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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5일 14시 0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1-1. 성장기

다산 정약용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아버지 정재원(荷石 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한강 강변 마현 마을에 태어났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아버지 정재원은 대과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영조 임금의 특별한 지시(음사; 蔭仕)로 벼슬에 나갔다. 연천현감, 화순현감, 예천군수 등 고을 수령을 지냈고, 조정에 들어와 호조좌랑과 한성서윤을 지내고, 다시 수령으로 나가 울산부사를 거쳐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지냈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 尹氏)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후손이요,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였다.

9세(1770년)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다산은 스스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회고했다.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다산은 15세에 홍화보의 딸(풍산 홍씨)과 결혼했다. 마침 아버지가 호조좌랑으로 다시 벼슬에 나가게 되어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다. 이것은 지방수재에 불과했던 그에게 세상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다산은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 공이 문학으로써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2세(癸卯年, 1783)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당시의 33세 임금인 정조의 눈에 뛰어 인정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학문 때문이었다. 다산은 성균관 생활이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 시험을 통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6세(丁未年, 1787) 이후로는 임금의 총애가 더욱 높아갔고 자주 이기경(李基慶)의 정자(亭子)에 나가 과거 공부에 열중했다. 이기경도 서교 듣기를 즐겨하여 손수 한 권의 책을 베껴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듬해(戊申年: 정조 12년, 1788) 서교를 탄압하자는 상소가 빗발쳤고 서교에 관한 책을 압수해 불사르기도 했으며, 남인 내에서 공서파(攻西派)가 분리해나가기 시작했다. 홍낙안 · 목만중 · 이기경 등이 정약용 등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28세때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는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그는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이로써 많은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로서 그는 전 연천 현감 김향직과 전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해 책임과 관리의 의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1-2. 천주교와의 인연

다산의 일생은 자의든 타의든 천주교와의 연관성의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천주교 때문에 다산이 겪어야 했던 순탄치 않았던 벼슬생활, 일가친척들과 친구들의 죽음, 18년의 유배생활과 17년의 미복권의 굴곡의 삶이 그의 생을 채웠다.

23세때 큰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의 배 위에서 다산에게 처음으로 천주교를 소개한 사람은 8세 연상인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85)이다. 광암이라면 바로 한국천주교에서 창립성조(創立聖祖)로 받드는 인물로서 큰형수의 동생이니 다산과는 사적으로 사돈간인 셈이다. 다산은 그의 둘째형 약전과 함께 '일찍이 이벽을 따랐다'(嘗從李壁)는 기록을 할 정도로 매우 가깝게 지냈고 서학과 천주교서적을 읽은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산은 이벽과의 만남 이후 한동안 천주교에 심취하였던 것 같다.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면 다산은 젊은 한때 사 · 오년 동안은 마음으로 열중하였지만 1791년의 진산사건(신해사옥)이후에는 사설(邪說)로 여기고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40세에 18년간의 긴 귀양살이가 시작된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의 작은 형 정약종은 형제보다 뒤늦게 천주교를 접했지만 그 믿음이 독실하여 신유사옥 때(1801) 희생되었다. 전도에 힘쓰다가 책롱사건으로 마흔 둘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형 약전과 막내(다산)가 믿음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형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엄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약종의 아들 철상(哲祥), 하상(夏祥), 딸 정혜(貞惠) 역시 천주교로 인해 요절했다. 이가환과 이승훈도 이때 죽음을 당하고, 다산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 경상도 장기로 유배당했다. 뒤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로 인해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어 있던 다산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관련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극형은 면했으나 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형 약전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다산과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의 연(緣)뿐만 아니라 다산의 학문을 알아주는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1801년 11월 하순 함께 귀양길에 올라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후 16년 동안 서로 한번도 보지 못했다.

1-3. 유배지에서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5백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니 18년 동안에 걸친 강진 유배기는 저술 작업 기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특히 이 시기의 경세학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도축을 이루는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곳이 ‘다산초당’이다. 유배생활의 고초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독서와 저술에 열중했다. 경학 이외에 경세학(經世學)과 다방면의 실용적인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유배 초기에는 6경 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의 저술을 마쳤고, 나중에는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마쳤다. ‘경세유표’는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정책제안서이다. ‘목민심서’는 현행법 내에서도 공직을 바로잡아 백성을 살려내려는 취지였다. 다산의 정확한 현실인식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후기의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고 민(民)을 구제하기위한 방략이었다.

