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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4일 09시 24분 등록
들어가며...

중국의 범중암이 쓴 『악양누기(岳陽樓記)』 중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천하의 근심을 앞세운 뒤에야 제 걱정을 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세운 뒤에야 자기의 즐거움을 누린다.“

『백범일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지요.
“해외에 있을 때 나는 우리 후손들이 일본의 악정 때문에 주름을 펴지 못할까 봐 걱정하였었다. 그러나 걱정과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줄지어 다니는 학생들의 활발하고 명랑한 모습을 보니, 우리 민족의 장래가 촉망되었다. 이것이 기쁨이다. 그러나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집은 하나같이 땅에 납작하고 빈틈없이 이어져 있어, 생활수준이 나쁠 거라고 짐작하니 마음이 슬프고 답답하였다.”

나라의 근심과 즐거움을 먼저 생각한 백범 선생님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백범일지』를 읽는 동안 저는 흥분과 감동의 드라마를 보는 듯 하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원 과제 도서 중 이 책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조수아 해리스의 『NO 데이팅』이라는 책을 28살엔가 읽었는데, ‘아! 이 책을 5년 전에 읽었더라면...’ 하고 후회했던 적이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아트 블래키’라는 재즈 드러머의 음악을 듣고서는 내가 몇 년 전에만 재즈를 알았더라면 아트 블래키를 한 번 만나보려고 시도했을 텐데, 라고 아쉬워했던 적도 있었지요. 『백범일지』는 몇 년 만에 이런 후회감을 느끼게 했던 책입니다. 왜 이제야 보았을꼬,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느낌표의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 중에 『봉순이 언니』, 『괭이부리말 아이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는 보았는데, 왜 이 책을 보지 않았을까요?
이제라도 읽었으니 다행입니다.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닐 테니까요.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에는 훈련의 핵심이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읽은 것을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해외 동포들의 지원 편지를 받은 백범 선생님께서는 “민족운동의 큰 일이 무엇인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연구하기 시작“(p.213)했다는데, 저도 나의 삶에서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찾았습니다.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강연 내용을 계발하고 준비하여 강연 말미에 덧붙이는 것입니다. 제 강연에 참석한 이들에게 애국에 관한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작은 일이지만 신납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좀 더 많은 봉사 강연을 기획하고 행하여야겠습니다.

■ 민족의 큰 스승 백범 김구에 대하여

● 백범일지, 그 이후
- 충의의 사표가 된 민족의 큰 스승


1949년 6월 26일은 남한이 통곡 속에 빠진 날이었다.
이날, 경교장에도 초여름의 화창한 햇살이 쏟아졌다. 백범은 2층 거실에서 『중국시선』을 읽고 있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백범은 차가 없어서 교회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오전 11시가 조금 지나 포병 소위 안두희가 경교장에 나타나 백범 선생을 뵙기를 요청하였다. 이미 면담 중이었던 창암학원의 여선생이 나가고, 비서 선우진이 안두희를 백범의 방에 안내한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2~3분이 채 못 되어 2층에서 4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비서와 경비원이 올라갔을 때에는 이미 백범 선생이 운명하신 후였다. 12시 45분경, 향년 74세였다.

백범의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장례기간 동안 경교장을 찾은 조문객이 124만여 명에 이르렀고, 이은상이 짓고 김성태가 작곡한 조가가 방방곡곡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도 김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통곡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리영희는 며칠을 울면서 지냈다. 40년 후에도 백범 추도가의 가사와 곡을 잊지 않고 부를 정도로 백범 선생을 존경한 리영희 교수다. 백범을 향한 존경이 비단 리영희 교수뿐이겠는가. 조지훈 시인과 박두진 시인이 각각 백범을 기리는 시를 지었고, 자유중국의 총통 장개석 장군도 백범의 비보에 만사(輓詞)를 보내왔다.

나는 구루 중의 구루, 스승 중의 스승이라 불릴 만한 위인들을 대할 때에 온 몸이 짜릿해지는 전율을 느끼곤 한다. 나의 모습을 그들에 견주어 볼 때마다, 한없이 겸손함을 느끼게 되고, 고결한 삶을 향한 치열한 일상을 다짐하곤 한다. 백화점의 창시자이자 평신도 사역의 모델을 보여 준 존 워너메이커 장로가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평생을 섬겼던 모습을 담은 『성경이 만든 사람』을 읽었던 적이 있다. 당시 군부대 교회를 열심히 섬겼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아! 나는 정말 주일 봉사를 하는 축에도 못 끼는구나!’하고 겸손해졌던 동시에 더욱 몸을 부지런히 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20세기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위대한 전도자 조지 휫필드를 가리키어 이렇게 말했다. “조지 휫필드의 설교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일생 동안 진정으로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음을 느낀다.” 이처럼 만약에 나라를 향한 충의심을 말하고자 한다면, 나는 백범 선생과 가장 먼저 견주어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박두진 시인이 백범의 영전에 바친 시를 보았다.「오! 백범 선생」이라는 제목의 시인데, 마지막 절이 꼭 내 마음과 같다.

“뒷 날에 뉘 있어 스스로 나라를
사랑했다. 이를 양이면
스스로의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고
이제 白凡 가신 이의
생애에다 물어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나 나라를 사랑했다 생각하지 말아라.”
- 1949. 7. 6 경향신문

백범은 서산대사의 <답설야(踏雪野)>라는 시구를 좋아하였는데, 백범일지 전체가, 백범의 삶 자체가 이 시의 주석이 될 정도로 백범은 자신의 사상을 실천으로 이어간 위인이었다. 누군가가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하더라도, 그의 행동은 더욱 큰 소리라고 말하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백범 선생이야말로 충의의 모범이요, 우리 민족에게 훌륭한 사표가 되어주셨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삶의 푯대를 제시해 준 이들이 있을 때, 우리는 달려나갈 수 있다. 우리에게 흔들 깃발을 쥐어 준 이들이 있을 때, 우리는 힘차게 전진할 수 있다. 우리가 부를 만한 노래를 들려준 이들이 있을 때, 우리는 신명나게 춤출 수 있다. 『백범일지』를 읽으며, 나는 내가 살아가야 할 푯대를, 흔들 깃발을, 부를 노래를 찾았다. 특히, 나라를 향한 충의심에 대한 사표가 될 만한 어른을 찾은 기쁨에 참으로 가슴이 벅찼다.

- 피살자 안두희와 그 배후

1996년 10월 23일, MBC 뉴스데스크의 첫 번째 뉴스는 안두희 피살에 대한 소식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 씨가 결국 피살되었습니다.”

