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뚱냥이
  • 조회 수 1286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7년 11월 27일 05시 50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그림자

이부영 글

한길사

 

 

1. 저자에 대하여

서울대학교 의대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수련을 시작하였다. 1966년 스위스 추리히 융 연구소를 수료, 융학파 분석가 자격을 취득하고 국제분석심리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독일 및 스위스 등 각지 정신병원에서 수련 및 근무하였으며, 귀국 후 서울대학교 의대 신경정신과 주임교수,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장을 지냈다. 그 밖에도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1977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 퇴임 후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추대되었으며 분석심리학 전문수련기관인 한국융연구원을 설립 현재 운영중이다.

 

한국 융학파의 태두로서 한국에 분석심리학의 씨앗을 뿌리고 분석심리학이 하나의 분과 학문이자 정통한 정신치료술의 하나로 인식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1차적으로는 당연히 환자의 치료에 있겠으나, 학문적 성취가 깊어짐에 따라 문학이나 예술 분야에 나타나는 다양한 상징 체계를 해석하고 그를 통해 한국인의 집단무의식 세계를 해명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동안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단행본 중에서는 분석심리학을 통해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심층을 밝혀보려는 의도를 가진 '분석심리학 3부작'이 유명하며, 그 중에서도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외 한국의 민담을 통해 한국인의 무의식을 탐구한 한국 민담의 심층분석도 주목할 만한 책이다.

 

현재 제대로 된 융 선집을 출간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힘을 모으고 있는데, 번역에 충실을 기하기 위해 해마다 한권씩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작업이 완성되는 날 한국인도 비로소 융의 세계를 좀 더 직접적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분쉬의학상을 비롯하여 국내외 많은 상을 받았으며, 융 기본 저작집(9, 솔 출판사)을 비롯한 여러 책을 번역하였으며, 분석심리학에 관련한 다수의 책을 저술하였다. (예스24발췌)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P23.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일한 위험은 인간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큰 위험인데도 우리는 너무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모릅니다. 아는 게 너무 적습니다. 우리는 그의 정신을 연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가오는 모든 재앙의 근원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1장 마음의 세계와 그림자

 

1. 마음의 세계

 

P29. 우리는 보통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남의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마음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오해를 받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혹은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저질렀을 때 우리는 나도 모르는 마음” “나도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을 한탄하고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 속은 모른다고 실토한다. 이로써 우리는 나와 남이 모두 가지고 있으나 평소 모르고 지내는 속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이나마 시인하는 것이다.

 

P31. 1900년 당시 프로이트가 브로이에르와 함께 연구한 히스테리 환자들이었다. 정신적인 해리상태에서 환자들은 알고 있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마음의 단편들을 내보였고 자기도 몰랐던 마음을 기억에 떠올려 이를 표현하면 병이 깨끗이 낫는다는 사실을 연구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P36. 나는 우리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는 중요한 창구인 동시에 내면세계와도 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태도는 우리의 인격의 성숙, 즉 정신의 전체성의 실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P36. 집단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조나’(Persona :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할 때 쓰던 가면)라 부른다. 그것은 집단정신에서 빌려온 판단과 행동의 틀이다. 집단이 개체에 요구하는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 그 집단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할 여러 유형이다. ‘페르조나를 배우고 여러 종류의 페르조나를 번갈아 쓰면서 사회 속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 페르조나는 어떤 일정 사회집단에만 통용되는 화폐나 지폐와 같은 것으로 그 집단 밖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인간의 보편적, 원초적 행동유형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신분열환자가 아니라도 나는 사람에게 여러개의 인격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봐도 그렇다 부모님을 대할 때와 내가 나를 대할 때, 회사에서의 나, 친구를 만날 때의 나. 심지어 친구에 따라서도 내가 달라진다. 물론 내가 아닌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기둥은 나 자신이지만, 조금씩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다양한 인격을 소유한 것이 아닐까?

 

P37. 바다 같은 무의식은 자아의식이 그 속에 있는 보배들을 발견하고 이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처녀지와 같다. 자아의식은 무의식계의 내용들을 의식화함으로써 그 영역을 넓혀 나간다.

 

P37. 무의식의 상당부분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의식의 내용에 동화시킬 수 있다. ‘인식이라는 말을 철학적인 인식과 혼동하지 않도록 하려면 의식화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의식화깨달음이다.

 

P39. 그리하여 지나치게 이성적인 남자의 꿈속에서 그로 하여금 매우 비합리한 행동을 하거나 평소와는 달리 열렬한 사랑을 나누게 만든다. 혹은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의 꿈에서 깃발을 들고 데모행진의 선두를 달리는 영웅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욕구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일방성을 깨우치고 의식이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무의식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P43. 아니마, 아니무스란 무엇인가? (중략) 혼이나 넋, 또는 심령이란 모두 자아의식을 초월하는 성질의 표현이며 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고도의 자율성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와 같은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그와 같은 독자적 인격이라 할만한 것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내적 인격이라 불러 집단 사회에 적응하는 가운데 형성된 외적 인격인 페르조나에 대응하는 무의식적 인격이라 보았다.