다산은 개인적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어두운 시대에 아파했다. 사실 다산이 겪는 고초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불의(不義)의 시대에 태어난 탓이었다. 그의 시문은 민초들의 고통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농민들의 착취와 압제의 실상을 목격하고, 농촌현실에 근거한 문제의식과 그 해결을 위한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이들 제자들은 또한 다산 저술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배지의 제자들로는 이청 · 황상 · 이강회 · 이기로 · 정수칠 · 윤종문 등을 들 수 있다.

유배기간 중에 형 정약전이 명을 달리 한 것은 크나큰 슬픔이었다. 약전은 다산의 학문을 알아주고 격려해 주었던 지기(知己)였다. 다산은 형과 유배 길에서 헤어진 후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편지와 저술을 보내 연락하고 있었다. 약전은 다산의 귀양살이가 풀릴 것이라는 말을 듣고 곧 아우를 만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해배는 이뤄지지 않았다. 약전은 유배 16년 만에(1816) 끝내 아우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에 이었다.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몇 차례 풀려날 기회가 있었지만 서용보 등 반대파의 저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다산은 구차하게 선처를 구하지 않았다. 무익한 일이 분명한데 자존심까지 잃을 수 없었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를 모두 운명이라 여겼다.

1-4. 생애와 학문의 정리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북한강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기도 하는 한편,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했다. 다산은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를 저술하여 경세론의 삼부작(1표2서)을 완성했다. 또한 『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또한 1822년 회갑을 맞이하여, 60평생을 돌아보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당쟁에 얽혀 잘못 알려질 수 있는 사실들을 바로 알리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이와 함께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리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에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18년을 더 살았다. 1836년 그의 부부가 혼인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혼(回婚)의 날, 그리하여 친척들과 자손들이 모인 날. 그는 75세로 세상을 마쳤다.

자신을 버린 불의(不義)의 시대는 자신의 실천적 학문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시대를 넘어 다음 시대에서나마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알아줄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자찬묘지명’에서 다산은 서술하고 있다.

"내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으니 여러 장이 되었도다. 너의 감춰진 사실을 죄다 기록했기에 이 이상의 기록이 없으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라고 하였으나 그 실천한 바를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명예를 널리 퍼뜨리고 싶겠지만 그러나 찬양이야 할게 없다. 몸소 실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뜻 섞여 어지러운 것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분별없이 함부로 날뜀을 그쳐서 부지런히 실천하기에 힘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경제·역리·지리·문학·철학·의학·교육학·군사학·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다산의 저술은 1922년에 문집에 넣기 위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자찬묘지명의 집중본(集中本)을 기준으로 할 때 육경사서의 연구서인 경학(經學)집 232권과 일표이서를 포함한 경세학서(經世學書) 138권에 시문집과 기타 저술을 포함한 문집 260권을 합하여 총 492권이다. 이 저술들은 대체로 6경4서 · 1표2서 · 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1-5. 다산의 철학

다산의 학문은 경학(經學)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자찬묘지명>에 “육경(六經)사서(四書)로써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을 갖추었다”고 적고 있다. 다산의 학문체계는 경학을 근본으로 하고, 경세학을 그 실현방법으로 보고 있다. 경학을 통해 수기(修己), 즉 자기의 인간됨의 완성을 위해 수양하고, 경세학으로 치인(治人), 즉 완성된 인격과 능력으로 천하와 국가를 경영(세상에 봉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배시절 초기에 경학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다산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학문자세를 견지했다. 청나라에서 새롭게 전래된 경전해석 방법인 고증학이나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 등 새로운 사조에 열려있었다. 그리고 고증학의 실증적 태도 등 객관적 학문자세를 따르지만 그에 머물지 않았다. 실증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했다.

경학과 더불어 다산의 중심과제인 경세학은 당시 사회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세상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는 것이 다산의 진단이었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一毛一髮無非病耳)”고 보았으며,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며 개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다산 경세학의 근저에는 민(民)을 근본으로 여기는 자세 또는 민(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다산이 남긴 시문들은 당시 민초의 피폐하고 참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경기 암행어사로 민간에 잠행하면서 농촌의 피폐상을 직접 보고서, 강진 귀양살이 때 국가권력과 아전의 횡포를 직접 듣고서 토해낸 글들이다. 다산은 당시의 치자-피치자의 구조에서 백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치자의 책무와 피치자의 권리를 각성시키고자 노력했다.

