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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일 08시 59분 등록
칭기스칸의 생애 - 르네 그뤼쉐 (간디서원 )

‘ 지적이며 적극적이고 케케묵운 편견에서 자유로웠던 지도자들과 백성들만이 사회를 발전시켜 새롭게 역사를 써 나간다’ - 르네 그뤼세 -

르네 그뤼세 ( 1885 -1952 ) 프랑스 남부 소도시에서출생한 동양사학자

그뤼세가 나를 불렀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는 뭐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단지 글로서 말할 뿐이다. 우리의 정서상 만나면 ‘이력’에 대한 탐구가 먼저인지라 다소 답답한 마음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개인사를 알아보는 방법에는 최소한의 정보밖에 없기에, 그러나 오랜만에 맛보는 ‘ 글로서 말한다’에 중심을 두어 본다.

책으로 그를 알아내기에는 웬지 허전하다. 글이 그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는지, 아님 더하거나 빼지는 않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일곱 마리의 생쥐 중 한 마리가 되어서 그뤼세를 더듬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니까. ( The seven blind mice - 일곱 마리의 생쥐가 코끼리의 부분을 보고 뱀, 화살 등 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영어동화)
우선 그가 젊은 시절 프랑스 예술성에 들어가 공무원 생활을 했다는 것에 후한 점수를 준다. 예술은 전체를 아우르는 눈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판단이다. 그러나 너무 이른 나이에 이러한 생활에 접어들었음에 그의 유약성을 염려하는 뜻에서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세계 1차대전 때 종군하여 부상을 당했단다. 일단은 안심이다. 부상의 정도는 염려하지 않고 ‘안심’에 초점을 둠에 다소 미안한 감은 있으나 그가 현장감을 잃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나를 즐겁게 한다. 좀 더 기웃거렸다. 그에 대해 ‘아는 것 없음’을 소문냈더니 ‘꺼리’ 들이 조금은 주어진다. ‘기메 박물관 부관장을 지냈고 동양학 관계 연구 교수를 거쳐 프랑스 국립박물관장을 엮임 했다’는 정보다. 이만 하면 그를 그릴 수 있다. 나아가서 그를 믿어도 좋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진다.

처음 르네 그뤼세 그를 그의 ‘글’로 알기 위해 두 권의 책을 구했다. ‘칭기스칸의 생애’와
‘유라시아 유목민사’ 다. 우선 앞을 책을 먼저 읽었다. 후자의 책은 32,000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지불했지만 그 방대함에 입만 벌리고 읽지는 않은 상태다. 책 리뷰를 참조할 수 도 있지만 최대한 내가, 그의 글로 판단하고픈 마음에 그 누구의 리뷰도 읽지 않았다.
전자의 책 ‘칭키스칸의 생애’를 통해 그를 바라본 나의 시각은

- 편협하지 않고 기록의 역사를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졌다. 그러나 냉정하지는 않다.
- 기록에 나타난 역사를 읽되 ‘인물’에만 돋보기를 가져가지는 않는다. ‘자연에 대한 묘사’에도 그의 눈은 머문다. 하기야 그 누구도 손대지 않는 ‘ 동양’ 나아가서 ‘몽골 - 스텝제국’에 눈을 돌린 그 자체가 그는 보통의 역사가는 아니다. ( 실제 본서에서 음유시인이 읊은 몽골 고원의 광활함을 노래한 부분이 자주 등장함)
- 논문을 포함한 100여 편의 그의 저서가 그의 성실성을 말해준다. 이 쯤되면 우리 시대의 선생님 ‘이규태’님을 떠올린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의 저서를 통해서 그의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역사관을 둘러볼 예정이다. 그의 역사에 대한 균형감각에 감사를 드리며
비 오는 월요일을 상쾌함으로 출발하는 여유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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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이는 저서 : (스텝의 제국- 앗틸라, 칭키스칸, 타메르레인,) 몽골제국 등이 있음

