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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5일 00시 00분 등록
#1. 프롤로그

나는 지금까지 대체 무슨 책을 읽었던가? 그리 많은 책을 읽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한 달에 2, 3권 정도의 책은 읽었던 듯 한데, 그 책들은 다 무슨 책이었던가? 다만 '실용'을 말하며 마케팅, 기획, 전략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포장된 알맹이 없는 책들만 들추었던 것은 아닌가? 어쩐지 외국의 것이 더 좋아 보여서 우리의 글은 돌아보지도 않고 번역서들만 기웃거렸던 것은 아닌가?

이달의 과제로 이순신, 김구, 정약용을 차례대로 만나면서, 그분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그 이름 두, 세자 밖에 없구나, 하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다. 우리의 것도 모르면서 남의 것 만으로 아는 체를 하였으니, 그게 과연 알기나 알고 했던 것인가? 모르고도 아는 체 했던 것인가? 민망하기 그지없다.

이제 내 몸에 맞지 않는 그 옷들을 하나, 둘 벗어 던진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치장을 하나, 둘 지워버린다. 아무 것도 없는 여기가 바로 나의 자리이다. 보잘것 없이 초라한 이 곳이 바로 나의 출발점이다.



#2. 저자에 대하여

200년 전 그대는
한 왕조의 치욕으로 태어나
조선의 자랑으로 살아 있습니다.
가슴 속 핏속에 살아 흐르고 있습니다.
귀양살이 18년 혹한 속에서도 그대는
만 권의 책 탑으로 쌓아놓고 고금동서를 두루두루 살피셨습니다.
그 위에 다시 압권을 저술하여
한 시대의 거봉으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나라 걱정 백성 사랑 꿈엔들
한시라도 잊으신 적 있었으리요마는
때로는 탁한 세상 하 답답하여
탐진강 강물에 붓대를 휘저었습니다.
애절양(哀絶陽)이여 애절양이여 애절양이여,
그러나 어떤가요 그 후 200년 지금은
여전히 농민은 토지로 밭을 삼아 땀 쏟아 일구고
여전히 벼슬아치는 백성을 밭으로 삼아 등짝을 벗겨먹고 있으니

아, 다산이여 다산이여
그대 어둔 밤 조국의 별로 빛나지 않는다면
내 심사 이 밤에 얼마나 황량 하리요.
어느 세월 밝은 세상 있어 그대 전론(田論)을 펴고
주린 백성 토지 위에 살찌게 하리요.

- 전론을 읽으며, 김남주

감옥에 갇혀 있던 시인 김남주는 정약용의 '전론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한다. 백범 일지를 읽을 때는 김구 선생님의 '나의 소원'에 희망했던 우리나라와 그 이후 전쟁과 독재로 점철된 현대사와의 괴리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다산 정약용의 생을 되짚어보니 200년 전에도 역시 어쩔 수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김구 선생님께선 자신이 꿈꾸시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향한 큰 발걸음을 채 떼지도 못하신 채 피살당하셨고, 정약용 선생님 또한 자신이 그토록 바라시던 '백성들이 살찌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개혁은 저만치 뒤로 한 채, 권력의 변두리에서, 남도의 유배지에서 쓸쓸한 생을 보내셔야 했다.

이제 다산 정약용의 생을 살펴보려 한다. 박석무가 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란 책과 다산 연구소 홈페이지(www.edasan.org)를 참고했다. 그의 생애는 보통 4시기로 나누어 구분하는데 유년기/청년기, 벼슬시절, 유배시절, 그리고 만년시절이다.

성장기/청년기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 사시(巳時)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정재원(8대 연속 홍문관 학사를 배출한 나주 정씨 집안), 어머니 해남 윤씨(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로 학문과 예술의 집안)의 4남 1녀 가운데 4남으로 출생했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힘썼다. 그는 4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7살 때 오언시를 짓기 시작했다. '산'이라는 제목의 시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멀고 가까움의 지세가 다른 탓이지"(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구절이 있는데, 아버지가 기특히 여겨 "분수에 밝으니 자라면 틀림없이 역법(曆法)과 산수(算數)에 통달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가 9살 되던 해 어머니 해남 윤씨가 죽었다. 어머니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로 공재는 다산에게 외증조부가 된다. 윤두서의 초상화가 남아 있는데, 다산의 얼굴 모습과 수염이 그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다산이 일찍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정분(精分)은 외가에서 받은 것이 많다"고 했다. 15살에 풍산 홍씨에게 장가를 들었고, 이때 아버지가 호조 좌랑이 되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살림집을 세내어 서울 남촌에 살았다. 지방 수재가 드디어 큰 세상을 접하게 된다.

1777년, 16살이 되던 해 그는 실학의 대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처음으로 보았다.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항상 "꿈 속 같은 내 생각이 성호를 따라 사숙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학문하기를 결심했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 공이 문학으로써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이후 과제와 시험마다 수석을 차지해 정조에게 많은 상을 받았다. 23살 때 이벽(李檗)을 따라 배를 타고 두미협(斗尾峽)을 내려가면서 천주교에 관한 얘기를 듣고 책 한 권을 보았다. 이렇게 젊은 시절,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이 뒤에 큰 화근이 된다.

벼슬 시기

다산은 28살에 대과에 합격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의 벼슬길이 시작됐다. 학문과 행정에서 정조의 신임을 얻으며 측근으로 활동했다. 규장각 초계 문신으로서의 활동, 수원 화성의 설계, 암행어사로서의 활약, 곡산 부사 임기 중 지방행정관으로서의 치적 등으로 장차 정조가 중용할 것이 예상됐다. 그러나 정적들은 다산의 성장과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에 위기감을 느끼며 천주교를 빌미로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그가 31살 때, 홍문관의 수찬(修撰)이 되었다. 그 해 4월에 아버지가 진주 임소에서 돌아가셨다. 집에서 여막살이를 하는 다산에게 정조는 임무를 맡겼다. 정조가 기유년(28세, 1789) 겨울에 한강에 부교(浮橋:배다리)를 놓을 때 다산이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을 상기하면서, 다산에게 수원 화성의 설계도를 작성해 바치라고 명한 것이다. 다산은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 기중기 등을 설계하여 비용을 절감하고, 일반 백성을 강제 동원하지 않고 임금 노동자인 모군 만으로 성을 건설하여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33살 되던 해(1794년), 7월 아버지의 상을 마친 그는 성균관 직강으로 제수 받았으며, 10월에 정조의 명에 의해 경기 어사가 되었다. 다산은 적성, 마전, 연천 등을 암행하면서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백성의 참상이 수령과 아전들의 착취로 인한 것으로 파악하고 제도를 악용하여 착취를 일삼는 탐관오리를 벌 주었다. 다산은 고위직에게도 추상같았는데, 암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다산이 관찰사 서용보의 비리를 정조에게 고했다. 이 고발사건으로 서용보는 다산에 악감정을 갖고 정조 사후 철저하게 보복하게 된다.

을묘년(정조 19년, 1795) 여름 4월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변복을 하고 몰래 들어와서 북악산 아래 숨어서는 서교(西敎)를 몰래 펴고 있었다. 체포하려 했으나 주문모는 놓쳐버리고 최인길, 윤유일 등 3인을 붙잡아 장살(杖殺)해버렸다. 이 사건을 빌미로 노론이 공세를 퍼부었다. 목표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이었다. 정조는 곤혹스러웠다. 이들을 비호했지만, 계속되는 공세에 한발 물러나서 이가환과 정약용의 천주교 혐의를 씻어주고자 했다. 이가환을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하여 임명하고, 이승훈은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 보냈다.

금정(金井)은 충청도 홍주(洪州)에 소속된 역원(譯院)인데, 역속(驛屬)들이 대부분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다산은 금정에 도착하여 그곳의 세력가들을 불러다가 조정의 금령(禁令)을 거듭거듭 설명해 주고 제사 지내는 일을 권고했다. 그리고 기호지방의 중요한 천주교도인 이존창을 체포하여 감화시켰다.

