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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6일 01시 50분 등록
1.저자에 대하여

저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2006년판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
저자: 르네 그루쎄(Rene Grousset, 1885~1952)

프랑스의 Aubais에서 출생. 프랑스 아시아사 학계의 태두. Ecole des Langues Orientales에서 역사와 지리를 교수.
티베트, 인도, 이란, 일본, 중국 등지에서 연구. 파리에 있는 Cenuschi & Guimer 박물관장과 Journal Asiatique의 서기장을 겸임. 이 외에도 다수의 직위를 역임. 1946년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 1952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

저서로「아시아의 역사(Historie de l'Asie. 1922)」「동양문명사(Les civilisation de l'Orient, 1929-30)」「극동의 역사(Historie de l'Extreme-Orient, 1929)」「극동의 예술(LArt de l'Extreme Orient, 1936)」「초원제국( L'Empire des Steppes; 본 역서의 원서 1939)」「몽골제국사(L'Empire mongol, 1941)」「아르메니아사(Histoire de l'Armenie, 1947)」「중국과 그 예술(La Chine et son art, 1951)」 외 다수가 있다.

저자가 얼마나 다양한 관심을 가졌고 또 얼마나 정력적인 작가였는가를 금세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1946년에는 프랑스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저자의 이 책이 개설서이면서도 동시에 고도의 학문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빨리오(P.PElliot), 샤반느(E.Chavanne), 마스뻬로(H.Maspero), 발라즈(E.Balaz)와 같은 탁월한 동양학자들이 활약하던 당시 프랑스의 높은 학문적 수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루쎄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놀라운 종합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글은 출판된 지 지금까지 거의 반세기가 되어 가지만 유목제국사를 공부하는 초학자들의 필독서임은 물론 전문학자들까지 즐겨 인용하는 글이 되었다.
그루쎄의 이 책은 이제 중앙아시아 분야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분명히 평가받게 되었고, 어느 언어로 씌어진 개설서이든 아직도 이 글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p8

나는 이 위대한 야만의 민족들, 특히 앗틸라와 칭기스칸과 티무르라는 세 사람의 강력한 인물이 지배했던, 그들이 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종국의 변경지역에서 서구의 문턱까지 다다랐던 모습을 독자들의 마음속에 가져가려고 한다. p11


2. 본문의 내용들

2부. 칭기스칸과 몽골제국
5. 칭기스칸
12세기의 몽골리아
12세기 말의 아시아 지도는 다음과 같이 그려졌다. 중국은 남으로는 항주를 수도로 하는 한족의 제국 송과 북으로는 북경을 수도로 하는 여진(여직女直)의 퉁그스 왕국인 금으로 나뉘어 있었다. 오늘날의 오르도스와 감숙에 해당되는 중국 서북 지방에서는 탕구트족의 서하 왕국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계통상 티베트족의 서하 왕국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계통상 티베트인들과 연관되었다.
투르판에서 쿠차에 이르는 타림의 동북부에는 투르크인들이 살았다. ....... 그들은 무슬림 신앙과 아랍-페르시아문화를 가진 투르크족이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 대부분은 언어는 달라도 동일한 기후에서 동일한 방식의 삶을 살았고, 이 지역을 여행한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한 인종적 유사성들을 지니고 있었다. p281

징기스칸이 태어난 가문은 보르지긴Borjigin 씨족(obogh)의 키야트Kiyat 뼈(yasun)에 속하였다. 칭기스칸이 승리를 거둔 후 몽골부족들을 키야트와의 관련 여부에 따라 두 범주로 분류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전자는 니룬이었으니 빛의 아들 즉 순수한 자들이었고, 후자는 두를루킨Durlukin의 범주에 속하였으니 이들은 열등한 출신으로 간주되었다. p287

칭기스칸조의 전승이 그의 아버지 이수게이를 고대 왕통과 연결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전승은 특히 이수게이가 카불 카간의 둘째아들 바르탄 바아투르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수게이는 메르키트 수령의 젊은 아내 후엘룬Ho'elun을 납치해 결혼하였으니, 후엘룬은 테무진Temujin 즉, 칭기스칸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수게이는 죽기전에 어린 테무진을 콩기라트의 한 수령의 어린 딸과 약혼시켰다(몽골인들은 족외혼을 하였다). 1167년경 타타르인들은 초원에서 식사하는 이수게이를 독살하는 데 성공하였다. p 294

칭기스칸의 유년기
훗날 칭기스칸으로 불리게 될 이수게이의 장남 테무진은 1167년경 오논 강의 오른쪽 기슭에 델리운 볼닥 Deli'un Boldagh 지역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오늘날의 러시아(외몽골) 영토로서 대략 동경 115도 부근이다.
(주33 * Haenisch의 <몽골비사> 전사 p. 에는 Deli'un Boldag. 원조의 정사에는 칭기스칸이 1162년생이라고 되어 있지만 정통은 칭기스칸의 출생을 페르시아 사가들이 제시한 대로 1155년생으로 여긴다. 그러나 1938년 12월 9일 Societe Asiatique로 보낸 글에서, Pelliot는 중국문헌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자기로 하여금 1167년을 정복자의 출생시기로 받아들이게 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1227년에 사망할 때 칭기스칸은 겨우 60세였을 것이다.

같은 글에서 Pelliot는 몽골어 이름 테무진Temujin을 '대장장이'로 해석하는 것은 음성적으로 옳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역자] 불어본 본문에서는 칭기스칸의 생년을 1155년, 이수게이의 졸년을 1167년이라 하고 영역본은 칭기스칸의 생년을 1167년, 이수게이의 졸년은 바로 몇 줄 위아래에서 1167년이라고도 하고 1179년이라고도 함.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스칸의 탄신일은 1162년 5월31일이다.)

우리는 한인 조공趙珙과 페르시아인 주즈자니Juzjani로부터 칭기스칸의 외모에 대하여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칭기스칸은 키가 컸고 체격은 탄탄하였으며, 이마가 넓고 '고양이 눈'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수염을 길렀다. 유년기의 발앙, 매서운 추위와 숨막히는 더위에 대한 저항력, 비상한 참을성, 패배 후퇴 포로상태에서 부상과 학대에 개의치 않음은 모두 칭기스칸의 놀랄 만한 생명력을 입증한다.

칭기스칸의 육체는 청년기부터 더할 수 없이 한랭란 기후와 한없이 불확실한 환경에서의 단련으로 가장 가혹한 시련에도 길들여져 있었다. 테무진은 정신은 자기가 받았던 시련으로 인해 처음부터 담금질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를 철인鐵人, 세계를 놀라게 할 사람으로 만들게끔 되어 있었다.

테무진은 1167년경 겨우 열두 살쯤일 때 고아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가 통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여겨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다. 어머니 후엘룬 에케Ho'elun Eke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마지막 추종자들조차 테무진을 버리고 가축을 이끌고 떠나버렸다. 그렇게 친척에게 강도를 당한 소년은 어머니와 카사르Qasar 카치운Qachi'un 테무게Temuge 3형제, 그리고 이복동생들인 벡테르Begter 벨구테이Belgutei와 남았다. p295

어려운 시절을 만난 이 작은 무리는 헨테이 산맥(그 당시에는 부르칸 칼둔Burqan Qaldun으로 알려짐)에 있는 오논의 상류에서 사냥과 고기잡이로 연명해야 할 만큼 영락하였다. 보르지긴씨 수령으로서의 테무진의 지위는 타이치우트 씨족의 수령인 암바가이드의 아들들인 카르구타이 키릴툭 Targhutai Kiriltugh과 투두옌 기르테Todoyen Girte가 차지해버렸다. 따라서 그들도 1161년의 재난 이후 왕족의 지위를 상실한 사람들- 몽골의 칸 카이두의 후손들-의 계보에 속하였던 거시 거의 확실하다.

테무진은 자기보다 더 뛰어난 동생 카사르의 활솜씨를 이용하여 집안의 재산을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테무진에게는 이제 말이 9마리가 있었다!" 초원의 강도들에게 도둑맞았던 8마리의 말을 아룰라트씨 지도자의 아들인 어린 보오르추Bo'orchu의 도움으로 되찾았는데, 그때부터 보오르추는 테무진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었고, 훗날 테무진이 위대하게 되었을 때 가장 유능한 장군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p296

케레이트의 신하 칭기스칸
부르테는 곧바로 가정에서의 명예스러운 지위를 회복하였고 테무진은 얼마 후 부르테가 낳은 아들, 즉 공식적으로는 장남인 조치가 정말 자기 아들인지 아니면 메르키트 납치자들 가운데 칠게르 부쿠Chilger Boko의 아들인지에 대한 것을 결코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치의 출생과 관련하여 드러내놓고 이야기되지 않는 의심으로 인해 '종가'의 우두머리인 조치의 후계자들은 칭기스칸 일족의 계승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p297

오논 강의 코르코낙 주부르Qorqonagh Jubur 지역에서 갈라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몽골의 마지막 칸 쿠툴라가 자신의 선출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던 곳으로, 아마도 그러한 사실이 두 젊은 지도자의 야망에 불을 지폈을지도 모르겠다.

