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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일 11시 09분 등록


언어의 장벽을 느끼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영어로 된 자료를 읽는 것 만으로도 숨이 찰 노릇이지만, 찾고 있는 자료가 영어 이외의 언어로 되어 있다면 일단 찾아볼 수 있는 가능성 자체부터가 차단된다. 꽤 많은 경우 영어문화권의 풍부한 자료로 갈증을 해소하곤 하지만 지난 '자크 아탈리'에 이어 르네 그루세(René Grousset)처럼 프랑스 사람에 대한 자료를 찾는 것은 영어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문제였다. 한참 동안 인터넷을 뒤적였지만 위키페디아(Wikipedia, 무료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간단한 약력을 찾아낸 것이 전부였다. 이것만으론 저자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다른 연구원들에게 SOS를 날려봤지만 다들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불어를 할 줄 아는 유일한 재원, 오윤마저도 별다른 자료를 찾을 수 없다고 하니 포기해야 할 듯 싶었다. 이번 과제의 저자 조사는 간단하게 약력만 적는 선에서 마무리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책 본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보니 '해설'이란 제목으로 덧붙여진 글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번역자가 쓴 글인 듯 한데, 이 부분을 읽어 나가다 보니 한숨이 새나왔다.

이 '해설'에는 르네 그루세(René Grousset)의 생애와 작품 활동 그리고 몽고사 연구에 대한 참고 자료들까지 잘 정리되어 있다. 결국 여러 시간 인터넷을 헤매며 르네 그루세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우리집 처마 밑에서 그를 발견한 셈이었다. 아쉬웠지만 한편 다행스러웠다.

다음은 책에 실린 '해설' 부분을 모두 옮겨 놓은 것이다. 몇몇 문장의 오류를 고치고 어색한 부분을 다듬었다. 내용을 요약하는 것을 고려하였으나 이 책, 《칭기즈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내용이어서 요약하는 대신 관련된 내용을 묶고 별도의 제목을 붙였다.

르네 그루세(René Grousset)의 생애

르네 그루세는 금세기에 가장 뛰어난 동양학자로 손꼽히는 프랑스의 역사가이다. 그는 1885년, 남프랑스의 오오베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의 대학 강사로 그루세가 태어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몽펠리에의 대학에서 역사와 지리의 학위를 얻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인해 교직에는 있지 않고 1912년부터 예술성의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르네 그루세는 전쟁이 끝나자 다시 직장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저서를 발표했다. 1925년에는 동양관계의 미술품과 자료를 모으는 기메 박물관(장차 루브르 박물관의 동양부 부관장)이 되었다. 그 뒤 《주르날 아시아틱(아시아 신문)》이라는 정기간행물의 편집장으로서 동양학의 모든 분야의 전문가와 사귀면서 연구성과를 차례로 발표했다.

1928년에는 루브르 학교의 인도학 교수를 맡았고, 1929년에서 다음 해에 걸쳐 시리아와 이란을 여행했다. 1933년에는 역시 동양 관계의 체르느스키 박물관 관장을 겸직했다. 1941년에는 국립현대 동양어학교 교수, 1944년에는 국립박물관 관장 등 주로 동양과 인연이 있는 여러 직책을 지냈다. 1946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혔다.

르네 그루세는 1952년 67세의 생애를 마친, 금세기에 손꼽히는 프랑스가 낳은 역사가이며 몽고의 역사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이다.

르네 그루세(René Grousset)의 작품들

그루세의 작품 목록을 보면 그 분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서만도 40권에 이르고 그 밖에 잡지 논문, 강연 기록 등을 합치면 100권에 이른다. 그의 주요 작품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시아의 역사》(전3권), 1922년
1. 오리엔트, 2. 인도와 중국, 3. 몽고 세계와 일본
《동양 철학의 역사》, 1922년
《동양의 문명》(전4권), 1925~1930년
1. 오리엔트, 2. 인도, 3. 중국, 4. 일본
《극동의 역사》(전2권), 1929년
《불타의 사적을 찾아》, 1929년
《인도 철학》, 1931년
《십자군의 역사》(전3권), 1934~1936년
《극동의 미술》, 1936년
《초원지대의 제국》, 1939년
《몽고 제국》, 1941년
《중국의 역사》, 1942년
《오리엔트 제국》, 1946년
《역사의 결산》, 1946년
《라르메니아 사(史)》, 1946년
《희랍에서 중국으로》, 1948년
《선수(船首)의 상(像)》, 1949년
《인도에서 캄보디아와 자바로》, 1950년
《중국에서 일본으로》, 1951년