결국, 이라는 표현 속에서 그가 이미 여러 번 테러의 위기를 겪었음을 말해 준다. 안두희는 신의주 근방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 덕에 일본 유학을 가기도 했으나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다. 47년 서북청년회에 입단하면서 극단적인 반공주의자가 되고, 육사 8기를 나와 포병 소위로 입관한 후, 김지웅의 사주를 받고 씻을 수 없는 암살을 저지른다. 이로 인해,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1년도 안 되어 군에 복직되었다. 4.19 혁명 이후로는 열혈 청년들에게 쫓겨다니며 일생을 도피 생활로 지냈다. 1992년 김구 선생 참배 현장에서는 쓰러져 통곡을 하기도 했으나 너무 늦은 참회다. 하지만, 그도 이제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럼, 안두희를 피살한 이는 누구인가? 어떻게, 왜 죽였단 말인가?

1996년 10월 23일 오전 6시, 용의자 박기서(43) 씨는 민족정기구현회 권중희 씨에게 안두희 씨를 암살하겠다고 전화한 후, 오전 11시 30분 동거녀 김명희(63) 씨가 수퍼에 간 사이에 안두희 집에 들어가 준비해 간 방망이로 안씨를 살해했다. 용의자는 11시 40분 경에 “이런 사람을 살려둘 수 없다. 안두희를 죽였다”고 다시 권중희 씨에게 전화하였다. 사건 현장의 안씨 옆에는 40cm의 정도의 몽둥이가 있었고, 몽둥이에는 ‘정의봉’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안두희의 삶을 추적해 온 스토리가 담긴 책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권중희 저)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는 이날 오후 7시쯤 자수하였다. 백범 암살의 배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건 당사자인 안두희가 피살됨으로 역사의 진실과 그 배후는 미궁으로 남게 되었다.

백범 암살은 한국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암살 이후,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정권 차원의 암살이었기에, 정부는 이 사건의 진상 규명에 아무런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안두희는 비록 쫓기는 일생이었지만, 역사의 심판대에 제대로 선 적이 없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안두희가 정권의 비호 아래 백범 암살의 정당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상을 밝히려는 신문기자들, 역사학자들, 백범시해진상규명위원회 등의 희생적 활동으로 사건에 대한 사실은 거의 밝혀졌다. 김구 선생의 평전을 쓴 김삼웅 씨는 백범 암살이 치밀하게 계획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고 못 박았다.

“백범 암살 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 안두희는 그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암살자에 지나지 않았다. 김지웅은 암살 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하였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그 일차적 배후는 군부 쪽이었다.
(중략)
백범 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역시 이승만과 미국의 관련성이다. 이승만의 경우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우선 도덕적 책임이 있다. 또한 사건 뒤처리에서 개입한 것이 확인된다. 다만 암살 사건에 대한 사전 개입과 지시는 불투명한 편이다.
미국의 경우 우선 백범의 정치 노선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암살 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미국 역시 백범 암살에 대한 구체적 지시나 명령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정권적 암살이기에 피살 이후, 백범의 노선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김삼웅 씨는 이렇게 암살 그 이후에 벌어진 정권의 만행을 설명했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이 효창원 백범의 묘지를 찾는 것도 차단하였고, 암살범 안두희의 이름으로 『시역의 고민』이란 책을 내어, 백범 정신을 ‘부관참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21세기에도 살아있는 백범 신화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백범김구선생시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가 구성되고 40여 개 애국단체가 연계하여 진상규명 활동을 벌였고, 1969년 8월 23일에는 서울 남산에 백범 동상이 건립되고 주변 지역을 백범광장이라 명하였다. 백범 서거 50주기가 되는 1999년에는 『백범김구전집』 12권이 발간되었으며, 21세기가 시작된 무렵인 2002년 10월 22일에는 효창원에 웅장한 백범기념관이 개관되었다. 개인기념관으로서는 규모나 진열 자료에 있어서 국내 최고의 수준이라 하니,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백범 선생의 업적에 걸맞는 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이러한 정책적인 복원에 더하여, 국민 개개인이 선생의 충의와 사상을 받들어 문화 선진국가를 만들어가야 하리라. 김삼웅 씨는 『백범 김구 평전』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백범의 생애는 여전히 ‘마침표’ 없는 정도의 표지판이다.” 그 정도의 표지판을 따라 우리도 부모를 위하여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힘껏 살아야 하리라.

●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백범 선생은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외적과 싸웠던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8세에 동학에 입도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사상을 철저히 실천한 행동주의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정의 앞에서 용감하였으며, 불의 앞에서는 단호하였다. 최시형 교주로부터 접주의 첩지를 받고 농민 전쟁에 참여하였다. 비록 성공하진 못하였지만, 행동하는 리더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였다.

대동강변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를 홀로 처단하는 사건은 백범의 일생이 왜적을 대적하며 고난과 충의의 길을 걷게 됨을 암시하는 복선과 같은 장면이다. 인천 감옥에 붙잡혀 갔을 때, 백범은 단근질의 고문에도, 서슬퍼런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올곧은 기개를 보인다. 이미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였다. 그가 독립운동의 중추적 지위에 오른 것을 훨씬 뒷날의 일이지만, 나는 치하포 사건 때부터 백범을 존경하게 되었다. 백범의 올곧은 기개와 타협할 줄 모르는 정의는 나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장면은 가슴이 떨리면서도 통쾌함을, 비장하면서도 감동을 안겨다 주었다. 치하포 사건으로 잡혀간 김창수가 와타나베에게 던진 말이다.

“만국공법 어디에 통상화친조약을 맺은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라는 구절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살면 몸으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으리라!”

비범한 기개로 자라난 청년 김창수는 후일 백범이라는 호를 갖고 나라를 위한 보다 체계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그 중간에 신서적을 통한 교육이 백범의 사상을 한단계 성숙시켰던 과정이 있다. 청년 백범은 왜놈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 애국이라 여겼다면, 청년 이후의 백범은 교육과 개화가 나라의 살 길이라 굳게 믿게 된다. (청년 김창수의 결심은 이러했다. “죽는 날까지 왜놈의 법률을 하나라도 파괴할 수 있다면 그리하고, 왜놈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서는 맛보기 어려운 삶의 진수를 맛보리라 결심하였다.” 『쉽게 읽는 백범일지』p.170)

임시정부가 위기에 몰리고 정체성이 흔들렸던 시기에는 해외로부터의 원조까지 끊어져서 백범에게도 매우 힘겨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백범은 굴하지 않는다. 나라를 위한 더 큰 뜻을 품고,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들이 거사를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 독립운동의 총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또한 광복군을 창군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제와 싸워나갔다. 후일 해방이 되었을 때, 훈련해 온 광복군의 활동을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광복군을 향한 애착도 강했다. 국제 정세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통해 미 ․ 영 ․ 소 3국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다짐받기도 했다. 이 모든 활동을 통해 혁명가적 독립운동가 백범을 만날 수 있다. 백범의 일차적 역할은 분명 독립운동가였다.

