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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0일 22시 43분 등록

삼국유사

 

일연(고운기)/현암사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P272 – 나라가 망하는 징조

자연의 이상 변동을 기록하는 사관의 뜻은 그것이 사람의 잘못으로구체적으로는 정치의 불안정이겠지만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어려움이 닥친다는 경고에 있을 것이다.

 

P272 – 나라가 망하는 징조

시절은 봄이 오고 여름이 왔으되어지러운 세상은 뜻밖에 펄펄 휘날리는 눈 속에 잠겨 간다.

 

P277 – 나라가 망하는 징조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곧 지금의 진도완도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을 건설한 사람이다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요충지였으므로여기를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장보고의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해상 왕국의 붕괴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그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에서 더욱 안타깝다인재들이 죽어 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P278 – 나라가 망하는 징조

서울부터 전국에 이르기까지 지붕과 담이 즐비하게 이어지고, 초가집이란 한 채도 없었다. 연주와 노래 소리 끊이지 않고, 사시사철 맑은 바람 불고, 비는 적당히 내려 주었다고 태평스런 시대의 배경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촛불이 꺼지지 직전 마지막 한 번 타오르는 불길과 같았다. 이 구절은 실로 역설적으로 읽어야 제대로 그 뜻이 전해올 것이다. 일연은 처용이라는 특이한 사내의 이야기를 통해 그 역설을 증명해 가고 있다.

 

P281 – 나라가 망하는 징조

처용은 정말로 용의 자식인가? 문면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어 갖가지 해석이 나왔는데, 앞서 말한 무속적인 것 외에도 지방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방 호족의 자식을 서울에 볼모로 잡아 두는 기인 제도가 신라에 있었거니와, 왕이 울산에 간 것이 모종의 정치적 사건 때문이라면, 일이 해결되고 난 다음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형적인 기인 제도의 볼모다.

 

P284 – 나라가 망하는 징조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다.

 

 

P286 – 나라가 망하는 징조

기미(機微)를 보아 사리(事理)를 판단하는 법이다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p287 – 지는 해 뜨는 해

신라의 멸망의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 을 내세우고 싶다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p289 – 지는 해 뜨는 해

하늘이 감옥을 흔들었다는 대목은 사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간절해도끝내 가슴에 묻어야 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사필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나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다만 그 말 대로 이런 선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p289 – 지는 해 뜨는 해

이쯤에서 일연이 거타지의 이야기를 집어넣은 것은 참으로 절묘한 수순이다한 편의 아름다운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에서 거타지는 사실 새로운 나라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거타지는 『고려사』의 「세계(世系)』에 나오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과 닮은 인물이다.

 

P293 – 지는 해 뜨는 해

거타지가 쏜 화살은 곧 이 세상의 부조리를 향하여 날아가 박히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가? 그의 도움을 받은 이는 다름 아닌 서해의 신이다. 그 신이 자기 딸을 꽃송이로 만들어 거타지의 품에 넣어 주는 데에서 이야기는 절정을 이룬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를 열게 될 성군을 탄생시킬 씨앗이다. 여기서 바로 왕건의 아버지 용건이 태어나는 것이다.

 

P302 – 지는 해 뜨는 해

나 또한 앞서 비슷한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 들 무슨 상관이랴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희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오히려 그것은 하늘의 뜻이요왕조 사회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백성의 힘이다.

예나 지금이나 맞는 말이다.

 

 

P303 – 지는 해 뜨는 해

김부식의 사론으로 넘어가 보자조선조에 들어 김부식은 사대주의 각에서도 민족적 주체성에서도 모두 공격을 받았다완벽한 중국 중심에 빠져든 한편의 유학자들은 그를 얼치기 사대주의자 정도로 보았고실학의 바탕에서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보려 했던 다른 한편 유학자들은 민족의 주체성을 모르는 지식인 정도로 보았다살아 있다면 김부식의 처지는 참으로 난처하겠다특히 이런 사론에서 밝힌 자신의 견해가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니차라리 쓰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삼국사기대로의 역사적 가치가 있다. 정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안 썼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삼국사기의 가치를 이해해야 한다.

 

P309 –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부여를 ‘여주’ 라고도 부른다는 일연의 기록은 매우 값진 것이다일연 자신이 직접 자복사라는 절에 가 보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 다거기서 본 글을 바탕으로 지명의 유래를 확실히 고증해 놓고 있는 이런 대목이 『삼국유사』가 지닌 매력 가운데 하나다.