그가 다룬 소재를 보면 그의 학문의 영역이 동서고금에 걸쳐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양 관계의 것, 그 가운데서도 아시아 전통의 원시에서 현대에 이르는 분야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저서에서 종교, 철학, 정치, 군사,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등 인간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 예술에 대한 것은 더욱 관심이 깊었다. 그는 역사가로서 아주 이상적인 타입의 학자일 뿐만 아니라 박식하고 집념이 대단했으며 기억력과 판단력, 전문가와 종합가, 사상가와 예술가 등등의 원숙한 기량과 도량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르네 그루세(René Grousset)의 학문 세계

그루세가 아시아의 역사에 뜻을 두게 된 주요 동기는 서양의 역사가 유럽 중심으로 흘러서 아시아에 서로 대응할 수 있는 위치를 주지 않고 있다는 것, 그 때문에 유럽 자체의 지위와 역할도 분명치 않다는 점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동양 연구에서 서양의 우월성을 확인한 것도, 서양의 헤게모니가 동양에 빼앗겼을 때의 후일에 대비한 것도 아니다. 오직 아시아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미지의 것을 아는 기쁨,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같이 하려는 벅찬 마음을 그는 항상 지니고 있었다.

그가 "우리들은 동양을 배움으로써 서양을 보다 잘 알 수 있을 것이요, 서양을 배움으로써 동양을 보다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는 오직 하나이다"라고 설파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아직 젊었을 때만 해도 프랑스는 동양학에 대해서 전통이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 영역에 갇혀서 다른 분야의 연구에 대해 일체 교류하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그루세가 맨 처음 저서를 세상에 내놓자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으면서 대담한 청년의 장래에 크게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그들은 젊은 모험가가 발견한 개개의 사실이 전체 속에 확고한 위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루세가 최초로 동양과 서양을 동등한 자리에 놓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문화를 소중히 여긴 사람, 모든 문화의 밑바탕에 종교와 사상을 간파하는 사람으로서 아시아에서 특히 인도와 중국에 마음이 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지중해권, 인도권, 중국권의 문화는 역사가 그루세의 세 가지 유매니즘(고전 연구)이었다. 그런데 이 밖에 네 번째 지역이 남겨져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북극 아래에 가로놓인 유라시아의 초원지대로, 이 초원과 사막과 오아시스 지대를 아시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본래 이 지역에 대한 서양인의 관심은 강했다.

유럽은 '실크 로드'의 혜택을 직접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목민의 침략도 당했다. 러시아 같은 나라는 몇백 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았고, 그들의 통치 영향은 제정시대부터 소련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대는 역사가 카베냐크(cavaignac)도 말한 바와 같이 '남부의 대문명에 비해 항상 미끄러지고 귕구는 각오를 요하는 거대한 빙하'였다. 유목민은 역사에 남은 것만으로도 1300년의 기간에 걸쳐 동서의 정착 문명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이른바 침략과 야만의 진원지였지만, 오랜 동안 문자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 활동력이 가장 왕성한 시대에는 내부의 기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지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문자를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가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목이라는 생활 조건을 위해 유적도 남기지 않았다. 칭기즈칸마저도 죽을 때까지 문맹인이었다. 몽고제국의 수도가 되기 전에도 옛 몽고 왕국 이전에 정착 문화의 꽃을 피울 가능성이 있었던 카라코룸(KaraKorm), 그곳도 과거의 영광을 전하는 것은 오직 한 덩이의 거북돌에 지나지 않는다.

그루세는 이 '빙하'에 몇 차례고 도전했다. 최초의 《아시아의 역사》를 비롯하여 《초원지대의 제국 - 아치라, 칭기즈칸, 타메루란》(1939년 초판, 1952년 개정 3판)은 초원지대 그 자체의 기원으로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유목민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더듬는 것으로,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해 지금도 '표준이 되는 지침서'로 간주되고 있다.

초원지대가 내부의 기록이 아주 적은 사실은 외부의 기록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서에 걸친 여러 민족의 언어, 풍습, 역사에도 해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루세와 같은 역사가만이 처음으로 이뤄놓을 수 있는 일로 선배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의 힘에도 크게 의지했다.

