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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5일 07시 10분 등록
1. 작가에 대하여

정두희 교수는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 옌칭 연구소 교환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 서강학파라는 학맥을 수립한 이기백, 길현모 교수의 후진이다. 다음은 고(故) 이기백 교수가 역사에 대하여 쓴 글의 일부이다. (2001년 월간조선 인터뷰 )


『학문이란 것은 전통이 중요한데, 그것을 계승하려 하지 않고 파괴하려고만 해요. 民族主義史觀, 唯物史觀, 實證史學에서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버려야 하는데, 자기 비위에 안 맞으면 무조건 배격해 버리는 풍토는 고쳐야 합니다. 역사는 여러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란 보편성을 띤 여러 법칙에 의해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多元的 普遍主義 發展史觀이라고나 해야 할는지요. 저 자신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두희 교수는 잘난 체 하고, 큰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며, 쉽게 비분강개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살아온 움직임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역사가들은 실제생활과 괴리된 거대한 말만 하지 말고 개인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현 시대에 대한 통찰도 필요합니다. 우리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조차 모르면서 역사, 즉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아마 이러한 인간적인 접근때문에 조광조를 가장 잘 그려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 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조선 시대 대간 연구』『미국에서의 한국사 연구』『하나의 역사, 두 개의 역사학』, 논문으로는「조선 초기 지리지의 편찬」「조선 건국초기 통치체제의 성립과 그 역사적 의미」등이 있다.

2. 나에게 다가온 책

가. 조광조의 생애

조광조(趙光祖)는 34세가 되던 중종 10년 8월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38세이던 중종 14년 11월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희생되었다. 그가 공적으로 활동한 기간은 만 4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4년 동안 조광조는 당시의 조선 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조와 연산군을 거치면서 퇴색되었던 유교 이념을 다시금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다 했다. 저자는 바로 이 4년 동안에 조광조가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광조는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았지만, 현재 전해지는 그의 문집에는 중종 10년 그가 알성문과에 응시할 때의 책제(과거 시험 문제)와 그에 대한 그의 대책문(답안)이 있다. 이 때의 알성시에서 중종은 재위 10여 년 동안 온갖 노력을 하였음에도 아직도 국가의 기강과 법도가 서지 못하는 까닭을 물었다. 국왕의 신임과 사림들의 공론의지 이외에는 자신의 개혁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 기반이 없었던 조광조의 실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후 사림 정치가 구현되는 16세기 중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 마치 유교 이념의 구현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처럼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죽음으로 그가 추구하던 개혁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이후 조선 왕조의 유교 문화가 독창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가 취한 방향은 옳았을 뿐 아니라 계속 살아남았던 것이다.

나. 세종의 화려한 업적 뒤의 허탈함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은 1450년 세종대왕 승하부터 조광조가 죽는 1519년 까지 약 70년 남짓한 시대의 처절함이었다. 세종의 국가경영을 읽으면서 느꼈던 조선의 기반을 다졌던 많은 제도와 정치철학들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 하는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세조의 왕권찬탈부터 중종반정에 이르는 기간동안 살았던 사람들과 세종 때의 황희, 맹사성 등 명재상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놀랐다. 나라의 근간을 세우고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닌 또한 자신들의 집권과 정권유지를 위한 모략과 추악한 정치적 술수에 놀랐고,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된 중종의 행동도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다. 지지기반이 없어서 공신들의 손아래 있다고는 하지만 36년의 재위기간이 무색할 만큼 아쉬움이 남는다.

- 1482년(성종13) 조광조 태어남
-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조광조 17세)
-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 (조광조 23세)
- 1506년(연산군12) 중종반정 (조광조 25세), 폐비 신씨 폐출
- 1515년(중종10) 조광조 과거 급제(32세) 폐비신씨 복위 상소
- 1517년(중종12) 정몽주의 문묘종사 주장
- 1518년(중종13) 권씨 왕후 소릉의 복원, 소격서 폐지 (9월), 현량과 주창
- 1519년(중종14) 기묘사화 (조광조 죽음 36세 11/19)

역사시간에 개혁의 실패자, 급진개혁의 실패하는 이미지로만 남았던 조광조에 대한 짧은 기억들이 거대한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인간적인 면으로서의 고뇌와 용기를 보면서 못다핀 학자에 대한 아쉬움이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다. 개혁과 혁신에 대하여

