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겠다.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수레를 뒤엎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힘을 합쳐 다시 한나라를 친다면 한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라가 멸망하면 공중치는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라도 진나라에 맞설 것입니다.” (317)

지금 공이 한나라와 친하게 지냄으로써 초나라에 대비한다면, 이것은 외부에서 사람을 추천할 때 자기 원수라도 쓸 만한 사람이면 꺼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319)

유세자들이 왕을 들었다 놨다 한다. 계속 읽으니 왕이 답답하다.

감무는 위나라의 마음을 얻어 제나라를 치려 하고, 공손석은 한나라의 마음을 얻어 제나라를 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공은 의양을 공략하여 공을 세웠으니 초나라와 한나라의 마음을 이쪽으로 끌어들여 안심시키고, 제나라와 위나라의 죄를 꾸짖으십시오. 이렇게 하면 공손석과 감무는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320)

 

남의 남는 빛으로 집안을 일으킨다

제가 듣건대 못사는 여자와 잘사는 여자가 함께 길쌈을 하였는데, 못사는 여자가 나는 초를 살 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당신의 촛불에는 남는 빛이 있으니 그 남는 빛을 나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당신의 밝음에 해를 끼치지 않고 나도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저는 곤궁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바야흐로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 아내와 자식은 진나라에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남는 빛으로 그들을 구제해 주십시오.” (321)

이런 상황에서도 들었던 이야기로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다니 대단하다. 한편 유세자들은 서로 상종 못할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나보다.

 

너무 현명해도 재상이 못 된다

감무를 진나라 재상으로 추천해서는 안 됩니다. 진나라에 현명한 재상이 있으면 초나라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323)

자기 나라에 이로운 지 아닌 지가 중요하다보니 재상 자리로 아무리 현명해도 추천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는 나이와 관계없다

예전 감무의 손자 감라는 나이가 어리나 이름난 집안의 자손으로서 제후들은 그 이름을 들어서 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장당이 병을 핑계로 연나라에 가려 하지 않는 것을 감라가 설득해서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 감라가 먼저 가서 장당이 연나라로 떠난다는 것을 조나라에 알리려고 합니다. 그를 보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327)

 

12. 양후 열전

양후는 재상이 되어 백기를 장수로 삼아 한, , , 초를 차례로 쳐서 진나라의 세력을 더욱 키웠다. 그는 세 번이나 진나라 재상이 되어 소왕이 서재가 되도록 한 인물이다.

그러나 양후의 공과 권력이 커져 가면서 범저의 비방을 받고 소왕과 사이가 멀어지더니 결국 울분에 차 살다가 죽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논찬 부분에서 인생무상을 언급한다. (331)

그 당시는 아무리 잘해도 모함도 많이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외척의 정치 참여

소왕이 어리므로 선태후가 몸소 조정에 나가 국정을 돌보고 위염에게 정치를 맡겼다. (334)

 

천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진나라는 탐욕스럽고 포악하니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336)

진나라에 대한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데 사실인 것인지 그저 자기들 편할 때로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다.

주서천명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으니, 이것은 요행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포자와 싸워 이겨 현 여덟 개를 얻은 것은 병사가 정예로워서도 아니요 계략이 교묘해서도 아니고 하늘이 큰 행운을 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337)

 

잃는 게 없는 싸움을 하라

천하의 위장에 해당하는 상당을 얻는 것과 군대를 출동시켜 놓고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유리합니까? 그래서 저는 진나라 왕은 현명하여 계책에 뛰어나고 양후는 지혜로워 일 처리에 능숙하므로, 결코 조나라에 병사 4만명을 주어 제나라를 치게 하지 않을 겁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341)

 

결국 내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는 부유하고 존귀함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 범저 한 사람의 탄핵으로 신분이 꺾이고 권세를 빼앗겨 근심과 번민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왕족의 한 사람이 이렇거늘) 하물며 (진나라에서 벼슬아치가 된) 객경이야 어떠하겠는가?” (342)

저자 본인의 감정이 이입된 내용인 듯하다.

