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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5일 11시 14분 등록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연구원 활동 초기에 매주 주어진 책의 저자를 조사하는 것은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저자에 대해서 기본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스스로의 무지함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와 더불어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미래의 달을 장식 했던 학자들이 그랬고, 그에 앞섰던 조안 시울라나 알렌 B. 치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관련 자료라고는 그들의 저서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저자 자신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최근 몇 명의 저자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그들은 저서로써 평가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었다. 난중 일기 속의 이순신이 그랬고, 백범일지 속의 김구가 또 그랬다. 몇몇 저자들은 관련 자료가 너무 없어서 그들의 삶을 짐작하기 어려웠고, 또 다른 몇몇은 너무 자세히 그들의 생애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 중에 어떤 부분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번 주의 주인공,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료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산연구소 홈페이지(http://www.edasan.org/)에 들어가니 다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또 다산학술문화재단 홈페이지(http://www.tasan.or.kr)에는 그의 업적에 대한 연구 자료와 논문들이 빼곡하다. 두 곳만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그의 생에를 가지런히 정리한 연대기에서부터 일부 저술들의 원문 및 번역본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만나게 된다. 대략 가늠해 보아도 주어진 1주일의 시간으로는 자료를 대충 훑어 보는 것도 힘들 듯 싶다. 어떻게 해야 주어진 시간 내에 그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주어진 '목민심서'와 '다산문선'의 선택 중에 다산문선을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런 자발적인 비겁함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그의 학문적 깊이를 충분히 맛볼 수 없다면 그런 업적의 이면에 존재했던 인간적인 다산의 모습을 알아보는 건 어떨까?' 이것이 내가 이번 주에 쓴 안경이다. 엄청난 저작물을 쏟아낸 천재적인 실학자, 다산이 아니라 아들들에게 잔소리를 해대는 아버지 다산과, 천주교 박해와 더불어 불운한 정치적 생애를 보내야 했던 관료로서의 다산보다는 비 오는 날 세검정으로 내달려 풍류를 즐겼던 낭만 가득한 다산이, 이번에 내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그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다산을 목표로 정했다고 해서 그의 생애, 사상, 업적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일단 조금 살펴보자.

다산의 생애

앞서 언급한 두 개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시기별로 분류한 그의 생애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또 연대기를 참조하면 그의 업적이나 저술 또한 비교적 정확하게 추적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내용은 타 연구원의 자료에도 인용되었고, 그 양이 너무 많으므로 생략한다. 대신 짧은 동영상 자료를 하나 첨부하려 한다. 이 동영상은 남양주시가 제작한 것으로 대략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에 다산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하다.



다산의 사상(다산연구소 자료 인용)

자신의 인격수양으로 시작하는 학문

다산의 학문은 경학(經學)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자찬묘지명>에 “육경(六經)사서(四書)로써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을 갖추었다”고 적고 있다.

다산의 학문체계는 경학을 근본으로 하고, 경세학을 그 실현방법으로 보고 있다. 경학을 통해 수기(修己), 즉 자기의 인간됨의 완성을 위해 수양하고, 경세학으로 치인(治人), 즉 완성된 인격과 능력으로 천하와 국가를 경영(세상에 봉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배시절 초기에 경학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주자 성리학 비판, 공자 정신으로 돌아가자

다산은 『오학론』에서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의 다섯가지 학에 관해서 그 폐단을 비판했다. 다산은 당시의 지배적인 학문이던 주자성리학에 안주하지 않았다. 관념화된 주자성리학은 더 이상 시대를 이끌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공자와 맹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이는 결코 복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혁명적 사상은 당시의 지배이념에 대한 비판으로 그 근거를 고대의 전통에서 찾곤 했다. 다산의 개혁론도 전통에 내재된 본래적 가치를 재각성함으로써 현재의 묵은 폐단을 제거하는 논리를 취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다산정신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다산은 이론 위주의 성리철학으로 윤색된 육경(六經)과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공자, 맹자의 본지(本旨)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데에 힘썼다. 그 결과가 《논어고금주》48권을 비롯하여 《맹자요의》 9권 등 육경?사서에 대한 232권의 방대한 저술로 남았다.

여기서 다산은 성(性) · 인(仁) · 도(道) · 덕(德) · 명(命) 등 대부분의 유교의 중심적인 명제(命題)들을 다시 해석한다. 이(理)라는 관념의 세계로 해석한 주자와 달리, 실행과 실천이 가능한 실학적 사고로 새로운 경전 해석을 시도한 것이 다산의 경학이었다.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학문

다산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학문자세를 견지했다. 청나라에서 새롭게 전래된 경전해석 방법인 고증학이나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 등 새로운 사조에 열려있었다. 그리고 고증학의 실증적 태도 등 객관적 학문자세를 따르지만 그에 머물지 않았다. 실증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했다. 인간과 사회의 가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다산은 속유론(俗儒論)에서 ‘속된 선비는 시의(時宜)를 모르니 어찌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에 대해 논하면서, 고루한 선비의 잘못을 질타했다.

“참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며, 문(文)에 능하고 무(武)에 능한 것, 이 모두 해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찌 옛 사람의 글귀나 따서 글을 짓고, 벌레나 물고기 등류의 해설을 하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禮貌)를 익히는 것만이 선비의 학문이겠는가.”