문민정부 시대의 핵심단어가 개혁이었고, 참여정부의 최대 현안이 혁신이었다. 당시 세관의 민원부서에 근무했던 나로서 새로운 정부 출범과 더불어 시작된 개혁과 혁신이 위에서부터 정부 조직의 말단에 까지 내려와서 변하는 것을 보고 개혁과 혁신에 대한 단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절차를 마련하자면 또 다시 조정의 대신들과 이 문제를 의논해야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도 수많은 이견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견해 차이를 조정하면서 상세한 절차를 마련한다면 그 천거제도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제도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것이 관료사회에서의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행정절차의 함정이기도 하였다. (222p)


변화를 싫어하는 관료주의의 특성일 수도 있겠지만, 실적위주로 치우치고, 그전에 했던 일에 제목만 바꾸어 달고 나중에는 이것이 개혁이고 혁신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그만큼 변화는 어려운 화두인 것 같다. 참여정부 초기에 정부역할의 새로운 대안으로 혁신이 강조되었고, 4년이 지난 지금, 행정기관의 대국민 서비스가 친절해지고 탈 권위적인 변화가 눈에 보이기는 하나 처음에 주창했던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 하다. 혁신가로서의 조광조는 짧은 기간을 살았고, 눈에 뛰는 실적이 없었지만, 4년간의 짧은 관료생활은 조선사회의 물줄기를 바꾸었으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후대에 이르러 싹을 틔웠다는 것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라. 과연 조선을 유교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시간을 하나의 선이라고 보았을 때 조선은 27대 500년의 긴 선의 역사이다. 때로는 굵은 선도 있었고 줄이 끊기는 가느다란 선도 되었다. 세종과 같은 성군을 만나서 백성들을 위한 많은 제도가 시행된 시대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처럼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있은 적도 있었다. 조선이 유교 국가인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유교국가라는 의문을 가져볼 때 오로지 집권층의 보호와 권력을 이어가기 위한 추악한 꼼수만 눈에 훤하게 보인다.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권력층이자 지배계급은 양반의 몰락과 함께 나라의 운명도 같이 한다.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한 것은 결국 민초들의 항쟁인데, 의병장을 역모죄로 몰아붙인 그들이다. 저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던지고 싸울 때 그들은 고상한 척하며 성리학을 운운하며 사군이충을 들먹거리면서 나라를 팔았다. 나라를 팔았고, 사대를 위한 제나라의 백성도 팔아먹었다. 조광조의 복권 또한 그의 활동과 혁신이 뚜렷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하다.

그의 복권과정은 16세기 말,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국가지배이념으로 성리학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려는 사람들의 필요성에 따라 또 다른 모습으로 조광조가 역사에 탄생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뜻에 따라 문묘에 배향된 조광조는 그의 실제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291p)


마. 못다핀 꽃에 대하여

한 사람의 생애를 먼 훗날에 살펴보고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저서나 기록이 없고 정적으로 몰려 사화의 희생으로 죽음을 당하였다면 그의 기록이 온전할 리가 없을 것이다. 짧고 굵게 살다간 조광조, 자기한테 다가올 죽음을 알고 순교자적인 모습으로 실천하는 지성을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훌륭한 지성이 날개를 펴지도 못하고 권력의 힘에 의하여 좌절된 것이 아쉬움을 준다. 첫 이미지로는 개혁론자답게 열정으로 카랑카랑한 힘이 가득할 것 같았는데, 자꾸만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인터넷으로 자료를 조사하던 중에 오마이 뉴스의 이정근 기자가 쓴 다섯 개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정두희 교수님의 책은 조광조라는 사람에게만 집중을 하다보니 약간 중복되는 부분도 있었고, 역사적인 배경지식이 부족한 나에게는 세조 때부터 이어온 복잡한 역사의 흐름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이정근 기자의 마지막 대목이 가슴에 들어왔다. 1517년 11월 19일 전라도 능주로 귀양을 떠나서 정착을 한지 한달도 채 되지 섣달 그믐날 한양에서 금부도사가 도착한다. 사면인줄 알고 버섯발로 뛰어나가 보니 사약이 내려진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아래 세상 내려다보고 있나니
가이 없는 이내 충정 길이길이 비추리라


쌓인 눈 위에 하얀 종이가 펼쳐지고 먹을 머금은 붓이 빠르게 지나간다. 먹 선이 가는 곳에 조광조의 마음이 그려졌다. 검은 먹 점이 글씨가 된 형체위에 하얀 눈발이 날린다. 붓 끝에 조광조의 염원과 회포가 알알이 맺혔다. 붓을 놓은 조광조는 북쪽 하늘을 쳐다봤다. 심호흡을 하는 조광조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글. 이것이 진정 죽음을 앞둔 절명시다.

