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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일 01시 39분 등록
칭기스칸 천년의 제국 / 배석규 / 굿모닝미디어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5장 칭기스칸 / 르네 그루쎄 / 사계절


1. 인물 소개

칭기스칸(成吉思汗, Chinggis Khan)
1155 또는 1162 ~1227


칭기스칸은 무엇으로 유명한가. 그는 13세기 페르시아, 러시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를 통털어 아우르는, 역사상 유례 없는 최대의 제국을 일구어냈다. 서점에는 온갖 소위 위인이라는 사람들에게서 CEO 의 자질을 탐구하고 배워보자는 종류의 책이 넘쳐난다. 칭기스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역사상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떠한 점에서 위대하다는 식의 접근은 접어두고자 한다.

나는 책을 읽은 동안 유목민에게 이질감을 느껴야 했다. 그들의 문화 그들의 습성은 마치 별세계에 있는 사람들의 그것인 듯 낯설었다. 칭기스칸은 유목민이었다. 나는 그를 한 인간으로 알아보기 전에 유목민이라는 거대한 장막을 이해해야 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유목민의 생활이라는 것은 어떨까. 풀과 물을 찾아 날씨가 혹하지 않은 곳을 따라 ‘게르’라는 이동식 천막을 짓고 해체하면서, 가족과 가축들을 이끌고 때에 따라 이동하는 모습일 것이다. 문명의 혜택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그런 가난하고 야만적이고 인구수도 많지 않았던 유목민족이, 그 유목민족이었던 칭기스칸은 어떻게 그런 대제국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의견들은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법에 관한 것이다.

“말이 가진 기동력을 최대로 활용한 푸른 군대는 하루에 200~300km를 이동하는 기동력을 과시했다.”

“작전이 개시되기 전부터 이미 적을 당황케 하는 기습과 편재(遍在)의 효과를 거두었다. 만일 적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면 몽골군은 그들의 공격하지 않았다. 몽골군은 초원의 모든 약탈자들처럼 흩어져 사라졌다가 경계심을 늦추면 다시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몽골군은 따라잡기 어려운 기동력에다가 당시로서는 유일한 전술상의 우위까지 갖고 있었다. 자신들의 강점에 대하여 자신감을 갖고 있던 몽골의 전위부대는 대형별로 자주 교체되면서 일제 사격을 퍼붓고는 빠져나갔다. 적이 어느 정도 앞으로 유인되고 원거리 사격으로 기동력을 잃게 되면 중무장한 기병대를 중심으로 군도를 빼들고 돌진하여 적을 동강내었다.......몽골군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 배치되었고, 지평선 위로 말을 타고 나타나 둥글게 달렸다. 그들은 장엄한 느낌까지 불러일으키는 침묵 속에서 서행하다가 지휘하는 고함소리 없이 기수의 신호에 따라 기동하고 진격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악마적인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돌진하였다.”

기동력을 앞세운 속도전, 빠른 속도로 치고 빠지는 전법, 정공법을 피하고 일단 적을 유인하여 파상적으로 공격하는 우회공격술. 싸우기 전부터 상대를 압도하는 심리전 등은 분명 다른 민족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전법은 그들이 유목민들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그다지 특기할만한 것이 못된다. 그들의 생활의 일부인 사냥이 바로 그런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몰이사냥에서 터득한 전술을 실제 전투에 적용하였다. 그들은 늑대와 표범을 사냥하듯, 중국인, 페르시아인, 러시아인, 이슬람인들을 사냥하였다. 몸에 베인 대로 움직인 것이다.

칭기스칸 군대의 전투 역시 물론 이러하였으며, 이는 군사적인 우위로 십분 작용하였다. 당시 다른 민족은 그런 면에서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칭기스칸의 승리는 유목민적 특성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분명 사냥 전법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이런 유목민의 습성을 유리하게 적용하며 그만의 플러스 알파를 더했다.


칭기스칸은 능력 위주로 조직을 운영했다. 능력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십호장 천호장 백호장에 쓰였다. 이는 신분의 귀천과 관련이 없었다. 수많은 전쟁 과정에서, 비록 동족이 아니더라도, 심지어는 상대족 출신이라도 능력이 높이 평가되고 배신하지 않을 충성을 보이는 자는 주저하지 않고 기용하였다. 칭기스칸 수하의 탁월한 장수 제베도 그런 경우였다.

