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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4일 09시 50분 등록
다산문선

정약용/ 민족문화추진회 편 / 출판사: 솔


Ⅰ. 저자에 대하여

丁若鏞

1762(영조 38) 경기 광주~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 翁)·태수(苔 )·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1. 마재에서 서울로
(1) 광주군 마재에서 태어남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윤씨 부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약용의 친가는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관리를 역임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그의 5대조인 정시윤이 광주군 마재로 이사한 이후로는 고조부, 증조부, 조부가 모두 벼슬에 오르지 못했고, 부친 정재원에 이르러 다시 벼슬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로서, 모친은 윤선도의 6세손이자 윤두서의 손녀였다.
정약용이 태어난 1762년은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가 당쟁에 휘말려 죽는 참극이 일어난 해였다. 벼슬길에 나섰다가 이 사건을 목격한 정재원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마침 태어난 정약용의 이름을 ‘귀농歸農’이라 지었다.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6살에는 부친의 임지인 경기도 연천에 가서 경서를 읽었다. 7살 때 처음으로 시를 지었는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우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란 구절이 있었다. 이를 본 그의 부친는 아들이 장차 역법과 산수에 통달할 것을 예견하였다.
9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2) 서울 출입과 이익의 저서
정약용은 15살의 나이로 풍산 홍씨에게 장가를 들었다. 정조가 왕위에 올랐던 1776년의 일이었다. 장가를 들기 직전에 관례를 치르면서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으로 지었다. 장인은 무과 출신으로 벼슬을 지낸 홍화보였다. 처가가 서울에 있었으므로 정약용의 서울 출입이 시작되었는데, 얼마 후 부친이 호조좌랑에 임명되자 아예 서울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집을 구해서 살았다.

서울에 살면서 정약용은 누님의 남편인 이승훈, 큰 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과 어울렸는데,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남인계 학자들이었다. 정약용은 이익의 [유고 遺稿]를 읽고 새로운 학문 세계에 눈을 떴다. 훗날 정약용은 자식과 조카들에게 “나의 큰 꿈은 성호 선생을 따라 사숙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았다”고 고백했는데, 10대 시절 정약용에게 이익의 저술이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3) 부친 임지에서 공부함
1777년 가을이 되자 부친이 화순현감으로 나가데 되어, 16세의 정약용의 부친을 따라 나섰다. 화순인근의 동복현에서 적벽과 몰염정을 방문하고, 서석산(전라남도 광주의 무등산)을 유람하며 시와 기문을 지었다. 그리고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동림사로 들어가 [맹자]를 읽었다.
정약용은 부친의 임지인 예천에 따라가서는 반학정에서 공부했고, 서울과 마재를 오가며 과거 공부에 전념했다. 그의 부친의 임지를 따라 다니면서 목민관이 해야 하는 일과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목격했는데, 이는 훗날 경세학 저술을 지을 때에 큰 도움이 되었다.

2. 실무 관리로서의 생활
(1) 성균관에서 정조를 만남
유교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였다. 1782년 서울 창동(남대문 안)에 집을 사서 이사했다. 21세의 나이에 본격적인 서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1783년(정조 7년) 정도는 세자(훗날 순조)의 책봉을 축하하는 증광감시를 실시했는데, 이때 정약용은 응시하여 생원이 되었고,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었다. 감시 합격자가 되어 정조에게 사은 인사를 올릴 때 정조의 눈에 띄었는데, 이것이 정조와 정약용의 첫 만남이었다.

정조가 성균관 유생을 양성하려는 학문정책을 적극 실시하였기 때문에 정조와 성균관 유생인 정약용의 만남은 잦아졌다. 1784년 정조는 [중용]의 의문점 80여 조를 작성하여 성균관 유생에게 답변하게 하였는데, 성균관 유생 중 학문이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정약용은 <중용강의>을 작성하여 정조의 눈에 들게 되었다. 정약용은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한 시험에서 꾸준히 우수한 성적을 보였고 정조는 그때마다 서적과 종이, 붓을 하사하면서 격려하였다.

(2) 서학과 서교를 접함
1779년 8월, 정조는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을 행차하며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불화살과 화포를 보았다. 이때 정약용은 정조의 행차를 구경했는데, 엄청난 화력을 가진 화포를 보면서 서양 과학의 위력을 경험했다.
이때까지 정약용은 서학은 접했지만 서교(=천주교)는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학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이미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강조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서학 서적은 명나라 말부터 꾸준히 유입되었고, 특히 천문, 역법과 농업 수리와 관련된 기구에 있어서는 우수성이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학 서적을 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정약용은 이미 이익의 학문을 사숙했고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서학을 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이익의 후학 중에는 천주교 교리까지 인정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정약용과 친분이 있던, 큰형의 처남인 이벽과 정약용 큰 누님의 남편인 이승훈이 중심인물이었다. 이벽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가운데 천주교 교리에 들어갔고, 조선에서 초기 천주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승훈은 1783년 부친 이동욱을 수행해 북경에 갔고, 천주교당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했다. 정약용은 이들을 통해 1784년 서교를 만날 수 있었다.