●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의 백범

“백범은 사상가이거나 철학자 이전에 혁명가이고 독립운동가이다. 생사를 다투는 망명생활중에 심오한 학문과 사상을 탐구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 혁명가는 전지(戰地)에서도 틈나는 대로 건국 후 조국의 미래상을 그리고 특히 해방 후에는 많은 연설과 언론 기고를 통해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표명하였다.” - 김삼웅

많은 행동하는 지성인들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신념을 형성하는 시기가 있듯이, 백범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간디와 마틴 루터 킹 같은 분들은 왠지 책상보다는 현장이 더 잘 어울리는 분들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전기를 읽으며, 젊은 시절에 많은 시간을 독서에 매진하였던 사실을 공통적으로 발견하였다. 목숨도 불사하는 그들의 열정과 용기, 그리고 기개는 그들의 확고한 신념에서 왔고, 그 신념은 확실한 앎에서 왔다. 그 확실한 앎은 열린 마음으로 여러 이론을 받아들인 결과다. 이 학습의 한 가운데에 ‘독서’가 있었다.

백범도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기를 즐거워하고 열심을 내었다. 백범일지의 곳곳에서 어린 창수가 글공부를 갈망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새로운 선생이 오신다 할 때, 새 옷을 입고 마중을 나가는 모습의 창수가 머리속에 선명히 떠오른다. 또한, 백범일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갯길을 쏜살같이 넘나들며 학문을 배웠다.”

그는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옥에 있을 때에도 신서적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받아들였다. 이 때가 백범의 사상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다. 그러니 치하포 사건은 독립운동가로서나, 사상가로서의 백범이 형성되는 시기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그 이후 백범의 삶 곳곳에서 민중을 향한 교육 열정을 찾아볼 수 있다. 왜적의 눈을 피해 숨어 살아갈 때에도 늘 교육에 힘을 쏟았고, 해방 이후에는 더욱 본격적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백범은 의무교육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백범의 건국 이념은 삼균주의에 따른 교육 중시의 정책이었다. 요컨대, 백범은 교육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으며, 훌륭한 교육자가 되기 위하여 공부하는 가운데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갖추었기에 사상가로서의 면모도 갖추었다는 것이다.

『백범 김구 평전』의 저자 김삼웅 씨는 자신의 책을 통해 백범 사상의 핵심을 ‘문화국가 건설’로 정리하였다.
“백범이 젊은 시절이나 망명기나 환국하여서나 일관되게 추구해온 가치관은 이상적인 문화국가의 건설이었다. ‘독립사상’을 백범의 기본 철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독립 사상은 민족주의와 자유민권 사상, 문화주의라는 세 바퀴로 얼개가 짜여지고, 민족주의와 자유민권 사상은 문화국가 건설을 위한 수단이라고 할 때, 기본 가치는 문화국가의 건설이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해방을 맞아 백범의 문화국가 건설의 이상은 더욱 구체화되고 실천적인 방향으로 제시되었다.” (p.563)

해방 후 나라로 돌아온 백범은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 양성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의 대부분이 친일파 자손이거나 민족 반역자의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47년 3월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였고, 이 작은 학교는 백범이 암살되어 해체되기 전까지 9기까지 이어졌다. 매 기수의 교육인원이 100명 내외였으니 백범의 지휘 아래 뜻을 지닌 선생님들이 모여 900여 명의 애국 청년들을 양성해 냈던 것이다.

백범은 교육이 중요하다는 원론만 제창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지금 딛고 서 있는 땅을 내려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군정이 1946년 8월 서울에 종합대학을 설치하고자 ‘종합대학안’을 발표하였을 때, 백범은 단순히 찬반 의견을 넘어 자신의 교육 원칙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자신의 교육론을 역설하였다. “종합대학안에 관해서는 선진국가의 학제로서 이미 그 성과로 보아 무조건으로 그 제도를 반대할 의사는 없다. (중략) 그러나, 그 운영이 기개 관료 손에서 좌우될 가능성이 있다면 이는 당연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득이 종합대학안을 실시한다면 학원 자유정신에서 민주주의 원칙을 토대로 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민주주의 교육 원칙’을 설파했던 것이다.

끝으로, 사상가로서의 백범의 진수를 보여주는 명문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나의 소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이상향을 펼쳤다. 이는 백범의 문화국가 건설론으로서 백범 사상의 핵심임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백범의 비전이 나에게 생생하게 다가섬이 느껴졌던 글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는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인류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에게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됙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중략)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이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고의 문화를 건설하는 사명을 달성할 민족은 한마디로 말하면 국민 모두를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데 있다. 대한 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백범의 문화주의와 평화 사상은 평생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혁명 철학과는 다소 상이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 백범의 또 다른 모습이다. 위인들은 종종 상호 배타적인 업적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평화 사상이 깔린 문화국가 건설론을 주장하는 혁명적 독립운동가 백범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 효자 백범

“백범 김구 선생은 사천이백구년 병자 음 칠월 십일일 자시 해주 백운방 터골 안동 김순영 현풍 곽낙원의 외아들로 나 해주 최춘례 맞어 인, 신 형제 두니라.
글을 즐겨 읽어 십칠세에 과거보다. 아버님 임종에 살어여 먹이더니 늙어도 어머님 가르침 받더라.”
1949년 12월 24일, 백범이 피살된 지 6개월이 지난 후, 백범의 묘지에 비석이 세워졌다. 위 글은 그 비문에 새겨진 백범 일생의 첫 부분이다. 아버님 임종에 살어여 먹이고, 늙어서도 공손히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아들로서의 백범을 간단히 서술해 두었다. 백범은 효자였다.

다산은 공부를 하는 목적을 효제(孝悌)의 마음을 기르는데 있다고 했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서 정민 교수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있게 지내는 정신이 다산 학문의 바탕에 깔려 있다고 말한다. 효자의 집에서 충신이 난다는 말은 백범을 위한 말이다. 백범은 나라에 충의를 다하는 동시에,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버님을 살려내기 위하여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내어 먹을거리를 만들어 드렸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어머님 앞에서는 항상 겸손한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아니하였다. 아버님의 임종 순간을 설명한 백범일지의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서 가슴이 뭉클하다.