테무진은 산기슭에 설영하였고 자무카는 강가에 설영하였다. 자무카는 "산비탈에는 말치기들의 천막, 강가에는 양치기들의 목영지"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바르콜드와 불라디미르초프는 이를 근거로 테무진은 말을 사욱하던 '초원 귀족'의 지지를 받았고 자무카는 가난한 목민인 평민들 즉 카라추의 지지를 받았다고 결론지었다.

나아가 <몽골비사>는 자무카가 "신기한 것을 즐기고 전통을 경멸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두고 불라디미르초프는 칭기스칸이 귀족을 대표한 반면 자무카는 일종의 민주세력의 대표였다고 추론했지만, 이는 대단히 무분별한 해석으로 보인다. 러시아 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이든지간에 테무진과 자무카가 결별한 뒤 '잘라이르 키야트 바이린씨 사람들' 은 테무진을 추종하였다. 그의 곁에는 몽골 귀족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 중에는 작은 아버지 다리타이 옷치긴Daritai Otchigin 외에 그 유명한 카불 카간의 장자 계열에 속하는 사람들 즉 카불의 증손이며 오킨 바르칵의 손자로 주르킨 Jurkin씨의 지도자인 사차 베키Sacha Beki와 쿠툴라 카간의 아들인 알탄 옷치긴Altan Otchigin도 있었다. p298

다시 말해 그는 몽골의 마지막 두 군주의 상속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블라디미르초프는 <몽골비사>의 한 대목을 해석하면서, 옛 왕가의 대표자들은 테무진을 더 전통적이고 더 온순하다고 보았던 반면 자무카의 활기찬 성격과 혁신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새로운 왕가의 군주자리를 노리는 두 사람 가운데 테무진을 선호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테무진은 군주로서 ‘칭기스칸’이라는 이름을 취하였으며, 이것은 좀 더 대중적인 역사책에서, ‘징기즈칸’이라는 형태로 바뀌었다. 학자들은 이 칭호의 정확한 뜻에 대해서 아직도 논쟁을 벌이고 있다. p299

『몽골비사』에 나오듯이 그를 선출한 알탄ㆍ쿠차르Qucharㆍ사차 베키의 맹세는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그대를 칸으로 선언하기로 결의하였다. 우리는 전투에서 선봉으로 행군하겠다. 우리가 여자들과 소녀들을 끌어오면 그들을 그대에게 주겠다. 우리는 사냥에서 맨 앞에 설 것이며 우리가 짐승을 잡으면 그것들을 그대에게 주겠다.” p300

옹칸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마음대로 군사동맹협정을 파기하였다. ....... 군사협정을 더욱 위반한 것은 칭기스칸에게 아무 몫도 나눠주지 않았다는 점이다.그런데도 칭기스칸은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나이만에 대한 연합원정전에 동참하였다. p303

이듬해 겨울 부이룩의 부하인 나이만의 쿡세우 사브락Kogse'u Sabragh이 두 동맹군에게 통보도 하지 않고 야간에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단독으로 위험한 철수를 감행해야 했다. 배신에 가까운 왕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칭기스칸조의 정사正史를 믿는다면- 자신의 종주에 대한 칭기스칸의 충성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p304

몽골 제국은 이제 실현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문제는 두 사람의 경쟁자 칭기스칸과 자무카 가운데 누가 이기느냐였다. 이 대결에서 칭기스칸은 끈기, 정치적 기민성, 사람의 마음을 끄는 기술, 그리고 초기단계에서 케레이트 왕칸의 확고한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유리하였다. 자무카에게는 조금은 일관되지 않지만 비범한 정력, 활기찬 마음, 그리고 천부적인 음모의 능력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칭기스칸 일족의 문헌에 따르면 자무카는 신뢰할 수 없는 동맹자였으며 자기 편 부족들을 약탈하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는 반면, 칭기스칸은 자신에게 믿음을 준 자들에 대해서는 변함없고 신실한 보호자였다고 한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을 개뜨린 것은 왕칸이었다. p306

칭기스칸이 왕칸에게 그들의 우정의 세월과 그가 바쳤던 헌신을 상기시켜 옛 주군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구두 메시지를 보낸 곳도 바로 부유르 호와 달라이 호 지역이었다. 그 내용은 대부분의 문헌에 재록 혹은 요약되어 있는데, 칭기스칸은 호의를 회복하기만 바란다고 하면서-이에 대하여 셍군은 칭피스칸이 왕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 한다고 반박하였다- 왕칸을 아버지, 즉 ‘칸 아버지’라고 불렀고 자신은 신하로서 항상 양심적으로 이무를 수행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의 충성스러운 성격, 정의를 존중하는 마음은 이 유명한 대목을 기록한 여러 문헌들에서 누누이 강조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제는 적이 된 옛 몽골 칸의 후손 일탄에게 자신이 칸의 지위를 수락한 것은 알탄을 비롯한 다른 종가 대표들이 스스로 명예를 사양하였기 때문이므로 알탄 스스로 그렇게 한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 구절이 보여주는 서사적이고 서정적인 형식의 이면에는 칭기스칸이 옛 주군에게 남자로서 그리고 동맹자로서 자신의 태도가 정당했음을 강조하는 일종의 법적 진술로서의 측면이 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왕칸이 옛날 자기 신하의 강력한 개성을 너무 늦게 파악하였고 이 능란한 사람의 초기의 노력을 너무 경솔하게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 정당한 이유도 없이 동맹을 파기하고 창기스칸을 배반ㆍ공격함으로써 왕칸은 자기 적에게 똑같이 행동할 권리를 준 셈이다. p 312

1206년의 쿠릴타이에서 샤먼인 쿠쿠추Kokochu(일명 텝 텡그리 Teb Tengri)의 역할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쿠쿠추의 아버지인 현명한 노인 뭉릭Monglig은 칭기스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인물로서, 확실치는 않지만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 후엘룬 에케와 결혼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쿠쿠추의 주술적인 능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미신적인 두려움을 갖게 했고, 그는 얼룩배기 회색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며 영혼과 대화를 한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는 쿠릴타이에서 영원한 푸른 하늘의 권세나 명령 혹은 힘에 의해(mongke tengri -yin kuchun-dur) 카간(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qan 혹은 qaan)의 칭호를 취하였고, 이러한 의전적 표현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지켜졌다. 그의 손자이며 대칸인 구육이 교황 인노센트 4세에게 보낸 서한에 사용한 인새印璽의 문구가 그 예이다. p321

“신령이 내게 영원한 하늘의 명을 드러냈다. 테무진이 처음에 통치할 것이나 그뒤로는 카사르다. 카사르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대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이 선언은 칭기스칸의 마음에 의혹을 불러일으켜 자기 동생을 체포하고 지휘권의 상징인 모자와 허리띠를 압수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 후엘룬 에케는 서둘러 카사르를 풀어주기 위하여 갔다.『몽골비사』에 의하면 그녀는 자기 젖가슴을 드러낸 채 애처롭게 울면서, “이것은 네가 빨던 젖가슴이다. 카사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는 네 혈육을 죽이려 하느냐? 너 테무진은 이 젖을, 네 동생 카치운과 옷치긴은 이 젖을 빨았다. 카사르만 두 젖을 모두 빨았다. 테무진은 재능이 있으나 카사르는 힘이 있고 빼어난 궁수다. 부족들이 들고 일어날 때마다 그의 활과 화살이 그들을 길들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적이 모두 제거되고 보니 카사르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 그러자 당황한 칭기스칸은 카사르에게 칭호와 명예를 되돌려주고 부하 몇 명만 빼앗았다.

그러나 샤먼은 계속해서 황가를 지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이제 칭기스칸의 막내아우를 공공연하게 모욕하면서 적대하였다. 칭기스칸으 아내인 현명한 부르테가 남편에게 경고하였다. “당신 생전에도 당신 아우들이 모욕을 받게 된다면, 당신 사후에는 사람들이 당신 아들들에게 반역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칭기스칸이 정황을 이해해 테무게에게 주술사를 없애라는 허락을 내렸다. 장면은 짧았다. 며칠 뒤 쿠쿠추가 그의 아버지 뭉릭과 함께 칭기스칸을 방문하러 왔을 때 테무게가 그 주술사의 멱살을 잡았다. 칭기즈칸이 그들에게 문제는 밖에 나가서 해결하라고 명령하였다. 쿠쿠추가 황제의 장막에서 나오자마자 이미 칭기즈칸으로부터 무언의 동의를 얻은 테무게가 배치해둔 세 사람의 호위병이 ‘피를 흘리지 않고’ 그의 등뼈를 분질러버렸다. 뭉릭은 아들이 죽은 것을 깨닫고도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오 카간이시여! 나는 그대가 등극하기 오래 전부터 그대를 모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모실 것입니다....... .” 칭기스칸 쿠쿠추 대신에 바아린부의 최장로이며 존엄하고 조용한 우순을 ‘흰 말을 타고 흰 옷을 입는’ 베키beki로 임명하였다. p323