 

P45. ‘자기란 자기실현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다. 자기란 전체정신,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정신이다. 그것은 인격성숙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그것은 의식의 중심인 (자아)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크기의 전체정신 그 자체, 혹은 그 전체정신의 중심이며 핵이다. 우리가 자아실현이라 하지 않고 자기실현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체정신의 중심핵이라는 뜻에서 자기를 말할 때 우리는 특별히 이것을 자기원형이라 한다.

어쩌면 사부님이 말씀하신 자기가 되기, ’가 되기으이 궁극적인 모습이 아닐까? 내 모르던 무의식을 알게 되면서,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알게되는 경지. 그래서 전체정신으로 나를 통찰하고, 타인을 통찰하고, 자연과 사회 등등을 통찰하는 것이 가 되는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본연의 모습인 것인가? 아니면 성인(聖人)이 되라는 것인가? 이것은 거의 성인의 수준이 아닌가? 어쨌든 궁극의 모습은 확실한 것 같다.

 

P47. 그러므로 자기실현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곳에는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실현을 통해서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끝없는 무의식 앞에서 자아가 취해야 할 겸허한 마음의 자세를 암시하는 융의 이와 같은 견해는 선불교에서의 해탈의 선언과는 다소 그 모습을 달리한다.

 

P51. 무의식의 열등기능은 의식에 대한 보상작용을 일으켜 의식을 자극하여 의식의 일방성을 제지한다. 혹은 그것은 외계로 투사된다. 그 보상작용의 정도가 적절한 경우에는 열등기능이 의식계로 떠올라 활성화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균형 있는 발전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은 어떻게 맞추는 건데??

 

P51. 그러나 열등기능을 찾아서 그것을 살리고 발전시키면 그것은 이미 열등기능임을 그친다. 그리고 모든 정신기능을 가능한 한 골고루 발전시킨다는 것은 전체정신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다. 열등기능의 의식화 그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자기실현이 상당히 진행되면 각 유형간의 차이가 점점 줄어든다. 이를테면 내향성을 존중하는 외향형이, 또는 외향성을 발휘할 줄 아는 내향형이 된다.

 

2. 마음의 세계에서 차지하는 그림자의 자리

 

P52. 그림자는 일차적으로 개인적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 자아 콤플렋의 무의식면의 여러 가지 열등한 성격경향이다. 그런 점에서 그림자는 전체정신, 전체 무의식의 일부를 차지하며 이 경우 그림자는 무의식의 전부가 아니다. 그림자는 의식에 가까이 있으면서 자아가 모르고 있는 무의식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을 의식화하면서, 다시 말해 우리가 가지고 있으나 모르고 있는 인격부분을 깨달아가면서 성숙해 가는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무의식의 요소이다. 그것은 성숙한 마음에 이른 첫 관문에 버티고 있는 수문장이다.

그러면 그림자를 발견해서 의식화하면, 또 다른 그림자가 생기고, 그 그림자를 발견해서 의식화하면 더 깊은 그림자가 생기고, 이렇게 반복이 된다는 것이네? 그러면 종국에는 아예 그림자가 없는 자기실현이 된다는 것이고. 성찰을 만하는 것이라면 종교와 가까운데? 성인이 되라는 말인가?

 

P53. 의식을 이라고 간주하는 한 무의식은 분명 의식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식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곳에 어두운 그림자 파괴적, 부정적 열등성 만 있는 것이 아니고 창조적 능력, 즉 빛의 원천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의 전체성이란 빛과 그림자의 융합으로 이루어진다.

점점 종교적 성찰의 느낌을 받는 것은 나뿐인가?

 

2장 그림자의 원시적 관념과 분석심리학적 개념

 

1. 살아 있는 그림자

 

P65. 그림자와 떨어져 있다는 것은 무의식과의 분리를 의미하고 그림자를 통해 보배를 찾는다든가 병을 고친다는 관념은 그림자가 해로운 영향뿐 아니라 매우 긍정적인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림자의 인식을 통하여 보다 깊은 무의식의 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분석심리학의 설명과 유사하다.

 

P69. 무엇보다 그림자의 상실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생각은 심리학적인 무의식의 그림자가 정신적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한는 분석심리학의 관념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전체로서의 인간의 정신은 의식의 대자(對者)인 그림자, 즉 무의식을 필요로 한다. 심리학적 의미의 그림자 없는 사람은 사실 분석심리학에서는 무의식으로부터 분열된 사람, 인간으로서 살아 있는 실체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 그림자의 분석심리학적 개념

 

P72. 그러니까 무의식을 보는 첫 단계의 시작에서 그림자란 내가 직접 모르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신화학적인 이름일 따름이다. 오직 우리가 우리 인격의 그림자 영역 속으로 파고 들어가 여러 측면을 살펴갈 때,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후 꿈에서 그 꿈을 꾼 사람과 같은 성의 인격화된 무의식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P75. --

그것들은 우리 자신의 내면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그것은 분명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들이다. 우리가 자아의 그림자세계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 그림자의 측면을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문명된 사회에는 그림자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 그림자를 제거해 버린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오직 이차원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제3의 차원을 잃어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신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신체는 가장 의심쩍은 친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몸에 대해서는 말로 언급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몸은 자아의 이런 그림자의 인격화이다.

