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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9일 11시 53분 등록
역사속의 영웅들 - 윌 듀런트/안인희 옮김/황금가지

1. ‘저자에 대하여’

퓰리처 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한 윌 유런트는 96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기 4년 전에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를 축약한 책을 내놓으려고 시도한다. 그의 나이 92세 때이다.

그는 92세 나이에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나는 죽음의 신이 우리를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력, 불안정한 걸음걸이 그리고 다리에 새로 생긴 경직 등의 형태로 그가 명함을 남기고 갔으니 말이지.”, “나는 이 에세이들을 텔레비전보다는 오히려 『역사속의 영웅들』이라는 책으로 낼 생각이기에 이전의 대본보다는 양을 약간 늘렸다. 대략 23쪽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지만, 그는 90을 넘은 고령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통찰을 계속 해 나가면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 위대한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인류역사의 비관적 결론, 즉 역사는 <인류의 범죄와 어리석음의 기록>이라는 볼테르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비극들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건강한 가족, 인간들의 건전한 노동과 사랑이 인간의 역사를 창조적인 희망의 역사로 만들어 갈 것이라는 낙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과거의 업적과 우리가 물려받은 장엄한 역사적 유산으로부터 우린 그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윌 듀런트는 1885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다. 1917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이 대학에서 강의 하다가, 1935년 이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스스로를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고 칭하는 그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총 11권의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을 저술하였고, 1926년에는 이미 우리에게도 친숙한 책인 <철학 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를 완성하였다. 이밖에 , , , ,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윌 듀런트는 생애의 마지막까지, 역사 과목을 위한 경이로운 입문서가 될 이 책에 새로운 자료를 첨부하였다. 처음 그는 이 책을 23개의 장으로 구성하려 했지만, 운명은 21개의 장에서 이 책을 끝맺게 하였다. 그가 스물한 번째 장을 완성했을 때 그의 아내 아리엘이 뇌졸증으로 쓰러졌고, 1981년 말 듀런트 자신도 심장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1981년 10월 25일 아내가 세상으로 떠난 지 13일 만인 11월 7일, 그의 심장도 멈추었다.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이 듯 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들어가는 말

나는 죽음의 신이 우리를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력, 불안정한 걸음걸이 그리고 다리에 새로 생긴 경직 등의 형태로 그가 명함을 남기고 갔으니 말이지.[8]

내게 있어서 역사란 철학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려 한다고 말했다..... 역사는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결론적으로 나는 자신이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10]

윌 듀런트의 마지막 저서인 이 책은 미래 세대의 도덕적 함양과 이익을 위해 과거의 유산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이것은 듀런트의 말에서 직접 들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많은 성인(성인), 정치가, 발명가, 과학자, 시인, 예술가, 음악가, 연인, 철학자들이 살아서 말하고 가르치고 조각하고 노래하는, 정신의 나라, 하늘의 도시......
『역사 속의 영웅들』은 이 <정신의 나라>가 제공하는 축복을 향한 윌 듀런트의 마지막 유언이다.[14]

그는 함께 걸으면서 삶, 사랑, 전쟁, 시, 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또 관용, 지혜, 깊어진 삶에 대한 더 많은 사랑의 위대하고 고귀한 전망을 향해 함께 올라가자고 우리를 부른다.[14]

제1장 문명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는 생물학의 한 단편(단편)이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종들 중의 하나이고,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싸움과 살아남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들의 경쟁에 종속된다. 심리학, 철학, 정치적 능력 그리고 이상향들은 이 생물학 법칙과 화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15]

인류의 흔적은 대략 기원전 1백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중 농업의 흔적은 기원전 2만 5천 년 이전으로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류는 땅을 경작하는 농부로 정착 생활을 한 것보다 40배나 긴 세월을 사냥꾼으로 살았다. 97만 5천 년의 이 세월 동안 인류의 기본적인 성향이 만들어졌고 아직도 그대로 남아 매일 문명에 도전하고 있다.[15]

문명을 위한 최초의 토양인 농업은 아마도 여자가 발전시켰을 것이다.[16]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집과 정착 생활에 적응하였다. 여자들은 먼저 양, 개, 나귀, 돼지들을 길들여 가축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남자들을 길들였다. 남자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길들인 동물로, 마지못해 부분적으로만 문명화되었다. 남자는 천천히 여자에게서 사회적 특질을 배워 익혔다. 가족에 대한 사랑, 친절(친족과 가까워지는 것), 절제, 협동, 공동체 활동 등이다. 이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자질이 미덕이 되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다. 즉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다.[17]

그러나 이와 더불어 자연과 문명 사이에 깊고도 끈질긴 갈등도 함께 시작되었다. 인류 역사의 길고도 긴 사냥 단계에서 아주 깊숙이 뿌리를 내린 개인적 본능과, 최근의 정착 생활을 통해 생겨났지만 아직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사회적 본능 사이의 갈등이다.[17]

개인은 효율적으로 보호해 주는 공동체에 속해 안전해졌을 때 문명화되었다. 국가들은 효율적으로 보호해 주는 연방 그룹의 충성스러운 일원으로 안전해질 때 문명화될 것이다.[18]

남자들이 물려받은 사냥꾼 천성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어떻게 성장하였나?[18]

문명이란 문화적 창조를 격려하는 사회 질서다.[20]

역사상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연속 장면의 한 가지는 이교적인 방종의 시대에 이어 청교도적인 억제와 도덕적 규율의 시대가 뒤따라온다는 것이다.[21]