다산이 36세 되던 해(정사년, 1797), 정조는 다산이 천주교 혐의를 충분히 씻었으므로 중용할 때라 생각했다. 그래서 6월 다산을 동부승지로 임용했다. 이에 대해 다산은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를 올려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솔직히 밝혔다. 이 상소는 다산이 한때 천주교에 경도되었지만 나중에 버렸노라는 변명이자 고백이었다.

사직상소를 낸 다음달 정조는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특별히 임명했다. 그때 세력을 잡은 자로 참소하고 시샘하는 자가 많아 다산을 몇 년 외직(지방직)에 근무하도록 하여 그 불길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곡산에 이계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백성 천여 명을 이끌고 관청에 와서 백성들의 고초에 대해 항의하다 달아난 사건이 있었다. 그 이계심이 다산이 곡산으로 부임하는 길에 나타나 백성들의 고통 사항 10여 조목을 적은 글을 바치고는 길가에 엎드려 자수했다. 옆 사람들이 체포하려 했으나 다산은 저지했다. 다산은 관청의 행정에 항의하는 태도가 오히려 관청이 밝은 행정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산은 곡산 부사로 있은 2년 동안 직접 한 고을의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쳤다.

다산이 아직 곡산부사로 있던 38세 때(己未, 1799) 정월에 명재상 채제공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산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불길한 전조였다. 4월 정조는 다산을 다시 조정에 불러 형조 참의에 제수했다.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의심스러운 사건들을 명쾌하게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의 신임이 높아갈수록 주위의 시기도 높아졌다.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계(啓)를 올려 권철신(權哲身)과 다산의 형 약종(若鍾)을 사학의 죄인으로 처벌하기를 요구했다.

다산은 39세(경신년, 1800)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현(馬峴)의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참소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하면 공격받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정조는 그를 놓아 둘 수 없었다. 다시 불렀다. 그러나 정조의 건강에 탈이 났고 보름새에 운명하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빠져있을 때,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다산에게는 이제는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다.

유배 시기

다산은 정조가 죽자 정적들에 의해 사지에 내몰린다. 겨우 목숨을 건져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다산은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학문적 업적으로 승화시켰다.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써서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저술은 당시 조선사회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1800년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노론 벽파들이 전권을 장악했다. 이듬해(신유년, 1801) 호시탐탐 노리던 노론 벽파는 장례가 끝나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채제공의 뒤를 이을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 정조가 장차 크게 쓰려했던 인재들이 붙잡혀 왔다. 이가환, 이승훈은 사교도라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다산은 사지(死地)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18년간의 긴 귀양살이가 시작됐다.

다산의 나이 40살이었다. 신중하면서도 용기를 지녔던 다산,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행정경험을 쌓았던 다산, 장차 명재상이 될 것이 예상되었던 다산, 조선을 새롭게 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던 다산. 그러나 다산은 먼 귀양길을 떠나야 했다. 첫 귀양지는 포항 장기였다. 9개월을 지냈는데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다산의 적들은 다산에게 혹독한 심문을 가했지만 다산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다산은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고, 형 손암 정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이 때 형과 함께 유배지를 향하다, 나주 밤남정이란 주막에서 서로 길이 나뉘게 되는데, 이때의 정경이 「율정별」(栗亭別)이라는 시에 나온다.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말 잃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정약전은 유배 16년 만에 흑산도에서 그 안타까운 생애를 마치므로, 이 이별은 형제의 영원한 이별이 된다. 강진에 도착했을 때, 유배초기인지라 인심은 싸늘했다. 한 늙은 주모의 도움으로 머무른 곳이 동문 밖 주막(酒家)이었다. 이곳에서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했다. 감시의 눈도 심했고 무고도 있었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서 머물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두 번째 거처로 보은산방(寶恩山房)에 머물렀다. 44살 때(1805) 겨울 큰아들 학연이 이곳에 찾아와 머물렀고, 다산은 큰아들에게 주역과 예기를 가르쳤다. 45살 때(1806) 가을 9개월 만에 다시 목리(牧里) 이학래(李鶴來)집으로 옮겼다.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다. 다산은 유배생활의 고초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독서와 저술에 열중했다. 다산은 먼저 예학과 주역을 공부했다. 경학에 힘써 당시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주자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했다. 관념론이 아닌 실천론으로서의 경학이었다.

다산은 개인적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어두운 시대에 아파했다. 사실 다산이 겪는 고초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불의(不義)의 시대에 태어난 탓이었다. 그의 시문은 민초들의 고통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농민들의 착취와 압제의 실상을 목격하고, 농촌현실에 근거한 문제의식과 그 해결을 위한 저술에 몰두했다.


- 다산초당

다산은 47세 때(1808)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橘洞 : 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경학 이외에 경세학(經世學)과 다방면의 실용적인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유배 초기에는 6경 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의 저술을 마쳤고, 나중에는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마쳤다. 경세유표는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정책제안서이다. 목민심서는 현행법 내에서도 공직을 바로잡아 백성을 살려내려는 취지였다. 다산의 정확한 현실인식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후기의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고 민(民)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다산은 만덕사(萬德寺 : 백련사)에 머물고 있던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났다. 열 살 이상 연하의 스님을 만나 학문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혜장은 1811년 40세의 나이로 입적하고 만다.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몇 차례 풀려날 기회가 있었지만 예전 관찰사 시절, 정약용의 보고에 앙심을 품었던 서용보 등 반대파의 저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다산은 구차하게 선처를 구하지 않았다. 무익한 일이 분명한데 자존심까지 잃을 수 없었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를 모두 운명이라 여겼다.

만년 시절


- 다산 생가

1818년, 57세 때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산은 북한강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기도 하는 한편,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힘썼다.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했으며, '흠흠신서'를 저술하여 경세론의 삼부작(1표2서)을 완성했다. 또한 '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1822년 회갑을 맞이하여, 자신의 60평생을 돌아보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었다. 자신의 생애를 정리한 자서전적 기록이다. 당쟁에 얽혀 잘못 알려질 수 있는 사실들을 바로 알리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학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육경(六經)사서(四書)로써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을 갖추었다”

다산은 만년에 ‘사암(俟菴)’을 자신의 호로 사용했다. 사암(俟菴)이란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즉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성인에게도 자기 학문은 질책 받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배어있다. 다산은 1836년 그의 부부가 혼인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혼(回婚)의 날, 그리하여 친척들과 자손들이 모인 날. 그는 75세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양반으로 태어났지만 백성들의 현실을 고민했고, 고루한 현실을 개혁하려는 실천 의지가 강하였다. 때문에 평생을 유교라는 수직적인 철학의 틀 안에서 실생활을 해결하기 위한 상생의 수평적인 삶을 담아내기 위한 방안을 고민했다. 불의의 시대에 태어나 18년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500여권의 저술이란 학문적 업적으로 극복해냈다.

#3. 내 마음에 들어온 인용문

기 • 記

(14) 병이 위독한 사람은 병든 것을 그 스스로는 알지 못하고, 병이 들었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병이 심한 것이 아니다. 미친 사람은 미친 것을 그 스스로 알지 못하고, 미쳤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진짜 미친 것이 아니다. 간사함, 음탕함, 게으름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잘못을 고칠 수 있다.

(14-15) 장자는 이미 깬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주 장수한 사람과 어린 나이에 죽는 것을 한가지로 여겨 오래 사는 것과 짧게 사는 것을 같은 차원에서 보았으니, 이는 환하게 깨어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꿈 속에서 또 꿈을 꾼다"고 말한 것이다. 대체로 몸소 본 것을 또다시 돌이켜 살피면서 말하기를, '깨었다(惺惺)', '각覺했다', 오悟했다'고 하는 것은 깊이 취하고 잠들었다는 증거이므로 스스로 재齋에 취몽醉夢이라고 이름을 붙인 자가 있다면, 이는 혹 술과 잠에서 깰 기미가 있는 사람이다.