[16]“잘 들어두어라, 너희들이 제각기 따로 떨어지면 한 개의 화살이 쉽게 부러지듯이 각자가 금세 꺾기고 말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발로 뭉치면 아무도 너희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23] 『몽골비사』에 의하면 카이두의 보호를 받고자 수많은 부족이 그의 주위로 차츰 보여들기 시작했고 신하의 대열에 끼는 가족의 수는 날로 불어났다. 이는 유목민에게서 볼 수 있는 통치의 전형으로써, 어떤 우두머리의 위광에 의지하여 갖가지 부족이 몰려드는 것이다. 분열되고 허기져있는 씨족, 고립되어 보호자를 구하는 가족, 싸움터의 공명을 노리는 모험가, 어김없는 활솜씨로 사냥감과 전리품을 얻고자하는 궁술가 등등......... 칭기스칸의 왕권도 바로 그와 같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27] 1148년 이후 매년 북경 궁정에서 몽골 인 부족들에게 소, 양, 비단 등을 보냈는데, 그것은 대홍안령 변경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선심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금나라 황제는 중국인다운 방식으로 적의 추장에게 몽골 왕이라는 그럴듯한 칭호를 주면서도, 그 왕은 금에 의하여 보호받고 금을 돕는 자로 간주하게끔 만들어 놓고 있었다.

[29] 타타르 족의 샤먼은 널리 알려져 있었던 모양으로, 몽골인의 칸인 카불의 의동생이 병으로 쓰러지자 타타르 인의 주술사가 불리어 왔다. 그러나 주술의 효과도 없이 병자는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가족은 주술사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 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주술사를 뒤쫓아가 죽이고 말았다. 타타르 인들은 이 원수를 갚고자 즉시 무기를 들고 일어섰으며 카불의 자식들도 그 도전에 응했다.

[34] 쿠투라는 늪 속으로 뛰어들어 말의 목까지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장 위에서 일어나서는 진흙탕을 뛰어넘어 저편 언덕까지 달아났으나, 도루벤 군사는 더 이상 뒤쫓지 않고 말했다. ‘말 없는 몽골 인은 별게 아니다.’라고”

[44] 네스토리우스파의 이단적 기독교, 즉 경교는 칭기즈칸 제국에서도 공인 종교의 하나가 되었다.

[51] 1167년 돼지해에 태어났다. 그 무렵의 일가는 오논 강 오른쪽 언덕의 데리운 볼다크, 즉 데리운의 고립된 언덕 가까이에 숙영하고 있었다. 태어날 때 아기는 오른손에 작은 뼈만한 크기의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58] “용사 예수가이가 없어졌다고 해서 당신들이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군요. 아이들이 자라기 않고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는 줄 아십니까? 아이들의 노여움을 두려워할 날이 언제고 오지 않을 줄 아십니까? 당신들은 제물 고기와 술을 나눌 때 나를 따돌렸소. 먹고 마신 다음에도 나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이 고장에서 떠날 작정이지요?”

[61] 커어룬은 모든 아이들을 공평하게 돌보아 주었다. 여기서도 그녀는 훗날 몽골의 시인이 ‘커어룬 어머니’라 부를 만한 일을 너끈히 해내고 있다. 이 미망인과 일곱 명의 아이들은 유목민의 주인 생활에서 하루아핌에 추방자 신세가 되었으며, 오논 강 상류의 가혹한 거장인 숲과 스텝 사이에 버려졌다. 그래도 여장부인 어머니는 기가 꺾이기는커녕 있는 힘을 다하여 시인으로부터 ‘현명한 커어룬’이라 불릴 만한 일을 해냈다.

[73] 새가 새장에서 달아나 숲에 몸을 숨기면 숲은 새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애써 우리 집까지 몸을 숨기러 온 사람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79] 그처럼 평범한 첫걸음, 스텝의 젊은이라면 누구에게서나 일어날 법한 일로부터 세계의 정복자가 될 사람의 행적은 시작되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거나 잘 돼봐야 종신 금고의 신세를 면치 못할 모험, 그것을 그는 용기와 침착성으로 극복해낸다. 그리고 말을 도둑맞았지만 그는 결단력과 의지의 힘으로 그것을 되찾는다. 아무튼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가 자기와 접한 사람들에게 끼친 인격과 매력이라 할 것이다. 그는 아주 젊어서부터 늠름한 인격과 이를 뒷받침하는 감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79] 솔칸 시라의 말을 다시 새겨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달빛 아래 오논 강의 수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테무친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 위에 설 자가 지니는 눈의 매력에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그는 자시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젊은이를 구해 주었던 것이다. 지금의 보올추도 처음 만날 때부터 테무친에게 자기 일신을 바쳤고 언제까지나 운명을 함께 하려 든다. 그 역시 ‘위대한 매력으로 빛나는 눈의 광휘’를 거스르지 못했던 것이다.