나는 저 볼테르와 기본(Gibbon)의 비관적 결론, 즉 역사는 <인류의 범죄와 어리석음의 기록>이라는 결론에 동의하지 않겠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 말이 맞고 또한 수억 가지의 비극들이 있다. 그래도 여전히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 생명의 흐름을 이끌어온 것은 평범한 가족의 건강함과, 남자들과 여자들의 노동 그리고 사랑이다. 또한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루즈벨트 같은 정치가들의 지혜와 용기도 있다. 자신들을 둘러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굴하지 않는 노력도 있다. 또 덧없는 아름다움에 지속적인 형식을 부여하고, 미묘한 의미를 밝히려는 예술가들과 시인들의 끈질김과 기술도 있다. 그리고 우리를 고귀함으로 안내하는 예언자들과 성인(聖人)들의 환상도 있다.[22]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악을 향해 눈을 감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고 그들을 가르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업적과 우리가 물려받은 장엄한 유산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23]

제2장 공자와 추방당한 신선

자연에서 모든 사물은 소리 없이 작용한다. 이들은 존재 속으로 들어오지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 기능을 모두 완수하지만 아무런 요구도 없다. 모든 사물은 똑같이 자기 맡은 바 일을 다하고 물러난다. 사물은 절정에 도달하면 모두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원래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휴식, 혹은 사명의 완수를 뜻한다. 이런 귀환은 영원한 법칙이다. 이 법칙을 아는 것이 곧 지혜이다.<노자> [29]

네가 다투지 않으면 지상의 그 누구도 너와 다툴 수 없을 것이다..... 손해를 친절로 갚아라. .... 나는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며 선하지 않은 사람을 선하게 대한다. 이와 같이 하면 모두가 선해진다. 나는 진실한 사람에게 진실하며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진실하다. 그러면 모두가 진실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 <노자>[30]

지혜로운 사람은 심지어 도(道)와 지혜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지혜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범과 경험으로만 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을 경우 그는 이것을 감추려 한다. <그는 자신의 명석함을 완화시키려 하며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몽매함과 같아진다. 그는 학식 있는 사람보다는 단순한 사람들과 더 마음이 맞으며 초심자의 모순을 보고 화를 내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부나 권력에 가치를 두지 않고, 불교에서 말하는 최소의 수준으로 소망을 줄인다.[31]

네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뼈까지 진흙이 되고 말았다. .... 너의 자부심과 야망을 없애라, 애착과 극단적인 목적들을 다 없애라. 네 품성은 이것들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노자>[31]

제국(온 세상)에 최고의 미덕을 펼치기 원했던 옛사람들은 먼저 자기 나라의 질서를 잘 잡았다. 나라의 질서를 잘 잡기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가족을 단속하였다. 가족을 단속하기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렸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였다. 마음을 바르게 하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생각을 신중히 하였다. 생각을 신중히 하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지식을 최대한 넓혔다. 지식을 넓힌다는 것은 사물을 탐구하는 것이다.
사물을 탐구하자 지식이 완전해졌다. 지식이 완전해지자 생각이 신중해졌다. 그들의 생각이 신중해지자 마음이 바르게 되었다. 마음이 바르게 되자 그들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다스리게 되자 가족을 단속할 수 있었다. 가족을 단속하게 되자 나라가 바르게 통치되었다. 나라가 바르게 통치되자 온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었다.<대학>[33]

그는 열렬히 지식을 구하느라 먹는 일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지식을 얻은) 기쁨에 취하여 근심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나이 먹는 것도 알아채지 못합니다.<자로, 공자의 근황>[34]

할 말은 아직도 너무나 많지만 지옥의 시계가 계속 똑딱거리고 있으니 이쯤에서 1932년경 내가 중국에 관해 쓴 글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맺기로 한다.
군사적 승리도 외국 금융의 폭정도 자원과 생명력이 이토록 풍부한 한 민족을 오래 억압할 수는 없다. 중국의 허리가 그 생명력을 잃기 전에 침략자들이 먼저 자본이나 참을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1백년이 자나가기 전에 중국은 그 정복자들(당시 일본인)을 흡수하고 허망하게 현대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기술을 모두 배울 것이다. 도로와 통신이 중국을 통일시킬 것이고, 경제와 근검은 자본을 가져다줄 것이며 강력한 정부가 질서와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모든 혼란은 일시적일 뿐이다. 마지막에는 무질서가 치유되고 독재 정권과 더불어 균형을 이루고, 낡은 장애물은 거칠게 쓸려나가고 새로운 성장이 나타날 것이다. 죽음과 양식(樣式)처럼 혁명이 쓰레기를 제거하고 불필요한 것을 도려낼 것이다. 많은 것들이 죽어야 할 순간에 혁명이 나타난다. 중국은 전에도 이미 여러 번 죽었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태어났다.[40]

제3장 붓다에서 인디라 간디까지

문명이란 문화 창조를 촉진시키는 사회 질서라고 정의한 바 있다.[41]

<인간의 근심과 병, 늙음과 죽음의 원천은 무엇인가?> ..... 그는 탄생이 바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째서 탄생은 그치지 않는가? 카르마(업)의 법칙이 새로운 탄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46]

평화는 열망이 없는 냉정한 평온함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이 해탈(니르바나)이다.[46]

<화난 사람을 친절함으로 이기도록 해라.> <선으로 악을 이겨라..... 미움으로 미움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미움은 오로지 사랑으로 중단된다.> <붓다>[47]

종교에 대한 붓다의 생각은 순수하게 윤리적이었다. 그는 의식이나 숭배나 신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행동에만 관심이 있었다.....욕심에 시달리는 우리의 자아는 실제로는 분리된 존재나 힘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강물 위에 이는 순간적인 잔물결이고, 바람에 날리는 운명의 올가미 속에 얽혔다 풀어졌다 하는 작은 매듭일 뿐이다. 우리 자신이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본다면, 전체의 틀 안에서 우리 자신을 개선하고 우리의 소망을 바꾼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실망과 패배, 비탄과 고통, 피할 수 없는 죽음 등이 더는 이전처럼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무한성의 넓이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의 분리된 자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면 마지막에 우리는 해탈, 곧 이기적이지 않은 평화를 찾을 것이다.[48]