다산은 그의 「기예론(技藝論)」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널리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그 기예가 정교하게 되고, 세대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기예가 더욱 공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더 넓은 세계의 기예를 배울 것과 새로운 기예를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농업의 기예나 직조의 기예를 정교하게 하여 편리함을 도모하고 소득을 올릴 수 있고, 병기의 기예를 정교하게 하여 용맹을 돕고 그 위태로움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 밖에도 의술과 백공의 기예가 정교해지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대가 강해지고 백성들이 넉넉하여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1-6. 가족에 대한 사랑

15세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씨(1761-1838)와 결혼한 다산은 공교롭게도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에 먼저 눈을 감고 홍씨는 이년 후인 1838년에 남편 다산을 뒤따른다. 10대 중반의 철없던 나이에 결혼하여 힘든 과거공부와 분주한 벼슬살이로 인해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한 다산은 정치적 반대파의 모함으로 인해 한창 나이인 사십에 유배를 떠나며 사랑하는 아내와 눈물의 생이별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 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그리운 정을 삭이던 홍씨는 누에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 珍詞七首贈內)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하였던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낸다. 10여 년의 유배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쳤을 지아비가 장롱 속 깊이 간직했던 빛바랜, 하지만 신혼시절의 추억이 스며있는 다홍치마를 보고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이에 다산은 그 비단치마를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매화에 새를 그린 매조도(梅鳥圖)를 선물한다.

지금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매조도는 그림 아래쪽으로 다음과 같은 4언 율시와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뜰앞 매화에 앉네(翩翩飛鳥 息我庭梅)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有列其芳 惠然其來)
여기에 둥지틀어 너의 집을 삼으렴(亥止亥樓 樂爾家室)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華之旣榮 有--其實)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가위로 잘라 네 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또한 세 살짜리 막내아들을 뒤로하고 천리 길 전라도 강진 땅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다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버지는 큰아버지(약전)와 함께 유배를 떠나고 약종 백부는 대역죄인으로 참수당하니 어린 나이의 자식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다. 이런 두 아들의 심정을 헤아린 다산은 유배지에서 편지를 보낸다.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책읽기에 힘써라. 출세 길이 막힌 폐족이 글도 못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보통 집안사람들 보다 백배 천배 열심히 공부해야 겨우 몇 사람 노릇을 하지 않겠느냐. 내 귀양사는 고통이 몹시 크긴 하지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아들에 대한 안Tm러움을 품고 있었지만 학문에 부지런하지는 않았던 아들들에게 엄히 꾸짖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잊지 않았다.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다 하더라도 성인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넓게 알고 이치에 밝은 선비가 되는 일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 평민이 배우지 않아 못난 사람이 되면 그만이지만 폐족으로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고 말아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유배 생활 중에도 수많은 편지와 아들을 옆에 두고 교육을 시킴으로써,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아버지이자 스승으로서의 실천을 하는데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2. 마음으로 스며드는 글귀

기(記)
14-병이 위독한 사람은 병든 것을 그 스스로는 알지 못하고, 병이 들었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병이 심한 것이 아니다. 미친 사람은 미친 것을 그 스스로 알지 못하고, 미쳤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진짜 미친 것이 아니다. 간사함․음탕함․게으름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잘못을 고칠 수 있다. / 대체로 몸소 본 것을 또 다시 돌이켜 살피면서 말하기를 , ‘깨었다’, ‘각覺했다’, ‘오悟했다’고 하는 것은 깊이 취하고 잠들었다는 증거이므로 스스로 재齎에 취몽醉夢이라고 이름을 붙인 자가 있다면, 이는 혹 술과 잠에서 깰 기미가 있는 사람이다.