[81] 디 세치엔의 집안사람들은 줄지어 신랑 신부를 케롤렌 강 하류의 우라크 죠르의 고지까지 전송해 주었다. 그의 아내 쇼탄은 딸 보르테를 따라 상구르 강가에 있는 테무친 일가의 집에까지 갔다. 그리고 돌아올 때 테무친의 어머니에게 훌륭한 흑담비 가죽을 선사했다. 이 가죽은 장차 젊은 추장의 외교에 이용된다. 그리고 얼마 후 테무친의 일가는 상구르 강가에서 케롤렌 강 원천에 가까운 부르기 예루기로 이주했다.

[81] 그녀는 몽골 여성으로서 불가결의 조건인 건장한 아들 4형제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도 분별력 있는 훌륭한 조언자가 된다.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칭기즈칸이 선택을 망설일 때는 보르테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욱이 그 의견은 선견지명이 있고 단호한 것이었다.

[88] 그러나 그들은 묘한 복수심에서 보르테를 치르겔 부크라는 자에게 넘겨주었다. 이 사나이는 지난날 예수가이에게 아니 커어룬을 빼앗긴 예케 칠레두의 아우였다. 이처럼 복수는 부족에서 부족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유괴와 폭력이 되풀이되면서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97] 이상으로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훗날 칭기즈칸은 아내가 메르키트 족의 유력자 가운데 하나와 강제로 동거 생활을 한데 대해서 눈감아 준다. 보르테 역시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낀 것 같지는 않다. 남편의 집념과 강한 의지에 마음을 놓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99] 이상와 같이 세대를 바꿔가며 거듭되는 부녀자의 유괴에서는 칼날같은 증오심만이 싹틀 뿐, 어느 한 쪽 부족이 완전히 소멸 까지 수습의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103] 몽골인은 원시인이 흔히 그러하듯 비유나 수수께끼 같은 말씨를 즐겨 썼다. 테무친은 차무하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그는 말을 세우고 커어룬 부인이 탄 수레를 기다렸다. 커어룬 부인이 오자 테무친은 차무하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런 경우에는 늙은이의 경험에 의지하여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104] 쌍방이 모두 일마다 길조를 찾고 재수가 좋기를 바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샤머니즘의 전성기였으므로 누구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샤먼의 입회 하에 결정하였지만, 자기와 관계없이 결정된 일을 그 다음에 가서 정당화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몽골계 바아린 족의 족장 코루치도 나중에 테무친 휘하로 달려와서는 차무하에 따르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가 있었다고 했다.

[109] 그런데 이들 왕족인 알탄, 세체 베키, 타이추, 다리타이 등이 테무친을 왕으로 뽑고 그를 위해 칸의 칭호를 부활시키기로 결장한 것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임금을 받들고자 한 것이었을까? 결코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점은 앞으로도 밝혀진다. 그들로서는 공동으로 병력을 동원하는 동안만이라도 전쟁 수행의 지도자가 필요함을 인정하고 예수가이의 아들을 그 적임자로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110] 그 반면 테무친은 왕가 출신임을 젖혀 두고라도 언제나 흔들림이 없고 뛰어난 평형감각과 타고난 정치력 등을 발휘했다. 그리고 짐승의 가죽을 두른 추장치고는 자기 동맹자들조차도 어엿한 귀인임을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를 갖추고 있었다.

[110] “우리는 그대를 칸으로 선출하고 싶다. 그대가 칸이 되기만 한다면 그대를 위해 우리는 적을 향해서도 맨 먼저 말을 몰 것이다. 빼앗은 계집과 뺨이 아름다운 처녀는 그대의 올드 게르로 데리고 가겠다. 다리가 곧은 준마를 달음질쳐서 그대에게 끌고 가겠다. 싸움이 있는 날 만일 그대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우리들의 제물과 아내를 빼앗고 우리들의 검은 머리를 땅 위에 떨어뜨려라. 평와릐 날에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우리를 처자 곁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 저편으로 내어 쫓으라. 이와 같은 맹세의 말을 한 다음 일동은 테무친을 펠트의 융탄자 위에 올려 앉히고 칭기즈칸이라는 이름, 혹은 존칭과 함께 칸이 지위에 앉힐 것을 선언했다. 이 존칭의 내력은 힘의 개념과 결부되어 ‘흔들리지 않는’ 군주, 혹은 ‘불굴’의 군주임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혹은 전 세계의 지상권이라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느지도 모른다. 아무튼 케롤렌 상류의 초원 가운데의 어느 곳에서 12세기도 저물어가는 그 어느 날, 처음으로 환호의 소리와 함께 불리어진 이 이름은 훗날 몽골 민족이 외치는 찬탄의 소리가 되었고, 동시에 다른 민족이 퍼붓는 저주의 외침 속에 옛 세계의 전부를 휩쓸어 버리고 그 다음 세기에까지 남아 전하게 된다.