 

P311 –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고구려로부터 가중되어 오는 압박을 견디기에 백제는 너무 작은 나라였다. 그래서 그들의 천부적인 이동솜씨를 발휘해, 어느덧 배를 만들어 남쪽으로 일본열도를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한강 유역을 고집하지 않을 바에야 일본에 이르기 가까운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것이 웅진으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속내로 보인다.

 

 

P315 –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일본 특히 왕실의 뿌리가 한반도라고 해서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거나한국이 종주국이라고 하는 따위의 생각은 참으로 난센스다한반도니 일본열도니 하는 말은 모두 후세가 만들어 낸 관념이다그들은 먹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던 당대의 생활인일 뿐이었다그 무렵 사람이 지금 살아온다면 그는 한반도라는 말도 일본열도라는 말도 모를 것이다.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이라든가 나라라는 개념은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관념이다.

 

P319 –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왕실과 귀족들의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책에 왕의 출신지가 백제라고 분명히 밝힌 것은 여기 뿐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민달왕의 아버지인 흠명왕도 당연히 백제인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최근 일본의 사학자 중에는 이 흠명왕이 실은 백제 성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을 정도다.

 

P326 –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수도를 교토로 옮기면서 헤이안 문화를 열었던 환무왕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200여년 뒤, 지금은 일본의 중심인 관동 지방으로 처음 진출하여, 첫 막부 카마쿠라를 만들고 쇼군이 된 이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모두 일본인이라고 말하지 백제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뿌리에 대한 정확한 규명은 필요하지 않을까? 왜 그걸 부정하는가? 백제인이라고 한들 그것이 한국의 우수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역사적 사실의 한 조각일 뿐이다.

 

P327 –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 게서 나온다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한 사회가 발전한다. 서동은 우리 고대사에서 만나는 맹랑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정말 서동의 설화는 사실일까? 늘 궁금했다. 그리고 부러웠다. 그 지혜와 용기가

 

 

P330 –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영웅은 자기가 타고난 비범한 재주로 고난을 극복해 낸다서동은 이웃나라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으로 첫발을 내딛고 있다첫발치고는 통도 크다.

여기에 「서동요」가 나온다물론 이 제목은 요즈음 학자들이 만든 것이다이런 종류의 노래를어린 아이들이 불렀다는 데에서 동 요그리고 그 내용이 어떤 목적한 상황을 이미 이룬 것처럼 상정하고 있다는 데에서 참요 또는 예언요라고 한다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동요요 참요라고 할 수 있다.

 

P337 –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나 전파되기 마련이고자생적으로 생겨난 이야기가 서로 비슷한 경우마저 있기도 하다.

 

P338 –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 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P342 –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신라는 아직 유학승 한 중국에 가지 못하고 있을 때 백제는 벌써 많은 승려가 유학을 다녀오고 불상을 들여와, 자기들의 이름을 넌지시 하나 더 얹어 놓고 있다.

그 것도 능력인 것 같다. 새로운 것을 본인의 것으로 은근 슬쩍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P343 –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미륵불이 자비의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P346 –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미륵상 셋과 회전낭무를 각기 세 군데에 세웠다’ 는 미륵사의 가람 구조는 미륵 사상의 삼론을 그대로 반영 한 것이다이 같은 구조는 황룡사의 조성으로다시 일본 나라의 동대사의 조성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P347 – 견휜, 비운의 영웅

실상 견훤은 백제 땅에서 나온 마지막 왕이다신라가 경순왕을 끝으로 왕의 역사를 마감했다고는 하나그의 외손자들이 고려조의 왕에 올랐고경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상당수 고려 왕실의 요직을 차지했던 것과 비교된다고구려 또한 고려로 그 정신사적 계승을 해주었고고려조 중반에는 묘청이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며 반란까지 일으키지 않았던가그러나 백제는 견훤으로 모든 것이 깨끗이 끝나고 말았다.

 

P353 – 견휜, 비운의 영웅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휜은 제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그 대목은 앞서 김부대왕을 쓰면서 소개했다.

항우와 유방의 싸움을 보는 듯 하다. 결국 본인의 능력보다는 덕이라고 해야 할까? 인재를 등용하고 믿고 맡기어 본인의 세를 만드는 사람이 이긴 것이다.