‘갑진년(1784) 4월 보름날, 맏형수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고 나와 우리 형제는 이덕조(이벽)와 같이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배 안에서 천지조화의 시초와 육신과 영혼이 죽고 사는 이치를 들으니, 황홀하고 놀라워 마치 은하수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에 도착하자 이벽의 집까지 따라가 [천주실의] [칠극]과 같은 천주교 서적을 빌려서 탐독하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은 자신과 천주교의 관련에 대해, <자찬묘지명>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적어도 진산 사건이 일어난 1791년까지는 천주교와 일정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서학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훗날 유교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3) 관직 생활과 학문 연마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7품의 희릉 직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정약용의 관리 생활은 1800년 정조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약용의 관리 생활은 몇차례 고비가 있었다. 1790년 우의정 체제공의 추천으로 예문관 검열에 임영되었지만, 격식에 어긋나는 추천을 받았다는 이유로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냈다.
1791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그에게 큰 위기로 작용했다. 진산사건은 호남의 유생인 권상연과 윤지충이 윤지충의 모친상에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식 장례를 지냈기 때문에 일어난 옥사건이었다. 이 때 균상연과 윤지충이 처형되었는데,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종형이고, 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종형이었다. 윤지충의 인척이었던 정약용은 창덕궁의 북영으로 밀려났고, 그와 가까운 인물들도 피해를 입었다.
1792년에 부친상을 맞아 삼년상 기간 동안 벼슬을 중단했고, 이를 마친 후에는 복귀하여 성균관 직강, 홍문관 교리, 수찬을 역임했다.

1795년 국왕의 부모인 장헌세자(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 되는 뜻 깊은 해였다. 정조는 장헌세자의 능을 명당이라고 알려진 화성관아터로 이전하였고, 기존에 그곳에 살던 백성을 새로운 성, 화성을 지어서 이주시켰다. 정약용은 1792년 당시 정약용은 부친상 중이었고,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정조는 정약용에게 화성의 축성을 위해 축성제도를 정리해 바치게 했다. 정약용은 명나라 사람 윤경의 [보약]과 유성룡의 [성설 城說]에서 좋은 제도를 택해 화성에 설치할 건축방법을 조목별로 정리했다. 또한 정조는 청나라에서 구입한 [기기도설]을 주고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법을 연구하게 했고, 이에 정약용은 기중기 제작법을 작성해 올렸다. 정조는 화성에 행차하여 회갑잔치를 개최하였다.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1795년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1797년에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정조의 측근에서 보좌하는 중에 반대파들의 거센 공격에 정약용은 외직인 곡산부사로 임명되어 목민관 생활을 경험했다. 반대파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1800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정약용의 든든한 후원자 체제공과 정조가 잇달아 사망하자 그는 더 이상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였다.

(4) 경세의 실무를 중시함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찰방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일반 백성들의 절망적이고 처참한 삶을 목격하고 지은 글

'큰 아이는 다섯 살에 기병에 등재되고
작은 아이는 세살인데 군적에 올랐다네
두 아이 일 년 세금이 오백전이나 되니
빨리 죽기를 바라는 데 의복에 신경 쓰랴'

1799년 중앙정계에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 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문제를 농업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3. 유배지에서의 저작활동

그의 학문과정과 생애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가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달고 형제들과 모여서 경전을 읽었다. 여유당전기는 시대상황이 자신에게 불안하게 돌아감을 느끼고 근신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밝힌 것이다.

(1) 유배지로 떠남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셋째 형 정약종이 천주의 성상과 교리서, 천주교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상자를 옮기다가 체포된 것이다.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정약용은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 )로 유배되었고 둘째 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그해 여름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여 체포 되었고, 천구교도인 황사영은 천주교회에 백서를 보내 서양의 힘을 빌려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 하다가 발각되었다. 황사영은 정약용 큰 형님의 사위였다. 이것과 관련하여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서울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심문을 받을 때 지은 저술이 그의 목숨을 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1월 정약전은 전라남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는데, 형제는 나주 율정의 주점에서 이별 한 다시는 만나보지 못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2) 경학 연구와 정약전
강진의 유배 생활 중에 그는 중풍으로 손발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렵고 눈조차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혹은 아들들에게 구술하여 받아쓰게 했다.
정약용의 저술을 읽고 비평해 준 사람은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형 정약전이었다. 정약용은 저술을 마무리 할 때마다 형에게 보내어 일일이 비평을 받았다. 정약용에게 있어 형은 스승이자, 부모였던 것이다. [주역사전]의 서문은 정약전의 마음이, 정약전이 죽었을 때 정약용이 지은 글에서는 그들이 어느 정도 서로를 얼마나 의지하고 학문적인 동반자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정약전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자신의 저작을 불태워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내용이있다.

특히 1808년 봄부터는 윤단(정약용의 외증조부인 윤두서의 손자)이 세운 산정으로 옮겨와 윤단의 아들 윤규로와 함께 그곳을 가꿔 연못, 폭포 등을 조성했다. 정약용은 집 근처에 차나무가 많았으므로 자신의 호를 ‘다산 茶 山’으로 바꾸고, 그가 거처한 곳을 ‘다산초당’이라 이름 지었다. 이곳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제자들이 모여 다산초당은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學理)를 연계하여 현실성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4. 고향 마재에서의 만년 생활

18년 동안의 유배에서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은 인근에 거주하던 신작, 김매순, 홍석주와 같은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 하였다. 이들은 모두 한강 연안에 거주하고 있고, 각가자 경학 저술을 가진 경학자였고, 또한 집안에 많은 서적을 소장하고 있는 장서가들이도 했다.
형 정약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의 저술을 읽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슬퍼한 정약용에게 이들은 서로의 저술을 읽고 비평해주는 학우였다. 또한 그가 미처 접하지 못한 새로운 학문의 정보까지 제공해 주었다.
고향에서도 정약용은 연구를 계속 하였는데, 이 때는 새로운 저술을 만들기 보다는 유배지에서 이뤄진 저술을 수정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1822년 정약용은 회갑을 맞았다. 정조치하에서 12년간의 관리생활을 경험하고 정조 사후 18년간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가족과 함께 맞이한 회갑이었다. 그는 그의 생애와 저술을 정리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자찬묘지명]을 작성하여 생애와 저술을 소개했다. 자신의 회갑때까지 저술한 것이 경집 232권, 문집 260권이며, ‘육경사서 六經四書 로 자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 一表二書 로 천하 국가를 다스리고자 했으니 본말本末이 구비되었다.’고 자평했다.

