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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일 23시 51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저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사계절 2005년판 정영목 옮김
저자: 잭 웨더포드

미국 미네소타 주의 매칼래스터(Macalester) 대학 인류학과 교수이다.
지은 책으로는 Indian Givers, Native Roots, Savages and Civilization, The History of Money 등이 있다. 부족민 연구 전문가인 그는 중국, 중동, 유럽을 연결하는 비단길과 세계 교역의 역사에서 부족민이 차지하는 역할을 연구하던 중,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8년 동안 몽골의 옛 중심지들을 답사했고, 베이징의 자금성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스탄불의 토프카피 궁전에 이르는 길을 따라다니며, 고고학적 발굴 현장과 도서관을 찾아보고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98년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을 방문했다. 그는 800년 동안 금지된 구역이었던 그곳에 대한 현지 답사를 통해, 그 동안 풀지 못한 의문들을 풀 수 있었다. 칭기스 칸의 성장 기반이었던 곳은 예상 외로 초원이 아니라 숲으로 가득 찬 곳이었고, 그러한 환경은 칭기스 칸의 전쟁 전술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800년 전의 칭기스 칸을 좀더 생생히 체험하기 위해, 계절을 바꾸어 그의 고향을 방문했으며, 칭기스 칸이 유목민 생활을 했음을 감안하여 그의 이동 경로를 추측해 ‘이동의 고고학’ 탐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워싱턴 포스트지에 실린 한 서평은 필자의 피와 땀이 담긴 이 책을 호머의 『일리아드』에 비견하기도 했다.

이 책의 집필을 마친 그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칭기스 칸은 몇몇 종교 지도자를 제외하고,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저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2006년판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
저자: 르네 그루쎄(1885~1952)

프랑스의 Aubais에서 출생. 프랑스 아시아사 학계의 태두. Ecole des Langues Orientales에서 역사와 지리를 교수.
티베트, 인도, 이란, 일본, 중국 등지에서 연구. 파리에 있는 Cenuschi & Guimer 박물관장과 Journal Asiatique의 서기장을 겸임. 이 외에도 다수의 직위를 역임. 1946년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 1952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

저서로「아시아의 역사(Historie de l'Asie. 1922)」「동양문명사(Les civilisation de l'Orient, 1929)」「극동의 역사(Historie de l'Extreme-Orient, 1929)」「극동의 예술(LArt de l'Extreme Orient, 1936)」「초원제국( L'Empire des Steppes, 1939)」「몽골제국사(L'Empire mongol, 1941)」「아르메니아사(Histoire de l'Armenie, 1947)」「중국과 그 예술(La Chine et son art, 1951)」 외 다수가 있다. [리브로 제공]


[내 마음에 들어 온 글귀]

(1)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징기스칸은 평화로울 때는 백마 말총으로 만든 영기를 이용했고 전시에는 흑마 말총으로 만든 영기를 안내자로 삼았다. 백마 영기는 일찍 사라졌지만 흑마 영기는 그의 영혼을 간직한 채 오래 살아 남았다. 12p

필요에 따라 깊은 우정을 나누는가 하면 강한 적대감을 품기도 하는 칭기스칸의 이중적 소질은 젊은 시절에 형성되어 평생 유지되었으며 그의 성격의 결정적 특질로 자리잡았다. 14p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짦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전성기 몽골제국은 연속되는 면적으로 2800만 내지 3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대략 아프리카 대륙만한 넓이며 미국, 캐나다,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섬들을 합친 면적보다 훨씬 넓다…….현대 지도에서 칭기스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15p

그가 태어난 1162년, 구세계는 여러 이웃 지역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각각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 외에는 다른 문명은 거의 알지 못했다. 중국은 유럽을 몰랐고, 유럽은 중국을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사망한 1227년대 중국과 유럽은 외교나 상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16p

몽골인의 믿음에 따르면 죽은 자의 몸은 평화롭게 놓아두면 그만이었으며 굳이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영혼이 이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영혼은 영기에 머물러 살게 된다. 19p

칭기스칸이 세운 유일한 항구적 구조물은 다리였다. 20p

몽골인이 손을 댄 나라의 주만은 대개 처음에는 미지의 야만적인 부족의 파괴와 정복 때문에 충격을 받았지만 곧 유례없는 문화 교류, 교역 확대, 생활 수준 개선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22p

하루에 말을 타고 거의 80킬로미터를 달려보니 몸통에 비단 5미터를 꼭 동여매면 실제로 장기(臟器)가 제 자리를 유지하고 구토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먼 길을 갈 때는 호주머니에 마른 요구르트를 넣어두는 것이 요긴하다는 것도 배웠다. 37p

칭기스칸은 도시를 정복하고 입성하는 자신의 행동이 선전전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 잘 알았다. 41p

칭기스칸은 어떤 도시를 상대로 심리전을 준비할 깨 주민의 앞 일을 보여주는 두 가지 예부터 제시했다. 그는 외진 마을에 관대한 항복조건을 내걸었으며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몽골군에 합세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43p

칭기스칸은 부자포로들에게 땅 위로 드러난 재산을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 재물은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찾아 낼 수 있으니 감추었거나 묻어둔 보물이 있는 곳만 안내해달라는 이야기였다. 46p

