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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4일 05시 01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정약용에 대해 조사를 하다 그가 일곱 살 때 지은 시 한 편을 접하고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애늙은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사람 여기 또 있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미운 일곱 살’이라는 나이에 쓴 ‘산’ 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더라도 그가 살아 간 75년 간의 삶이 비범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글 잘하는 정치가로 유명한 강산 이서구라는 사람이 어느 날 시골에 볼 일이 있어 길을 가다보니 한 소년이 나귀의 등에 책을 가득 싣고 북한산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열흘 후 이서구가 시골에서 볼일을 다 보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다시 그 길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소년이 이번에는 나귀의 등에 책을 가득 싣고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궁금해진 이서구는 소년에게 물었다.

"얘야, 넌 뭘 하는 아이냐?"
"저는 이 위에 있는 절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며칠 전 네가 책을 나귀의 등에 싣고 가는 걸 봤는데, 너는 책을 읽지도 않고 싣고만 다니는 게냐?"
"저는 이 책들을 벌써 다 읽었습니다."
소년의 말에 이서구는 깜짝 놀랐다. 나귀의 등에 실린 책들은 '강목'이라는 책으로 무척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열흘만에 그 책을 다 읽었단 말이냐?"
"욀 수도 있습니다."
이서구는 소년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책 중에서 한 권을 뽑아 들며 말했다.
"자,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이서구가 책에 실린 내용을 물어보자 소년은 막힘 없이 술술 대답했거 이서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의 큰 일꾼이 되어다오."
이서구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한 이 소년이 바로 정약용이다.

그는 15세 때 풍천홍씨(豊川洪氏)를 취하여 6남3녀를 두었으나 4남2녀는 요절하고 학연(學淵)•학유(學遊)와 서랑 윤창모(尹昌謨)만 남았다고 하는데, 정약욕에 대한 조사 중에 발견한 또 한가지 재미있는 글이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정약용이란 사람에 대해 궁금해 할지도 모르는 정약용의 후손 되는 사람이 남긴 글. 그의 글을 발췌 소개해 본다.

“평생 8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인물, 2500여개의 시를 남긴 초인적인 다작의 인물, 정약용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수식과 이론, 미래세계, 과학과 예술과 철학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인물자체에는 관심을 그다지 가져본 적이 없는 나에게 정약용이라는 인물은 나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을 뿐더러 관심분야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오직 한가지, 그가 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 할아버지라는 사실뿐이다. 그는 나의 멀지 않는 조상이다.

정약용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종종 볼 때마다 그와 함께 항상 따라다니는 800권의 저서를 남긴 인물이라는 글귀가 요즘들어 더욱 특별히 관심을 갖게 만든다. 이제 겨우 한권의 책을 어렵게 낸 나로서는 자그마치 800권이라는 숫자앞에서 기죽을 수 밖에 없다.

그는 무협지를 쓴 사람도 아니고 당대 최고의 실학사상을 이끈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러한 사상을 담은 책이 800권이라는 것은 가히 인간의 능력인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요즘도 보통 다작으로 인정받는 사람들도 평생 수십권정도의 저서를 남길 뿐 세자리가 넘어가는 숫자의 기록을 보유한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정약용은 조금만 더 살았다면 네자리가 되었을 범직한 숫자를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남긴 시의 숫자도 기가막힐 정도다. 2500개의 시... 요즘의 시집하나가 70, 80개의 시로 구성된걸 감안하면 대락 40권의 시집분량과 맞먹는다. 저서와 시집, 그외에도 알려지지 않는 생전에 쓴 모든 것을 합한다면 1,000권은 족히 됨직한 저서를 썼을 인물이다.

과학하면 뉴튼, 아인쉬타인등 서양의 인물만을 쳐다봐야하는 우리의 처지로는 우리의 조상중에서 그러한 과학사상을 뿌리내린 인물이 있다면 대단히 반가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진바 이상으로 우리의 조상들도 수학과 과학을 즐겼다. 정약용은 이미 지동설을 믿고 있었으며, 조선시대 미적분이나, 수열등의 수학등은 이미 서양의 역사에 필적하거나 앞선 것들도 많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천문관측과 기상관측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서양보다 더 깊다. 정약용의 저서에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그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엄청난 저서를 쓸 수 있었던 초인적인 인물이었다는 점, 그러나 정확히 그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이런 엄청난 분량의 책을 썼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커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는 가까운 조상이라는 사실이 그에 대한 친밀감을 더 키워준다.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부터 조금이라도 이 궁금증을 해소해보고자 정약용 프로젝트를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에 대한 글을 조금씩 수집하며 그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작지만 꾸준히 전개해나가는 작은 개인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정약용, 그는 스물 두 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이때 당시의 임금인 정조의 눈에 뛰어 인정 받게 되고 성균관 생활이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 시험을 통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8세 때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고 그는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그는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 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 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5백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니 18년 동안에 걸친 강진 유배기는 저술 작업기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특히 이 시기의 경세학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도축을 이루는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이들 제자들은 또한 다산 저술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또한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 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에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자찬묘지명에서 다산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돌아보며 경계했다.