13. 백기·왕전 열전

백기와 왕전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재능을 갖추어 천하를 무찔렀지만 진나라를 위해 천하를 지킬 수는 없었고, 심지어 자기 몸조차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말이다. 백기는 조나라 군대를 땅속에 묻어 죽여 비명횡사를 피하지 못했고, 왕전은 진시황에게 어진 행실을 하도록 간언하지 않아서 그 손자가 재앙을 받았다는 것이다. (343)

 

마음을 잘 바꾸는 자는 난을 일으킨다

9월이 되자 조나라 군대는 식량을 보급받지 못한 지 사십육 일이나 되었으므로 내부에서 서로 죽여 살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349)

백기가 진나라 장군으로 전쟁을 잘 했는지 모르지만 너무 잔인하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속여서 모두 산 채로 땅속에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353)

 

세 대에 걸쳐 장군이 된 자는 싸움에서 진다

진나라 왕은 포악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소. 그런데 지금 진나라 군사를 모두 나에게 맡겼소. 내가 자손을 위한 재산을 만들려고 많은 논밭과 정원과 연못을 요청함으로써 다른 뜻이 없음을 보여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지 않는다면 진나라 왕은 가만히 앉아서 나를 의심할 것이오.” (356)

유세가들은 끊임없이 의심받고 심지어 목숨이 위험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런 말들을 하는 이유는 뭘까.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해서 일까.

무릇 세 대에 걸쳐 장군이 된 자는 반드시 싸움에서 지게 되오. 반드시 싸움에서 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소?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사람을 죽이고 쳐부순 것이 많아서 그 후손이 상서롭지 못한 기운을 받았기 때문이오.” (357)

 

14. 맹자·순경 열전

사마천은 음양가와 도가의 학문이 사실상 근본이며 기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가의 위대한 두 스승 맹자와 순자의 사적에 관해서는 짧게 다루고 음양오행가와 도가에 대해서는 유가보다 상세하게 다루었다. (361)

 

사욕은 혼란의 시작이다

공자가 이익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그 혼란의 근본 원인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라고 했던 것이다.” (363)

 

시대 흐름에 들어맞지 않는 주장은 쓰이지 못한다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과 영횡에 힘을 기울이고 남을 침략하고 정벌하는 것만을 현명하다고 여기는 때였다. 그런데 맹자는 요 임금과 순 임금과 하, , 주 세 대 성왕들의 덕치만을 부르짖으므로 가는 곳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64)

저자가 유가보다는 음양가와 도가가 근본이라 여겼음에도 기술은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하고 있다.

 

추씨 성을 가진 세 학자

추연의 학설은 다 이런 내용들이다. 그러나 그 결론을 요약하면 반드시 인의와 절약과 검소, 군주와 신하, 위와 아래, 육친 사이의 일로 귀착되는데 그 시작은 너무 크고 넘친다. 왕후나 귀인들은 추연의 학설을 처음 들을 때는 몹시 놀라 감화되는 듯하나 그 뒤로 실행할 수는 없었다. (366)

 

양나라 혜왕이 순우곤을 만나 한마디도 듣지 못한 까닭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으로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어느 한 학설에 국한하여 배우지 않았다. 그는 군주에게 충고하고 설득하는 면에서는 안영의 사람됨을 흠모하면서도 군주의 뜻에 따르고 그 얼굴빛을 살피기에 급급했다. (368)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건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었을까.

 

전국시대 각 지역의 사상가들

추연의 학설은 광대하며 변론에 뛰어났고, 추석의 학설은 매우 완벽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웠으며, 순우곤과는 오랫동안 같이 지내면 때때로 좋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370)

순경의 시대에는 세상의 정치가 혼탁했으며 멸망하는 나라와 난폭한 군주가 잇달아 나오고, 성인의 기본적인 도리를 닦아 몸으로 실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무속에 빠져 길흉화복의 징조를 믿고 못난 유학자들이 하찮은 일에 얽매이며 장주 같은 이들이 우스갯소리 주장으로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했다. (370)

학자들이 워낙 많으니 각자 생각이 다른 것 당연하다.