새로운 몽골 제국 : 국가와 군대
샤먼 쿠쿠추는 제거되었지만 칭기스칸 일족의 새로운 제국은 여전히 그 종교적 토대를 보존하였다. 즉 고대 투르크 -몽골의 애니미즘은 많든 적든 마즈다교적인 요소와 중국적인 요소와 훈효되었다. 대칸이 그 현현인 신은 여전히 텡그리, 즉 하늘 또는 하늘의 신이었고, 이는 이란의 오르마즈드Ormazd는 물론 어떤 점에서는 중국의 천天 사상과도 흡사했다. 극동에서 철저히 중국화되었든, 투르키스탄ㆍ페르시아ㆍ러시아에서 이슬람화 되었든 상관없이 칭기스칸의 후손들은 모두 지상에서의 텡그리의 대리자 임을 자처하였으니, 그들의 명령은 텡그리의 명령이고 그들에 대한 반역은 곧 텡그리에 대한 반역이었다. p324

하늘과 주문에 대한 그들의 미신적 두려움으로 인해 몽골인들은 자기네 샤먼뿐 아니라 신성의 대리자일 가능성이 있는 다른 사람들, 즉 케레이트와 웅구트인들 사이에 있던 네스토리우스교의 사제들, 위구르인과 거란인의 불교 승려들, 중국 도교으 도사들, 테베트의 라마들, 프란체스코회 선교사들, 또는 무슬림 물라mullah들처럼 초자연적인 힘이 인도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종파의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 징스스칸의 후손들은 이 같은 미신적 두려움에서 벗어나자 투르키스탄과 페르시아에서 태도로나 행동으로나 관대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p325

역사의 여명기에 인도-유럽계의 ‘말 조련사들’에게 그들의 우위를 부여하고, 고전시대 말기에 훈족을 중국과 로마 제국 정복으로 이끈 것은 틀림없이 북방 유목민들의 이 군마였다. 이제 중세에 이르러 새로운 충동이 초원의 모든 기병들을 북경과 타브리즈와 키예프의 황금 대궐들을 향하여 돌진하도록 했다. p330

전해 내려오기는 칭기스칸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낮에는 늙은 늑대의 경계심으로, 밤에는 갈가마귀의 눈으로 지켜몽골인들은 말과 떨어질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은 서로 닮았으니, 같은 초원에서 태어나 같은 기후와 토양에서 자라났으며 똑같은 훈련으로 길들여졌다. 몽골인은 키가 작고 탄탄하며 뼈대가 굵고 튼튼한 체격을 갖추었고, 스테미나가 엄청나다. 그들의 말 역시 작고 탄탄하며 우아한 데라고는 없다. “힘센 목, 굵직한 다리에, 가죽은 털이 빽빽하며, 불같은 투지와 정력, 지구력, 꾸준함, 걸음걸이의 확실함은 경탄할 만하다.” p330

보아라. 전투에서는 적을 매처럼 덮쳐라.” 사슴 무리에 참을성 있게 몰래 접근하는 것은 사냥감인 적에게 들키지 않고 아무 소리 없이 보이지 않는 정찰조를 전방으로 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초원에서 사냥할 때 몰아대형을 사용하여 달아나는 야생동물 무리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적군을 양익으로 포위할 수 있는 우회기동법迂廻機動法(tulughma)을 가르쳐주었다. p330

유목민들은 이 고도의 기동력 있는 기병을 이용하여 작전이 개시되기 전부터 이미 적을 당황케 하는 기습과 편재遍在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만일 적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면 몽골군은 그들의 거점을 공격하지 않았다. 몽골군은 초원의 모든 약탈자들처럼 흩어져 사라졌다가, 중국군창수槍手나 호레즘ㆍ맘룩ㆍ헝가리 기병이 경계심을 늦추면 다시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몽골 기병들의 거짓후퇴를 추격하는 실수를 저지른 적에게는 재앙이 따를 뿐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적을 길에서 벗어나고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 포위되어 소처럼 쓰러질- 험한 지형의 함정으로 유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위와 양익에 배치된 몽골의 경기병들은 화살을 날려 적을 쉴 새 없이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이것이 적의 대오에 엄청나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p331

모든 작전에서 몽골 사람들은 그들의 체격, 추한 모습, 악취 등으로 인해 상대방이 갖게 되는 공포심을 백분 활용하였다. 몽골군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 배치되었고, 지평선 위로 말을 타고 나타나 둥글게 달렸다. 그들은 장엄한 느낌까지 불러일으키는 침묵 속에서 서행하다가 지휘하는 고함소리 없이 기수의 신호에 따라 기동하고 진격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악마적인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돌진하였다. 기는 희생물을 제어하기 위하여 그것을 흥분시키고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사냥꾼의 오래 된 전통적인 계략이었다.
몽골인과 그의 말은 마치 그들이 영양과 호랑이를 사냥하듯, 중국인ㆍ페르시아인ㆍ러시아인ㆍ헝가리인을 사냥했던 것이다. 몽골의 궁수들은 독수리가 최고 높이로 날아올랐을 때 그것을 쏘아 떨어뜨리듯 적이 가장 지쳐버렸을 때 덮쳤다. p332

유목민들은 대도시를 어떻게 처리한다거나 그것을 그들의 권력강화와 확대를 위하여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아무런 관념이 없었다. 그 결과인문지리학도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초원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인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들을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난감함 때문에 더 불을 지르고 더 살육을 하게 된 것으로, 그들은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몽골 수령들, 아니 적어도 야삭을 충실히 준수하는 자들에게 약탈은 개인적 탐욕이 개입되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장군 시기 쿠투쿠는 금나라 창고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 자기 몫으로 빼돌리지 않았다.
문명에 막대한 재난을 초래한 것은 바로 그 같은 당혹감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행위였다. p338

칭기스칸 국가의 역사가 지닌 역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행위를 건전한 상식의 격언과 잘 확립된 정의로 규제하는 현명하고 사려깊고 도덕적인 지도자의 성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막 원시적인 야만상태에서 나타나 공포 말고는 적들을 굴복시킬 수단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았으며, 도시와 농경문화를 지닌 정주민족들의 생활이나 자기 고향인 초원에 없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유목민드으 야수적 반응 사이에 보이는 뚜렷한 차이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놀라움은 라시드 웃 딘이나『원사』의 편찬자가 지도자 개인에게서 보이는 지혜나 심지어 온건함, 이에 반해서 교육과 유전적 회귀와 사회관습에서 보이는 잔인성, 이 양자가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결합된 거을 보았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기본적으로 같다. p339

통치자들 사이에는 뚜렷한 대조가 보였다. 칭기스칸은 냉정하고 신중하고 끈기 있고 조직적이었던 반면 호레즘의 무함마드는 무책임한 혈기에 날뛰며 비논리적인 조직에 대한 감각도 전혀 없었으나 구르조와 카라키타이조에 대한 승리로 기고만장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최초의 패배는 그의 사기를 완전히 꺾고 속수무책으로 만들어버렸으며, 그를 애처롭고 거이 겁쟁이에 가까운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두 사람 가운데 유목 야만인은 통치자였지만, 이란화된 투르크인으로 이슬람 국가들의 황제이자 정주국가들의 군주는 정작 돈키호테에 불과하였다. p346

어느 누구도 저항은 생각해보지도 못할 정도로 공포와 낙담이 컸다. p354

징기스칸이 아랍-페르시아 문명에 대한 최악의 적처럼 행동하였을지라도 그리고 무슬림 작가들에게 낙인찍힌 대로 지옥의 망령들과 저주받은자들처럼 처신하였을지라도, 그는 이슬람 자체에 대해서는 적개심이 없었다. 그가 세정洗淨의 관행이나 무슬림 방식의 가축 도살을 금지하였지만 그것은 몽골 관습이나 미신과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피르도시Firdawsi나 이븐 시나Ibn Sina에 의해 만들어진 동부 이란의 찬란한 도시문명을 파괴하였지만, 그것은 서남 국경 쪽으로 일종의 무인지대나 인위적인 초원을 만들어 자신의 제국에 대한 제방이나 보호벽으로 삼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가 ‘땅을 죽인 것’은 바로 이 목적에서였다. 그는 종교전쟁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통치감각이 있던 사람이지만, 동시에 초원이 그의 생활방식에 적합하고 통치하기도 수월했기 때문에 도시문명을 파괴하고 농경을 폐지하여(동부 이란을 떠나면서 그는 곡물창고들을 파괴하였다) 전답을 초원으로 바꾸려고 했을 정도로 정주생활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인식을 가진 유목민이기도 하였다. p355

그러나 그는 이제 몰골리아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다. 그는 1222년 을 아무다리아르 f다시 건너 부하라로 갔으며, 거기서 무슬림 신앙의 주요교리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칭기스칸은 전세계가 신(즉 텡그리, 몽골인들의 ‘영원한 하늘’)으 거처이기 때문에 메카 순례가 불필요하다고 여긴 것 말고는 이슬람의 교리를 승인하였다.
사람르칸드에서 칭기스칸은 자신이 술탄 무함마드를 대체하였기 때문에 공적인 기도는 자신의 이름으로 행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그는 무슬림 성직자들, 즉 이맘들과 카디qudi(재판관)들에게 면세 조치를 내렸는데, 이것은 그가 무슬림 세계에 대해 저지른 잔혹함은 전쟁행위였을 뿐 종교전쟁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p356