경세학,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사상

경학과 더불어 다산의 중심과제인 경세학은 당시 사회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세상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는 것이 다산의 진단이었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一毛一髮無非病耳)”고 보았으며,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며 개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이 쓴 자찬묘지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경세유표』를 지은 동기는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할(新我之舊邦)’ 생각이라 했다.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제로 바꾸려는 의사로 경세유표를 저작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다산은 숱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민(民)이 근본이다

다산 경세학의 근저에는 민(民)을 근본으로 여기는 자세 또는 민(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다산이 남긴 시문들은 당시 민초의 피폐하고 참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경기 암행어사로 민간에 잠행하면서 농촌의 피폐상을 직접 보고서, 강진 귀양살이 때 국가권력과 아전의 횡포를 직접 듣고서 토해낸 글들이다.

다산은 당시의 치자-피치자의 구조에서 백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치자의 책무와 피치자의 권리를 각성시키고자 노력했다.

원목(原牧)이라는 글에서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 생긴 것인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목민관이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牧爲民有也)”고 결말을 짓고 있다.

또한 탕론(湯論)에서는 “탕왕(湯王)이 걸(桀)을 추방한 것이 옳은 일인가?”, “신하가 임금을 친 것이 옳은 일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천자는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이다(天子者 衆推之而成者也)”고 답한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했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하는 것이 순(順)이라”고 보았다.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 : 백성 다스리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목민관으로서 요구되는 덕목으로 ‘율기(律己: 자신을 다스림)’, 봉공(奉公: 공을 받듦),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 세 가지를 벼리로 삼고 있다. 이 모두가 백성 한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입었으면 하는 것이 다산의 마음이었다.

『흠흠신서』를 지은 것도 법의 집행에서 억울한 백성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다산의 애민정신, 민본사상은 민생을 위한 각종 대책으로 연결된다. 경자유전(耕者有田), 균산병활 원칙에 입각한 토지제도 조세제도의 개혁론을 전개했다. 나아가 제도개혁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생산증대의 방법을 모색한다. 기계와 기술의 도입에 의한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기술을 개발하여 백성을 편하고 넉넉하게

다산은 그의 「기예론(技藝論)」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널리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그 기예가 정교하게 되고, 세대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기예가 더욱 공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더 넓은 세계의 기예를 배울 것과 새로운 기예를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농업의 기예나 직조의 기예를 정교하게 하여 편리함을 도모하고 소득을 올릴 수 있고, 병기의 기예를 정교하게 하여 용맹을 돕고 그 위태로움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 밖에도 의술과 백공의 기예가 정교해지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대가 강해지고 백성들이 넉넉하여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다산의 학문세계(다산학술문화재단 자료 인용)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조 후기의 학자다. 그는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 · 경제 · 역리 · 지리 · 문학 · 철학 · 의학 · 교육학 · 군사학 ·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5백여권에 달하는 이 저술들은 깊고도 넓은 학문세계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우리의 고전이 되고 있다.

18세기 후반 시작된 다산의 경학연구는 강진유배기에 본격화되어 1812년까지 六經의 연구를 마치고 1814년까지 2년 동안에는 四書에 대한 저술을 완성한다. 소학과 심경에 대한 연구가 있었던 1815년에 비로소 방대한 경학에 대한 연구를 일단락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경세학 관련 저술을 시작해 일표이서라는 불후의 명저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1822년 회갑을 맞아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 다산은 자신의 학문체계를 요약하여 "육경과 사서로써 자기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으니 본과 말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다산의 경학연구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귀향 후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의 이른바 경기학인들과 교유하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834년 이전의 상서에 대한 연구를 수정 · 보완한 <상서고훈>을 완성한다.

다산의 저술은 1922년 문집에 넣기 위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자찬묘지명의 集中本을 기준으로 할 때 육경사서에 연구서인 경학집 232권과 일표이서를 포함한 경세학서 138권에 시문집과 기타 저술을 포함한 문집 260권을 합하여 총 492권이다. 집중본과 구분하여 무덤 속에 넣기 위해 간략하게 쓴 자찬묘지명 壙中本에는 경학집이 230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소학지언>과 <심경밀험> 2권을 뺀 것이다. 1836년 2월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다산이었으니 여유당전서는 500여권이 넘는 엄청난 분량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실로 방대한 다산 선생의 저술은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1934년-1938년 사이에 외현손 김성진과 정인보 · 안재홍 등의 노력에 의해 활자본 154권 76책으로 <여유당전서>를 신조선사에서 발간되었다. 이것이 다산학 연구의 시발점이 되는데, 일찍이 다산이 "나의 학문의 업적이 하필 百世가 되도록 기다리지 않아도 빛을 볼 것이다"라고 한 예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문헌편찬위원회와 경인문화사에서 이 여유당전서를 저본으로 한 영인본을 각각 1962(?)년과 1970년에 간행하였는데. 전자는 <정다산전서> 3책으로 다산연보가, 후자는 <증보여유당전서> 6책으로 간행되었다. 1974년에는 <여유당전서보유> 5책을 다산학회에서 영인하여 간행하였고 여강출판사가 1985년 영인 간행한 20책 <여유당전서>가 있다. 이 외에 필사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여유당집>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본 <열수전서>가 있다.



그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저술을 대략 살펴보고 나니 현기증이 날 정도다. 긴 유배생활로 얼룩진 외로운 삶이 가슴 아프고, 숫자만 들어도 숨이 막힐 그의 저술에 기가 질린다. 과연 이 엄청난 업적에 등을 보이고 숨겨진 이면을 먼저 살펴보겠다는 나의 선택은 올바른 것 일까? 그러나 이젠 이런 의구심을 떠올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이 태산과도 같은 천재 실학자, 다산은 어찌 풍류를 즐겼으며, 자식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었을까? 그의 인간적인 이야기들을 들어보도록 하자.




