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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일 08시 02분 등록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그 사람’이 된 칭기스칸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사계절>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 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하고 믿어 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예’보다도 ‘아니오’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 주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진정한 인간관계가 그리운 날」에서 -


이번 주말에 만난 시의 한 부분이다. 시를 느끼면서 ‘나의 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칭기스칸’이다. 그는 몽골인뿐만 아니라 여러 인종과 부족으로부터 ‘그 사람’에 해당되는 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병사가 먼 길 나설 때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함을, 힘들고 어려울 때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너그러움을,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해줄 수 있는 진실함을 가진 자가 바로 칭기스칸인 듯하다. 적은 부족의 수로 그 넓은 지역과 그 많은 부족을 통합하고 이끌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인은 혈연이나 종교로 형성된 인간관계가 아니라 신의와 능력으로 사람들을 결집한 혁신적인 발상에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신화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름하여 ‘발주나 맹약’이라는 사건이다.

『테무진은 먹을 것도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며칠간 계속 달아나다가 진흙탕인 발주나 호숫가에 이르렀다. 그는 몇 명이 살아남았는지 확인하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하들 가운데 불과 19명만 남아있었다.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으로, 테무진과 동생 카사르 만이 몽골 씨족 출신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한 때 적군이었던 메르키트, 키타이, 케레이트 출신도 있었다. 테무진은 ‘영원한 푸른 하늘’과 성산 부르칸 칼둔을 숭배하는 헌신적인 샤머니즘 신자였지만, 19명 가운데는 무슬림 3명 이외에 기독교도와 불교도도 몇 명씩 있었다. 그들은 오직 테무진에 대한 헌신과 서로간의 서약을 통해서 결합되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마저 이 머나먼 땅에서 굶어죽을 판이었다. 그들이 몸을 쉬며 앞일을 결정하려고 발주나 호숫가에서 발을 멈추었을 때, 갑자기 북쪽에서 야생마가 나타났다. 그러자 테무진의 동생 카사르가 말을 쫓기 시작했다. 카사르는 말을 잡아왔고 부하들은 얼른 가죽을 벗겼다. 고기를 구울 장작도 없고 삶을 단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래(古來)의 조리법을 이용했다. 말의 가죽을 벗긴 뒤 고기를 자르고, 말가죽으로 큰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 고기와 물을 약간 넣었다. 그들은 마른 똥을 모아 불을 피웠지만 가죽 솥을 불에 직접 올려놓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돌 여러 개를 불에 빨갛게 달구어 가죽 부대 안에 집어넣었다. 돌 때문에 물이 뜨거워졌지만, 물 덕분에 가죽 주머니가 타서 뚫리지는 않았다. 몇 시간뒤 굶주리던 사람들은 삶은 말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테무진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카사르외에는 친척이 아니라 친구들이었다. 가족 가운데 몇 사람은 초원에서 잠시 서로를 놓쳤지만, 다른 친척들은 테무진을 버리고 옹칸이나 자무카에게로 갔다. 특히 그의 숙부-아버지의 두 형제 가운데 하나로 테무진의 어머니를 메르키트족 남편에게서 납치하는 일을 도왔던 사람이다-가 옹 칸 진영에 합류하여 조카와 맞섰다.

서로 위로 할 것도 없고 격려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지친 사람들은 갑자기 말이 나타난 것을 초자연적인 징조로 여겼다. 이 말은 허기진 배를 채울 음식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말은 몽골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예로운 짐승으로서 어떤 행사의 의미를 엄숙하게 드높여주는 역할도 하고 신의 개입이나 지원을 상징하는 역할도 했다. 말은 테무진의 운명의 힘을 상징했다. 주요한 전투나 쿠릴타이를 앞두고 말을 제물로 바치면 사람들은 그 고기를 먹었고 테무진의 영기의 힘은 강화되었다. 말고기를 먹은 뒤에 마실 물이라고는 발주나의 흙탕물밖에 없었다. 테무진 칸은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들어올리고, 축배를 들 듯 다른 손으로 발주나의 흙탕물을 들어올렸다. 그는 부하들의 충성에 감사하면서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부하들은 흙탕물을 함께 마시며 끝까지 그에게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역사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 사건을 다시 정리하면서 ‘발주나 맹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p112)

이 사건은 친족관계, 인종, 종교를 떠나 상호 헌신과 의리에 기초한 칭기스칸의 대인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신에게 칭기스칸과 같은 ‘그 사람’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인가? ‘인간관계의 핵심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일깨워준다고 생각한다. <칭기스칸> 이란 역사적인 인물에게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해보자.


1. 저자에 대하여


잭 웨더포드는 미국 미네소타 주의 매칼래스터(Macalester)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이며, <그 은밀한 유혹(The History of Money)>,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Savages and Civilization)>, , 등을 지었다.

부족민 연구 전문가인 저자는 중국, 중동, 유럽을 연결하는 비단길과 세계 교역의 역사에서 부족민이 차지하는 역할을 연구하던 중,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이 동서 문명 교류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자는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책을 위해 8년 동안 몽골 땅을 답사했고, 베이징의 자금성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스탄불의 토프카피 궁전에 이르는 길을 다니며 고고학적 발굴 현장과 도서관을 찾아보고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1998년 서구 학자로는 최초로 칭기스칸의 고향 부르칸 칼툰을 방문하면서, 그의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800년 동안 방문이 금지되었던 구역에 대한 현지답사를 통해, 그 동안 풀지 못한 의문들을 풀 수 있었다. 칭기스칸의 성장 기반이었던 곳은 예상 외로 초원이 아니라 숲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이를 통해 초기의 몽골족은 유목보다는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그러한 환경은 칭기스칸의 부족 운영과 전재 전술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800년 전의 칭기스칸을 좀 더 생생히 체험하기 위해 몽골 학자들과 함께 계절을 바꾸어 그의 고향을 방문했으며, 칭기스칸이 유목민 생활을 했음을 감안하여 그의 이동 경로를 추측해 ‘이동의 고고학’ 탐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워싱턴 포스트>는 필자의 피와 땀이 담기 이 책이 호머의 <일리아드>에 비견된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12] 바람에 나부끼고 꿈틀거리는 말총은 그 소유자에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고 손짓했으며, 이곳을 떠나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더 나은 목초지를 찾아보자고, 새로운 기회와 모험을 탐사해보자고, 이 세상에서 새로운 운명을 창조해보자고 유혹했다. 전사와 영기는 서로 뗄 수 없이 얽혀 있어 전사가 죽어도 그 영은 말총에서 영원히 산다고 했다.