고향에 돌아온 후 정약용은 조정에 두차례의 부름을 받았는데, 그가 의술이 뛰어나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1830년 왕세자 익종의 병이 위독하여 불려갔으나, 진맥을 했을 때는 이미 운명하기 직전이었고, 약재를 구하러 궁을 나온 사이 사망하고 말았고, 1834년 순조가 위독했을 때 상경했지만, 동대문에 들어섰을 때, 이미 순조는 승하하고 말았다. 결국 더 이상 관리로 등용될 기회를 만나지 못했고 고향에서 생애를 마무리 했다.

5. 정약용이 정리한 학문들과 주장들

1799년에 저술한 〈전론 田論〉의 여전제(閭田制)는 토지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지주제를 부정하고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하는 기초 위에, 향촌을 30가구의 여(閭) 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여장(閭長)의 통솔하에 공동노동을 통해 경작하고 농민의 투하노동력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분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관련된 조세제도 개혁책으로서 정액제(定額制)를 취하고, 역제(役制)의 경우 재편성된 향촌제도와 관련시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하면서 호포제(戶布制)로의 개혁을 고려했다. 이러한 여전제의 보급을 위해서 여내(閭內) 농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무위도식하는 선비들에게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처럼 여전제는 농민경제의 균산화(均産化)와 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생산성 향상을 통한 사회적 부의 증대를 위해 노동력의 기능을 강조한 공동농장·협동농장적 경영론이다. 이는 종전의 한전론(限田論)· 균전론(均田論) 등 토지분배에만 초점을 맞춘 개혁론에 비해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 등 농업생산이나 농업경영 전반의 변혁까지도 포괄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시행의 전제가 되는 국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될 수 없었던 토지개혁방안이었다. 특히 〈전론〉에서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와 연결하여 공상(工商)을 농업에서 완전 분리시켜 독립적 사회분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당시 상품화폐경제와 수공업 발전의 현실을 염두에 둔 견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생산에 주력하는 중농정책(重農政策)이 견지되어 사족의 상업·공업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의 사회개혁론과 궤를 같이하여 혁신적 정치개혁론으로 제시된 것이 〈원정 原政〉·〈원목 原牧〉이다. 여기에서 그는 아래로부터의 정치개혁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 〈원정〉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왕정의 제일책으로 삼고 물화의 유통과 교환을 촉진하며 지방생산력의 불균등 발전을 완화하고 정치적 권리를 균등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파격적인 체제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는 만년에 저술한 정치권력론·역성혁명론으로서의 〈탕론 湯論〉과 이념적 기초를 같이한다.
그는 〈원목〉에서 태고 이래 민(民)의 자유의사와 선거에 의해 이장(里長)·면정(面正)·주장(州長)·제후(諸候)·천자(天子) 등 각 계층의 통치자들이 발생했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만약 민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행동하는 경우, 민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로써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발생에 관한 학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 발생 초기 유럽의 사회계약설과 유사한 논리가 되며 해석에 따라서는 정치의 민주주의적 합의제, 선거제,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경우와 달리 당시의 역사발전 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며, 다만 극도로 부패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기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같은 정치개혁론은 그의 사회 경제개혁론과 함께 당시의 현실 속에서 혁명을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불가능한 이상론이며 궁극적인 지향점은 밝혔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면서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론으로 체계화되기는 어려웠다.

〈주례 周禮〉 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 .
먼저 〈경세유표 經世遺表〉는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하여 현재의 실행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 구방(舊邦)을 새롭게 개혁해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했다"고 하여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유표〉의 구성은 경전에서의 이념적 모델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의 변천과정을 아울러 참조하여 개혁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목민심서 牧民心書〉는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여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흠흠신서 欽欽新書〉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해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 저술되었다. 제도개혁에 있어서 〈경세유표〉가 전국적 범위에서 국왕·국가가 집행할 것을 모색한 데 비해 〈목민심서〉는 군현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흠흠신서〉는 〈목민심서〉의 형전(刑典)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이 일표이서는 저술동기와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1817~22년에 기초, 완성되어 후기 개혁론의 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표이서의 개혁론은 경학사상체계와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체계화되었다.