"내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으니 여러 장이 되었도다. 너의 감춰진 사실을 죄다 기록했기에 이 이상의 기록이 없으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라고 하였으나 그 실천한 바를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명예를 널리 퍼뜨리고 싶겠지만 그러나 찬양이야 할게 없다. 몸소 실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뜻 섞여 어지러운 것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분별없이 함부로 날뜀을 그쳐서 부지런히 실천하기에 힘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

나는 그가 우리나라 후손들을 위해 남겨준 것이 많아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욱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그가 남긴 지침들을 ‘몸소 실행하여 증명시켜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담긴 그의 실천주의 겸손함 때문이다.


<마음에 들어온 인용문>

“다산학의 체계상에서 사회적 실천으로 위상이 잡힌 ‘목민심서’는 요즘 개념으로는 지방행정의 지침서에 해당하는 셈이다…… 요컨대 ‘목민심서’는 자기 시대의 현실에 대한 저자 자신의 뼈저린 고뇌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대문이다.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문제의 해법을 진정으로 강구한 것이다” (p. 5)

“목민심서는 요컨대 민과 국가 관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p. 8)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p. 17)

“다른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벼슬은 구해서는 안 된다” (p. 21)

“위엄은 청렴함에서 나오는 것이니 간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은 겁내어 엎드릴 것이고, 명령을 내리고 시행함에 백성들이 모두 순종할 것이다” (p. 23)

“행장을 꾸릴 때 의복과, 안장을 얹은 말은 본래 있는 그대로 써야 하며, 새로 마련해서는 안 된다”(p. 24)

“아전과 하인들이 인사하고 물러가면 말없이 혼자 단정히 앉아 백성을 다스릴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너그럽고 엄숙하고 간결하고 치밀하게 규모를 미리 정하되, 오직 그때 그때의 사정에 알맞게 하며 스스로 굳게 지켜나가야 한다” (p. 36)

“여론을 수집하기는 쉬우나 개혁은 어려운 일이다. 고칠 만한 것은 고치고, 고칠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오늘에 들떠서 날뛰지 말며 다음에 실망하지도 말 것이다”
(p. 39)

“관청의 일은 기약이 있는 법인데, 그 기약이 믿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명령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기약은 미덥게 해야 한다” (p. 40)

“일상 생활을 절도 있게 하고, 옷차림은 단정히 하며, 백성들을 대할 때에는 장중하게 하는 것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수령의 도이다” (p. 45)

“정선은 ‘하늘은 한 사람을 사사로이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개 많은 가난한 자들을 그에게 부탁하려 함이요, 하늘은 한 사람을 사사로이 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개 많은 천한 자들을 부탁하려 함이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제 힘으로 먹고 살면서 제 일을 경영하고, 제 피땀으로 얻은 것을 제가 쓰니, 하늘이 오히려 너그럽게 볼 것이요, 부귀한 사람은 벼슬을 하여 녹을 먹되 만민의 피땀을 한 사람이 받아쓰니, 하늘이 그 허물을 경계하는 것이 더욱 엄중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p. 47)

“많이 말하지도 말고, 갑자기 성내지도 말 것이다” (p. 48)

“술을 끊고 여색을 멀리하며 노래와 음악을 물리쳐서 공손하고 단정하고 위엄 있기를 큰 제사 받들 듯 할 것이요, 감히 놀고 즐김으로써 거칠고 방탕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p. 51)