 

P363– 견휜, 비운의 영웅

능환만은 "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다신하된 도리에 마땅히 이라야 하단 말이냐, 하고 목을 베었다.

간신다운 최후다.

 

P363– 견휜, 비운의 영웅

그 때가 언제인들 무슨 상관이랴? 따지고 보면 자식을 원수로 여겨 죽이지 못하는 것을 분통해 하고, 치사한 목숨 부지하다 등창이 나서 제 명을 재촉한 사람의 생애다. 실제로 그 지경까지 되었을까 의아스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정말 견휜이 비운의 영웅이었을까? 그리고 고려의 평가처럼 난폭했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이긴자의 기록이 역사이다. 견휜은 전체적인 세에서 밀려서 결국 싸움에서 진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후대의 각색되고 윤색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든다.

 

P364 – 신비의 왕조, 가야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기에 오늘날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된 ‘베스트 3’를 뽑으라고 하면 무엇을 들겠는가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은 단군신화  향가  가락국기 이 세 가지에다 점을 찍었다.

 

P364 – 신비의 왕조, 가야

허왕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온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

 

P369 – 신비의 왕조, 가야

그런데도 가야의사적을 적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지금 우리로서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원 기록자는 스스로도 감격스러운 듯 이렇게 말한다.

가야는 고대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 곳은 완충지였다. 신라와 백제가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을 이루었고, 일본열도에서 몰려온 또는 몰려갈 다수이 사람들에게 생활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삼국유사가 아니면 잊혀진 역사가 될 뻔했다.

 

P371 – 신비의 왕조, 가야

하늘로부터 내려온 여섯 개의 알, 이야기의 골자는 신라의 박혁거세나 김알지의 탄생을 알리는 대목과 매우 닮은, 남방계 그대로다. 다만 여기에 이색적인 것 한 가지가 노래다.

 

P372 – 신비의 왕조, 가야

심지어 구워 먹겠다는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에서 우리 옛 노래의 특이성을 발견한다이것은 삶을 개척하는 매우 강한 의지나 다름없다.

 

P378 – 신비의 왕조, 가야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P384 – 신비의 왕조, 가야

다만 그것으로 식민지 운운은 난센스다, 제 땅에 아직 제대로 된 나라도 갖추지 못한 때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란 말인가?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한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P385 – 불교로 보는 역사

전반부와 달리 여기서부터 후반부의 『삼국유사』는 완연히 불교적 성격을 띤다처음 불교가 전래된 일탑과 절을 만든 경위고승들의 전기 등이 누벼지는데일연 자신이 승려 출신이기에 그랬을까전반부에 비해 이야기도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인용한 책도 다양하다.

 

P386 – 불교로 보는 역사

일연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이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갗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흥법은 곧 흥국이었다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쿄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물론 일연은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다그러나 흥법 편의 여선 가지 이야기에 숨어 있는 메시지야말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나는 일단 이것을 인연이 지닌 ‘불교역사주의’ 라고 명명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일연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물론 당시의 불교는 지금과는 달리 사회적 기본 시스템적 역할을 했기에 일면 일리가 있기는 하다.

 

P390 – 불교로 보는 역사

계롱산에서 유명한 절인 갑사는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법성포에서 한산주로 올라가는 여정에 그는 자신의 발자취를 절을 짓는 것으로 남긴 것일까?

 

P391 – 불교로 보는 역사

다만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두고, 정작 승려인 일연 자신은 삼국사기의 기록만 옮겨다 놓기가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여기서 찬을 생각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 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P394– 불교로 보는 역사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이익에 혈안된 장사꾼들의 잰 걸음도 아니 과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세계와 인간이 하나 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 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P396 – 불교로 보는 역사

종교를 처음 전할 때 의술이 따라 다닌 것은 동서의 고금을 두고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 대목에서 우선 그 점이 눈에 띈다. 하늘에서 꽃이 내렸다거나 처음 지은 절의 이름이 홍륜사라거나, 이 짧은 기록에 불교사적으로 보면 적지 않은 중요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가 참으로 놀라마지 않을 대목은 그런 아도가 마지막에 자결을 택했다는 것이다.

종교의 포교를 위해서는 기적, 마술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종교의 본질과 무엇이 연관이 있단말인가? 의문이다.