(15) 그는 세상에서 파리처럼 분주한 사람이나 돼지처럼 쉬는 사람과 비교하면 꽤 분명하게 깨인 사람이라 하겠다.

(16) 적벽의 뛰어난 경치는 여자가 화장을 한 것과 같아서 붉고 푸르게 분을 바른 모습이 비록 눈을 즐겁게 할 수는 있으나, 가슴 속에 품은 생각을 풀고 기질과 의지를 펼 수는 없네. 그대는 서석산을 보지 못하였는가.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과 훌륭한 선비가 말하지도 웃지도 않고 조정에 앉아 비록 움직이는 흔적을 볼 수 없지만 그 공적은 사물에 널리 미치는 것과 같네.

(16-17) 가운데 봉우리의 정상에 서면 날듯이 세상을 가볍게 보고 홀로 특별히 다른 길을 가는 기분이 들어, 인생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마음에 둘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8) "중이 중 노릇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무릇 부모, 형제, 처자의 즐거움이 없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의 즐거움이 없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고통스럽게도 중 노릇을 합니까. 진실로 그와 바꿀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가 학문을 한 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 같은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까?

(19) 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고, 곤궁했을 때 지내던 곳을 입신 출세하여 찾아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며, 홀로 외롭게 지나가던 땅을 좋은 손님들과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이끌고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22) 무릇 사물 중에서 아름다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물건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욱 많게 되며, 그것을 얻기도 더욱 힘들게 된다. 비옥한 전답과 높은 집, 길다란 인끈과 포근한 갖옷, 아리따운 여자와 좋은 말 같은 것은 평생토록 얻으려고 애쓰지만, 어떤 사람을 얻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얻지 못한다. 그것을 얻을 때는 마치 사나운 새와 짐승이 먹이를 움켜잡고서 사방을 둘러보는 것과 같으며, 그것을 얻지 못할 때는 마치 궁한 귀신이 슬피 울부짖는 것과 같으니 또한 가련하지 않은가.

(24) 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으나 부득이 해야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요, 자기는 하고 싶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만둘 수 있는 일이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은 항상 그 일을 하고는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그만둔다.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할 수 있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한 때로는 그만둔다. 진실로 이와 같이 된다면 천하에 도무지 일이 없을 것이다.

(25)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고 하였으니 아, 이 두 마디 말은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닌가? 대체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뼈를 에듯 하므로 매우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건너지 않으며, 사방의 이웃이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기 몸에 이를까 염려한 때문에 매우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28) 옛사람이 산을 바라보기만 하여 그 흥취의 반쯤은 남겨놓은 것을 미인을 반쯤 본 것에 비유하여, "얼굴을 아름다웠으나 그 자태는 기억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매우 훌륭한 비유다.

(32) 신라의 시조가 탄생한 시기는 한나라 선제 때와 맞먹는데 기록된 고적이 모두 황당하여 정도에 어그러지고, 백제가 망한 시기도 당나라 고종 때의 일인데 용을 낚았다는 설이 이처럼 잘못되었으니, 하물며 한나라와 당나라 이전의 사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우리 나라의 일은 고려 이전까지는 모두 물을 것이 없다.

(36-37) 때는 바야흐로 봄과 여름이 교차되는 때였다. 초목의 어린 잎이 막 돋아나서, 빛이 짙은 것은 초록색이고 옅은 것은 노랑색이었다. 연못의 물빛도 혹은 짙은 흑색이거나 혹은 밝은 녹색이었다. 물가에는 대체로 흰 자갈과 깨끗한 모래가 있었다. 어떤 곳은 물살이 세고 어떤 곳은 연못이 되어 배가 빨리 달리기도 하고 혹은 천천히 떠가기도 하였는데, 봉우리들이 가려서 안 보이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여, 그 경치가 가지가지로 기묘하였다. 한창 배가 신속히 달릴 때는 봉우리가 병풍처럼 죽 늘어서 있던 것이 순식간에 뾰족한 머리와 예리한 뿔로 바뀌어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으며, 다시 한바퀴 돌아가면 뾰족한 머리와 예리한 뿔이 또 구름이 녹고 안개가 걷히듯 도로 병풍처럼 되어버린다. 이러한 경치는 한결같이 신기루의 연기에 뒤덮인 나무를 보는 듯 변화가 무쌍하여 정말로 기이한 절경이었다.

(39) 뱃사공에게는 밥을 지으라 하고 조그만 배에 악기를 싣게 하고 섬 사이를 뚫고 가는데, 그 사이는 겨우 배가 지나갈 정도였다. 그 악기 소리가 간드러지게 나니, 강변의 돌길에서 식량을 지고 가던 사람들은 지게를 벗어놓고 바위에 걸터앉아서 구경하고, 산꼭대기에서 화전을 갈던 사람들도 호미를 놓고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구경을 했다. 이것 또한 나의 기쁨을 더해주기에 족하였다.

전 • 傳

(52) 도가에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을 신선이 되는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조신선은 욕심이 많으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늙지 않았으니, 혹 말세가 되어 신선도 시속을 면할 수 없어서인가?

(57) "나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도 예법에 구애되어 모른체하고 떠나간다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다"

가훈 • 家訓

(61)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행하는 일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니, 이 점에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비록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흙담에다 색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 몸을 엄정하게 닦았다면 그 벗을 사귀는 것도 자연히 단정한 사람일 것이다.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는 서로 모이는 것이므로 결코 특별한 힘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62) 무릇 천륜에 야박한 사람은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믿어서도 안 되며, 비록 충후忠厚하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온 정성을 다해 나를 섬기더라도,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끝내는 은혜를 배반하고 의리를 망각하여 아침에는 따뜻하게 대하다가 저녁에는 냉정해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 세상에 깊은 은혜와 두터운 의리로는 부모 형제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부모 형제를 저처럼 가볍게 배반하고 있는 처지에 더구나 벗에 대해서이겠는가. 이것은 쉽게 알 수 잇는 이치이다. 너희들은 절대로 이 점을 기억하여 모든 불효자를 가까이 하지 말고, 형제끼리 깊이 사랑하지 않는 자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63)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란 임금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임금에게 신임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64) 지위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는 온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공무에 힘을 서야 하고 언관言官의 지위에 있을 때는 모름지기 날마다 격언과 곧은 의론을 올려서 위로는 임금의 과실을 비판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 혹 사악한 관리를 공격하여 제거하되 모름지기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해야 하며,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은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것만을 지적해야지, 의리에만 치우쳐서 자기와 뜻이 같은 사람이면 편을 들고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이면 공격해서 함정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70-71) 자질구레한 이야기들로 구차하게 한 때의 괴상한 웃음이나 자아내게 하는 책이라든지, 진부하고 새롭지 못한 이야기나 지리하고 쓸데없는 논의와 같은 것들은 다만 종이와 먹만 허비할 뿐이니, 좋은 과일나무를 심고 좋은 채소를 가꾸어 생전의 살 도리나 넉넉하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72) 무릇 시에는 정신과 기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쓸쓸하고 산만하기만 하여 결속과 단속의 묘미가 없는 시는 그 사람의 빈궁과 영달은 고사하고 수명도 길지 모사니, 이 점은 내가 여러 차례 시험한 것들이다.

… 시에는 반드시 마음에 깊이 느낀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절대로 미묘하고 완곡하게 표현을 해야지 얄팍하게 드러나도록 해서는 안된다.

(74) 이러한 때에, 만약 어떤 도량이 넓은 남자가 아리땁고 지혜로운 부인을 감동시켜 숲 같은 도량을 넓혀주고 태양처럼 밝은 마음을 갖게 하여 여자의 도리를 지켜 어린 아이처럼, 창자 없는 것처럼, 뼈 없는 벌레처럼, 갈천씨의 백성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정에 들어간 승려처럼 하여 저쪽에서 돌은 던지면 이쪽에서는 옥돌로 보답하고, 저쪽에서 칼을 가지고 나오면 이쪽에서는 단술로 대접해주지 않는다면, 서로 눈을 흘겨보며 성내고 다투다가 죽이기까지 하는 등 결국 집안을 망치고야 말 것이다.