산골 가난한 집에서 이름 있는 의사를 부른다거나 기사회생의 명약을 드시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님께서 손가락을 자르신 것도 이런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또 그리한다면 어머님의 마음이 상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이 계시지 않는 틈을 타서 왼쪽 넓적다리 살을 한 조각 베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살을 베어 내려 했으나, 살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처음보다 천백 배 용기를 내어 다리 살을 베었지만 두 번째는 결국 베어 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떼어 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백범은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다.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였고,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다. 부모님께는 지극한 효심으로 인간됨의 도리를 다하였고, 나라를 위하여는 목숨까지도 두렵잖게 여기는 충신이었다. 이제 백범일지를 통하여 백범의 영웅다움을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 백범 피살 장면은 김삼웅 저,『백범 김구 평전』 p.584를 요약 참조하였음.
- 안두희 씨 피살 사건은 다음 영상을 보고 참조하였음. (1996년 10월 23일 MBC 뉴스데크스)
[동영상 http://cafe.naver.com/tvradio.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8505]
- 백범김구기념관 http://www.kimkoomuseum.org/

■ 내 마음에 들어온 글 귀

[3] 윤봉길 의거 이후 중일 간의 전쟁으로 일시적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게 되었으나, 나는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어 살아남아 다시 민족운동의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4] 끝에 붙은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지금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개요를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민족이 국가를 세워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한 채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존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4]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5] 나도 비록 늙었으나 앞으로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는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백범 아버지의 의로움
[20]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의 영웅들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참지 못하셨다. 그러므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존경했고 양반들은 무서워서 피하였다.
→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모든 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악한 이는 나를 미워하고, 선한 이는 나를 좋아하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나는 그러지 못하니 부끄럽다.
[23] 사실대로 말씀드리자 아버님은 다시 그런 짓을 하면 엄벌하겠다고 꾸중만 하셨다.
→ 이는 백범의 아버지가 다혈질의 감정적인 사람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의로운 자였고, 아들에게는 너그러움을 보여주었다.

배움을 향한 백범의 열정
[25] 선생님이 오시는 날, 나는 너무 좋아서 머리 빗고 새 옷 입고 마중 나갔다.
[27] 책은 빌려서 읽고, 어미님이 품을 팔아 먹과 붓을 사 주셨다.
[27] 나는 어찌하든지 실용문 이상의 글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28]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갯길을 쏜살같이 넘나들며 학문을 배웠다.

[32]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42] 이동엽은 나 대신 우리 부대의 영장 이용선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호령하였다.
“이용선은 나의 지휘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니, 그를 죽이려거든 차라리 나를 총살하라!”
→ 소년 백범의 정의와 두려움 없는 기개가 놀랍다.

[47]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이르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상심 말게.

[47] (김창수(백범)의 스승 고능선)
청계동에서 만난 백범의 진정한 첫 스승이다. (중략) 고능선의 의리관과 사생관은 백범에게 평생 깊은 영향을 미쳤다.

[48] 그날부터 나는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겠고, 고선생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날마다 고선생 사랑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선생은 책을 차례대로 가르치지 않고,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 주고 빈 구석을 채워 주는 구전심수(口傳心受 말로써 요체를 전하여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함)의 방법을 이용하셨다. 선생은 주로 의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아무리 뛰어난 재주와 능력이 있어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 실행 ․ 계속의 세 단계를 밟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62] (백범의 아버지가가 백범에게) “고선생은 네 인중이 짧은 것이나 이마가 두툼한 것, 그리고 걸음걸이 등이 범의 모양을 타고났다고 하시며, 장차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 날이 있을 것이나 두고 보라고 하시더라.“
고선생이 그처럼 나를 촉망하신다니 나는 더욱 책임감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고, 또 그 성의를 감당키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3. 질풍노도의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67] 나는 그 놈의 행색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많은 진남포 맞은편이므로 왜인들이 본래 행색대로 다니는 곳이다. 그러니 저놈이 보통 장사치나 기술자라면 굳이 조선사람으로 위장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혹시 저자가 우리 국모를 시해한 이무라가 아닐까? 만일 미우라가 아니더라도 그놈과 공범인 것 같다. 여하튼 칼을 차고 숨어 다니는 왜인이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독버섯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니 내가 저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치욕을 씻어 보리라.

[69] 나는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았다.
“너는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그렇다. 그러니 지금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치하포 사건 묘사
[70]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크게 호령하며 그 왜놈을 발길로 차서 거의 한 길이나 되는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바로 쫓아 내려가서 놈의 목을 힘껏 밟았다. 세 칸 방의 문들이 일제히 열리면서 사람 머리들이 다투어 나왔다. 나는 사람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누구든지 이 왜놈을 위해 내게 덤벼드는 자는 모두 죽이리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금 내 발에 밟혔던 왜놈이 칼날을 번쩍이며 달려들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그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손목을 힘껏 밟으니 칼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 칼로 왜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피가 샘솟듯 마당에 흘러넘쳤다. 나는 손으로 그놈의 피를 움켜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 2001년도였던 것 같다. 여자 친구와 함께 오락실에서 오락을 하는데, 깡패같은 사람(깍두기 머리에 강호동 체격, 인상은 박진영) 한 명이 오락실에서 약간의 난동을 부렸다. 누가 저 사람 혼을 좀 내 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러봐도 제 체구를 당해 낼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약한 자들은 힘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는가. 나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오늘 내가 보여주자. 나의 이 한 번의 응징으로 그 사람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일이 그의 삶에 여러 번 반복되면 그도 개선될 날이 올 것이다. 오늘 내가 그 한 번의 벌을 만들어보리라.’
이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나는 그를 한 방 때린 후에 도망치는 계획을 세웠다.
여자 친구는 다음 지하철역 정거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먼저 보냈다. 순순히 내 말에 따랐는데 훗날, 내 눈빛을 보니 말릴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단다. 여자 친구가 떠나고, 나는 오락실 주변을 살펴 작은 몽둥이 하나를 구하였다. 그의 다리를 후려치고 도망갈 작정이었다. 홀로 남은 오락실에서 많이 떨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오락실을 나섰다. 나도 따라 나왔다. 골목길에 접어드는 그를 쫓아가는 나의 두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후들거렸다.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 깡패 같은 사람이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타 버렸다. 타이밍을 놓쳐버린 나는 그 사람의 차에다가 몽둥이를 던지고, 냅다 달려 도망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면서 나는 그가 차 문을 열고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테니 못 쫓아왔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길 가에 주차된 차 뒤에 숨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 거구가 불과 10미터 앞에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으악!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심장이 뛰었다. 달리고 또 달렸다. ‘잡히는 맞아 죽는다’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장 안으로 달렸는데, 막다른 골목이었다. 어떡하지, 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담장을 넘었다. 빌딩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지하주차장으로 뛰어가는데, 조용한 주차장에 울려퍼지는 내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곧이어 그의 발자국 소리도 들렸다. 주차장 설비가 있는 큰 공간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벽에 달린 간이용 계단을 타고 올랐다. 큰 물탱크 같은 것이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올라가서 바짝 누웠다. 아래 쪽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물탱크의 위에 큰 대 자로 드러누웠다. 그렇게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 숨을 죽인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그 곳에 있었다. 물탱크도 많고, 복잡한 설비 시설도 많아 못 찾을 것 같은 안도감이 들고 인기척이 사라진 지도 오래 되었지만,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숨어서 기다릴 수도 있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살그머니 내려가서 뛰어내려왔던 주차장 입구가 아닌 건물 1층으로 올라갔다. 수위 아저씨가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었고, 나는 사정이 있으니 1층 현관문을 열어달라고 부탁드렸다. 나는 쫓기고 있다고, 그러니 횡단보도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면 곧장 뛰어나가겠다고 했다. 녹색신호에 불이 들어오고, 나는 건물 1층 현관을 지나 대로를 건넜다. 그리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가서 지하철을 탔다. 밝은 곳에 나오니 그 사람을 만나게 될까 덜컥 겁이 났는데 지하철을 타고 나니 이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이 무척 졸였나 보다. “안심이 되었다”라고 쓰는 순간에 크게 숨을 내쉬는 나를 보며 웃는다.)
나의 옷은 연탄재를 나르는 사람처럼 기름때와 먼지로 검게 변하였다.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다음 정거장에 내리니 여자 친구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웠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 숨과 함께 활짝 웃을 수 있었다.