[13] 운명은 칭기스칸을 끌고 다니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나갔다.

[14]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칭기스칸은 아들, 손자들과 함께 13세기에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문명들을 정복했다. 그가 굴복시킨 사람들 숫자로 보나, 합병한 나라들의 숫자로 보나, 정복한 문땅의 면적으로 보나 칭기스칸은 역사상 다른 어떤 정복자보다 두 배 이상을 정복했다.

[15] 미국을 예로 들어 칭기스칸이 이룬 일을 비유적으로 한번 이야기해보자. 교육받은 상인이나 부유한 경작자가 아니라 문맹의 노예 한사람이 순전히 인격과 통솔력, 결단력만으로 미국을 건립했다고 생각해보라. 거기서 더 나아가 미국을 외세의 지배에서 해방하고, 국민을 단결시키고, 알파벳을 만들고, 헌법을 쓰고,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새로운 전쟁방식을 고안하고, 캐나다에서 브라질까지 군대를 몰고 다니고, 교역로를 열어 양 대륙을 가로지르며 길게 뻗은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었다고 상상해보라. 칭기스칸이 이룬 업적의 규모와 범위는 어떤 수준에서 보든, 어떤 관점에서 보든, 상상의 한계에 도전하며, 아무리 설명에 능한 학자라도 그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16] 칭기스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난 1162년, 구세계는 여러 지역 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각각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 외에는 다른 문명을 알지 못했다. 중국은 유럽을 몰랐고, 유럽은 중국을 알지 못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사망한 1227년에 중국과 유럽은 외교나 상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16] 몽골은 부와 보물을 축적하는 제국이 아니었다. 대신 칭기스칸은 전투에서 얻은 물자를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 유통망으로 들어가게 했다. 칭기스칸은 국제법을 만들고 ‘영원한 푸른 하늘’의 법을 만민을 다스리는 궁극적인 최고의 법으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통치자가 스스로 법위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 칭기스칸은 통치자도 미천한 목자와 똑같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복당한 모든 신민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지만, 영토 내에서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법의 지배를 내세우고 고문을 철폐했지만, 양민을 습격하는 도적떼나 테러리스트 암살자들을 찾아내 죽이기 위한 대규모 원정에는 서슴없이 나섰다. 그는 볼모를 잡아두는 관행을 없애고, 대신 모든 대사와 사절에게 외교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관행을 수립했다. 전쟁중인 적대국가의 사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17] 역사는 대부분의 정복자들에게 비참하고 때 이른 죽음을 선고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33세의 나이에 바빌론에서 의문을 남기고 죽었다. 부하들은 그의 가족을 죽이고 땅을 나누어 가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동료 귀족과 이런 동맹자들에게 로마 원로원에서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모든 정복자가 파괴되거나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본 뒤 지구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외딴 섬에서 외로운 수인으로 고독하고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러나 거의 70세에 이른 칭기스칸은 자신의 야영지 침대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의리 있는 친구, 명령만 내리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충성스러운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었다.

[20] 몽골인은 과학기술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도 않았고, 책이나 연극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세상에 새로운 작물이나 영농기술을 내놓지도 않았다. 몽골의 장인은 직물을 짜지도 못하고, 금속을 주조하지도 못하고, 도기를 만들지도 못하고, 심지어 빵을 굽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기나 도기를 제작하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건물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여러 문화를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주었다.

[22] 13세기에 잉글랜드의 과학자 로저 베이컨은 몽골인이 승리한 것은 군사 분야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그들은 과학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몽골인은 “열렬히 전쟁에 나서기도”했지만, “철학 원리를 습득하는데 여가시간을 바쳤기” 때문에 그렇게 앞서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26] 19세기 과학자들은 아시아 사람들과 아메리카 인디언이 열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때 그들을 몽골 인종으로 분류했다. 의사들은 우월한 백인종 어머니가 지진아를 낳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을 때, 지진아의 얼굴 특징을 모면 아이의 조상 가운데 누군가가 몽골 전사에게 강간을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33] 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장소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33]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려면 그 장소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기후 조건이 똑같을 때 그곳에 가보아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47] 몽골군은 무기를 새로 고안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접촉한 다양한 문화의 무기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런 지식의 축적을 통해 손에 쥐게 된 세계의 무기들은 어떤 상황에도 응용이 가능했다. 몽골군은 화염과 폭발을 일으키는 무기 분야에서 훗날 박격포와 대포의 초기 형태라고 할 만한 무기를 실험했다.

[49] 사람과 과학기술을 다루는 칭기스칸의 능력은 40년 이상에 걸친 쉼 없는 전쟁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천재적 능력, 부하들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수완, 세계적인 규모의 조직을 꾸려나가는 전례 없는 기술 등은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 직관적인 깨달음이나 공식 교육에서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실용적 학습, 실험적 적용, 꾸준한 수정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그의 독특하게 단련된 정신과 집중력이 돋보이는 의지가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싸운 몽골 전사들 대부분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투에 뛰어들었으며, 싸울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웠다. 접전이 벌어질 때마다 추종자와 더불어 전투 기술도 늘었다. 거꾸로 전투를 할 때마다 새로운 구상을 적용하여, 군사전술, 전략, 무기를 끊임없이 바꾸어 나갔다. 그는 한번도 똑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한 적이 없었다.

[54] 후엘룬의 첫 아기는 오른 손에 뭔가 신비하고 불길한 것을 쥐고 세상에 태어났다. 젊은 어머니가 깜짝 놀라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살살 펴보니 손가락 마디뼈만한 크기의 크고 검은 핏덩어리가 드러났다. 갓난아기는 어머니의 자궁 어딘가에서 이 핏덩어리를 움켜쥐고 바깥 세상으로 나올 때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다.

[59]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72] 어느 날 머리가 모자라고 몸도 약한 소년이 테무진을 맡고 있었는데, 타이치우드(칭기스칸과는 같은 씨족)의 남자들은 모두 술에 취해 있었다. 테무진은 갑자기 칼을 강하게 휘둘러 소년의 머리를 때려 쓰러뜨렸다. 그러나 칼을 쓴 채로 초원을 걸어서 달아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이었다. 테무진은 근처 강가의 잡초들 속에 숨었다. 그러나 수색이 시작되자마자 그에게 잘해주었던 가족의 가장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노인은 소리를 질러 알리는 대신 테무진에게 어두워지면 달아나라고 말했다. 어두워지자 테무진은 강에서 나왔으나 달아나지는 않았다. 그는 천천히 노인의 게르로 가서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의 가족은 기겁을 했다. 그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족은 머뭇거리면서도 자기들 목숨을 걸고 칼을 벗겨내 태워버렸다. 다음날에도 타이치우드 씨족의 수색은 계속되었고, 테무진은 장작더미 속에 숨어지냈다. 그날 밤 이 가족은 테무진을 떠나보냈다. 그들은 가난한 처지였음에도 테무진을 위해 양고기 요리를 해주었고 말까지 주었다. 테무진은 말을 타고 추적자들을 피해 멀리 어머니의 외딴 야영지까지 달아날 수 있었다.