(76-77) 대체로 부귀한 집안의 자식들은 재난이 화급한데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반면, 몰락하여 버림받은 집의 가족들은 태평한 세상인데도 언제나 걱정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늘진 벼랑이나 깊숙한 골짜기에 살다 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도 모두가 버림받고 벼슬길이 막혀 원망하고 지내는 부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듣는 것이라고는 모두 사정에 어둡고 허탄하고 편벽되고 너절하고 더러운 이야기들뿐이니 이것이 바로 영원히 가버리고 돌아보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그리하여 아들이나 손자의 세대에 가서는 과거에도 마음을 두고 경제에도 정신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루아침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먼 시골로 이사가버리는 사람은 천한 무지렁이로 끝나고 말 뿐이다.

(79) 그러니 너희들은 이 점을 알아서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노력은 조금 늦추더라도 먼저 올바른 몸가짐의 공부에 힘써 육중한 산처럼 우뚝 솟은 모습으로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를 익혀야 한다.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데도 먼저 기상을 점검하여 자기 본령을 세울 줄 안 다음에 점차로 저술에 마음을 기울여야만이 한마디 말, 한 구절의 글이 모두 남들이 아끼고 애호하는 바가 될 것이다. 만약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경시하여 땅에 버려진 흙같이 한다면 이는 정말 끝나버리는 일일 분이다.

(80) 형체가 있는 것은 파괴되기 쉽지만 형체가 없는 것은 없애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기가 자기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형체로 사용하는 것이요, 제 재물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은 정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물질로써 물질적인 향락을 누리면 해지고 파괴되느니 수 밖에 없지만 형체 없는 정신적 환락을 누린다면 변하거나 없어지는 낭패를 당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재화를 비밀리에 숨겨두는 방법으로는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도둑에게 빼앗길 염려도 없다. 불에 타버릴 걱정도 없고, 소나 말이 운반해야 할 수고로움도 없이 자기가 죽은 뒤까지 지니고 가서 천년토록 꽃다운 명성을 전할 수 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있겠느냐? 재물은 더욱 단단히 잡으려 하면 더욱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것이니 재화야말로 미꾸라지 같은 것이다.

서 • 書

(82) “우주宇宙 사이의 일이란 바로 자기 분수 안의 일이요, 자기 분수 안의 일은 바로 우주 사이의 일이다.”

대장부라면 하루라도 이러한 생각이 없어서는 안된다. 우리 인간의 본분이란 역시 그냥 허둥지둥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

무릇 하늘에 부끄럽고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을 전혀 범하지 않으며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윤택해져 호연지기가 생기는 것이다. 만일 포목 몇 자, 동전 몇 닢 때문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호연지기가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느냐 하는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극히 주의하도록 하라.

다음으로는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체가 모두 완전하더라도 구멍 하나가 새면 이는 바로 깨진 옹기 그릇일 뿐이요, 백 마디가 모두 신뢰할 만하더라도 한마디의 거짓이 있다면 이건 바로 도깨비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

(88) 나는 비로소 기상의 웅장함과 잔약함은 체구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음을 알았다.

(93) 뜰 앞에는 오동나무 한 그루와 파초 한 떨기가 맑은 그림자만 너울거려 한 점 먼지의 기운이 없었으니 이는 그야말로 당시의 풍류였었다.

(94) 용勇이란 지智, 인仁과 함께 삼덕三德 가운데 하나다. 성인이 개물성무開物成務하고 천지를 두루 다스림은 모두 용으로 하는 것이다.

“순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순임금처럼 하면 그와 같이 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용이다. 경제의 학문을 하려는 사람은 “주공周公은 어떤 사람인가? 주공처럼 하면 그와 같이 된다”하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려는 사람은 “유향劉向과 한유韓愈는 어떤 사람인가? 그들처럼 하면 그와 같이 된다” 하였다. … 한가지 소원이 있으면 어떤 사람을 목표로 정해 그 사람과 동등한 경지에 이르고서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용의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97) 한차례 배가 부르면 살찔 듯이 여기고 한차례 주리면 마를 듯이 여기는 것은 천한 짐승들이나 하는 것이다. 시야가 짧은 사람은 오늘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은 일이 있으면 당장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에 뜻에 맞는 일이 있으면 당장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에 뜻에 맞는 일이 있으면 벙긋거리며 낯빛을 펴곤 하여, 일체의 근심, 유쾌함, 슬픔, 기쁨, 감격, 분노, 애정, 미움 등의 감정이 대부분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

요컨대 알아야 할 점은 아침에 햇빛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때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진리인 것이다. 운명은 돌고 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 때의 재해 때문에 마침내 청운의 뜻까지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지니고서 천지가 눈 안에 들고 우주가 손바닥 안에 있듯이 생각하고 있어야 옳다.

(101) 또 모든 옳지 모사 재산이란 오래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너는 포교나 나졸들의 재신이 일생 동안이나 부지되는 것을 보았느냐? 귀신 혀끝의 한 방울 물로 불을 끄는 격이니 끝내 목마름을 해소할 이치가 없는 것인데 어찌 그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랴.

공손하고 성실하게 경전을 정미리 연구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과일나무, 채소를 심는 뒤란이나 밭 가꾸기에 힘을 다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며 일을 줄이고 경비를 절약하면 집안을 보존하는 어진 아들이 되리라.

(104) 살림살이를 꾀하는 방법에 대하여 밤낮으로 생각해보아도 뽕나무 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이제야 제갈공명의 지혜보다 더 위에 갈 것이 없음을 알았다. 과일을 파는 일은 본래 깨끗한 명성을 잃지 않지만 장사하는 일에 가까우나, 뽕나무 심는 거야 선비의 명성을 잃지도 않고 큰 장사꾼의 이이기에 해당되니 천하에 다시 이런 일이 있겠느냐?

남쪽 지방에 뽕나무 3백65그루를 심은 사람이 있는데 해마다 3백65꿰미의 동전을 얻는다. 1년을 3백65일로 보면 하루에 한 꿰미로 식량을 마련하더라도 죽을 때가지 궁색하지 않을 것이요 아름다운 명성으로 세상을 마칠 수 있으니, 그 일은 가장 힘써 배워야 할 일이다.

서 • 書

(110)큰 애는 아무쪼록 4월에 말을 사서 타고 오게 하여라. 그러나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괴롭구나.

(113) ‘고려사’에 대한 공부는 아직도 착수하지 않았느냐? 젊은 사람이 먼 생각과 통달한 견해가 없으니 한탄할 노릇이다. 네 편지 중에 모든 의심나고 모르는 부분을 질문할 곳이 없다고 한탄하였는데 과연 네 마음에 참으로 의심나서 견딜 수 없고 생각이 나서 감내할 수 없다면, 왜 조목조목 기록해서 인편에 보내오지 않느냐? 부자간에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115) 그 폐족의 처지를 잘 대처한다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 뿐이다. 이 독서야말로 인간의 제일가는 깨끗한 일로서, 호사스런 부호가의 자제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또한 궁벽한 시골의 수재들도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 없다. 오직 벼슬아치 집안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가 있고 중년에 재난을 만나 너희들 처지와 같은 자라야 비로소 독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저들이 독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뜻도 모르고 그냥 읽기만 k는 것은 독서라고 일컬을 수 없기 때문이다.

(117) 독서에는 반드시 먼저 근기根基를 세워야 한다. 무엇을 근기라 하는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니 학문에 뜻을 둔다면 반드시 먼저 근기를 세워야 한다. 무엇을 근기라 하는가? 효孝와 제悌가 그것이다. 모름지기 먼저 효, 제를 힘서 근기를 세운다면 학문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학문이 몸에 배게 되면 독서는 따로이 그 층절層節을 논할 것이 없다.