칭기스칸의 만년
칭기스칸은 1225년 봄에 몰골로 돌아와 1225년 겨울부터 1226년 여름까지 오르콘 강의 지류인 툴라 강의 거영지에서 보냈다. 북경에서 볼가까지 세계가 그 앞에서 떨었다. 알라 -카스피 해 초원의 통치를 위하여 파견된 장남 조치는 독립된 정책을 추구하기 위하여 극단으로 치닫는 듯하였다. 이것이 정복자를 놀라게 하였으나, 조치는 부자간에 공공연한 불화가 발생하기 전인 1227년 2월에 죽었다. p360

칭기스칸의 시신은 한때 텡그리가 그에게 말을 한 오논과 케룰렌의 발원지 즉 서안 부르칸 칼둔(헨테이) 부근에 안장되었다. 1229년 그의 후계자는 몽골 방식에 따라 대대적인 제사를 올렸다. “그는 관습에 따라 자기 아버지의 영령에 사흘간 음식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그는 노얀들과 장군들의 가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 40명을 뽑았다. 그들은 화려한 옷과 값비싼 보석으로 가꾸어졌으며, 라시드 옷 딘의 말에 의하면 저승에서 칭기스칸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보내졌다. 이 야만스러운 경의의 표시에 더하여 훌륭한 말들이 희생되었다.” (초원에서 장례식 참가자와 말의 순장은 헤로도투스의 스키타이인들 이래 칭기스칸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Herodotus, 4, pp. 71-72)) p361

칭기스칸 : 그의 성격과 업적
칭기스칸은 인류의 재앙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는 1200년간에 걸친 초원 유목민의 고대 정주문명에 대한 침략의 화신이었다. 실로 그처럼 가공할 평판을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공포를 통치의 방법으로, 학살을 정교하고 조직적인 제도로 만들었다. 동부 이란의 파괴가 가져다 준 공포는 유럽이 앗탈라의, 혹은 인도가 미히라쿨라 Mihirakula의 탓으로 돌린 그 어느 것보다 더 끔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잔혹성이 어떤 본성적인 사나움보다는 주로 그가 처했던 환경이 어떤 투르크-몽골인들의 경우보다 더 거칠었다는 데에서 생겨난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이 점에서 훨씬 더 문명화된 또 다른 살육자 티무르의 경우는 이 외에도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한다). 몽골 정복자들이 수행한 집단적 처형은 전쟁체계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은 재빨리 항복하지 않은 정주민족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단 항복한 뒤에 다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가해진 유목민의 무기였다. 슬픈 일은 이 유목민이 농경과 도시경제의 본질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p362

1220-1223년 그 유명한 구창춘을 수행하여 정복자를 방문한 이지상이 기초하여1219년에 새겨진 한 도교 석비에는 유목민 황제와 그의 생활방식과 업적에 대해 자신이 받은 인상이 도교의 철학적 용어로 흥미롭게 표현되어 있다. “하늘은 중국의 지나친 사치에 환멸을 느낀다. (칭기스칸이 이르기를) 나는 북의 야생지역에 남아 있다. 나는 소박함으로 돌아가 한 번 더 절제를 모색한다. 내가 입는 옷과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소치기나 마부와 똑같은 누더기를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병사들을 내형제로 대한다. 100번의 전투에서 나는 늘 선두에 섰다. 7년 간 나는 큰일을 했고, 육방六方의 모든 것이 유일한 통치에 부속한다.”

칭기스칸은 그의 생활방식과 환경과 종족이라는 틀 안에서 사려깊은 심성과 건전한 상식을 가진 놀랍도록 균형잡힌 사람이자 남의 말도 잘 경청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정을 굳게 지켰으며, 매우 엄격하면서도 관대하고 자애로웠다. 그에게는 진정한 행정가로서의 자질도 있었으나 그것은 유목민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고, 정주민족의 경제에 대해서는 극히 미미한 개념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질서와 선정善政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에게는 잔혹한 야만적 감정과 결합된 어떤 마음의 고결함과 고상함이 있었고, 때문에 무슬림 저자들에 의해 ‘저주받은 자’로 낙인찍혔으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의 성격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반역자들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다. 불운한 주인을 배반함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던 하인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반면에 주군에게 끝까지 충성한 자들에게는 그 주군이 자신의 적일지라도 종종 상을 내리거나 벼슬을 내렸다.

라시드 웃 딘과『몽골비사』가 그의 특성으로 드는 점들은 많이 비슷하며, 두 사료는 불행할 때의 용기에 대한 그의 존경뿐 아니라, 그의 통치가 건전한 도덕에 바탕하였음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던 약한 사람들을 끝까지 지켰으며 평생 동안 흔들림 없는 신실함으로 그들을 보호하였다. p363

그러한 모든 상황에서 가죽옷을 입은 이 유목민 즉, 여러 민족의 진멸자는 중국인들조차 놀라게 한 자연스러운 위엄과 숭고한 예의와 진정한 고결함을 보여주었다. 훌륭한 가문의 신사로서 그는 영혼 속 깊이 군주였으며, 그래서 유성과 같은 행운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겸손하였던 것이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정책에 확고하면서도 개화된 사람의 경험의 소리에도 귀머거리가 아니었다. p364

몽골 국가와 칭기스칸 일족에 대한 그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저주받은 도시나 지역을 위하여 자비를 탄원할 때 그가 항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대는 또다시 살람들을 위하여 울겠는가” 하고 우구데이가 묻곤 하였다. 그는 재치 있고 현명하게 개입하여,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예방한 적이 많았다. 레뮈자A. Remusat는 “출신으로는 타타르인이며 문화적으로는 중국인인 그는 압제자와 압제받는 자들 사이에 선 타고난 중재자였다”고 적었다. 그는 몽골인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관대한 조치가 훌륭한 정책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썼는데, 이는 몽골인들의 야만성이 주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p365

학살은 잊혀졌고 대신 칭기스칸 국가의 기율과 위구르식 관제의 혼합물인 행정적 성취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의 막대한 파괴 뒤에 마침내 문명에 혜택을 주게 되었다. 칭기스칸이 그의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였다. 마르코 폴로는 “그는 죽었으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올바른 사람이었고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앵빌Jean de Joinville은 “그는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고 했다. 이 평가는 외면상으로는 역설적이다. 모든 투르크 -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아불 가지는 “칭기스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란(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따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야삭은 전몽골과 투르키스탄에 ‘팍스 칭기스카나Pax Chiggis-Qana’를 확립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시대에는 분명 무서운 것이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의 시대에는 부드러워졌고, 14세기 위대한 여행가들과 같은 성취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칭기스칸은 일종의‘야만인 알렉산더’로서 문명에 이르는 새 길을 열어젖힌 개척자였다. p367

6. 칭기스칸의 세 후계자들
칭기스칸의 제자분봉諸子分封
칭기스칸의 큰아들 조치는 1227년 2월경, 아버지보다 6개월 먼저 아알 해 북쪽 초원에서 죽었다. 비록 칭기스칸이 조치의 의심쩍은 출생을 공식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틈은 긑내 넓어져만 가고 있었다. 조치는 우르겐치 점령시에 참전한 것을 끝으로 (1221년 4월), 그 후 1222년부터 1227년까지는 은퇴하여 자기 속령에 있는 투르가이와 우랄스크Uralsk에 살면서 아버지가 추진한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우울한 움추림은 칭기스칸을 얼마간 불안하게 했으며, 그는 큰아들이 자신에 대해 모반을 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조치의 죽음은 그들 사이에 일어났을지도 모를 고통스러운 갈등을 막아주었다.

조치의 아들을 가운데 바투Batu가 아버지의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 한편 그가 상대적으로 연소한 점, 그의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계의 정통성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조치 가문'은 제국의 일에 눈에 띄지 않는 역할만 하게 되었다. p369

정복자의 야삭을 관리하고 몽골인들의 기율을 책임지도록 한 칭기스칸의 둘째아들 차가다이(1242년 사망)는 엄격하고 무서운 판관이었고 칭기스칸 국가의 양심적이고 꼼꼼한 법률 집행자였으며, 군대의 대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노련한 군인이면서도 조금은 고리타분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동생 우구데이를 최고위에 지명하였을 때 항의하지 않았다. 차가다이는 위구르 지방에서 서쪽으로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에 이르는 옛 카라 키타이제국의 초원, 즉 기본적으로 일리, 이식쿨, 추 강 상류, 그리고 탈라스 지역을 몫으로 받았다. 그는 카쉬가리아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부하라 샤마르칸드 등의 도시는 대칸의 관료에 의해 직접통 치되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장춘진인의 증언에 의하면 차가다이의 통상적인 주거는 일리 남쪽이었다.

징기스칸의 세째아들 우구데이는 발하쉬 호 동쪽과 동북쪽 지역, 즉 이밀과 타르바가타이, 카라 이르티쉬와 우룽구 지역을 받았다. 카라 이르 티쉬와 우릉구 지역은 옛 나이만의 영토 부근으로 우구데이의 아정은 보통 이밀 강가에 세워졌다.