가난한 가족이 목숨을 걸고 테무진을 도와주고 또 귀중한 자산까지 내준 것을 보면 그에게 특별한 매력이나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테무진도 물론 이 가족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자신과 가까운 친족 관계에 있는 타이치우드는 한때 그의 가족을 내팽개쳐 죽음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이제는 그를 죽이려고 안달이었다. 그러나 그와 아무런 친족관계도 아닌 이 가족은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와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 테무진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의 씨족이 아니라 해도 가족과 다름없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훗날 테무진은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84] 인생에서 흔히 그렇듯이 어떤 문제의 답은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90] 테무진은 친족 관계를 무시하고 개인의 능력과 충성도에 따라 여러 부하에게 수많은 책임을 나누어주었다. 개인 보좌관이라는 최고의 자리는 처음에 그를 따랐던 보르추와 젤메에게 맡겼다. 이들은 테무진에게 10년 이상 일관되게 충성했다. 사람의 재능을 평가하고 혈통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한 것은 테무진 칸의 핵심적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96] 테무진은 주르킨의 지도자들을 모두 없앴다. 초원의 모든 관련된 씨족들에게 그 메시지는 분명했다. 테무진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보답을 해주고 좋은 대답을 해준다. 그러나 그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100] 테무진 부대와 타이치우드는 하루종일 싸웠으나 어느 쪽도 확실하게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적에게 패배의 공포를 더 크게 불러일으킨 쪽은 아무래도 테무진 부대인 것 같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그날 늦게 화살 하나가 테무진 칸의 목을 꿰뚫었다. 어둠이 깔리면서 두 군데는 하루종일 싸우던 바로 그 들판에서 숙영을 했다. 서로 거리가 멀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밤에는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어야 두 진영이 서로를 감시하여 기습을 예방할 수 있었다.

테무진은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해가 진 뒤에 의식을 잃었다. 이런 상처는 감염위험이 컸으며 화살에 독이 묻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제2인자인 젤메는 저녁 내내 그의 옆을 지키며 상처에서 피를 빨았다. 젤메는 피를 뱉어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그대로 삼켰다. 이런 행동에는 종교적 이유 외에도 테무진이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다른 전사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젤메는 배가 너무 불러 입 밖으로 피가 줄줄 흘러내릴 때가 되어서야 바닥에 뱉기 시작했다.

[101] 당시 초원 부족들은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편을 바꾸었고 병사들은 지도자를 버렸지만, 테무진이 전사로서 활동한 60년 동안 장군들 가운데 그를 버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또 테무진 역시 장군을 벌하거나 장군에게 해를 준 적이 없었다. 역사속의 위대한 왕과 정복자들을 살펴보아도 이런 충실한 군신 관계는 찾아보기 힘들다.

[103] 습격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을 주기로 한 것이다. 타타르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뒤 어머니가 처했던 곤경을 기억하고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조치는 큰 영향을 주었다. 테무진은 이 정책을 통해 부족 내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충성심도 더 끌어냈다. 이제 병사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테무진이 남은 가족을 돌보아준다고 믿었다.

[112] 테무진은 먹을 것도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며칠간 계속 달아나다가 진흙탕인 발주나 호숫가에 이르렀다. 그는 몇 명이 살아남았는지 확인하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하들 가운데 불과 19명만 남아있었다.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으로, 테무진과 동생 카사르만이 몽골 씨족 출신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한 때 적군이었던 메르키트, 키타이, 케레이트 출신도 있었다. 테무진은 ‘영원한 푸른 하늘’과 성산 부르칸 칼둔을 숭배하는 헌신적인 샤머니즘 신자였지만, 19명 가운데는 무슬림 3명 이외에 기독교도와 불교도도 몇 명씩 있었다. 그들은 오직 테무진에 대한 헌신과 서로간의 서약을 통해서 결합되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마저 이 머나먼 땅에서 굶어죽을 판이었다. 그들이 몸을 쉬며 앞일을 결정하려고 발주나 호숫가에서 발을 멈추었을 때, 갑자기 북쪽에서 야생마가 나타났다. 그러자 테무진의 동생 카사르가 말을 쫓기 시작했다. 카사르는 말을 잡아왔고 부하들은 얼른 가죽을 벗겼다. 고기를 구울 장작도 없고 삶을 단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래(古來)의 조리법을 이용했다. 말의 가죽을 벗긴 뒤 고기를 자르고, 말가죽으로 큰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 고기와 물을 약간 넣었다. 그들은 마른 똥을 모아 불을 피웠지만 가죽 솥을 불에 직접 올려놓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돌 여러 개를 불에 빨갛게 달구어 가죽 부대 안에 집어넣었다. 돌 때문에 물이 뜨거워졌지만, 물 덕분에 가죽 주머니가 타서 뚫리지는 않았다. 몇 시간뒤 굶주리던 사람들은 삶은 말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테무진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카사르외에는 친척이 아니라 친구들이었다. 가족 가운데 몇 사람은 초원에서 잠시 서로를 놓쳤지만, 다른 친척들은 테무진을 버리고 옹칸이나 자무카에게로 갔다. 특히 그의 숙부-아버지의 두 형제 가운데 하나로 테무진의 어머니를 메르키트족 남편에게서 납치하는 일을 도왔던 사람이다-가 옹 칸 진영에 합류하여 조카와 맞섰다.

서로 위로 할 것도 없고 격려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지친 사람들은 갑자기 말이 나타난 것을 초자연적인 징조로 여겼다. 이 말은 허기진 배를 채울 음식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말은 몽골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예로운 짐승으로서 어떤 행사의 의미를 엄숙하게 드높여주는 역할도 하고 신의 개입이나 지원을 상징하는 역할도 했다. 말은 테무진의 운명의 힘을 상징했다. 주요한 전투나 쿠릴타이를 앞두고 말을 제물로 바치면 사람들은 그 고기를 먹었고 테무진의 영기의 힘은 강화되었다. 말고기를 먹은 뒤에 마실 물이라고는 발주나의 흙탕물밖에 없었다. 테무진 칸은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들어올리고, 축배를 들 듯 다른 손으로 발주나의 흙탕물을 들어올렸다. 그는 부하들의 충성에 감사하면서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부하들은 흙탕물을 함께 마시며 끝까지 그에게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역사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 사건을 다시 정리하면서 ‘발주나 맹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19] 테무진이 나이만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일년 뒤인 1205년 소의 해, 절망과 체념에 빠진 자무카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잡아 테무진에게 데려갔다. 그는 자무카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대신, 그들이 배반한 지도자 앞에서 모두 처형해버렸다.