(118) 너희들이 만일 독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나의 저서가 쓸모 없게 되는 것이요, 나의 저서가 쓸모 없게 되면 나는 할 일이 없게 되어, 장차 눈을 감고 마음을 쓰지 않아 흙으로 만들어놓은 우상이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나는 열흘도 못 되어 병이 날 것이요, 병이 나면 고칠 수 있는 약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이 나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은 이것을 생각하여라.

(119) 다른 사람들이 천시하고 세상에서 비루하게 여기는 것도 슬픈데, 지금 너희들은 스스로 자신을 천시하고 비루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는 너희들 스스로가 비통함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120) 문장은 반드시 먼저 경학으로써 근기를 확고히 세운 뒤에 널리 읽어서 정치의 득실과 혼란에 빠진 세상을 다스리는 일의 근원을 알아야 하며, 또 모름지기 실용적인 학문에 마음을 써서 옛사람의 경제에 관한 서적을 즐겨 읽고서 마음속에 항상 만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모든 사물을 기르려는 마음을 둔 뒤에야 비로소 독서하는 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 혹 안개 낀 아침과 달 밝은 밤, 짙은 녹음과 가랑비 내리는 것을 보면, 시상이 떠오르고 구상이 일어나서 저절로 읊어지고 저절로 이루어져서 천지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나올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생동하는 시인인 것이다.

(121) 어버이를 섬김에는 뜻을 받드는 것이 가장 크다. 그러나 부인들은 뜻이 의복이나 음식, 거처하는 것에 있으니, 어머니를 섬기는 자는 자질구레한 것부터 유의하여야 효도하는 지름길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기’ 내칙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 중 음식에 관한 소소한 절목이 많으니, 여기에서 성인이 가르침을 세울 때 물정을 잘 알아서, 실제와 거리가 멀고 미묘한 것부터 시작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또 예를 들어 새벽에 문안드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필 때에 만일 이불 밑 방바닥이 차면, 너희 형제들은 노비를 불러 시키지 말고 너희들 스스로가 나무를 가져다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하여라. 잠깐 연기를 쏘이는 수고에 지나지 않지만 네 어머니의 기쁜 마음을 마치 맛있는 술을 드신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이 일을 즐겨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127) 앞으로는 본래의 선한 마음을 분발해서 ‘대학’의 ‘성의誠意’ 장과 ‘중용’의 ‘성신誠身’ 장을 서서 벽에 걸어놓고 큰 용기를 분발하고 다리를 튼튼히 세워 물살이 센 여울로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으로 성의誠意 공부에 힘써 매진해야 할 것이다. 성의 공부는 가장 먼저 황당한 말을 하지 않는 것부터 힘을 써야 할 것이니 한마디의 황당한 말은 세상의 가장 큰 죄악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이것이 성의 공부에 가장 먼저 시작되어야 할 부분이다.

(130) 그런데 너는 한마디도 누가 먼저 글을 전해야 하는가를 밝히지 않고서 머리를 숙여 그 사람의 말만 옳다고 하고 있으니 너 또한 부귀영화에 현혹되어 부형을 천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냐. 어찌 슬프지 않으냐. 저 사람은 나를 모욕해도 괜찮은 폐족으로 여겨 먼저 편지를 보내오지 않고 있는데, 내가 고개를 숙여 뻔뻔스런 낯으로 먼저 동정을 애걸하는 편지를 쓴다는 것은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느냐.

(131)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반드시 한 점의 양심이 있기 때문이니, 한 점의 양심이 있어야 인간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137) 백방으로 생각해서 집에 있으면서도 학습할 가망이 있거든 네 아우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서 동생과 교대하고 이곳으로 오도록 할 것이며, 만일 사정상 전혀 가망이 없거든 내년 봄 날씨가 따뜻해진 뒤에 모든 일을 제쳐놓고 이리로 내려와서 함께 공부하도록 하여라.

첫째 이유는 날로 마음씨가 나빠지고 행동이 비루해져가니,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하겠고, 둘째는 안목이 좁아지고 지기가 상실되어가니,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하겠고, 셋째는 경학이 조잡해지고 식견이 텅 비어가니,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하겠다. 소소한 사정은 족히 돌아볼 것이 못 된다.

(138) 두보의 시는 고사를 인용하는 데 흔적이 없어서 읽어보면 스스로 지은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근본이 있으니. 이 점이 바로 두보가 시성이 되는 이유이다. 퇴지 한유의 시는 자법은 모두 근본이 있으나 구어는 스스로 지은 것이 많으니, 이 점이 그의 시가 뛰어난 이유이다. 동파 소식의 시는 구절마다 사실을 인용하였는데, 흔적이 남아 있어 얼핏 보면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반드시 이리저리 고찰하고 검사해서 그 근본을 캔 뒤에야 겨우 그 뜻을 통할 수 있으니, 이 점이 바로 시의 박사가 되는 이유이다.

(141) 나는 또 생사고락의 이치를 대략 알고 있는 터에도 이처럼 비통한데 하물며 너의 어머니는 직접 품속에서 낳아 흙 속에다가 묻었으니, 그 애가 살았을 때의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던 한마디 말과 한 가지 몸짓들이 모두 귀에 쟁쟁하고 눈에 삼삼할 것이다. 더군다나 감정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부인들에 있어서랴.

(143) 빈천한 자의 본분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본디 남의 보살핌을 받는 법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144-145) 여러 일가 중에 며칠째 밥을 짓지 못하는 자가 있을 때 너희는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느냐? 눈 속에 얼어서 쓰러진 자가 있으면 너희는 땔나무 한 묶음을 나누어 주어 따뜻하게 해주었느냐? 병이 들어 약을 복용해야 할 자가 있으면 너희는 약간의 돈으로 약을 지어주어 일어나게 하였느냐? 늙고 곤궁한 자가 있으면 너희는 때때로 찾아 뵙고 공손히 존경을 하였느냐? 우환이 있는 자가 있으면 너희는 근심스런 얼굴빛과 걱정하는 눈빛으로 우환의 고통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 잘 처리할 방도를 의논해보았느냐? 이 몇 가지 일을 너희들은 하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여러 집안에서 너희들의 급박하고 어려운 일에 서둘러 돌보아주기를 바랄 수 있느냐?

내가 남에게 베풀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이 먼저 나에게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들의 오만한 근성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유념해서 평소 일을 없을 때에 공손하고 화목하며 근신하고 충성하여 여러 집안의 환심을 사도록 힘써야 할 것이요, 절대로 마음 속에 보답을 바라는 근성을 남겨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나는 일찍이 이렇게 이렇게 해주었는데 저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한다"고 하지 말아라. 이러한 말을 한번 하면 그 동안 쌓아놓은 공덕이 하루 아침에 바람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다.

(149) 채소밭을 가꾸는 요령은 모름지기 지극히 평평하고 반듯하게 해야 하며 흙을 다룰 때에는 잘게 부수고 깊게 파서 분가루처럼 부드럽게 해야 한다. 씨를 뿌릴 때는 지극히 고르게 하여야 하며, 모는 아주 드물게 세워야 하는 법이니 이와 같이 하면 된다. 아욱 한 이랑, 배추 한 이랑, 무 한 이랑씩을 심고 가지나 고추 따위도 각각 구별해서 심어야 한다. 그러나 마늘이나 파를 심는 데에 가장 주력해야 하며, 미나리도 심을 만하다. 한여름 농사로는 오이만한 것이 없다. 비용을 절약하고 농사에 힘쓰면서 겸하여 아름다운 이름까지 얻는 것이 바로 이 일이다.

(152) 가령 내가 몇 년 안에 유배에서 풀려나 너희들로 하여금 몸을 닦고 행동을 가다듬어 효도와 공경을 숭상하고 화목을 일으키며, 경사를 연구하고 시와 예를 담론하며, 서가에 3, 4천 권의 책을 꽂아놓고 1년을 지탱하는 양식이 있으며, 뒤란에 뽕나무, 삼, 채소, 과일, 꽃, 약초들이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어 그 그늘을 즐길 만하며, 마루에 오르고 방에 들어가면 거문고 하나와 투호 일구와 붓, 벼루, 책상에 볼 만한 도서가 있어서 그 청아하고 깨끗함이 기뻐할 만하며, 때때로 손님이 찾아오면 닭을 잡고 회를 만들어서 탁주나 좋은 나물 안주에 흔연히 한번 배불리 먹고 서로 더불어 고금의 대략을 평론할 수 있다면, 비록 폐족이라 할지라도 장차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 흠모할 것이니, 이렇게 세월이 점점 흘러간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느냐? 너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차마 이것을 하지 않으려느냐?