정약용은 〈주례〉 속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의 개념을 원용한 상제관(上帝觀)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매개로 이를 군주와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천명은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바뀌어 항상 유덕(有德)한 사람에게 옮겨진다는 것이다. 덕의 유무는 민심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군주권의 근원은 결국 민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천명 그 자체가 통치권의 궁극적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다산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통치질서를 회복하여 치세(治世)의 근본을 확립하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군주의 우월성은 민의에 의해 한계가 규정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상제와 직결된 왕권과 상제와 직결된 민의 자주권 회복에 의해 하나의 통일된 통치체계를 수립하려 할 때 그 모습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으로 나타나며 사적 중간지배층의 배제는 필수적인 사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표이서에서 표방되는 개혁론은 전기에 비해 훨씬 온건한 것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현실을 크게 고려하면서 실현 가능한 점진적인 방안, 단계론적 시행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경세유표〉의 〈전제 田制〉에서는 우선 토지국유제하 농민의 개별적 점유를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토지국유의 실현이 불가능한 상태를 전제하여 차선책으로 정전제에서 동시에 시행되었던 구일세제법(九一稅制法)만이라도 원용하려는 방안을 제기했다. 이는 토지제도의 개혁보다는 국가재정과 밀접한 조세제도의 개혁, 일체의 중간수탈 배제를 목적으로 한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서 현안을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서 점진적이고 과도기적인 개혁방안이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다산은 사민구직(四民九職)의 직업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상업의 경우 농업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조세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며 해외 상업을 발전시키려 했다 . 이를 위해 동전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금화·은화와 같은 고액화폐의 발행으로 원격지간 교역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즉 상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중소상인은 보호하는 방식을 도모했다. 다음으로 수공업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기술도입론을 강조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지방 차원에서 민간 직물업에 관련된 기술도입을 역설했고 〈경세유표〉에서는 토목공사기술 등을 국가 차원의 제도개혁을 통해 적극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그의 중앙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즉 기술도입의 주체인 국가기구가 강력하게 민간산업을 보호·통제하고 기간산업을 관장함으로써 대상인의 횡포에서 중소수공업자를 보호하려 했다. 국영광산론 역시 천연의 부에 대한 특권층의 자의적 이용을 배제하여 국가 통제하에 두며 그 이익을 공전(公田) 매입에 돌림으로써 전체적으로 소농민의 이익이 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밖에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물화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교통수단의 정비를 제안했다. 이는 18세기말과 19세기초 유통경제의 발전과정을 염두에 둔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리(一理)로서의 태극이 관통하고 있음을 주장한 데 비해 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천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그는 전통적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천문·기상·지리·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논박하고 서학과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 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요지 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다. 또한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수원성의 축조시 거중기·고륜(鼓輪)·활차(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했다. 이와 함께 〈기예론 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의학·백공(百工)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 〈원정〉에서는 수리관개사업·식수(植樹)·목축·수렵·채광기술 및 의학을 깊이 연구해야 농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과학정책론을 제시했다.

( 다산에 대한 평가와 학문의 연구내용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참조하였고,
그의 생애의 기술은 광주문화원에서 발행한 [광주와 실학] p198~235를 참조하였다.)



Ⅱ.감상
학문연구에서 평생의 즐거움을 찾은 사람'

다산문선을 읽는 동안 마음이 편안했다. 조용하고 자신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살아간 선비의 마음이 천천히 전달되었다.

다산 그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연구하고 익힌 경학과 서학을 정리하면서 자신이 쌓아올린 ‘지식’과 ‘삶’을 ‘화해’시켰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는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부를 하는 것은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힙합 댄스는 재미난 것이지만, 책을 읽고 뭔가를 배워나가는 것은 더 이상 즐거움이 되지 못한다. 즐거움이 없기에 책 읽기는 더 이상 삶과 가까워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오늘날 배움이 삶에서 멀어진 것처럼, 정약용의 생애를 본다면 학문을 계속하지 않아도 되는 요소가 충분했다. 학문을 닦아 벼슬을 하는 것, 그것은 유배 생활을 하는 그에게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학문을 닦아 이름을 떨치는 것, 그것도 그에게는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오로지 학문하는 즐거움으로 채워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18년간의 오랜 유배생활을 버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산문선에서는 자산의 두 아들에게 자신의 책을 읽어라, 좋은 책을 골라 읽어라고 끊임없이 권학을 한다. 두 아들들은 아버지가 아는 그 즐거움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배움과 삶을 하나로 일치시킨 다산을 보면서, 행하는 것 자체로서 즐거운 일 하나를 찾는 것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것은 평생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그 힘 하나를 찾는 일에 나는 지금 몰두 하고 있다.


Ⅲ. 책속에서 인용
- '[ ]' 안의 숫자는 책의 페이지를 나타낸다.
- 특별히 사람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인용은 정약용의 저서에 나타난 정약용의 말이다.
- '* '은 약간의 설명이거나, 그 구절을 읽으면서 생각난 것들을 적은 것이다.


[13] 그가 잠을 깨지 않고서는 스스로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취몽재기’의 한구절

[14] 미친 사람은 미친 것을 그 스스로 알지 못하고, 미쳤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진짜 미친 것이 아니다. 간사함, 음탕함, 게으름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잘못을 고칠 수 있다.
* ‘취몽재기’의 한구절. 내겐 치열함이 부족해. 하지만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고쳐지지는 않는 것 같아.