[122] 배음(倍音) 창법은 몸 안의 아주 깊은 곳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동시에 두 가지 선율을 따라갈 수 있었다.

[131] 칭기스칸은 평화와 번영이 그 나름의 문제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151] 칭기스칸은 낯선 땅에서 더 많은 수의 적과 싸워야 하는 불리한 여건 속에 있었지만 그에게는 평생에 걸쳐 경험한 전쟁에서 얻은 교훈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부대와 장교들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많은 장교와 25년 이상 함께 싸웠으며, 보루추와 젤메 같은 장군들은 그와 함께 거의 40년을 살았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감독할 없는 원거리 원정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또 각 장군의 장점과 약점을 알았다. 지휘관가운데 하나인 제베는 빠르고 격렬한 싸움꾼이었으며, 모험심이 뛰어나 전투에 나선 전사들에게 결단력 있는 용기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지휘관인 무칼리는 느리지만 빈틈없이 움직였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다양한 임무를 맡길 수 있었다.

[153] 칭기스칸은 그들의 지식을 제국에 이용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학자들을 끌어오거나 잡아오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칭기스칸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학자들을 불러 그들이 무슨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그의 제곡에서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154]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158] 칭기스칸은 적군의 새로운 무기들을 이용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공학적 두뇌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몽골군은 자기쪽으로 넘어오는 기술자들에게 상을 주었으며, 전투가 끝날 때마다 포로들 가운데 기술자들을 가려내 몽골군에게 봉사하게 했다. 칭기스칸은 공병대를 편성했으며, 새로운 전투가 벌어지거나 새로 정복을 할 때마다 그의 전쟁 기계는 그 정밀성이나 능률이 개선되었다.

[165] 왕자와 사제, 재단사와 약사, 통역관과 서기, 점성술사와 보석상, 화가와 예언가, 마법사와 금세공장이. 기술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데려왔으며, 어떤 이유에서건 몽골인의 관심을 끈 사람도 데려왔다.

[172] 주베이니의 말을 빌리면, 몽골 왕궁에서는 “분노의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인내와 자비의 눈에 흙이 들어갔고, 진노의 불이 사납게 타오르면서 그 눈에서 물이 말랐으니 그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피밖에 없었다.”

[173] 유목민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산이다. 전사에게 전쟁이란 성공과 부를 의미한다.

[177] 지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범주에는 사무원, 의사, 천문학자, 재판관, 예언자, 교사, 이맘, 랍비, 사제 등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몽골인에게는 특히 상인, 낙타 모는 사람,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장인이 필요했다. 몽골인은 전쟁과 목축, 사냥밖에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일꾼들을 요긴하게 썼다.

[180] 원정 불과 일 년 후인 1221년 8월 몽골 관리들은 고려 신민에게 그 곳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종이 10만장을 요구했다. 이 종이의 양은 제국이 커지면서 몽골의 기록 규모가 얼마나 빠르게 늘었는지 보여주지만, 동시에 몽골이 자신의 역사를 쓰는 일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종이는 칭기스칸의 무기고에서 점점 중요한 자기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는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무용을 기리는 찬사에도 관심이 없었다. 외려 그는 사람들이 자신과 몽골인에 대하여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악의에 찬 이야기들을 마음대로 유포하도록 허용했다.

[188] 칭기스칸은 후계자 선정문제를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일 내 아들들이 모두 칸이자 통치자가 되어 서로를 섬기지 않으려 한다면, 머리가 하나인 뱀과 머리가 여럿인 뱀의 이야기처럼 되지 않겠는가?” 이 전래의 이야기에서는 겨울이 왔을 때 뱀의 경쟁하는 머리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어느 구멍으로 들어가 차가운 바람과 눈을 피하는 것이 좋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러나 꼬리는 여럿이지만 머리는 하나인 뱀은 곧 한 구멍을 찾아 겨울 내내 따뜻하게 지낸다. 물론 머리가 여럿인 뱀은 얼어 죽고 말았다.

[194] 칭기스칸은 지도력의 첫 번째 열쇠가 자기절제라고 가르친다. 특히 자만심과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데, 자만심을 누르는 것은 들의 사자를 제압하는 것보다도 어려우며 분노를 이기는 것은 가장 힘센 씨름꾼을 이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자만심을 삼키지 못하면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절대 자신이 가장 강하거나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그 산에 사는 짐승들이 있다. 그 짐승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산보다 더 높아진다.

그는 말 많은 것을 꺼리는 몽골의 전통에 따라 자식들에게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필요한 말만 해라. 지도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도자는 백성이 행복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는 또 자식들에게 전망, 목표,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목표에 대한 전망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삶도 경영할 수가 없다."

[195] 칭기스칸은 자신의 수수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에 따라 자식들에게도 물질적인 천박함이나 허튼 쾌락을 추구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좋은 옷을 입고, 빠른 말을 타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리면 자신의 전망이나 목표를 잊기 쉽다.’ 그런 사람은 ‘노예나 다름없으며, 반드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195] 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약간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모르지만, 그 뒤에 훨씬 더 실용적인 조언이 나온다. 몽골 제국은 하나지만 그 신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호수 건너편에서 정복한 사람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통치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후계자들은 그의 다른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 가르침도 무시해버렸다.

[200] 칭기스칸이 자신을 어떻게 보았느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민하지 알 시라지 주즈자니의 연대기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주즈자니는 한 이맘이 이 악명높은 정복자와 나눈 대화로 기록하고 있다. 이 성직자는 칭기스칸의 조정에서 일을 했으며, 자신의 오만한 주장에 따르면 몽골의 칸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어느 날 그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칭기스칸은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맘은 약간 망설이다가 칭기스칸은 워낙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칸은 그의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구려. 정말 이해를 못하는 것 같소.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는 그 학식이 높은 성직자에게 설명했다. 세상의 다른곳에는 또 많은 사람들이 있고, 많은 군주와 왕국들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칭기스칸은 자신있게 선언했다. “그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할 거요!”