 

15. 맹상군 열전

제나라 맹상군 전문, 조나라 평원군 조승, 위나라 신릉군 무기, 초나라 춘신군 황헐은 선비를 기르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각기 식객 3000여 명을 거느려 흔히 전국 사공자라고 부른다.

사마천은 맹상군을 냉소적으로 보는 면이 없지 않으나 맹상군이 선비를 우대하는 모습에 대해서만은 꽤 우호적이다. (375)

 

사람의 운명은 어디로부터 받는가?

“5월에 태어난 아들은 키가 지게문 높이만큼 자라면 부모에게 해롭다고 하기 때문이다.” (378)

쌍둥이는 불길하니 하나를 죽이거나 따로 키워야 한다는 건 들어봤어도 태어난 달과 키로 해롭다고 하다니, 그것도 그걸 믿고 자기 자식을 버리라고 했다. 하긴 천한 첩의 아들이고 아들이 사십여 명이라고 하니 그 당시론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람의 운명을 하늘에서 받는다면 아버님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그렇지 않고 운명을 지게문에서 받는다면 지게문을 계속 높이면 그만입니다. 어느 누가 그 지게문 높이를 따라 계속 클 수 있겠습니까?” (379)

떡잎부터 다르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 스스로 헤쳐 나갔다.

지금 아버님께서 쌓아 둔 것이 남아돌지만 더욱 많이 쌓아 두려고만 할 뿐 힘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은 잊고 계십니다.” (380)

맹상군이 설 땅에 있으면서 제후들의 빈객을 불러 모으자, 죄를 짓고 도망친 자까지 모두 그 문하로 모여들었다. (380)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로 위기를 벗어난다

진나라 소왕은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으려던 생각을 그만두고, 그를 가두고 계략을 짜내 죽이려고 했다. (382)

지금까지 설공은 키가 훤칠한 대장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훅 불면 날아갈 듯한 왜소한 사내로구나.”

맹상군이 이 말을 듣고 화를 내자 그와 함께 길을 가던 빈객들이 수레에서 뛰어내려 칼을 빼서 수백 명을 죽이고, 마침내 현 하나를 없애 버린 뒤에 떠났다. (384)

이건 너무 심하다. 외모를 있는 대로 얘기했다고 현 하나를 없애버리다니.

 

모든 일에는 보답이 따른다

그는 한나라와 위나라에게 진나라로 예물을 보내 축하하도록 하고, 한과 위와 조 세 나라가 진나라를 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며, 군사와 식량을 서주에서 빌리지 않기로 했다. (386)

 

맹상군의 결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

맹상군은 반란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이 한 몸을 바쳐 맹세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궁궐 문 앞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으로써 맹상군이 결백함을 밝히려 했다. (387)

목숨을 함부로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물론 결백을 위해 그랬다곤 하나 본인의 결백도 아니데…….

 

군주가 이익에 눈멀면 백성은 떠난다

맹상군은 그 무렵 제나라 재상으로 1만 호의 설읍을 봉지로 받았으니 그 빈객이 3000명이나 되어 봉읍의 조세 수입만으로는 빈객들을 보살피기에 넉넉지 못했다. (391)

개인의 돈으로 빈객을 먹여주고 재워준 거다. 그것도 몇 년씩 지내는 사람도 있더라. 대단하다.

가난한 자는 차용증서를 십 년 동안 가지고 있어도 이자만 더욱 쌓여갈 뿐이라 성급하게 독촉하면 바로 달아날 테니 영원히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성급하게 재촉하여 돌려받지 못한다면 위로는 군주가 이익에 눈멀어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꼴이 되고, 아래로는 백성이 빚을 갚지 않으려 군주를 떠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백성을 격려하고 군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차용증서를 불살라 받을 수 없는 빚을 없애 설 땅의 백성이 군주를 가까이하고 군주의 이름을 칭송하게 하려고 한 일입니다.” (393)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진다

빈객들은 내가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보자 하루아침에 나를 버리고 떠나가 나를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소.” (397)