몽골군은 무기를 새로 고안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접촉한 다양한 문화의 무기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러 지식의 축적을 통해 손에 쥐게 된 세계의 무기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응용이 가능했다. 47p

승리는 부분적일 수 없었다. 완전하고 전면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야 한다. 이런 승리가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48p

초원문화에서는 냄새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문화에서는 만나거나 헤어질 때 입을 맞추지만 초원의 유목민은 뺨에 입을 맞추는 것과 흡사한 동작으로 서로 냄새를 맡는다. 53p

몽골족 저신은 투르크나 타타르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주장한다. 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3세기에 고원의 초원지대에 첫 제국을 건설했던 훈족(흉노족이라 부른다) 의 직계후손이라고 주장한다. 훈은 몽골어로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며 몽골족은 훈족 조상을 태양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훈누라고 불렀다. 56p

몽골족은 이 세계의 북쪽 가장자리, 초원지대와 시베리아 북부 삼림이 만나는 곳에서 생존해왔다. 그들에게는 숲에서 사냥을 하는 것만큼이나 초원에서 가축을 기르는 것도 생계에 중요했다 58p

이들은 인간에게 접근할 때도 짐승에게 접근할 때와 똑 같은 전술을 이용했다. 58p

몽골족의 아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말을 타고 성장했다. 그들은 아기 때부터 부모나 나이 든 형제와 함께 말을 탔으며 몇 년만 지나면 혼자서 말을 타고 다니게 되었다. 보통 네 살이면 안장 없이 말을 타는 데 익숙해졌으며 결국은 말 등에 올라서는 방법도 익혔다. 아이들은 말 등에 올라선 채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리는 시합을 했다. 다리가 등자에 닿을 만큼 길어지면 말을 탄 채로 활을 쏘고 올가미 밧줄을 던지는 법도 배웠다. 장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가죽 주머니들이 과녁이었다. 아이들은 말을 탄 채 거리와 속도를 바꾸어가며 목표물을 맞히는 연습을 했다. 이런 놀이에서 터득한 기술은 훗날 기마병으로서 활동할 때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65p

테무진은 사냥꾼들의 오랜 관습대로 어린 시절부터 호각화살촉으로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거나 판별할 수 없는 소리를 내서 비밀리에 교신을 했다. 66p

훗날 태무진은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호의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72p

초원의 문화에서는 정치가 남성의 친족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동맹자가 되려면 남자들은 같은 가족에 속해야 하며 따라서 생물학적인 관련이 없는 남자들 사이의 관계도 의식을 통하여 가공의 친족관계로 바꾸어야 했다. 74p

일상 생활이 언제든지 비극이나 죽음으로 바뀔 수 있는 살벌한 부족세계에서 기사도는 사치스런 장식품이었다. 78p

초원의 부족들에게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권력은 초자연적인 힘과 떼어놓을 수 없다. 둘 다 “영원한 푸른 하늘”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성공을 거두고 다른 사람에게 승리를 거두려면 먼저 영적인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얻어야 했다. 80p

사람의 재능을 평가하고 혈통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하는 것은 테무진 칸의 핵심적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테무진은 신임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주방 일을 맡겼다. 90p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제2인자인 젤메는 저녁 내내 그의 곁을 지키며 상처에서 피를 빨았다. 젤메는 피를 뱉어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그대로 삼켰다. 이런 행동에는 종교적 이유 이외에도 테무진이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다른 전사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100p

당시 초원부족들은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편을 바꾸었고 병사들은 지도자를 버렸지만 테무진이 전사로서 활동한 60년동안 장군들 가운데 그를 버린 사람을 한 명도 없었다. 또 테무진 역시 장군을 벌하거나 장군에게 해를 준 적이 없었다. 역사 곳의 위대한 왕과 정복자들을 살펴보아도 이런 충실한 군신관계를 찾아보기 힘들다. 102p

테무진은 숲의 사냥꾼들이 집단 사냥이 끝난 뒤 사냥한 짐승을 분배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물자를 분배한 것이다. 또 한가지 혁신은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 같은 몫을 주기로 한 것이다. 103p

말은 몽골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예로운 짐승으로서 어떤 행사의 의미를 엄숙하게 드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신의개입이나 지원을 상상하는 역할도 했다. 말은 테무진의 운명의 힘을 상징했다…….발주나 맹약. 112p

결국 발주나 맹약을 통해 하나의 결사체가 탄생한 셈이었다. 이 결사체는 친족관계, 인종, 종교를 초월했기 때문에 개인적 선택과 헌신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 결사체에 가까웠다. 이 집단은 테무진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의 맹아였으며 이것이 결국 몽골제국 내 통일의 기초로 힘을 발휘하게 된다. 113p

몽골군에게는 이런 말이 있었다. “그가 나를 불로 보내건 물로 보내건 나는 간다. 그를 위해 간다.” 118p

몽골어에서 친(chin)은 강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다는 의미였으며 늑대를 가리키는 몽골어 치노(chino)와 가까웠다. 122p