[16] “적벽의 뛰어난 경치는 여자가 화장을 한 것과 같아서 붉고 푸르게 분을 바른 모습이 비록 눈을 즐겁게 할 수는 있으나, 가슴 속에 품은 생각을 풀고 기질과 의지를 펼 수는 없네. 그대는 서석산을 보지 못하였는가.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과 훌륭한 선비가 말하지도 웃지도 않고 조정에 앉아 비록 움직이는 흔적을 불 수 없지만 그의 공적은 사물에 널리 미치는 것과 같네. 그대는 그 산을 가보지 않으려나?’
* 건물들에 가려 서석산(무등산)의 웅장한 모습을 멀리서 한눈으로는 보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그 웅장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나 보다. 무등산이 그렇게 아름다웠나? 서석대에 오르기 전에 억새가 있는 너른 능선에서는 기교 없는 평안함을 느껴진다. 항상 그곳에 있어 묵직한 산이지.
* ‘유서석산기’ 중에서

[18] 이곳에 올 때는 첫눈이 가루처럼 뿌리고 산골 물은 얼어붙을 듯하였으며, 산의 나무와 대나무의 빛도 모두 새파랗게 추워서 움츠린 것 같아서, 아침저녁으로 거닐면 정신이 맑아졌다. (중략) 날이 저물어 별이 보이면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며 시를 읊조리고, 밤이면 중이 게송을 읊고 불경을 외우는 소리를 듣다가 다시 책을 읽는다. 이렇게 40일 동안 하고는 내가 말하기를,
“중이 중노릇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무릇, 형제 처자의 즐거움이 없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의 즐거움이 없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고통스럽게도 중 노릇을 합니까. 진실로 그와 바꿀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가 학문을 한 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 같은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까?” 하였더니 둘째 형님도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 그것이 중 노릇하는 까닭일 것이다.”
* ‘동림사 독서기’ 중에서

[23] 달을 얻는데는 참으로 도가 있으니, 사사로운 욕심과 혼자만이 차지하려는 마음을 없애지 않고서야 참으로 소유할 수 있겠는가? 득월의 경지에 이른 자는 아무리 천하 사물 가운데 아름다운 것을 모두 얻는다고 하더라도 달을 얻는 것과 바꾸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천하 사물 가운데 아름다운 것을 순지가 얻을 수 없음에랴. 순지는 이미 달을 얻었으니 편안히 여길지어다.
* ‘득월당기’ 중에서
* 아래층 주인집의 검둥개의 이름이 ‘달’이다. 그 이름을 알기 전까진 ‘검둥아, 검둥아’하고 불렀는데 알고 나니 이젠 가끔 ‘달아’하며 부른다. 온통 까만 검둥개에 ‘달’이라니, 이름 붙인 주인의 심사가 궁금하다. 앞가슴과 배만 유독 하얀 털이 전체의 털 빛과 대조를 이룬다. 앞으로 바로 섰을 때, 앞가슴의 흰 털이 달이 뜬 듯 보여서 일까? 아님 천장지구? 아래층의 검둥개의 주인은 ‘달’을 곁에 두고 산다.

[24] 나의 병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용감하지만 슬기로운 꾀가 없고 선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을 모르며, 마음 내키는 대로 즉시 행하여 의심할 줄을 모르고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그만둘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마음에 기쁘게 느껴지기만 하면 그만두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에 꺼림칙하여 불쾌하게 되면 그만둘 수 없다.
* ‘여유당기’ 중에서. 공감한다.

[25]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猶).”
* ‘여유당기’ 중에서

[29] 정자에 올라 자리를 펴고 난간에 앉으려니, 수목은 이미 미친듯이 흔들렸고 한기가 뼈에 스며들었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더니 산골 물이 갑자가 흘러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은 메워지고 물 부딪치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였다 흘러내리는 모래와 구르는 돌이 내리치는 물 속에 마구 쏟아져 내리면서, 물은 정자의 주춧돌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형세는 웅장하고 소리는 맹렬하여 서까래와 난간이 진동하니 오들오들 떨려 편안치가 못하였다.
* ‘유세검정기’ 중에서. 세검정 앞으로 큰 길이 나버리고 물길을 따로 내었으니 지금도 이러할까? 비가 쏟아지는 날 세검정에 가고 싶다. 이런 광경은 깊은 산 계곡에서나 겪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그 거침없는 물을 보고 싶다.

[53] 몇 년 뒤에 그의 아버지가 멀리 장사를 나가 있으면서 집에 모낸 편지에 ‘평안하다’고 하였는데, 효자는 그 편지를 품에 안고 울었다. 그 어머니가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으니 효자는,
“아버지께서 아마 병을 앓고 계시나 봅니다. 글자의 획이 떨렸지 않습니까?”
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물어보니 병이 위독했다고 한다.
* ‘정효자전’ 중에서.
군대에 있는 아들에게 친구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모두 평안하다는 말만을 써서 보낸다. 그 편지를 읽을 아들이, 친구가 편지글의 내용으로 근심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편지를 보내 올 때도 그러하다. 그런 마음까지 담아보낸 것을 제대 후에야 알게된다. 情이 그렇게 보태어진다.

[58]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떤 아낙이 그의 남편을 구해주기를 청하였는데 몽수가 말하기를
“ 당신 남편의 병은 매우 심하오, 다만 한 가지 약이 있기는 하지만 당신은 쓰기 못할 것이오.”
했다. 그 아낙은 굳이 청하였지만 몽수는 끝내 말하여주지 않았다. 남편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안 아낙은 독약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가 술에 타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는 장차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 아낙이 잠깐 눈밖에 나가서 울고 들어와 술잔을 찾아보니 술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 남편에게 물으니 목이 말라서 마셨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이몽수에게 달려가서 구해달라고 하자 이몽수는 말하기를,
“이상하고, 내가 전에 한 가지 약이 있다고 한 것이 바로 그 독약이오, 나는 당신이 독약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당신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오. 지금 당신 남편이 살아난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오.”
하였다. 그녀가 집에 돌아가보니 남편의 병이 나아 있었다.
* 자칫하면 호러물이 될 수도 있었던 이야기이다.