 

P75. 그림자는 낡은 방식들, 낡은 인격, 안일한 것들, 인격의 열등한 부분, 부정적 측면이며 감추어진, 바람직하지 않은 성질의 총화, 잘 발전되지 못한 기능들이며, 강렬한 저항에 의해서 억압되고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중략) 적어도 우리의 꿈속에 나타나는 그림자의 모습이나 투사에 의해서 자기 밖에서 보는 그림자의 대부분은 자아의식의 눈으로는 부정적이며 열등한 성격을 띤다.

예를 들어 나는 욕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실제로는 나도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것인가? 나는 정치인들의 권력욕이나 부정부패 등이 싫은데, 사실은 나는 엄청난 권력욕의 소유자라른 것인가? 이것은 사실이 아닌데... 뭔가 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 내가 원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나?

 

P76. 다른 한편으로 그림자는 무의식의 다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며 그 열등한인격 속에는 의식생활의 법과 규칙을 따르지 않으려는 온갖 불순종이 들어 있다고 융은 말한다.

글쎄... 그럴 수도 있지만 다는 동의를 못하겠는데..

 

P78. ’그림자 없는 사람이란 통계적으로 가장 흔한 인간유형으로, 자기가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그런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겠다. 그럼 자기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고 자신이 갈망하는 욕구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가식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완전한 인격은 아니라는 것이구만...

 

P79. --

거의 해마다 우리는 전에는 몰랐던 어떤 새로운 것이 우리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본다. 우리는 늘 이젠 우리의 내면적 발견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계속 우리가 이것이라는 것, 우리가 저것이라는 것, 또는 그밖의 다른 것임을 발견하고 때로는 깜짝 노랄 만한 경험을 한다. 이것은 바로 언제나 거기에 아직 무의식적인 우리 인격의 한 부분이 있다는 것, 그것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우리는 미완성이라는 것, 우리는 자라고 변화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 해를 거쳐 이루게 될 미래의 인격은 이미 그곳에 있다. 다만 그것은 아직 그림자 속에 있을 뿐이다.

나도 이말에는 동의한다. 그러면 그림자를 발견한다는 것,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다는 것을 인격의 성숙이라고 단정지어 쉽게 생각할 수 있겠네? 자기 자신의 내적 수양이라고 말해도 되고..

 

P80. --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안다. 그러나 무엇이 될 것인지는 모른다.

 

P83. --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함께 걸머지고 있다. 즉 원시적이며 탐욕스럽고 격졍적인 열등한 인간을 걸머지고 있다. 이 짐을 벗으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림자의 억압으로 노이로제가 되면 우리는 현저히 강화된 그림자와 직면하게 된다. 환자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의식된 인격과 그림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발견되어야 한다.

 

의식은 어느 정도 위에 있고 그림자는 밑에 있으며 높은 것은 언제나 깊은 곳을 향하고 열은 냉으로 향한다. 이와 같이 모든 의식은 정체, 삭막함, 혹은 목질화라는 단죄를 받음 없이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한 채 그의 무의식적인 대극을 찾아 나선다. 오직 대극에서의 삶의 불이 타오른다.

 

3장 그림자의 투사현상 그림자는 어디서 어떻게 볼 수 있는가

 

1. 그림자의 투사현상

 

P89. 그림자는 무의식의 이미지이다. 자아는 자신이 어떤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자아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그늘에 속하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의식으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성격,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바로 그 성격이다.

나에게는 무엇이 있지? 모르겠다...

 

P89.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만일 당신의 친구 중 한 사람이 당신의 결점을 비난할 때 마음속에 심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당신 그림자의 일부를 발견할 것이다.

한 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그러면 나는 직선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그림자가 있는 것인가? 나는 말을 함부로(?)까지는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 같다.

 

P90.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버럭 화부터 내는 것은 우리 무의식의 아픈 곳이 건드려졌기 때문이며 아픈 곳이란 곧 격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무의식의 콤플렉스인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반응을 일으킨다. 다만 무엇에 의해서 마음 소의 어떤 부분이 자극을 받느냐가 다를 뿐이다.

 

P90. 앞에서 폰 프란츠가 말했듯이 자기를 무척 화나게 하는 다른 사람의 지적을 통해서라도 조금만 자신을 돌이켜본다면 자기가 지니고 있는 그림자의 특성을 막연하게나마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P91. 나쁜 것은 남에게만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괴로운 마음을 피하려는 자기방어의 수단으로서 뿐 아니라 자기의 무의식적인 마음의 일부를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목적으로도 투사현상이 일어난다. 투사는 자신을 돌이켜 보고 다른 대상으로 떨어져 나간 자신의 분신을 되찾아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아직 밖으로 투사되지 않은 무의식의 내용도 있다.