 

 

P399 – 불교로 보는 역사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눈 덮인 땅에 봄빛은 돌 지 않았지만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산불(信佛)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스런 상황에서 꿋꿋한 믿음을 지킨 그녀다겨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완고한 신라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P401 – 순교의 흰 꽃 이차돈

이 승려가 내전의 궁주와 간통을 하다 죽임을 당한 사건이 위 조의 내용이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정말로 그랬는지 의심스러운 한편, 안팎으로 늘어나는 신불의 분위기를 꺾기 위한 어떤 모략이 끼여들었을 가능성도 떠올릴 수 있다.

 

P407 – 순교의 흰 꽃 이차돈

어떤 자료를 받아들였는가의 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차돈의 머리를 베었더니 흰 젖이 한 길이나 되었다는 대목은 어디에나 있다. 붉은 피가 아니라 흰 젖이었다는 이적이 이 이야기의 절정 부분이며, 흰 젖은 부처님의 감응을 말하는 것이다.

 

P411 – 순교의 흰 꽃 이차돈

일연은 아도와 법흥왕 그리고 이차돈을 묶어 세분 성인이라고까지 지칭하였다. 앞서 일연은 비처왕 때 아도가 신라에 이르렀다는 삼국사기의 이 대목을 부정한 바 있다.

 

P413 – 순교의 흰 꽃 이차돈

백제에 비한다면 고구려에 대한 일연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비판적이다. 도교를 신봉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가 쇠태해진 데 대한 아쉬움이 컸겠지만, 굳이 그것만으로 이유를 댈 수야 없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일연의 사관에 있는 약간의 아쉬움과 약점이 아닌가 싶다.

 

P417 –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황룡사는 옛 경주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지리상으로만 아닌 마음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황룡사는 상상 속에 신라의 불교를 상징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다.

 

P425 –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아쇼카는 콤플렉스가 많은 왕이었다. 못 생긴 얼굴에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마저 가득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로 뻗어 나와 결국 가상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잘 생긴 사람을 들여보내 죽이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누구에게나 콤플렉스는 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 짓는 것이다.

 

P428 –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아쇼카왕은 참회하고 불교를 전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사자나 황소 또는 코끼리의 모습을 새긴 기둥을 세우는 일이었다. ‘아소카의 기념주라 불리는 이 유명한 조각 기둥은 불교 미술의 출발이라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미술사학자들은 불상의 출현을 서기 1세기경의 쿠샨 왕조 때로 보고 있다. 석가모니 열반 후 500여년이나 지났을 무렵이다.

불상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처음 알았다. 불상은 불교 초기부터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P430 –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순도의 불상도 장륙존상도 모두 없어져 버린 지금, 한반도라는 작은 공간에 함께 머물렀던 세계 불교 문화의 두 중심을,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워할 뿐이다.

 

P433 –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황룡사의 착공이 553, 완공이 569년 그리고 장륙존상의 조영이 574년이다. 인도 모델의 불상 앞에 중국 모델의 탑이 서려는 순간이다. 절은 본디 왕궁으로 쓰려고 지었던 화려한 건물, 그야말로 신라 건축 문화의 총합이 여기 있다.

황룡사에 대한 일연의 사랑이 느껴진다.

 

P434 –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신라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인도의 불교 문화 그리고 가까이는 백제로부터 들어온 기술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곳이 황룡사다.

신라 불교 문화의 정점이 황룡사이다. 그래서 더욱 더 황룡사의 손실이 아쉬운 것이다.

 

P444 –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준비가 되어 있어야 진리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P451 –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영동고속도로의 상진부 톨게이트에서 빠져 나가 월정사를 들러가곤 했다. 상진부에서 월정사로 들어가는 길도 길이려니와, 월정사의 전나무 숲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대로이고, 월정사 뒤편으로 성원사 가는 길은 더욱 호젓하고 아름답다.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어찌 그리 맑고 차가운지 그리고 다시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진고개를 넘어 주문진으로 가는 길이 마지막 코스다. 그렇게 태백산맥을 한 번 넘어서면 폐에 가득한 먼지가 깨끗이 씻어 나오는 듯 하다.

갑자기 월정사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정말 늘 갈 때마다 느끼지만 멋진 길이다.