몽골군의 이동과 대형은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 점에서 이들은 다른 모든 전통적인 문명의 군대와 분명하게 달랐다. 첫째, 몽골군은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다……..두 번째의 독특한 특징은 병사들과 함께 다니는 예비의 많은 말들 외에는 따로 병참부나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가축의 젖을 짜고 가축을 도살하여 식량을 만들고 사냥과 약탈을 통해 배를 채웠다. 148p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오랫동안 비밀이 유지될 수 없다. 한 쪽 편에서 유용하게 써먹은 무기는 전투를 몇 번만 하고 나면 상대편도 사용하게 된다. 몽골의 승리는 작은 무리를 지어 다니던 유목민이 수 천 년 동안 다져온 단결과 규율에서 나온 것이며 지도자에 대한 변함 없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153p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그들의 모든 원정의 목표는 오직 하나, 완전한 승리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전술을 쓰든 상관없었다. 어떻게 싸우든 또 어떻게 싸움을 피하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몽골 전사에게 싸움을 지고 개인적인 명에는 얻었다는 말을 있을 수 없었다. 칭기스칸이 말했다고 하듯이 끝장을 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54p

몽골군은 적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끌어내면 동물의 대규모이동을 관리할 때 사용하던 기술을 이용했다. 159p

무슬림은 상업, 기술, 일반 학문의 높은 수준으로 볼 때 세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추락할 거리도 그만큼 길었다. 몽골 침략군의 말발굽은 다른 어느 곳보다 이곳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174p

일반 사람들이 게으른 부자들의 운명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몽골군은 귀족을 죽임으로써 적의 사회체제를 무너뜨렸고 나아가서 미래의 저항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179p

이 시대의 문명화된 군대가 공포를 자아내는 행동을 하는 것과 비교할 때 몽골군의 행동은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공포를 자아낸 것은 특별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정복이 매우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동쪽으로 말을 달리면서 공포를 불러 일으켰지만 그들의 원정은 그들이 피에 굶주린 행동을 했거나 사람들 앞에서 잔혹성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막강한 군대와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도시들과 싸워서 전례 없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184p

칭기스칸은 주민 살육자라기보다는 도시파괴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복수를 하거나 공포심을 자아내는 목적 외에 전략적인 목적에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186p

칭기스칸은 중국 북부를 떠나 몽골로 돌아가면서 농경지를 짓밟아놓았듯이 자신의 군대가 드나드는 길목에 말을 비롯한 짐승들이 풀을 뜯을 수 있는 넒은 목초지를 마련해 놓으려 했다. 이 짐승들이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187p

칭기스칸은 지도력의 첫 번째 열쇠가 자기절제라고 가르친다. 특히 자만심과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데, 자만심을 누르는 것은 들의 사자를 제압하는 것보다도 어려우며 분노를 이기는 것은 가장 힘센 씨름꾼을 이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자만심을 삼키지 못하면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절대 자신이 가장 강하거나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그 산에 사는 짐승들이 있다. 그 짐승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산보다 높아진다.
그는 말 많은 것을 꺼리는 몽골의 전통에 따라 자식들에게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필요한 말만 해라. 지도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도자는 백성이 행복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는 또 자식들에게 전망, 목표,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목표에 대한 전망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삶도 경영할 수 없다.”……………….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근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몽골제국은 하나지만 그 신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 호수 건너 편에서 정복한 사람들은 호수 건너 편에서 통치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후계자들은 그의 다른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 가르침도 무시해버렸다. 195p~196

우구데이는 그의 아버지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말을 타고 정복을 할 수는 있지만 말을 타고 다스릴 수는 없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말을 타고 통치하는 것, 즉 권력의 중심이 옮겨 다니는 것이야말로 몽골 성공의 제1요인으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 우구데이가 짧은 치세에 저지른 몇 가지 실수가운데 첫 번째가 이 정책을 버리고 권력 중심과 제국의 행정부를 고정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206p

몽골 기병들은 슬라브인이 손에 쥔 무기가 닿을 만한 곳에 이르기 직전 말을 멈추었으며 그곳에서 러시아 보병대오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러시아 병사들은 주위에서 전우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공격범위에 들어 온 사람들이 없어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215p

몽골지도자들은 러시아인에게 사절을 죽이면 엄벌을 받는다는 점을 이해시키려 했다. 또 부하들에게는 적이 몽골인을 부당하게 죽이면 언제든지 잔인하게 복수해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217p

공격을 할 때 몽골 전사들은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었다. 이 옷은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못하도록” 앞은 두껍지만 뒤는 얇았다. 222p

당시의 러시아 연대기 기록자는 이 살육을 기록하면서 몽골군이 지나간 뒤에는 “죽은 자를 위해 눈물을 흘려줄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고 말했다. 224p

몽골군이 불가리아인, 러시아인, 헝가리인, 독일인, 폴란드인에 잇따라 승리를 거두자 극심한 불안이 유럽인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가? 매슈 프리스가 탄식했듯이 유럽인들은 이들의 언어를 몰랐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접근할 방도가 없었으며 그들 역시 우리와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 양쪽을 다 아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의 관습이나 성격을 알 수도 없었다. 233p