16-“벼락과 번개, 구름과 비의 변화가 항상 이 산의 허리에서 일어나 자욱하게 산 아래로 내려가는데, 산 위에는 그대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니 굉장히 높은 산이 아닌가, 가운데 봉우리의 정상에 서면 날듯이 세상을 가볍게 보고 홀로 특별히 다른 길을 가는 기분이 들어, 인생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마음에 둘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고, 곤궁했을 때 지내던 곳을 입신출세 하여 찾아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며, 홀로 외롭게 지나가던 당을 좋은 손님들과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이끌고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22-무릇 사물 중에는 아름다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물건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욱 많게 되며, 그것을 얻기도 더욱 힘들게 된다. 비옥한 전답과 높은 집, 길다란 인끈과 포근한 갖옷, 아리따운 여자와 좋은 말 같은 것은 평생토록 얻으려고 애쓰지만, 어떤 사람은 얻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얻지 못한다. 그것을 얻을 때는 마치 사나운 새와 짐승이 먹이를 움켜잡고서 사방을 둘러보는 것과 같으며, 그것을 얻지 못할 때는 마치 궁한 귀신이 슬퍼 울부짖는 것과 같으니 또한 가련하지 않은가. 무릇 천하 만물의 아름다움을 모두 따져보아도 하늘에 있는 물건의 아름다움만은 못하다. 그러나 해는 너무 뜨겁고, 별은 너무 희미하며 구름과 안개는 너무 쉽게 없어지니, 마음을 기쁘게 하는 점에서는 모두가 달만 못하다.

23-사사로운 욕심과 혼자만이 차지하려는 마음을 없애지 않고서야 참으로 소유할 수 있겠는가?

24-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으나 부득이 해야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요, 자기는 하고 싶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만둘 수 있는 일이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은 항상 그 일을 하고는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그만둔다.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할 수 있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한 때로는 그만둔다. 진실로 이와 같이 된다면 천하게 도무지 일이 없을 것이다.

25-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마음에 크게 두려움이 있어서이므로, 마음에 크게 두려움이 있는 것은 또한 그만둔다.

28-“얼굴은 아름다웠으나 그 자태는 기억할 수 없다.”
33-그 새끼를 칭찬해주었더니 호랑이는 기뻐하며 가버렸습니다.

34-돌아와 생각하니 나는 비버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는 홀로 높은 산, 깊은 골짜기에 살면서 거처를 옮기지 않으며, 갑자기 맹수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더구나 호랑이를 타일러 보냈으니, 마음속에 도술을 간직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52-외사씨는 논한다. 도가에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을 신선이 되는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조신선은 욕심이 많으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늙지 않았으니, 혹 말세가 되어 신선도 시속을 면할 수 없어서인가?

55-“네가 한 번 죽음으로써 나는 세 가지를 잃었다. 아들을 잃고 친구를 잃고 스승을 잃었다.”

가훈․
61-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행하는 일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나, 이 점에 자기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비록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흙 담에다 색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 몸을 이미 엄정하게 닦았다면 그 벗을 사귀는 것도 자연히 단정한 사람일 것이다.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는 서로 모이게 되는 것이므로 결코 특별한 힘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62-대체로 이 세상에 깊은 은혜와 두터운 의리로는 부모 형제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부모 형제를 저처럼 가볍게 배반하고 있는 처지에 더구나 벗에 대해서이겠는가.

63-임금을 섬기는 방법이란 임금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에게 사랑받는 살마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임금에게 신임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64-위로는 임금의 과실을 비판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

65-의리에만 치우쳐서 자기의 뜻이 같은 사람이면 편을 들고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이면 공격해서 함정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67-[주역사전]은 바로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어 지어낸 책이요, 절대로 사람의 힘으로 통할 수 있고, 사람의 지혜나 생각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여 오묘한 뜻을 모두 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나의 자손이나 벗이 천 년에 한번 나오더라도 배 이상 나의 정을 쏟아 애지중지할 것이다.

69-나를 위하여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덜어 내고 아름답고 선명한 것들만 남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다.

72-무릇 시에는 정신과 기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쓸쓸하고 산만하기만 하여 ruftr과 단속의 묘미가 없는 시는 그 사람의 빈궁과 영달은 고사하고 수명도 길지 못하니, 이 점은 내가 여러 차례 시험한 것들이다.

74-저쪽에서 돌을 던지면 이쪽에서 옥돌로 보답하고, 저쪽에서 칼을 가지고 나오면 이쪽에서는 단술로 대접해주지 않는다면, 서로 눈을 흘겨보며 성내고 다투다가 죽이기까지 하는 등 결국 집안을 망치고야 말 것이다.