[62] 무릇 천륜에 야박한 사람은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믿어서도 안 되며, 비록 충후하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온 정성을 다해 나를 섬기더라도,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 [사람에게서 구하라] 중 관중이 같은 이유를 들어서 왕에게 측근들 중에 몇을 내치라고 한 것이 떠오른다.

[63]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란 임금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임금에게 신임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 [군주론] vs. 신하론

[72] 무릇 시에는 정신과 기맥이 있어야 한다.

[76]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79] 너희들은 이 점을 바로 알아서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노력은 조금 늦추더라도 먼저 올바른 몸가짐의 공부에 힘써 육중한 산처럼 우뚝 솟은 모습으로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를 힉혀야 한다.
* 마음가짐과 자세를 바르게 하라. 이는 학문보다 우선한다.
‘진중하기를 산과 같이 하라’가 요즘 마음에 품고 있는 말이다. 마음이 요란하여 자꾸 험한 말이 표출됨을 걱정한다.

[80] 재화를 비밀리에 숨겨두는 방법으로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82] 무릇 하늘에 부끄럽고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을 전혀 범하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윤택해져 호연지기가 생기는 것이다.
* 아멘.

[83] 나는 논밭과 동산을 너희에게 남겨줄 수 있을 많나 벼슬을 하지 않았다만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이 있어서 삶을 넉넉히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기에 이제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는 소홀이 여기지 말아라. 한 글자는 ‘근 勤’이요 또 한글자는 ‘검 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필요한 곳에 쓴다 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84] 사람이 천기간에 살면서 귀히 여기는 것은 성실한 것이니 조금도 속임이 없어야 한다. 하늘을 속이는 것이 가장 나쁘고, 임금을 속이고 어버이를 속이는 데서부터 농가가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상인을 속이는 데 이르기까지 모두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오직 하나 속일 게 이으니 바로 자기의 입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식물로 속이더라도 잠깐 그때를 지나면 되니 이는 괜찮은 방법이다.

[92] 공은 나보다 스무 살이 더 위였으나 국가의 큰일을 함께 논하다가 충의 감격한 뜻이 맞으면 훌쩍 일어나 절을 하곤 하였다.
* 여기서 공은 ‘이가환’이란 사람인 듯 하다. 멋지다. 충의와 충의가 만나는 순간에는 나이가 잊혀진다. 영혼과 영혼의 만남에는 선후가 문제되지 않는다.

[97] 아침에 햇빛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 때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진리인 것이다. 운명은 돌고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은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 때의 재해 때문에 마침내 청운의 뜻까지 꺽어서는 안된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가을 ark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지니고서 천지가 눈 안에 들고 우주가 손바닥 안에 있듯이 생각하고 있어야 옳다.
* 많은 편지글을 읽으면서 아버지의 따뜻함을 느낀다.

[98] 남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행위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고,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만한 것이 없다.
* ‘여유 與猶’

[113] 네 편지 중에 모든 의심나고 모르는 부분을 질문할 곳이 없다고 한탄하였는데 과연 네 마음에 참으로 의심나서 견딜 수 없고 생각이 나서 감내할 수 없다면, 왜 조목조족 기록해서 인편에 보내오지 않느냐? 부자간에 스승과 제가가 도는 것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 나는 의심은 많아도 그 의심만큼 질문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왜 질문하지 않았지? 대체 뭐가 두려워서. …… 결국은 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33]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잃어버렸으니 앞으로는 비록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고 어는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 형 정약전이 죽고서 그를 슬퍼함.

[137] 첫째 이유는 날로 마음씨가 나빠지고 행동이 비루해져가니,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겠고, 둘째는 안목이 좁아지고 지기가 상실되어가니,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겠고, 첫째는 경학이 조잡해지고 식견이 텅 비어가지,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겠다.
*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이렇다면 더욱 공부를 해야 한다.

[138] [시경] 3백 편은 모두 충신, 효자, 열부, 좋은 벗들의 진실하고 충후한 마음의 발로이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은 것이라면 시가 아니요,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은 것이라면 시가 아니며, 높은 덕을 찬미하고 나쁜 행실을 풍자하며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한 것이 아니라면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뜻이 서지 않고 학문이 순전하지 못하며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듣지 못하며, 임금을 요순의 성군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히려는 마음을 갖지 못한 자는 시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너는 힘쓰도록 하여라.

[145] 이후로는 너희들이게 우환이 있는데도 저들이 돌보지 않더라도 너희들은 절대 마음에 한을 품지 말고 오로지 곧게 어진 마음으로 ‘저 사람이 마침 서로 방해되는 일이 있어서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절대로 입에 경솔한 말을 올려 “나는 일찍이 이렇게 해 주었는데 저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한다.”고 하지 말아라. 이러한 말을 한번 하면 그 동안 쌓아놓은 공덕이 하루 아침에 바람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 내가 품고 살아야 할 말이다.

[171] 무릇 책을 읽을 때는 한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연구해서 그 근본을 터득하고 따라서 그 글의 전체를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을 계속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 아울러서 수백 가지의 책을 널리 찾아보게 될 것이요, 따라서 본서의 의리에 대해서 분명히 꿰뚫을 수 있으니, 이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 책을 읽을 때 참고할 책, 인명사전, 자전(옥편), 역서, 백과서전…..

[174] 너처럼 배우지 못하고 식견이 좁은 폐족의 한 사람으로서 못된 술주정뱅이라는 이름이 더 붙게 된다면 앞으로 어떤 등급의 사람이 되겠느냐? …….. 너에게 빌고 비노니, 술을 입에서 끊고 마시지 말도록 하여라.
* 아버지께서 이렇게 간곡히 하시니 술을 꼭 끊어야 할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아버지 소원 들어드려야지.

