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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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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11시 35분 등록

『 삼국유사』

고운기 지음, 현암사

 

16주차 (7/17~7/23)

티올(윤정욱)

 

1. 작가 분석

 

가.   일연 스님은 누구인가?

 

일연(一然, 1206~1289)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에 태어나,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모진 세월을 살았다. 14세에 출가하여 78세 때는 국사(國師)가 된 고승이었는데, 곧바로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본문에는 삼국유사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연이 79세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 왔을 때 그의 어머니의 나이가 96세였다고 한다. 본문에서 드러난 일연의 특성을 몇 가지로 살펴 보고 그의 생애와 관련한 내용을 별도로 확인하고자 한다.

 

# 민속학자로서의 일연 #

 

(96)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 인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미 앞서 단군 신화의 경우와, 앞으로 소개할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광범하게 퍼져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일연은 승려로서 여러 곳을 옮겨 다니는 생활을 했다. 그 동안 승려로서의 구도적 삶과 함께 남다른 일을 한 것이 있는데 바로 민가에서 전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채록한 것이다. 고운지 저자가 말한 것처럼 그는 오늘날의 민속학자와 같았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비해 더욱 낭만적이고 극적으로 전개 되는 부분이 많다.

 

# 역사학자로서의 일연 #

 

 

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 충렬왕 7(1281)에 승려 일연이 편찬한 역사서로, 전체 5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는 편의에 따라 분량을 나누었다.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 · 기이(紀異) · 흥법(興法) · 탑상(塔像) · 의해(義解) · 신주(神呪) · 감통(感通) · 피은(避隱) · 효선(孝善) 9편으로 편찬되었다. 왕력은 가락국 · 삼국 · 후백제 · 후고구려의 연표이며, 기이편은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의 간략한 역사가 담겨 있다. 기이편 앞에는 이 편을 엮은 연유를 밝힌 서() 서술되어 있다.

 

흥법편은 삼국이 불교를 받아들인 연유와 그 융성에 관한 내용이며, 탑상편은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이다. 의해편은 신라의 고승에 대한 전기가 담겨 있으며, 신주편은 신라의 신이승(神異僧)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감통편은 신앙의 영향에 관한 내용이며, 피은편은 초탈(超脫)한 인물의 행적을 그리고 있다. 효선편은 효도와 불교의 선행에 대한 미담 등이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역사와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성쇠 및 신화·전설·신앙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신라와 불교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단군신화를 비롯하여 이두(吏讀)로 쓰인 향가(鄕歌) 14()도 담겨 있어 한국고대어 연구를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한국고대미술의 가장 큰 주류인 불교미술을 위한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며, ()를 수행하는 화랑과 낭도들을 연구하는 데 상당한 자료를 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유사 [三國遺事]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 12. 20., ()신원문화사) 중 발췌

 

 

다.   삼국유사가 지어질 당시의 시대적 배경

 

(24)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나온 12세기 중반과 일연의 <삼국유사>가 지어진 13세기 후반까지는 약 150여 년의 간극이 있다. 이 시기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 째는 무신 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대내외적으로 같은 시기에 겪은 이 사건은 고려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데, 무엇보다 기존에 세워졌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삼국유사>에서는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가 지어진 시대적 배경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대외적으로는 송의 멸망 후 원이 성립 된 것이고, 대내적으로는 문신 정권이 무너지고 무신 정권이 기득권을 장악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고려 시대 내부의 정권의 교체나 고려와 중국을 둘러 싼 국제 사회 정세의 변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중국을 천자의 나라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나라로 생각하던 것이 일반적인 사상이었던 당시 천자의 나라가 오랑캐의 나라였던 몽고족에게 천하의 중심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더욱이 고려 내부적으로 사대주의를 표방하던 문신들이 실권하고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나라의 자주적 위상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드세어졌다. 그러한 자주적 특성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삼국유사>의 첫 시작을 단군신화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들 수 있다.

 

단군 신화는 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출발이었으며, 일연의 삼국유사가 단순히 신라/백제/고구려의 흥망성쇠를 다룬 역사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전체로 두고 설명하고자 한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라.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어떻게 다른가?