한 승려가 말하였다. 종교가 미덕과 축복뿐 아니라 공포심으로 설교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무법적인 개인주의를 통제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 등지에서는 신학적으로 재구성된 불교가 번성하고 있었으며 신을 생각지 않았던 붓다는 신이 되고 말았다.[49]

제4장 피라미드에서 이크나톤까지

어째서 파라오들과 다른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했던가?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속에 <카>라고 부르는, 자기와 똑같은 영적인 짝이 들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육체가 굶주림, 폭력, 부패를 이기고 보존된다면 원래의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왕의 시체는 특별한 조심성으로 향료 처리되어 미라로 만들어졌다.[58]

계급 투쟁이 번성하고 파업이 빈번하였다. 어떤 문서는 감독관에게 보낸 노동자들의 탄원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곳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옷도 연료도 음식도 없어요. 주인이신 파라오와 우리를 감독하는 태수님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에게 생계를 유지할 물건을 주시도록 청해 주십시오.> 그러나 계급 혁명에 대하서는 들을 수가 없다. 유대인들의 항의 퇴거(유대인의 이집트 탈출) 사건을 혁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말이다.[60]

이집트 예술은 그리스 로마 예술과 겨룰 만한 것이지만 그리스 로마보다 1천 년 이상 앞섰다.[61]

제5장 구약 성서의 철학과 시

칼라일은 욥기를 가리켜 <역사상 기록된 가장 위대한 문헌의 하나다.... 성서나 혹은 성서 바깥에 이와 동일한 문학적 가치를 지닌 글이 쓰인 적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라고 하였다..... 모든 신학 체계를 괴롭히는 어두운 질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곧 <불의가 그토록 자주 승리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정의와 사랑의 신이 다스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83]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은 에고를 가장 많이 넓혀주고, 살아 있고 평화로운 모든 것들에 대해 마음과 팔을 활짝 여는 일이다. 영혼이 행복하면 그 사랑도 커진다.[91]

제6장 페리클레스에 이르는 길

플라톤보다 300년 전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신비로운 경구를 사용해서 변화의 철학을 설명하였다. 이것은 헤겔, 다윈, 스펜서, 니체 등에게 영감을 준 사상이었다.
두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변화가 보편적이라는 것과 에너지는 파괴할 수 없이 영속한다는 생각이었다.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현재의 존재이기를 중지하고 새로운 다른 것으로 된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그리고 <흐르는 강의 동일한 물 속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쉬지 않고 중지하지 않는 <과정>이다.[95]

그러나 이런 흐름 속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았으니 곧 그가 <불>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이 말로 그는 <힘>이나 <에너지>를 뜻하게 되었다. 개별적인 영혼은 생명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꽃의 일시적인 혀일 뿐이다. 인간은 이 불꽃 속에서 변하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불을 붙여 밤에 내놓은 촛불과 같다.> 신은 영원한 불이고, 유동적인 세계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에너지이다.
이런 보편적인 변화 속에서 무엇이든 시간이 흐르면 정반대의 것이 될 수도 있다. 선은 악이 될 수 있고 악이 선이 될 수도 있다. 삶은 죽음이 되고 죽음은 삶이 된다. 이러한 대립은 동일한 사물의 두 가지 측면이다. 힘은 대립하는 두 요소의 긴장이다. <싸움(경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며 모두의 동족이다. 싸움이 만들어낸 일부는 신이 되고, 또 일부는 인간이 된다. 그것은 어떤 존재를 노예로, 또 어떤 존재를 자유롭게 만든다.> 마지막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싸움은 정의다> [9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따르면 그는 처음으로 <세계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부여한> 인물이다. 그는 별들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보고 그런 이름을 붙였다. <코스모스>란 질서라는 뜻이고, 이것이 피타고라스의 핵심적인 단어이다. 우리의 소망이 질서를 이룬 것 그리고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질서를 이룬 것이 곧 미덕이다. 그리고 국가 안의 질서가 유지되면 그것이 곧 올바른 정부이다.[99]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인 아르키메데스는(기원전 287년) 지레와 사랑에 빠졌는데, 지레 하나를 들고 땅위에 한 발로 서있으면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100]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가 끝나갈 무렵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부의 격차가 절정에 도달해서 아테네 시는 정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전제 정치 말고는 도시를 소동에서 자유롭게 해줄 어떤 방책도 불가능해 보였다> 라는 것이다.[103]

아테네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법을 주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솔론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법을 주었다.> 서로 갈등하는 그룹과 이해 단체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좋은 법안이었다. 그는 황금률을 좇아 나라를 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훌륭한 제자였던 셈이다. 전통에 따르면 델포이 아폴로 신전에 써 있는 모토 -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라>는 그의 말이라고 전해진다.[107]

제7장 아테네의 황금 시대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와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에서 페르시아를 누르고 그리스 군을 승리로 이끌었다.[109]

1820년경 셸리는 이렇게 썼다. <페리클레스의 탄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 사이에 들어 있는 시대는..... 세계 역사상 가장 기억할 만한 시대이다.>.... 한 국민의 역사에서 정치 지도력, 예술, 과학, 철학, 문학, 종교, 도덕 등이 책의 여러 페이지에 흩어져서 각기 따로따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상을 지닌 하나의 직물로 짜여져 나타난 시대이다.[109, 111]

황금 시대의 면모 중에는 우리에게 경고를 해주고 우리 감정을 손상시킬 만한 측면들이 있다. 하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장면을 낭만적으로 이상화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그것도 약간 언급할 필요가 있다.[112]

우선 아티카라 불리는 작은 반도에 살던 31만 5천 명의 주민들 중 오직 4만 3천 명만이 참정권을 가지 시민이었다. 그리고 11만 5천 명이 노예였다..... 아테네에는 (1863년 이전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노예들을 검사하고 살 수 있는 시장이 있었다. 아주 가난한 시민도 노예 한 명쯤은 있었다.[112]