[116] 곧 ‘70의 늪’ 싸움에서는 칭기즈칸이 승리를 거두었고, 70개의 가마솥에다 포로를 삶아 죽인 것도 그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처럼 무의미한 만행은 역시 차무하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행위로 인하여 그는 곧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며, 이는 칭기즈칸에게는 싸움에서 승리한 것 보다도 더 유리하게 작용했다.

[116] 칭기즈칸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당한 원한도 잊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117] 이렇듯 칭기즈칸 주위에 잇달아 부하들이 모여든 것은 그를 적으로 삼기보다 보호자로 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칭기즈칸의 권위는 질서, 절도, 혹은 인정미 등을 갖추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적들이 거의 갖추고 있지 못한 인격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했다.

[124] 이러한 말투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칭기즈칸이나 새로 칭호를 갖게 된 ‘옹 칸’이나 모두 금을 섬기는 ‘여러 연방’ 중에서도 하위의 원수에 불과했으며, 북경의 궁전이 직함과 유리 세공품 정도로 달래기가 고작일 수준의 야만족 추장에 지나지 않았다.

[140]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었습니다. 탈주병 행세를 하려고 했습죠. 주군께서 저를 죽이려하기에 옷도 입지 못한 채 바지바람으로 간신히 도망쳐 왔노라고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면 적도 저의 말을 믿겠지요. 그리고 입을 옷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쯤 되면 말을 빼앗아 타고 도망쳐 돌아올 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칸의 목을 축여드릴 말젖을 찾아다니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눈동자처럼 소중한 주군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그의 충성에 칭기즈칸은 깊은 감명을 느꼈다.

[147] 칭기즈칸은 장병들에게 미리 다음과 같이 명령해 두었다. 완전한 승리를 거둔 다음이면 아무리 적의 물건을 빼앗아 나누어 가져도 좋지만, 승리를 거둘때에까지는 절대로 전리품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최초의 공격에서 후퇴를 하게 될 경우에는 어떤 희생을 각오하더라도 다시 공격을 되풀이해야 한다.

[154] “우리는 싸움터에서 함께 돌격해 나간다. 사냥을 할 때에는 손을 마주잡고 사냥감을 몰아낸다. 우리들 사이에서 남들이 불신과 불화의 씨를 뿌릴 때, 우리들 사이에 뱀이 다가올 때, 우리는 뱀이 물어 뜯을 틈을 주지 않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말을 서로 믿기로 한다.”

[157] 칭기즈칸은 조금도 의심하는 빛이 없이 10명 가량의 신하를 대동하고 초대를 받아 찾아 갔다. 가는 도중 돌아가신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문리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영리한 물히크는 칭기즈칸의 경솔함을 타일렀다. “당신이 상대편의 달 차울 베키를 며느리로 원했을 때 그들은 당신과의 혼사에 대해서 코웃음 쳤소. 그러다가 왜 이제 와서 새삼스레 약혼식 연회를 갖자는 걸까요? 실컷 무례한 짓을 해 놓고서는 왜 이제 와서 딸을 주겠다는 걸까요? 난 그 점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초대는 거절하도록 하시오! 지금은 때가 봄이라는 것을 핑계 삼으면 됩니다. 말이 여위어서 목장에 매 둘 필요가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말이 살찐 다음에 가도록 하세요.