펠리오는 돈황의 유문 발견자로서 알려진 몽고 의학의 권위자이지만 중국어, 터키어, 티베트어, 페르시아어 등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의 언어를 자유로이 쓸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칭기즈칸 시대에 대해서는 그루세에게는 밀접한 협력자이다. 단, 이 《초원지대의 제국》은 6백 페이지가 넘는 대작이지만 그 가운데 칭기즈칸에 대한 부분은 불과 80여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루세는 2년 뒤 《몽고 제국》에서 칭기즈칸의 시대에 초점을 맞췄다. 이것은 먼저 인용한 그리스 사가 카베냐크가 편집한 《세계사》(22권, 1922년~1948년)의 일부를 이룬 것으로, 제8권 《중세의 인도, 중국, 몽고인》 가운데 '몽고 제국'은 다시 그루세가 분담하는 제1기와 다른 학자의 제2기로 나눠지지만, 그루세가 저술한 것만도 6백 페이지에 가까운 대저이다. 여기에는 12세기의 옛 몽고 왕국에서 쿠빌라이의 치세까지, 칭기즈칸의 일대기가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칭기즈칸》과는 중복되는 곳이 적지 않지만 《몽고 제국》에서는 모든 자료와 원전의 번역을 비교 검토하면서 사실 또는 사실과 귀납, 연역되는 곳을 할애하고 있다. 이 책의 본문 각 페이지마다 수없이 끼워넣고 있는 각주, 더욱이 권말에 덧붙여놓은 150페이지 이상의 '비고와 참조'를 읽으면 주로 금세기의 유럽에 쌓아놓은 몽고학, 칭기즈칸 연구의 놀라움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그 같은 착실한 고증, 실증 아래 정리해놓은 일이 얼마나 대단한 노력과 치밀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루세는 문자 그대로 한 자, 한 문장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 그야말로 발음되지 않는 철자의 유무에 관한 것까지 저울질해가며 음미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 일을 그에게 부탁한 편찬자 카베냐크가 먼저 혀를 내두르며 놀랐다는 것이다.

칭기즈칸 시대의 중세 몽고어는 이미 없어진 말이여, 고유 명사의 호칭에도 하다못해 많은 원전과 사본에 따라 다른 점이 있다든지, 동일한 것이라도 전후에 이미 이동이 있다. 지명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연구가가 아무리 실제로 답사해보아도 당시 지명의 현재지를 찾아낼 수 없는 곳도 있었다. 그것을 논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미궁으로 들어간 사건을 추궁하는 것 같아 결정적인 단안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후 같은 제목에 접하는 역사가가 이 책을 그냥 대충 읽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루세는 3년 후에 세 번째의 책을 저술했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칭기즈칸》이다. 분량은 먼저 낸 책의 반 밖에 되지 않지만 주인공의 일대기에 한해서, 고증과 주석 같은 대목은 거의 빼놓았기 때문에 이야기 거리로서는 이 책이 가장 자상한 칭기즈칸의 전기인 셈이다. 이 책은 일반인을 독자로 쓰여졌는데, 일반용이라는 것이 레벨을 낮춰서 쓴 것이 아니라 이 책이 가장 칭기즈칸과 그의 시대를 부각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용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역사에 흥미를 가진 독자라면 틀림없이 재미있게 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르네 그루세(René Grousset)의 《칭기즈칸》에 이용된 자료들

이 책에 이용된 자료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해둔다면, 칭기즈칸에 관한 근본 자료는 몽고 자료, 중국 자료, 페르시아 자료의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셋 다 동시대의 기록은 아니고 몽고 왕조의 지배하에 조종의 위업을 찬양하는 뜻에서 엮어진 것이지만, 각기 과거에 몽고인의 정복으로 은혜를 받았거나 짓밟혔거나에 따른 다른 점이 있다고 인정된다. 그 같은 일은 이 책의 전반과 후반의 호라즘 정벌 내용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분명할 것이다. 낱낱의 기술, 연대 등 세목에 다른 점은 있지만 그래도 대강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나 사실을 전하려고 한 것에는 틀림없다.

몽고인의 오랜 자료로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것은 한역명(漢譯名)이 《원조비사(元朝秘史)》라고 불리는 것뿐으로, 이것은 적어도 칭기즈칸을 직접 아는 사람들과 같은 시대의 미지의 작자에게 엮도록 한 것인데 1240년과 1252년에 기록되었다. 몽고어의 원전은 일찍이 없어졌고 1370년의 한역서밖에 전해오지 않는다. 그 역자는 한문 옆에다 향찰과 같은 문자로 한문과는 별도로 표기해놓았지만 몽고문의 발음을 정확히 번역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세기 몽고 학자의 일은 향찰과 같은 한자 발음 아래 최초의 몽고문을 재발견해 그것을 현대어로 번역한다는 참으로 귀찮은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즈네프라고 하는 러시아 인이 손을 댄 뒤 펠리오가 본격적으로 달라붙어서 1920년과 1925년의 《아시아 신문》에 부분적으로 번역한 것을 발표했다. 그 후 그 것과는 별도로 독일의 헤어니슈도 1931년과 1933년에 부분적으로 번역을 시작한 뒤에 1937년에도 원문 전체의 복원, 1941년에는 전체를 번역해서 간행했다. 그러나 이것도 즉시 펠리오에게 잘못된 점을 지적당해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펠리오는 그 작업을 3분의 2 이상 마친 뒤에 죽었는데 나머지는 제자인 앙피스가 이어받았으며 현재로서는 학문적으로 이 책이 가장 믿을 만한 번역이다.