“벼슬살이는 다섯 가지 병통이 있다. 급히 재촉하고 함부로 거두어들여 아랫사람한테 긁어다가 위에 갖다 바치는 것은 조세의 병통이요, 엄한 법조문을 함부로 둘러대어 선악을 명백히 가리지 못하는 것은 형옥의 병통이요, 밤낮 술잔치에 빠져 나랏일을 등한히 하는 것은 음식의 병통이요, 밤낮 술잔치에 빠져 나랏일을 등한히 하는 것은 음식의 병통이요, 백성의 이익을 침해하여 사사로이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것은 재물의 병통이요, 많은 계집을 골라 노래와 여색을 즐기는 것은 음란의 병통이다.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백성이 원망하고 신이 노할 것이니, 편안하던 자는 반드시 병들고 병든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벼슬살이하는 자가 이를 알지 못하고 풍토의 병을 탓하니, 잘못된 일이 아닌가” (p. 52)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다 객기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맑은 취미로 잘못 생각하는데, 술 마시는 버릇이 오래 가면 게걸스러운 미치광이가 되어 끊으려 해도 되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마시면 주정부리는 자가 있고, 마시면 말 많은 자가 있으며, 마시면 잠자는 자도 있는데, 주정만 부리지 않으면 폐단이 없는 줄로 여긴다. 그러나 잔소리와 군소리는 아전이 괴로이 여길 것이요, 깊이 잠들어 오래 누워 있으면 백성이 원망할 것이다. 어찌 미친 듯 소리지르고 어지러이 떠들며 넘치는 형벌과 지나친 곤장 질만이 정사에 해가 된다고 하겠는가? 수령이 된 자는 술을 끊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p. 52)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오” (p. 60)

“몸을 닦은 후에 집을 다스리고, 집을 다스린 후에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원칙이다. 고을을 다스리려는 자는 먼저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p. 65)

‘전임자의 흠이 있으면 덮어주어 나타나지 않도록 하고, 또 죄가 있으면 도와주어 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p. 99)

“천하에 가장 천해서 의지할 데 없는 것도 백성이요, 천하에 가장 높아서 산과 같은 것도 백성이다” (p. 103)

“얽히고 설켜 잘 풀리지 않는 세상일 가운데 남녀가 혼기를 놓치는 일보다 딱한 일은 없을 것이다” (p. 129)

“혹시 비참한 일이 눈에 띄어 측은한 마음을 견딜 수 없거든 주저하지 말고 즉시 구휼을 베푸는 게 마땅하다” (p. 131)

“이를 보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어진 마음에 있는 것이지 행정능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p. 138)

“아전을 단속하는 일의 근본은 스스로를 규율 함에 있다.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행해질 것이고,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하더라도 일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p. 141)

“벼슬살이 할 때에는 모름지기 스스로는 항상 한가하고 아전들은 항상 바쁘도록 해야만 한다. 만약 스스로 문서 속에 파묻혀서 정신을 차릴 수 없으면 아전들이 곧 폐를 끼칠 것이다” (p. 144)

“타이르고 감싸주며 가르치고 깨우치면 아전들 역시 사람의 성품을 타고난 지라 바로잡아지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니, 먼저 위엄부터 베풀지 말아야 한다” (p. 145)

“마음에 털끝만큼이라도 치우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치우침이 있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이 눈치채게 된다” (p. 153)

“백성을 다스리는 직분은 백성을 가르치는 일일 따름이다. 전산을 고르게 하는 것도 장차 백성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부세와 요역을 고르게 하는 것도 장차 백성을 가르치지 위함이요,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는 것도 장차 백성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형벌을 밝히고 법규를 갖추는 것도 장차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모든 정사가 정비돼 있지 않아서 가르칠 겨를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백대에 이르도록 선치가 없었던 것이다” (p. 215)

“족(族)에는 귀천이 있으니 마땅히 그 등급을 구별해야 하고, 세력에는 강약이 있으니 마땅히 그 형편을 살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어느 하나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p. 224)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은 어린이는 따로 가려 뽑아서 가르쳐야 한다” (p. 226)

“밝은 마음으로 사물을 비추고 착한 마음이 작은 새와 짐승에까지 미치게 된다면, 뛰어난 소문이 퍼져 아름다운 명성이 널리 전해질 것이다” (p. 262)

“빌린 곡식이나 돈에 관한 송사는 마땅히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엄중하게 빚을 독촉하기도 하고 때로는 은혜롭게 빚을 덜어주기도 해야 하며, 굳이 원칙만 고집할 것이 아니다”
(p. 263)

“협잡과 음란을 일삼아 기생을 데리고 놀며 창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p. 275)

“장터에서 술주정하며 장사하는 물품을 약탈하거나, 거리에서 술주정하며 나이 많은 어른에게 욕하는 것을 엄금한다” (p. 275)