매춘부가 아주 많았다. 아테네는 이것을 사업으로 인정하고 합법화하였으면 그 종사자들에게 세금을 물렸다. 일부 매춘부는 음악과 춤과 다른 오락 형식을 훈련받았다. 최고급 기생인 헤타이라이, 곧 동반자들은 교육받은 여성들로 지적인 후원자와 문학, 예술, 철학에 대한 토론을 벌여 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소포클레스를 즐겁게 해주었고 또 다른 한 명은-바로 아스파시아- 페리클레스와 결혼하였다.[113]

아테네 법은 동성애를 금지하였지만 여론은 그것에 관대하였다.[113]

그리스 사회는 남성만의 단성(單性) 사회였다. 그래서 여성의 정신과 매력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프랑스 계몽주의에 주었던 것과 같은 흥분, 우아, 자극 등이 결핍되었다.[114]

아테네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서 선량해지기 어려웠다. 그들은 악덕을 싫어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성을 멸시하였다. 어떤 민족도 이보다 더 큰 상상력이나 혹은 더 생생한 혀를 가진 적이 없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테네 사람의 가장 고귀한 정열이었지만 나머지 다른 일들처럼 너무나 과도하였다. 뒷날 아테네 사람은 이성(理性)의 한계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원래 그들의 정신의 낙천성과는 기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비관주의에 빠지게 된다.[115]

그리스 예술은 이성을 눈에 보이게 만든 것이다. 그리스 회화는 선으로 이루어진 논리학이고 그리스 조각은 균형의 숭배이며 그리스 건축은 대리석으로 된 기하학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예술이란 삶에 종속된 것이며, 삶은 모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 생각하였다.[116]

그(페리클레스)의 생애 마지막 18년 동안(기원전 447년 - 429년) 도시는 건축, 조각, 그림을 위해 6천만 달러를 승인해 주었다. 부자들이 저축한 것이 미술가, 장인, 노예들에게 분배되었고 아테네는 1세기 동안 세계의 기적이 되었다.[119]

보통 한 시대의 철학은 다음 시대의 문학이 된다. 한 세대 동안 사색이나 탐구의 영역에서 논쟁이 이루어진 사상이나 문제들은 이어지는 세대에 가서 연극, 허구, 시 문학의 배경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문학은 철학의 뒤를 쫓아가지 않았다. 시인들 자신이 철학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사유를 행하였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지적인 선봉에 섰다.[122]

황금 시대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다. 아테네는 몸과 영혼이 다 지쳤고, 한 세대 동안이나 계속된 싸움을 통해 품성이 타락한 것을 느꼈다. 두 가지가 아테네를 떠받쳤다. 민주주의의 복구와 그리고 지난 60년 동안, 심지어는 전쟁 동안에도 계속된 자부심, 곧 아테네는 인류가 기억하는 한 그렇게 짧은 시기에 다른 누구의 것보다 우수한 예술과 문학을 생산해 냈다는 자부심이었다.[132]

제8장 플라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그리스는 계층간의 전쟁이 점점 심해지면서... 사치가 커지고 지식이 해방되면서 도덕적 해이도 나타났다.... 성적, 사회적, 정치적 도덕성은 계속해서 추락하였다. 미혼 남자와 매춘부들이 함께 증가하고 자유로운 결합이 합법적인 결혼을 대신하였다.... 피임이나 낙태 혹은 영아 살해를 동원한 가족 계획이 유행이었다.... 정부의 모든 단계에서 뇌물이 번창하였다.... 정치는 전보다 더욱 격렬해졌지만 애국심은 약해지고 부정 부패는 늘어만 갔다. 개인주의가 번창하면서 국가는 시들고 있었다.[135, 136]

필립 왕은 문명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강력하고 훌륭한 짐승이었다.[137]

그(필립 왕)는 아내 올림피아스를 제외한 모든 적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올림피아스는 그의 바람기에 앙심을 품었다.... 필립 왕의 장수 중 한사람인 파우사니아스는 올림피아스의 꾐에 넘어가 왕을 죽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왕좌를 물려받았고 그는 스무 살의 나이로 세계를 정복할 준비를 하였다.[140]

기원전 356년에 에페소스에 지어진 아르테미스 여신의 세 번째 신전도 이 일곱 기적에 포함된다. 50년 동안의 작업을 통해 세워진 이 신전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이 되었다.
처녀 신은 그곳에서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 아르테미스로 숭배되었고, 이러서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는 디아나로, 기독교에 의해서는 성모 마리아로 숭배되었다. 역사는 신문과 마찬가지로 이름과 날짜는 바뀌어도 사건은 언제나 똑같다.[144]

그(플라톤)는 민주주의 정치가들이 자유가 무정부 상태로 바뀔 때까지 민중의 변덕에 비위를 맞춘다고 여겼다.[145]

행동의 목적은 행복이지만 행복의 비결은 미덕에 있다. 그리고 최고의 미덕은 지성이다. 이것은 현실, 목표, 수단에 대한 조심스런 관찰이다. 통상적으로 <미덕>이란 두 극단 사이에 있는 황금의 중간(황금률)을 뜻한다. 정치란 한 사회를 구성하는 계층들간의 타협의 기술이다. 모든 사람은 불평등하게 만들어졌다. 부자연스런 평등이 강요되면 상류층은 즉각적으로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불평등이 부자연스러운 정도가 되면 하류층이 반항할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금권 정치>를 선호하였다. 이것은 귀족 정치와 민주주의를 혼합한 형태이다. 그에 따르면 재산 소유자들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지고, 수가 많은 중간층이 권력의 중심 및 균형의 축을 이루어야한다.[150]

