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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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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5일 05시 09분 등록
백범 일지 [ 도진순 주해, 돌베개 ]
2004년 7월
태양은 불을 뿜는 듯했다. 대지는 이글거리고 짙푸른 산야는 지칠대로 지쳐 기력을 다 한양 흐느적 거렸다. 2km 가까운 거리를 뛰 듯이 걸었다. 땀은 등줄기를 타고 양 다리를 거쳐 땅으로 떨어졌다. 지하철역에 도착하여 여행 가방을 찾았다.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역무실담당자에게 통사정을 하여 맡긴 가방인지라 미안한 마음으로 몇 개의 음료수를 건넸다. 아침 일이 생각났는지 낯설지 않는 웃음을 보낸다. 그래, 그도 잠시 긴장했으리라. 웬 낯선 여인이 불쑥 찾아와 여행 가방을 오전까지만 맡아 달라고 하니 긴장할 만도 하다. 신분증과 사정이 통했다. 그는 친절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나에게 남고, 나는 그에게 ‘재미 있는 사람, 특이한 사람으로 남게 되리라.
일본행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나서 비로소 약간의 여유를 찾았다. 메모지를 펼쳐들었다. 현장에서 기록한 것이라 글씨는 오직 나만이 알아볼 정도다. 조계지역, 중국인 거리, 백범이 차하포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인천 감리서 부근, 오전 동안 돌아본 일정이 꽤나 된다. 전문가의 자세한 설명과 함께 했던터라 머리 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선명하다. 비행기는 4만 피트 이상에서 날고 마음은 5만 피트 아래에서 걷고 있다. 과연 일본을 개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일본이 남긴 흔적들을 둘러 본 것을 이 번 여행과 어떻게 관계 지을 수 있을까? 갑자기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 최대한 냉정해 지자, 그리고 냉철해지자.’ 일본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일본 여행에 이어서 상해를 포함해 남경,연변, 백두산을 돌았다. ‘우리의 역사가, 특히 나와 가장 가까운 역사가 한 낱 이야기꺼리로 마음 한쪽에 자리 잡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스러움이 연이은 여행을 재촉했다. 지난 역사의 흔적을 더듬고 아픔도 함께 보듬고 싶었다.
골목골목을 돌아 찾아간 임시정부 건물, 작고 보잘 것 없는 목조건물이 가슴에 따스하게 안겨들고 고인들의 절박했던 상황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내가 나를 걱정했던 것보다 월씬 나았다. 우리들의 역사를, 그 아픈 역사를 내가 껴 안지 못할까봐 조바심했던 것들이 한 낱 염려에 불과했에 안도의 마음을 가졌다. 연변은 아직도 내가슴 한켠에 애틋한 그리움과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남아있지만 흔적들을 더듬어 보았던 몇 년 전 여름여행은
지난 우리 역사를 껴안을 수 있는 소중한 흔적으로 내 옆에 살아있다.

1. 저자에 관하여
백 범 김 구 ( 1876 - 1946 )
- 안동 김씨 김자점 후손으로 황해도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남. 테어날 당시 모친의 나이 가 겨우 17세 였기에 아이 돌보는 것이 서툴렀음, 천연두를 앓고 있는 창암(당시 김구의 이름)의 얼굴을 죽침으로 땄기에 김구의 얼굴에 굵은 마마자국이 생기게 함

- 15세때 한학자 정재문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고종 30년인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됨. 1894년 동학혁명군에 가입하여 싸웠으나 청과 일본의 개입으로 패배하였음

- 1895년 신천군 청계동 안타훈에게 몸을 의탁하고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가르침을 받음.
5월 김형진을 만나 청국 기행, 만주까지 감,( 이 때 만난 안태훈의 아들 안중근을 멀리서 지켜봄) 1896년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죽임, 해주에서 투옥되었으며 나중에 인천감옥으로 호송됨. 인천감옥에서 8-9차례 심문을 받고 복역 중 1898년에 탈옥함
- 1904년 최춘례와 결혼
- 1907년 안악양산학교의 교원이 됨. 야계 사범강습회를 열고 교원을 양성함.
( 아는 것이 없고 나라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백성이 나라가 곧 자신의 집이요, 나라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지 않고서는 나라를 건질 길이 없다고 생각했음)

- 1911년 일본 헌병엑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음. 종로구치감, 서대문 감옥에서 인천감옥으로 이송, 1915년 가 출옥

- 3.1독립운동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에 가담하여 내무총장 등을 지냈고 1926년 임시 정부의 국무령으로 취임함.