마지막으로, 몽골 관습에 따라 막내아들 톨루이는 옷치긴ochigin(더 정확한 형태는 otchigin) 즉, 화로의 수호자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툴라, 오논 상류, 케룰렌 상류 사이의 지역을 포괄하는 가문 세습재산의 상속자였다. 톨루이는 정복만을 꿈꾸는 대담한 군인이자 훌륭한 장군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1232년 하남河南 전투를 매우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그는 알코올에 중독되었으며(그래서 1232년 10월 나이 40에 요절하였다) 위대한 사람으로서의 통찰력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는 드물게 지적인 여자인 옛케레이트 왕가의 공주 소르칵타니Soyurqaghtani, 왕칸의 질녀)와 결혼하였는데, 다른 모든 케레이트 사람들처럼 그녀도 네스토리우스 교도였으며 훗날 자기 아들들을 위하여 제국을 확보하였다. p370

우구데이의 치세,1229-1241
칭기스칸이 자기 후계자로 선택한 우구데이는 아들들 가운데 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으 천재성, 지배에 대한 열정과 정력 거운데 어느 것도 물려받지 못하였으나, 대신 그에게는 훌륭한 감각과 끈기가 있었다. 그는 서툴고 게으르고 유쾌한 주정뱅이였으며 극단적으로 관대하고 대범했고, 술을 마시고 자기 방식대로 즐기기 위하여 절대권력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야삭 덕분에 몽골 제국의 사무는 잘 운영되어갔다. p372

바투와 수베에테이의 유럽원정
몽골인들은 때로 요새화된 도시들을 습격하기 위하여 포로들을 앞으로 내몰앗다. "그들은 이 불행한 사람들 뒤에서 쓰러지는 자들을 비웃고 후퇴하는 자들은 죽여버렸다. 농부들에게 수확을 하도록 강요한 뒤 그들을 죽여버렸고, 다른 곳을 유인하러 가기 전에 철수할 지역의 여자들을 범하고 마찬가지로 죽여버렸다." p387

구육의 치세, 1246- 1248
"그가 선출될 때 그의 나이는 마흔 살이거나 아무리 많아도 마흔다섯 살이었다. 그는 중키에 매우 현명하고 영민하며 진지하였고, 풍채와 태도가 매우 근엄하였다. 그는 좀체로 웃거나 즐겁게 노는 못습을 보이지 않았다." p391

구육은 소아시아(코냐)의 셀죽 술탄국에 대해서 그때까지 통치하고 있던 형 카이 카부스 2세 Kai-Kawus 2보다 동생 킬리치 아르슬란 4세글 더 좋아하여 왕위를 동생에게 주었다.
구육은 칭기스칸 일족의 다른 지파들이 독립하려는 경향을 보이자 이를 근절시키려는 결심에서 장손인 조치가의 군주 바투와 충돌하였다. p393

중국사료에는 구육의 죽음이 1248년 3월 27이에서 4월 24일 기사 안에 들어 있다. 그는 그때 겨우 마흔세 살이었다. 아마 이 죽음이 유럽을 절박한 위험에서 구하였을 것이다. 구육은 킵착의 칸을 패배시키는 것뿐 아니라, 플라노 카르피니도 증언하였듯이 기독교 왕극을 복속시키려는 꿈도 갖고 있었다. 하여튼 그는 주의를 특히 서방으로 돌린 듯하다. 그러나 톨루이 가문 왕자들의 즉위(처음에 뭉케, 그리고 누구보다도 쿠빌라이Qubilai로 인해 몽골의 주된 노력은 극동으로 향하게 되었다. p394

뭉케의 치세, 1251-1259
마흔세 살에 통치를 시작한 뭉케는 몽골 대칸들 가운데 칭기스칸 다음으로 가장 뛰어난 대칸이었다. 말이 없고 사치와 탐욕을 증오했고 유일한 오락이라고는 사냥뿐인 그는 야삭과 조상의 교훈을 원래의 엄격함으로 복구시켰다.
그는 정력적인 지도자였으며 엄격하면서도 공정한 통치자였고(그는 전임자들이 서명만 하고 갚지 않은 막대한 금액의 청구서들을 마지막 적은 부분까지 지불하였다), 고지식하지만 지적인 정치가이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는 칭기스칸이 세운 강력하고 효과적인 정치가이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는 칭기스칸이 세운 강력하고 효과적인 장치들을 그대로 완전히 복원하였다. 뭉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후계자 쿠빌라이처럼)자신의 종족적 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통치구조를 강화하고 몽골제국을 위대하고 질서 정연한 나라로 만들었다. p398

네스토리우스 교도인 어머니, 즉 케레이트 출신 소르칵타니 왕비가 키운 뭉케는 네스토라ㅣ우스 신앙에 호의적이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 교도인 케레이트 출신 볼가이Bolghai를 재상으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호의를 갖고 있었다.

사실 뭉케는 불교도와 도교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였으나 결국에는 전자 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는데 특히 1255년 도교도들이 불교의 기원에 대하여 근거 없는 말들을 퍼뜨렸다고 탄핵을 받은 집회가 있은 뒤부터였다.
게다가 몽골 통치자는 모든 종파를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는 불교도들에게 승려 해운행운을 그들의 우두머리로 하였고 몽골의 이익을 위하여 똑같이 헌신적인 사람을 도교도들에게도 정해준 것이었다. p399

뭉케의 남송 원정
그는 1259년 8월 11일 공성전 기간 중에 걸린 이질로 그 도시 부근에서 죽었다. p410

7. 쿠빌라이와 중국의 몽골 왕조
쿠빌라이의 정치 : 몽골과 중국의 정책
쿠빌라이는 자신을 대칸이며 칭기스칸의 계승자로 여기는가, 아니면 천자이며 중국의 19개 왕조의 상속자로 여기는가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는 2중 정책을 추구하였다. 몽골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원칙상(설사 실제로는 아니었더라도) 칭기스칸 제국의 도덕적 통합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그는 최고의 칸 칭기스칸과 뭉케가 지녔던 권위의 계승자로서 독립적인 여러 칸국들이 된 징기스칸 일족의 속방들에 대하여 계속 복종을 요구하였다. 우구데이(카이두)가와 차가다이가에 순종을 강요하기 위하여, 그는 몽골리아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일생을 보냈다. p426

전중국의 소유자, 투르키스탄과 몽골 지배하에 있는 러시아의 이론적 종주, 그리고 이란의 진정한 종주인 부빌라이는 마르코 폴로가 진술한 대로 진정코 ‘위대한 주군’, ‘아담의 시대 이래 오늘날까지 일찍이 세상에 나왔던, 사람과 땅과 보물의 가장 강력한 주인’이었다. p427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통치는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다. p427

그는 땅을 정복한 다음에는 마음까지 정복했으며, 그가 명성을 주장할 만한 가장 큰 권리는 아마 그가 역사상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중국에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p427

그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교통문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 북경의 식량 공급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국 중부에서 수도로 쌀을 가져올 대운하를 보수하고 완성시켰다.
공적부조도 조직되었다. 1260년의 칙명은 지방 수령들에게 늙은 학자, 고아, 그리고 병자와 약자들을 구제하고 도움을 베풀 것을 명령하였고, 1271년의 칙령은 병원 설립을 지시하였다. p427

쿠빌라이 행정에서 열등한 분야는 재정이었다. 쿠빌라이는 송의 제도 중에서 초, 즉 지폐의 사용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것을 전반적으로 통용되도록 하였으며 그의 재정정책의 토대로 삼았다. 1264년에 그는 주요 재화에 대하여 지폐로 가치를 밝히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p428

쿠빌라이와 계승자들의 종교정책 : 불교
쿠빌라이는 마르코 폴로가 명백하게 진술한 대로, 1279년 무슬림관습과 상치하는 가축 도살과 관련된 칭기스칸의 규율을 잠시 부활시켰고, 한때『쿠란』이 무슬림들에게 부과한 ‘이교도들’에 대한 성전수행의 의무에 대하여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모든 종파에 대하여 폭넓게 관용적이었다. 더욱이 불교도들에 대한 공감으로 인하여 그는 잠깐이나마 그들의 경쟁자인 도교도들에게 상당히 개인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불교는 그의 호의로 실로 매우 뚜렷하게 혜택을 입었고, 그가 몽골 전승에 알려진 것은 이 측면에서다. 헌신적인 불교도인 몽골의 역사가 사강 세첸Saghang Sechen은 쿠빌라이에게 쿠툭투qutughtu(‘우러러볼, 거룩한’)와 차크라바르틴Chakravartin(불교 어휘로 ‘만국의 군주’, [전륜성왕前輪聖王])이라는 칭호를 추증할 정도였다. p429