칭기스칸은 충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의 조직 중에는 케식텐이라는 친위대 성격의 조직이 있다. 케식텐은 칭기스칸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제적 집단으로, 자무카와의 마지막 전쟁을 준비할 때 누쿠르(상하가 있는 의형제 관계)로 구성된 친위 부대의 창설이 시작이었다. 케식텐은 3익체제의 중앙에 속했으며, 케식텐 소속인들은 다른 천호장의 지위보다 높았고,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쿠릴타이의 정식 구성원이었다. 충성을 다짐한 자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준 셈이었다. 후에는 1만 명 규모로 늘어났으며, 병사 이외의 요리사 통역사 등 여러 직분 수행자들이 있었다. 칭기스칸은 케식텐으로 집중된 권력을 창출했으며, 이는 국가 경영의 축이었다.

한편, 칭기스칸은 반역과 배신을 보인자는 바로 처단하였다. <칭기스칸 천년의 제국>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칭기스칸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배신자에 대한 혐오감이다. 자신에 대한 배신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적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군주를 배신할 경우에는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대신 비록 적일지라도 자신의 군주나 군을 위해서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에 대해서는 충성심이나 용맹성을 높이 평가하여 대우했다.”

그러나 사실 충성에 대한 맹목은 단순히 혐오감을 넘어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종족 간 모반과 배신과 복수를 여러 차례 지켜 보고 경험하였다. 그것 때문에 집안이 몰살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몽골 통일 과정 의형제 관계를 맺었었던 자무카와 옹칸과도 맹약과 배신의 관계를 여러 차례 되풀이하였다. 이는 전략적이기도 했고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격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오랫동안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의형제 관계를 넘어, 제도적으로 그리고 심증적으로 충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다.


칭기스칸의 초기 전쟁은 정복 후 약탈과 살육으로 초토화하는 유목민의 사냥 습성을 그대로 보인다.

“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사흘이 걸렸고, 도시를 파괴하는 데 열흘이 걸렸다. 몽골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살아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시체들의 목을 모두 자르고, 개와 고양이 등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코 그가 개인적으로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할 줄 밖에 모르기 때문이었다. 경제적 기반이라고 할 만할 것이 없는 그들에게 전리품 획득은 전쟁의 주요 이유였고, 사냥물에 대한 처리는 살육이었다. 그들이 전쟁 승리 후 같은 행동 방식을 취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정주문명의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재산으로 활용하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행히 칭기스칸은 본인의 생각은 확고하였으나 항상 귀를 열어두는 융통성을 잃지 않았다. 르네 그루쎄는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야율초재와 칭기스칸의 위구르 조언자들 덕에 온갖 대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서도 몽골행정의 기초가 생겨났다.”

“학살은 잊혀지고 대신 칭기스칸 국가의 기율과 위구르식 관제의 혼합물인 행정적 성취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의 막대한 파괴 뒤에 마침내 문명의 혜택을 주게 되었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광대한 영토의 대몽골제국 건설은 칭기스칸으로부터 3대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던 이 광대한 제국은 동서양을 연결하는 역할을 단단히 하였으며, 칭기스칸이 역사상의 한 획을 그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 가슴으로 들어오는 구절

<천년의 제국 칭기스칸>

38 높이 5m, 폭 10m 가량의 시멘트로 만들어진 기념비는 휴양소 안 호수 옆에 있었다. 비석에는 초상화 모습보다는 조금 더 사나워 보이는 칭기스칸의 전신이 입상으로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칭기스칸이 남긴 격언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한 발이 되는 내 몸은 피곤해도 괜찮지만 위대한 내 나라는 결코 곤고해서는 안 된다.”

44 초원에서 여행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단순한 풍습이 아니라 일종의 관습법이나 마찬가지였다.

54 의형제처럼 동등한 입장에서 이루어진 관계를 ‘안다’라 부르고 ‘누쿠르’는 독립성과 대등성을 가지기보다는 군신관계 또는 주종관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55 전리품은 그것을 획득한 사람들끼리 나눠 갖는 것이 유목민들의 관습이었다.

62 복수는 종족 전체의 의무였고 대를 이어서 행해지는 것이 관례였다.

66 유목인 집단 사이에 이루어지는 공동 유목은 최고의 정치적 연합 형태로 간주된다. 같은 지역에서 함께 유목을 하면서 외부의 적에 공동 대처하는 이 형태는, 말하자면 일종의 상호 안보 조약을 바탕에 둔 경제 공동체로 볼 수 있다.