 

    김부식의 사() vs 일연의 사()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라는 글자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지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에 대해 김부식은 ()’ 즉 역사서에 대한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는 듯 하다. 중국의 아버지 나라로 섬기고, 또한 그것이 당연시 되던 시절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이름 역시 중국의 한 나라 무제 때 사마천에 의해 쓰여진 사기(史記)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때문에 김부식은 잡다한 글이나, 민간에서 떠도는 신묘한 이야기나 신술(神術)과 관련 된 이야기 등 조금이라도 허황된 것 같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사기에 옮기지 않았다. 지배계층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또는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내용들 위주로 서술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가급적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일연의 삼국유사의 ()’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당대에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 총 망라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받아 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일연의 ()’의 개념이 김부식의 ()’의 개념을 포괄하는 더 넓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 어느 역사서를 망론하고 그들이 전수하고 대대로 이어지는 역사()는 결국 지배자들이 후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나 속삭임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을 공정하게 바라 보기 힘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일연의 ()’의 개념은 다르다. 그것은 지배 계층에 의한 역사()는 물론이고, 민간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 또는 )들을 넓게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소 허황 될 수도 있고, 극적으로 전개 되는 부분도 많다. 통일 신라가 하대(下代)에 이르러 국운이 다해갈 즈음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차이가 극명하게 달라진다. 삼국사기에서는 각 왕대의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술에 그치는 반면, 일연은 그 음신한 나라 분위기 전체를 묘사하듯 삼국유사에 담아 낸다. 늦은 봄 또는 한 여름에 눈이 내리더라는 식의 은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그 뿐만 아니다. 멀쩡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뜨기도 하고, 사찰 벽에 그려진 개가 벽화 속에서 튀어나와 한참을 짖으며 내 달리더라는 이야기는 황망스럽기까지 하다. 오늘 날 생각해보아도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고 이해하기 보다는 그 이야기 속에 감춰진 상징을 알아차리는 노력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성적 사고 vs 자유분방한 사고

 

그 둘의 차이는 신라의 건국 이야기를 다루는 과정에서 기존에 있었던 유민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부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54p) 먼저 여섯 부족을 설명함은 같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여섯 부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한데 반해 일연은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되도록 이성적 판단에 맞아 들어가는 것을 추구했던 삼국사기의 세계와 일연 사이에 놓이는 차이점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사기가 말한 조선의 유민은 결국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 조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집단을 통칭하는 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일연은 그들을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함으로써 신라 건국의 주요 세력들과 북방민족들 간의 관계를 사전에 차단하고 있다.

 

 

마.   저자(일연)의 특징

 

# 삼국사기의 큰 줄기를 인용하되, 자신이 직접 민담의 설화 채집 하였음

 

# 매 장마다 지명이나 인명 등의 유래가 되는 내력을 밝히면서 종결

 

 

바.   글쓴이 고운기는 어떤 사람인가?

 

글쓴이 고운기는 196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삼국유사 관련 연구서로 <일연을 묻는다>,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삼국사기 열전>을 냈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등 세 권의 시집을 선보였다. 1999년부터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연구원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서기를 비교 연구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II.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24)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나온 12세기 중반과 일연의 <삼국유사>가 지어진 13세기 후반까지는 약 150여 년의 간극이 있다. 이 시기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 째는 무신 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대내외적으로 같은 시기에 겪은 이 사건은 고려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데, 무엇보다 기존에 세워졌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삼국유사>에서는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34)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39)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요, 이름은 유화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나와 노닐 때에 한 남자가 자신은 하늘님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신산의 아래 압록강변에 있는 집안으로 꾀어 관계를 맺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절차도 없이 남자를 따라갔다 꾸짖으시고 이 곳에 가두었습니다

 

è 예나 지금이나 남녀가 만나 결혼을 앞두고 부모님의 영향을 쉽게 벗어날 수가 없는 듯 하다.