불교계에서 쿠빌라이의 주요 조력자는 1239년에 태어나 1280년 12월 15일에 죽은 것이 확실한 티베트인 라마 팍바였다. 팍바는 짱Tsang 지역 사끼야Sa-skya의 승원장이었던 유명한 사끼야 반디타Sa-skya Pandite의 조카이자 계승자였다. 쿠빌라이는 팍바를 티베트에서 불러와 몽골인들을 개종시키고 나아가티베트의 신속臣屬을 확실히 하는데 활용하였다. 그는 그에게 고대 중국불교에서 빌린 ‘국사’라는 칭호를 주었고, 1264년경에는 티베트 지방을 그의 정치ㆍ종교적 권위 아래 두었다. 그때까지 몽골인들은 위구르문자만 알고 있었지만, 쿠빌라이의 명에 따라 팍바는 몽골인들을 위하여 1269년에 티베트문자에서 영감을 받은 두르벨진dorbeljin, 즉 ‘네모’라고 부르는 새로운 문자체계를 만들었다. p430

쿠빌라이의 계승자들은 대부분 열렬한 불교도였지만, 그들 가운데에서도 첫 번째는 쿠빌라이 바로 다음에 퉁치한 손자 테무르 였다(1294-1307). 그러나 쿠빌라이의 또 다른 손자 아난다(이름은 불교 산스크리트식이지만)는 이슬람에 가까웠다. ‘그는『 쿠란』을 암송하였으며 아랍글에 뛰어났고’, 자신이 총독으로 있는 탕구트 지방(영하寧夏)에서 무슬림 신앙의 열성적인 포교자였다. 케무르는 그를 불교도로 전향시키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고 잠시 그를 투옥하기도 하였지만, 사촌 카이샨이 이를 차지하고 아난다를 사형에 처하였다. 카이샨은 치세 중에(1307년 6월 21일 -1311년 1월 27일)자신이 헌신적인 불교도임을 보여주었으니, 수많은 불경을 몽골어로 번역시킨 것이었다. 유교문화의 한인 지식층은 그가 라마들에게 베푼 호의를 비난하였으며, 정부가 불교와 도교 재단이 그때까지 누려온 재정적 면세특권을 철회한 것은 아마 이 편애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p431

섬서는 특히 수많은 티베트 승려들의 유흥지였다. p432

불교는 처음에 흉맹스러운 야만인들을 보다 부드럽게, 그리고 보다 고상하게 만들고, 다음에는 굼뜨게 만들어 마침내 그들 안에 있는 자기보존 본능을 죽였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주인들을 견뎌온 고대 유교국가 중국은 그들이 해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들을 탁발의 경우처럼 흡수해버리거나 칭기스칸 국가의 경우처럼 쫒아내 버렸다. 만일 쿠빌라이가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면, 즉 아난다가 1307녀에 제 방식대로 한 것처럼 되었다면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였을 것이다. 이슬람의 승리는 고대 중국문명에 가공할 만한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문명의 긴 역사과정에서 두 가지 가장 큰 위험은 아마도 1307년의 아난다의 시도와, 다행스럽게도 1404년 그 지도자의 죽음으로 피할 수 있었던 티무르의 침입이었을 것이다. p432

쿠빌라이와 게승자들의 종교정책 : 네스토리우스교
칭기스칸 가문은 이 네스토리우스교도 왕자들에게 결코 잊은 적이 없는 신세를 졌다. 웅구트의 수령 알라쿠쉬 티린은 몽골인들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극히 중대한 공훈을 세웠으니 나이만이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요청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고 칭기스칸을 확고하게 지지한 것이다. p434

패요합이 죽자 알라가이 베키는 칭기스칸의 진정한 딸답게 웅구트 지방을 강력하게 다스렸다. p435

마르코 폴로의 여행
마르코 폴로의 책에는 두 가지 여정이 나온다. 하나는 북경에서 운남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경에서 복건으로 가는 것이다. 첫 번째 여정에서 그는 오늘날의 산서의 으뜸 도시 태원(마르코 폴로의 Taianfu), 그 성의 두 번째 도시인 평양(Pianfu), 그 당시에는 봉원부奉元府 또는 경조부京兆府(Quengianfu)라고 하던 섬서의 서안(쿠빌라이의 아들 망갈라Manghala가 1272년부터 1280년까지 이곳의 총독이었으며, 마르코 폴로는 이 사람에 대하여 얘기한다, 그리고는 사천의 성도(Sindufu)를 얘기한다. p443

마르코 폴로가 기술하는 두 번째 여정은 동부 중국을 북에서 남으로 동지나해를 끼고 통과하였다. 북경에서 하간(마르코 폴로의 Cacianfu)을 경유하여 장로長蘆(Cianglu), 장릉獎陵(Ciangli), 산동의 제녕濟寧(Singiumatu), (그 당시 황하 하구였던) 회하淮河의 하구 근방 회안淮安(Coigangiu), 절강浙江의 양주(Yangiu), 소주蘇州(Sugiu), 항주(Quinsai), 무주婺州(Vugiu), 난계蘭谿의 남쪽, 그리고 거기서 상당히 가까운 절강의 구주衢州(Ghiugiu), 역시 절강에 있는 처주處州(Cugiu), 보건의 건녕建寧(Quenlinfu), 현대 복건성의 소도 복조(Fugiu), 그리고 천주(Caiton)로 갔다. 이 여정은 천주 이남으로느 더 이상 가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에 대한 얘기가 없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p444

몽골 통치 하에서의 중국의 경제적 번영
마르코 폴로의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중국의 두 지역, 그가 줄곧 옛 거란의 이름에서 유래한 카타이로 부르는 북부 중국과 만지Manzi라고 부르는 옛 송 제국, 즉 남부 중국의 경제활동에 대한 묘사다. “산의 광맥에서 뽑아내는 일종의 검은 돌을 마치 정작처럼 태우는데, 이 목적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에 카타이 전역에서 다른 연료는 사용되지 않는다.” p446

마르코 폴로가 익살스럽게 ‘진정한 철학자의 돌’이라고부fms 지폐의 통용도 상업거래를 촉진하였다. “나는 사람들이 대칸의 영토 어디를 가든지 이 지폐를 갖고 마치 순금처럼 쉽게 매매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지폐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해두겠다. p447

몽골의 정복은 옛 실크로드와 일치하는 이러한 대륙루트들 외에 해상루트 즉, 향료의 길을 다시 열었다. 아랍과 셀죽 이란이 실질적으로 서구에 대하여 닫혀 있었던 데 반하여 페르시아의 몽골 칸들은 해로로 중국에 가고자 하는 상인들과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자기네 나라를 자유롭게 열어두었다. p450

이 통행의 자유는 그토록 많은 학살을 치른 몽골 정복이 가져온 한 가지 커다란 유익한 결과였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중국, 투르키스탄, 페르시아, 그리고 러시아 대상들의 안전에 관심이 있고 모든 종파에 관용적인 왕자들 밑에서 엄격한 야삭으로 통제되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의 통일은 고대 말부터 폐쇄되었던 세상의 길을 바다로 육지로 다시 열었다.

그러나 폴로 일가의 여행은 마에스 티티아노스Mses Titianos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활동을 증언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이란, 서방이 서로 진정한 접촉을 하게 된 그것이야말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칭기스칸 일족의 정복이 가져다준 다행스러운 만큼이나 예기치 못하였던 것이다. p450

오도리코는 그가 신칼란Sincalan-아랍어 신칼란Sinkalan 또는 시니칼란Sinikalan에서 옴-이라 부르는 광동에 상륙하였다. 그는 하나같이 타고난 상인이자 훌륭한 장인들이 주민들의 부지런한 성격과인구가 몹시 조밀하고 물자가 풍부하고 값이 싼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들의 수에도 충격을 받았다. p454

오도리코의 글에 칸사이Cansay 또는 긴자이Guinzai로 나오는 항주는 그를 더욱 놀라게 하였다. 그는 그곳을 “우리의 베니스처럼 두 호수 사이에, 그리고 운하와 초호礁湖 사이에 자리잡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라고 하였다. 한인, 몽골인, 불교도, 네스토리우스교도, 무슬림 등 그렇게 다양한 민족들이 이 거대한 도시에 함께 거주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몽골 통치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많은 인종들이 한 권력의 퉁제 아래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세상의 가장 위대한 경이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p454

쿠빌라이계의 종말과 중국에서의 몽골인 추방
뭉케는 정복자들을 초원의 검소한 생활방식으로 되돌리려고 시도한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쿠빌라이는 단호히 그의 왕조가 중국식 생활방식을 지향케 하였으니, 그것은 문명화된 쾌락속의 정착된 생활이었다. 그 사람(이나 그의 손자 테무르) 치하에서 이것은 좋은 것, 즉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몽골의 강인함에 중국의 재능을 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약한 2류 황제들의 등장과 함께 이 배합은 전적으로 해롭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중국의 마지막 칭기스칸 일족은 지나치게 중국화되었고 궁정생활과 지나친 주색 탐닉으로 연약해졌으며, 총신들과 애첩들, 그리고 지식층과 관료들의 장막으로 바깥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실질적으로 그들의 몽골적 활력의 모든 흔적을 잃어버렸다. 역사에 알려진 가장 무섭고 끔찍한 정복자의 이 후손들은 연약하고 무능하고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는 우유부단한, 그리고 재난의 시기에는 통곡하는 자들로 왜소해져버렸다. 추상적 실체로서의 국가라는 중국적 관념에 자신들을 적응시키지 못하는 무능함만이 그들의 야만적 특성 가운데 남게 되었다. p460

칭기스칸의 후손들이 중국에 세운 칸국은 쿠빌라이로부터 토곤 테무르까지 100년 이상 존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투르키스탄에 세운 비슷한 칸국은 운명의 기복과 티무르에 의한 단절에도 불구하고 17세기까지 버틸 운명이었다. p465

8. 차가다이가 치하의 투르키스탄
차가다이 칸국 : 기원과 전반적 특징
군주의 이름에서 영역의 이름을 따온 차가다이 칸국은 옛 구르 칸들의 카라 키타이 왕국과 일치하였다. 그리고 이는 카라 키타이처럼 몽골 지배 하의 투르크 지방 즉, 몽골령 투르키스탄이었다. 그러나 차가다이의 통치자들은 카라 키타이의 구르 칸들, 그리고 그보다 앞선 7세기 서돌권의 칸들처럼, 서구식 또는 중국이나 페르시아식으로 어떻게 정규국가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를 위한 역사적 배경이 없었다. 쿠빌라이가나 페르시아 훌레구가의 사촌들은 유구한 고대 중앙집권적 제국의 전통, 즉 행정관행과 아문衙門과 디반divan의 모든 역사를 자기네 영유지에서 발견하였다.