 

P455 –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일본에서 온 지인들이 나와 함께 몇 군데 절을 돌아보고 난 다음, 산과 물과 절이 어울린 전체의 풍광이 특히 인상에 남았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라서 우린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P469 –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하나 들자면 어머니다. 세속의 인연에 너무 연연해한다고 탓하지 말라. 일연의 어머니는 열아홉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P471 –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그들을 살린 어떤 매카니즘이 중요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그런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

 

P476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부처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는다는 말은 평범 속의 비범이다.

 

P480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성불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관음보살이 흔히 여자의 모습인 것은 삼국유사 안에 여기 말고도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여자의 모습인가는, 일연이 결론 부분에서 여자는 부녀자의 몸으로 나타난 섭화자라 할 만하다. 화엄경에서 마야부인 신지식이 열한 군데에 살면서 부처를 낳아 해탈문을 환상했다는 것과 같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은 숨은 뜻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 데서 답을 찾을 수 있다.

 

P499 – 낙산사의 힘

이 여자는 표주박에 해가 담긴 물을 마시고 와서 잉태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범일이다. 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이야기는 신약성서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이는 신성함을 표현하기에 한 방편인 듯 하다.

 

P502 – 낙산사의 힘

그를 기다리는 어머니는 인생의 모진 인연의 실체이고 숙명이다. 거기에다 소년 일연은 자신과 어머니의 얼굴을 겹쳐 보았을 터이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떠나 구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 일연에게는 귀하나가 없는 사미승의 이야기가 그렇게 가슴 깊이 아로새겨졌다.

 

P504 – 낙산사의 힘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사는 온갖 영고성쇠가 한솥밥 끊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

P508 – 낙산사의 힘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 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맺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그러나 어째 하겠는가?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부리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

그렇게 알면서도 또 억척스럽게 이익만을 위해 이전투구하는 건 왜 일까

 

P513 – 운문사 이야기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이런 지식인들이 지난 역사에 어디 김부식뿐만 이겠는가.

 

P521 – 운문사 이야기

일연은 이미 13세기에 이 땅에 뿌리 내린 불교의 모습을 주체적으로 인식한 이였다고 보아 무방하리라

 

P521 – 운문사 이야기

기실 원광은 오늘날의 일반일들에게 세속오계를 지은 승려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세속오계는 다분히 유교의 삼강오륜에서 오륜과 닮아 있다.

 

P527 – 운문사 이야기

대체로 삼국유사의 편찬이 이 절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삼국유사안에서 그 같은 심증을 갖게 하는 기록이 많이 보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 두 조에 걸치는 운문사 기록으로 분명해진다.

 

P530 –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 의해편에서 원효의 전기를 쓰며 지은 제목 원효불기를 풀어보면 그렇다.

의상의 관형어가 화엄을 전한 분, 자장이 계율을 정한 분이라고 해석해도 좋다면, 성사는 무슨 뜻일까?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불교의 최고 경지를 이룬 분이라 해야 할까?

 

P533 –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이 곳에 삼성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는데, 아직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여기서 원효와 설총, 그리고 일연이 태어났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믿는다.

대단한 마을이다. 이런 인물들이 셋이나 태어나다니

 

P535 –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과부인 요석공주를 가리키지만, 그 주인공이 승려이기에 꺼림직한 기분은 나라의 이익으로 명분을 세운다. 그만한 여유와 융통성이 신라를 신라이게 했던 것은 아닐까?

너무 지나친 신라 위주의 해석은 아닐런지

 

P537 –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배우들이 노는 도구란 일반 민중들에게 익숙하고 재미있는 것이었으니, 거기에 빌려 어려운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고, 누구나 가까이 하는 불교를 만들었다.

 

P545 –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한 마디로 말하면 원효는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다. 그로 인해 한국의 불교가 만들어지고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P549 – 의상, 화엄의 마루

의상이 원효와 대비되어 자주 등장한다는 말은 앞서도 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국의 불교가 큰 두 흐름을 이루는 등, 여러모로 대비할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P556 – 의상, 화엄의 마루

의상은 이 곳으로 지엄(602~668)을 만나러 간 것이었는데, 그는 이미 27세에 화엄경수현기를 지은 중국 화엄종의 제 2조였다.

큰 스님 지엄의 눈에 의상은 준비된 큰 재목이었다. 그에게 부지런히 화엄의 묘의를 가르쳤다는 그 다음 구절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P530 – 의상, 화엄의 마루

의상은 부석사를 지은 다음 거기 우물을 하나 만들어 용이 된 선묘가 머무르게 했다. 1950년대에 나왔던 어느 연구자의 논문에는 그 우물을 선묘정이라 부르며, 최근까지도 우물이 남아 있었다고 쓰여 있다.