[161] “저기 테무친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은 누구요?”
“울우트 족과 방구트 족이 전진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투 중에도 저 대형을 절대로 흩트리지 않습니다. 대열이 방향을 바꾸어도 전열은 그대로 있지요. 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칼과 검을 익혀 왔습니다. 저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169] 이곳에 머무르면서 그는 옹 칸을 비롯하여 셍굼, 차무하, 알탄, 구차르 등에게 가신 두 사람 즉 알카이 카사르와 수케게이 제운을 보내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전했다. 즉 문자가 없는 사회였으므로 호소의 말을 시의 형식으로 꾸며 두 사신에게 외우도록 했다. 이 ‘칭기즈칸의 호소’라 불리는 것에는 정의, 감동, 예로부터의 애정을 표면에 내세우면서 지극히 정치적인 발언을 담고 있었다. “오오, 칸! 나의 아버지, 그대는 어찌하여 저에게 화를 내시고 저를 위협하는 것입니까. 저의 의자는 넘어지고 저의 집 부엌에는 재가 사방에 흩어졌습니다. 지난날 조르칼쿤 산에 가까운 붉은 언덕에서 함께 주고받은 약속을 설마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비록 독사가 우리들의 결합에 이빨을 돌리더라도 그 독이빨이 파고들 틈을 주지 않으며 어떠한 감언에도 넘어가지 말고 서로 흉금을 터놓아 참다운 말의 증거만을 믿자하고........ 짐수레가 좌우의 채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소는 수레를 끌 수 없게됩니다. 두 개의 바퀴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수레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대라는 수레의 두 채 가운데의 하나, 두 개의 바퀴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180] 칭기즈칸의 승리는 급소를 찌르는 병법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다. 조심스러운 야간 행군에 이어 기습의 효과를 십분 발휘하는 급습을 하고, 다시 적을 막다를 골짜기로 몰아너흔 포위 전술을 구사하여 칭기즈칸은 처음으로 대승리를 얻었다. 이 대승리가 유목민 사이에서의 그의 패권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189] “하늘에는 해와 달이 함께 있을 수 있어도 땅 위에는 오직 한 사람만의 칸이 있을 q뿐이다.”

[193] “이 끝없는 길은 흔히 상상하듯 살풍경한 곳이 아니다. 풀은 무성하고 꽃이 아로새겨져 있다. 선명한 황색의 미나리아재비와 십자화과의 꽃, 당아욱빛의 사향초과 총총이풀, 연미붓꽃 등이 핀 가운데 여기저기 새하DIS 별꽃 등이 섞여 있다. 그 갖가지 빛깔의 꽃들을 감사하는 것은 무척 즐겁다.”
투울라 강 남쪽에서 오르콘 강 동남에 걸친 시아리 케엘은 ‘나귀 등의 스텝’이라는 말 뜻이 가리키고 있듯이, 둥근 언덕이 이어져 있다. 눈이 닿는 한 오직 노란 빛깔의 높고 낮은 언덕이 물결치듯 이어져 있을 뿐이고, 모래땅 여기저기에 시들어가는 풀들이 돋아나 있다.보다 더 서쪽으로는 “기복이 적은 누른 빛깔의 스텝이다. 여기저기 바싹 말라 소금을 뿜어내는 늪이 햇빛을 받아 흰 무늬를 반짝이고 있다.

[196] “살아있는 것 모든 것은 결국 죽음에 이른다. 사람의 몸은 고통을 받게 마련인 것, 그것이 곧 세상사이다. 내 운명이 그러하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지!”

[197] 이 대목에서 몽골의 전술 용어를 전하고 있다. 전진할 때의 대형은 ‘풀숲’과 같을 것, 그리고는 ‘호수’의 형으로 대형을 전개시킬 것, 다음에는 ‘송곳’ 모양의 돌격을 가할 것, 칭기즈칸은 몸소 선봉에 서서 지휘를 했으며, 본대는 아우 카사르에게, 예비의 기병은 막내아우 테무게에게 맡겼다.

[201] 그들은 산에서 내려오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칭기즈칸은 눈앞에서 그들의 필사적인 용기를 보자 그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했으나, 그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무기를 손에 든 채 차례로 죽어갔다. 칭기즈칸은 주군에게 바치는 충성을 무사 최고의 덕으로 보는 만큼 이들의 용감한 행위를 크게 칭송했다.

[211] “자네는 스스로 마음을 놓기 위해서라도 지금 여기서 나를 처치해야 하네. 그러나 나를 죽이더라도 피를 흘려서는 안 되네. 그리고 이 근처 어디든 높은 곳에 매장해 준다면 나의 영혼은 멀리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자네의 자손들을 수호하겠네. 나는 훌륭한 가문의 귀인이었어. 그것이 보다 더 훌륭한 가문의 안다에게 패배한 것일세. 내 말을 되새겨 주게. 그리고 이몸을 한 시각이라도 빨리 처치해 주게!”