76-충과 효를 행한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화를 면하게는 것도 아니고, 음란하고 방탕한 자라 하여 반드시 박복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도가 되므로 군자는 부지런히 선을 행할 뿐이다. / 진실로 너희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그리하여 아들이나 손자와 세대에 가서는 과거에도 마음을 두고 경제에도 정신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려졌다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루아침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먼 시골로 이사가버리는 사람은 천한 무지렁이로 끝나고 말 뿐이다.

77-만약 나의 책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나이가 많으면 너희들은 아버지로 섬기고 너희와 엇비슷한 나이라면 너희들이 형제로 맺는 것도 좋을 것이다.
79-너희들은 이 점을 알아서 학문이 깊이 연구하는 노력은 조금 늦추더라도 먼저 올바른 몸가짐의 공부에 힘써 육중한 산처럼 우뚝 솟은 모습으로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를 익혀야 한다. / 한 구절의 글이 모두 남들이 아끼고 애호하는 바가 될 것이다. 만약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경시하여 땅에 버려진 흙같이 한다면 이는 정말 끝나버리는 일일 뿐이다.

80-형체가 있는 것은 파괴되기 쉽지만 형체가 없는 것은 없애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기가 자기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형체로 사용하는 것이요. 제 재물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은 정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물질로써 물질적인 향락을 누리면 해지고 파괴되는 수밖에 없지만 형체 없는 정신적인 향락을 누린다면 변하거나 없어지는 낭패를 당하지 않는 법이다.

82-송나라 학자 육자정은 말하였다. “우주, 사이의 일이란 바로 자기 분수 안의 일이요. 자기 분수 안의 일은 바로 우주 사이의 일이다.”

83-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필요한 곳에 쓴다 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근’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때까지 미루지 말며, 전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끌지 말며, 비 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검’은 모든 맛있는 횟감이나 생선도 입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버리므로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전에 사람들은 더럽다고 침을 뱉는 것이다. 사람이 천지간에 살면서 귀히 여기는 것은 성실한 것이나 조금도 속임이 없어야 한다. 하늘을 속이는 것이 가장 나쁘고, 임금을 속이고 어버이를 속이는 데서부터 농부가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상인을 속이는데 이르기까지 모두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오직 하나 속일 게 있으니 바로 자기의 입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식물로 속이더라도 잠깐 그때를 지나면 되니 이는 괜찮은 방법이다.

85-“쌈을 싸서 먹는 게 절여서 먹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건 나의 입을 속이는 법일세”

95-도량의 근본은 용서함에 있다. 용서만 할 수 있다면 좀도둑과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라 할지라도 아무 말 없이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야 말할 게 있겠느냐?

97-시야가 짧은 사람은 오늘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은 일이 있으면 당장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에 뜻에 맞는 일이 있으면 벙긋거리며 낯빛을 펴곤 하여, 일체의 근심 ․ 유쾌함 ․ 슬픔 ․ 기쁨 ․ 감격 ․ 분노 ․ 애정 ․ 미움 등의 감정이 대부분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그러나 달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보면 비웃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소동파는 말하기를 “속된 눈은 너무 낮고 하늘을 통한 눈은 너무 높다.” 요컨대 알아야 할 점은 아침에 햇빛이 먼저 받은 곳은 저녁때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고 진리인 것이다. 운명은 돌고 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 때의 재해 때문에 마침내 청운의 뜻까지 꺾어서는 안 된다.

98-남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싶은 행위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이 두 구절의 말을 평생 동안 몸에 지니고 왼다면 위로는 하늘을 섬길 수 있고 아래로는 집안을 보존할 수 있다.

112-책을 가려 뽑는 방법은, 나의 학문이 먼저 주관이 있어 확립된 뒤에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저울이 마음속에 있어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는 것이다.

113-언제나 책 한권을 읽을 때엔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이면 뽑아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눈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이러게 한다면 비록 1백 권의 책이라도 열흘의 공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14-너는 지금 폐족인데 만일 그 폐족의 처지를 잘 대처해서 본래의 가문보다 더 완전하고 좋게 한다면, 또한 기특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115-그 폐족의 처지를 잘 대처한다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뿐이다. 이 독서야말로 인간의 제일가는 깨끗한 일로서, 호사스런 부호가의 자제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또한 궁벽한 시골의 수제들도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 없다.