아주 지극히 인간적이다. 열전에 나오는 사람을 선과 악으로 대비시키거나 권선징악의 형태로 맺지 않고 그저 장,단점이 있는 인간으로 기술하고 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397)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398)

 

16. 평원군·우경 열전

사마천은 평원군이 다른 사람의 간언을 받아들이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이웃 나라에 명망을 떨친 점에서 평원군은 혼탁한 세상에서 새가 하늘 높이 날 듯이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경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진나라를 섬기다 조나라를 섬기다 하는 지조 없는 일부 빈객과는 달리 끝까지 합종을 지키며 진나라에 대항하고 조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 (401)

애첩을 죽여 신의를 지킨다

당신이 절음발이를 비웃은 자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비들은 당신이 여색을 좋아하고 선비를 하찮게 여기는 인물로 생각하여 떠나는 것입니다.” (404)

사람을 죽이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한다.

 

세 치 혀가 백만 명의 군사보다 강하다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 같아서 그 끝이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406)

 

나라가 망하면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한단의 백성은 땔감이 없어서 죽은 사람의 뼈를 때고,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 자식을 바꾸어 먹고 있으니 위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410)

서로 뺏고 뺏는 싸움만을 일삼았으니 이럴 밖에, 이게 사실이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강한 자는 공격을 잘하고 약한 자는 지키지 못한다

조나라 왕이 어쩌면 좋을지 계책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누완이 진나라에서 돌아왔다. 조나라 왕은 누완과 이 일을 상의했다. (417)

왕이 생각을 못하나? 아님 워낙 유세가들의 말에 휘둘리다 보니 결정을 못하는 것인가. 자꾸 보니 답답하다.

원컨대 왕께서는 이것으로 결정하시고 더 이상 의논하지 마십시오.” (419)

오죽 답답하면 이렇게 말했을까.

신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작은 나라와 큰 나라가 함께 일을 하면 이로운 것이 있을 때에는 큰 나라가 그 복을 받고, 일이 잘못되면 작은 나라가 그 화를 입게 된다.’ 지금 위나라는 작은 나라인데 스스로 화를 부르고 있고, 왕은 큰 나라인데 복을 사양하고 있습니다.” (421)

 

17. 위 공자 열전

신릉군 무기는 전국시대 네 공자 중 가장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서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는데, 이는 그가 선비를 대하는 남다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네 공자 중 신릉군은 그 빈객들로부터 충성과 존경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사로 일컬어지는 지식인들의 능력을 알아보는 혜안을 갖고 있었다. (425)

 

어진 사람을 얻으려면 정성을 다하라

그 뒤로 왕은 공자가 어질고 능력 있음을 꺼려 그에게 나랏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428)

너무 능력이 있으면 꺼리기도 하는구나. 그런데 왜 그런 걸까.

 

숨어 사는 선비 후영과 주해

제가 들러 만났던 백정 주해는 어진 사람입니다만 세상에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푸줏간 사이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430)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 주지 말라

저도 마땅히 따라가야 하지만 늙어서 갈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공자의 일정을 헤아려, 공자께서 진비의 군대에 이르는 날에 북쪽을 향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435)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왜 이리 목숨으로 대신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군대 안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돌아가고, 형과 동생이 함께 군대 안에 있으면 형이 돌아가라. 외아들로서 형제가 없는 자는 돌아가 부모를 모시도록 하라.” (435)

사기열전에서 처음으로 보는 배려하는 모습이다.

 

잊으면 안 될 일과 잊어야 할 일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436)

보통 사람들은 반대다. 내가 남에게 한 것만 기억한다. 그러면서 내가 너에게 000 했는데……. 한다.

 

노름꾼과 술 파는 자라도 어질면 찾아가라

평원군은 사람을 사귀는 데 그저 호걸인 척하는 몸짓만 있을 뿐 참다운 선비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438)

 

비방 한마디가 인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제후들은 공자가 위나라 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각각 군사를 보내 위나라를 구하게 했다. (439)

신릉군만이 깊은 산과 계곡에 숨어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것은 일리가 있다.“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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