“도적이 생기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위에서 위의를 바르게 가지지 아니하고, 중간에서 명령을 받들지 아니하며, 아래에서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이 고쳐지지 않으면 아무리 도적을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p. 276)

“중국의 권분하는 법은 곡식을 팔도록 권하는 것이었지 거저 먹이도록 권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베풀도록 권하는 것이었지 거저 바치도록 권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몸소 솔선하는 것이었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상을 주어 권장하는 것이었지 위협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권분은 비례의 극치이다” (p. 309)

“흉년이 들었을 때 재물을 훔치면 소문이 먼 변방에까지 미치고 재앙이 먼 후손에까지 끼치니, 이런 일은 결단코 마음조차 먹어서도 안 된다” (p. 312)

“진휼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으니 첫째는 시기를 맞추는 것이요, 둘째는 규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불탄 사람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데 어찌 시기를 늦출 수 있겠으며, 많은 사람들을 다루고 물자를 고루 나눠주는데 어찌 규모가 없을 수 있겠는가?” (p. 313)

“수령직은 반드시 교체가 있기 마련이다. 교체되어도 놀라지 않고 벼슬을 잃어도 연연해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존경할 것이다” (p. 327)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옛사람들의 뜻이었다. 교체되고서 슬퍼한다면 수치스럽지 않은가” (p. 328)

“맑은 선비의 돌아갈 때의 행장은 모든 것을 벗어 던진 듯 조촐하여 낡은 수레와 야윈 말인데도 그 산뜻한 바람이 사람들에게 스며든다” (p. 329)

“수령이 떠나는 것을 매우 애석히 여겨 길을 막고 유임을 원하는 일은 역사책에 그 광휘가 전해져 후세에 빛나는 것이니, 이는 겉 시늉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p. 331)

“재임 중에 죽으매 고결한 인품이 더욱 빛나서 아전과 백성이 애도하여 상여에 매달리어 울부짖고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것이 어진 수령의 뜻있는 죽음이다” (p. 334)

“돌에 새겨 덕을 칭송하여 오래도록 보여주자는 것이 이른바 선정비이다. 속으로 반성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p. 337)

“아이가 어미 곁에 즐거이 놀 적에는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더니, 어미가 떠나자 아이가 울부짖으니 추위와 배고픔이 닥쳐서가 아닌가” (p. 340)


<내가 저자라면>

목민심서도 목민심서지만, 그에게 800권이 넘는 책을 작성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과 여건이 허락됐다는 사실에 나는 더 주목할 수밖에 없다. 비록 속세를 떠나 18년이라는 기나 긴 유배생활이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정약용으로 하여금 우리 후세에게 대대로 물려줄 고전을 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가 계속 현직에 머물러 충분한 저술 기간을 확보하지 못했다거나 아니면 일찍 그의 생애를 마감해야 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업적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그냥 허황된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목민심서는 목민관, 즉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책이다.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조목조목 적고 있는데, 1.부임 2. 율기 3. 봉공 4. 애민 5. 이전 6. 호전 7. 예전 8. 병전 9. 형전 10. 공전 11. 진황 12. 해관의 12편으로 나누고 각 편을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되어 있다. 모두 48권 16책이며 책의 체제는 수령이 지켜야 할 덕목을 먼저 제시한 다음 그것에 관련된 실례를 첨부하였다. 아마도 그의 풍부한 실례는 그가 지방수령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것과 암행어사를 지내면서 목격했던 생생한 체험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실례들 속에는 조선후기 지방사회의 부패상과 인생문제가 소상하게 적혀 있어 그 당시의 사회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나, 어디 그것이 그 시대에만 국한 되는 현상일까. 부정부패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어느 나라에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존재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문득 목민심서가 지방 수령들을 주 독자로 쓰여진 책인 만큼 실제 우리나라의 장들은 이 목민심서를 읽어봤을까 궁금해졌다. 만약, 읽었다면 그리고 읽어서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면 우리가 뉴스에서 목격하는 눈살 찌푸릴 일들이 현저하게 줄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도 함께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목민심서를 읽으며 오히려 뜻 모를 답답함에 사로잡혀 약간은 체한 기분이 들었다. 무서우리만치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룬 목민심서이지만 오히려 지금의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이상적인 세계를 그리는 것 같은 아이러니컬함 때문에 아마 그리도 속이 불편했나 보다. 특히나 청렴함에 대한 지침들과 대면할 때는 며칠 전 뉴스 보도가 떠올라 더욱 더 그러했다. 아마도 수령이 된다는 것은, 아니 훌륭한 수령이 된다는 것은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보다.