 

P91. 그러므로 투사된 그림자상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되찾아오는 작업에는 많은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누가 무슨 그림자를 누구에게 투사하고 있는지는 자신보다는 자신을 잘 아는 제3자의 눈에 더 잘 띄게 마련이다.

이런 친구를 본 적이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 이 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그림자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되찾아오려는 용기를 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생각이 난다. 그리고 참 훌륭하다. 평생 모르고 살 수 있는데, 계기를 통해서는 어떻든 간에 그 친구는 한 단계 더 성숙해 질 것이라 믿는다.

 

P93. 투사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강력한 감정반응을 일으키고 자아가 그 대상에 집착하게 만든다. 투사가 일어났을 때 자아는 그 대상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도 무관심할 수도 없다. 이것이 투사현의 특징이다. 투사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므로 자신은 그것이 투사된 자시의 마음인지를 모른다.

 

P93. 이렇데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열등한 인격의 측면은 자신의 그림자의 투사로써 상대방이 실제로 가진 약간의 성격상의 열등성을 훨씬 과장하여 그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그런데 그 나쁜 사람의 상당부분은 사실 그 사람의 무의식에 자기도 모르게 도사리고 있던 자기 마음 속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향해 짖듯이 남의 잘못과 나태함과 위선은 질타하면서도 자기 마음 속에 든 도둑심리는 보지 않는다.

맞아 사실 죄가 없는 사람이 없다.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면 위법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를 욕하고 싫어하고 비난하지.... 성찰을 위한 책인데??

 

P94. ’거룩한 분노는 오직 개인적인 그림자의 투사를 거두고 자기자신의 전체정신과 일치된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을 때 나오는 것이다. ’의식무의식‘, ’자기가 하나된 마음의 표현일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거룩한 분노일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분열된 상태에서 내리는 세계에 대한 판단은 나의 마음과 객체가 뒤섞인 분열된 세계상일 수밖에 없다. 의식과 무의식이 따로따로 노는 것이 정신의 해리상태이고 하나로 합치는 것이 전체 정신의 실현이라면 전체정신은 오직 각자의 무의식 자기가 평소에 못 보고 있는 자기의 속마음-을 살펴보는 자기인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P95. 편견, 선입관념, 속단.... ’틀림없이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야에서 곧장 나쁜 놈의 단죄가 유도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흑백판단과 불신풍조는 건전한 사회의 발전을 저해한다. 이런 풍조를 고치지 않고 사회의 성숙한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을 고치려면 비난하고 욕하고 헐뜯는 대상에 투사된 우리 마음의 반쪽 그림자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우리 자신으로 되돌려 받는 개개인의 의식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림자가 무엇인지를 아는 작업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P96. 사람들 사이의 오해는 항상 무의식적 투사에서 비롯된다. 가족 중에 온 가족이 미워하는 구박둥이이며 미운 오리새끼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족성원의 그림자의 투사에서 비롯된다. 이 경우에는 그림자의 개인적인 투사라기보다 집단적인 투사의 결과이다.

 

P97. 그림자란 대개 모든 면에서 열등한 성격측면이므로 도덕적으로 열등한 경향을 띠고 있다.

 

P98. 우리의 그림자는 그와 같은 의 어두운 반려자, ’의 검은 대리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의식의 그림자를 의식하여 그것을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언젠가 그림자의 열등한 성격은 를 사로잡고 내가 규탄하는 오물을 스스로 뒤집어쓰게 된다. 아니면 분열된 그림자가 가까운 사람을 통해 연출됨으로써 곤혹을 치르게 된다. 그러니 인간이 투사 없이 남의 죄를 심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성경게 너희는 심판하지 말라‘ ’칼로 심판하는 자는 스스로 그 칼에 망하리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가.

 

P102. 이러한 상호간의 비난은 사실 조금씩은 상대방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자, 즉 열등기능의 투사 때문에 상대방 성격의 부정적 측면만이 두드러지게 과장되어 내향, 외향 두 유형이 가지고 있는 건설적인 측면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무르이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자신의 열등기능을 인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P105.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열등기능은 때로 우월기능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보상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내향형은 외향형보다도 더 대담하게 외부세계에 도전하고 객관성을 강조하고 외향형은 내향형 이상으로 내면의 정신세계에 집착하여 거의 신비주의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모두 열등기능을 의식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P114. 인간은 어떤 유향에 속하기 이전에 전체정신을 가지고 있는 개성적 존재이다. 유형론은 그 전체정신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적 관점이다. 유형설을 자세히 보면 전체정신에 이르는 길이 보인다. 가령 내향형이라 하지만 외향적 태도가 무의식에 있어 그것을 의식화함으로써 전체에 접근해야 하고, 합리적 유형이라고 해서 비합리적 기능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고 무의식에 비합리적 기능이 대극을 이루어 의식을 보상하고, 비합리적 유형에서는 또한 합리적 기능이 무의식에 있으면서 의식의 기능에 포함되고자 작용하고 있다.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데 어떤 것이 발현이 될 뿐이겠지요. 다른 유형의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건널 때 그것을 가르치려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싸움난다.