(153) 이는 성인이 사람을 가르칠 때에 "먼저 외모로부터 수습해나가야 바야흐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세상에 비스듬히 눕고 삐딱하게 서서 큰소리로 지껄이고 어지러이 보면서 주경존심主敬存心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므로 '용모를 움직임', '말을 함', '안색을 바로 하는 것'이 학문을 하는 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니, 진실로 이 세 가지에 힘을 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하늘을 꿰뚫는 재주와 남보다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끝내 발을 땅에 붙이고 다리를 세울 수 없을 것이다.

(163) 시의 근본은 부자, 군신, 부부의 인륜에 있으니, 혹 그 즐거운 뜻을 널리 펼치기도 하고,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기도 하여라. 그 다음으로는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이 없는 사람을 구제해주고 재물이 없는 사람을 구원해주고자 하여 배회하면서 차마 그들을 버려둘 수 없는 뜻을 둔 뒤에야 비로소 시가 되는 것이다. 만약 자기의 이해에만 관계되는 것일 뿐이라면 이는 시라 할 수 없는 것이다.

(169-170) 네가 닭을 기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닭을 기르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도 품위 있고 저속하며 깨끗하고 더러운 등의 차이가 있다. 진실로 농서를 잘 읽어서 그 좋은 방법을 선택하여 시험해보되, 색깔과 종류로 구별해보기도 하고,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 사육 관리를 특별히 해서 남의 집 닭보다 더 살찌고 더 번식하게 하며, 또 간혹 시를 지어서 닭의 정경을 읊어 사물로써 사물을 보낼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책 읽은 사람이 양계하는 법이다. 만약 이익만 보고 의리를 알지 못하며 기를 줄만 알고 취미는 모르는 채 부지런히 힘쓰고 골몰하면서 이웃의 채소를 가꾸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나 한다면, 이는 바로 서너 집 모여사는 시골의 졸렬한 사람이나 하는 양계법이다. 너는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이미 양계를 하고 있다니 아무쪼록 여러 학자의 양계에 관한 이론을 뽑아 계경鷄經을 만들어서 육우의 '다경茶經'과 유득공의 '연경煙經'과 함께 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일에서 맑은 운치를 간직하는 것은 항상 이런 방법으로 예를 삼도록 하여라.

(171) 책을 그냥 읽기만 하면 하루에 천백 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한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모름직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연구해서 그 근본을 터득하고 따라서 그 글의 전체를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을 계속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 아울러서 수백 가지의 책을 널리 찾아보게 될 것이요, 따라서 본서의 의리에 대해서 분명히 꿰뚫을 수 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172) 오늘 한가지 사물에 대해 끝까지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끝까지 궁구한다는 것도 이와 같이 착수하는 것이다. 격格이라는 것은 끝까지 연구하여 끝까지 도달한다는 뜻이니, 끝까지 연구해서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다.

(172) 무릇 책의 내용을 뽑아서 쓰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자기의 뜻을 정해서 만들 책의 규모와 항목을 세운 뒤에 뽑아야만 일관된 묘미가 있는 법이다. 만약 세워놓은 규모와 항목 이외에 뽑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모름지기 책 하나를 따로 갖추어 놓고 얻는 대로 기록해야 확고한 힘을 얻게 된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쳐놓았는데 기러기가 걸렸다고 해서 어찌 버리겠느냐.

(173-174)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는 것이다. 소가 물을 마시듯 마시는 저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는 적시지도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데 있는 것이다. 저 얼굴빛이 주귀朱鬼와 같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자들이야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대부분 별안간 죽게 된다. 술독이 오장육부에 스며들어 하루아침에 썩기 시작하면 온몸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크게 두려워할 만한 점이다.

설 • 說

...

논 • 論

(186) 우리 나라에 있는 모든 공장의 기예는 모두 옛날에 배웠던 중국의 법인데, 수백 년 이후로 딱 잘라 끊듯이 다시는 중국에 가서 배워올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이와 반대로 중국의 새로운 신묘한 제도는 날로 증가하고 달로 많아져서 다시 수백 년 이전의 중국이 아닌데도 우리는 또한 막연하게 서로 모르는 것을 묻지도 않고 오직 예전의 것만 만족하게 여기고 있으니, 어찌 그리도 게으르단 말인가.

(190) 만일 백성이 사용하는 기물을 편리하게 하고 재물을 풍부히 하여 백성의 생화를 윤택하게 하는 데 사용하는 것과 모든 공장의 기예의 재능은, 그 뒤에 나온 제도를 가서 배우지 않는다면 그 몽매하고 고루함을 타파하고 이익과 은택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국가를 도모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강구해야 할 일이다.

(197-198) 세상에는 진실로 재주와 덕행을 충분히 간직하고 운수가 사나워 고생하며 그 재주와 덕행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상에다 허물을 돌리지만 상을 따지지 않고 이 사람을 우대했더라면 이 사람도 재상이 되었을 것이다. … 공자가 말하기를 "용모로써 사람을 취했더라면 자우子羽에게 실수할 뻔했다' 하였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202) "아니 그렇게 좋은 자리라면 어째서 너의 어미를 장사지내지 않고 남에게 주었느냐?"

(228) "하늘은 지극히 높지만 하늘이라 부르지 않은 적이 없고, 임금 또한 지극히 높지만 임금이라 일컫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서얼은 자기 부모를 부모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232) "이 곡식이 전에 우리 집에서 실어갔던 건가요? 어째서 묵은 쌀과 변질된 쌀이 섞여 있고 또 싸라기는 왜 이리 많아요? 이것은 시동생 집에서 실어다 두었던 것과 바뀐 것이 아닌가요? 아니면 광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공모하여 협잡한 것인가요? 지난 번에 우리가 굶주릴까 봐 걱정한다고 한 것이 결과가 이 모양이란 말입니까?"

(234) 무릇 직책은 하찮은데도 재주가 넘치면 간사하게 되고, 지위는 낮은데도 지식이 많으면 간사하게 되고, 노력을 적게 들였는데도 효과가 신속하면 간사하게 되고, 나는 한 자리에 오래 있는데도 나를 감독하는 사람이 자주 교체되면 간사하게 되고, 나를 감독하는 사람의 행동 또한 정도正道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간사하게 되고, 아래에는 동료들이 많은데도 윗사람이 외롭고 어리석으면 간사하게 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나보다 약한 탓으로 나를 두려워해서 고발하지 못하면 간사하게 되고, 내가 꺼리는 사람이 다 같이 죄를 범했는데도 서로 버티고 고발하지 못하면 간사하게 되고, 형벌이 문란하여 염치가 확립되지 않으면 간사하게 된다. 간사한 탓으로 지위를 잃기도 하고 오히려 잃지 않기도 하고, 간사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간사한 짓을 했다는 것으로 지위를 잃는다면 간사하게 된다. 간사함이 발생하기 쉬운 것이 이러하다.

(237) 무릇 간사한 짓은 오래 있는 데서 생기게 된다.

(242)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 죽을 것이다."

원 • 原

(245)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대로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245) 정政은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을 아울러 차지하여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토지의 이로운 혜택을 받지 못하여 빈한하게 살 것인가. 이 때문에 토지를 개량하고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어 그것을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이다.