[209] 우구데이는 교역을 개선하려고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사용하는 무게와 측량단위를 표준화했다. 금은괴나 동전은 운반하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지폐를 만들었으며, 덕분에 교역은 한결 간편하고 안전해졌다.

[219] 즉 몽골군을 나누어 송나라와 유럽을 동시에 공격하자는 뜻이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연합국들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전투를 벌이기 이전에는 어떤 군대도 이루어낸 적이 없는 위업이었다.

[257] 몽골인 모든 종류의 시합을 즐겼다. 그들은 씨름시합을 열듯이 경쟁하는 종교들이 참여하는 토론시합을 열었다. 보통 이런 토론대회는 날짜를 잡아 열렸고, 감독할 심판들도 참석했다. 루브룩이 참여한 대회에서 뭉케 칸은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에 속하는 세 심판을 앉혀놓고 토론을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이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많은 청중이 참석했다. 행사는 격식을 갖추어 매우 진지하게 시작되었다. 한 관리가 뭉케의 엄격한 진행 지침을 전달했다. 죽을 각오가 아니면 “말다툼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루브룩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은 무슬림과 하나가 되어 불교의 교리를 논박하려 했다. 이 사람들은 몽골의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평원에 세운 천막에서 각각의 예복을 입고 함께 모여 토론을 했다. 역사상 학자나 신학자들이 모여서 이런 토론을 벌였다는 기록은 없었다. 이런 다양한 유형의 기독교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일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하물며 다양한 무슬림이나 불교도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토론을 해본 일은 없을 것이다. 종교학자들은 자신의 신앙과 사상으로 경쟁을 해야 했다. 그들 뒤에 있는 통치자나 군대의 무기나 권위를 빌릴 수 없었다. 오로지 말과 논리만으로 자신의 사상의 설득력을 시험해야 했던 것이다.

[259] “신이 손에 여러 손가락을 주셨듯이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소. 신은 당신들에게 경전을 주셨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그 경전을 따르지 않고 있소.” 뭉케 칸은 그 증거로 기독교인이 정의보다 돈을 앞세운다는 점을 들었다. 이어 신이 몽골인에게는 경전 대신 거룩한 사람, 즉 샤먼을 주셨다고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 서로 “평화롭게 살고 있소.”

[298] 몽골 제국 신민들이 지성사와 행정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실험을 해보았다. 세계의 모든 언어를 적을 수 있는 단일한 알파벳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의 라마승 팍파에게 이 과제를 맡겼다. 팍파는 1269년에 칸에게 티베트 알파벳을 바탕으로 한 41개 글자를 제시했다. 쿠빌라이 칸은 팍파문자를 제국의 공식문자로 채택했지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고 중국인을 포함한 모든 신민이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새로운 문자가 그 우월성을 드러내 과거의 문자를 교체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중국학자들은 자신들의 오랜 언어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언어와 단절하고 야만인이 만든 새문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신민들은 몽골의 권력이 시들자마자 몽골의 문자체계를 버리고 말았다.

[325]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인이 아닌 사람들은 몽골어를 배우는 것을 금지했다. 몽골은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328] 몽골은 문화를 휴대 가능한 형태로 바꾸었다. 단순히 물자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새로운 생산물을 사용하려면 지식체계 전체를 옮겨와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약품은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교역품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몽골 왕궁은 페르시아와 아랍의 의사를 중국에 수입했으며, 중국 의사를 중동에 수출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은 상품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333]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도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337] 종이와 인쇄술, 화약과 화기, 나침반을 비롯한 해양 장비의 광범한 영향을 받아 유럽인은 르네상스를 경험했고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것은

[340]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그는 왕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태어난 신앙에 따라
스스로 맹세한 법을 지켰다.
게다가 강인하고, 지혜롭고, 부유했으며,
누가 보아도 정이 많고 의로웠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자비롭고, 명예로웠으며,
그의 감정은 중심이 잡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집의 어떤 젊은 남자 못지않게
젊고, 생기있고, 강하며, 전투에서 앞서고자 했다.
그는 잘생긴 사람이고 운도 좋았으며,
늘 왕의 지위를 잘 유지하여,
그런 사람은 달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고귀한 왕, 이 타타르의 칭기스칸.』(p340)

[344] 몽골이 상인을 위해 건설한 도로와 역참 또한 의도와 관계없이 벼룩, 따라서 병 자체가 이동하다 머무는 지점으로 이용되었다. 캐러밴은 사치스러운 직물, 이국적인 향료, 화려한 보석과 더불어 벼룩도 싣고 다녔다. 이렇게 벼룩은 한 숙영지에서 다른 숙영지로,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옮겨갔다. 페스트가 고개에 있는 중요한 역참 하나만 휩쓸어도, 사막을 통과하는 다른 길 하나만 막아도 방대한 제국 내의 큰 지역을 고립시켜버릴 수 있었다.

[349] 몽골 제국은 사람, 물자, 정보가 제국 전체를 끊임없이 빠르게 돌아다녀야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연결이 없으면 제국도 없었다.

몽골인이 외국인 정복자이면서도 때로는 자기들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신민을 큰 탈없이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약해진 뒤에도 교역물자가 계속 대규모로 흘러다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스트의 여파로 교역도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지파에서 지원병을 보내줄 가능성도 사라지자 칭기스칸의 황금 가족 각 지파는 신민이 언제라도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매우 가변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꾸려나가야 했다. 군사적 힘과 상업적 이득이라는 두 가지 이점이 사라지자, 러시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의 몽골인은 자신의 신민과 결혼을 하고 의식적으로 그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따름으로써 권력과 정통성의 새로운 야식을 찾아나갔다.

[358] 르네상스 시대 작가와 탐험가들이 칭기스칸과 몽골인에게 공개적으로 찬사를 보낸 반면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아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종종 몽골인이 놓여 있었다.

[373] 역사에서 위대한 역할을 한 인물은 식물 표본처럼 책 속에 깔끔하게 끼워서 보관해둘 수가 없다. 그런 인물의 행동은 기차가 오고 가는 것처럼 구체적인 시간표에 따라 설명할 수가 없다.

[373] 종소리가 멈춘 뒤에도 간질거리는 진동은 계속 느낄 수 있듯이 칭기스칸은 오래 전에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행동은 우리 시대에까지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몽골비사(Secret History of the Mongols)>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칭기스칸은 야만인, 피에 굶주린 미개인, 파괴 자체를 즐기는 무자비한 정복자의 전형이었다.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몽골비사> 사본 한 부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책에 적혀있던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여서 해독할 수 없었다. 또한 20세기에는 사회주의체제에 부적절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이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정치해금이 이루어지고 몽골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칭기스칸이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1990년에 갑자기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소비에트의 몽골 지배가 끝이 났고 몽골이 외부인에게 개방되면서 칭기스칸이 새로운 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책 속의 글로 대신한다.