 

P116. 이른바 사회지도층에 대한 반감과 불신, 재벌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 등에는 재산의 사회환원 없이 개인적 이익만을 챙기거나 공익을 위한 희생정신이 결여된 부패한 사람들이 실제로 있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상대방의 전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가 개입하고 있다. 또 이러한 투사는 자신의 잘못을 보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치유의 효과마저 있다.

이 책에 의하면, 현재 사회에 대한 투사로 인해 나오는 감정은 거룩한 분노는 아니겠구만.. 전체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미성숙한 사람들이니...

 

P117. 사람이, 그들이 규탄하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부정부패의 소인, 즉 그림자를 안고 있는 민중들의 그림자의 집단투사를 통한 찰나적인 한풀이를 부추기고 희생양을 만들고 쾌재를 부르게 하고 박수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사정을 한다면, 혹은 부정부패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아니라 정적에 대한 사적인 복수심이 조금이라도 개입된 사정이라면 진정한 개혁을 이루기 어렵다. 개개인 마음 속의 부패심이 없어지지 않는 한 부패는 아무리 법적인 조치를 마련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P119. --

평화는 승리와 패배가 그 의미를 잃을 때 오직 그때라야 가능하다. ’나는 평화를 주기보다 칼을 주러 왔노라하고 우리의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는 무엇을 생각했겠는가?

 

P120. 진정한 평화는 다른 말로 개개인이 자기 안에 있는 그림자를 인식할 때, 원형의 매혹적이며 무시무시한 여향에 휩씁리지 않을 만큼 지각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집단 속에서 모두 약한 존재가 된다. 건전한 윤리적 책임감을 가진 사람도 집단 속에 파묻히면 책임감이 느슨해지며 결국 다른 사람처럼 타락한 폭도‘ ’무자비한 망나니가 될 수 있다. 집단 속에서 집단적 무의식의 파괴적 세계에 전염되는 것이다.

 

P122. 무의식적, 원시적 세력이 급격하게 집단적으로 의식을 엄습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P127. ’마녀는 높은 정신적 경건성과 도덕적 금욕주의를 표방하던 중세의 신앙 깊은 사람들의 무의식에서 의식의 일방성을 보상하기를 기다려온 본능적 충동의 표현이었다.

 

P129. 그러나 질보르그가 말하듯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통일체에 깊이 숨은 불안의 표현이었을 것이며 <마녀의 망치>는 기성질서가 불안정하게 되어간다고 우려할 만한 징후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 시대에 교회와 국가가 보인 일종의 피해마니아는 의심 없이 기성질서의 위기에 대한 불안감에서 나온 것이었고 또한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적 세력과 새로운 정신적 이상이 일어나서 그동안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사회제도의 중핵 자체를 위협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되었다고 질보르그는 술회한다.

 

P136. 낯선 것은 배척의 대상이 되지만 그 마음 뒤에는 전염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의 일본인 그림자, ’왜놈그림자를 인식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우리의 의식을 동화하여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면서도 자아의식은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모르는 장님과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집단적 그림자는 의식과 의식적인 통합이 필요한 것이다.

 

2. 꿈에 나타난 그림자의 현상

 

P147. 그림자상이 반드시 역겹고 추잡하거나 고집스러운, 부정적 성격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정치적 지도자, 사회명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융이 지적한 대로 사람들은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거나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차를 나누기도 한다. 의식상황에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때 꿈에서는 그러한 식으로 과대관념을 표현한다. 그것은 흔히 조용한 내향형 인간들의 무의식에서 잠자는 권력 콤플렉스, 허영심, 명예욕과 같은 것이다.

 

3. 정신병리현상과 그림자

 

P165. 왜 이런 정신적 해리현상이 일어나는가. 대개 의식에서 억압된 콤플렉스들에 의해서 일어난다. 무의식의 여러 콤플렉스가 의식계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억압되는 것은 의식이 용납하지 않는 것들이다. 사회규범에 맞지 않는 것을 모두 무의식에 억압해 버릴 경우, 그 정도가 지나치면 의식의 분리가 일어나기 쉽다.

 

P166.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자아와 페르조나가 극단적으로 동일시되면 될수록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교류는 단절된다. 그리되면 의식의 해리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한 분리 또는 해리의 시초에 나타나난 것이 불안, 공포, 강박 등 노이로제의 증상이다.

내가 의식의 해리현상을 겪어 봤다. 밖에서의 시선, 사회의 기준, 잣대에 의해 살아야 하지만, 정말로 집이 힘들었었지... 점점 의식과 페르조나가 하나가 되어 무의식과 단절되면서 결국 빵!!

 

P166. 사회집단이 요구하는 규격화된 태도와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자기의 내면세계를 전혀 돌보지 못하고 내버려두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외부사회에 대한 적응 못지 않게 내면세계에 대한 적응을 필요로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의 요구뿐 아니라 자기 내면정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내면의 소리를 듣고 실천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균형을 유지한다.