[75] 형을 집행하라는 호령이 나자 사령들이 내 두 발과 두 무릎을 한데 찬찬히 동이고 다리 사이에 붉은 몽둥이 두 개를 들이밀었다. 한 놈이 몽둥이 하나씩을 잡고 좌우를 힘껏 누르니 단번에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내 왼다리 정강마루에 있는 큰 상처자국이 바로 이때 생긴 것이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76] “어머님은 자식이 이번에 죽을 아십니까?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죽였으니 하늘이 도우실 테지요.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너의 아버님과도 약속하였다. 네가 죽는 날이면 우리 둘도 같이 죽자고.”

[79] 내 옆 의자에 와타나베라고 하는 왜놈 순사가 걸터앉아서 방청인지 감시인지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서 “이놈!”하고 큰소리로 죽을 힘을 다해 호통을 쳤다.
“만국공법 어디에 통상화친조약을 맺은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라는 구절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살면 몸으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으리라!”
통렬히 꾸짖는 서슬에 겁이 났던지 와타나베는 욕을 하며 대청 뒤쪽으로 숨고 말았다.

[79~80]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백성의 의리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왕을 죽여 복수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국모상이라고 흰 갓을 쓰고 있는데,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흰 갓도 쓰지 아니한다는 구절을 읽어 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이재정과 김윤정을 비롯하여 관리 수십 명의 얼굴이 달아올라 홍당무 빛을 띠고 있었다.

[83~84] “나는 인천항에 사는 아무개올시다. 당신의 의기를 사모하여 신문장에서 얼굴을 뵈었소이다. 설마 오래 고생하려고요. 안심하고 지내십시오. 출옥 후 반가이 뵙시다.”

[85] 와타나베가 직접 내게 말했다.
“네가 그처럼 충의가 있는데 어찌 벼슬을 못하였느냐?”
“나는 상놈이기 때문에 작은 놈밖에 죽이지 못했다. 그러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을 것이다.”

[85] 감옥에 있는 동안 나는 무엇보다 책 읽기에 힘썼다. 아버님이 『대학』 한 질을 사 넣어 주셨으므로 매일 그것을 읽고 외웠고, 또한 신서적도 많이 읽었다.

[86] “낡은 구지식과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 ․ 문화 ․ 경제 ․ 도덕 ․ 교육 ․ 산업이 어떠한지 연구하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받아들여 나라의 살림살이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이 시대 영웅이 할 일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하지 못하오. 그러니 창수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히 신지식을 구하여 큰 일을 하여야 하오.”
→ 젊은 청년 김창수는 이리하여 『세계역사』,『세계지지』 등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역시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백성을 구할만한 사상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통하여 만들어진다. 백범, 마틴 루터 킹, 간디 등 너무나도 흡사한 독서 경험이 있었다. 백범 선생은 김창수 시절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나는 죽을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작정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읽었다.”

[86] 신서적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청계동에서는 오로지 고선생만을 하나님처럼 여기고 섬겼으나, 그 분의 말과 행동이 다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옥에서 알게 되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는 세계 각국에서 배워 적용하는 것이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선생이 망해 버린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 이백 몇 년’을 써서 제문을 읽던 것이나, 양학을 한다는 이유로 안진사와 절교한 일도 잘한 일로 보이지 않았다.
→ 언젠가 나의 제자들이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지성이 연마되어 또 다른 스승을 찾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87] 감옥에서 두 번째로 정성을 쏟은 일은 교육이었다. “김창수가 들어간 후로는 인천감옥이 학교가 되었다”고 쓴 기사도 났다.

[87] 어느 날 아침 신문을 보니, 강도 누구누구, 살인 누구누구 등과 함께 김창수를 교수형에 처하도록 건의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조금도 산란하지 않았고, 식사와 책 읽기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소처럼 하였다. 고선생의 가르침 중에 조선시대의 명신 박태보가 단근질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오히려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했다는 일화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가 처형당한 홍익한, 윤집, 오달재 등 삼학사에 관한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다.

[88] 나 역시 아침 저녁을 잘 먹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있었다. 그러나 동료 죄수들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그동안 내게 음식을 얻어먹고 글을 배우던 죄수들이 얼마나 슬퍼하며 우는지, 과연 제 부모가 죽을 때에도 그렇게 할지 의아할 정도였다.“

[90] 백범의 사상적 궤적은 동학, 의병, 애국계몽운동 등을 거치면서 고종과 왕실에 대한 인식에 일정한 변화를 겪는다. 치하포 사건은 왕실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고, 고종도 교수형을 최종 재가하지 않아서 김창수는 탈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개화사상을 접한 김창수는 탈옥 이후 스승 고능선을 만나 임금과 탐관오리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국권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백범은 환등기로 고종 대황제의 어진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국궁을 시키는 등 우호적인 입장으로 다시 바뀐다.
→ 나는 위인들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91] 방망이로 차꼬 등을 두들기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푸른 바지저고리 죄수복 차림으로 춤도 추면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이 마치 배우들의 연극장 같았다.
→ 백범이 사형을 면한 것을 기뻐하는 동료 죄수들의 모습이다. 얼마나 고매한 인격이었으면 함께하던 동료들이 이렇게나 기뻐하게 될까? 힘겨울 때 인격이 드러나는 법이고, 사형을 당하고도 의연하게 행동하고, 감옥에서 많은 이들의 사표가 된 백범의 모습은 실로 존경할 만하다.

[91] 어머님도 그날 밤 감리서의 전갈을 받고서야 비로소 이 일을 알게 되셨다. 이 일로 인해 누구보다도 어머님이 당신 아들을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셨다.

[151] 그(이재명)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 공부했고, 조국이 왜놈에게 강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귀국하여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 몇 놈을 죽이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도 한 자루, 단총 한 정과 이완용 등의 사진 몇 장을 품 속에서 내놓았다. 뉘 알았으랴, 그가 며칠 후 경성 명동에서 군밤 장수로 가장하고 이완용을 공격하여 조선 천지를 뒤흔들어 놓을 이재명 의사인 줄을. 우리는 그를 단지 시세의 격변 때문에 헛된 열정에 들뜬 청년이라 여겼다.
→ 그리하여 백범 측은 이재명에게서 총과 칼을 맡기라고 설득하였고, 며칠 후 총을 맡긴 이재명 의사가 홀연히 나타나 자기 물건을 돌려 달라고 하였지만 돌려주지 못했다. 훗날, 이재명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애석하게도 이완용을 죽이지는 못했다. 백범은 이렇게 한탄한다.