몽골군은 불과 2년 만에 서쪽의 유럽 십자군과 동쪽의 셀쥬크 투르크가 200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들은 아랍 세계의 심장부를 정복했다. 그 이후 2003년 미국과 영국군이 들어올 때까지 무슬림이 아닌 부대가 바그다드나 이라크를 정복한 일을 없었다. 271p

쿠빌라이에게 공감하는 학자들은 그가 충동이 아니라 꼼꼼하고 치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싶어하는 성숙하고 사려 깊은 지도자로써 중국과 몽골의 군사전략과 군대의 장점을 결합했다고 관대하게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그렇게 관대하지 않아 그에게는 몽골인 특유의 전쟁능력이 없었으며 정복을 해나가던 기세와 장군들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 덕분에 그나마 실패를 피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274p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의 군대가 아무리 크고 그의 무기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엿볼 수 있다. 285p

쿠빌라이는 1260년에 동생 아릭 부케와 최고의 자리를 놓고 싸우면서 이미 몽골의 연호를 “완전한 시작”을 뜻하는 至元으로 바꾸었으며, 1271년에는 이것을 기초로 왕조의 이름을 “위대한 기원” 또는 “위대한 시작” 정도의 의미를 가진 大元으로 정했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몽골 왕조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287p

쿠빌라이는 강한 군대와 훌륭한 선전(宣傳)이 중요하다고 인정했지만 그의 전략의 세 번째 요소를 꼽으라면 좋은 행정과 정책이었다. 288p

중국인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한 몽골 관습은 뭐니뭐니해도 몽골여자들이 중요한 행사에서까지 자유롭게 남자들과 섞이며 어울린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292p

쿠빌라이는 하나의 민족이나 인종 집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하여 서로 이간질을 시키는 경향이 있었으며 늘 중국인과 외국인을 다양하게 섞어놓았다. 295p

명나라는 위에서 아래로 다스리는 방식 선호하여 권력을 잡자마자 회의제를 버리고 전통적인 관료제로 돌아갔다. 297p

쿠빌라이 칸은 농민의 자식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공립학교를 만들었다. ……….몽골 왕조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공립학교가 2만166개 세워졌다. 300p
몽골의 취향은 세련된 엘리트보다는 대중의 취향에 더 가까웠다. 300p

송 왕조는 갑자기 무너지거나 정복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침식당하면서 해체되었다. 302p

일본 학자 오카다 히데히로가 썼듯이 “몽골 제국이 중국인들에 물려준 가장 위대한 유산은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다” 303p

쿠빌라이는 한반도를 거대한 조선소 겸 군사기지로 바꾸어 그곳을 발판으로 일본을 정복하려 했다. 304p

몽골의 지상정복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열대의 더위와 낯선 지형 때문에 큰 고초를 겪으면서도 미얀마, 베트남 북부의 안남, 라오스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베트남 남부의 참파나 인도해안의 말라바르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몇 개 왕국은 스스로 몽골지배에 복종했다. 어던 면에서 보자면 이런 복종은 현실적인 행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몽골에서는 그들은 다스릴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307p

몽골제국은 1242년에서 1293년 사이에 그 최대의 크기에 이르렀으며 네 번의 전투-폴란드,이집트, 자바, 일본이 상대였다-가 몽골 세계의 바깥 경계를 확정 지었다. 309p

랍반 바르 사우마의 여행, 특히 잉글랜드 왕에게 영성체를 주고 교황에게서 직접 받은 사건은 처음 유럽을 침공한 이후 50년 동안 몽골이 세상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 잘 보여준다.,……몽골은 말을 탄 전사와 무시무시한 공성무기를 보내는 대신 이제 겸손한 사제, 학자, 사절을 보냈다. 몽골 정복의 시대는 끝났지만 “몽골 평화”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훗날 서구 학자들은 국제적으로 평화와 번영이 확대되어가는 엄청난 변화를 인정하여 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 또는 “팍스 타타리카”라고 명명했다. 317p

처음에는 군사정복을 통하여 만들어진 길을 상업에 이용했지만 곧 군대는 말을 타고 육지로 가로지르는 것이 가장 빠른 반면 대량의 물자는 배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바람과 물의 흐름에 의존하는 수상운송이 느린 육상운송에 비해 값싸면서 효율은 높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육상운송은 인간과 짐승의 노력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야 했다. 몽골은 첫 해에 약 3000톤을 배로 운반 했지만 1329년에는 그 양이 21만 톤으로 늘어났다. 320p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아두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이제 정부 관리밖에 없었다. 대신 중국 전통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교 학자들을 아홉 번째로 낮추었다.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등급이었다. 323p
몽골 관리들은 어디에 사는 누가 구매자가 될 것인지 찾아주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324p

역사상 대부분의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다……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인이 아닌 사람들은 몽골어를 배우는 것을 금지했다. 몽골은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 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325p

몽골은 문화를 휴대 가능한 형태로 바꾸었다. 328p

일찍이 1620년에 잉글랜드의 과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변화하는 기술이 유럽에 준 충격을 인식했다. 그는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근대 세계의 발판이 된 과학기술 혁신의 세가지로 꼽았다……첫 번째는 문학에서, 두 번째는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항해에서. 이런 물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변화가 파생되었다”는 점이다. 베이컨은 그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하여 이렇게 말했다. “ 이 기계적인 발견은 어떤 제국이나 종파, 별보다 인간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몽골 제국 시대에 서구로 확산되었다. 337p