3. 가슴을 치는 구절

<제 1장 서론>

(14p) 조광조는 관직에 나아간 직후부터 이러한 그릇된 현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유교국가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도덕적 가치가 바로서야만 한다고 확신하였다. 즉 왕을 비롯한 나라의 지배층이 마땅히 유교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며, 배운대로 실천해야만 이 낙국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나라 말기에 나라의 기강이 크게 무너졌을 때, 공자가 올바른 도리를 밝혀 이를 바로 잡으려 했던 것처럼, 조광조도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조선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20p) 조광조는 세조의 찬탈과 연산궁의 학정, 그리고 중종반정이라는 또 하나의 쿠데타, 이 세 가지 사건이 유교 이념에 남긴 깊은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믿고 활약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사건 모두가 조선 왕조 지배층의 가장 중심부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기에 왕조의 지배자들의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제2장 중종 초 반역과 모반의 정치사>

(38p) 그러므로 중종 초 10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이들 역모사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인 논공행상을 둘러싼 조정 내의 노쟁의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이런 역모사건에는 유자광 처럼 연산군대 사화를 주동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반정 이후에도 공신이 될 수 있는가 라는 회의가 담겨져 있다.

(49p) 반정 이후 중종 초기에는 왕권도 대신들의 권위도 확고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국가 권력에 공백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간은 그 영향력을 크게 확대시켜나갔다.

<제3장 조광조의 등장>

(75p) 그러나 조광조의 관직 임용여부를 두고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다시 며칠 후 검토관 공서린은 조광조가 남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거듭 천거를 받았으니 임용하는 것이 옳다는 뜻을 건의하였다.

(77p) 이로써 조광조는 34세의 나이에 정치무대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것은 조광조 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의 운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제4장 조광조의 알성시 대책문>

(87p) 위의 문제에서 중종은 마지막으로 성균관 학생들에게 삼대의 이상 정치를 오늘에 할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광조는 명도(明道)와 근독(勤獨)이라는 두 가지 점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란 곧 도리를 밝히는 것이며,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있을 때라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자신을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군자여야 했던 것이다.

(90p) 그가 살던 당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그가 제시했던 방향은 너무 뚜렷하였으며, 그만큼 너무 단순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이상과 그가 직면한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깊은 골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지배자의 덕성이 함양된다면 충분이 메워질수 있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끊임없는 절충과 타협으로 체제를 끌어가는 현실정치와는 너무도 다른 방식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로 현실 정치에 임하였기에 그는 더욱 큰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제5장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에 대한 논쟁과 조광조>

(103p) 박상과 김정이 폐비 신씨를 복위하자는 상소를 올려 조정이 들끓던 때는 조광조의 생애에서도 무척 중요한 시기였다. 박상과 김정의 상소가 제출되던 1515년(중종10) 8월 8일로부터 보름 후 쯤인 8월 22일에 조광조는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 그는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두달후인 11월 20일에 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그 이틀 후 사건원 정원 조광조는 상소를 제출하여 박상과 김정에 관한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였다.

(110p) 조광조는 그만큼 사림의 핵심적인 생각을 정면에서 대변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행동은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뜨거운 논쟁이 몇 달 간 계속되는 동안 단 한번도 여기에 휩싸이지 않고 초연히 사건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았던 그의 태도는 매우 위엄있는 것이었다. 그는 하는 말은 옳으나 행동은 경박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거론하면서도 냉정하게 주변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볼 만큼 신중하고 담력있는 사람이었다.


(112p) 이것이 조광조가 문과를 통해 조정에 등장 했을 때의 현실이었으며, 바로 그 때부터 그는 가장 뛰어난 유교이념의 주창자로서 또 사림들의 생각과 시대적 요구의 핵심을 가장 잘 적절하게 드러나게 만들 줄 아는 지도적 인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제6장 단종 어머니 권씨 왕후 소릉의 복권>

(116p) 세조는 더 이상 단종을 상왕이라 하여 궁중에 기거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를 서인르로 폐하고 나아가 왕후릉을 강등하여 개장하였다.