[152] 만약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이다. 우리가 눈이 멀어 그의 행동을 간섭하고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 아...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던진 이재명 의사. 그의 기개와 정신에 감동하고, 이완용의 목숨을 끊지 못함에 분하고 원통하다. 나도 이러한데 백범 선생님은 얼마나 안타깝고 분하였을까.

[93] “지금 정부대관들은 모두 돈독이 올라서 돈을 안 쓰면 김창수를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산을 전부 팔아 김창수의 부모님을 모시고 경성에 올라가 석방을 주선하겠다.”

[94] 그러는 동안 김주경의 돈도 바닥이 났다. 마침내 그는 소중을 중단하고 돌아와서 내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요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 물고기가 아니리.
나라에 대한 충도 부모에 대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님을 생각하소서.
→ 김진경의 창수 섬김(^^)이 눈물겹다. 의인은 의인을 찾고 서로 돕는다. 다음의 글을 보라. ‘의인들의 소개팅’은 고독한 의인들을 묶어주는 멋진 수단이다.

[123] 하루는 이천경이 편지 한 장을 써 주며 무주 읍내의 이시발에게로 가라 하였다. 찾아가 편지를 전하니 하룻밤을 묵게 하고는, 이시발이 또 편지 한 장을 주며 지례군 천곡의 성태영을 찾아가라 하였다. 찾아가니 성태영은 나를 최고의 손님으로 대우해 주었다. 한 달 남짓 여유로운 생활을 하며 보냈다. 하루는 유완무가 성씨 집에 찾아왔다. 성태영과 유완무는 창수라는 나의 이름이 불편하다 하여 김구로 고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정해 주었다.

[124] “연산 이천경이나 지례 성태영은 모두 내 동지입니다. 우리는 새 동지가 생기면 반드시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1개월씩 함께 지냅니다. 그리하여 각자 관찰하고 시험한 것을 모아서, 벼슬살이가 적당한 자는 벼슬자리를 주선하고 상업이나 농사에 적당한 인재는 상업이나 농사일을 하게 하고 있소. 동지들이 시험한 결과, 연하(백범)는 아직 학식이 부족하니 공부를 더 해야 하오. 경성 방면의 동지들이 전적으로 마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도록 할 것이오. 또 연하는 상민 계습 출신이니 불가불 신분부터 양반에게 눌리지 않도록 지금 연산의 이천경이 갖고 있는 집과 논밭, 그리고 가구 전부를 그대로 연하의 부모가 사용할 수 있도록 주려 하오. 그 고을의 큰 성씨 몇몇만 잘 단속하면 족히 양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오.”

[102] 선생은 내 나이가 어린 것과 의관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는 초면에 낮춤말을 썼다. 나는 정색하고 선생을 나무랐다.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이 그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소? 내가 일시 운수가 나빠 길에서 도적을 만나는 바람에 이 모양이 되었으나, 결코 선생께 하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오.”
→ 이런 대장부다운 기질은 나에게도 조금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111] 하룻밤 사이, 청정법계에서 속세의 만 가지 생각이 다 없어진 듯하여 중이 되기로 승낙하였다.
→ 이 갑작스런 결정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김창수의 이 결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다음을 보라.

[113] 불가에 입문하였지만, 나는 아직 세상과 인연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절에는 잠깐 숨어 있으려고 들어온 것이지, 불교에 일생을 바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 자꾸 속세의 이런 저런 일들이 생각났다.

[114] 무술년 3월, 내가 탈옥하자마자 부모님은 해주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곧 뒤따라온 인천 순검에게 바로 체포되어 두 분 다 인천감옥에 갇히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곧 풀려나셨지만, 아버님은 근 1년 뒤에야 석방되셨다고 한다.
→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정말 무한하고 깊다.

[127] 아, 슬프다!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만에 하나라도 내게 아름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구전수심하신 훈육의 덕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 애통하다!
→ 백범의 첫 스승이라고 할 만한 고선생이 돌아가신 후, 스승을 그리워하는 백범

[128] 산골 가난한 집에서 이름 있는 의사를 부른다거나 기사회생의 명약을 드시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님께서 손가락을 자르신 것도 이런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또 그리한다면 어머님의 마음이 상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이 계시지 않는 틈을 타서 왼쪽 넓적다리 살을 한 조각 베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살을 베어 내려 했으나, 살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처음보다 천백 배 용기를 내어 다리 살을 베었지만 두 번째는 결국 베어 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떼어 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129] “자네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만나보고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130] “나는 지금 약혼을 한다 해도 탈상 후에나 결혼할 것이니, 그동안 낭자가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학문을 한다는 조건입니다.”

[132]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신교육은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 지키던 자들이 예수교에 투신함으로써,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 사정을 알게 되어 신문화 발전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 학문을 배우지 못하였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들은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종서는 그때 전도사였다. 동학 시절 이후 나와 여러 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예수교 신봉을 힘껏 권하였다. 나도 탈상 후에는 예수도 믿고 신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1903년 가을, 백범은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그래서 장모도 금동 김윤오 집으로 인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였다.

[136] 그때(11월 27일)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등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이준이 상소문을 짓고, 평양의 최재학을 선두로 다섯 대표가 서명하였다. 상소하면 사형될 것이요, 사형되면 다시 다섯 사람씩 몇 차례든 계속 상소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놈 순사대가 달려왔다. 다섯 사람이 일시에 순사들을 향해 달려들며 내정간섭을 규탄하였다. 왜놈들의 칼이 번쩍거리는 가운데 다섯 지사는 맨손으로 싸웠다. 우리는 근처에서 그들을 호위하며, “왜놈이 국권을 강탈하고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데, 우리 인민은 원수의 노예가 되어 살 것인가, 의롭게 죽을 것인가?”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138] 아무리 사정이 급하여도 민중이 깨닫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당시 민중의 애국 사상은 얕기만 하였다. 경성에 모인 동지들은, 신교육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도 황해도 장련 사직동으로 돌아와 다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였다.

[142]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탓할 수 없으나, 너는 어른 된 표시로 상투 짜고 초립을 쓰고서도 부모와 어른에게 공대할 줄을 모르니 부끄러운 줄 모르느냐? “ 하고 꾸짖었다. 그러자 두환이 물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공대를 하오리까?“ ”잘못인 줄 아는 시간부터니라.“

[142] 나는 할 수 없이 얼레빗, 참빗을 사다 두고 매일 몇 시간씩 학생들 머리를 빗겼다. 점차 아동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학과 시간보다 머리 빗기는 시간이 많게 되다 보니, 하나둘씩 부모님의 승낙을 얻어 머리를 깎아 주었다.