(249-250) 형벌의 의의가 그 사람이 미워서 그를 아프고 괴롭게만 하려는 데 있는 것인가? 그를 아프고 괴롭게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허물을 고치고 착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죽도록 사면이 없다면 그가 한번 형벌에 빠졌을 때 곧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되어 이름은 비록 살아 있을지라도 사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253) 결국 원망이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 나머지 성인으로서도 인정한 사실이고, 충신, 효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충정을 나타내는 길이다. 그러므로 원망을 설명할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시를 말할 수 있고, 원망에 대한 의의를 아는 자라야 비로소 충효에 대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

(253-254)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곡식과 베를 생산하여 목민관을 섬기고, 또 말과 수레와 하인을 내어 목민관을 전송도 하고 환영도 하며, 또는 피고름과 진수津髓를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우고 있으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하여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소 • 疏

(259)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나라의 큰 정사는 사람을 등용하는 일보다 앞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인재 등용은 오직 3년마다 실시하는 과거 뿐인데 그 실상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여기에도 뽑은 사람은 대부분 폐기되어 이름이 문과 방목에 오르고도 기껏해야 낭관에 지나지 않으며, 저 묘당에서 관복을 입고 국정을 담당하는 우직으로 말하면 오직 별시와 반제에 급제하여 올라온 자라야 차지합니다. 이는 마치 아침, 저녁의 식사는 폐하고 오직 차와 과일만을 먹는 것과 같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맞지 않음이 이보다 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 "본래 시골 샌님들을 수재로 만들려고 했다가 이제 도리어 수재를 시골 샌님으로 만들고 말았다" 한 말에서 벌써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266-267) 신은 이른바, 서양 천주교에 대한 책을 일찍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책을 본 것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말을 야박하게 할 수 없어 책을 보았다고 했지, 진실로 책을 보고 말았다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대개 일찍이 마음 속으로 좋아하여 사모했고, 또 일찍이 이를 거론하여 남에게 자랑했습니다. 그 본원 심술은 일찍이 기름이 스며들고 물이 젖어 들며 뿌리를 내리고 가지가 얽히듯 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무릇 이미 한 번 이와 같이 되면, 이것은 맹자 문하의 묵자요, 정자 문화의 선파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증자가 말하기를, "나는 정도正道만 얻고 죽으면 그만이다." 하였는데, 신 또한 정도를 얻고 죽고자 하오니, 한마디 말로써 스스로를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74) 대개 이 사학邪學은 곧 몇천만 리 밖, 풍속이 다른 이역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 하나라도 죄역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해괴하고 두려운 것이 짐승이 사람 속에 있는 것 같이 분명하여 하루도 구차하게 함께 거처할 수 없으니, 단연코 관적에 올라 벼슬하는 집안과 풍속에 따라 교유하는 사람으로서는 거스름 없이 병행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천하고 한미한 사람은 혹 행하더라도 무사하지만, 사대부에 속한 종족으로서 드러나게 칭송할 만한 이는 그 화가 바로 이르니, 어찌 열흘 간의 목숨인들 지탱하겠습니까.

기사 • 紀事

(284-285) 이듬해 경오년 7월 28일, 큰 바람이 남쪽에서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바다에 이르자 파도가 산더미처럼 거칠게 일었다. 물거품이 공중에 날아 소금비가 되어 산꼭대기까지 이르렀다. 해변의 곡식과 초목이 모두 소금에 젖어 말라죽어서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나는 다산에 있으면서 소금비에 대한 부賦를 지어 그 일을 기록했다. 또 이듬해 그날도 바람의 재앙이 지난해와 같았다. 바닷가 백성들은 그 바람을 처녀풍處女風이라고 했다. 그 뒤 암행어사 홍대호도 그 사연을 들었지만 역시 모른체하고 가버렸다.

잡문 • 雜文

(288) 그러나 한 필의 비단을 얻게 되면 곧바로 저자에 내다 팔아 재산 만들 것을 생각하고, 한 마리의 병아리라도 얻게 되면 곧바로 읍내에 들어가 팔아서 돈을 만들려고 할 뿐, 혹시라도 바지 하나 짓고 국 한 그릇 끓여서 그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 사람의 생각에는 아직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부모 봉양에 쓸 수 없고 장차 훗날에 집이 부유해지기를 기다리겠다고 하는 것인가? 아! 바람 타는 나무는 항상 고요히 있을 수 없거니와 어버이의 나이가 어찌 영원히 머물러 있으랴. 진실로 가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효자가 있다면 마땅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292-293) 아아, 사람이 태어나서 매우 위험하여 가장 보호하기 어려운 때가 어릴 때인 것이다. 그 부모가 만약 잠시라도 돌보아주지 않거나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어린 자식이 어떻게 온전히 자랄 수 있겠는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모두가 빈손이다. 그것을 입혀주고 먹여주며 논밭과 집까지 아울려 물려준다. 비록 억만금을 가지고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는 것이 부모가 아니던가. 앞서 친구에 대해서는 어느 날 입은 하루의 은혜를 죽을 때가지 잊지 않고, 앞서 비복에 대해서는 어느 날 받은 하루의 노고를 마음에 새겨 잊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부모에 대해서는 그 은혜가 하늘과 같이 커서 다함이 없으되 막연히 잊어버리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여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여 사례하고자 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 사람의 자식 된 자가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294-295) 형제는 나와 더불어 부모와 같이하였으니 이 또한 나일 따름이다. 형은 먼저 태어난 나요, 아우는 뒤에 태어난 나다. 다만 얼굴 모양과 나이가 다를 뿐인데, 구태여 둘로 구분하여 서로 우애하지 않으니 이는 나로써 나를 소원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한 가지는 울창하게 무성하고 다른 한 가지는 시들어 마를 경우, 사람들이 이를 보고 혀를 차며 애석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지금 두 형제 중 한쪽은 부귀와 호강을 누리고, 다른 한쪽은 가난과 고난을 겪고 있는데도 서로 돌보지 않으며 자기의 처자식만을 알고 사랑할 경우,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어찌 지각이 없는 초목의 경우와 같다고만 할 것인가. 아예 대면하지도 않고 혀를 차면서 죄받을 것이라고 가엾어할 것이다. 이 어찌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299-300) "아! 이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는 굶주려 죽은 자의 몸이 옮겨 붙은 것이다. 아! 기구하게 사는 생명이다. 애처롭게도 지난해 흉년이 들어 식량이 크게 모자랐고 또 겨울의 혹한을 겪었다. 그로 인해서 전염병이 돌게 되었고 게다가 또다시 가혹한 세금징수까지 당하여 수많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고, 그 시체를 버린 들것은 언덕을 덮었다. 수의도 관도 없는 시체에 훈훈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높아지자, 그 피부가 썩어 문드러져 옛 추깃물과 새 추깃물이 고여 엉겨서 그것이 변해 구더기가 되어 항하의 모래보다도 만 배나 많았는데, 이 구더기가 날개를 가진 파리로 변해 인가로 날아드는 것이다. 아! 이 파리가 어찌 우리의 유가 아니랴. 너의 생명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이에 음식을 만들어 널리 손님을 청해와 모이게 하니 서로 기별해 모여서 함께 먹도록 하라."

#4. 내가 저자라면

다산문선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대작 이외의 시문집 가운데 몇 편을 추려 담은 책이다. 이 책에는 그가 17세 때, 둘째형 약전과 함께 화순 동림사에서 글을 읽고 지었던 '동림사 독서기'와 38세에 정조에게 올렸던 상소문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한 소' 등이 함께 담겨 있어, 우리는 전 생애를 걸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보고 그 생각들을 접해볼 수 있다.

기記로 시작되어 편안하게 책을 읽어나가던 나는 가훈과 자식들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그의 삶을 생각하고, 또 나의 삶을 반성해보았다. 치열하지 못하고 부족한 나의 공부와 부족한 나의 마음과 부족한 나의 노력을 반성했다. 다산은 말한다.

1) 학문하는 법

“오늘 한가지 사물에 대해 끝까지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끝까지 궁구한다는 것도 이와 같이 착수하는 것이다. 격格이라는 것은 끝까지 연구하여 끝까지 도달한다는 뜻이니, 끝까지 연구해서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다.” (172p.)