[217] 샤먼인 쿠쿠추는 자신을 테프 텐게리라 부르게 하고 있었는데, 그와 같은 자격을 배경삼아 이상의 선언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진실로 칭기즈칸의 권력은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며, 옛 투르크 인과 옛 몽골인의 최고신 ‘쿠쿠 몽카 텐게리’가 지상의 대리자로서 새로운 제위를 수여한 것이다. 칭기즈칸이야말로 ‘영원한 하늘의 신이 뽑으신 칸’이었다.

[225] “오오, 나의 충성스럽고 용맹한 파수병들, 오래도록 나를 섬기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칠흑의 밤에도, 달밤에도, 눈보라칠 때 억수같이 비가 쏟아질 때, 견딜 수 없는 추위 속에서도 나의 막사 주위를 지키고 나를 편히 쉬게 해 주었다. 나의 진지 주위를 적이 배회할 때에도 너희들은 그 곳에 있었으며, 막사 주위에서 눈도 깜박이지 않고 들릴락 말락한 화살통 소리에도 벌떡 일어섰다. 나는 너희들 덕분에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227] 이 ‘푸른 몽골인의 이상은 유랑하는 사냥꾼의 이상을 그대로 드러낸 거이다. 여러 탐험가가 말하듯, 그리고 칭기즈칸 자신도 다음과 같은 말로써 분명히 밝혔듯이 순수한 면과 잔인한 면을 번갈아 드러낸다. “평소에는 두 살짜리 새끼사숨과 같고, 잔치 때는 망아지처럼 순진하게 날뛰지만, 일단 싸움에 임하면 매처럼 적을 덮친다. 낮에는 나이든 늑대처럼 방실하지 않으며, 어두운 밤에는 까귀처럼 빈틈이 없다.”

[233] 칭기즈칸은 쿠쿠추의 도움을 중시했는지, 아니면 그의 신통력에 겁을 먹었는지, 아무튼 그를 어려워하여 어느 정도 그에게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리는 없었다. 샤먼은 영계의 힘을 믿고 몹시 거드름을 피웠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칭기즈칸과 대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 자처하면서 예절도 갖추지 않은 채 토론까지 벌이기도 하였다. 쿠쿠추는 새로운 칸의 영달을 촉진한 것은 자기이며 즉위가 가능했던 것도 자기의 주술 덕분이라 믿었다. 따라서 남들이 보기에 자신을 황제와 대등하게 여기지 않는 지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243] 이곳에서 처음으로 칭기즈칸은 정착 도시 문명에 접했다. 그러나 이곳은 중국식의 방비를 갖춘 요새의 땅이었고, 순전히 기병으로 이루어진 유목민들로서는 공격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한 전투에 소용되는 무기를 그들은 갖고 있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영하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황하의 흐름을 돌려놓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그의 천재성을 입중하는 착상이었지만, 몽골 인에게는 기술자가 없어서 결국 계획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251] 칭기즈칸은 막내아들 토투이를 데리고 몸소 중원에 침입하는 중앙군의 지위를 담당했다. 다른 지휘자였더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북경의 공격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확한 판단력으로 그것을 피했다. 왜냐하면 북경은 너무나도 견고한 성과 도시여서 이를 함락시킬 만한 장비를 몽골 군은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255] 칭기즈칸역시 그런 호기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다음해인 1215년 봄, 그는 중신 무하리를 보내어 마침내 북경 공략의 진을 펴게 했다. 전해에는 만전의 방비를 굳히고 있는 대도시의 공격에 별로 마음이 없던 정복자가 적진이 어지러워진 것을 보고, 또 주둔병의 일부가 없어졌음을 확인하자 공성전을 망설이지 않게 된다. 거기에서 칭기즈칸의 성격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견실한 평형감각은 항상 가능과 불가능을 분간하고 그때그때의 힘에 걸맞는 일을 기도한다.

[259] 처음 칭기즈칸의 군대는 하북 땅의 싸움에서도 파괴만을 일삼았다. 초원의 목자나 숲의 사냥꾼은 문명과 문화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261]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이자 제자이기도 한 철학자 카리스테네스를 원정길에 데리고 갔다가 그를 죽였었다. 마케도니아의 대왕만큼 교양은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칸은 중국 학자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273] 칭기즈칸은 그렇게 소리치면서 상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깨우쳐 주기 위해, 금나라가 공물로 바친 물건들 중에서도 중국제의 훌륭한 견직물을 보여 주면서, 그 상인이 가진 물건을 가차 없이 빼앗아 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두 상인은 조심스러워 물건값을 칭기즈칸의 마음에 맡기겠다고 했다. 과연 칭기즈칸은 최초의 상인에게도 후한 값을 치러 주었다. 그리고 그는 멀리서 온 상인들을 위해 ‘흰 펠트 천막’을 치게 하고 환대를 다했다.