그리고 그루세가 저술한 이 책의 단연 돋보이는 점이라면 파라데이우스, 헤어니슈, 펠리오가 저술한 내용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원문을 의역하거나 줄이고 설명과 묘사를 보충하면서 본질적인 부분만을 현대의 독자에게 전하려고 애쓴 것이다.

《원조비사》는 회랍과 인도의 서사시에도 걸맞는 대문학이지만 칭기즈칸의 전반생을 알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사료이다. 도오손이 쓴 《몽고사》의 치명적인 결함은 이 내부적인 기록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사》가 말할 수 없는 부분은 몽고 국내의 일로서 칭기즈칸이 외정(外政)을 한 뒤부터는 바깥쪽의 기록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중국 자료는 원조(元祖)의 정사인 《원사(元史)》가 주로 인용되었는데 이것은 1369~1370년,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흥할 무렵에 꽤 서둘러서 편찬된 것이다. 이 책은 연대와 사건을 늘어놓은 종류의 무미건조한 사서이지만 거기에도 큰 이용가치가 있다. 그 밖에도 《황원성무친정록(皇元聖武親征錄)》은 잃어버린 몽고 자료에서 1263년경에 한역한 것으로, 같은 자료는 페르시아의 라시이트 우쓰데인에게도 이용되었다.

페르시아 자료로서는 주와이니의 《세계의 정복자의 역사》(1257)와 라시이트 우쓰데인의 《집사(集史)》(1303) 두 가지가 주요한 것으로서 라시이트의 이름은 이 책에도 가끔 나타난다. 몽고조의 칸을 섬긴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그는 칙령에 의해 이 《집사》를 편찬했다. 그는 이미 근대적인 의미의 역사가로서 백성을 잘 다스리도록 객의 자료를 정리했다고 한다.

이상 외에도 역시 본문 중에 가끔 보이는 사난 세치엔은 훨씬 뒷 세대의 인물로서 1662년경에 《몽고사》(한역명 《몽고원류》)를 저술한 몽고인으로, 이 책은 사실보다도 후세의 칭기즈칸 전설을 알기 위해서 버리지 못할 가치가 있다.





"주르치에트 족은 쉽사리 넘어뜨릴 수 있다. 그들은 윗자리에서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p. 23)

"나의 경우를 교훈으로 삼아라. 반드시 나의 원수를 쳐라! 활을 당기는 너희들의 손톱이 깡그리 문드러져도, 열손가락이 모두 문드러져도 꼭 나의 원한을 풀어다오." (p. 33)

바루 헤브라에우스는 에베도 이에스 대사교가 이라크의 바그다드에 있는 네스토리우스 파의 총주교였던 요하네스(Johannes) 5세에게 보낸 편지(1009년)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2천명의 유목민이 왕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
문제는 바루 헤브라에우스가 훗날 케레이트 왕녀들의 피를 받은 칭기즈칸의 자손을 즐겁게 하기 위해 케레이트라는 이름을 뒤에 적어 넣지 않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p. 43)

마르구즈의 미망인 미녀 쿠토우쿠타이 이리쿠치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로 맹세했다.
그녀는 이 사건을 운명이라고 체념한 것처럼 위장하고 타타르인의 두목을 cㅏㅈ아가 신하로서 예를 다하겠다는 증표로 백 개의 가죽부대를 바쳤다. 가죽부대는 구미즈(말젖을 발효시킨 술로 유목민들이 즐겨 마심)를 담은 것인데 사실은 부대 속마다 병사를 숨겨두었던 것이다.
타타르의 두목은 아름다운 여자손님을 극진히 대접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한참 흥에 취해 있을 때 갑자기 부대에서 뛰어나온 백 명의 케레이트 병사는 적의 두목을 비롯해 현장에 있던 많은 왕족을 모조리 죽이고 말았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아라비안 나이트》 한 도막을 몽고풍으로 고친 것이다. (p. 45)

예스게이의 죽음, 그 고통과 가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임종의 비통한 외침은 훗날 칭기즈칸이라 불리게 될 테무친의 전기에 첫째 장을 이룬다.
여기서 몽고의 시인이 읊었던 약간의 감동은 지금도 독자의 가슴에 전해지고 있다. 그 얼마나 무서운 조건 밑에서 세계의 정복자는 인생을 배워야만 했던가를! (p. 55)