그(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땅들을 그리스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러한 다양한 문명의 상호 작용은 중동 지역의 그리스화(化)를 진척시켰고, 반대의 움직임으로 동방의 종교가 유럽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촉진시켰다. 그렇게 해서 유대교 - 나중에는 기독교 - 는 에게해를 건너 퍼져나갔고, 예루살렘에서 생겨난 신앙이 유럽의 신앙이 되었다.[154]

정력이란 천재의 절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통제의 능력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온통 정력이었다. 그에게는 - 이러 기대를 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기는 하지만 - 카이사르의 조용한 성숙이나 혹은 아우구스투스의 섬세한 지혜가 없다. 그를 보면 (나폴레옹을 보듯이) 경탄하게 된다. 그가 혼자 힘으로 세계의 절반과 맞섰기 때문이고, 또한 그는 한 개인의 영혼 안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 잠재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155]

제9장 로마 공화국

로마와 카르타고가 기원전 264년에서 146년까지 전쟁을 하였다. 세 번에 걸친 카르타고 전쟁(포에니 전쟁)에서 많은 영웅들이 역사에 등장하였다. 레굴루스, 하밀키르, 한니발, 하스두르발,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 등이다.[167]

221년 스페인의 카르타고 군대는 한니발을 장군으로 뽑았다.... 그는 나폴레옹이 2000년 뒤에 선택하는 것과 같은 길로 알프스를 넘었다.[169]

제10장 로마의 혁명

기원전 139년의 첫 번째 노예 전쟁과 기원전 73년에서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가 지휘하는 전쟁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다.[181]

우리는 카이사르가 처음에는 무자비한 선동가이며 거침없는 난봉꾼이었다가 책임감에 의해 천천히 역사상 가장 신중한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의 결점을 보고 좋아하더라도 그가 위대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가 여자들을 유혹하고 교도관을 매수하고 책들을 썼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 자신을 그와 대등하게 여길 수는 없다.[195]

마침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제13군단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의 첫 마디 말이 벌써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동료 병사 여러분!> 하는 말이었다. 게으르고 부패한 귀족 정치는 로마에 질서, 정의, 번영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대들은 자기를 따르겠는가? 단 한 명도 거절하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그는 1개 군단을 거느리고 알프스 이남 갈리아의 남쪽 경계선을 이루는 작은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00]

기술적으로 보면 로마 공화정은 경련성 발작으로 되살아났다. 안토니우스가 평민에게 호소한 일은 공화정에 또 다른 기회를 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남은 일이라고는 폐허를 다스릴 권한을 놓고 브루투스에 맞서 안토니우스가 전투를 한 것이었다. 이어서 권력의 고삐를 누가 쥐느냐를 놓고 카이사르의 양아들이며 후계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전투를 벌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고 그들이 이집트에서 함께 자살하고 난 다음 옥타비아누스, 뒷날의 아우구스투스는 군주 통치 방식을 확립하고(기원전 27년) 이를 유지하였다. 그는 이것을 가리켜 <황제, 제1인자>라고 불렀다. 그렇게 해서 정치에 대해 플라톤이 말한 것들이 완전한 순환을 겪었다. 즉 독재관 통치에서 왕조, 이어서 귀족 정치, 이어서 공화제, 이어서 독재관, 이어서 왕조....[205]

제11장 로마 제국(기원전 27년 - 180년)

여자들은 어머니로서 존경받기보다는 성적으로 탐나는 대상이 되고 싶어 하였다. 많은 로마 토박이들은 결혼 생활을 기피하거나 아니면 피임, 낙태, 영아 살해 등을 통해 가족의 수를 제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현상을 부모의 권위와 사회적 질서, 로마인의 성격 탓이라고 여겼다.[210]

제12장 네로와 아우렐리우스

아피안은 로마의 속국이 되겠다고 간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한 외국 사절들을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 이전에 어떤 군주 국가도 사람들에게 그토록 자유를 준 경우가 없었다. 혹은 백성의 권리를 그토록 존중한 경우는 없었다. 르낭은 이렇게 썼다. <세계의 이상이 성취된 것으로 보였다. 지혜가 통치를 하고 23년 동안 로마 세계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지배를 받았다.>[231]

이 세상에서 훌륭한 기질이란 그것이 진지하기만 하다면, 아무것도 그것을 이길 수가 없다. 정말로 선한 사람은 불행에 대해 면역력이 있다. 어떤 재앙이 덮쳐도 그의 영혼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논리나 배움이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이다.[234]

제13장 인간 그리스도

나는 그가 행했다고 하는 대부분의 기적들이 암시에 의한 자연적인 결과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영혼에 미친 강하고 확고한 정신의 영향이라고 말이다.[242]

제14장 기독교의 성장

베드로는 시리아에서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고 서쪽으로 떠나 로마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베드로의 자리(로마 교황직)를 세우고 첫 번째 교황이 되었다. 그리고 64년 네로 황제 치하에서 박해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였다.[256]

바울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아마도 베드로가 죽은 것과 같은 해인 64년이었을 것이다.[258]

311년 갈릴레우스 황제는 그런 박해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관용의 칙서를 발행하였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259]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 의해 1098년에 소집된 십자군 원정은 동유럽과 서유럽이 기독교의 상업과 신앙을 위하여 중동 지역을 이슬람의 손에서 탈환하려는 낭만적인 노력이었다.[260]

1198년 교황이 된 인노켄티우스 3세는 이런 발전을 보고 교회와 국가에 대한 위협이라고 느겼다..... 폭력, 사회적 무질서, 불충 등에 대해 주요한 방어 체제가 되는 이 거대한 조직이 그 근간을 공격당하고, 물질적 바탕을 뺏기고 허풍스런 풍자로 모욕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느꼈다.[262]

십자군은 성벽을 부수고 도시를 장악하고 남자, 여자,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2만 명을 잔혹하게 살해하였다.[264]