그들은 여기서는 천자, 저기서는 술탄이 되었다. 그들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된 국가들과 자신들을 동일시 할 수 있었다. 차가다이의 아들들에게는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경계가 바뀌는 그들의 영토는 북경이나 타브리즈 같은 중심지가 없이 초만원이 있을 뿐이었다. p467

칸국의 창업자이자 1227년부터 1242년까지 통치한 차가다이는 구식 몽골인이었다. 그가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한 아버지 칭기스칸은 그를 야삭의 수호자, 즉 법전과 기율의 수호자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일생을 이 법을 준수하고 또 주위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면서 살았다. p468

알루구의 치세: 차가다이조의 독립 시도
아름답고 어질고 분별력 있는 왕조로 기술되는 오르가나는 차가다이칸국을 1252년부터 1261년까지 다스렸다. 그녀의 치세 말기의 칸국은 대 칸위를 차지하기 위한 몽골리아에서의 투쟁, 이번에는 대칸 쿠빌라이와 그의 아우 아릭 부케 간의 경쟁의 메아리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p472

절정기의 차가다이 칸국 : 두와, 에센 부카, 케벡
두와는 카이드를 끝까지 충실하게 따랐다. 두려운 종주의 죽음은 그에게 구원으로 여겨졌겠지만, 그는 변화가 점진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드와는 그에게 황제 테무르의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제안하고,1303년 8월에는 두 사람 다 북경에 복종하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지난 40년 간 중앙아시아를 유린한 족내 분규를 끝내고 몽골의 단결을 재확립하였다. p480

9. 몽골 치하의 페르시아와 훌레구가
훌레구 이전 페르시아의 몽골 체제: 초르마간, 바이주, 엘지기데이
대체로 몽골의 종주권은 이 서남 국경지대에서는 산발적으로만 표현 되었다. 초르마간과 바이주는 종속국가들을 강력히 통제하면서도 카라코룸조정과 지속적으로 협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정은 거리 때문에 몇 달씩 계속 연기되었으며 종속둑 왕자들은 칭기스칸 일족 분쟁의 모든 위험 속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탄원하기 위해 사신들처럼 그곳으로 가야 하였다. p497

훌레구의 치세: 암살자단의 파괴, 바그다드 정복, 칼리프조의 절멸
몽골인들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지 20년이 지나지 않아, 정규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그곳의 임시적이고 이중적인 통치체제(이란과 무간에서의 순수 군사통치와 후라산과 이라키 아잠에서의 재정행정)를 종결지으려고 생각하였다. 1251넌 쿠릴타이에서 대칸 뭉케는 아우 훌레구에게 이란 총독직을 주었다. 이 밖에도 훌레구에게는 페르시아에 여전히 존속하던 두 가지 신성한 권력, 즉 마잔다란의 이스마일리Ismaili 이맘들의 영지와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조를 진압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그에게 부과된 또 다른 임무는 시리아 정복이었다. “아무다리아의 기슭에서 이집트 땅의 끝까지 칭기스칸의 관례와 관습과 법을 확립하라. 항복하여 네 명령에 순종하는 모든 자를 친절과 호의로 대하라. 누구든지 네게 저항하는 자는 그를 굴욕 속으로 던져 넣어라.” p501

기독교에 대한 훌레구의 호의
훌레구의 영향권 내에서 기독교도들이 누린 호의는 크게 그의 정비正妃 도쿠즈 카툰 덕이었다. 그녀는 케레이트의 공주로서 케레이트의 마지막 군주였던 칸 토오릴의 조카이다. 그녀의 지혜를 매우 높이 산 뭉케는 훌레구에게 그녀와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충고하였다. 라시드 웃 딘은 “케레이트는 오래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엿기 때문에, 도쿠즈 카툰은 기독교를 보화기 위하여 늘 주의를 기울였고,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 기독교도들은 번영하였다. 훌레구는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그들에게 호의를 듬뿍 베풀었고, 배려의 징표를 보였다. 그의 왕국 전역에 새 교회들이 건설되었고, 도쿠즈 카툰의 오르두 문 앞에는 항상 예배당이 있었고 거기서는 종이 울렸다. p506

10.킵착 칸국
조치와 그의 아들들: 금장金帳 칸국, 백장白帳 칸국, 샤이반의 울르스
바투와 베르케
가장 중요한 유목집단으로 화제를 돌려보면, 1227년부터 1255년까지 통치한 바투스는 칭기스칸 일족의 장자 지파의 (분명히 오르다의 승인으로) 가장이 되어 몽골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그는 결코 최고 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p554

큰아들에 대한 칭기스칸의 사랑의 결여와 조치의 이상한 행동은, 그가 우르겐치 공성 이후 삶이 다하는 마지막 5년을 칭기스칸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속령인 투루가이, 엠바 ,우랄 등지에서 보냈을 때 언급한 바 있다.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 간의 불화를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처음에는 조치 가문이 별로 뚜렷하지 않을 역할만 하도록 운명지웠다. p555

이처럼 자기를 낮추어 복속하는 정책은 1243년 바투에게 충성을 표하고 그로부터 ‘러시아 왕자들의 최선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온 불라디미르의 야로슬라브Yarosalav 대공 때부터 시작되었다. p556

금강 칸국이 지탱되는 동안 아시아는 키예프의 남쪽 교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플라노 카르피니와 루브룩은 바투의 칸국에 들어설 때 서구인들이 받은 인상을 잘 전달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서구주의'으 표명은 조치의 계승자들보다는 10세기 하자르 쿠르크인들 사이에서 확실히 더 많았다.

그러나 역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루브룩이 뭐라고 하든 그는 몽골 제국에서의 네스토리우스파의 정치적 중요성을 완전히 알지 못하였기에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들의 무지와 취태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기독교는 바투의 집안에 뿌리를 내렸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의 진술과는 달리 바투의 아들 사르탁은 네스토리우스 교도였다. 아르메니아(키라코스), 시리아(바르 헤브라에우스), 그리고 무슬림(주즈자니와 주베이니) 사료들도 이 점에서 일치된다. p558

마마이 Mamai와 톡타미쉬Toqtamish
톡타미쉬는 예기치 않은 반전을 통하여 킵착 칸국의 세력을 완전히 복구하였다. 금장 칸국과 백장 칸국의 통일, 모스크바 국가의 점멸은 그를 새로운 바투, 새로운 베르케로 만들었다. 그의 부흥은 칭기스칸 일족이 중국에서 쫓겨나고, 페르시아에서 제거되고, 투르기스탄에서 절멸된 지금 더 큰 충격이었다. 그 유명한 가문에서 톡타미쉬는 홀로 굳건히 섰다. p573



3. 내가 저자라면


칭기스칸(成吉思汗, Chinggis Khan) 1155 또는 1162 ~1227
칭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케룰렌Kerulen 초원에 고아로 버려졌을 때 이미 자신의 동생인 ‘호랑이’ 조치와 함께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필요한 사냥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나 중세에 기마궁사가 질주해와서 쏘고 도망가는 화살은 마치 오늘날 포병들의 일종의 간접 사격만큼이나 효과적이었고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p14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통치는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다. p427

그는 땅을 정복한 다음에는 마음까지 정복했으며, 그가 명성을 주장할 만한 가장 큰 권리는 아마 그가 역사상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중국에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p427
큰일이다. 읽으라는 가운데 토막(2부)을 다 읽었는데 결론을 못내겠다. 너무 시간을 끓었나. 징기스칸의 달리기가 너무 빨라서 그의 입술을 훔치기에 타이밍을 놓쳤나보다.