 

P570 –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힌두 문화라는 큰 틀에서 그것이 길들여진 것이건 아니건 지금 그들이 사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거기 부러운 부분이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와 정말로 달리 사는 모습에 대한 문화적 충격이었으리라, 우리가 지금 너무 모질게 살고 있어서 그것은 더욱 선명했겠고

우리네 삶이 너무 각박한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린 왜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서로를 죽여가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

 

P574 –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그렇기에 일연이 제목에다 귀촉제사라 한 귀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결국 그 곳이 진정 돌아갈 곳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들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P593 –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오늘날 금산사가 미륵 신앙의 중심지가 된 것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무극의 기록에서는 금당과 불상이 완성된 날짜를 766 5 1일이라고 적고 있다. 진표의 나이 불과 33세 때 일이다.

 

P601 –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샘은 없었다. 아니 본디 있기는 있었다고 했다. 절에서 만난 스님 한 분은, 수도가 들어오자 샘은 빨래터로 전락했고, 얼마 안 있어서 그나마 절 안팎에 콘크리트 포장을 하면서 묻어 버렸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명했다.

샘은 이 절이 생겨난 유래와 성격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상징물이다. 없던 것도 만들어 놓을 바에 있는 것마저 없애 버린 처사가 무작스러워, 속으로 점찰범회 자리에 웬 약사여래람?” 이렇게 중얼거리며 산을 내려온 적이 있었다.

우리가 역사적 문화재와 이야기를 망친 사례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싶다.

 

P605 – 밀교의 한 자락

전부 5권으로 이루어진 삼국유사의 마지막 권은 이 신주편부터 시작한다, 신주라는 말은 밀교 신승들의 사적을 뜻하겠는데, 일반적으로 다른 고승전에서 쓰이지 않는 용어다.

 

P616 – 밀교의 한 자락

중국의 못된 이무기가 용으로, 다시 버드나무에서 곰으로까지 변하는 이야기의 구조가 무척 복잡한 만큼 이야기는 흥미를 더한다. 게다가 중국의 이무기가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환생담은 물론 기본적으로 불교적 발상이다.

 

P619 – 밀교의 한 자락

신라의 밀교는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듯하다. 명랑의 전기 끝에 일연은 고려의 태조때 활약한 광학과 대연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안혜와 낭융의 후예이며, 비법을 써서 외적을 물리치고 진정시켰는데, 모두 명랑의 계통을 이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P627 –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기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 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P633 –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역시 이조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회한과 눈물로 범벅이 된 엄장은 원효 스님에게 달려가 간절히 깨우침에 필요한 가르침을 물었다고 한다.

그게 우리 인간의 매력이지 않을까 싶다.

 

P636 –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저승의 일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선율의 환생은 그런 그들에 대한 경계이지만, 사실 살아 돌아와 저승의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P656 –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나는 앞서 이런 비슷한 이야기의 모티비를 우연히 스치는 듯한 성인 만남이라 하고 낙산사 전신을 만나러 가던 원효를 그 예로 들었다. 여기서 효소왕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 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P659 –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세월의 탓도 있겠지만 흐릿한 선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아마도 나머지는 불상을 보러 온 사람이 완성시키라는 조각가의 배려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여백의 미라고 해야 할까

 

P660 –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효소왕의 이야기를 하는 일연의 본디 마음은 다른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근사하게 차려 입어야 사람 대접받는 것은 지금 세상이나 예나 마찬가지. 효소왕이 걸려 넘어진 것은 그런 겉모습에 집착한 데 까닭이 있었다.

 

P670 –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그런 사회의 종교는 오히려 더 타락하기 쉽다. 헛된 권위만 살았을 뿐 책임의식이 없으므로 자기에게 좋은 것만 택하고 힘든 일은 하지 않는다. 일연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P671 – 숨어 사는 이의 멋

삼국유사의 여덟 번째 편은 피은이다. ‘피은은 피세은거, 즉 세상을 떠나 숨어 사는 것이라는 말로 풀어볼 수 있다.

 

P675 – 숨어 사는 이의 멋

산중에 고요히 앉아 생애를 마쳤는데 석실에 갖다 둔 시신에서 오직 혀만 붉게 남아 있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숨어 산 이의 마지막이 그렇게 신이로웠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리라.