동림사 독서기

"중이 중 노릇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무릇 부모, 형제, 처자의 즐거움이 없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의 즐거움이 없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고통스럽게도 중 노릇을 합니까. 진실로 그와 바꿀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대문입니다. 우리 형제가 학문을 한 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 같은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까?"
하였더니 둘째 형님도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 그것이 중 노릇하는 까닭일 것이다.." (p. 18)

수종사에서 노닐은 기

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고, 곤궁했을 때 지내던 곳을 입신 출세하여 찾아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며, 홀로 외롭게 지나가던 땅을 좋은 손님들과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이끌고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p. 19)

월파정에서 밤에 노닐은 기

"달이 지금 떠오른다."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다시 배에 올라 달을 맞으니, 오로지 만 길이나 되는 황금빛 줄기가 수면에 내려쐬더니, 잠깐 돌아보는 동안에도 천태만상으로 순간순간 광경이 바뀌었다. 수면이 움직일 때는 부서지는 모습이 구슬이 땅에 흩어지듯 하고, 조용할 때에는 평평하고 미끄럽기가 유리가 빛을 내는 것과 같았다. 달을 잡고 물놀이는 하는 등 서로 돌아보며 매우 즐거워했다. 시를 짓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에 나는 말하기를,
"오늘은 글 짓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인데, 다시 괴롭게 눈살을 찌푸리고 수염을 비비꼬면서 어려운 운자를 내어 좋은 글을 짓느라 어근버근하며 이 월파정의 풍경을 헛되이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자네들이 마시지 않는다면 이 정자의 이름에 걸맞지 않을 것이네."
하니 마침내 각자 실컷 마시고 취해서 돌아왔다. (p. 21)

득월당기

무릇 천하 만물의 아름다움을 모두 따져보아도 하늘에 있는 물건의 아름다운만은 못하다. 그러나 해는 너무 뜨겁고, 별은 너무 희미하며 구름과 안개는 너무 쉽게 없어지니, 마음을 기쁘게 하는 점에서는 모두가 달만 못하다. (p. 23)

여유당기

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으나 부득이 해야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요, 자기는 하고 싶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만둘 수 있는 일이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은 항상 그 일을 하고는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그만둔다.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할 수 있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한 때로는 그만둔다. 진실로 이와 같이 된다면 천하게 도무지 일이 없을 것이다. (p. 24)

곡산의 북방산수기

뱃사공에게는 밥을 지으라 하고 조그만 배에 악기를 싣게 하고 섬 사이를 뚫고 가는데, 그 사이는 겨우 배가 지나갈 정도였다. 그 악기 소리가 길고 간드러지게 나니, 강변의 돌길에서 식량을 지고 가던 사람들은 지게를 벗어놓고 바위에 걸터앉아서 구경하고, 산꼭대기에서 화전을 갈던 사람들도 호미를 놓고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구경을 했다. 이것 또한 나의 기쁨을 더해주기에 족하였다. (p. 39)

조신선전

와사씨는 논한다.
도가에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을 신선이 되는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조신선은 욕심이 많으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늙지 않았으니, 혹 말세가 되어 신선도 시속을 면할 수 없어서인가? (p. 52)

학연에게 보여주는 가훈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행하는 일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니, 이 점에 자기의 본분을 다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비록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흙담에다 색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p. 61)

나는 벼슬을 하기 전부터 어진 임금께서 알아주셨고, 벼슬길에 오른 뒤에도 더욱 깊이 알아주시어 부지런히 보필한 것이 임금의 뜻에 맞은 것을 타인이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으나, 끝내 국가를 위한 계책들이 역사책에 실리지도 않고 정이에 새겨지지도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옛 철학자가 말하기를 "그 지위에 있지 않고서는 그 정사를 계획하지 않는다"하였고, 『역경』에도 "군자는 생각하는 것이 그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하였다. 나는 그때만 해도 나이가 젊고 식견이 얕아서 이러한 의미를 알지 못했으니, 슬프다!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p. 63)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란 임금에게 존경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임금에게 신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침 저녁으로 가까이 모시고 있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사부를 잘 읊는 사람도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글씨를 민첩하게 쓰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임금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거듭 관직을 버리고 가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위의가 장엄하지 않은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측근 신하의 세력에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는다.
또 연회에서 주고받는 말이 온화하고, 형편에 알맞을 때에 비밀스레 부탁하며 마음과 몸을 의탁하고, 보좌 역할을 다 맡기면서, 서찰이 연이어지고 하사품이 아무리 잦아도 모두가 임금의 은총이라고만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뭇사람들이 시기하여 재해가 몸에 미칠 뿐만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한 품계나 반 등급도 더 보탬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임금도 역시 혐의를 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첩처럼 기르고 종처럼 일을 시켜 수고로운 일만 도맡아 할 뿐 재상으로 올려 쓰이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무릇 사군자로서 초야에서 갓 벼슬길에 나온 자가 가장 좋은데, 이때에는 임금이 어떤 인품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문자를 올려 바칠 때 논책 등에서 성실하고 강직하고 적절하게 하여도 해가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말과 글귀로 문장이나 꾸미는 조그마한 기교는 비록 한 시대에 회자된다 하더라도 배우가 무대에 올라 우스갯짓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p. 64)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명, 청 이래로, 경학이 갈래가 많아 개개의 책이 이루어져 거의 빠뜨린 연구분야가 없다. 그러나 『주역』과 『예기』 두 책은 이미 허다한 황무지를 개척할 것이 보이고 있으니, 하늘은 총명한 사람을 아껴 한 사람에게만 아름다운 이름이 돌아가게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험할 수 있다. (p. 70)