 

(39~43) 왜 동명왕이 삼국유사에서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더 강력한 증거를 보이는지?? (다시 읽어봐야 함)

 

(43) 난생 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49) 비류와 온조가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다 함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결국 유리왕이 즉위하던 해, 두 사람은 고구려를 떠나야 했다.

 

(54) 신라 건국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삼국사기>와 일연은 처음부터 충돌한다. (중략) 먼저 여섯 부족을 설명함은 같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여섯 부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한 데 반해 일연은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한다. 되도록 이성적 판단에 맞아 들어가는 것을 추구했던 <삼국사기>의 세계와 일연 사이에 놓이는 차이점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많은 신화나 설화에서 주인공들에 대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식의 플룻을 차용한다. 그것은 아마 해당 주인공에게 기존 토착세력과는 다른 특별함을 부여함과 동시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시 말해 그 주인공이 있기 전과 후를 구분하는 일이며, 그는 기존 세력세력부터 영향을 받은 존재가 아닌 스스로 일어선 존재이며, 새로운 역사의 시작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69) (왕의 칭호와 관련해) 어떤 이는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마립이라는 것은 이 지방 말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을 표지로 자리에 세워 두면 왕이니, 말뚝은 주인이 되고 신하는 아래에서 말뚝을 따라 줄을 지었다. 이런 까닭에 붙인 이름이다고 하였다.

 

(73) 박노례 닛금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매부인 탈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탈해가,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è 왕을 임금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기원이 아닐까?

 

(78)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는 장면)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96)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미 앞서 단군 신화의 경우와, 앞으로 소개할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광범하게 퍼져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106) 고대 사회에 이룩된 일본의 문물 대부분이 백제를 통해서 들어와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사회의 밑바닥을 흐르는 교류는 역시 좀 더 가까운 경상도 쪽 곧 신라와 더 빈번했으리라 보인다. 그것이 탈이었을까, 너무 가깝고 너무 쉽게 갈 수 있으니, 좋은 사이로 지내기도 하려니와 싸움도 잦았다.

 

(117) 『삼국유사』의 기이편은 왕의 재위 순대로 엮였다. 그러면서 그 왕대에 일어난 일이나 특이한 사람을 하나 소개하고, 그것이 제목을 만드는 재료가 되기도 한다. ‘미추왕 죽엽군이라고 하면, 미추왕 때의 죽엽군 사건을 쓰면서, 미추왕의 재위 기간을 정리한 것이다.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 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특징적인 사건 하나로 한 왕대의 성격을 나타내 버리는 것이다. 일연의 특이한 기술 방법이다.

 

(139) 신라는 나라를 세운 시기로는 삼국 가운데 가장 앞섰지만, 문명의 개화는 가장 뒤쳐졌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한반도에서 신라가 위치한 지리상의 여건, 즉 문명의 고장이라 할 중국과의 통로가 쉽지 않은 구석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140)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160)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낸 역사인지 모른다. 신라의 전반기가 박제상과 이차돈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면, 그 중반기가 김유신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 김유신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난다.

 

(189) (만파식적)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結晶)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212) # 효소왕대 죽지랑

 

한 때 신라의 삼국통일을 진두지휘 하던 화랑(花郞). 문무왕 때에 이르러 삼국 통일(668)을 이루자, 토사구팽의 피해자가 된다. 진덕왕에서부터 신문왕에 이르기까지 재상의 역할을 도맡아 하던 화랑 출신의 죽지랑이 육두품 벼슬 아간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게 된다. 그의 옛 부하 득오는 <모죽지랑가>를 통해 삼국이 하나 되던 봄 날 그 어떤 꽃보다 찬란하게 피어났던 화랑(花郞)의 출신들의 비애를 애끓는 심정으로 드러낸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228) 해가(海歌) 발췌 (지은이 미상)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전체적인 구조는 수로왕의 탄생담에서 나오는 구지가(龜旨歌)와 흡사하다. (중략) <구지가>로부터 <해가>까지 사이에는 이미 700여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듯 긴 세월을 두고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불리는 노래가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구지가>의 시대에 이 노래는 신이 중심인 신화에 속한 신가(神歌)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삶 속에 노래가 자리한다. (중략) <해가>는 신가에서 민요로 넘어오는 중간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다.