『미국을 예로 들어 칭기스칸이 이룬 일을 비유적으로 한번 이야기해보자. 교육받은 상인이나 부유한 경작자가 아니라 문맹의 노예 한사람이 순전히 인격과 통솔력, 결단력만으로 미국을 건립했다고 생각해보라. 거기서 더 나아가 미국을 외세의 지배에서 해방하고, 국민을 단결시키고, 알파벳을 만들고, 헌법을 쓰고,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새로운 전쟁방식을 고안하고, 캐나다에서 브라질까지 군대를 몰고 다니고, 교역로를 열어 양 대륙을 가로지르며 길게 뻗은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었다고 상상해보라. 칭기스칸이 이룬 업적의 규모와 범위는 어떤 수준에서 보든, 어떤 관점에서 보든, 상상의 한계에 도전하며, 아무리 설명에 능한 학자라도 그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p15)

어떻게 해서 노예 신분까지 전락했던 그런 비천한 아이가 몽골족의 위대한 칸으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사후 800년이 지난 후 다시 그의 리더쉽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을까? 많은 전문가들이 21세기를 노마드 시대라 하여 유목시대와 비교하면서 칭기스칸의 리더쉽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몇 가지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 사람을 사귐에 있어 핏줄보다는 믿음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이다. 이상적인 몽골 문화에서는 친족관계가 다른 모든 사회적 원리를 지배했다. 즉 친족으로 이루어진 관계 외부에 있는 사람은 바로 적이 되고, 가까운 친족 관계일수록 그 유대도 더 깊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어릴 적 사건을 통해 친족이 반드시 좋은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고 친족이 아니어도 믿음이 바탕이 된다면 누구라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어느 날 머리가 모자라고 몸도 약한 소년이 테무진을 맡고 있었는데, 타이치우드(칭기스칸과는 같은 씨족)의 남자들은 모두 술에 취해 있었다. 테무진은 갑자기 칼을 강하게 휘둘러 소년의 머리를 때려 쓰러뜨렸다. 그러나 칼을 쓴 채로 초원을 걸어서 달아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이었다. 테무진은 근처 강가의 잡초들 속에 숨었다. 그러나 수색이 시작되자마자 그에게 잘해주었던 가족의 가장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노인은 소리를 질러 알리는 대신 테무진에게 어두워지면 달아나라고 말했다. 어두워지자 테무진은 강에서 나왔으나 달아나지는 않았다. 그는 천천히 노인의 게르로 가서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의 가족은 기겁을 했다. 그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족은 머뭇거리면서도 자기들 목숨을 걸고 칼을 벗겨내 태워버렸다. 다음날에도 타이치우드 씨족의 수색은 계속되었고, 테무진은 장작더미 속에 숨어지냈다. 그날 밤 이 가족은 테무진을 떠나보냈다. 그들은 가난한 처지였음에도 테무진을 위해 양고기 요리를 해주었고 말까지 주었다. 테무진은 말을 타고 추적자들을 피해 멀리 어머니의 외딴 야영지까지 달아날 수 있었다.

가난한 가족이 목숨을 걸고 테무진을 도와주고 또 귀중한 자산까지 내준 것을 보면 그에게 특별한 매력이나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테무진도 물론 이 가족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자신과 가까운 친족 관계에 있는 타이치우드는 한때 그의 가족을 내팽개쳐 죽음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이제는 그를 죽이려고 안달이었다. 그러나 그와 아무런 친족관계도 아닌 이 가족은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와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 테무진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의 씨족이 아니라 해도 가족과 다름없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훗날 테무진은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p72)

얼마나 군신관계가 깊은 의리로 맺어있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도 있다. 바로 목 부상 사건이다. 당시 유목부족들은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편을 바꾸거나 병사들은 지도자를 버렸지만, 테무진이 집권한 60년 동안 그를 버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테무진 역시 장군들을 벌하거나 해를 준 적이 없었다. 역사 속의 다른 왕이나 정복자들을 살펴보아도 이런 충실한 군신관계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테무진 부대와 타이치우드는 하루종일 싸웠으나 어느 쪽도 확실하게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적에게 패배의 공포를 더 크게 불러일으킨 쪽은 아무래도 테무진 부대인 것 같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그날 늦게 화살 하나가 테무진 칸의 목을 꿰뚫었다. 어둠이 깔리면서 두 군데는 하루종일 싸우던 바로 그 들판에서 숙영을 했다. 서로 거리가 멀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밤에는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어야 두 진영이 서로를 감시하여 기습을 예방할 수 있었다.

테무진은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해가 진 뒤에 의식을 잃었다. 이런 상처는 감염위험이 컸으며 화살에 독이 묻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제2인자인 젤메는 저녁 내내 그의 옆을 지키며 상처에서 피를 빨았다. 젤메는 피를 뱉어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그대로 삼켰다. 이런 행동에는 종교적 이유 외에도 테무진이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다른 전사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젤메는 배가 너무 불러 입 밖으로 피가 줄줄 흘러내릴 때가 되어서야 바닥에 뱉기 시작했다.』 (p100)

『테무진이 나이만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일년 뒤인 1205년 소의 해, 절망과 체념에 빠진 자무카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잡아 테무진에게 데려갔다. 그는 자무카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대신, 그들이 배반한 지도자 앞에서 모두 처형해버렸다.』 (p119)

둘째, 부족을 통치함에 있어 그 당시의 관행을 깨는 혁명적인 평등원칙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전쟁을 통해 획득한 모든 물자들을 분배하는 데 있어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나누었다. 이에 대한 내용을 책 속에서 만나보자.

『습격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을 주기로 한 것이다. 타타르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뒤 어머니가 처했던 곤경을 기억하고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조치는 큰 영향을 주었다. 테무진은 이 정책을 통해 부족 내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충성심도 더 끌어냈다. 이제 병사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테무진이 남은 가족을 돌보아준다고 믿었다.』 (p103)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몽골 내에서 부족간의 분쟁과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 이른바 ‘칭기스칸의 대법령’이다. 여자 납치 금지, 노예금지, 여자를 돈으로 사서 결혼하는 것을 금지, 간통 금지, 도둑질 금지 등 사람들 간의 신뢰를 깨뜨리는 전통적인 관행들을 과감하게 개혁한 것이다. 그 당시 일반적인 통념에 비하면 혁명적인 발상에 해당한다. 또한, 자기 자신도 법아래 둠으로써 군주가 법위에 서던 유럽의 문명보다 훨씬 앞서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셋째, 칭기스칸은 사람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적절한 배치와 역할을 배정함에 있어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또한 늘 전쟁을 하면서도 그를 통해 경험과 지식을 꾸준히 배워나갔고 기술자를 우대하여 새로운 기술을 익혀나갔다.