대체로 저술하는 법은 우선 경적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고 그 다음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학문이어야 하며, 국경을 지키고 성을 쌓는 기구의 제도로 외침을 막아낼 수 있는 분야의 것들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자질구레한 이야기들로 구차하게 한때의 괴상한 웃음이나 자아내게 하는 책이라든지, 진부하고 새롭지 못한 이야기나 지리하고 쓸데 없는 논의와 같은 것들은 다만 종이와 먹만 허비할 뿐이니, 좋은 과일나무를 심고 좋은 채소를 가꾸어 생전의 살 도리나 넉넉하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p. 71)

또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생각해보건대 재난이 앞에 닥쳐올 때는 이렇게 활달한 기상을 지닐 수 없었으나 재난을 당하고 난 이후로는 아마도 재난에 대한 걱정은 없지 않겠는가. (p. 72)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중국은 문명이 일반화되어 궁벽한 시골이나 먼 산 구석의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도 될 수 있고 현인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도성의 문에서 몇 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의 원시사회가 되어 있으니, 더구나 멀고먼 외딴 곳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무릇 사대부의 집안 법도는 벼슬길에 나갔을 때는 빨리 높직한 산언덕에 셋집을 내어 살면서 처사의 본색을 잃지 말아야 하고 만약 벼슬에서 떨어지게 되면 빨리 서울에 의탁해 살 자리를 정하여 화려한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p. 75)

군자가 책을 지어 세상에 전하려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 알아주기만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 것이다. 만약 나의 책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나이가 많으면 너희들은 아버지로 섬기고 너희와 엇비슷한 나이라면 너희들이 형제로 맺는 것도 좋을 것이다. (p. 77)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은 많고 이치를 터득한 사람은 적은데, 어느 누가 보기 쉬운 위의를 버리고 알기 어려운 의리를 별스럽게 구하려고 하겠느냐? 고상하고 정묘한 학문은 알아주는 사람이 더욱 적어서 비록 주공과 공자를 계승할 도를 찾아내고 양웅이나 유향의 문장을 뛰어넘는다 하더라도 알아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점을 알아서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노력은 조금 늦추더라도 먼저 올바른 몸가짐의 공부에 힘써 육중한 산처럼 우뚝 솟은 모습으로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를 익혀야 한다.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데도 먼저 기상을 점검해서 자기 본령을 세울 줄 안 다음에 점차로 저술에 마음을 기울여야만이 한마디 말, 한 구절의 글이 모두 남들이 아끼고 애호하는 바가 될 것이다. 만약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경시하여 땅에 버려진 흙같이 한다면 이는 정말 끝나버리는 일일 뿐이다. (p. 78)

재화를 비밀리에 숨겨두는 방법으로는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p. 80)

또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우주 사이의 일이란 바로 자기 분수 안의 일이요, 자기 분수 안의 일은 바로 우주 사이의 일이다."

나는 논밭과 동산을 너희에게 남겨줄 수 있을 만한 벼슬은 하지 않았다만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이 있어서 삶을 넉넉히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기에 이제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는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필요한 곳에 쓴다 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근'이란 무얼 말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무리지 말며,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때까지 미루지 말며, 갠 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끝지 말며, 비 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늙은이는 앉아서 감독할 바가 잇고 어린이는 다니면서 받들어 행할 바가 있으니, 젊은이는 힘드는 일을 맡고 아픈 사람은 지키는 일을 하며, 아낙네는 밤 사경이 되기 전엔 잠자리에 들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집안의 상하 남녀가 한 사람도 놀고 먹는 식구가 없게 하고 한 순간도 한가한 시간이 없도록 하는 것을 '근'이라고 한다.
'검'이란 무엇인가? 의복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을 취할 뿐이니, 가는 베로 만든 옷은 해지기만 하면 볼품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거친 배로 만든 옷은 비록 해진다 해도 볼품없진 않다. 한 벌의 옷을 만들 때마다 모름지기 이후에도 계속하여 입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가는 베로 만들어 해지고 말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고운 베를 버리고 거친 베로 만들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음식이란 생명만 연장하면 된다. 모든 맛있는 횟감이나 생선도 입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버리므로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전에 사람들은 더럽다고 침을 뱉는 것이다. (p. 83)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모름지기 이런 생각을 가져라. 정력과 지혜를 다하여 변소간을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으리라. (p. 85)

공(정범조)은 스무 살이 더 위였으나 국가의 큰일을 함께 논하다가 충의, 감격한 뜻이 맞으면 훌쩍 일어나 절을 하곤 하였다. (p. 92)

학유가 떠날 때 노자 삼아 준 가훈
용이란 지, 인과 함께 삼덕 가운데 하나다. 성인이 개물성무하고 천지를 두루 다스림은 모두 용으로 하는 것이다.
"순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순임금처럼 하면 그와 같이 된다"고 한 것은 바로 용이다. 경제의 학문을 하려는 사람은 "주공은 어떤 사람인가? 주공처럼 하면 그와 같이 된다"하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려는 사람은 "유향과 한유는 어떤 사람인가? 그들처럼 하면 그와 같이 된다"하였다.
명필이 되려는 사람은 "왕희지와 왕헌지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고,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도주공과 의돈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여 한 가지 소원이 있으면 어떤 사람을 목표로 정해 그 사람과 동등한 경지에 이르고서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용의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p. 95)

너는 나와 너의 어머니의 자식이니 어떻게 숲처럼 넓은 도량을 가질 수 있겠느냐만, 아무래도 너는 너무 심한 편이다. (p. 95)

옛날의 선왕들은 사람을 임용하는 데 지혜가 있었다. 소경에게는 음악을 살피게 하고, 절름발이에게는 대궐 문을 지키게 하며, 환관들로 궁중을 출입케 하고, 꼽추, 불구자, 허약자 등의 쓸모없는 무리들까지도 적당한 임무를 맡겼으니, 이것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p. 95)