- 1928년 독립당을 조직, 당수가 됨 이로부터 항일 무력 활동을 시작하여 결사단체를 조직(한국 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함
- 1929년 백범일지 상권 탈고, 상해 교민단장이 됨,
1931년 일본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인 애국단’조직 , 1932년 6월 백 범의 임시정부 이탈로 임정의 기반이 약화 됨,

- 1941년 일제가 드디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킴, 임시정부는 12월9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실시함. 광복군 산하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작전을 실시하다 타국의 힘으로 해방을 맞이함.

- 194년 일제의 패망. 미국의 개입으로 임시정부의 해체와 신탁통치 문제 등으로 내적인 갈등 상태를 가져옴.

-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통일 조국의지를 보여 줌( 38선을 넘어 정치회담을 열었음)
- 1946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피살 당함, 극민훈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됨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추서됨

2. 가슴에 다가온 글귀

[14] 무릇 난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를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38] “너 그러면 풍수공부나 관상공부를 해보아라. 풍수에 능해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복록을 누리게 되고 관상을 잘 보면 선한 사람과 군자를 만날 수 있다.”

[39]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42] “동학은 용담 최수운 선생이 천명하였으나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 최해월 선생이 대도주가 되어 포교중입니다. 동학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백성이 되어 장래 참주인을 모시고 계룡산에 신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49] “선생들이 이와 같이 먼 길을 오신 것은 저에게 좋은 방책을 가르쳐 주고자 하심이 아닙니까? ” 라고 물었다. 정씨는 설혹 대책을 말하여도 실행할 자격이 있는 지 의문이라며 “요새 동학군 접주라는 자들이 호기충천해서 선배를 무시하는 판국에 군도 동학 접주 아닌가?” 반문하였다. 나는 더욱 공손히 하여 “먼저 가르쳐 주신 후 제가 실천하는 것을 보신 다음에 다른 접주와 마찬가지인지 아닌지 판단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62]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분명히 살펴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불과 스무 살에 일생의 진로에 대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그르쳐 허다한 실패를 경험한바 민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격과 품성을 밝히 보시고 좋은 점이 있다면 사랑도 하여 주시고 교훈도 하여 주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면 저의 발전은 고사하고 선생님 높으신 덕에 누를 끼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62]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물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말게. 나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 아닌가?”

[63]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가만히 보면 언제나 내게 보여주기 위해 책장을 접어두었다가 들쳐 보이곤 했는데, 그것만 보아도 선생이 얼마나 나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 하였다.

[63]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 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 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라는 구절을 힘있게 설명하였다.

[65] 매일 고선생 댁에서 놀다가 밥도 선생과 같이 먹고, 밤 깊고 인적이 고요할 때는 국사를 논의했다. 고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 만고 천하에 흥해보지 않은 나라가 없고 망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네. 종전에는 토지와 백성은 가만두고 군주 자리만 빼앗는 것으로 흥망을 논하였지. 그러나 지금의 망국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과 주권을 모두 강제로 집어삼키는 것이네. 우리나라도 필경은 왜놈에게 망하게 되었네. 소위 조정대관들은 전부 외세에 영합하려는 사상만 가지고 러시아를 친하여 자기 지위를 보전할까, 혹은 영국이나 미국을, 혹은 프랑스를, 혹은 일본을 친하여 자기 지위를 견고히 할까. 순전히 이런 생각들 뿐이라네. 나라는 망하는데 국내의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들도 한탄하고 혀만 차고 있을 뿐 어떠한 구국의 경륜도 보이지 않으니 큰 유감일세.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66]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 세력은 온 나라에 차고 넘쳐 대궐 안까지 침입하여 대신들은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나라를 제2의 왜국으로 만든 것 아니겠는가? 만고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은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충성하는 일사보국 한 가지 일만 남아있네.”