[182] 나의 친구여! 무릇 미련한 백성과 간사한 관리는 만나거든,
“흥양에는 본래 좋은 풍속이 있었는데 너희들이 왜 그것을 더럽히느냐?”
하면서 꾸짖으면 흥양 사람들이 기뻐할 것이고 만일,
“흥양 사람들은 모두 이렇군.”
하면 흥양 사람들이 괴로워할 것이다.
* ‘수령이 조심해야 할 네 가지 일’ 중에서

[186] 아무리 성인이라 하더라도 천 명이나 만 명의 사람이 함께 의논한 것을 당해 낼 수 없고, 아무리 성인이라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그 아름다운 덕을 모조리 갖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그 기예가 정교하게 되고, 세대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기예가 더욱 공교하게 되니, 이는 사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기예론’ 중에서

[190] 무릇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 근본하고, 성현의 글에 밝혀졌으니, 진실로 이를 넓혀서 충실하게 하고, 닦아서 이를 밝힌다면 곧 예의의 풍속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는 진실로 밖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요, 또한 뒤에 나오는 것에 힘입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194] 맥을 진찰하는 것을 배우는 사람은 오직 그것이 힘이 있고 없는가와, 神이 있고 없는 가와 법도가 있고 없는 가만을 살필 뿐이지 어찌 오장육부를 분별할 수야 있겠는가

맥이 오장에서 명령을 받아 팔다리와 몸에 통하는 것은 마치 물이 여러 산에서 발원하여 하류에 도착하는 것과 같다.
* ‘맥론’ 중에서

[195] 상相은 익히는 것으로 인하여 변하고, 형세는 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데,
* ‘相론’ 중에서. 형상 象을 논한 것이 아니고, 相을 논한 것이다.
번역하여 붙인 제목에는 ‘용모에 대하여 논함’이라고 붙어 있다. 내용은 용모에 대한 것이 많은 데, 얼굴을 얘기하는 ‘상’자는 相(서로 상, 바탕 상)를 쓰나? 혹은 용모가 그 사람을 그의 인생을 규정한다기 보다는 하는 일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모습을 이루어간다는 내용에 충실하여 이런 제목을 붙일 것일까?
정약용이 각각의 구절에서 어떤 글자를 사용하여 ‘상’을 논했는지는 이것은 원문으로 보아야 알 것 같다. 어떤 글자를 사용했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니까

[196] 무릇 학문을 익힌 사람은 사리를 통달하는 데 효과가 있고, 이익을 익힌 사람은 재물을 모으는 데 효과가 있고, 힘을 익힌 사람은 비천한 일에 몸을 마치고, 악을 익힌 사람은 패망한 데 몸을 마치게 되니, 익힘과 효과가 아울러 진보함으로써 효과와 상이 모두 변하게 된다.
* ‘상론’ 중에서

[198] 사대부와 서인이 상을 믿으면 직업을 잃게 되고, 경대부가 상을 믿으면 그 친구를 잃게 되고, 임금이 상을 믿으면 신하를 잃게 된다.

[211] 맹자의 제가 악정자춘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닷새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다가 이윽고 “우리 어머니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이러는 것을 잘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어머니의 마음을 무시하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뉘우쳤다.
* ‘효자론’ 중에서

[217] 천하의 올바른 도리는 하나 뿐이다. 매우 효성스럽지 못하고 자애스럽지 못하면서 유독 남편에 대해서만은 올바른 도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열부론’ 중에서

[232] “이 곡식이 전에 우리 집에서 실어갔던 건가요? 어째서 묵은 쌀과 변질된 쌀이 섞여 있고 또 싸라기는 왜 이리 많아요? 이것은 시동생 집에서 실어다 두었던 것과 바뀐 것이 아닌가요? 아니면 광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공모하여 협잡한 것인가요? 지난 번에 우리가 굶주릴까 봐 걱정한다고 한 것이 결과가 이 모양이란 말입니까?”
한 뒤에 말로 되어보고는,
“이 쌀이 세 말이란 말인가요? 우리 말로는 열닷 되도 못 되는 데….”
* ‘환상론’ 중에서
* ‘환상론’은 당시의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준 환곡법에 대해서 논한 것 같다.

[234] “법은 환상법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환상법은 비록 아버지와 아들 사이일지다도 행할 수 없다.”

[238~242] 감사에 대해 논함.
좀도둑, 강도, 산적떼, 부패한 관리, 부패한 감사
[242]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 죽을 것이다.”

[244] [대학]에서 “명덕을 밝힌다.” 한 것은 그 두가지 (효와 제)를 밝힌다 한 것이고, [중용]에서 “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진다 (自誠明)” 한 것은 그 두 가지(효와 제)에 성실한다는 것이다. 충忠이라는 말은 자기에게 거짓이 없이 이 두 가지를 다한다는 뜻이고, 서恕라는 말은 이 두 가지를 미루어 상대에게 까지 미친다는 뜻이다.
* [난중일기]와 [백범일지]를 읽는 동안 忠과 孝의 의미가 궁금했는데, 약간은 풀어줄 듯 하다. 忠이란 誠과 관련이 있다.