사람 집안의 둘째 아들 중에는 살림을 나가지 않았을 때에 과수원이나 채소밭의 일을 보살피려 하지 않는 자가 있는데, 그들의 마음은 제 살림을 나서 제 소유의 토지를 얻으면 성의껏 경영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 사람의 성벽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기 형의 과수원을 보살피지 못하는 사람은 제 과수원도 보살피지 못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너는 내가 다산에다가 연못을 파고 대를 쌓고 남새밭의 일에 힘과 마음을 다하던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앞으로 내 것으로 만들어 자손들에게 전해주려는 뜻에서 그러한 것이겠느냐? 참으로 성벽에 좋아하는 것이라면 내 땅 네 땅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p. 97)

아침에 햇빛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때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진리인 것이다. 운명은 돌고 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 때의 재해 때문에 마침내 청운의 뜻까지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지니고서 천지가 눈 안에 들고 우주가 손바닥 안에 있듯이 생각하고 있어야 옳다. (p. 97)

남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행위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만한 것이 없다. (p. 98)

두 아들에게 답함

마융과 정현은 비록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라고는 하나, 권력이 당대에 막중하여 외당에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면서 내당에서는 음악과 기생을 두어 즐겼다. 그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이 이와 같았으니, 당연히 경전을 연구함이 정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뒤에 공안국과 가규 등 여러 사람도 모두 유림의 달인이었으나 심기가 정밀하지 못하였으므로 의논한 바가 대부분 밝지 못하였으니, 비로소 곤궁한 뒤에야 저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드시 매우 총명한 선비가 지극히 곤궁한 지경을 만나서 사람들과 수레의 시끄러운 소리가 없는 곳에서 종일토록 외롭게 있은 뒤에야 경례의 정밀하고 자세한 뜻을 비로소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천하에 이처럼 공교로움이 있겠느냐. 옛 경전을 고찰하여 정현과 가규의 학설을 비교하여 보건대 거의 조목조목이 잘못되었으니, 독서의 어려움이 이와 같은 것이다. (p. 112)

『고려사高麗史』에 대한 공부는 아직도 착수하지 않았느냐? 젊은 사람이 먼 생각과 통달한 견해가 없으니 한탄할 노릇이다. 네 편지 중에 모든 의심나고 모르는 부분을 질문할 곳이 없다고 한탄하였는데 과연 네 마음에 참으로 의심나서 견딜 수 없고 생각이 나서 감내할 수 없다면, 왜 조목조목 기록해서 인편에 보내오지 않느냐? 부자간에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p. 113)

두 아들에게 부침

가야, 너는 재주와 총명이 나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네가 열 살 때 지은 글은 거의 내가 스무 살 때에도 짓지 못했던 것이며, 근래 몇 해 전에 지은 것은 오늘날 나로서도 지을 수 없는 것이 더러 있으니, 이는어찌 네가 공부한 길이 멀리 우회하지 않았고, 문견이 조잡하지 않은 때문이 아니겠느냐. 네가 곡산에서 돌아온 뒤로 나는 너에게 과문을 익히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 너를 아끼던 문인이나 운치가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욕심이 많음을 탓하였고, 나도 또한 스스로 겸연쩍었다. 지금 네가 이미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과문에 대한 근심은 잊게 된 것이다. 나는 네가 이미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했다고 여긴다. 글자를 알고 있으면서 과거에 대한 누가 없는 경우와 진사가 되고 급제를 한 경우 중 어느 경우를 택하겠느냐? 너는 진정 독서할 기회를 만난 것이다. 앞에서 내가 "폐족의 처지를 잘 대처한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 아니겠느냐?
포야, 너는 재주와 역량이 너의 형보다는 한층 못한 듯하나 성품이 자상하고 사려가 깊으니, 진실로 독서하는 일에 전념한다면 어찌 너의 형보다 못하겠느냐. 근자에 보니 네 문장이 점점 진전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 아는 것이다. (p. 117)

독서에는 반드시 먼저 근기를 세워야 한다. 무엇을 근기라 하는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니 학문에 뜻을 둔다면 반드시 먼저 근기를 세워야 한다. 무엇을 근기라 하는가? 효孝, 제悌가 그것이다. 모름지기 먼저 효, 제를 힘써 근기를 세운다면 학문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학문이 몸에 배게 되면 독서는 따로이 그 충절을 논할 것이 없다. (p. 117)

연아에게 답함

보내준 편지는 자세히 보았다.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시비의 기준이요, 또 하나는 이해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종류의 큰 등급이 생기는 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요,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켜서 해를 받는 것이며, 그 다음은 나쁜 것을 쫓아 이익을 얻는 것이며, 가장 낮은 등급은 나쁜 것을 쫓아서 해를 받는 것이다. (p. 128)

그러나 나는 절개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요, 다만 세번째 등급을 얻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네번째 등급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뿐이다. (p. 129)

두 아들에게 부침

절대로 입에 경솔한 말을 올려 "나는 일찍이 이렇게 이렇게 해주었는데 저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한다"고 하지 말아라. 이러한 말을 한번 하면 그 동안 쌓아놓은 공덕이 하루아침에 바람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다. (p. 145)

해가 새로 바뀌었다. 군자는 새해를 맞이하면 반드시 그 마음과 행동을 한번 새롭게 하여야 한다. 나는 젊었을 때에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반드시 그 해의 공부와 과정을 미리 정하였는데, 예를 들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책을 뽑아 적어야 하는가를 미리 정해 놓은 뒤에 실행하였다. 간혹 몇 달 뒤에 이르러 사고가 발생해서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선을 즐기고 앞으로 전진하려는 뜻만큼은 스스로 숨길 수 없었다. (p. 150)