 

(241) 제망매가(祭亡妹歌) 발췌 (월명사 지음)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246) 안민가(安民歌) 발췌 (충담사 지음)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다사로운 어머니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 다사로움을 알도다

 

구물구물 살아가는 물생(物生)

이들을 먹이고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

하실진대, 이 나라 보전될 것을 알도다

 

,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하리니

 

(261) 사실 원성왕은 기울어 가는 신라를 되살리고자 애쓴 마지막 왕이 아닌가 한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왕족간의 싸움 끝에 등장하였다고 하나, 그것이 곧 야심찬 젊은 왕족의 나라를 위한 충정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왕 즉위 4년에 실시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는 그 대표적인 업적으로 볼 수 있다.

 

(264) 세상을 돌며 그가 본 바를 설명하는 대목이나, 부하의 말을 듣고 그에 따르는 대목이나, 두 가지 모두 경문왕이 무엇보다 덕을 가진 이였음을 보여 주는 데 부족하지 않다.

 

(267)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 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267)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 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284) 여기서 우리는 일연의 기술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다.

 

(286) 삼국사기는 경명왕 3(919)에만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짖어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고 기록하였다. 일연은 918년과 919년으로 나누어 훨씬 자세히 적었다. 게다가 짖어대는 것 같은 소리짖었다는 분명 다르거니와, 여기서도 <삼국사기>가 지키려는 합리적 사고 방식의 한 단면을 읽게 되는데, 기왕의 기이한 사건을 한층 극적으로 전하려는 데서 일연의 태도에 더 매력을 느낀다.

 

 

 

    저자(일연)에 대해 더 생각해 볼 거리 (네이버 지식 캐스트 발췌)

 

일연(一然, 1206~1289)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에 태어나,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모진 세월을 살았다. 14세에 출가하여 78세 때는 국사(國師)가 된 고승이었는데, 곧바로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이 책 덕분에 일연은 우리에게 누구보다 낯익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삼국유사]의 가치에 대해서는 좀 더 차분하고 치밀한 분석의 손길이 따라야 한다. 13세기 아주 특별한 이에 의해 이룩한 민족의 발견,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 정작 그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 #

 

일연은 너무 유명해서 아무도 모른다. 이 반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삼국유사]의 지은이로 일연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사실 [삼국유사]가 유명하므로 일연 또한 덩달아 유명해졌다. 오늘날 초등학생에서 일반인까지 [삼국유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과서와 동화책과 인문 교양서에 이르기까지 [삼국유사]를 변주한 책의 숫자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삼국유사]라는 책에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친숙하다.

 

일찌감치 [삼국유사]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정녕 우리 역사를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꿔 놓은 책. 우리 문학을 지식인의 문학에서 민중의 문학으로, 사대의 문학에서 자주의 문학으로 바꿔 놓은 책.” 이런 [삼국유사]를 지은 이가 일연이다.

 

[삼국유사] 3 1,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이 1281(충렬왕 7)에 편찬하였다. 그런데도 일연을 모른다니, 오리무중의 대상이라니 무슨 말인가. 일연은 20세기에 들어 유명해졌다. 아니 이 또한 [삼국유사]가 유명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20세기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일연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삼국유사]를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다는 말과 같다. 한마디로 일연은 [삼국유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이이다.

 

하지만 일연은 당대에 꽤 잘나간 사람이었다. 그가 살았던 고려 왕조의 국사가 된 이였다. 국사는 한 나라의 스승이다. 특히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사회에서 국사의 위치는 지금의 상상을 초월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고 법정 스님이 입적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분들의 생애를 그리워했는가. 단순하게 따지자면 당대의 일연은 추기경과 스님을 합쳐 놓은 분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만한 이가 국사에 올랐고, 단일 종교에 국가 종교였던 불교의 당시 영향력으로 치자면 국사는 두 분을 합쳐 놓은 것 이상이었다. 일연도 그만한 반열에 오른 이였다.