『몽골군은 무기를 새로 고안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접촉한 다양한 문화의 무기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런 지식의 축적을 통해 손에 쥐게 된 세계의 무기들은 어떤 상황에도 응용이 가능했다. 몽골군은 화염과 폭발을 일으키는 무기 분야에서 훗날 박격포와 대포의 초기 형태라고 할 만한 무기를 실험했다.』(p47)

『사람과 과학기술을 다루는 칭기스칸의 능력은 40년 이상에 걸친 쉼 없는 전쟁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천재적 능력, 부하들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수완, 세계적인 규모의 조직을 꾸려나가는 전례 없는 기술 등은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 직관적인 깨달음이나 공식 교육에서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실용적 학습, 실험적 적용, 꾸준한 수정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그의 독특하게 단련된 정신과 집중력이 돋보이는 의지가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싸운 몽골 전사들 대부분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투에 뛰어들었으며, 싸울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웠다. 접전이 벌어질 때마다 추종자와 더불어 전투 기술도 늘었다. 거꾸로 전투를 할 때마다 새로운 구상을 적용하여, 군사전술, 전략, 무기를 끊임없이 바꾸어 나갔다. 그는 한번도 똑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한 적이 없었다.』(p49)

『칭기스칸은 낯선 땅에서 더 많은 수의 적과 싸워야 하는 불리한 여건 속에 있었지만 그에게는 평생에 걸쳐 경험한 전쟁에서 얻은 교훈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부대와 장교들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많은 장교와 25년 이상 함께 싸웠으며, 보루추와 젤메 같은 장군들은 그와 함께 거의 40년을 살았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감독할 없는 원거리 원정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또 각 장군의 장점과 약점을 알았다. 지휘관가운데 하나인 제베는 빠르고 격렬한 싸움꾼이었으며, 모험심이 뛰어나 전투에 나선 전사들에게 결단력 있는 용기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지휘관인 무칼리는 느리지만 빈틈없이 움직였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다양한 임무를 맡길 수 있었다.』 (p151)

『칭기스칸은 그들의 지식을 제국에 이용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학자들을 끌어오거나 잡아오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칭기스칸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학자들을 불러 그들이 무슨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그의 제곡에서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p153)

『칭기스칸은 적군의 새로운 무기들을 이용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공학적 두뇌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몽골군은 자기쪽으로 넘어오는 기술자들에게 상을 주었으며, 전투가 끝날 때마다 포로들 가운데 기술자들을 가려내 몽골군에게 봉사하게 했다. 칭기스칸은 공병대를 편성했으며, 새로운 전투가 벌어지거나 새로 정복을 할 때마다 그의 전쟁 기계는 그 정밀성이나 능률이 개선되었다.』 (p158)

『왕자와 사제, 재단사와 약사, 통역관과 서기, 점성술사와 보석상, 화가와 예언가, 마법사와 금세공장이. 기술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데려왔으며, 어떤 이유에서건 몽골인의 관심을 끈 사람도 데려왔다.』 (p165)

『지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범주에는 사무원, 의사, 천문학자, 재판관, 예언자, 교사, 이맘, 랍비, 사제 등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몽골인에게는 특히 상인, 낙타 모는 사람,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장인이 필요했다. 몽골인은 전쟁과 목축, 사냥밖에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일꾼들을 요긴하게 썼다.』 (p177)

넷째, 칭기스칸은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리더의 요건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21세기 현재 기업의 리더들에게 요구되는 요건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되어 있었다. 그에 대한 내용을 책을 통해 직접 살펴보자.

『칭기스칸은 지도력의 첫 번째 열쇠가 자기절제라고 가르친다. 특히 자만심과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데, 자만심을 누르는 것은 들의 사자를 제압하는 것보다도 어려우며 분노를 이기는 것은 가장 힘센 씨름꾼을 이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자만심을 삼키지 못하면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절대 자신이 가장 강하거나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그 산에 사는 짐승들이 있다. 그 짐승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산보다 더 높아진다.

그는 말 많은 것을 꺼리는 몽골의 전통에 따라 자식들에게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필요한 말만 해라. 지도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도자는 백성이 행복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는 또 자식들에게 전망, 목표,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목표에 대한 전망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삶도 경영할 수가 없다."』 (p195)

『칭기스칸은 자신의 수수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에 따라 자식들에게도 물질적인 천박함이나 허튼 쾌락을 추구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좋은 옷을 입고, 빠른 말을 타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리면 자신의 전망이나 목표를 잊기 쉽다.’ 그런 사람은 ‘노예나 다름없으며, 반드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p195)

『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약간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모르지만, 그 뒤에 훨씬 더 실용적인 조언이 나온다. 몽골 제국은 하나지만 그 신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호수 건너편에서 정복한 사람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통치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후계자들은 그의 다른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 가르침도 무시해버렸다.』 (p196)

칭기스칸에 대한 위대한 이미지를 제프리 초서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표현한 내용으로 대신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그는 왕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태어난 신앙에 따라
스스로 맹세한 법을 지켰다.
게다가 강인하고, 지혜롭고, 부유했으며,
누가 보아도 정이 많고 의로웠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자비롭고, 명예로웠으며,
그의 감정은 중심이 잡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집의 어떤 젊은 남자 못지않게
젊고, 생기있고, 강하며, 전투에서 앞서고자 했다.
그는 잘생긴 사람이고 운도 좋았으며,
늘 왕의 지위를 잘 유지하여,
그런 사람은 달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고귀한 왕, 이 타타르의 칭기스칸.』(p340)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은 세계역사에 위대한 업적들을 수없이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직접 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 이것은 몽골제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그 시대로 되돌아가 꼭 참석해보고 싶은 장면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종교 토론이다. 몽골인은 모든 종류의 시합을 즐겼다고 한다. 종교도 시합으로 다루었는데 정말 독특한 시합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때의 상황을 책 속의 글로 느껴보자.