가령 내가 몇 년 안에 유배에서 풀려나 너희들로 하여금 몸을 닦고 행동을 가다듬어 효도와 공경을 숭상하고 화목을 일으키며, 경사를 연구하고 시와 예를 담론하며, 서가에 3, 4천 권의 책을 꽂아놓고 1년을 지탱할 만한 양식이 있으며, 뒤란에 뽕나무, 삼, 채소, 과일, 꽃, 약초들이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어 그 그늘을 즐길 만하며, 마루에 오르고 방에 들어가면 거문고 하나와 투호 일 구와 붓, 벼루, 책상에 볼 만한 도서가 있어서 그 청아하고 깨끗함이 기뻐할 만하며, 때때로 손님이 찾아오면 닭을 잡고 회를 만들어서 탁주와 좋은 나물 안주에 흔연히 한번 배불리 먹고 서로 더불어 고금의 대략을 평론할 수 있다면, 비록 폐족이라 할지라도 장차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 흠모할 것이니, 이렇게 세월이 점점 흘러간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느냐? 너희는 생각하고 생각하라. 차마 이것을 하지 않으려느냐? (p. 152)

두 아들에게 부침

주자가 말하기를 "온화하고 양순함은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이요, 부지런하고 검소함은 집안일을 처리하는 근본이며, 독서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근본이요, 도리를 따름은 집안을 보전하는 근본이다" 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거가의 네 가지 근본이다. (p. 154)

이렇게 몇 달을 실천해나가면 오랜 뒤에는 저절로 될 것이다. (p. 159)

학유에게 부침

이미 양계를 하고 있다니 아무쪼록 여러 학자의 서적에서 양계에 관한 이론을 뽑아 계경을 만들어서 육우의 『다경』과 유득공의 『연경』과 같이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일에서 맑은 운치를 간직하는 것은 항상 이런 방법으로 예를 삼도록 하여라. (p. 170)

나는 몇 년 전부터 독서에 대하여 대략 알게 되었다. 책을 그냥 읽기만 하면 하루에 천백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한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연구해서 그 근본을 터득하고 따라서 그 글의 전체를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을 계속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으 FEO에 아울러서 수백 가지의 책을 널리 찾아보게 될 것이요, 따라서 본서의 의리에 대해서 분명히 꿰뚫을 수 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기』의 「자객열전」을 읽다가 "조도제를 지내고 길을 떠났다"라는 한 구절을 만나게 되었을 경우 "조란 무엇입니까?"하고 스승에게 물어보아라. 그러면 스승은 "전별제이다"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또 "꼭 '조'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고 물어서 스승이 "자세히 모르겠다"고 하거든 집으로 돌아와서 자서를 꺼내 '조'자의 본 뜻을 살펴보고, 또 자서에 있는 증거를 토대로 하여 다른 책까지 들추어 그 전석을 고찰해서 그 뿌리를 캐고 세세한 뜻까지도 캐도록 하여라. 또 『통전』이나 『통지』 같은 서적에서 조상께 제사 지내는 예절까지 자세히 참고해서 책을 만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을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네가 그날부터는 조제의 내력을 환하게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리 큰 학자라 할지라도 조제에 관한 한 가지 일에서는 너와 겨룰 수 없을 것이다. 어찌 크게 즐겁지 않겠느냐? (p. 171)

책의 내용을 뽑아서 쓰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자기의 뜻을 정해서 만들 책의 규모와 항목을 세운 뒤에 뽑아야만 일관된 묘미가 있는 법이다. 만약 세워놓은 규모와 항목 이외에 뽑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모름지기 책 하나를 따로 갖추어놓고 얻는 대로 기록해야 확고한 힘을 얻게 된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쳐놓았는데 기러기가 걸렸다고 해서 어찌 버리겠느냐. (p. 172)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는 것이다. 소가 물을 마시듯 마시는 저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는 적시지도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다. (p. 173)

수령이 조심해야 할 네 가지 일

동해이건 서해이건 마음과 이치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충절과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고, 공자의 마을에도 역시 개구쟁이 짓을 하는 소년은 있게 마련이다. (p. 182)

기예에 대해 논함

슬기로운 생활을 미루어 운용하는 것도 한rP가 있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사리를 연구하는 것도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인이라 하더라도 천 명이나 만 명의 사람이 함께 의논한 것을 당해낼 수 없고, 아무리 성인이라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그 아름다운 덕을 모조리 갖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그 기예가 정교하게 되고, 세대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기예가 더욱 공교하게 되니, 이는 사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p. 186)

맥에 대해 논함

맥에 대해서는, 그 『맥경』을 저술한 사람부터 벌써 자기가 저술한 『맥경』을 믿지 않았고, 그 후에 무릇 의술의 이치를 약간 통한 사람도 반드시 『맥경』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엔 오히려 거기에 현묘하며 심오한 이치가 있다고 의심하여 자기 자신도 깨닫지 못하였고, 또 자기가 『맥경』을 높여 받들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과 후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맥경』의 뜻을 통달하지 못했다고 말할까 염려하여 이에 거짓으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 것을 자기는 혼자 아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해서, 겉으로 『맥경』을 높이고 영구히 전할 책으로 삼아 그 설을 설명하고 또 그 뜻을 해석하되, 그 해석하지 못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문득 "마음속에 스스로 깨닫는 묘한 이치는 말로써 전할 수 없다"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밝지 못하여 이를 받들어 믿고, 슬기로운 사람도 다시 그 술법을 이용하게 되니, 이는 오직 『맥경』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허위적인 술법은 다 그러하다. (p. 192)