[293] 부하라에 입성하다 정복자는 말에 올라탄 채 이슬람교의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것이 술탄의 궁정이냐고 물었다. 알라의 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칭기즈칸은 이마무가 기도드리는 단 앞에서 말을 내려 설교단 위로 두세계단 올라간 다음 큰 소리로 말했다. “들은 짓밟혔다. 말에게 먹이를 주라 !”

[297] 칭기즈칸은 본진을 교외인 ‘쿠쿠 세라이’에 두고 처음 이튼 동안은 요새의 짜임새를 몸소 살피고 다녔다. 사흘 째 되는 날, 그는 진격을 명하여 몽골병으로 변장한 가엾은 포로의 무리를 선두에 내세웠다. 사마르칸드의 민간병들은 성밖에서 공격군을 맞아 싸웠다. 몽골 군은 예의 병법대로 천천히 후퇴하여 편성한 지 얼마 안되는 적의 의용병을 자기네 복병이 기다리는 곳까지 유인해 갔다. 그런 다음 기병이 적의 보병을 무찌르기는 손쉬운 것이었다.

[304] 아무 다리아의 남쪽 언덕에 당도한 것으로, 몽골 군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령 투르케스탄의 바추크 지방에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311] 이렇듯 복된 오아시스의 땅에 토루이 왕자와 유목민의 군사가 나타남으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참극 가운데 하나가 연출되었다. 정신적 문화의 파괴가 오아시스 지대 그 자체의 파괴, 곧 ‘대지의 죽음’과 함계 따라왔던 것이다.

[322] 이번 전쟁에서 제대로 대항한 유일한 호적수에 대한 기사도적 감탄이 표시였다. 그러나 그 밖에 일체의 다른 일에 관한한 칭기즈칸은 평소의 엄한 처사를 조금도 누그러뜨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라르 웃단을 뒷따라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적병들에게 화살을 퍼붓고 언덕에 남아있는 패잔병들을 사정없이 죽였다. 호라즘 황태자의 어린 자식들도 사로잡혀서 사정없이 처형되었다.

[327] 이렇듯 두 회교도 학자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 사실은 정복자의 생애를 통해서 중요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그때를 경계로 하여 지금까지는 도시 문명의 조건을 전혀 알지 못했던 유목민의 수장은, 승리의 성과를 이용하여 옛 문명 제국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그 제국을 불시에 찬탈한 자가 정복한 문명의 계승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337] 칭기즈칸은 중국의 현인에 대해 실망한 빛은 나타내지 않았고, 그를 대하기 이전보다 더욱 경의를 품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애정마저 느끼게 되었다.

[360] “몽골 군에 사로잡힌 자는 칭기즈칸에게 복종하거나 죽음을 각오하거나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밖에 길이 없었다. 그래도 장유는 칭기즈칸의 무장 앞에 무릎 꿇기를 거절하고 금나라의 군대로 치자면 자기도 명안과 같은 계급의 장군이므로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363] 대사는 단지 이상의 조건을 금나라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개봉의 조정으로서도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관에 있는 여러 성은 지도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남성 서쪽을 방비하는 유일한 성채로 그 땅을 양도한다는 것은 금나라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 황실의 열쇠를 넘겨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1227(칭기즈칸이 사망한 해)년까지는 금나라 황제도 복종의 맹세를 되풀이함으로써 정복자의 딱딱한 마음을 어떻게든지 누그러뜨리려 애썼다.

[369] 칭기즈칸은 누구보다도 이해력이 풍부하고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이다. 그러한 칭기즈칸이 가공할 잔학 행위를 방치해 둔 것은 당시의 몽골 인 환경으로 미루어 유목 생활이 아닌 생활 형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이외의 방법에 의한 전쟁은 전혀 몰랐으며,정착민의 토지는 약탈이나 학살, 인간 사냥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외의 방법도 있음을 터득하게 되자, 칭기즈칸은 곧 예류추짜이에 명하여 정착민의 국토에 일정한 조세를 부과하는 등 규칙적인 행정의 방식을 갖추게 만들었다.