[253] 결국 원망(원怨)이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 나머지 성인으로서도 인정한 사실이고, 충신 효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충정을 나타내는 길이다. 그러므로 원망을 설명할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시를 말할 수 있고, 원망에 대한 의의를 아는 자라야 비로소 충효에 대한 감정을 성명할 수 있다.
* ‘原怨’ 중에서
* 예로 부모를 원망하고, 군주를 원망하는 것을 들었다. 자식에게 존경과 미움을 둘 다 받아 보지 않는 사람은 진정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그리고 또, 진정으로 배가 고파보지 않은 사람이 배고픔을 논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듯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 환경만을 겪은 사람이 부모에게 잘하는 것은 효라고 말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시험을 받아본 적도 없으면서 번민에 싸여보지도 못해보고서, 원망해 보지도 않고 한결같이 효와 충을 실천했다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가 아닐까.

[260] 7년 된 병을 3년 묵은 쑥으로 고치니

[277] 상소에 대한 임금님의 비답이 있었다.
“소를 자세히 살펴보니, 착한 마음의 싹이 마치 봄바람에 만물이 자라는 것 같다. 종이에 가득히 열거한 말은 듣는 이를 감동시킬 만하다. 너는 사양하지 말고 직책을 수행하라.”
*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에서
이 소를 읽고는 나는 그냥 허허로운 웃음이 나왔다.

[294] 형제는 나와 더불어 부모를 같이 하였으니 이 또한 나일 따름이다. 형은 먼저 태어난 나요, 아우는 뒤에 태어난 나다. 다만 얼굴 모양과 나이가 다를 뿐인데….

[300] 파리야, 날아와 훌쩍훌쩍 울지만 말고 너의 부모와 처자식을 모두 거두고 와서 여한 없이 한번 실컷 포식하라.
* ‘파리를 조문하는 글’ 중에서
* 윤회, 축생, 수라……. 헐벗고 굶어죽은 백성, 파리.

[311] 탐진 백성들은, 벼 베기가 끝나면 농토가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곧바로 그 이웃 사람의 논을 경작하기를 마치 자기 논밭처럼 하여 보리를 심는다. 내 말이 “잘하는 일이다. 보리가 익으면 반으로 나누느냐?”고 하니 아니라고 한다. “세금을 낼 때 그 반을 부담하느냐?”고 하니,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밭주인과 나누지도 않고 또한 세금을 내는 데 한푼도 들지 않는다. “그러면 벼를 심을 때에 품앗이로 보답하느냐?’고 하니, 그 역시 아니라고 한다. “땅힘이 떨어지지 않느냐?”고 하니, 왜 그렇지 않겠느냐고 한다. “보리를 미처 베어내지 못하고 비가 내려 모심기를 해야 할 경우 서로 피해가 없느냐?’고 하난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고 대답한다. 아아, 참으로 어질고 후덕한 풍속이다.
* ‘탐진에 대한 대답’ 중에서

Ⅳ. 내가 저자라면

기를 읽을 때는 언제적 감상인지 궁금했다. 저자 정약용이 10대 후반에 겪은 것인지, 20대 혹은 노년에 얻은 감상인지 궁금했다.
인생의 시점이 달아질 때, 감상이 달라질 거란 예상으로 그래서, 記를 써둘 때는 앞이나 뒤쪽에 날짜를 적어두었으면 한다. 자신의 일기를 볼 때도 가끔은 자신이 한 일데도 아득히 잊고 있다가 '이런 일이 있었던가' 할 때도 많고, 볼때마다 느낌이 새로워지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독득한 이야기 하나씩 재미나게 읽었다. 어느 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한다는 것을 무척이나 꺼려했었다. 비평을 쓰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화를 중심으로 가볍게 적어두는 것도 괜찮겠다.

가훈과 書
아들의 기질을 무시하고 너무 권학만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처음 읽을 때는 반감이 생겼었다. 그러나 밑줄친 것들을 다시 읽게 되었을 때, 다른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권학 뒤에 숨은 아버지의 마음을.
書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書는 일부러 꾸미지 안아도 마음이 담긴다. 서를 쓸때는 글을 쓰는 두려움 따위는 저리 치워버리자.

說, 論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기술하는 설과 논.
이부분까지 다가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하다. 나는 아직 '논'를 할 만한 용기가 부족하다.
머리속에 품은 생각은 많다. 그러나,드러낼 용기가 부족하다. 드러내지 못하는 데는, 지식의 부족도 있고, 정약용이 지적했듯이 논쟁을 피해가려는 비겁함도 있다.

잡문
'파리를 조문하는 글'은 웃다가 곧 웃음을 멈추었다. 나의 웃음은 애민의 절절함 앞에 무례했다.
음식으로 꼬이는 '파리'는 헛벌고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비유였다.

'탐진에 대한 대답'에서 보리밭을 보고 문답 하는 장면은 문에는 따옴표가 답에는 전달하는 말로 되어서 긴 문답이 전개가 빨랐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 문답을 살린 것이 내용전달에 적절했다. 읽는 데 시원시원했다. 그 구성은 한번쯤은 써먹고 싶은 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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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海
2007.06.25 19:43:11 *.244.221.2
저는 정약용선생의 삶을 보면서 무언가 한스러움을 느꼈습니다.
다산초당에 가서 고향소식을 기다리던 바위에 앉아 먼 곳을 쳐다보면서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지금도 강진에 가면 꼭 다산초당을 들려서 문안인사 드리고 천천히 거닐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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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25 19:52:14 *.72.153.12
두해님...정약용, 김구, 이순신. 6월에 만난 인물들에서는 모두 恨 이란 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다른 무엇도 있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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