[143] 두환은 사람됨이 총명하고 망국의 한을 같이 느낄 줄 알았다.(이후 손두환은 임시 정부의 의정원 의원을 역임하는 등 백범을 따라 독립운동을 하였다.)

[144] 청년 중에 혹 쓸 만한 인재가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겉모습뿐 아니라 정신까지 상놈이 되어,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도 알지 못하는 밥벌레들에 불과하였다. 교육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으나, 신학문을 예수교나 천주교로만 알았다.

[144] 여하튼 양반의 힘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나라가 망하게 되니 양반부터 저 꼴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 더 받더라고, 양반이 살아나서 나라가 독립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감상이 일었다.

[144] 그는 나라 망한 책임이 당국자에게만 있고, 자기 같은 시골 늙은이는 관계없는 것처럼 대답했다. 참으로 양반 중의 상놈이라, 나나 저나 상놈이기는 마찬가지라 여겨졌다.

[151] 그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 공부했고, 조국이 왜놈에게 강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귀국하여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 몇 놈을 죽이기 위해 준비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도 한 자루, 단총 한 정과 이완용 등의 사진 몇 장을 품 속에서 내놓았다. 뉘 알았으랴, 그가 며칠 후 경성 명동에서 군밤장수로 가장하고 이완용을 공격하여 조선 천지를 뒤흔들어 놓을 이재명 의사인 줄을. 우리는 그를 단지 시세의 격변 때문에 헛된 열정에 들뜬 청년이라 여겼다.

[151] 만약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이다. 우리가 눈이 멀어 그의 행동을 간섭하고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다.

[170] 죽는 날까지 왜놈의 법률을 하나라도 파괴할 수 있다면 그리하고, 왜놈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서는 맛보기 어려운 삶의 진수를 맛보리라 결심하였다.

[206] “우리가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지휘나 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공산혁명을 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오.”
이에 나는 강경한 어조로 말하였다.
“독립운동이 우리 민족의 독자성을 떠나 제3자의 지도나 명령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자주성을 상실한 의존적 운동일 뿐입니다. 임시 정부의 헌장에 위배되는 말씀은 크게 옳지 못하니, 아우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고, 도리어 자중하실 것을 권고합니다.”

[212] 애초에 나는 임시정부의 문지기 되기를 원하였으나, 끝내는 경무국장 ․ 내무총장 ․ 노동총판 ․ 국무령 ․ 국무위원 ․ 주석으로 중임을 거의 다 역임하였다. 이것은 나 개인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인재난과 경제난 때문이었다.

[218] 그러므로 내 생일 같은 것은 입 밖에 내지도 않고 지냈는데, 1925년 8월 29일 나석주가 식전에 고기와 채소를 많이 사 가지고 와서 어머님께 드렸다.
“오늘이 선생님 생신이 아닙니까? 돈도 없고 해서 옷을 전당잡혀 고기 근이나 좀 사 가지고 밥해 먹으러 왔습니다.”
나는 나석주에게 그처럼 영광스럽게 대접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하고, 그간 생신을 차려 드리지 못한 어머님께도 너무나 죄송하여, 죽는 날까지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219] 내 일생에서 제일 큰 행복은 기질이 튼튼하게 태어난 것이다.

[223] 독립운동도 잘 안 되고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 무슨 일이든 과감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255] 우리 민족의 비운은 대체로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의 실질적인 행복은 내 모른다 하고, 창시자 주희 이상으로 성리학만 주창하여 사색당파로 수백 년이나 다투어 왔으니, 민족 원기는 다 닳아 없어지고 남에게 의지하려는 생각만 남았다. 이러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으리오.

[255] 청년들은 중국 정자와 주자의 방귀조차 향기롭다는 옛사람들을 비웃지만, 같은 입과 혀로 러시아 레닌의 방귀는 달다 하니, 정신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자 ․ 주자 학설의 신봉자도 아니고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위해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272] 어머님 곽낙원 여사는 백범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며, 백범의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279] 이를 지켜본 미국 교관은, 앞서 중국 학생 400명을 모아 놓고 시험하였을 때도 얻지 못한 결과를 한국 청년 7명은 해냈다며, 참으로 앞날이 촉망되는 국민이라고 크게 칭찬하였다.

[289] 고국을 떠난 지 근 27년, 1945년 11월 23일 상해에서 미국 비행기를 타고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당시 기쁨과 슬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해외에 있을 때 나는 우리 후손들이 일본의 악정 때문에 주름을 펴지 못할까 봐 걱정하였었다. 그러나 걱정과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줄지어 다니는 학생들의 활발하고 명랑한 모습을 보니, 우리 민족의 장래가 촉망되었다. 이것이 기쁨이다. 그러나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집은 하나같이 땅에 납작하고 빈틈없이 이어져 있어, 생활 수준이 나쁠 거라고 짐작하니 마음이 슬프고 답답하였다.

[305]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내 칠십 평생 이 소원을 위해 살아 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으며, 미래에도 이 소원을 달성하려고 살 것이다. 칠십 평생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겪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군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독립한 제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이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신라의 총신 박제상이 “차라리 계림(신라)의 개와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제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제상은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 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는 신조 때문이었다.

[307]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307] 이처럼 모든 사살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문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의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라.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308]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랑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308]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309] 나는 우리나라의 청춘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기꺼이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쓴다면 30년이 못 되어, 남들이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볼 정도로 우리 민족은 대대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309]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자유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310]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나온다. 일 개인에서 나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나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310]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이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지만,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렵다.

[310] 수백년 동안 조선에서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정치 뿐만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참다운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였으니 그 영향이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315]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는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인류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에게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됙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316]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이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고의 문화를 건설하는 사명을 달성할 민족은 한마디로 말하면 국민 모두를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데 있다. 대한 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 백범 선생님께 배운 지행합일의 정신

이순신 장군과 마찬가지로 백범 선생 또한 자신의 시대를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충무공과 백범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문제와 고민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나아가 그들은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갖고,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전 일생을 바쳤다는 점이다. 그들의 개인적인 삶이 녹록치 않았음은 분명하다. 개인적인 삶의 모습만을 떼어내어 평범한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보다 훨씬 고단하고 불행한 삶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충무공과 백범 선생은 자신의 문제에 함몰되지 않았고, 고개를 떨구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들어 시대를 바라보았고 나라를 둘러보았다. 깊이 들여다보았고, 멀리 내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였고, 거기에 아낌도 없이, 두렴도 없이 자신의 삶을 내던졌다. 그들이 스스로 내던진 삶은 수세기가 지난 후손들이 고이 받아들이어 본받으려 하고 있다. 그 수많은 후손들 중에 비겁하고 두려움 많은 청년 현운도 있다.