 

P166.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사회적 요구만을 일방적으로 충족시키다 보면 마음 속에 살지 못한 채 억압된 무의식의 부분이 점차 힘을 더하여 자동적으로 의식을 압박하기 시작하며, 의식의 일방적인 외적 적응이 극에 다다르면 무의식의 보상기능도 상대적으로 격화되어 불어난 강물이 둑을 무너뜨리며 마을을 덮치듯 무의식의 콤플렉스들이 의식을 휩쓸어버린다.

 

P166. 인간의 무의식은 본래 정신의 해리를 해소하고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한 전체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의식으로부터 억압되어 무의식의 내용이 된 콤플렉스들은 그대로 없어지거나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의식화 될 기회를 기다리고 있거나 수시로 의식에 대한 보상기능을 통하여 의식화를 촉진시킨다. 그러나 의식의 경직된 태도 때문에 무의식의 보상이 급격하고도 과도하게 일어나면, 의식의 기능은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장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P167. 그런데 이 장해는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나 정신의 전체를 통합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므로 자기실현의 목적을 가진, 의미 있는 고통이라 하는 것이며 치료란 결국 쪼개진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 사람이 본래 가지고 나온 정신의 전체정신을 실현시키는데 있다.

 

P168. 자기에게 그림자 따위는 없다고 자처할 때, 그림자가 자기 속에 있는데 보지 않으려 할 때 그것이 노이로제의 온상이 된다.

 

P177. 투사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인간관계란 없다. 문제는 투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림자를 어떻게 의식화하느냐 하는 것이다.

 

4장 분석과 그림자의 인식과정

 

1. 그림자 인식의 어려움

 

P182. 그런 의미에서 자기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는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삶이 그림자를 교육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젊은 날 극력한 흑백판단으로 남의 잘못이나 사회적 부패를 규탄하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남이나 자기자신의 실수에 관대한, ’부드러운성품으로 변하는 것도 어느 정도 자기 내부의 그림자를 인식한 바탕에서 남들이나 사회에 더 이상 그림자 투사를 하지 않게 된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P183. 개체의 삶이 그 개체의 전체정신을 전개시키는 것이라면, 그리고 융이 말하였듯이 삶을 움직이고 형성하는 것이 전체정신의 핵심, 자기 그 스스로를 개현하는 것이라면 그림자의 형성이나 투사, 인식과 의식화가 모두 인간의 정신 속에 내재하여 있는 자기의 커다란 기획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P183. 융의 그림자에 관한 여러 가지 언급을 종합해볼 때 융은 그러한 낙관주의를 가장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자의 인식은 일생일대의 과업이다. 그것은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인식되는 것은 아니고 삶의 고통을 통해서 만날 수 있으며 그 고통 속에서 의식화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림자의 인식과 의식화가 그림자의 투사를 삼가고 자신의 그림자를 용인하는 부드러운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림자의 의식화에는 저 찬장 속의 해골을 내놓고 진지하게 그 처리를 고민하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P189. 그것은 말하자면 선택된 기회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신문이나 TV에서 지탄하는 부정부패, 비리의 규탄에 맞장구치고 아우성치면서 조금도 자기자신을 들여다보거나 자기의 그림자를 통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융이 분석 이외에는 그림자를 무의식을 보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데는 무의식을 보는 분석작업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P190. 물론 앞에서도 말한 대로 고통스러운 체험은 어떤 사람에게는 커다란 깨우침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2. 그림자의 의식화 과정

 

P192. 앞에서 그림자에 대한 인식은 곧 그림자를 답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림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의 마음 속에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의식에 수용함을 말한다.

내가 누군가에게서 나타나는 싫은 면이나 내가 비난하는 사건이 나오면 우선 나를 먼저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

 

P193. 그림자의 인식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고 자기 마음속에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인한다고 해도 아직 그림자의 의식화가 완수된 것은 아니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도 자기가 남을 비난하는 성격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이것만 해도 큰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비난의 화살이 이제는 밖에서 안으로 와야 할 차례이고 최소한 그는 남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무디게 함으로써 그림자의 부질없는 상호투사를 종식시키는데 첫 번째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P193. --

그림자의 통찰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데 필수적인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한다.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의식된 인정과 배려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P195. 그림자의 인식은 그림자의 의식화로써 완결되어야 한다. 그림자의 내용이 개인적 무의식인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그것은 그림자의 존재를 알고 인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살려내 의식의 내용으로 동화하는 작업이다.