그래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도전해볼 만한 것이고,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어려운 길을 가기 위한 지침서야말로 꼭 필요한 가이드북이다. 그때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약용이 자신의 학문 체계에 대해 "나의 학문의 업적이 하필 百世가 되도록 기다리지 않아도 빛을 볼 것이다"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4월 달에 만났던 미래학자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다방면에서 박식한 사람들이었는데 정약용 또한 정치 • 경제 • 역리 • 지리 • 문학 • 철학 • 의학 • 교육학 • 군사학 •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어쩌면 정약용이야말로 한국의 미래학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적인 생각에 답답했던 마음이 한층 가라앉았다.

그는 말한다.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일컬었다고. 정치현실로부터 벗어나 있었기에 이렇게 명명한 것일 테지만, 사실 정치현실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책을 쓸 수 있는 냉철한 제 3자의 눈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가 보다. 그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던 ‘실천’의 목민은 그의 후세에게 맡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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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바다
2007.06.25 00:25:02 *.6.5.217
자꾸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어 밝혀둡니다... ^^;;;;
<저자에 대하여> 중간에 보면 정약용 후손되는 사람의 글을 발췌
소개했는데 그 사람이 책을 냈다는 말이 나와요. 몇몇 연구원들이
윤이가 책 냈는줄 알고 오해하셔서 ^^;;;;; 저 말고 정약용 후손이
책 냈나봐요 ㅎㅎㅎ 참고하세요~ 별로 좋은 리뷰가 아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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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귀
2007.06.26 07:56:34 *.244.221.3
^^잘읽었어요~간결하면서도 사람으로 하여금 관심을 주목시키시네요.
결과론적으로, 후손 입장에서 보면, 정약용의 유배를 긍정적으로 봐야할듯 하네요. 정약용도 1인기업가가 아닐가요?(구 소장님처럼 ? 한해에 몇십권의 책을 써나간)
힘든 사람들에게 지금의 어려운 상황도 긍정적으로 해결해나가라고 하면서 추천할 수 있는 책인것 같아요, 저도 읽어보겟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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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바다
2007.06.26 16:53:37 *.132.76.128
부족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뽑아내신 귀귀님이 더
감사하네요~ ^^ 그래서 더 글 쓰는 보람이 드나봐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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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12 [독서15]다산문선/정약용 [1] 素田최영훈 2007.06.25 2847
911 백범일지-(15) [3] 최정희 2007.06.25 2319
910 [15] 다산문선 / 정약용 [7] 써니 2007.07.01 2415
909 다산문선/정약용 [2] 香仁 이은남 2007.06.25 3115
908 (15) 다산문선 - 정약용 [2] 時田 김도윤 2007.06.25 2911
907 목민심서 / 정약용 [1] 好瀞 김민선 2007.06.24 2831
906 [리뷰13] 다산문선 : 정약용 [8] 素賢소현 2007.06.25 2618
905 [리뷰12] 백범일지 : 김구 : 도진순 주해 [2] 素賢소현 2007.06.24 2316
» 목민심서-정약용 file [3] 海瀞 오윤 2007.06.24 3264
903 [다산문선] 숙명이 낳은 사람, 고독이 낳은 저작 [2] 余海 송창용 2007.06.23 2440
902 칭기스칸-천년의 제국 [3] 도명수 2007.06.23 3086
901 퍼거슨 리더십을 읽고(청소년을 위한 리더십 책) [1] 산골소년 2007.06.23 2625
900 삼국지 경영학을 읽고 (추억과 교훈 되살리기) [1] 산골소년 2007.06.19 2524
899 -->[re]민선이는 잘 세고 있지 ? [9] 부지깽이 2007.06.19 2311
898 다산- 목민심서로 만나다(14) [7] 최정희 2007.06.19 2583
897 [014]『백범일지』를 읽고 [2] 현운 이희석 2007.07.14 2770
896 (014) 백범일지, 김구 [2] 校瀞 한정화 2007.06.18 2462
895 [리뷰014] 백범일지, 김구 [2] 香山 신종윤 2007.06.18 2597
894 [14] 白凡逸志 / 金九 [3] 써니 2007.06.18 2076
893 백범일지-김구 file 海瀞 오윤 2007.06.18 2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