 

그런데도 일연을 모른다니, 오리무중의 대상이라니 무슨 말인가. 하물며 일연에게는 번듯한 비문이 남아서 전해온다. 한문으로 쓴 1,200자 가량의 꽤 긴 분량이다. 가계와 생몰연대 그리고 주요활동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이에 비하면 꽤 풍부한 자료를 남겨 놓은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평면적이고 단선적이다. 비석을 세우기 위해 쓴 비문 하나가 정보의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국사까지 오른 고승에 대해 이토록 감감무소식인지 의아할 만큼, 다른 기록에 걸쳐 견주어 입증할 자료가 없다. 그러므로 구체적이고 입체적이지 않다. 이 때문에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연은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다. 비문에 나타난 그의 생애와 [삼국유사]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그의 세계관은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 점철된 일연의 시대 #

 

이름을 안다고 다 안 것처럼 여기는 우리네 불찰이 여기서 한몫 거든다. 일연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일생을 다 알았다고 말하면 너무 싱겁다. 우리의 역사 시간은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삼국유사]에 대해서도 그 이름과 단편적인 몇 가지 내용만 알 뿐, 깊이 있게 이 책의 가치와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유명해서 알았다 여기고 넘어가는 무심함을 이제 깰 때가 되었다.

 

비록 단선적이긴 하나 먼저 비문을 통해 일연의 생애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일연은 고려 희종 2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 해 곧 1206년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이다. 그리고 꼭 10년 전인 1196년에는 최충헌이 자신의 무인정권을 세웠었다. 일연의 생애는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신난(辛難)한 세월이었다.

643년 원효가 창건한 이래 1307년 보각국사 일연이 중창하고, [삼국유사]를 편찬한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비의 탁본. 이 비는 1295(충렬왕 21) 사승 죽허가 왕희지 글자를 집자해서 세운 것으로, 인각사보각국사탑과 함께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었다.

 

일연의 속명은 김견명(金見明), 어머니가 자신에게 환히 해가 비추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14세에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출가했고, 이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첫 승려인 도의(道義)가 은거하며 수행하던 곳이다. 22세에 과거시험의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이후 몽골 전란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경상도 달성의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다.

 

그가 처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44세 때였다. 경상도 남해의 정림사(定林社)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첫 직장치고는 꽤 늦었다. 55세에는 남해에서 [중편조동오위(重篇曺洞五位)]를 저술하였다. 일연의 많은 저작 가운데 [삼국유사]와 함께 지금까지 전하는 이 책은 그의 수행과 학문이 벌써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자연히 불교계에서는 일연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의 활동 범위는 이제 전국으로 뻗어가기 시작하였다. 중앙 정계의 인물들과 교유하는가 하면, 각지의 사찰에 머물며 후학을 길러냈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가 함께 일본 정벌을 하던 때는 일연의 나이 어언 76세가 되어 있었는데, 충렬왕은 일연을 곁에 불러 자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일연은 1283년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가 되었다. 종신직인 이 자리에 오른 이는 개성에서 머물러야 하지만, 일연은 이듬해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주석한 지 5년 만인 1289년에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이 시기에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연이 79세 때 고향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96세였다. 실로 은퇴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열일곱 살에 아들 하나 두고, 스물여섯 살에 제 품에서 아들을 떠나 보낸 어머니는 70년을 홀로 살았다. 일연은 그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효성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 일연이 쓴 삼국유사, 정사의 상대적인 의미인 ‘대안사서’라 부를 수 있다 #

 