(121p)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즉 이 조의제문은 항우를 세조에 비유하고 항우가 죽인 어린 왕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을 비판한 글이었는데, 이것을 성종실록에 올리려는 과정에서 무오사화는 시작되었다.

(130p) 조광조는 세조대의 정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일단 이루어진 것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연산군대의 정치적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조광조가 앞장서 펼친 정국공신의 삭훈 문제는 이러한 사태의 연장선사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제7장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 배향>

(131p) 1515년(중종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치무대에 등장한 조광조는 이후 1510(중종14) 기묘사화로 실각될때가지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문제와 거의 모두 연관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조광조와 그 시대에 대한 연구는 필기시험위주의 과거 제도를 천거 중심의 현량과로 개혁하는 문제와 정국공신의 특권을 박탈하려는 문제, 이 두 가지에만 중점을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5p) 유자광의 상소는 중종대의 정치사를 이해하는데 몇 가지 중요한 암시를 하고 있다. 즉 중종반정 이후에도 여전히 세조대의 정치적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가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쟁점으로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147p) 조광조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연원이 정몽주 - 길재 - 김종직 - 김굉필로 이어지고 있음을 논하고, 자신들이 이처럼 학문적 연원을 중요시 하는 것을 반대파에서는 혹시 <붕당>이라고 모함할 가능성이 있음을 중종에게 일깨우고자 하였다.

(149p) 세조와 연산군대의 이념적 혼란을 겪으면서 조광조는 절의라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덕목임을 새삼스럽게 느꼈던 것이며, 이런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리학적인 이념을 명백하게 표방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지식인들이 다른 학문이 아니라 성리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정몽주-김굉필로 이어지는 연원을 정통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제8장 소격서 폐지 논쟁에 나타난 조광조와 중종의 대립>

(155p) 조광조는 이 소격서의 문제를 영의정 장광필처럼 사소한 문제로 보지 않고 유교적 정치 이념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문제로 해석함으로써 매우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157p) 조광조는 중종이 소격서 폐지를 망설이는 것은 아직도 조선의 정치의 대본을 성리학의 기초위에 놓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조선의 정치가 그 지향해야 할 바를 따르지 못한다면 어지러운 현실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163p) 중종은 대간을 모두 교체하는 한이 있더라도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겠다는 뜻을 이런 식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이에 조광조는 명군(明君)은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고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으며, 암군(暗君)은 자기의 생각대로 행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용납하지 않는다. 고 전제하고 나서 소격서 문제로 사직한 대간을 전원 교체하라는 중종의 조처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하였다.

(166p) 이후 소격서 폐지는 절차상의 문제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13년 9월 3일 왕은 소격서의 폐지를 기정 사실로 인정하였으며, 사직하고 물러난 대간은 속히 복직하여 밀린 업무를 처리하라고 명령하였다. 조광조의 상소로 격화된 소격서 폐지에 대한 논쟁은 이로서 두달 만에 종결되었다.

(172p) 소격서 폐지에 대한 조광조와 중종의 논쟁은 조광조의 일생에 있어서나 당시의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소격서 논쟁을 제기하기 전까지 조광조가 이처럼 앞장서서 개혁을 주장한 적은 없었다.

(173p) 조광조는 매우 민감한 정치 문제에 있어서 앞으로 자신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나 성리학적 이념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그의 자세는 그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던 세력들에게 매우 적대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제 9장 돌아올 수 없는 길>

(175p) 조광조와 중종 사이에 있었던 격렬한 논쟁 끝에 소격서가 폐지되자 조광조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소격서가 폐지되고 2개월 후인 중종 13년 11월 조광조는 정2품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조광조가 맡았던 어떤 관직과 달랐다. 대사헌은 대간의 우두머리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였지만, 중요한 만큼 시비에 휩싸일 가능성도 큰 자리였다.

(182p) 조광조는 간곡하게 물러나기를 청하였지만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 김정이나 안당은 모두 조광조가 동지성균관사가 되어야 성균관에 유생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 시점에서 무척 망설였으며, 또 두려워하였다.

(185p) 결국 조광조는 중종 13년 11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 때도 조광조는 출신한지 불과 40개월도 못되어서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이 되는 것은 너무 외람된다고 하며 극구 사직을 청하였다. 그리고 이 날 하룻 동안에만 다섯 차례나 사직을 청하였다.