117-독서에는 반드시 먼저 근기를 세워야 한다. 무엇을 근기라 하는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니 학문에 뜻을 둔다면 반드시 먼저 근기를 세워야 한다. 무엇을 근기라 하는가? 효孝 ․ 제梯가 그것이다. 모름지기 먼져 효 ․ 제를 힘써 근기를 세운다면 학문은 자연히 몸에 베게 되는 것이다. 학문이 몸에 배게 되면 독서는 따로이 그 충절을 논할 것이 없다.

119-다른 사람들이 천시하고 세상에서 비루하게 여기는 것도 슬픈데, 지금 너희들은 스스로 자신을 천시하고 비루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는 너희들 스스로가 비통함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끝내 배우지 않고 스스로 포기해버린다면, 내가 지은 저술과 간추려 뽑아놓은 것들을 장차 누가 모아서 책을 엮고 바로 잡아 보존시키겠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는 나의 글이 끝내 전해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27-보내준 편지는 자세히 보았다. 전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시비의 기준이요. 또 하나는 이해의 기준이다. 이 두가지 큰 기분에서 네 종류의 큰 등급이 생기는 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요,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켜서 해를 받는 것이며, 그 다음은 나쁜 것을 쫓아 이익을 얻는 것이며. 가장 낮은 등급은 나쁜 것을 쫓아서 해를 받는 것이다.

137-첫째 이유는 날로 마음씨가 나빠지고 행동이 비루해져가니, 이 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하겠고, 둘째는 안목이 좁아지고 지기가 상실 되어가니,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하겠고, 셋째는 경학이 조잡해지고 식견이 텅 비어가니,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하겠다.
139-앞으로 시를 지을 때에는 모름지기 사실을 인용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야 할 것이다.

144-내가 남에게 베풀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이 먼저 나에게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들의 오만한 근성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유념해서 평소 일이 없을 때에 공손하고 화목하며 근신하고 충성하여 여러 집안의 환심을 사도록 힘써야 할 것이요, 절대로 마음속에 보답을 바라는 근성을 남겨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저 사람이 마침 서로 방해되는 일이 있어서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절대로 입에 경솔한 말을 올려 “나는 일찍이 이렇게 이렇게 해주었는데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한다”고 하지 말아라. 이러한 말을 한번 하면 그 동안 쌓아놓은 공덕이 하루아침에 바람에 날리는 제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154-주자가 말하기를 “온화하고 양순함은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이요, 부지런하고 검소함은 집안일을 처리하는 근본이며, 독서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근본이요, 도리를 따름은 집안을 보전하는 근본이다” 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거기의 네 가지 근본이다.

164-사상이 형상한 것은 하늘 ․ 땅 ․ 물 ․ 불이고, 하늘 ․ 땅 ․ 물 ․ 불은 스스로 형상을 이루었을 뿐, 다른 물건이 섞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불을 의탁해서 바람이 되고 불이 하늘에 분결해서 우레가 되며, 물이 땅을 깎아서 산이 되고, 땅이 물을 가두어 못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는 것이다.

171-나는 몇 년 전부터 독서에 대하여 대략 알게 되었다. 책을 그냥 읽기만 하면 하루에 천백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한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연구해서 그 근본을 터득하고 따라서 그 글의 전체를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을 계속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 아울러서 수백 가지의 책을 널리 찾아보게 될 것이요. 따라서 본서의 의리에 대해서 분명히 꿰뚫을 수 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172-무릇 책의 내용을 뽑아서 쓰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자기의 뜻을 정해서 만들 책의 규모와 항목을 세운 뒤에 뽑아야만 일관된 묘미가 있는 법이다.

185-하늘이 짐승에게는 발톱을 주고 단단한 발굽을 주고 날카로운 이를 주고 독을 주어서, 각기 하고 싶은 것을 얻게 하고, 사람에게서 받게 되는 환난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바로 사람에게는 슬기와 깊이 생각하는 것이 있음으로써 기예를 습득하여 스스로 자기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한 것이다.