페스트는 유럽을 고립시켰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했다……페스트는 국토를 유린했고 살아있는 사람을 타락 시켰고, 교역과 공물을 차단하여 몽골의 황금 가족으로부터 일차적인 소득원을 빼앗았다. 349p

몽골인이 외국인 정복자이면서도 때로는 자기들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신민을 큰 탈없이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약해진 뒤에도 교역물자가 계속 대규모로 흘러 다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스트의 여파로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지파에서 지원병을 보내줄 가능성도 사라지자 칭기스칸의 황금가족 각 지파는 신민이 언제라도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매우 가변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꾸려나가야 했다. 350p

중국의 몽골 칸들은 페스트의 확산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고 신민들로부터도 점차 고립되자 티베트 불교의 영적 세계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352p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사회는 빠르게 붕괴했다. 각각 1335년과 1368년에 몽골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몽골의 통치가 끝난 뒤 승리를 거둔 명왕조의 통치자들은 중국인이 몽골의복을 입고 자식들에게 몽골 이름을 지어주는 등 외래의 관습을 따르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353p

1644년에 명을 타도한 만주족은 전략적으로 칭기스칸의 후손과 결혼을 하여 정신만이 아니라 혈통에서도 그들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다.
칭기스칸의 후손은 중앙아시아 심장부의 모굴리스탄-몽골영토를 가리키는 페르시아 이름-에서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 14세기 말에 중앙아시아의 몽골 소유지는 티무르의 손으로 넘어갔다. 355p

르네상스 시대 작가와 탐험가들이 칭기스칸과 몽골인에게 공개적으로 찬사를 보낸 반면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아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종종 몽골인이 놓여있었다. 358p

칭기스칸을 이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덮어버리기는 했지만 볼테르의 진짜 목표는 프랑스 왕이었다. 다만 두려움 때문에 직접 비판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볼테르는 프랑스를 투사한 몽골이 모든 사악한 것을 대표하게 만들어 놓았다. 다른 작가들 역시 금세 볼테르를 따라 몽골을 세계의 악의 상징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몽골은 광범위한 문학적, 학문적 공격의 피해자가 되었다. 360p

그러나 아시아인이 열등하다는 가장 유해한 이론적 설명은 유럽의 철학자나 예술가 쪽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태어난 새로운 지식인 종족인 과학자들에게서 나왔다. 361p

네루는 딸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럽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어리석다. 그러나 아시아의 위대함을 잊는 태도 또한 어리석다.” 366p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칭기스칸이 새삼스럽게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는 묘한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선전과 이데올로기에만 이용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군사작전에도 응용되었다. 소련, 일본, 독일은 모두 새로 발굴된 “몽골비사”를 판독하고 번역하고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책에 중국과 러시아를 이길 수 있었던 몽골 군사전술의 비법이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368p

영국이 19세기 인도의 마지막 무굴황제의 아들과 손자들을 처형했듯이 소련은 20세기 몽골에 남아있던 칭기스칸의 후손을 숙청했다. 370p

이후 몽골 박해과정에서 언어학자, 역사학자, 고고학자를 비롯해 칭기스칸이나 몽골제국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주제를 전공하는 학자들 한 세대가 완전히 사라졌다. 칭기스칸이 태어나고 나서 800년이 지난 1960년대 무렵 공산주의자들이 보관하던 술데, 즉 영기가 사라졌다. 이 숙청의 시대 이후로 칭기스칸의 술데는 보이지도 않았고 사라진 이유를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371p

학자들은 정확하게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정하기도 하지만 커다란 역사적 사건들, 특히 갑자기 폭발한 사건들은 오랜 준비과정을 거치며 또 일단 시작되면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 영향은 사건이 시야에서 희미해진 뒤에도 오랫동안 남는다. 373p

문화마다 옷을 제대로 입고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 있다. 몽골인은 가슴단추 세 개를 채우고 옷깃을 똑바로 세우고 델의 소매를 잡아당겨 손목과 윗부분까지 가린다. 모두 넓은 금색 허리띠를 조여 매더니 델의 윗부분을 밖으로 빼 낙낙하게 늘어뜨렸다. 376p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그들의 어머니에게, 다 괜찮다고, 그녀와 그들, 즉 후손은 모든 일을 견디며 800년간 생명을 이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379p

(2)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중앙아시아 유목민들 대부분은 언어는 달라도 동일한 기후에서 동일한 방식의 삶을 살았고 이 지역을 여행한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한 인종적 유사성들을 지니고 있었다. 281p

불멸의 훈 또는 몽골인에 대한 이 묘사는 에스키모나 프랑스 코세 지방 농부에 대한 묘사와 다를 바 없으니, 바람이 몰아치고 겨울에는 얼고 여름에는 몇 주 동안이나 타는 듯한 그러한 광막한 공간에서의 삶은 어떤 인종에게도 그러한 환경을 견디기에 충분할 만한 마디지고 왜소한 육체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282p