3. 내가 저자라면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몽골 초원, 르네그뤼세와 함께 일주일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계획 된 여행이라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을 지니고 차근차는 되짚어보리라는 마음가짐의 출발이었다.
초원은 넓고 광활했다. 때마침 6월이라 스텝은 온통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리꽃을 비롯한 갖가지 꽃들과 버드나무를 비롯한 잡다한 나무들이 어우러져 장관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광활한 초원앞에 서 ‘초원의 유목민’ 그들의 삶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르네그루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풍경속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고 죽는다. 이야기는 ‘탄생’보다 ‘죽음’에 중심 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생활사’와 연결 짓기에는 무리가 있는 이야기 전개다. 내 생각주머니와 그림지도를 최대한 활용한다.
머리는 이해를 하지만 마음은 이를 거부한다.

칭키스칸.
이름만으로도 거칠고 거대한 바위로 내 앞을 가로막는다. ‘르네 그뤼세’의 냉철한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편협되지 않은 몽골제국의 역사를 더듬을 수 있었 던 것은 행운이었다. 책을 읽어가는 도중에 자주‘에릭 홉스 봄’을 떠 올렸 던 것은 그가 지루하리 만큼 냉정한 시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면 르네는 우리에게 다소의 숨통을 열어주는 자세로 대화체로 여유와 박진감을 가져다 준다.( 이 시점에서 홉스 봄이 그리운 것은 왜 일까? ) 또한 간간히 사물, 풍경, 즉 서정성 깃든 문장을 곳곳에 던져 놓으므로써 익숙지 않은 그림들에 대한 당황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칭키스칸의 생애’를 읽기전에 다른 시각에서 쓴 ‘칭기스칸’을 먼저 읽어보았다. 일종의 칭키스칸에 대한 인물 해설서 성격의 책이었다고 본다. 책의 구성이나 내용 면을 떠나서 ‘칭키스칸’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하다고 생각된 지라 어느 정도의 밑그림을 들고 그뤼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기본적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역동성과 현장성, 그리고 사실성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부족간에 쫓고 쯫기는 생활의 연속, 광활한 대지 앞에서 ‘신’의 존재보다 ‘인간’의 존재가 한 수 위에 놓여있는 듯한 세계였다. 이는 몽골 초원의 생활사가 그러함인지 아니면 그뤼세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읽기에는 다소 힘들었다.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 또한 언제 영역을 빼앗길지 모르고 또 언제 내 ‘색시’가 적군의 품안에서 놀지를 모른다. 내가 마음이 편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뤼세의 이야기 솜씨가 탁월하며 긴장과 여유를 적절하게 배분하고 있다는 증거다 . 다만 그뤼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손지도 정도는 들고 이야기를 시작함이 현명한 판단이라는 생각을 했다. 초원의 생활사에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른 초원을 하루밤에도 수십, 수많킬로를 달리니 마음의 지도는 그릴 여유가 없었다. 지나친 요구일지는 모르지만 이야기 중간중간에 지도를 곁들어 주었다면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한층 도움이 되었겠다. 아울러 수많은 부족들의 얽힘의 관계, 나아가서 인물들의 얽힘도 간단한 도표나 엮음으로 나타내는 배려가 있었다면 역사와 지역과 인물이 한데 어우러져 좀 더 여유있고 열린 시각에서 ‘칭키스칸과 초원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눈과 귀가 그뤼세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마음은 콩닥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초원의 사람들이 잠시의 긴장을 늦추지 못한 것처럼 나의 가슴이 지속적으로 콩닥거렸던 것은 결코 그뤼세 탓은 아니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생활사와 자연이 자연으로 다가가지 않고 생존을 위한 탈환의 장으로 각인되고 있는 초원의 삶을 살고 있는 수많은 선조를 비롯한 동시대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발동했음이다.
그뤼세는 영리했다. 그 영리함은 약삭바름이라는것에 편승하지 않고 ‘책임감’과 ‘즐거움’을 적절하게 분산하는 지혜로 작동했다. 자칫 ‘야만인의 역사’ 라고 던져버릴 수 있는 몽골 초원의 역사를 ‘객관성’과 ‘사실성’에 충실한 이야기를 써 나간 역사학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쉬지 않고 내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은 그의 이야기 솜씨가 훌륭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이리라.
IP *.114.56.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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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03 11:56:20 *.249.167.156
책을 읽으며 가슴을 콩닥거리는 정희 누님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칭기스칸은 참 거칠었죠. 이제 가쁜 숨을 돌리고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7월입니다. 갈수록 누님의 글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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