194-무릇 능히 움직여 손가락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힘이라 이르고, 능히 화합하여 생활하는 기관을 가진 것을 신이라 이르고, 능히 왕래하고 동작하고 정지하면서 법이 있어 문란하지 않는 것을 법도라 이른다. 이 세 가지를 알고 나서 맥이 움직이고 가라앉음과, 더디고 빠름과, 크고 작음과, 미끄럽고 껄끄러움과, 팽팽하고 허한 것과 긴장되고 완만함과, 맺히고 잠복하는 징후에만 자세히 주의한다면 맥 짚은 의원의 일은 다 마친 셈인데 또 무엇을 구하겠는가.

237-무릇 간사한 짓은 오래 있는 데서 생기게 된다.
238-“아전이 본디부터 간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을 간사하게 만드는 것은 법이다.”
아니다. 이른 단지 본성을 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일 뿐이다. 아니다 이는 단지 배우지 못한 오만한자 일뿐이다. 아니다 이는 비슷할 뿐이요 역시 작은 도적이다. 큰 도적이 있다. “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 죽을 것이다.”

244-“인의 실상은 어버이 섬기는 일이 바로 그것이고, 의의 실상은 형을 따르는 일이 바로 그것이고, 예의 실상은 그 두 가지를 절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 락의 실상은 그 두 가지를 즐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며, 지의 실상은 그 두 가지를 알아 거기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259-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나라의 큰 정사는 사람을 등용하는 일보다 앞선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인재등용은 오직 3년 마다 실시하는 과거뿐인데 그 실상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여기에서 뽑은 사람은 대부분은 폐기되어 이름이 문과 방목에 오르고도 기껏해야 낭관에 지나지 않으며, 저 묘당에서 관복을 입고 국정을 담당하는 우직으로 말하면 오직 별시와 반제에 급제하여 올라온 자라야 차지합니다. 이는 마치 아침, 저녁의 식사는 폐하고 오직 차와 과일만을 먹는 것과 같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맞지 않음이 이보다 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288- 아! 바람 타는 나무는 항상 고요히 있을 수 없거니와 어버이의 나이가 어찌 영원히 머물러 있으랴. 진실로 가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효자가 있다면 마땅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291-불효의 이유가 두 가지가 있으니 아내와 재물이 바로 그것이다. 아내와 재물은 본래 부모에게 효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아내라는 것은 곧 그로 하여금 부모가 살아서는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게 하고 부모가 돌아가셔서는 제사를 받들게 하며 자손을 낳아 길러서 선조의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이요, 재물이란 것은 곧 부모의 의식을 만족시켜드리는 것이며 부모의 장례와 제사를 받드는 것인, 아내와 재물이 아니면 사람의 자식 된 자가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


3. 내가 저자라면

3-1. 다산의 철학을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

[다산문선]의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부분은 다양한 형식에서 우러나는 다산의 열 가지 빛깔이다. 기, 전, 가훈, 서, 설, 논, 원, 소, 기사, 잡문의 다양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내용에서도 다산 사상의 축약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산의 다양한 생각을 유감없이 전하고 있다. 또한 다산의 인간적인 면모와 생각을 중심으로 편집된 것이기에 매우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게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책이다. 훗날 나의 사상의 성숙함이 이루어 질때에, 다산문선의 형식을 빌어 나의 글쓰기를 정리해 본다면 재미있는 구성이 될 것이다.

3-2. 칼럼집

내가 특히 [다산문선]에서 감탄한 부분은 첫째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의 흡인력, 둘째 ‘곡산의 북방산수기’ 와 같은 살아있는 관찰과 묘사력, 셋쨰, 개성 있는 인물의 성격을 그린 전기들, 넷째, 삶의 경험과 연결된 뛰어난 비유를 통한 주제 전달력이다. 내가 칼럼을 쓸 때 갖추고 싶은 능력들을 모두 소유한 다산을 만나며 더욱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어내려 가게 되었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그의 독서에 대한 철학을 만나게 된다. 다산의 글쓰기는 그의 끊임없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노력, 독서에 대한 철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마치 변화샘이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같아 마음은 뜨끔 뜨끔, 미소는 입가를 떠나지 않은 채, 확연하게 현실감 있게 읽어 나갔다. 그의 삶에서의 실천 학문은 단지 이론이 아닌 일상의 습관을 만드는 데에도 기본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다양한 주제와 샘플들, 다양한 예문을 선물 받은 것 같아 마냥 즐거운 상태다. 칼럼이 막히거나 머리를 식힐 때에 늘 곁에 두고 읽어본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3-3. 새롭게 다가오는 시의 의미

실학사상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는 다산은 또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2,500여수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이것 또한 얼마나 부러운 일이던가. [다산 문선] 곳곳에 시에 대한 그의 철학들이 숨어 있다. 그에게 시는 여흥이 아니라 실학정신에서 일관되게 구현되는 또 다른 표현 방식이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시 정신을 이렇게 피력했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옳은 것을 찬미하고 잘못을 풍자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없음은 시가 아니다.”