테무친은 훌쩍훌쩍 울면서 자기 신변을 지켜주려고 애쓰는 최후의 가신(家臣)이 죽어가는 막사를 나왔다. 훗날 그의 정치적인 모든 행위에는 강철같이 거센 사회에서 단련된 어린 시절의 교훈이 반영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라카 노인이 죽어가는 앞에서 어린 테무친이 흘린 눈물에 대해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인간다운 애정과 인자함의 발로는 미래의 칭기즈칸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처음으로 나타내고 있다. (p. 59)

"서로의 신뢰를 언제까지나 굳게 지켜가거라. 피차 무례한 말로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p. 76)

테무친의 신부 부르데는 훗날 칭기즈칸에게 큰 힘이 된다. 부르데는 몽고 여인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인 네 명의 튼튼한 아들을 낳았다. 뿐만 아니라 항상 사리판단이 정확했고 남편을 위한 훌륭한 조언자이기도 했다. 칭기즈칸은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시기마다 선택에 고민할 경우 부르데의 의견을 따랐다. 그녀의 의견은 선견지명이 있었고 또 결정적이기도 했다.
이 무서운 정복자도 아내 부르데에게는 한결같이 경의를 표하곤 했다. 그러나 모든 우두머리처럼 그도 둘째, 셋째 부인을 맞아 들였다. 경우에 따라 부르데를 고국에 남긴 채 첩을 먼 싸움터로 데리고 가는 일도 있었으나 칭기즈칸의 유산을 받은 사람은 부르데의 아들뿐이었으며 부르데만이 모든 사람의 위에 앉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부르데가 메르키트족에게 아홉 달 동안 납치되어 임신한 몸으로 집에 돌아온 후에도 손상되지 않았다. 부르데는 이 정복자의 기적적인 승리의 서사시에서 왕후로서 크게 존경을 받는다. (p. 79)

이때 테무친의 호소는 12세기 유럽의 봉건 귀족이 같은 사정에 쫓기어 종주의 봉건 군주에게 매달린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메르키트의 세 부족이 갑자기 나타나 집사람을 유괴했습니다. 오오, 우리의 왕이시여, 나의 아버님이여, 바라옵건대 빼앗긴 자들을 되찾기 위해 저희에게 힘을 내리시옵소서!"
그에 대한 토구리루의 대답도 유럽의 봉건 사회에서 있었던 왕의 대답과 같다.
"나는 그대의 아버지 예스게이의 신세를 입은 것을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대의 오늘의 소망은 그대가 검은 수달피 가죽옷을 선사하러 왔을 때 이미 약속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우리들은 설사 모든 메르키트 인을 상대로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대의 부르데를 되찾을 것이다!" (p. 88)

부르데는 메르키트 족 진영에 사는 동안 임심을 하여 남편 곁으로 돌아오자 곧 주치라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는 정식으로 칭기즈칸의 장남으로 인정되지만 항상 남의 말을 좋아하는 패거리들은 치루게르의 아이일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 같은 미묘한 문제에 대해서도 칭기즈칸이 아내를 원망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하기사 메르키트 족이 침입했을 때는 젊은 아내를 아주 간단하게 버리고 도망치고선 이제 새삼스레 그 일을 탓하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p. 92)

"산허리에서 자면 말지기가 득을 보고, 강가에서 쉬게 되면 양지기가 좋아할 것이다."
몽고인은 대개의 원시인들이 그러하듯 비유나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기를 좋아했다. 테무친은 자무카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p. 97)

테무친은 아내의 인견에 찬성해서 곧 그대로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우리들은 훗날 칭기즈칸이 될 사람의 재미있는 성격의 일면을 접하게 된다. 중요한 전기를 맞아 큰 결단을 내리게 될 때 그는 매번 주저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아내 부르데가 남편 대신에 결정을 내리는 처지이고 남편은 아내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맡겨버렸다. (p. 97)

칭기즈칸은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정당한 원한도 잊어버리는 인물로, 새로 가맹한 자와 예전부터의 충신을 모두 모아 오논 강기슭에서 크게 주연을 베풀었다. 이처럼 칭기즈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그를 적으로 두기보단 보호자로 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할 만한 실력을 그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p. 107)

온칸은 며칠 전에 졸렬하게도 자기가 배신했던 칭기즈칸에게 다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칭기즈칸은 도와주는 것을 미끼로 복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온칸의 청을 받자 그는 곧 심복인 보오르주, 무카리, 보로크루, 치라운에게 도와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p. 121)

유목민들은 복수심을 채우고 빼앗은 물건을 서로 차지하려고 누군가 뛰어난 대장의 권위에 일시적이나마 복종하긴 하지만 평화롭게 마무리되는 일은 드물었다.
그 대장이 아주 훌륭한 인물이든가 혹은 칭기즈칸처럼 부하를 잘 이끄는 지도자가 아닌 바에야 오합지졸로 뭉쳐진 대중은 목적을 이룬 즉시 자유롭게 방종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p. 164)