풍수에 대해 논함

"아니 그렇게 좋은 자리라면 어째서 너의 어미를 장사 지내지 않고 남에게 주었느냐?" (p. 202)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은 것이다. 내 땅에 발복될 수 있는 무덤이 있는 것을 알았는데, 이를 한 꿰미의 돈 때문에 눈이 어두워 남에게 선뜻 내어줄 사람이 있겠는가? (p. 205)

사물의 이치에 널리 통달했다고 하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풍수의 이치는 꼭 있다고도 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꼭 없다고도 할 수가 없다."
아, 쟁론을 이런 식으로 판결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선비가 되기도 어렵다. (p. 206)

효자에 대해 논함

"우리 할아버지는 그 어머님이 병을 앓아 위급하게 되자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구워서 드렸는데, 며칠을 더 사셨습니다." (p. 206)

열부에 대해 논함

아, 신체와 모발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상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위독한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자식의 몸을 해쳐가면서 그 고기를 먹고 싶어할 리가 있겠는가? (p. 218)

충신은 많을 수가 없는 것이다. (p. 223)

간사한 아전에 대해 논함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 죽을 것이다." (p. 242)

곡산항교에서 효도를 권장하는 글

그 사람의 생각에는 아직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부모 봉양에 쓸 수 없고 장차 훗날에 집이 부유해지기를 기다리겠다고 하는 것인가? 아! 바람 타는 나무는 항상 고요히 있을 수 없거니와 어버이의 나이가 어찌 영원히 머물러 있으랴/ 진실로 가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효자가 있다면 마땅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p. 288)

아아, 사람이 태어나서 매우 위험하여 가장 보호하기 어려운 때가 어릴 때인 것이다. 그 부모가 만약 잠시라도 돌보아주지 않거나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어린 자식이 어떻게 온전히 자랄 수 있겠는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모두가 빈손이다. 그것을 입혀주고 먹여주며 논밭과 집까지 아울러 물려준다. 비록 억만금을 가지고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는 것이 부모가 아니던가. 앞서 친구에 대해서는 어느 날 입은 하루의 은혜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앞서 비복에 대해서는 어느 날 받은 하루의 노고를 마음에 새겨 잊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부모에 대해서는 그 은혜가 하늘과 같이 커서 다함이 없으되 막연히 잊어버리고 마치 당연한 것철머 생각하여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여 사례하고자 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 사람의 자식 된 자가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p. 292)

형제는 나와 더불어 부모를 같이하였으니 이 또한 나일 따름이다. 형은 먼저 태어난 나요, 아우는 뒤에 태어난 나다. 다만 얼굴 모양과 나이가 다를 뿐인데, 구태여 둘로 구분하여 서로 우애하지 않으니 이는 나로써 나를 소원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p. 294)

파리를 조문하는 글 (p. 299)

뱀을 쳐서 죽인 데 대한 해명 (p. 303)




'월파정에서 밤에 노닐은 기(月波亭夜遊記)'에서는 "달이 지금 떠오른다."하고 매우 즐거워서 글짓기도 피하고 실컷 마시고 취했던 다산이 '득월당기(得月堂記)'에 이르러서는, "만약 하늘과 땅 사이에 예로부터 달이 없다가 어떤 사람이 갑자기 달을 얻게 되었다면, 그가 달을 소중히 여기고 스스로 만족해하여 다른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어찌 야광주와 수극벽을 가진 것쯤에 비교가 되겠는가"하며 시원스레 한마디를 던진다. 해, 별, 구름과 안개가 다 달만 못하다며 밤을 즐기는 멋스러운 그가 또 그 달을 놓고 삶의 이치에 닿은 충고를 넌지시 건네는 것이다. 그의 책 다산문선은 그렇다.

다산문선은 기記, 전傳, 가훈家誡, 서書, 설設, 논論, 원原, 소疏, 기사紀事, 잡문雜文으로 이루어져있다.

'기記'를 읽어 내리다 보면 그의 멋스러움이 고스란히 풍겨 나온다. 월파정에서 달에 취하고, 비 오는 날에 세검정으로 몰려가고, 배에 악기를 싣고 강을 따라 흐르는 그의 모습은 진정한 멋과 여유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 가운데서 다산은 학문의 즐거움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관통하는 진리를 들려준다. 그래서 그의 '기記'는 때론 날아갈 듯 가볍고 상쾌하지만, 때론 차분하고 진지하다.

'가훈家誡'과 '서書'에는 다산의 진솔한 면들을 좀더 드러난다. 아들과 조카들에게 주는 글과 편지 속에서 그는 인간적이고 따뜻하다. 잘못을 꾸짖는 그의 목소리는 엄하고, 배움을 독촉하는 그의 애달픈 목소리는 요즘 부모들의 교육열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재촉과 독려는 사사로운 명예와 부귀를 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임금을 섬기는 신하 된 도리를 말하고,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학자의 삶을 가르친다. 사람 사이의 관계와 도리를 이야기하고 '효孝'와 '제悌'를 통한 가족 관계를 이야기한다.

"아니 그렇게 좋은 자리라면 어째서 너의 어미를 장사 지내지 않고 남에게 주었느냐?"

그 뒤를 잇는 효자, 열부, 충신에 대한 다산의 비판도 냉철하고 통쾌하다. 거짓 효자와 만들어진 충신 그리고 무책임한 열부를 따끔하게 나무라는 다산은 날카롭다. 그가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는데 달인이라는 것은 책에 여러 번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환상에 대해 논함(還上論)'에서 환상법을 비판하며 그가 사용한 아버지와 아들의 예는 너무도 적절해서 도무지 그의 주장에 이견을 달 수가 없다.