케레이트인들으 보통 투르크족으로 여겨진다…..어쨌든 많은 케레이트 칭호가 투르크 것이었으며 토오릴은 몽골이름이라기보다는 투르크 이름이다. 283p

토오릴은 1199년 북경 금조의 지원을 받아 그리고 금조를 위하여 타타르를 패배시킴으로써 잠시 몽골 전역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다. 북경의 금 조정은 이 케레이트 지도자에게 “왕(王)”이라는 중국식 칭호를 수여하였고 토오릴은 중국식과 투르크식의 이중칭호인 “왕칸”으로 역사에 알려지게 되었다. 칭기스칸은 이 지배자의 피보호자이자 신하로써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285p

12세기에 몽골인들은 수 많은 ‘울루스”로 나뉘었는데 블라디미르초프에 의하면 울루스는 부족인 동시에 작은 나라를 뜻한다. 287p

12세기말의 몽골인들은 이론적으로는 그들의 생활 방식에 따라 초원의 유목부족과 삼림의 수렵, 어로 부족으로 나눌 수 있다. 실제로 몽골-시베리아 접경지대에 살던 몽골인들의 거주지는 남쪽의 (곧 사막화 할)초원지대와 북쪽 삼림지대에 걸쳐 있었다. 288p

중부 고비의 위구르, 요하의 거란, 북경의 여진과 근접하여 이익을 보던 유목민들이 장벽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문명화된 삶과 접촉할 수 없었던 삼림부족들은 대체로 그런 이유로 인해 더욱 야만적이었던 것 같다. 290p

블라디미르초프는 몽골비사의 한 대목을 해석하면서 옛 왕가의 대표자들은 테무진을 더 전통적이고 더 온순하다고 보았던 반면 자무카의 활기찬 성격과 혁신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새로운 왕가의 군주자리를 노리는 두 사람 가운데 테무진을 선호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299p

칭기스칸에 반대했던 자무카는 음모꾼인 만큼 겁쟁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처음에는 케레이트, 후에는 나이만을 자신의 경쟁자와 싸우는 전쟁에 끌어들였던 그가 도리어 잇따라 두 번씩이나 전투에서 도망하였으며 처음에는 왕칸을 나중에는 타양을 배반하였다. 전투에서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그는 이 정복자와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318p

샤먼 쿠쿠추는 제거되었지만 칭기스칸 일족의 새로운 제국은 여전히 그 종교적 토대를 보존하였다. 즉 고대 투르크-몽골의 애니미즘은 많든 적든 마즈다교적인 요소와 중국적인 요소와 혼효되었다. 대칸이 그 현현인 신은 여전히 텡그리, 즉 하늘 또는 하늘의 신이었고 이는 이란의 오르마즈드는 물론 어떤 점에서는 중국의 천(天)사상과도 흡사했다.
극동에서 철저히 중국화되었든, 투르키스탄, 페르시아, 러시아에서 이슬람화 되었든 상관없이 칭기스칸의 후손들은 모두 지상에서의 텡그리의 대리자임을 자처하였으니 그들의 명령은 텡그리의 명령이고 그들에 대한 반역은 곧 텡그리에 대한 반역이었다. 324p

몽골 풍속에 따라 아홉 번 무릎을 꿇으면서 쿠미스 즉, 유목민들의 술인 발효시킨 말젖으로 의식을 올렸다. 324p

하늘과 주문에 대한 그들의 미신적 두려움으로 인해 몽골인들은 자기네 샤먼뿐만 아니라 신성의 대리자일 가능성이 있는 다른 사람들, 즉 케레이트와 옹구트인들 사이에 있던 네스토리우스교의 사제들, 위구르인과 거란인의 불교 승려들, 중국 도교의 도사들, 티베트의 라마들, 프란체스코회 선교사들, 또는 무슬림 물라들처럼 초자연적인 힘에 인도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종파의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종파의 대표자들에 대한 그들의 호의는 텡그리에 대한 재보험과 같은 것이었으니 전반적인 미신적 공포가 그토록 일반적인 관용을 낳은 것이다. 칭기스칸의 후손들은 이 같은 미신적 두려움에서 벗어나자 투르키스탄과 페르시아에서 태도로나 행동으로나 관대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325p

역사의 여명기에 인도 유럽계의 “말 조련사들”에게 그들의 우위를 부여하고 고전시대말기에 훈족을 중국과 로마 제국 정복으로 이끈 것은 틀림없이 북방 유목민들의 이 군마였다. 330p

그들은 장엄한 느낌까지 불러일으키는 침묵 속에서 서행하다가 지휘하는 고함 소리 없이 기수의 신호에 따라 기동하고 진격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악마적인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돌진하였다. 이는 희생물을 제어하기 위하여 그것을 흥분시키고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사냥꾼의 오래된 전통적이 계략이었다. 331p

서하에 대한 이 공격은 정착 문명 민족에 대한 몽골인들의 최초의 행동이었고 그들의 지도자는 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옛 중국 땅을 분할하고 있는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약한 나라를 상대로 자기 군대의 질을 시험하고 있었다. 333p