(189p) 조광조는 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기대를 저버린 적은 없었지만, 때로는 그런 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과 그의 활동은 이제 더 이상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는 사람들의 기대와 더불어 살아야 했다. 그는 성리의 학문을 깊이 닦아 진정한 도학자가 되기를 원하였지만, 공인이 된 지금 그의 개인적 소망을 이루어질 수 없었다. 사람들의 여망과 개인적 소망사이에서 그는 앞엣것을 따를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그 한 사람에게는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제 10장 중종 13년 5월의 대지진과 군자·소인 논쟁>

(197p) 그는 중종에게 왕으로서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특히 이 세상에 음과 양, 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반드시 조정에는 군자와 소인이 섞여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면서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군주 자신의 판단력 밖에 없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200p) 그는 그럴듯한 말로 윤색하면 중중도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조광조는 중종에게 군자와 소인에 대한 문제를 인식시키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며, 이런 논의가 큰 지진을 계기로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209p)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광조의 발언은 가장 무거운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중종 13년 5월 20일 조계상과 장순손이 소인으로 지목되어 파직됨으로써 조광조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되었으며, 당시 중종대의 조정에서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념의 기치를 더욱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211p) 그만큼 당시 정국은 불안정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불안정한 정국이었다 하더라도 일단 기세를 잡은 조광조는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았다. 그는 군자·소인 논쟁에서 제기되었언 새로운 인재 등용법의 시행을 위해 오랜 세월 유지해온 과거제도를 손질하려는 개혁을 시도한 것이며, 이것은 조광조의 정치적 생애에 있어서 매우 극적인 순간이기도 하였다.

<제11장 현량과 : 이념과 현실의 갈등>

(222p) 그러나 자세한 절차를 마련하자면 또 다시 조정의 대신들과 이 무제를 의논해야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도 수많은 이견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견해 차이를 조정하면서 상세한 절차를 마련한다면 그 천거제도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제도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것이 관료사회에서의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행정절차의 함정이기도 하였다.

(226p) 이로써 오랫동안 전개되었던 천거제에 대한 찬반 논란은 일단 종식되고 구체적으로 이를 시행하기 위한 제도도 마련되었다. 조광조가 주장한 천거제는 최종적으로는 식년 과거와 병행되는 것으로 별시의 형식을 띤 것이며, 천거의 대상자는 유생뿐만 아니라, 현직 관리도 포함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천거의 제도가 마련되었어도 이는 바로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며, 이 제도에 대한 반발이 전혀 다른 형태로 터지게 됨으로써 중종대의 정국은 큰 혼란으로 빠져들었을 뿐만 아니라 조광조에게도 커다란 시련을 안겨주었다.

(236p) 심지어 안처겸, 안처근, 안처성 삼형제가 28명을 뽑는 이 현량과에 함께 급제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현량과는 결과적으로 조광조 세력을 등용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38p) 조광조가 지닌 힘은 그의 도덕적 순수성이었으며, 당시 조선 왕조의 핵심적 지배 세력은 이러한 도덕적 비평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들이 보기에 조광조도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편법을 동원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은 조광조를 그렇게 몰고 갈 충분한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239p) 조광조의 생각대로 현량과는 한번은 시행되었지만, 그렇다고 물길이 트이지는 않았다. 이제 그에 반발하는 세력이 총동원되어 또 다시 사화가 일어나고 조광조는 죽음을 맞게 되었다. 조광조는 그의 반대세력과 마찬가지로 조선왕조 지배 사회의 일원이었으며, 현량과 급제자들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조광조 또한 조선왕조의 체제를 기본적으로는 지키려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개혁도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조광조 사후 조선 왕조 말기까지 그 누구도 의미있는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때 조광조의 현량과 시행과 실패의 역사는 그의 운명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의 역사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12장 기묘사화와 조광조>

(267p) 당시 조선 왕조가 당면한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서 정국공신과 같은 기성의 정치세력을 약화시키며, 보다 새로운 생각으로 무장된 사람들을 등용해야만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정국공신의 개정과 현량과의 실시라는 두 가지 개혁안이 중종 14년에 적극 추진된 것이다.

(269p) 그러기에 그는 이후 사림정치가 구현되는 16세기 중기 이후 조선사회에서 마치 유교이념의 구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처럼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추구하던 개혁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이후 조선 왕조의 유교 문화가 독창적인 발전을 이룩 하는데 중요한 초석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취한 방향은 옳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 살아남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제13장 조광조의 복권과정과 16세기 조선의 성리학>

(271p) 조광조는 살아사도 매우 논쟁적인 사람이었지만, 죽임을 당한 후 그의 복권을 둘러싼 논쟁은 더욱 뜨거운 것이었다.