72 참석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무당이 불의 신을 불렀을 것이라는 분위기에 젖어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샤머니즘이 생활화된 몇 백 년 전의 몽골인들이 무당이 하는 말을 하늘의 뜻으로 믿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7 나이만에게 종말을 안겨준 시라 케에르 전투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몽골 통일 전쟁은 거의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는 이 전투를 통해 몽골 통일 후 세계로 나아가게 될 칭기스칸의 푸른 군대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108 제베와 젤메, 쿠빌라이, 수베데이 등 네 명의 추적에 혼쭐이 난 타양칸에게 자무카는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무쇠 이마에 끌 주둥이, 송곳 혀를 하고 있으며 강철 심장에 칼 채찍을 갖고, 이슬을 먹고 바람을 타고 다닌다.

113 칭기스의 의미는 ‘바다를 지배하는 군주’, ‘전 세상을 지배하는 사해의 군주’ 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설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117 대몽골 제국에 문명을 전파하는 메신저가 생겼다는 점과 함께 중국의 서부 지역이 칭기스칸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위구르의 복속은 대몽골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118 왜 몽골은 마치 전쟁을 생존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처럼 한없이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정과 학설이 난무한다. 하지만 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은, 잡다한 여러 집단을 뒤섞어서 만들어 낸 통합 국가가 초기에 지니게 되는 취약점을 보완하고, 충격 요법을 통해 전체 구성원의 일체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전쟁이라는 수단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칭기스칸의 정복 전쟁을 경제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물자 부족과 유목민의 약탈 습성화가 전쟁에 나서도록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119 칭기스칸의 초기 정복 전쟁은 거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약탈을 통해 전리품을 챙겨 다시 돌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19 서하에 대한 공격은 국지적인 침략이 아닌 전면전으로서 대몽골 제국이 정착 문명권에 대해 펼치는 최초의 군사작전이었다.

129 만리장성은 단순한 성벽이 아니라 정주 문명권과 유목 문명권을 가르는 문명의 경계선이기도 했다.

135 이슬람 상인들이 이들이 전해 주는 호레즘 소식과 그곳에서 가져온 물품에 관심을 가진 칭기스칸은 그 나라와 교역하기를 원했다.

159 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사흘이 걸렸고, 도시를 파괴하는 데 열흘이 걸렸다. 몽골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살아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시체들의 목을 모두 자르고, 개와 고양이 등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166 몽골과 러시아의 첫 만남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지만 러시아 지역에는 무서운 재난과 엄청난 공포심을 안겨줬다.

169 분명한 것은 1227년 8월, 칭기스칸이 육반산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마지막 가는 길에 도르도스 지역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긴 것은 분명했다. 그의 시신이 머물렀던 곳을 에젠호라 부르고, 그의 가묘가 만들어진 곳을 ‘나이만 차강게르’라 부르면서 후손들은 이후 이곳을 신성시했다.

174 칭기스칸의 푸른 군대는 사냥을 통해 군사 훈련을 생활화하면서 최강의 군대로 태어날 수 있었다.

177 사냥을 하는 데는 용맹성과 기동력, 그리고 전투력뿐 아니라 상황을 정확히 읽어 내는 판단력과 함께 무엇보다 서로 간에 손발이 제대로 맞는 협동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80 몰이사냥에서 터득한 전술을 실전에 적용함으로써 푸른 군대 병사들은 마치 호랑이와 늑대, 표범을 사냥하듯 중국인과 이슬람인, 러시아인, 헝가리인 병사들을 사냥했던 것이다. 뛰어난 기동력에다 몰이사냥에서 터득한 전술까지 가미된 몽골군의 공격은 상대방에게 공포를 안겨주기 충분했다.

180 사냥은 부족간 또는 씨족간의 단결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인구가 적은 데다 띄엄띄엄 떨어져 사는 유목민들이 대규모 사냥을 할 때는 몇 개의 씨족이 여합해야 가능하고, 반드시 지도자를 선출해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서약이나 맹약을 할 때는 단결과 협력의 상징으로 사냥이 등장한다.

187 기동력이 떨어지는 기마병이 몸집이 가벼운 말을 타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공격하는 몽골의 병사들을 당해 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191 그들은 인터넷이 발명되기 700여 년 전에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개척해놓았다. 칭기스칸은 사람과 기술을 이동시켜 세계를 좁게 만든 인물이다. 역참제.