미녀 쿠란의 처녀 테스트(?) (p. 191)

교권(敎權)과 정권(政權)의 대립 (p. 218)

그 후 9년 뒤에 그 고장을 지나던 도교(道敎)의 선인(仙人)인 구장춘(邱長春) 일행은 땅바닥이 아직도 백골에 뒤덮여져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p. 235)

북경 정부는 하북성에서 그랬듯이 농민을 성곽 도시로 피난시켰다. 그러나 몽고군은 잔인한 수법을 써서 성을 공략하거나 이웃 지역의 농민들을 포로로 잡아 성을 공격하는데 앞잡이로 이용했다. 중국인은 돌격해온 종대 대열의 선두에 선 동족의 처절한 모습을 보고 차마 활을 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자대로 난공불락의 몇몇 성을 제외하고는 도시다운 도시는 모조리 함락당하고 말았다. (p. 241)

전해에는 철통같은 대도시의 공격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적의 진영이 혼란해지고 또 북경 수비군의 일부가 없어진 것을 확인한 그는 어려운 공성전을 주저하지 않았다. (p. 243)

몽고인의 습관으로 잘나 그는 도시경제(都市經濟)라는 것을 전혀 몰랐고 따라서 도시를 정복했지만 그것을 파괴하는 일 밖에 몰랐던 것이다. (p. 244)

그(이에리우치우쓰아이)는 후년에 칭기즈칸의 아들에게 직언하기를 '제국은 말(馬)로써 정복되었다'고 하지만 '말로 다스릴 수는 없다'고 하고 있다. (p. 249)

쿠출르크의 압정을 받고 있던 주민은 무서운 몽고군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던 모양이다. 다른 고장에서는 "신벌(神罰)"이라고 두려워했던 몽고군도 여기서는 해방군으로 받아들여졌다. (p. 257)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몽고인의 세계와 이슬람 교도의 세계는 아시아를 둘로 나누어 창과 칼을 부딪히게 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서 몽고인이 많은 잔혹행위를 범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몽고 제국이 보낸 대상과 사절을 까닭 없이 처형함으로써 정복자의 가슴에 노여움이 불타오르게 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p. 264)

원정이 길어질 것을 예상해 그는 여러 전장의 위로 상대로 후궁인 미녀 쿠란을 동반했다. (p. 271)

시민 중에 한 노파가 죽기 전에 자신을 살려준다면 아름다운 진주구슬을 주겠다고 외쳤다. 몽고 병사는 구슬이 있는 곳을 물었다. 노파는 삼켜버렸다고 했다. 그러자 노파는 즉석에서 살해되고 배를 가르게 되었다. 그리고 칭기즈칸은 다른 사람들도 구슬을 삼켰을지 모르니 이미 죽은 사람들의 배를 갈라보라고 했다. (p. 293)

칭기즈칸은 이슬람교에 대해 애초부터 적대감 따위는 없었다. 그의 경우도, 또 그의 장병의 경우도 그의 대상과 사절을 학살한 죄인에게 벌을 내렸을 뿐, 우리들이 '무역의 자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침해와 인권의 유린을 응징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그의 사위나 사랑했던 손자의 죽음에 대해 해를 입힌 무리들에게 철퇴를 가하기도 했다. 그는 몽고식의 원시적인 징벌을 가했던 것으로서 그와 같은 소행은 원시인인 몽고 사람이 알고 취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 309)

《노자(老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시간 이전에, 언제, 어느 곳에서도 스스로 존재한다. 영원하고, 무한하며, 완전한 것이 있었다. 그것을 이름 붙일 수는 없다. 인간의 말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밖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초의 존재는 느낄 수 있는 세계와 형태를 이룬 세계를 본디부터 초월하고 있다. 신비라고 불리는 것이다."
명상에 의해 그에 동화되는 선인 또는 진인은 만물을 움직이는 무명의 힘에 의해 이어진다. 그는 우주에 합일된다.
"번갯불이 산에 떨어지더라도, 폭풍우가 바다를 뒤엎어도, 선인의 마음은 흩어지지 않는다. 선인은 대기와 대운에 몸을 실어 해와 달에 걸쳐 공간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있다." (p. 312)