융이 여러곳에서 말했듯이 그림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 것, “그림자가 개인의 의식된 삶에 실체화되는 정도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의 그림자는 더욱 검고 더욱 진하며, 열등성이 의식화되면 그것을 교정할 기회가 생긴다” “그림자의 동화로써 인간은 어느 정도 실체성을 갖게 된다” “그림자의 깨달음은 전체인간에 미치는 체험과 고통을 의미한다” “통찰되고 동화되어야 할 성질로서의 그림자등등에 관한 설명은 모두 그림자가 단순히 그 존재의 확인만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P205. 그림자의 의식화에는 적당한 자아의식의 안정성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림자가 원형적 요소를 내포할 경우, 우리는 그 존재에 경악하고 전율하고 조심할 뿐, 섣불리 대결한다든가 없애려 한다든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원형은 자아의식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는 콤플렉스이므로 자칫 잘못하면 자아가 여기에 휩쓸려 원형의 영향 아래 꼼짝없이 사로잡혀 지리멸렬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P208. 앞에서도 이미 말한 대로 처음에 그림자를 표현할 때 얼핏 생각하기에는 나쁜 사람이 되라는 것 같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주저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어둠이 아니라 어둠을 통한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림자 속에 숨은 빛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자기성찰과 성숙을 의미하겠지?

 

P210.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밝은 것, 선한 것, 정의로운 것, 깨끄한 것, 지혜로운 것만 향하여 달려간다.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처럼 이상을 추구하다가 억제된 그림자의 세계를 무시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선한 것은 선한 집단적 행동규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전체정신을 실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P211. --

밝은 것을 상상한다고 밝아지지 않는다. 어둠을 의식화함으로써 밝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쾌하고 그래서 인기가 없다.

 

P211. 밝음을 위한 밝음이 아니라 어둠을 통한 밝음이 진정한 밝음이다. 어둠의 바다를 통과한 태양만이 아침의 바다 위에 떠오르는 일출의 환희와 구원을 주는 존재로서 인정된다. 그럼으로써 이상은 이상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 발을 붙인다. 그러나 무의식의 의식화는 끝없는 작업이다. 전체정신인 자기는 항상 자아의식을 넘는 크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을 의식화해도 거기에는 항상 나믐 것이 있다. 무의식을 의식의 그림자라고 볼 때 그림자는 언제고 남아서 의식화를 기다리고 있다.

 

5장 그림자의 문화적 대응양식

 

1. 민속문화 속의 그림자와 그 표현

 

P218. 한국에서도 5월 단오에 전국 각지에서 민속놀이의 하나인 탈춤놀이가 실시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유교사회의 도덕규범에 위배되는 온갖 부도덕한 그림자가 연출되는 것을 본다. 바보 같은 양반, 파계승, 살인, 탐욕, 음란 등이 가면을 쓴 춤꾼에 의해 묘사되었다. 가면극이 민중의 양반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며 울분의 해소라는 점에서 심리적 세척의 목적이 있다고는 보지만, 비단 민중뿐 아니라 지배계급에게도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림자를 공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사회의 통기구로서 의식, 무의식 대극간의 건강한 균형을 이루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P228. 그런 까닭에 ㅁ

 

2. 옛날 이야기 속의 그림자상과 그 문제의 해결

3. 그림자와 종교사상

 

P258. 모든 고등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융은 각 고등종교가 최고의 것으로 지향하는 상징들, , 그리스도, 불성 속에서 자기원형의 상징을 발견하였다. 종교는 결코 프로이트가 본 것처럼 본질적으로 소아의 강박신경증 같은 것, 마르크스가 주장한 아편과 같은 것이 아니고 종교적 인류로서의 인간의 마음의 근원에서 생겨난 것이며 의식으로 하여금 자아를 넘는 커다란 신화적 원형층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기실현에 기여한다고 융은 보았다.

 

P262. “현대문명의 꽃다운 결실인 교양 있는 대중은 그의 뿌리에서 단절되어 있고 대지와의 결속을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고 융은 간파하였다. “어떤 부분은 사람들은 보다 상급의 인간과 동일시하여 아래로 내려올 수 없고 다른 부분의 사람은 하급인간과 동일시하여 위로 올라가고자 한다문명국가치고 하층계급이 의견의 충돌에서 오는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지 않은 나라가 없다고 융은 말했다.

 

P262. --

그런 변화는 선전선동이나 대중집회나 압력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변화로 시삭된다. 그것은 개개인의 개인적인 친화 또는 혐오, 그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의 변화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변화만이 집단적인 해결을 가져다 줄 수 있다.

 

P271. 여자와 소인을 중국의 하녀나 머슴을 일컫는다고는 하지만 이를 비천하게 여긴 것은 사해 안에 모두 형제가 있고 덕으로서 야만인도 교화시킬 수 있으며 인간은 교육이 문제일 뿐 신분의 차이는 문제가 안 된다는 공자의 말에 비추어 매우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여자와 소인이 그림자라는 것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군자로서, 남자로서 정말로 하고 싶고, 가지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너무 억압했던 것인가?

 

P276. 원효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매우 의미가 깊다.

우리는 제법(諸法)(모든 사물)의 맑음과 흐림을 가리지만 그 본성이 둘이 아니며 또 참됨과 거짓됨이 두문을 세우지만 그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라고 한다. 둘이 아닌 이 자리에서 모든 사물은 알찬 것이 되며, 그것은 조금도 헛되지 않아 그 스스로 모든 것을 환히 아는 까닭에 이를 불러 마음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가 있으랴! 하나란 가짐이 없다는 말이니 어찌 마음을 누구의 것이라고 하랴! 이러한 마음의 도리는 언설과 사려를 절한 것이므로 무엇이라고 지목할 바를 몰라 구태여 일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P278. ’의 대극으로서가 아닌 절대선을 분석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곧 전체로서의 삶, 즉 자기실현이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의 목표는 사회규범으로서의 도덕적 인간의 구현이라기 보다는 건강한 사람, 성숙한 사람을 향한 노력이다.