194 천호제와 중앙 3분할 체제는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 조직 체계로 하드웨어 측면에서 우수성을 나타냈다.......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에 기용했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 조직 안에서 능력 있는 다른 인물로 즉각 교체했다.

195 칭기스칸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친위 집단을 만들었다. 케식텐이라 불리는 이 친위 조직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형태로 좌우와 중앙으로 포진시킨 몽골 제국의 3분할 체제 가운데 가장 핵심부를 맡고 있는 친위 부대였다.......케식텐의 병사는 다른 부대의 천호장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케식텐에 속하는 친위 대원들은 또한 국가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쿠릴타이의 정식 구성원이기도 했다.

199 쿠릴타이는 민주적 합의체 성격을 띠고 있어 여기에서 도출되는 합의 사안은 일사불란하게 추진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200 전투에 태만한 병사와 사냥 짐승을 놓친 자는 태형에 처한다. 종군하는 부녀자는 남편이 싸움에서 물러났을 때는 남편을 대신해 의무를 다해야 한다. 자격이 없는 천호장, 백호장, 십호장은 그 안에서 갈아치워야 한다. 사냥에 나가면 짐승을 많이 잡아야 하고, 전쟁에 나가면 사람을 많이 죽여야 한다. 간음은 복수와 불화를 일으키고 가정의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극형에 처했다.

212 칭기스칸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배신자에 대한 혐오감이다. 자신에 대한 배신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적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군주를 배신할 경우에는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대신 비록 적일지라도 자신의 군주나 군을 위해서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에 대해서는 충성심이나 용맹성을 높이 평가하여 대우했다.

358 쿠빌라이가 궁궐 안에 게르를 설치해 놓고 그 속에서 잠을 잔 것을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농경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유목 마인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다진 행위로 봐야 할 것이다.......문제는 변화를 추구하는 인물이 사라진 뒤 후계자들이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는 데 있다.

361 몽골을 초원으로 밀어낸 뒤, 주원장은 몽골이 대륙에 남겨 놓은 것을 걷어 내는 것을 통치의 가장 우선적인 원칙으로 삼았다. 문제는 몽골의 것들 속에는 시대를 앞서 나가는 많은 것들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282 그들은 넓적한 얼굴, 납작한 코, 튀어나온 광대뼈, 째진 눈, 성긴 턱수염, 두툼한 입술, 그리고 곧고 검은 머리를 하고 있으며, 피부는 볕에 그을리고 바람과 서리에 거칠어져 가무잡잡하였다. 그들은 키가 작았으며, 그들의 탄탄하고 무거운 몸은 활처럼 굽은 다리가 떠받치고 있었다...... 바람이 몰아치고 겨울에는 얼고 여름에는 몇 주 동안이나 타는 듯한 그러한 광막한 공간에서의 삶은 어떤 인종에게도 그러한 환경을 견디기에 충분할 만한 마디지고 왜소한 육체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295 칭기스칸은 키가 컸고 체격은 탄탄하였으며, 이마가 넓고 ‘고양이 눈’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수염을 길렀다. 유년기의 방랑, 매서운 추위와 숨막히는 더위에 대한 저항력, 비상한 참을성, 패배 후퇴 포로 상태에서 부상과 학대에 개의치 않음은 칭기스칸의 놀랄 만한 생명력을 입증한다. 칭기스칸의 육체는 청년기부터 더할 수 없이 한랭한 기후와 한없이 불확실한 환경에서의 단련으로 가장 가혹한 시련에도 길들여져 있었다. 테무진의 정신은 자기가 받았던 시련으로 인해 처음부터 담금질되어 있었다.

308 갈팡질팡하는 목적으로 조정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러한 수령들 가운데 칭기스칸만이 유일하게 고정된 축이 되었는데, 그 역시 미래의 정복에 대한 엄격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강한 성격이 이 끊임없는 게릴라전의 양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23 지상에서의 후손들은 모두 지상에서의 텡그리의 대리자임을 자처하였으니, 그들의 명령은 텡그리의 명력이고 그들에 대한 반역은 곧 텡그리에 대한 반역이었다.......무슬림 작가들과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같은 고대의 애니미즘으로 인하여 산봉우리와 강의 발원지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특기하였다.