“성인이 개물성무開物成務하고 천지를 두루 다스림은 모두 용으로 하는 것이다.

“순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순임금처럼 하면 그와 같이 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용勇이다. 경제의 학문을 하려는 사람은 “주공周公은 어떤 사람인가? 주공처럼 하면 그와 같이 된다”하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려는 사람은 “유향劉向과 한유韓愈는 어떤 사람인가? 그들처럼 하면 그와 같이 된다” 하였다. … 한가지 소원이 있으면 어떤 사람을 목표로 정해 그 사람과 동등한 경지에 이르고서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용의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94p.)

제대로 된 독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부님의 말씀이 잠시 겹쳐져서 떠올랐다.

“책을 그냥 읽기만 하면 하루에 천백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한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연구해서 그 근본을 터득하고 따라서 그 글의 전체를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을 계속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 아울러서 수백 가지의 책을 널리 찾아보게 될 것이요, 따라서 본서의 의리에 대해서 분명히 꿰뚫을 수 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171p.)

그렇다. 격格하기 위해서는 용勇해야 한다. 그저 얕은 마음으로 흉내만 내어서는 그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 다산은 자식들에게 학문하는 법에 대한 조언도 빼놓지 않는다. 훌륭한 스승으로서의 아버지이다.

“문장은 반드시 먼저 경학으로써 근기를 확고히 세운 뒤에 널리 읽어서 정치의 득실과 혼란에 빠진 세상을 다스리는 일의 근원을 알아야 하며, 또 모름지기 실용적인 학문에 마음을 써서 옛사람의 경제에 관한 서적을 즐겨 읽고서 마음속에 항상 만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모든 사물을 기르려는 마음을 둔 뒤에야 비로소 독서하는 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 혹 안개 낀 아침과 달 밝은 밤, 짙은 녹음과 가랑비 내리는 것을 보면, 시상이 떠오르고 구상이 일어나서 저절로 읊어지고 저절로 이루어져서 천지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나올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생동하는 시인인 것이다.” (120p.)

그리고 현실과 학문을 조화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도 넌지시 일러준다. 이 얼마나 현실적이면서도 조화로운 삶의 태도인가.

네가 닭을 기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닭을 기르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도 품위 있고 저속하며 깨끗하고 더러운 등의 차이가 있다. 진실로 농서를 잘 읽어서 그 좋은 방법을 선택하여 시험해보되, 색깔과 종류로 구별해보기도 하고,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 사육 관리를 특별히 해서 남의 집 닭보다 더 살찌고 더 번식하게 하며, 또 간혹 시를 지어서 닭의 정경을 읊어 사물로써 사물을 보낼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책 읽은 사람이 양계하는 법이다. 만약 이익만 보고 의리를 알지 못하며 기를 줄만 알고 취미는 모르는 채 부지런히 힘쓰고 골몰하면서 이웃의 채소를 가꾸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나 한다면, 이는 바로 서너 집 모여사는 시골의 졸렬한 사람이나 하는 양계법이다. 너는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이미 양계를 하고 있다니 아무쪼록 여러 학자의 양계에 관한 이론을 뽑아 계경鷄經을 만들어서 육우의 '다경茶經'과 유득공의 '연경煙經'과 함께 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일에서 맑은 운치를 간직하는 것은 항상 이런 방법으로 예를 삼도록 하여라. (169p.)

2) 사람으로 사는 법

그는 또한 인간답게 사는 법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우주宇宙 사이의 일이란 바로 자기 분수 안의 일이요, 자기 분수 안의 일은 바로 우주 사이의 일이다.”

“대장부라면 하루라도 이러한 생각이 없어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의 본분이란 역시 그냥 허둥지둥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

무릇 하늘에 부끄럽고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을 전혀 범하지 않으며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윤택해져 호연지기가 생기는 것이다. 만일 포목 몇 자, 동전 몇 닢 때문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호연지기가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느냐 하는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극히 주의하도록 하라.”
(82p.)

사람으로 올바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한시도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기울어진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하는 일이다. 나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람의 삶의 살고 있는가? 짐승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한차례 배가 부르면 살찔 듯이 여기고 한차례 주리면 마를 듯이 여기는 것은 천한 짐승들이나 하는 것이다. 시야가 짧은 사람은 오늘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은 일이 있으면 당장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에 뜻에 맞는 일이 있으면 당장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에 뜻에 맞는 일이 있으면 벙긋거리며 낯빛을 펴곤 하여, 일체의 근심, 유쾌함, 슬픔, 기쁨, 감격, 분노, 애정, 미움 등의 감정이 대부분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

요컨대 알아야 할 점은 아침에 햇빛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때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진리인 것이다. 운명은 돌고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 때의 재해 때문에 마침내 청운의 뜻까지 꺽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지니고서 천지가 눈 안에 들고 우주가 손바닥 안에 있듯이 생각하고 있어야 옳다.” (97p.)

무엇보다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행하는 일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니, 이 점에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비록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흙담에다 색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61p.)

“아아, 사람이 태어나서 매우 위험하여 가장 보호하기 어려운 때가 어릴 때인 것이다. 그 부모가 만약 잠시라도 돌보아주지 않거나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어린 자식이 어떻게 온전히 자랄 수 있겠는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모두가 빈손이다. 그것을 입혀주고 먹여주며 논밭과 집까지 아울려 물려준다. 비록 억만금을 가지고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는 것이 부모가 아니던가. 앞서 친구에 대해서는 어느 날 입은 하루의 은혜를 죽을 때가지 잊지 않고, 앞서 비복에 대해서는 어느 날 받은 하루의 노고를 마음에 새겨 잊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부모에 대해서는 그 은혜가 하늘과 같이 커서 다함이 없으되 막연히 잊어버리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여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여 사례하고자 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 사람의 자식 된 자가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292p.)

다산문선을 읽으며, 전체적으로 흐름과 구성이 있는 단행본이 아니기 때문에 글을 읽다 가끔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모음집이라는 특성상 어쩔 수 없을 듯 하다. 다만 다산의 생애와 좀 더 연관을 지어 글들을 배열했다면 그의 삶과 인간적인 면모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독자에 대한 배려가 편집자에게 약간 아쉽다.

다산문선은 거울 같은 책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자신의 흐트러진 몸 매무새를, 마음가짐을 가지런히 할 것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다산문선은 '묵향이 나는' 책이었다. 사부님의 말씀처럼 책을 읽는 '선비의 향기'가 담겨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나는 사부님의 말씀을 다시 듣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언제가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 사부님은 이런 글을 쓰신 적이 있다.

"맹자는 책을 읽는 것을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일’이라고 말했다. 주자는 ‘도리란 이미 자기 자신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밖에서 첨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독서의 길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자기 속에 이미 있었으나 잃어 버린 마음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마음을 거두어 들이지 못한다면 책을 읽어 무엇을 하겠는가?"

독서는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다. 자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다산문선은 나에게 어떤 말을 전하는가? 그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강렬했다. '사람은 그 시대의 산물이다. 오직 그 시대 속에서 부단히 깨치려 노력하는 자만이 그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다.'

끊임없이 읽고, 생각하고, 쓰고, 열심히 사는 수 밖에 없다. 시작하고 또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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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25 18:14:56 *.72.153.12
김남주의 시인지 모르고 읽을 때, 도윤씨가 시를 지었나 했습니다. 분위기가 묘하게 닮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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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7.03 10:17:28 *.249.167.156
분위기가 묘하게 닮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다시 읽어보니, '내가 저자라면'을 좀 더 고민해야겠네.. 사부님 말씀을 다시 새겨본다!

'내가 저자라면'은 그대의 책을 쓸 때, 책 전체를 구상하는 그대의 기획력을 실험하는 시간이다. 저자가 촛점을 맞춘 주제, 설득을 위해 끌어들인 소재, 전체적 뼈대, 전개의 방식과 표현등을 조망해 보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이 연습이 되어야 그대의 혼이 담긴 집을 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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