사실 성숙하고 건강한 사람이 되자는 궁극적인 목표는 도덕적 인간 아닌가? 도덕적인 인간의 필수조건이 건강하고 성숙한 사람이니까. 자기실현한 사람은 성숙하고 그럼으로 도덕적이겠지. 그런데 온전한 성숙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도덕성이 대부분 있는데 그것도 가식은 아니잖아..

 

P280. 밝기 위해 어둠이 있다. 어둠이란 상으로 대하지 말라

어두워지기를 위해 밝음이 있다. 밝음의 상으로 대하지 말라

밝음과 어둠은 서로 상대하는 것, 앞뒤의 발걸음과 같다

만물에는 제각기 쓸모가 있다. 쓰이는 곳을 보고 말하라

 

P286. ’결국 중요한 것은 그림자에 있지 않고 그림자 주인의 태도에 달렸다는 뜻이 담겨 있는 듯하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자아의식의 자세에 따라 그림자도 달라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경우는 그림자의 자아의식에 대한 대립적 관계, 그 독자성이 부각되고 있지 않다.

 

P289. 성인은 욕심이 없으므로 그 지혜가 밝아진다. 그런데 그 밝은 지혜를 써야 할 길을 충분히 알면서 그 지혜를 꺼내지 않고 묵묵히 혼자 어둡게 하여 어리석음을 지키는, 빛을 고르게 하고 티끌과 함께 하는화광동진의 덕이 있으므로 천하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P292. 그림자의 의식화는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살려서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는다는 것은 이미 누차 말하였다. 그림자의 살림은 먼저 그 원시적 충동, 그 열등성, 그 유치함을 살리는 것과 같으므로 모두가 이를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이것을 표현한다면 무의식의 그림자가 가진 미숙하고 부정적인 면이 약해지고 분화된 인격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맺음말

 

P300. 그런데 이제 동양은 서양이라는 그림자의 세계를 받고 있다. 그것은 동양의 전통적 사고방식과는 정반대의 외향적 태도, 객관주의와 논리성이라는 특징을 가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동양인은 서양인보다도 더 외향적이 되었다. 서양인보다 더 외적 효과, 외적 화려함에 심취하게 되었다. 노자의 무위자연과 소박함이, 공자의 눌변이 무색할 만큼 물질주의, 공리주의, 감각적 향락주의, 외화내빈, 허영의 심성에 휩쓸리고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필요한 무의식적 보상작용의 결과일지 모른다. 열등한 그림자의 보상은 항상 과장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소홀히 해온 냉철한 객관적 증명, 객관세계에의 적응능력, 기계의 치밀성, 물질의 중요성, 육체감각의 충족을 더 많이 경험함으로써 이 부분을 재발견하고 발전시켜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양인의 이와 같은 변신이 그러한 서양 그림자의 통합과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직 동양의 전통적 사고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알고자 하며 서양의 이름으로 들이닥친 자기내부의 그림자를 보는 사람만이 이 변화의 의미를 알고 이 변화를 창조적인 통합으로 이끌 수 있다.

 

P301. 우리가 객체를 모르면 모를수록 투사는 강해지고 편견은 망상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가 상대방을 모르면 모를수록 부정적인 그림자뿐 아니라 긍정적이며 이상화된 그림자를 상대방에 투사하여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 없게 된다.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이나 지나치게 백안시하고 위험시하는 것이나 다 같이 일방적이고 전체상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P302. 비록 매우 더디고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기실현은 오늘날과 같은 집단유행, 집단정신의 흐름에 전염되지 않는 면역성을 그 사람에게 확실히 부여한다. 그런 개인이 모일 때 그 집단은 성숙한 집단이 될 수 있다. 자기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의 책임으로 걸머질 수 있는 용기 있는 시민의 집단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림자의 의식화는 결국 집단의 성숙에 이바지하고 그 튼튼한 기반을 마련한다. 개인의 통찰 없는 제도상의 어떠한 개혁도, 어떠한 집단운동도 그 실효를 거두기 어렵고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

 

 

3. 내가 저자라면

 

목차/구성에 대하여

이 책의 장점

카를 융의 자서전인 카를 융_기억 꿈 사상을 읽을 때, 무슨 말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물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더 넓은 세계에 대하여 집필하였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이부영 선생의 그림자는 무의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관심있는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더불어 각 사회, 시대, 종교, 민담 등과 연계하여 무의식을 설명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흥미로웠으며, ’이렇게도 해석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완점 / 저자의 눈으로

오랜만에 굉장히 흥미롭게 읽은 책이라 특별히 보완점은 없음

 

 

 

IP *.140.65.7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