억압에 대한 가장 엄격한 계율은 1220년에서 1239년 프리드리히 2세가 제정한 법이었다. 교회의 저주를 받은 이단자들은 <속인의 팔(지방 관청)>에 맡겨져 화형을 당하였다. 그들이 신앙을 철회하면 형벌이 완화되어 평생을 구금 상태로 살아야 했다.[265]

국가와 교회는, 그들 생각에 사람들이 도덕적, 정치적 무정부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법과 도덕의 복합적인 구조를 무너뜨리려 하는 이단자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공격에서 서로 힘을 합쳤다. 위기에 몰린 정부는 거의 모두 종교 재판 관청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국가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의견이나 행동에 대해 종교 재판과 동일한 형벌을 내렸다.
자유는 안전이 만들어내는 사치품이다.[266]

아마도 중세 시대의 시 문학에 자극을 준 것은 이러한 접근 불가능성이었을 것이다. 성취된 욕망을 낭만적으로 그려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방해가 없으면 문학도 없다. 음유 시인들은 새벽의 사랑 노래와 저녁의 사랑 노래에 뛰어났다. 그들은 낮엔 유혹하고 밤엔 비탄에 빠졌다.[266]

<지혜를 향한 첫 번째 열쇠는 자주 부지런히 질문하는 것이다..... 의심을 통해 우리는 탐구에 이르고, 탐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아벨라느>[272]

중세 사람들은 종교에 모든 것을 걸었다. 로마 문명은 그 신들의 죽음 혹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혼란으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들었다.[274]

교회가 야만인을 가르쳐 문명인으로 만든다고 여겨서 좋아하였다..... 교황들은 국가를 통제하고 왕들에게도 벌을 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가 널리 퍼지고 부유해지면서 강해졌다.[274]

중세의 영혼은 자라나는 세포처럼 두 가지 역사적 유기체로 발전하였다. 남부 유럽에서는 고전적, 에피쿠로스적, 이교적 르네상스이고, 북부 유럽에서는 초기 기독교적, 스토아적, 청교도적 종교 개혁이다. 중세의 영혼은 이제 두 개의 강력한 문화가 되었다. 그들을 통해 문명을 보전하고 전달하는 중세의 역사적 업적은 완성되었다.
그 죽음이 곧 그 완성이었다.[275]

제15장 르네상스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중심으로

돈은 문명의 뿌리다..... 그것은 중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또한 대학과 지식과 철학의 성장 덕분이었으며, 역사와 법을 연구해서 정신이 현실적으로 예민해진 덕분이었다. 더 폭넓은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신앙의 교리를 의심하고 성직자가 속인과 똑같이 쾌락주의적이라는 것을 보면서 교육받은 이탈리아인들은 지적, 윤리적 금기(터부)들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워진 감각은 자연, 여자, 남자, 예술에 드러난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1434년 - 1534년) 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통합되지 않는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규율(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282]

르네상스란 시간상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과 사유의 방식이다.[284]

인간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이것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요, 인간이 받은 최고의 놀라운 축복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삶의 씨앗을 주셨다.[298]

제16장 르네상스 Ⅱ 로마

일부 추기경들은 연간 수입이 3만 두카토(50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신을 성직라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정치가, 외교관, 통치자라고 여겼다. 그들은 로마 교회의 로마 원로원이었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338]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다른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문명이란 소수의,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원래의 정당성을 넘어 과대하게 찬양하는 것이 될 것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은 밭을 갈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지고 동이 틀 무렵부터 어스름이 질 때가지 일을 하였고, 저녁이면 생각을 위한 근육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삶을 살았다.[341]

『군주론』 이것은 가장 정직하고 부도덕한 책이다. 명료하고 솔직하게 국가는 자신의 시민들에게 권고하는 도덕률을 실천할 필요가 없으며 실천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국가는 위증, 사기, 도둑질, 잔인성, 살인 등에 대해 형벌을 내리는 일이 옳다. 그러나 국가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될 경우 이런 행동의 일부나 전부를 행하는 것 또한 옳다.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의 규칙인 <국민의 안녕이 최고의 법>이라는 말을 국가의 - 곧 국민의 조직 - 안전이 최고의 법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평화라는 기독교의 이상은 시민의 기력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이따끔 전쟁을 하는 것이 국민에게는 강장제가 되고 규율과 통일성과 기운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로마 공화국에서 미덕이란 겸손과 온화함이 아니라 정력과 지력으로 무장한 남자다움, 강함, 용기 등이었다. 국민을 강하게 하는 전쟁은 좋은 것이다. 한 국가가 팽창을 멈추면 곧 죽기 시작한다.[347]

개혁은 수많은 관리들에게는 지겨운 일이었고, 그래서 어두운 저항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하드리아누스가 빨리 죽기만을 바랐다. 교황은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개선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탄식하였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하였다. <한 인간의 능력이란 얼마나 많이 그 시대에 달려 있는 것인가!> [350]

<부리단의 당나귀> 스콜라 철학자인 장 부리단이 망설임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철학적인 나귀가 절망적으로 배가 고팠지만 두 개의 건초더미가 같은 거리에 떨어져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어느 한쪽을 선택할 아무런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기에 굶어죽었다는 것이다.[352]

에라스무스는 도시의 평온하던 시절이 지나갔음을 탄식하였다. <로마는 기독교 신앙의 성소이고, 고귀한 영혼을 양성하는 곳이며 많은 좋은 것들의 거처일 뿐 아니라 민족들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로마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나라보다도 더욱 소중하고 달콤하고 귀한 곳이었던가!..... 실로 이것은 한 도시의 파괴가 아니라 전 세계의 파괴이다.>[356]