나에게 그저 시는 개인적인 정서를 노래하는 무엇으로 읽혀져 왔었다. 시에서 까지 철학을 찾고 의미를 찾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었다. 하지만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과감히 시로 승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다산을 만나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또 다른 시의 의미를 찾아보게 된다. 나의 여성운동, 춤과 명상에 대한 사상과 철학 또한 시로 표현해 볼 수 있으리라.

3-4.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한승원 ‘흑산도 가는 길’ - 정약용의 형 정약진의 절대고독 속에서 희망 찾는 삶을 그린 소설 / 다산 시 작품집 / ‘목민심서’ / ‘주역’

3-5. 아쉬운 점

이 책은 다산의 대표작 외에 시문집 가운데 전하는 약간 편을 추려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생각을 접해보도록 하였다고 저자 소개 끝에 살짝 책의 편집의도를 밝히고 있다. 좀더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서문을 통해 책의 출판 과정이나 목적, 그리고 그 시대의 산문형식 등의 소개를 제시해 주었다면 이 책을 읽는데 좀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몇주 째 역사인물들의 책을 읽다보니 제목 앞에 ‘쉽게 읽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책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뭔가 얄미운 감이 생겼더랬는데, 막상 다산문선을 다 읽고 나니 쉽게 내용을 좀더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누구라도 좀더 쉽게 다가 설 수 있도록 현재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나 시대적 배경의 설명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좀더 풍부한 설명(각주, 사진 자료등)이 함께 실려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전체 10가지 형식의 글 중에서 ‘서․書’ 부분에 너무 많은 부분이 치중된 것이 아쉬웠다. 전, 원, 소, 기사, 잡문등 뒤로 갈수록 그 색깔을 충분히 감상하기에 부족한 수가 실려져 있어 다양한 형식을 균형감 있게 흡수하기에는 어려웠다.


IP *.103.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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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6.24 23:18:31 *.142.242.51
리뷰 두 개가 올라오네요...
좋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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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6.25 00:03:49 *.60.237.51
이 사람이 무슨 큰 결심을 한건가^^ 한 번에 2개의 북리뷰라니, 지난주를 슬며시 넘어간 내가 부끄러워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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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07.06.25 09:51:47 *.99.120.184
그래. 다시 힘을 내고 있군. 파이팅!
역시 소현만의 독특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아.
앞으로도 계속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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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6.25 11:39:28 *.128.229.230

소라의 춤다리가 예쁘구나. 다리몽댕이가 부러진게 아닌가 보다.

촘촘한 그물처럼 읽어 가더니 어찌하여 '논' 에서는 그 촘촘함을 잃었느냐 ? 어인 일이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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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25 18:00:37 *.72.153.12
내가 '저자라면' 달 읽고 갑니다.
사람마다 중심으로 잡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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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6.26 23:45:01 *.48.41.28
일주일이 빡셌겠구나. 고생했다.
나도 이순신 미제출 하나 있는디..언제 올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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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06.27 10:25:16 *.231.50.64
호정 : ㅋㅋ.. 호정이도 한번 해봐봐...

도윤 : 나는 아직도 남아있는 리뷰가 2개나 있으니 부끄러워 마시옹.

여해 : 에너지 팍팍주는 오빠, 고마워요.

부지깽이 : 사부님 춤을 춰야하니 다리몽댕이 말고 손을 부러트려 주시옵소서.

정화 : 언니야. '달'을 읽고 간다니.. 너무 멋지표현이잖아. ㅋㅋㅋ

향인 : 빡쎈한주^^ 신기하게도 말이야. 그닥 빡?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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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2007.06.27 22:04:00 *.72.153.12
소현 그거 '달' 오타다. 손가락에 기름칠한것도 아닌데 미끄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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