『몽골인 모든 종류의 시합을 즐겼다. 그들은 씨름시합을 열듯이 경쟁하는 종교들이 참여하는 토론시합을 열었다. 보통 이런 토론대회는 날짜를 잡아 열렸고, 감독할 심판들도 참석했다. 루브룩이 참여한 대회에서 뭉케 칸은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에 속하는 세 심판을 앉혀놓고 토론을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이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많은 청중이 참석했다. 행사는 격식을 갖추어 매우 진지하게 시작되었다. 한 관리가 뭉케의 엄격한 진행 지침을 전달했다. 죽을 각오가 아니면 “말다툼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루브룩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은 무슬림과 하나가 되어 불교의 교리를 논박하려 했다. 이 사람들은 몽골의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평원에 세운 천막에서 각각의 예복을 입고 함께 모여 토론을 했다. 역사상 학자나 신학자들이 모여서 이런 토론을 벌였다는 기록은 없었다. 이런 다양한 유형의 기독교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일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하물며 다양한 무슬림이나 불교도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토론을 해본 일은 없을 것이다. 종교학자들은 자신의 신앙과 사상으로 경쟁을 해야 했다. 그들 뒤에 있는 통치자나 군대의 무기나 권위를 빌릴 수 없었다. 오로지 말과 논리만으로 자신의 사상의 설득력을 시험해야 했던 것이다.』(p257)

둘째로 세계의 모든 언어를 적을 수 있는 단일한 알파벳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문자를 한번 보고 싶다. 만약 그런 문자가 통용되었다면 오늘날보다 앞서 글로벌 시대를 연 대단한 업적이 아니었을까 한다.

『몽골 제국 신민들이 지성사와 행정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실험을 해보았다. 세계의 모든 언어를 적을 수 있는 단일한 알파벳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의 라마승 팍파에게 이 과제를 맡겼다. 팍파는 1269년에 칸에게 티베트 알파벳을 바탕으로 한 41개 글자를 제시했다. 쿠빌라이 칸은 팍파문자를 제국의 공식문자로 채택했지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고 중국인을 포함한 모든 신민이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새로운 문자가 그 우월성을 드러내 과거의 문자를 교체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중국학자들은 자신들의 오랜 언어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언어와 단절하고 야만인이 만든 새문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신민들은 몽골의 권력이 시들자마자 몽골의 문자체계를 버리고 말았다.』(p298)

저자가 인류학자여서 그런지 <몽골비사>에 적혀 있는 내용을 뛰어난 현장감과 세밀한 문장력으로 묘사하여 독자로 하여금 상상과 흥미를 유발하였다. 예를 들어, 자신의 아내 부르테를 납치해간 메르키트를 공격하면서 아내를 찾아 헤매는 장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마치 내 자신이 칭기스칸이 되어 아내를 찾고 있는 듯한 아찔한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몽골비사」는 부르테가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혼란과 소요 가운데 그녀의 이름을 외쳐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그것이 테무진의 목소리임을 알았다고 전한다. 부르테는 수레에서 뛰어내려 어둠을 뚫고 그 목소리를 향해 달려갔다. 테무진은 안장에서 미친 듯이 몸을 돌려가며 부르테의 이름을 부르고 어둠을 살피기를 되풀이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녀가 달려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그녀가 말고삐를 손에서 낚아챘을 때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하고 공격할 뻔했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은 ”서로 힘차게 끌어안고“ 감격의 포옹을 했다.』 (p 83)

그리고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저자 외에 유명한 몽골 학자들과 팀을 이루어 몽골비사에 적혀 있는 내용의 사실여부를 발로 뛰며 확인해나간 내용을 적은 것이다. “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장소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으로 주요 유적지를 계절마다 같은 장소에도 여러 번 돌아다니며 몇 백 년 전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하나 둘씩 풀어나갔다.

그러나 두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 8년 동안 발로 뛰며 확인했던 내용들을 지도와 사진을 곁들여서 칭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해갔다면 지리적인 면이나 전쟁의 수행방법 등을 훨씬 더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생소한 몽골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용어들에 대한 설명과 사진을 추가한다면 몽골에 대한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부가적인 혜택도 얻지 않을까 한다.

두 번째, 저자가 서양학자이어서 그런지 동양역사에 대한 오류를 범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를 잘못 알고 기술한 부분(p308)이 있었다. 이 한 사례를 통해 다른 책들 속에는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왜곡되어 알려지고 기술되어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몽골제국의 역사를 보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13세기는 몽골이 무력전쟁을 통해 세계화가 진행되었다고 하면 현재는 시장경쟁을 통해 세계화가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세계화와 지역화라는 작용과 반작용이 법칙이 다시 한번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속 내용을 들여다보면 뚜렷한 차이가 있다. 몽골제국은 보편주의 원칙에 의해 다양성이 인정되었지만 지금은 부익부 빈익빈에 의해 일등이 아니면 시장에서 도태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편중을 통제할 통치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만약 몽골제국에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되었다면 어떻게 통치하였을까 몹시 궁금하다. 단일문자처럼 자체 경쟁력이 있다면 살아남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

파괴적인 정복자의 이미지에서 디지털 노마드 시대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인물,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모든 사람과 모든 땅의 통치자가 되려 했던 인물, 어떻게 보면 이 허황된 꿈을 하늘이 자신에게 준 소명으로 알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 칭기스칸은 자신이 세상에 어떤 이미지를 남기고 간다고 생각했을까? 이에 대답을 책 속의 글로 음미해보며 나 자신에게도 그 질문을 던져보아야겠다.

『칭기스칸이 자신을 어떻게 보았느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민하지 알 시라지 주즈자니의 연대기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주즈자니는 한 이맘이 이 악명높은 정복자와 나눈 대화로 기록하고 있다. 이 성직자는 칭기스칸의 조정에서 일을 했으며, 자신의 오만한 주장에 따르면 몽골의 칸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어느 날 그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칭기스칸은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맘은 약간 망설이다가 칭기스칸은 워낙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칸은 그의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구려. 정말 이해를 못하는 것 같소.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는 그 학식이 높은 성직자에게 설명했다. 세상의 다른 곳에는 또 많은 사람들이 있고, 많은 군주와 왕국들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칭기스칸은 자신있게 선언했다. “그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할 거요!” 』(p200)

IP *.211.6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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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03 11:50:22 *.249.167.156
칭기스칸에게서 '관계'를 발견하셨네요.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감흥하는 부분이 다르다는 것. 그 차이가 참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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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07.07.03 12:52:50 *.99.120.184
그렇구나. 관계였구나. 연구원을 지원하면서부터 쭉~ 어울림, 관계 등에 시선이 머물러있구나.
같은 책 다른 시선, 나도 참 재미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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