P678 – 숨어 사는 이의 멋

구름을 탄다든지 몸을 하늘로 솟구쳐 올라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자주 나온다. 신비롭고 즐거운 세계의 연속이다.

삼국유사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기존 역사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유로움이 바로 삼국유사의 특징이다.

 

P686 – 숨어 사는 이의 멋

변재천녀는 불교에서 보이는 최고의 여신이다. 인도의 전통적인 여신이지만 불교에 들어와서 사람의 온갖 재앙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아 비파를 오른 손으로 퉁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P688 – 불교가 보는 효도

일연 개인이 가지고 있는 깊은 효심이다. 그의 생애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무척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일연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 지금 그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추정해 들어가는 일연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는 너무도 분명히 나타나 있어 췌언이 필요치 않다.

 

P691 – 불교가 보는 효도

대체적으로 이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리 효도를 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사람을 그것도 자식을 죽여가면서까지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독후감을 쓰는 당사자들이 자식의 입장이어서 그랬을까 정말로 자식들에게도 죽음으로 해야 할 효도가 온다면 무섭기도 했겠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과연 이것이 참된 효도일까 그 부모는 손자를 희생하는 효도를 원했을까

 

P692– 불교가 보는 효도

그것은 인간에게 닥치는 거대한 시험이고, 시험 앞에 굴하지 않도록 연단시키는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 관습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시험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던 아브라함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갈 만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내려치려는 순간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마치 그것처럼 땅을 파는 손순의 삽 끝에 기이하게 생긴 돌 종이 걸려드는 것과 같다.

아니다. 단연코 반대한다. 아무리 종교적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목숨을 그것도 자식의 목숨을 걸고 시험에 들게 해서는 안된다. 이는 종교란 이름의 폭력이다. 큰 사람을 걸러내기 위한 시험이 아니다.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사람이 정말 지도자가 될 사람이라고? 정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사람인가? 종교란 이름으로 그렇게 잔인해도 된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누구이 이름으로 이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P694 – 불교가 보는 효도

누가 뭐라해도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인 불국사와 가장 신비스런 불상인 석굴암을 지은 사람이 김대성이다. 그가 어떻게 이 두절을 지었는가는 대성이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하다조에 실려 있지만, 그것의 발로는 바로 효심이므로, 삼국유사에서도 일연은 탑상편에 싣지 않고 여기 효선편에 실었다.

 

P700 – 불교가 보는 효도

일연은 불국사의 구름다리와 석탑 그리고 강당을 조각한 석목에 들인 공이 경주의 여러 절 가운데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고 칭찬한다. 오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가 보는 안목 그대로다.

 

P704 –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 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P707 –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도 하지만 좋은 시를 알아볼 줄도 안다, 일연은 분명 그런 시인이었다.

우리가 일연에게 고마워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이다.

 

P709 –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지금 전해오는 향가의 편수가 너무나 적어, 일반적이건 구체적이건 향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기만 하다. 일단 남아 있는 향가만을 가지고 정리해 볼 때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첫째, 작가에 대한 문제이다. 현존하는 향가의 작가는 화랑이거나 화랑 출신의 승려 또는 승려가 압도적으로 많다.

둘째, 향가의 내용에 대한 문제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향가는 서정시다 개인의 일상이 개인의 정서 속에서 부딪혀 형상화되어 있다.

 

P711 –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 구름 쫒아 떠난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이 노래는 바로 경덕왕을 감동시켰던 향가다. 경덕왕은 이 시로 인해 충담사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향가의 전편이 전해지지 않지만, 비록 그렇다고 해도, 이 노래는 최고의 작품에서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

 

P725 –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P733 –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새로운 시대상을 창출한다는 명제 앞에서 다른 산문의 경전을 해석하는 일이나 다른 산문의 고승을 스승으로 삼는 일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오히려 거기에 가르침의 본질이 있다면 가서 배워야 하고 그 업적을 널리 현창하여야 하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연이 중편조동오위를 편찬하면서 평소에 꿈꾸어 오던 일이라고 한 말의 맥락을 잡을 수 있다.

 

P738 –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일연의 서문은 중국의 역사에서 일어난 여러 괴이한 사건들을 장황하게 열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중국에서 처음 나라가 설 때부터 한나라를 일으킨 유방에게까지 신이한 일로 점철된 건국의 역사를 낱낱이 대는 것은 우리도 이면의 전범을 하나쯤 마련하겠다는 일연의 논리적 전거 대기다.