유목민들은 대도시를 어떻게 처리한다거나 그것을 그들의 권력강화와 확대를 위하여 어떻게 이용하는 지에 대해 분명히 아무런 관념이 없었다. 그 결과 인문지리학도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초원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인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난감함 때문에 더 불을 지르고 더 살육을 하게 된 것으로 그들은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몽골 수령들, 아니 적어도 야삭을 충실히 준수하는 자들에게 약탈은 개인적 탐욕이 개입되지 않는 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장군시기 쿠투쿠는 금나라 창고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 자기 몫으로 빼돌리지 않았다.
문명에 막대한 재난을 초래한 것은 바로 그 같은 당혹감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었다. 338p

칭기스칸은 인류의 재앙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는 1200년간에 걸친 초원 유목민의 고대 정주문명에 대한 침략의 화신이었다. 실로 그처럼 가공할 평판을 남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잔혹성이 어떤 본성적인 사나움보다는 주로 그가 처했던 환경이 어떤 투르크-몽골인들이 경우보다 더 거칠었다는 데에서 생겨난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361p

그의 성격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반역자들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다. 불운한 주인을 배반함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던 하인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반면에 주군에게 끝까지 충성한 자들에게는 그 주군이 자신의 적일 지라도 종종 상을 내리거나 벼슬을 내렸다. 363p

칭기스칸은 투르크-몽골 세계에서 가장 개화된 민족들인 거란과 위구르에 특히 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인들은 칭기스칸 일족의 제국에게 몽골인들의 민족성을 박탈하지 않고도 중국문화를 전수할 수 있었으며, 위구르인들은 오르콘과 투르판의 고대 투르크 문명에서, 그리고 시리아와 마니교-네스토리우스교 및 불교적 전통이 남긴 모든 유산에서 그 일부를 몽골인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었다. 366p

[내가 저자라면]

두 권의 책을 들고 양 쪽으로 보다가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쪽으로 치우치면서 먼저 그 책을 다 읽게 되었다. 그리고 르네 그루쎄의 책을 읽으니 훨씬 더 이해가 빨리 되는 듯하다. 감성적인 사람은 사실에 의거한 기술보다도 역자나 사람들의 감성적인 언어에 마음이 움직여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EH카는 역사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거라고 본다.
신뢰할 만한 잭 웨더포드의 부드러운 필치는 사실에 의거한 저자의 발로 뛴 글이라는 느낌이고 역자 정영목 또한 그의 땀냄새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시 그 말 그대로 저자의 수고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몽골이란 나라를 가장 떠 올리게 하는 말은 몽고반점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칭기스칸이 대표적일 것이다.
몽고반점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유는 맛있었던 중국집 이름이기 때문이고, 또 갓난 아이 엉덩이의 푸른 점 때문이겠지만 실제로는 몽골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게 정설이다. 한국이 몽골의 침략을 받기 이전부터 몽고반점이란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칭기스칸에 대한 이미지,”
이 이미지라는 것이 연구원 생활을 통해 이토록 바뀌고 있으니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내가 아는 일천한 그에 대한 지식은 문명 파괴자,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버렸고 그리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야만인의 이미지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칭기스칸과 더불어 그 당시의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고 있으니 일주일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책을 읽어보면 왜 칭기스칸이 이런 방법을 택했는지 이해할 수가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연히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몽골인에게 있어서 전쟁은 이기는 것만이 의미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다음의 글은 그러한 그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그들의 모든 원정의 목표는 오직 하나, 완전한 승리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전술을 쓰든 상관없었다. 어떻게 싸우든 또 어떻게 싸움을 피하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몽골 전사에게 싸움을 지고 개인적인 명에는 얻었다는 말을 있을 수 없었다. 칭기스칸이 말했다고 하듯이 끝장을 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54p

아주 짧은 시간에 제국을 일군 그들은 수 만의 기병대를 이끌며 그 당시의 문명국과 몇 세기를 뒤떨어진 상태로 살았던 유목민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마치 동물 사냥을 하듯 전쟁을 치른다. 압도적인 힘과 전술로 문명세상에서 나온 그들은 초원의 방식대로 충실하게 싸움에 임하는 것이다.
적의 성으로 진격하지 않고 그들이 나올 때까지를 기다려 큰 동물을 잡는 것처럼 협공작전을 펼치던가 아니면 소리내지 않고 적에게 가까이 가는 법, 또 수신호나 일반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 그들끼리 교신하는 방법 등이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동물에 관한 더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은 느낌마저 들게 했다. 다음은 그들의 전투 방법 중의 하나인데 소개해 보겠다.

그들은 장엄한 느낌까지 불러일으키는 침묵 속에서 서행하다가 지휘하는 고함 소리 없이 기수의 신호에 따라 기동하고 진격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악마적인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돌진하였다. 이는 희생물을 제어하기 위하여 그것을 흥분시키고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사냥꾼의 오래된 전통적이 계략이었다. 331p

마치 맹수와 인간의 싸움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힘이란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이 당시의 몽골의 힘은 순수한 힘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문명과는 상관없이 그들이 정복한 나라들은 몽골에 맞서는 원시적인 힘이 없었다. 현대에 있어서 힘은 지식이나 돈으로 회자되겠지만 당시는 유목민 출신의 징기스칸의 부대가 압도적으로 뛰어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은 사는 또 하나의 다른 문화적 관점에서 보자면 안타까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것이다. 파괴란 유형의 역사를 모두 없애버리는 것 아닌가. 한 도시가 형성되어 살았던 문화가 전부 무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물론 기병을 이끄는 그에게 목초지 확보라는 너무나 당연한 이유가 있었음을 지금은 이해하지만 말이다.