325 초자연적인 힘에 인도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종파의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종파의 대표자들에 대한 그들의 호의는 탱그리에 대한 재보험과 같은 것이었으니, 전반적인 미신적 공포가 그토록 일반적인 관용을 낳은 것이다. 칭기스칸의 후손들은 이 같은 미신적 두려움에서 벗어나자 투르키스탄과 페르시아에서 태도로나 행동으로나 관대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326 ‘하늘의 힘’인 대칸은 하늘이 정한 엄격한 기율을 민간사회와 군대에 부여하였다. 법은 너무도 가혹해 살인 절도 음모 간통 비적 저주 장물취득 등은 사형으로 규정되었다.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불복정은 보통법 아래에서 범죄로 취급되었고, 야삭은 세계를 통치하는 데 유효한 규율 즉, 민법이자 행정법이었다.

327 몽골사회는 귀족제적인 특징을 보존하였다. 그것은 용사와 수령으로 이루어진 귀족제였으며, 그들은 자유스러운 신분인 전사나 충복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론적으로는 몽골계가 아닌 노예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사회계급을 지휘하고 관리하였다.

329 남향 대형은 몽골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으로, 부채모양으로 여러 ‘남쪽’ 나라들을 향하고 있었다. 목표는 왼쪽으로 중국, 가운데로 투르키스탄과 동부 이란, 오른쪽으로 러시아 초원이었다.

329 전투시 그는 목덜미를 덮는 가죽투구를 쓰고, 검은 옻칠을 한 가죽 끈으로 만든 강하고 유연성 있는 흉갑을 입는다. 그의 공격용 무기는 두 개의 활과 두 개의 활통, 굽은 군도, 손도끼, 안장에 걸린 쇠로 만든 미늘창, 적의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갈고리가 달린 창, 당기면 죄어드는 올가미가 있는 말털로 짠 밧줄 등이다.

330 몽골인들은 말과 떨어질 수 없다. 사실 그들은 서로 닮았으니, 같은 초원에서 태어나 같은 기후와 토양에서 자라났으며 똑같은 훈련으로 길들여졌다.

330 농경지역 변방에 대한 지속적인 습격과 초원의 대규모 몰이사냥에서 발전된, 유목민들에게 있어 영원불변의 전술이었다. ‘낮에는 늙은 늑대의 경계심으로, 밤에는 갈가마귀의 눈으로 지켜보아라. 전투에서는 적을 매처럼 덮쳐라.’

331 몽골군은 따라잡기 어려운 기동력에다가 당시로서는 유일한 전술상의 우위까지 갖고 있었다. 자신들의 강점에 대하여 자신감을 갖고 있던 몽골의 전위부대는 대형별로 자주 교체되면서 일제 사격을 퍼붓고는 빠져나갔다. 적이 어느 정도 앞으로 유인되고 원거리 사격으로 기동력을 잃게 되면 중무장한 기병대를 중심으로 군도를 빼들고 돌진하여 적을 동강내었다.

333 넓은 평원지역에서 적을 공격하는 데는 훌륭하게 조직되었지만, 요새화된 거점에 대해서는 초보자들이었다.

336 계속 공격하고도 번번이 전리품만 갖고 철수했기 때문에 금에게 도시를 재졈령하고 폐허를 복구하고 갈라진 성벽과 보루를 수축하여 요새를 재건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정주국가 특히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사는 중국에서는 대량 학살이 별로 대단한 인상을 주지 못하였는데 이는 항상 살해된 자들보다는 그들 대신 자리를 차지할 주민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338 유목민들은 대도시를 어떻게 처리한다거나 그것을 그들의 권력 강화와 확대를 위하여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아무런 관념이 없었다. 그 결과 인문지리학도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초원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인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들을 소유하게 되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난감함 때문에 더 불을 지르고 더 살육을 하게 된 것으로, 그들은 이보다 더 나은 방범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339 칭기스칸 국가의 역사가 지닌 역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행위를 건전한 상식의 격언과 잘 확립된 정의로 규제하는 현명하고 사려 깊고 도덕적인 지도자의 성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막 원시적인 야만상태에서 나타나 공포 말고는 적들을 굴복시킬 수단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았으며, 도시와 농경문화를 지닌 정주 민족들의 생활이나 자기 고향인 초원에 없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유목민들의 야수적 반응 사이에 보이는 뚜렷한 차이이다.

340 야율초재처럼 중국화된 투르크-몽골 사람들은 칭기스칸과 그의 계승자 우구데이와, 정착 문명 사회에서 행해지던 정치적 행정적 생활요소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 친숙해지게 할 수 있었다.