장춘은 도교의 선인을 특색 있게 나타내는 독립 정신에서(중국에서는 도교의 스승에 대해서 군주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은 면제되어 있었다.)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히는 정도로 예를 다할 수 있는 사실을 진언했다. 칭기즈칸도 그와 같은 철학자의 독립 정신을 쾌히 받아들였다. 재미난 일은 그 점에서도 야만인의 정복자 쪽이 알렉산더 대왕보다 늘름했다. 알렉산더의 스승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카리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 인을 아시아 풍으로 조아리고 '우러러보는 일'을 거절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그의 총애를 잃고 마침내 처형된 것이다.
칭기즈칸은 도리어 그를 존경하고 몽고인이 아주 즐기는 말젖술을 다정하게 권했는데, 장춘은 종교상의 계율울 이유로 이것을 굳이 사양했다. (p. 321)

"사내로 태어난 무상의 즐거움을 적의 패거리를 때려부수고 그 뒤를 쫓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빼앗고, 그들과 친한 자들이 눈물로 얼굴을 적시는 광경을 보고,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그들의 딸과 아내를 안아보는 일이다." (p. 327)

"독수리는 높은 나무의 꼭대기에 집을 짓지만 너무 먼 곳으로 날아가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리면 아주 연약한 새에게도 알과 새끼를 잡아 먹히고 맙니다." (p. 328)

칭기즈칸은 한 달에 세 번밖에 취하지 않는 것을 예의바른 행동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두 차례에 그치면 그편이 좋고, 한번만이라면 더욱 좋은 일이다. 한 번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터인데 몸이 건장한 사나이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런지. (p. 340)

"내 자손은 금빛 찬란한 옷을 입을 것이리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뛰어난 군마를 타며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여자들을 팔에 껴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누구의 덕택인줄도 모르면서……"



생명력이 넘치는 역사 그러나 어디까지가 역사인가?

책은 검증된 사실에 기반을 둔 역사라기 보단 몽고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로 시작된다. 문자를 가지지 못했던 몽고의 역사를 되짚어가는 과정에서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조금은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시작한 책의 전반부는 싱싱하게 살아 움직인다. 인물들은 하나하나 날카로운 묘사 아래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들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처럼 사실적이다. 사건 하나하나는 먼지 덮인 역사책 속의 잊혀진 것이 아니라 마치 '가자, 아메리카로(We, the people)'의 그것들처럼 생명력이 넘친다.

그러나 여기에도 아쉬운 점은 존재한다. 이 책, 《칭기즈칸》은 역자가 책의 말미에 있는 '해설'에서 언급한대로 《원조비사》, 《몽고사》, 《원사(元史)》, 《황원성무친정록(皇元聖武親征錄)》, 《세계의 정복자의 역사》, 《집사(集史)》 그리고 《몽고원류》 등을 토대로 씌어졌는데, 그 중 《몽고원류》는 역사서라기보다는 전설을 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따라서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한 부분의 원전이 표시되지 않은 경우 역사인지 혹은 전설인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책은 재미있지만 역사와 꾸며진 이야기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이 부분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고증이나 주석을 빼고 이야기 중심으로 이 책을 구성하였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책에 서문이 없기 때문에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야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 책의 본래 의도가 나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미리 알았더라면 '좀더 즐겁게 책을 즐길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운 마음이다.

책의 구조에 대해서 - 1부, 2부는 왜 나눴을까?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시기적으로 몇 개의 큰 구분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은 책에서 분류한 것처럼 제1부에 해당하는 칭기즈칸의 조상들에 대한 부분이다. 제2부로 분류된 큰 덩어리는 '칭기즈칸의 성장기', '몽고의 통일기', '페르시아 정벌', 마지막으로 '귀향 그리고 최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보다 더 세부적으로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기존에 제1부와 제2부로 무성의하게 나뉘어져 있는 책의 구조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독자로 하여금 책의 전반적인 흐름을 읽고 전체적인 구조를 좀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책의 목차와 구성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너무 어려운 인명, 지명, 어떻게 좀 안되겠니?

'이에리우치루크'나 '투르키스탄의 바루크 지방'처럼 그다지 중요도가 높지 않은 인명이나 지명은 말할 것도 없고, 칭기즈칸의 측근들 이름도 책의 중반을 넘어 종반에 이르도록 계속 헛갈린다. 외우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던 탓도 있겠지만 애초부터 익숙하지 않은 발음과 모양의 이름들을 줄줄 외우길 기대했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이 외우기 쉽지 않은 이름들이 중간중간 끈질기게 맥을 끊는다는 점이다. 물론 독자에게 '정신 똑바로 차려라'고 고함을 칠 수도 있겠지만 좀더 친절한 방법은 없는 걸까?