권력 앞에서도 당당한 청년 창수가 좋았다. 그 권력이 정의롭지 못함을 알고 권력을 향해 호통을 치는 청년 창수의 기개와 용기가 좋았다. 그는 몸으로 실천하고 싸우며 행동하는 정의의 사도였다. 나는 청년 창수로부터 독립운동의 총지휘관 백범 선생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의 하나가 ‘행동’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그는 생각만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행동이 절망의 해독제라는 사실도 행동을 통해 깨달아나갔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심을 ‘생각’하는 인물이 아니라,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고기를 구워 드리기까지 효심을 ‘행동’한 영웅이었다. 백범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민하고 방편을 ‘생각’해 본 사람이 아니라, 일본의 고위급 관리자를 암살하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의 전쟁을 준비한 ‘행동’의 사람이었다.

21세기의 지식인들을 돌아볼 때, 백범보다 체계적인 사상을 지닌 이들이 많을 것이다. 백범 선생보다 넓은 안목과 깊은 통찰력으로 나라를 위한 비전과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독립과 번영을 위하여 백범 선생보다 치열하게 행동하고 있는 이들은 없을 게다. 지(知)의 힘이 강한 시대지만, 行(행)이 더하여진 앎이 더욱 그리운 시대이기도 하다. 지(知)를 가진 이는 부럽지만, 지행(知行)을 갖춘 자는 존경스럽다.

백범 선생님이 가진 행함의 덕을 찬양하였지만, 백범의 아름다운 사상을 간과하고 싶지도 않다. 백범이 위대한 것은 훌륭한 사상을 정립하였으며,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그대로 구현하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가 결여되면 위대함에 이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백범 선생은 지식을 위하여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책을 읽었으리라.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의 깨달음이 있어야 함을 알고 배움과 교육에 힘썼으리라. 백범의 자신 나라의 철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낯설지 않은 내용이지만, 당신이 이 철학을 세워 삶으로 철학의 완성을 위하여 고군분투한 것을 알기에 새롭게 다가온다.

“무릇 한 민족이 국가를 세워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한 채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존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백범 선생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라는 백범 선생의 말씀은 비단 국토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세계까지 포함하여 적용해야 할 말씀이다. 이렇게 철학을 세운 후에는 온 몸을 던져, 생애를 던져 살아가도록 하자. 백범 선생님처럼 말이다.

백범이 아직 자신의 철학을 갖추기 전의 일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행동하고자 했던 인물인지를 알 수 있고, 동시에 자신의 철학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작은 방법론 하나를 얻을 수 있다. 『쉽게 읽는 백범일지』의 69페이지에 나오는 일화다.

나(백범)는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았다.
“너는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그렇다. 그러니 지금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백범이 아버지가 권해 준 관상학 책을 통해 건진 한 가지 교훈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한 것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얻은 것이 달랑 이 한 가지다. 별 것 아닌 이 순간을 위대함으로 전환시킨 것은 백범의 행동주의다. 어찌보면 책 한 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족함의 순간인데,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고 했던 백범의 삶이 그를 한 단계 도약시킨 것이다. 그는 실천하고 행동했다. 그런데 행동하는 백범의 생각도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문화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백범 선생의 삶의 년수가 더해갈수록 그의 위대함이 더해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사상이 깊이 성숙하였고, 그는 그의 사상을 끊임없이 행동으로 이어갔으니.

마지막으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론 하나.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묻고 치열하게 대답해 보기! 이름하여, “Q&A 자기 성찰“!
그리하여, 결심하고 생각한 것이 있으면 목숨을 걸고 행동으로 지켜나가는 것이다.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답변 같지만 『백범일지』를 갓 읽은 지금의 나로서는 이 방법이 무척이나 신뢰있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야, 그거 힘들어. 누가 그렇게 하는 적 본 적이라도 있어? 라고 냉소적인 회의감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봐 버렸다. 백범 선생님을 만나버렸다.

이상적인 지침을 몽땅 실천해 버린 이들을 만나게 되면, 그 모든 이상적 지침은 실천 지침이 되어버린다. 물론 백범 선생과 나는 다르다. 그릇이 다르기에 똑같은 일을 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스스로의 사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만큼은 내가 해야 할 몫이다. 이 몫까지 그와 다르다고 영원히 밀쳐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지행합일!
갑자기 '지행합일‘이라는 과업이 내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과업의 결과와 위력을 알게 되어 기쁜 마음이 든다.
“고맙습니다. 김구 선생님.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지요? 열심히 살겠습니다. 당신의 삶에 존경의 마음을 드립니다. 꾸벅.”

[덧붙임글]
글의 마지막이 다소 감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백범의 행동지향적 삶은 나에게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론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백범이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하는 과정은 스스로를 성찰하는 순간이다. 하워드 가드너는 자신의 책 『비범성의 발견』에서 비범한 성취를 이루는 데에 성찰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며 성찰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기간의 자신의 소망에 비추어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의식적으로 꼼꼼하게 고려해 보는 것이다. (『비범성의 발견』p.221)

하워드 가드너는 각기 다른 유형의 비범성을 보이는 네 사람(모차르트, 프로이트, 버지니아 울프, 간디)을 연구하고 난 후,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에 부적당하다”고 결론짓는다. 물론 성찰이 비범한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균형잡기’와 ‘토대화’를 위한 기본적 요소임은 기억해야 한다. 어린 모차르트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쓰며 그날 일어난 사건에 대해 유쾌하게 부가 설명을 하거나 자신이 직면한 음악적 문제나 도전에 대한 토론을 적곤 했다. 자기를 성찰하였던 것이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에도 자기 성찰의 능력이 보여준 것처럼 청년 김창수도 그러했다. 자기 안에 질문자와 응답자를 두어 스스로 묻고 대답하곤 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백범 선생은 자신의 일상을 성찰하며 무언가를 결심하기도 하고, 자신이 비범성을 보이고자 결심했던 분야의 성취를 살피며 새로운 일을 모색하기도 했다. 나석주의 생일상을 받고 어머니께 너무나도 죄송하여 평생 생일을 챙기지 않기로 결심한 것(p.218)과 독립운동도 잘 안 되고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 무슨 일이든 과감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던(p.223) 것이 그 예에 해당한다.

이제 결론이다. 하워드 가드너의 말이다.
“어른이 되어 특정 분야에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우리의 비범성이 자동적으로 싹트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 그것이 의미하는 것, 우리가 성취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성취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성찰이 매우 귀중한 요소다.”
이런 자기 성찰 능력과 강력한 실행력을 갖춘 인물이 백범 선생님이란 것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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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19 06:35:56 *.72.153.12
어제 만나서 얘기해보니 백범일지 읽고 김구에 반해버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더라. 현운도 그런 거 같네. 책에서 감동보다 리뷰에서 감동이 더 큰 것도 공통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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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12 10:03:22 *.249.167.156
희석아, 네 감동적인 리뷰를 이제서야 읽었다. 책을 열심히 읽었음이,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네 몸과 마음 속에 깊이 새기려 했음이, 그래서 이를 행동으로 이끌어내려 했음이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글이었다. 나도 이런 멋진 리뷰를 "왜 이제서야 보았을꼬" 하는 아쉬움이 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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