 

P741 –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신라 불교가 가진 자존심이 있다. 그 자존심은 재래 신앙에서 불교 신앙을 성공적으로 결합 시킨데서 나온 것이다. 다름 아닌 향가의 대표적인 시인에게서 보이는 이런 태도가 곧 향가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소다. 민족적 정서를 그 고유어로 가장 잘 드러낸 시 그것이 향가이고, 일연은 이 점을 가치 있게 보았던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목차는 일연의 삼국유사 순서대로 각 편의 주요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각 편에 있는 삼국유사의 목차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가끔씩은 어떤 것이 일연의 생각이고 어떤 것이 저자의 생각인지 헛갈릴 때가 가끔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제목이 우리가 읽어야 할 삼국유사가 아니라, ‘고운기가 읽은 삼국유사삼국유사 강독같은 제목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삼국유사는 필연적으로 삼국사기와 비교될 수 밖에 없다. 태생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있는것이다. 그만큼 이 두 책은 상호보완적이면서 상호간에 약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일연은 삼국사기의 단점을 완벽하게 극복한 책을 편찬해 낸 영웅(?)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일연의 삼국유사도 엄연하게 약점이 존재한다. 특히 일연이 승려라는 신분으로 역사를 서술한 관점을 불교에 놓고 있다. 이는 본인이 애써 그 부분을 희석시키고자 애쓰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색깔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물론 불교는 지금처럼 여러 종교 중 하나가 아니었다. 사회적 시스템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단순히 하나의 중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불교의 발전과 사회적 시스템화를 각 국가의 흥망성쇠와 연결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니 아쉬움까지 남는다. 특히 고구려의 멸망을 도교를 받아드리는 것에 방점을 찍고 해석하는 것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마저 삼국의 핵심을 신라에 놓고 서술함으로써 우리는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의 상당부분을 잃고 말았다. 이 부분이 참으로 아쉽다.

 

3. 이 책의 장점

이 책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삼국유사를 저자만의 시각으로 재 해석하고 삼국사기와 비교도 하고 시대적 상황을 알기 쉽게 풀어냄으로써 삼국유사를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삼국유사 그 날것의 텍스트를 우리가 읽는 다면 그 뜻의 10%도 제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삼국유사를 아주 쉽게 받아드릴 수 있도록 잘 요리해서 입안에 넣어주는 아주 친절한 책이다. 더군다나 많은 사진과 더불어 지금의 지역적 상황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해줌으로써 정말 우리가 2천여년전 그 시절로 빠져 들 수 있게끔 해준다. 삼국유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대적 상황과 삼국유사의 문구에 대한 시대적 해석은 삼국유사의 깊이와 그 의미를 더욱 더 뜻 깊게 받아드릴 수 있도록 해 주어 참으로 고마운 책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각 지역의 불교적 특성과 사찰의 창건 의미에 대한 해설은 마치 또하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은 듯 하다. 그래서 갑자기 예전 그 지역과 사찰을 스치듯 지나갔던 나의 모습이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는 언젠가 다시 그 사찰에 가보리라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때 다시 가게 된다면 삼국유사의 한 구절이 그림처럼 떠 오르면서 천년 사찰의 오랜 역사가 진정으로 가슴 속에 다가오리란 기대를 해 본다.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가 보다.  

 

4. 내가 저자라면

삼국유사의 역사적 의미와 의의에 대해서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보고자 한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외면했던 우리 조상들의 진 면목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아주 소중한 책이다. 그러나 역시 삼국유사 또한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그 보완점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짚어주고 기술했으면 우리가 삼국유사의 진정한 깊이와 역사적 가치를 보다 더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진을 조금 더 사실적인 보완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각 사진들은 어떻게 보면 저자의 감상이 많이 투영되어 있어 마치 책이 어떤 면에서 보면 기행문처럼 보이도록 하는 면이 있다. 좀 더 삼국유사를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조금 더 디테일하면서 사실적인 사진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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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7 12:30:27 *.18.218.234

정학씨의 '내가 저자라면' 읽으면서 아 이렇게 하는거구나..다시 끄덕거립니다 ㅋ

나도 저렇게 생각했는데 왜 구조화 못할까 머리 때리며 ..

이번 북리뷰도 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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