주말에 동생을 만났는데, 요즘 도스토에프스키 전집을 읽고 있다고 한다. 몽고 사람들 이름이 외우기 힘들다고 불만을 토로하자 러시아 사람 이름도 만만치 않다고 응수한다. 그래서 읽고 있던 책을 잠시 들여다 보았더니 눈이 팽팽 돈다. 몽고 사람 이름은 거기에 비하니 쉽게 느껴질 지경이다. 그런데 동생이 조그만 카드 같은 것을 내민다. 무엇인고 하니,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간단한 설명을 정리해놓은 책갈피다. 아마도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비슷한 문제에 시달린다는 것을 눈치 챈 출판사의 배려인 모양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꼭 똑같은 책갈피는 아니더라도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들어지는 책'이라는 개념은 꼭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지도라도 한 장 있었다면...

기마부대를 이끌고 대륙을 휩쓴 몽고인의 정복을 살펴보면 그러한 전쟁과 승리가 대단히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이 놀라운 기동력을 쫓아가는 독자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새로운 지명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데다가 하나같이 낯설고 발음하기도 어렵다. '역사, 위대한 떨림'이나 '가자, 아메리카로'에 적절히 등장하던 지도의 부재가 안타깝다. 머리 속으로 공간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단절을 의미하고, 이런 단절은 저자와 독자 간의 의사 소통을 방해한다.

일반인을 위한 '칭기즈칸'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여느 역사책과 마찬가지로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겐 여전히 어렵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일까. 읽는 내내 스스로의 무지를 탓해야 했지만, 다른 책들에 풍부한 자료가 제공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저자의 독자에 대한 배려가 아쉽다.

서문의 부재 = 길잡이의 부재?

지난 역사의 달에 이기백 교수님의 《한국사신론》을 읽으면서 잘 쓰여진 서문이 글 전체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형성하는 것을 경험한 이후로 서문은 저자와 대화를 시작하는 통로로써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애석하게도 이 책, 《칭기즈칸》에는 저자인 르네 그루세(René Grousset)의 서문이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 바람에 나는 책을 읽어 나갈 마음준비를 적절히 하지 못했다. 이 책의 목적이 무엇이며, 누구를 대상으로 쓰여진 것인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책을 읽고 보니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책을 다 읽은 후에 역자의 '해설' 부분을 읽으면서 몇몇 오해가 풀렸다는 점이다.

좋은 서문은 독자에게 책을 읽어 나가는 내내 길잡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저자의 의도가 왜곡되지 않도록 하고, 때때로 만나게 되는 석연치 않은 구석에서조차 독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협상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구본형 선생님께서 연구원 과정의 말미에 서문을 쓰고 다듬는 시간을 왜 그렇게 비중 있게 배치하셨는지 이제 좀더 이해할 수 있다.

마무리

이 책은 역자가 '해설'에서 밝히고 있듯이 일반인을 위한 '칭기즈칸'의 재조명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아쉬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말았지만 《칭기즈칸》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위에 나열한 아쉬움들은 몽고 제국에 대한 르네 그루세의 다른 저서들로 적절히 보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중세의 인도, 중국, 몽고인》 중의 《몽고 제국》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고증 자료를 통해 이 책의 부족한 부분들을 충분히 메워줄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책을 읽기 전에 알았더라면 부족한 부분을 짚어가며 아쉬움에 손가락을 빠는 대신 좀더 느긋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장(智將)장이면서 용장(勇將)이고 그보다 앞서 덕장(德將)이었던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 그를 위한 인터뷰를 꼼꼼히 준비해야겠다.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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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군
2007.07.03 11:40:58 *.6.116.98
서문이 그런 역할을 하는군 .
서문을 책읽기전에 꼭 보는 편이긴 하나, 그러한 목적의식을 계속 유지하면서 책을 다 읽지는 않았던거 같으네. ^^

예전처럼 자주 들어오지는 못하지만, review를 늦게라도 읽고 가고 있어. (인생은 역시 타이밍, 늦은 덧글은 필요 없지? ^^)

꾸준함과 성실함을 본받으려 애쓰고 있음 !!
더운데 몸관리도 잘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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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03 16:13:24 *.249.167.156
어느새 연구원을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났네요. 일요일 저녁에 전화를 받고 많이 웃었습니다. 참 열심이구나, 해서요. 저 같으면 여기저기 찾아도 자료가 없으면 ‘뭐, 할 수 없지’, 그러곤 제 깜냥 내에서 해결할 텐데 말이죠. 그렇게 같이 가면서도 제각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건가 봅니다. 꾸준히 가시는 모습, 참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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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7.03 23:14:46 *.72.153.12
고민을 이야기로 결국은 풀어내는 구나.
대부분 그냥 그걸 덮어두거나 피해가는데 종윤은 그렇지가 않네. 그게 충실한 리류를 쓰는 힘인가 보다. 나 그거 건져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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