361 칭기스칸은 인류의 재앙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는 1200년 간에 걸친 초원 유목민의 고대 정주문명에 대한 침략의 화신이었다. 그는 공포를 통치의 방법으로, 학살을 정교하고 조직적인 제도로 만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잔혹성이 어떤 본성적인 사나움보다는 주로 그가 처했던 환경이 어떤 투루크-몽골인들의 경우보다 더 거칠었다는 데에서 생겨난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363 칭기스칸은 그의 생활방식과 환경과 종족이라는 틀 안에서 사려 깊은 심성과 건전한 상식을 가진 놀랍도록 균형 잡힌 사람이자 남의 말도 잘 경청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정을 굳게 지켰으며, 매우 엄격하면서도 관대하고 자애로웠다. 그에게는 진정한 행정가로서의 자질도 있었으나 그것은 유목민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고, 정주민족에 경제에 대해서는 극히 미미한 개념밖에 없었다.

363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질서와 선정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에게는 잔혹한 야만적 감정과 결합된 어떤 마음의 고결함과 고상함이 있었고, 때문에 무슬림 저자들에 의해 ‘저주받은 자’로 낙인찍혔으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364 칭기스칸은 자신의 정책에 확고하면서도 개화된 사람의 경험의 소리에도 귀머거리가 아니었다.

366 야율초재와 칭기스칸의 위구르 조언자들 덕에 온갖 대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서도 몽골행정의 기초가 생겨났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정복자 자신이 전반적으로 문화를 좋아하는 기질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분명히 작용했을 것이다.

366 학살은 잊혀지고 대신 칭기스칸 국가의 기율과 위구르식 관제의 혼합물인 행정적 성취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의 막대한 파괴 뒤에 마침내 문명의 혜택을 주게 되었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그의 야삭은 전몽골과 투르키스탄에 ‘팍스 칭기스카나’를 확립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시대에는 분명 무서운 것이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의 시대에는 부드러워졌고, 14세기 위대한 여행가들과 같은 성취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칭기스칸은 일종의 ‘야만인 알렉산더’로서 문명에 이르는 새 길을 열어젖힌 개척자였다.


3. 내가 저자라면

<칭기스칸 천년의 제국>의 저자 배석규는 언론인이다. 학자가 아니다. 이 책 역시 언론인이 취재하며 쓴 글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일단 읽는데 부담이 없다. 문장이 어렵지 않아 가독성이 좋고 흥미진진하다. 수많은 문헌과 참고자료와 어려운 표현들이 즐비한 학술서와 비교되었다. 일반 독자들이 대하기 편하겠다.

그리고 현장에서 취재한 장면들이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어 생생함을 더한다. 이는 현장의 묘사이기도 했고, 아련한 감상과 상상이기도 했다. 비록 역사 속의 이야기지만 현재로 불러내어 재생되는 듯한 생생함이 더해졌다. 게다가 상당한 역사적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지라 이 부분에 저자의 노고가 꽤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장의 취재 내용을 넣는 방식은 과도하면 자칫 산만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 이 책에서는 내용이 잔가지에서 떨어지려 하다가 아슬아슬하게 본가지로 돌아오는 듯한 부분이 여럿 있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는 르네 그루쎄라는 이 방면 선두라고 할 수 있는 학자가 저술한 책이다. <칭기스칸 천년의 제국>을 읽고 이 책을 접하고 보니, 다시 논문 풍의 딱딱함이 먼저 다가옴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에는 기스칸에 대하여 다룬 부분은 많지 않지만, 그의 정복과정이나 생애, 그의 면모 등을 집약하여 잘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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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02 13:15:58 *.249.167.156
저자 소개를 칭기스칸으로 대신했군요. 저도 어제 갈등하다 종윤 형의 전화를 받고 르네 그루쎄를 다시 살폈습니다. 검색하다 보니 저자의 한마디가 있어 추가해봅니다.

"한곳에 머물기를 거부했던 유목민들이 그들의 땅에 남겨 놓은 흔적과 기록은 매우 희미했다. 정주 문명권에 살아온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아쉬울 정도였지만, 당시 생존에 충실했던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오랜 시간 현장을 누빈 뒤에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초원을 찾아낸 역사의 현장과 그곳에서 만난 유목민들, 오지에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흥분을 삭일 수가 없다." - 배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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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7.02 23:23:21 *.142.240.154
네.. 그렇지요.
르네 그루쎄와 배석규...
으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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