제17장 르네상스 Ⅲ 베네치아의 일몰

제18장 종교 개혁 Ⅰ 위클리프와 에라스무스

1300년경 이 장엄한 구조는 인간의 천성으로 인해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교회의 일부 책임자들은 인간적이고 부패하고 엇나가고 억압적이고 강요적인 속성을 드러냈다. 왕들 중 일부는 - 사회 질서와 발전하는 경제로 강해진 왕들 - 세속의 권력을 향한 교황의 요구를 거절하고, 백성의 세금이 이방의 권력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탄식하였다.[374]

위클리프는 단호히 말한다. <많은 사제들은 유부녀, 처녀, 과부, 수녀들을 욕보인다.> <그들은 강도이며... 약아빠진 여우이고... 강탈하는 늑대이며... 대식가이고... 악마니며... 원숭이다.> [378]

수많은 인자들과 영향들 - 교회 내부의 것, 지적, 감정적,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인 것들 - 이 수백 년의 방해와 억압을 견딘 다음 하나의 회오리바람으로 뭉쳐져 야만인이 로마를 정복한 이후로 유럽에서 가장 큰 전복을 가져올 참이었다. 아비뇽 유폐와 교황 분열로 인해 교황청의 힘이 약화된 것. 수도원 계율과 성직자 독신주의의 붕괴, 고위성직자의 사치와 교황청의 부정 부패, 교황들의 세속적 활동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 6세의 도덕성의 결함, 율리우스 2세의 전쟁, 레오 10세의 조심성 없는 즐거움. 성유물 판매와 형벌 면제 칙령(면죄부) 행상. 십자군 전쟁과 터키 전쟁에서 기독교에 대해 회교가 승리를 거둔 일. 기독교 이외의 신앙이 점차 퍼져나간 일. 아랍의 과학과 철학의 유입. 스콜라 철학이 붕괴되고 스코투스의 비합리주의와 오캄의 회의주의가 등장한 것. 개혁을 위한 공회의 운동의 실패. 세속적 고대의 발견과 아메리카대륙의 발견. 인쇄술 개발. 읽기 교육과 일반적인 교육의 확대. 성서의 번역과 성서 읽기.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았던 사도들의 삶과 교회의 화려한 의식 사이의 모순에 대한 새로운 인식. 도이칠란트와 잉글랜드의 부와 경제적 독립이 커진 일. 종교적 제약과 요구를 싫어하는 시민 계급의 확대. 민족주의의 심화와 왕조들의 권력 강화. 모국어와 모국 문학의 민족주의적 영향. 발도파, 위클리프, 후스 등의 영향. 종교 의식은 줄이고 더욱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며 직접적인 종교를 향한 신비주의적 열망......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힘의 급류를 형성하였다.[403]

제19장 종교 개혁 Ⅱ 루터와 공산주의자들

루터는 도이치어로 그 유명한 역사적 답변을 하였다.
폐하와 귀족들께서 간단한 답변을 원하시므로 나는 쓸데없이 구별하지 않고 대답하겠다..... 내가 성서의 증언에 의해서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유죄로 인정된 것이 아닌 한(나는 교황과 공회의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서로 모순되니까), 나의 양심은 하느님 말씀에 따를 뿐이다. 나는 어느 것도 취소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수도 없다. 양심에 거슬린다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멘.[420]

농민 전쟁에서 발생한 생명과 재산의 손실은 오로지 30년 전쟁의 그것하고만 비교될 수 있다. 전쟁이나 앙갚음 과정에서 죽은 농민들만 13만 명에 이르렀다.[433]

제20장 카톨릭 종교 개혁(1517년 - 1563년)

성직자의 결혼은 금지되고 성직자가 애인을 두었을 경우에는 심각한 형벌이 정해졌다. 성직자들의 도덕성과 규율을 증진하기 위해 많은 작은 개혁들이 도입되었다.... 공회의는 루터의 반란을 점화시킨 잘못된 악습들을 정직하게 인정하였다..... 공회의가 이제 그 임무와 유용성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교황과 황제가 동의함으로써 공회의는 1563년 12월 4일 마침내 지친 대표들의 행복한 연설 속에서 끝을 맺었다. 앞으로 수백 년을 위해 교회의 노선이 확정되었다.[460]

카톨릭의 종교 개혁, 혹은 반종교 개혁은 주요 목표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카톨릭 국가나 개신교 국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계속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처녀를 유혹하고, 직위를 판매하고,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성직 계층의 도덕성은 개선되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거친 자유는 진정되어 인류의 요구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형태가 되었다.[461]

제21장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이 옥좌에 나(엘리자베스 여왕) 보다 더 강력하고 더 지혜로운 왕들이 과거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더 사랑한 왕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엘리자베스 여왕>[478]

베이컨이 죽을 때 남겨놓은 종이에서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로울리는 암호로 된 다음의 유명한 문장을 찾아냈다. <나는 지난 50년 동안 영국에 있었던 가장 공정한 판사였다. 그러나 하원은 지난 200년 동안 가장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이 기소의 효과는 좋았다. 공직에서 부패가 줄어들었다.[482]

오늘날 카톨릭이건 개신교건 기독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과학 및 철학의 확산과 힘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 현대의 드라마는 베이컨을 통해 세계를 향하여 그 프롤로그를 말했던 것이다.[498]

옮긴이의 글 - 귀 있는 이여, 들어보라

여기서 역사는 영웅의 역사이다. 영웅이란 역사상 위대한 정치가나 장군만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 시인까지 포함한다. 이 모든 영웅들은 한결같이 위대함과 더불어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다. 듀런트는 이들의 위대성을 깎아 내리지 않지만 슬그머니 미소를 띤 채 약점을 거침없이 털어 놓는다. 역사나 사실을 바라보는 이러한 냉정함이 우리에게는 낯설다.[501]