'잡문雜文 '이라는 이름으로 별스럽지 않게 모아둔 글 중에서도 다산의 날카로운 비판과 번뜩이는 재치는 멈추지 않는다. '파리를 조문하는 글(吊蠅文)'과 '뱀을 쳐서 죽인 데 대한 해명(擊蛇解)'은 조금은 엉뚱한 소재를 통해 예리하게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진다. 잡문이라는 제목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 외에도 전傳, 설設, 원原, 소疏, 기사紀事에서도 다산은 다양한 주제로 폭넓게 글을 써내며 그가 진정한 천재요, 영원한 학자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목민심서, 경제유표, 흠흠신서 같은 대작을 피해 인간적인 다산 정약용을 찾겠다고 숨어든 다산문선에서, 나는 인간적이지만 여전히 태산처럼 높고 단단한 모습의 그를 다시 발견했다. 천재 실학자 다산과 인간적인 다산은 처음부터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지난 토요일에 남양주에 있는 다산기념관에 다녀왔다. 책을 절반쯤 읽고 들렀던 그 곳의 느낌과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지금, 그 곳의 느낌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조금씩 알아가면 보는 눈과 느끼는 마음도 변해가는 모양이다. 자신이 태어난 생가의 바로 뒤편 야트막한 동산에 묻힌 다산의 묘가 자꾸만 떠오른다. 그 곳에서 느꼈던 아늑한 평화와 그윽한 단정함이 가슴 속에 새롭게 살아난다.

서가에 3, 4천 권의 책을 꽂아놓고 1년을 지탱할 만한 양식이 있으며, 뒤란에 뽕나무, 삼, 채소, 과일, 꽃, 약초들이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어 그 그늘을 즐길 만하며, 마루에 오르고 방에 들어가면 거문고 하나와 투호 일 구와 붓, 벼루, 책상에 볼 만한 도서가 있어서 그 청아하고 깨끗함이 기뻐할 만하며, 때때로 손님이 찾아오면 닭을 잡고 회를 만들어서 탁주와 좋은 나물 안주에 흔연히 한번 배불리 먹고 서로 더불어 고금의 대략을 평론할 수 있다면, 비록 폐족이라 할지라도 장차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 흠모할 것이니, 이렇게 세월이 점점 흘러간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느냐? 너희는 생각하고 생각하라. 차마 이것을 하지 않으려느냐? (p. 152)

장차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 흠모하지 않으면 또 어떤가? 이 정도는 되야 진정한 멋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멋지다. 참으로 멋지다.

IP *.227.22.57

프로필 이미지
귀귀
2007.06.26 08:06:13 *.244.221.3
잘읽었습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한두페이지로 간단히 언급되어, 실학자로만 알려졌던 정약용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신 글인듯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한정화
2007.06.27 02:08:22 *.72.153.12
동영상 자료 잘 봤어. 짧은 시간안에 설명해주니 좋네.
프로필 이미지
종윤
2007.07.02 11:32:46 *.227.22.57
귀귀님~ 잘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리뷰에 주신 댓글에는 답하기가 정말 쉽지 않네요. 저도 이번 기회에 정약용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조금씩 더 알아갈 생각입니다.

정화~ 그러게. 나도 좋더라구. 짧고 굵게! 리뷰도 그렇게 써야할까봐. 매번 댓글 달아주니 황송할따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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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32 위대한 나의 발견 * 강점 혁명 [2] 香仁 이은남 2007.07.08 2342
931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혁명] 행복은 내 안에 있다 [2] 余海 송창용 2007.07.08 2066
930 Now, Discover Your Strengths [3] 好瀞 김민선 2007.07.08 2189
929 [독서51]조광조 -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정두희 지음 [3] 素田 최영훈 2007.07.05 3072
928 [16]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르네 그루쎄 [5] [6] 써니 2007.07.06 4099
927 『칭기즈칸의 생애』를 읽고 [2] 현운 이희석 2007.07.02 2844
926 [리뷰016] 야성의 경영자 칭기즈칸, 르네 그루세 [3] 香山 신종윤 2007.07.02 2805
925 (016) 칭기즈칸 / 르네 그루세 [4] 교정 한정화 2007.07.13 2621
924 [독서16]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깨우다/잭 웨더포드 [4] 素田 최영훈 2007.07.02 2421
923 '르네그뤼세' 의 '칭키스칸의 생애' [1] 최정희 2007.07.02 2524
922 [칭기스칸] ‘그 사람’이 된 칭기스칸 [2] 余海 송창용 2007.07.02 5265
921 (16) 칭기즈칸 - 그 광대하고 덧없는 꿈 [2] [2] 時田 김도윤 2007.07.12 2607
920 칭기스칸 천년의 제국,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2] 好瀞 김민선 2007.07.02 3244
919 칭기스칸,잠든 유럽을 깨우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2] 香仁 이은남 2007.07.01 3598
918 칭기즈칸-Rene Grousset file [2] 海瀞 오윤 2007.07.01 2444
917 [리뷰14] 칭기즈 칸 : 라인홀트 노이만 호디츠 [3] 素賢소현 2007.07.01 2412
916 토크쇼 화법을 읽고 (말이 아닌, 뜻을 잘 전달하는 방법) [1] 산골소년 2007.07.06 2573
» [리뷰015] 다산문선, 정약용 [3] 香山 신종윤 2007.06.25 3158
914 (015) 다산문선 [2] 校瀞 한정화 2007.07.14 2633
913 (15) 다산문선 - 정약용 [3] 박승오 2007.06.25 3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