우리는 [삼국유사]를 흔히 야사(野史)라 부른다. 그러나 입증하기 어려운 뒷방 이야기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들리는 말이 야사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아니다. 그래서 ‘대안사서(代案史書)’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최근에 나왔다. 당대의 기준에서도 정식 사서라 할 수 없는 책이지만, [삼국유사]는 오히려 전혀 다른 세계의 발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있는 작명이 아닐 수 없다. 대안사서는 [삼국사기]를 정사라고 불렀을 때 상대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생활사(生活史)로 요약해 본다.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나라를 이루었던 이 땅의 민중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삼국유사]는 수많은 일화를 적절히 정리하여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곧 일연의 세계관이기도 하였다. [삼국유사]는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9개의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구성을 본다면 연대기로서 왕력, 준 역사서로서 기이, 불교 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 이하의 여러 편으로 삼대분(三大分)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왕력 편은 [삼국유사] 전체 기술의 기반이 되는 부분이고, 기이 편은 양적으로도 역사자료의 가치가 충분히 있지만, 기술방식이나 역사관에서 [삼국사기]와 현저히 다른 질적인 면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특히 기이 편은 그 서문에서 밝힌바,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을 비록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굳이 수록하겠다는 것, 그래서 단군 신화가 처음으로 문서 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서 더는 강조할 필요가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편, 흥법 편 이하의 편들은 불교 문화사적 관점에서 기록하였다. 일연은 승려로서 분명한 불교적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불교 문화사란 그런 저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결과다. 다만 불교 하나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러므로 읽는 이도 어떤 편협한 선입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아가 흥법 편 이하가 중국의 승전(僧傳)을 많이 모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로만, [고승전] 같은 불교서로만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어떤 틀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삼국유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것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바를 반추했을 때 드러난다. 생활이 묻어 있는 이야기이고, 민족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는 자료이다. 우리는 거기서 생활을 발견하고 민족을 재발견한다.

 

 

#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던 일연이 전하는 삼국시대 이야기 #

 

이렇게 [삼국유사]의 세계를 정리해 보면서 다시 고개를 드는 의문이 남았다. 과연 일연은 누구인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에 대한 해답은 매우 치밀하고 장황하게 늘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는 이야기꾼이었다. 일연은 이야기하는 재주를 다양하게 지닌 이였다. 그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이야기 속에 풀어 넣는 비상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기술은 몇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원효와 의상처럼 대조적인 두 사람을 짝을 지어 등장시킴으로써 흥미를 배가시키는 경우김춘추처럼 주인공의 자리에 조연으로 등장시켜 매우 객관적인 태도로 한 사람을 조명하는 경우 등이 먼저 눈에 띈다. 이는 이야기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경우는 한 왕대에 대해 대표적인 한 사건을 서술하여 그 성격을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선택과 집중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미추왕과 죽엽군, 내물왕과 김제상, 이런 식이다. 그것은 [삼국유사]가 정식 역사서의 의무감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한 왕대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이 얽혀 있다고는 하여도, 그것을 특징적인 사건 어느 하나로 집약하여 정리해 주는 이 방식에서 일목요연한 흐름을 짚어보게 되고, 저자의 분명한 역사관 또한 찾아볼 수 있으니 매우 흥미롭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진평왕의 경우, 왕은 무려 53년이나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었음에도, 일연은 다만 한 가지 천사옥대(天賜玉帶), 곧 하늘이 내려준 옥대를 받은 일로 갈음한다. 그의 권위와 업적에 대해서는 이 한 가지로 설명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하늘에서 옥대가 내려온다는 일이 발생 가능한 것인가는 논외다. 만약 거기에 걸려서 쓰기를 주저했다면 아예 단군신화는 설 자리조차 잃었을 것이다.

 

법흥왕은 기이 편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법흥이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흥법 편에서 이차돈 순교 사건의 조연으로 법흥은 나온다. 물론 이는 [삼국유사]를 사건의 나열 방식이 아니라 주제별 분류에 따라 썼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그러나 법흥이 법흥인 것은 신라의 불교공인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일연은 왕의 재위 순서에 따라 기이 편을 기술하다가도 법흥 같은 중요한 왕을 과감하게 흥법 편으로 돌렸다. 거기서 더 흥미롭게 법흥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유사’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것도 없다 #

 

일연은 역사를 왕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서민이나 지체가 낮은 스님도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의 붓을 통해 정착한 이야기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입체적 생활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유사’라는 제목을 붙이는 다른 책 또한 이와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일연만큼,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내용과 형식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연이 가졌던 세계관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연 [一然] - [삼국유사]를 쓴 뛰어난 이야기꾼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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