위대하든 평범하든 상관없이 한 인간을 오로지 훌륭하게만, 또는 나쁘게만 서술할 수 있겠는가? 위대한 인물이 지녔던 인간적인 약점은 그 인물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위대성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들이 지닌 약점을 보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하고 허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위대했으며 마찬가지로 약점 투성이인 우리 또한 위대해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502]

삶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대체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가? 그토록 잔인하고 그토록 위대하고 그토록 허망하면서 또한 그토록 아름답다. 이러한 사실을 언제나 거듭 느끼지만 그때마다 이것은 얼마나 이상한 체험인지 새삼 깨닫는다.[502]

죽기까지 인류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통찰을 계속했던 그 삶의 흔적을 만나고 그 깊은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 삶이 참으로 경이롭고 또 노년을 존경하는 마음이 뭉클 솟아난다. 나도 이같이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고 싶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여기서 한 스승이 후세와 젊은이들에게, 특히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역사의 교훈을 귀담아 들어보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귀 있는 이여, 들어보라.[503]



3. 내가 저자라면

오랜만에 읽은 세계사(서양사) 관련 서적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4대 문명발상지를 돌아가면서 관찰하고, 이어서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기독교, 중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개관하면서, 역사 속의 인물, 즉 시대를 이끌어간 영웅을 통해서 그 시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방식을 취한다.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점에서 보면 이전에 읽은 사기열전과 비슷한 구성을 갖고 있다고 불 수 있다.

이 책은 흔히 역사서들이 중점을 두는 정치, 사회적 역사를 보여주기 보다는, 사상(철학)과 예술의 흐름을 좀 더 부각시킴으로써 문화사적 접근을 시도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저자는 90이 넘은 고령임에 불구하고, 유려한 문체, 번득이는 유머와 재치로 독자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또한 그는 영웅이 지녔던 인간적인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책 속의 영웅들을 보다 인간적인 영웅으로, 평범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의 영웅으로 다가 올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이 책에서 가장 돗 보이는 점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자의 경력이 말해 주듯이, 탁월한 저자의 문장표현 능력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역사를 쓰는 철학자> 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의 표현력은 간결하고 재치가 넘치며 유머러스하기 까지 하다. 예를 들면,

“그리스 예술은 이성을 눈에 보이게 만든 것이다. 그리스 회화는 선으로 이루어진 논리학이고 그리스 조각은 균형의 숭배이며 그리스 건축은 대리석으로 된 기하학이다.”[116]

“필립 왕은 문명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강력하고 훌륭한 짐승이었다.”[137]

“역사는 신문과 마찬가지로 이름과 날짜는 바뀌어도 사건은 언제나 똑같다.”[144]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피 속에 암호랑이의 사나움이 들어 있어서 주기적인 잔인성의 발작에는 속수무책이었다.”[152]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 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두 번째 이 책의 장점은 책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수많은 인용과 예시들이다. 역사 속의 주인공들이 한 말 중 중요한 내용을 주인공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고, 곳곳에 아름다운 시와 문장들을 수록하여 독자들에게 책 읽는 기쁨을 더해 준다.

이 책에서 좀 보완되었으면 하는 점은, 역사서인데 연대표나 지도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수많은 인명과 지명이 나오므로 책 말미에 색인표를 만들어 두었으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그가 23장으로 생각했던 책을 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부족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내게 있어서 역사란 철학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려 한다고 말했다..... 역사는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결론적으로 나는 자신이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10]

인류의 역사는 생물학의 한 단편(단편)이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종들 중의 하나이고,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싸움과 살아남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들의 경쟁에 종속된다. 심리학, 철학, 정치적 능력 그리고 이상향들은 이 생물학 법칙과 화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15]

지혜로운 사람은 심지어 도(道)와 지혜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지혜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범과 경험으로만 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을 경우 그는 이것을 감추려 한다. <그는 자신의 명석함을 완화시키려 하며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몽매함과 같아진다. 그는 학식 있는 사람보다는 단순한 사람들과 더 마음이 맞으며 초심자의 모순을 보고 화를 내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부나 권력에 가치를 두지 않고, 불교에서 말하는 최소의 수준으로 소망을 줄인다.[31]

칼라일은 욥기를 가리켜 역사상 기록된 가장 위대한 문헌의 하나라고 하였다. 모든 신학 체계를 괴롭히는 어두운 질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곧 <불의가 그토록 자주 승리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정의와 사랑의 신이 다스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83]

필립 왕은 문명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강력하고 훌륭한 짐승이었다.[137]

기원전 356년에 에페소스에 지어진 아르테미스 여신의 세 번째 신전도 이 일곱 기적에 포함된다. 50년 동안의 작업을 통해 세워진 이 신전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이 되었다.
처녀 신은 그곳에서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 아르테미스로 숭배되었고, 이러서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는 디아나로, 기독교에 의해서는 성모 마리아로 숭배되었다. 역사는 신문과 마찬가지로 이름과 날짜는 바뀌어도 사건은 언제나 똑같다.[144]

이 세상에서 훌륭한 기질이란 그것이 진지하기만 하다면, 아무것도 그것을 이길 수가 없다. 정말로 선한 사람은 불행에 대해 면역력이 있다. 어떤 재앙이 덮쳐도 그의 영혼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논리나 배움이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이다.[234]

<지혜를 향한 첫 번째 열쇠는 자주 부지런히 질문하는 것이다..... 의심을 통해 우리는 탐구에 이르고, 탐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아벨라느>[272]

이 옥좌에 나(엘리자베스 여왕) 보다 더 강력하고 더 지혜로운 왕들이 과거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더 사랑한 왕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엘리자베스 여왕>[478]

베이컨이 죽을 때 남겨놓은 종이에서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로울리는 암호로 된 다음의 유명한 문장을 찾아냈다. <나는 지난 50년 동안 영국에 있었던 가장 공정한 판사였다. 그러나 하원은 지난 200년 동안 가장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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