몽골의 스토리는 마치 전쟁영화에서 착한 주인공 입장의 시각으로 읽는 이를 데려가는 경향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에서처럼 그들이 계속 이겨주기를 바라고 승리했을 때의 쾌감을 같이 즐기면서 보고 있는 내 자신의 공격성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동시에 이기는 전쟁방법 등, 그들의 치밀함을 엿보면서 배울 점을 찾고 있었다.

칭기스칸은 무조건 야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제압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얻기 위해 선전이나 공포로써 기선제압을 하여 무혈입성을 하는 나라들도 있었으니 그 부분에서는 현명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가 진정으로 승리하는 자가 아니던가.

정복지의 사람들을 노예가 아닌 정상적인 부족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부분에서는 카이사르를 상기시킨다. 제국의 시작은 점령과 살육만이 아닌 포용과 관대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테무진의 안다였던 자무카와의 알력, 의부였던 옹칸과의 알력에서는 배신이 난무한다. 가진 자들의 속성을 늘 그래왔듯 역시 빼앗기지 않으려는 본능과 빼앗으려는 욕망들을 볼 수 있었다.

신하관계의 종용, 다시 말해 무시당하는 일을 다들 가장 큰 모욕으로 여기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국가나 가정 내부의 분열 또한 무시라는 촉매제가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분열이나 갈등은 반드시 쇠락을 가져다 주고있다. 개인이나 국가에게나 모욕이란 화를 불러일으키는 장본인이다. 모욕이란 사람들에게서 무서운 무언가를 이끌어내는 커다란 자극이며 기폭제임에 틀림없다.

쿠빌라이가 세운 원나라는 반란군 명에게 멸망 당하고 명은 다시 만주족에 의해 청나라로 세워진다. 이 부분에서 요즘의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나오는 칸의 모습과 인조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명나라와의 끈을 놓지 못했던 조선의 조정모습과 그 때의 상황들.. 그들의 칸이 남한 산성까지 와서 조선인에게 남긴 굴욕의 한 페이지들..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이번 몽골여행은 분명 가슴 뛰는 여행이 될 듯하다. 일전에 그들이 활보하던 땅에 잠시 들른 일이 있다. 아랍과 중국의 교역의 길 위의 위그르 투르판의 사막길에서 동물들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던 습관대로 사막 한 가운데 살짝 튀어나온 바위 뒤에 나의 영역이란 표시를 하고 왔다. 누가 침범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대들을 분노하게 되리라는 선생님의 말씀도 있고 하여 엄숙하게 분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도 그리 분노할 만한 대목이 나오지 않으니 이거 정말 내가 정말 도를 제대로 닦긴 했나 보다 하고 웃고 있다.

유럽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폄하와 그로 인한 여파는 오랫동안 아시아인들을 피해자의식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런 시각밖에 갖지 못하는 상대를 오히려 동정하게 된다.
거꾸로 아시아인들도 서양에 대해 얼마나 많은 폄하를 하여 왜곡 시키고 있는가? 생명과 문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못하는 의식은 결국 스스로가 파놓은 덫에 자신도 걸린다. 분노하지 않는 이유로는 스스로의 무지함도 있겠지만 상대가 측은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애써 변명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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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02 13:08:39 *.249.167.156
저도 두 권의 책을 읽다 르네 그루쉐 쪽으로 기울어, 잭 웨더포드의 책은 징기스칸까지만 읽었습니다. 인용문을 보며 제가 읽지 못한 부분들을 더듬어보았습니다.

공격을 할 때 몽골 전사들은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었다. 이 옷은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못하도록” 앞은 두껍지만 뒤는 얇았다. 222p

쿠빌라이는 한반도를 거대한 조선소 겸 군사기지로 바꾸어 그곳을 발판으로 일본을 정복하려 했다. 304p

몽골은 문화를 휴대 가능한 형태로 바꾸었다. 328p

“유럽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어리석다. 그러나 아시아의 위대함을 잊는 태도 또한 어리석다.” 366p

인용문을 읽다 보니 책을 차근차근 참 재미있게 읽으셨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래 문장을 접하고는 크게 웃고 갑니다^^

“아랍과 중국의 교역의 길 위의 위그르 투르판의 사막길에서 동물들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던 습관대로 사막 한 가운데 살짝 튀어나온 바위 뒤에 나의 영역이란 표시를 하고 왔다. 누가 침범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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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7.02 16:06:16 *.48.41.28
도윤님의 웃음이 여기까지 들리는 군요.
찬찬히 인용문까지 읽는 성의가 참 괘씸합니다.ㅎㅎ
몽골에서도 그렇게 영역을 만들고 오게 될 듯 합니다. 누가 더 많은 땅을 차지할런지 사뭇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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