(276p) 수기치인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믿었던 성리학에서 배운 것을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나 치자(治者)로서의 공적인 행위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282p) 중종 39년 4월에는 홍문관 부제학 송세형이 기묘사화를 재평가하고 조광조의 사람됨이나 정치행위를 크게 칭송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광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 않고 이에 대한 중종의 책임을 거론하가까지 하였다. 만약 조광조가 그릇되고 과격한 길로 갔다면 마땅히 왕이 이를 억제했어야 하는데, 실은 왕이 조광조의 모든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반문하면서 그렇다면 왜 그를 그처럼 갑작스레 죽여야 했느냐고 왕에게 항의하였다.

(290p) 그리고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 2년 9월 5일 마침내 위에서 언급된 오현을 문묘에 배향하라는 왕의 교서가 반포되었던 것이다. 그 교서 가운데는 이들 다섯명의 신하는 성리학의 본질을 터득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을 이룩한 사람 이라고 그의 공적을 명백히 지적하였다.

(291p) 그의 복권과정은 16세기 말,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국가지배이념으로 성리학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려는 사람들의 필요성에 따라 또 다른 모습으로 조광조가 역사에 탄생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뜻에 따라 문묘에 배향된 조광조는 그의 실제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293p) 16세기 조선성리학의 내면적 심화과정은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현실정치를 이상적으로 이끌수 있다고 믿고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던 조광조의 신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학문으로 서의 성리학이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정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은 과거제와 같은 조선왕조 지배체제의 중심적 제도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제 14장 실천적인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에서>

(312p) 그는 자신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단정하였으며, 이 위기는 유교적 가르침과 정치행위가 서로 어긋나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세조의 찬탈과 연산군의 학정은 모두 유교적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대표적 행위였다. 충과 효를 그처럼 강조하는 조선왕조에서 어떻게 신하가 섬기는 군주를 죽일 수 있으며, 모든 정치 행위를 자신이 갈고 닦은 학문과 덕성의 발로로 이해하던 당시에 어떻게 연산군과 같은 반유교적인 학정이 자행 될 수가 있느냐는 것이 조광조가 그 시대에 던진 질문이었다.

(316p) 최후의 순간에는 학문과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힘이 문제였다. 이것은 유교 이념이 보편화되었던 조선왕조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학문과 정치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 양자의 일체성을 믿고 정치에 뛰어든 조광조는 매우 이상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그가 실패함으로써 학문과 정치의 일체성이라는 유교적 이념은 이념으로서만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신념과는 달리 학문이 정치에 개입하면 학문은 결국 정치적 현실을 합리화시켜주는구실로 전락할 따름이었음을 조선의 역사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321p) 조선왕조는 결코 조광조가 희망하던 수준의 유교국가가 되지 못하였으며, 조선위 군주와 관료는 결코 그가 원하던 군자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자신은 유교 국가인 조선왕조의 커다란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322p) 조광조를 높이 평가했던 사람들이 집권했던 때에도 과거제도를 본격적으로 개혁하려는 노력은 전해 시도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개혁은 조선왕조 지배층의 내부에서 자체적인 노력으로 시도한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그만큼 조선왕조의 지배체제가 보수적이며 그 보수적 체제의 관성이 무척 강한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는 조광조 사후 수백년동안 운명을 다 할때까지 한번도 의미 있는 개혁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323p) 요즘 같은 세상에 스스로 학자적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어느 이익 단체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익단체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이미 더 이상 학자적 지성인이 아니며, 관료적 관행에 따라야 하는 그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는 점을 명백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며, 자신이 더 이상 독립적인 지성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324p)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조광조처럼 기억될 만한 이상주의적 지성을 지니고 있는가?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이상이 없이도 우리 사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겠는가? 조광조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반성해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4. 내가 작가라면