르네그루세의 말대로 재미있는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임에는 틀림없다. 책의 750여 페이지가 현수의 말처럼 약간 부담을 주고 또한 이 책은 여러 책들을 함께 비교하며 보다 실증적으로 자료를 활용하려 애쓴 흔적도 보이지만 주해 부분이 많아 다소 산만스럽기도 하다. 계속 생각을 이어가며 연결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따라서 결론을 천천히 내야 겠다^^

뭉케의 치세, 1251-1259
마흔세 살에 통치를 시작한 뭉케는 몽골 대칸들 가운데 칭기스칸 다음으로 가장 뛰어난 대칸이었다. 말이 없고 사치와 탐욕을 증오했고 유일한 오락이라고는 사냥뿐인 그는 야삭과 조상의 교훈을 원래의 엄격함으로 복구시켰다.

그는 정력적인 지도자였으며 엄격하면서도 공정한 통치자였고(그는 전임자들이 서명만 하고 갚지 않은 막대한 금액의 청구서들을 마지막 적은 부분까지 지불하였다), 고지식하지만 지적인 정치가이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는 칭기스칸이 세운 강력하고 효과적인 정치가이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는 칭기스칸이 세운 강력하고 효과적인 장치들을 그대로 완전히 복원하였다. 뭉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후계자 쿠빌라이처럼)자신의 종족적 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통치구조를 강화하고 몽골제국을 위대하고 질서 정연한 나라로 만들었다.

쿠빌라이의 정치 : 몽골과 중국의 정책
쿠빌라이는 자신을 대칸이며 칭기스칸의 계승자로 여기는가, 아니면 천자이며 중국의 19개 왕조의 상속자로 여기는가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는 2중 정책을 추구하였다. 몽골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원칙상(설사 실제로는 아니었더라도) 칭기스칸 제국의 도덕적 통합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그는 최고의 칸 칭기스칸과 뭉케가 지녔던 권위의 계승자로서 독립적인 여러 칸국들이 된 징기스칸 일족의 속방들에 대하여 계속 복종을 요구하였다. 우구데이(카이두)가와 차가다이가에 순종을 강요하기 위하여, 그는 몽골리아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일생을 보냈다. p426

전중국의 소유자, 투르키스탄과 몽골 지배하에 있는 러시아의 이론적 종주, 그리고 이란의 진정한 종주인 부빌라이는 마르코 폴로가 진술한 대로 진정코 ‘위대한 주군’, ‘아담의 시대 이래 오늘날까지 일찍이 세상에 나왔던, 사람과 땅과 보물의 가장 강력한 주인’이었다. p427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통치는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다. p427

그는 땅을 정복한 다음에는 마음까지 정복했으며, 그가 명성을 주장할 만한 가장 큰 권리는 아마 그가 역사상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중국에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p427



몽골 통치 하에서의 중국의 경제적 번영
마르코 폴로의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중국의 두 지역, 그가 줄곧 옛 거란의 이름에서 유래한 카타이로 부르는 북부 중국과 만지Manzi라고 부르는 옛 송 제국, 즉 남부 중국의 경제활동에 대한 묘사다. “산의 광맥에서 뽑아내는 일종의 검은 돌을 마치 정작처럼 태우는데, 이 목적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에 카타이 전역에서 다른 연료는 사용되지 않는다.” p446

마르코 폴로가 익살스럽게 ‘진정한 철학자의 돌’이라고부fms 지폐의 통용도 상업거래를 촉진하였다. “나는 사람들이 대칸의 영토 어디를 가든지 이 지폐를 갖고 마치 순금처럼 쉽게 매매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지폐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해두겠다. p447

몽골의 정복은 옛 실크로드와 일치하는 이러한 대륙루트들 외에 해상루트 즉, 향료의 길을 다시 열었다. 아랍과 셀죽 이란이 실질적으로 서구에 대하여 닫혀 있었던 데 반하여 페르시아의 몽골 칸들은 해로로 중국에 가고자 하는 상인들과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자기네 나라를 자유롭게 열어두었다. p450

이 통행의 자유는 그토록 많은 학살을 치른 몽골 정복이 가져온 한 가지 커다란 유익한 결과였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중국, 투르키스탄, 페르시아, 그리고 러시아 대상들의 안전에 관심이 있고 모든 종파에 관용적인 왕자들 밑에서 엄격한 야삭으로 통제되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의 통일은 고대 말부터 폐쇄되었던 세상의 길을 바다로 육지로 다시 열었다.p450

쿠빌라이계의 종말과 중국에서의 몽골인 추방
뭉케는 정복자들을 초원의 검소한 생활방식으로 되돌리려고 시도한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쿠빌라이는 단호히 그의 왕조가 중국식 생활방식을 지향케 하였으니, 그것은 문명화된 쾌락속의 정착된 생활이었다. 그 사람(이나 그의 손자 테무르) 치하에서 이것은 좋은 것, 즉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몽골의 강인함에 중국의 재능을 더하는 것이었다. p460

알루구의 치세: 차가다이조의 독립 시도
아름답고 어질고 분별력 있는 왕조로 기술되는 오르가나는 차가다이칸국을 1252년부터 1261년까지 다스렸다. p472


단지 약간의 호의를 가진 사람에 의해 사람이 사람에게서 한 마리 순한 양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 작은 떨림은 그러한 수평적 어울림이 유지될 수만 있다면 마냥 즐겁게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꽃과 나비는 그렇게 인류의 역사와 함께 존재의 의미를 바꾸지 않았고 그 법칙은 유구하다. 다만 그 환경이 달랐고 그에 따라 생존의 방식을 달리 해야 했을 뿐.

한사람이 한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숨죽이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생명은 덤불만이 가득하던 평야에 생기가 돌고, 갑자기 그 땅에 윤기가 흘러 비옥해 지기라도 하듯, 촉촉이 젖은 대지 위로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리는 파아란 새싹이 힐긋 돋아난다. 빙그레 객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마도 세상이 조금만 더 솔직해지고 가진자가 갖고자하는 것을 향해 더 욕심내지만 않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옥죄지 않고 평화롭게 숨통을 열어갈 것이고, 원래의 아름다움과 진솔한 내면을 들어내기에 스스럼 없이 편해질 것이다.

태초에 똑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 변.경.연에서는 전쟁을 일삼지 않고 함께 놀 수 있는 것은, 단지 한 리더의 꿈이 만들어낸 그 길에 동참한다는 작은 이유 외에 다름 아니었다. 그 작은 힘이 한사람에 의해 발걸음을 내딛고 그렇게 하나씩 모여들었다. 우리의 리더는 상대를 공격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공격하라 일렀고, 그는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복해나가는 지를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둥둥둥 북소리를 울리며 우리는 자신의 심장을 공격하여 들어가고 보다나은 꿈을 꿀 수 있도록 이상과 육신을 진화시켜나가고자 한다. “어제보다 좋은 삶을 살고 싶은 자 있거든 ‘나를 따르라’ 그리고 ‘나보다 앞서나가라’ 우리가 이곳에 함께하게 된 역사와 운명과 존재의 이유다”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여기게 내가 존재한다. 나는 나의 생각들을 쓰기 시작했고 미지의 누군가와 벗들이 이 글을 읽게 되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격려와 서로를 위한 필요와 도움을 나누며 각자와 또 벗들의 일상을 따로 또 같이 점령해 나간다. 내 스승의 보다나은 삶을 향한 변혁을 위한 거친 질주는 징기스칸을 닮았고, 그와 더불어 만들어 내는 역사 속에 기꺼운 동참을 함께하는 우리는 징기스칸처럼 강인하게 먼저 스스로를 정복하고, 더 좋은 세상 향해 긍정과 아름다움을 도모하는 혁신으로 또 하루를 정벌해 나간다.

IP *.75.1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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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07.03 14:59:16 *.114.56.245
써니 님의 글에 점점 빠져들고 있어요. 내 가 저 강 건너 작은 물빛 하나에 아득함을 느낀다면 그대는 광활한 대지위에 광풍이 지나고 난후 찬란한 햇살 속에서 눈부심을 발견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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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03 16:32:51 *.249.167.156
"둥둥둥 북소리를 울리며 우리는 자신의 심장을 공격하여 들어가고 보다나은 꿈을 꿀 수 있도록 이상과 육신을 진화시켜나가고자 한다. “어제보다 좋은 삶을 살고 싶은 자 있거든 ‘나를 따르라’ 그리고 ‘나보다 앞서나가라’ 우리가 이곳에 함께하게 된 역사와 운명과 존재의 이유다”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내가 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나?' 하는 질문을 가장 가슴 깊이 품고 계신 분이 바로 써니 누님입니다. 그 한결 같음에, 그리고 나날이 깊어짐에 감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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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수
2007.07.03 21:16:05 *.243.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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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껍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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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써니
2007.07.04 02:57:42 *.48.41.28
이게 왠일이래요? 저 아직 쓰고 있는데요. 사실 쓰다가 말고 제출부터 하고 다시 읽고 있던 참에 향인이 맛 있는 술 사주는 바람에 신나게 먹고 있는데... 휴~ 쑥스럽습네다. 꾸벅, 잘게요... 이따 봐요. 안녕~

민선아, 언니가 시간 안에 제출은 했거덩, 근데 마저 읽고 있거덩...
조금만 기다려줘~ 부지깽이님께는 비밀이야. (쉿! 조용... 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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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별
2007.07.06 03:59:31 *.176.143.34
와- 마지막 부분 정말 멋져요 동감 동감//
저도 청출어람 하고 파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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