가. 전체적인 구성에 대하여

조광조에 대한 기록은 4년간의 짧은 관직생활로 많지 않다. 따로 문집을 남긴 것도 아니고, 저술한 책도 없다. 1515년 중종 10년때 시행되었던 알성문과의 시험답안과 상소문이 남아있을 뿐이다. 6월의 책은 나름대로 개인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어 역사속의 영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반면, 다른 사람의 기록, 그것도 한참 피지도 못하고 꺾인 꽃한테 무슨 아름다운 사연이 남아있겠는가? 조광조가 과거 시험보기 전까지 시대적인 배경과 학문적인 내용이 있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상황을 너무 상세히 설명하다 보니 그것이 세조 때까지 올라갔고, 폐비 신씨의 문제부터 정몽주의 문묘배향까지는 너무 복잡하여 전문적인 역사 지식없이는 이해가 힘이 들었다. 조광조의 힘이 실리기 시작하는 중종 13년 소격서 폐지부터는 이해하기가 쉬웠다. 조광조란 인물에 대하여 좀더 친근하게 다가서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나.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조광조를 짧게 표현하는 주제어로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지성인이라는 것. 배운바 대로 지행합일의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조광조처럼 기억될 만한 이상주의적 지성을 지니고 있는가?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이상이 없이도 우리 사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겠는가? 조광조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반성해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24p)


문득 이글을 보면서 20년전 6월 항쟁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을 다니면서 실천하는 지성인이라는 말처럼 대학생들을 선두로 직장인, 가장주부까지 새로움을 갈망하면서 시위에 참가를 하고 역사적인 전환점을 이끌어 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과연 그때만큼 실천하는 지성이 있었나 하고 반문을 해본다. 먹고 사는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잘사는 나라가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럼 그 실천하는 지성은 다 사라지고 만 것일까? 역사는 실패한 혁신은 그 실패로 끝나지 않음을 보여줄 것이다. 실패한 혁신들이 모여 다시 더 큰 혁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역사의 힘이라고 믿는다.

다. 연구원의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연구원의 생활이 약간은 적응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느낄때 조금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제가 쓴 글을 다시한번 죽 읽어보았습니다. 내 스스로 연구원이라는 우물속에 들어있는 한심한 나를 발견했습니다. 정작 발전한 것은 미미한데 연구원이라는 호칭에, 그냥 고생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속에 갇혀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조광조가 유교정치에 대한 이상과 현실에서 고민하였다면, 저는 연구원이라는 이상과 현재의 제 현실의 사이가 너무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뭔가 변화를 갖고 싶었습니다. 읽는 양을 조금 늘렸습니다. 독서모임에서 토론한 것을 토대로 한달에 두권의 책을 더 읽어보고 정리를 해보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조광조가 절명시를 적고 사약을 마시기전에 마지막으로 남긴말은 송장을 넣어갈 관을 얇은 나무로 만들라는 유언이었습니다. 관을 메고 갈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참 아름다운 사람을 역사속에서 만난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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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7.04 23:29:07 *.70.72.121
나는 변.경.연에서 너무 쉽게 당신 같은 진국을 만났는데... 징글러브유.
이 못 말리는 열정을 어떡햐. 난 징기스칸 더 채우러 왔다가 깜짝 놀랐네.

316p) 최후의 순간에는 학문과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힘이 문제였다. 이것은 유교 이념이 보편화되었던 조선왕조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학문과 정치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 양자의 일체성을 믿고 정치에 뛰어든 조광조는 매우 이상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그가 실패함으로써 학문과 정치의 일체성이라는 유교적 이념은 이념으로서만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신념과는 달리 학문이 정치에 개입하면 학문은 결국 정치적 현실을 합리화시켜주는구실로 전락할 따름이었음을 조선의 역사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생각이나. 학문이 정치와 결탁했을 때의 혼탁함.

깐깐하게 목숨 걸고 지켜가는 이 시대의 진정한 학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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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7.05 07:06:19 *.99.241.60
써니누나..너무 그러지마슈.
어차피 일년의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거구.
여기에서 돌파구를 찾을려고 했다면 좀더 색다른 모험이 필요할듯
해서 한번 해보는 거니까
일년후에 사부님이 준 책만 본다면
조금만 더 읽었더라면 좋았을 걸...라는 후회를 할것 같아..

옛날에 읽었던 책을 연구원의 신분으로 다시 꺼내보니
왜 이리 구구절절 가슴으로 와닿던지...
그래서 연구원일때 최대한 많은 책을 보자구 했으니..
행여 나 말릴 생각 하지도 마슈....

중종은 38년 2개월을 집권을 했으니.
조광조가 중종 14년에 죽었으니,
24년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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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환
2007.07.06 13:02:01 *.143.170.4
잘 읽었습니다~^^ 항상 좋은일 가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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