[70] 함경도의 교육 제도는 양서지방보다 일찍이 발달해 있었다. 아무리 가난해서 게딱지 만한 집을 짓고 살더라도 서재는 반드시 기와집으로 지었고 그 외 동네에는 도청이 있었다. 도청은 동네 공용가옥으로 비교적 크고 화려하게 지어 그 집에 모여 놀기도 하고 이야기책도 보고 짚신도 삼곤 했다. 동네 뉘 집에나 손님이 오면 식사를 대접하여 도청에서 자고 쉬게 했고 무전객이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 도청의 공금으로 음식을 대접하는 규례가 있었다. 또 오락기구로는 북, 장구, 꽹과리, 퉁소 등을 비치하여 두고 동네사람들이 종종 모여 즐기기도 하고 손님을 위로하기도 하는 미풍양속이 있었다.

[72] 유월에도 눈 덮인 산. 백두에 운무가 감돌고
만고를 소리쳐 흐르는 물, 압록에 용솟음친다.

[75] 그곳에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생활난을 피하여 간 사람들이 많았다. 갑오년 청일전쟁 때 피난하여 건너간 집이 많았고 드물게 죄를 저지르고 도망한 자들, 즉 전국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던 주동자들, 공금을 유용한 평안, 함격 양도의 이속들도 간혹 있었다. 지세로 말하면 파저강 좌우에 설인귀, 연개소문의 관루 흔적이 남아있고 도처에 천연의 요새가 있었다. 그 천연 요새들은 한 사람이 막으면 만 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므로 여진 , 금, 요, 고구려의 발원지라 한다.

[87] 고선생에게 청나라 돌아다닌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보고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 토지의 비옥함에 대해, 그리고 그곳의 지세와 인심은 어떠한지에 대해 말씀드렸고, 서옥생의 앋르과 결의한 일. 돌아오는 길에 김이언을 만나 의병에 동참하였다가 실패한 일 등등을 다 말씀드렸다. 또 장래에 북방에 가서 활동할 지대. 즉 군대를 움직일만한 곳 등을 두루 소상히 보고하였다.

[105] 어머님은 옥문 앞까지 따라오셔서 내가 옥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며 서 계셨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보았다. 어머님은 비록 농촌에서 생장하셨지만 무슨 일이나 잘 감당해내셨고 특히 바느질에 능하셨다. 무슨 일이 손에 잡히셨을까만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감리서삼문밖에 있는 개성사람 박영문의 집에 들어가셔서 이제까지의 일을 잠시 이야기하시고 그 집 동자꾼으로 써 달라 부탁하셨다. 그 집은 당시 항내의 유명한 물상객주라 안채에서 밥 짓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이 매우 번잡하고 많았다. 덕분에 어머님은 하루 세 끼 감옥에 밥 한그릇씩을 갖다주기로 하는 조건으로 고용이 되셨다. 압뢰가 밥을 받아 넣어주면서 “ 네 모친도 의지할 곳이 생겼고, 네 밥도 매일 세 끼를 들여 줄 터이니 안심하라.” 고 하였다. 함께 갇힌 죄수들도 그것을 매우 부러워하였다. 옛사람들은 말하기를 “슬프다,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느라 고생하시었다.”라 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적에도 많은 고생을 하셨고, 또 나를 먹여살리시기 위해 천중만금의 고생을 겪으셨다.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114] 이 때부터의 옥중생활을 대략 들어 쓴다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독서. 아버님이 오셔서 <대학>한 질을 사 넣어 주셨으므로 매일 <대학>을 읽고 외었다. 인천항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개항된 곳이었으므로 구미 각국에서 들어온 거주자와 여행자들이 있었고 각 종교당도 설립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도 간혹 외국으로 장사하러 나가 다니면서 신문화의 취미를 아는 자가 약간 있던 때였다.

[115] 이같이 말하며 <세계역사.지지> 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자과 국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갖다주며 읽어보라 권하는 이도 있었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이 글을 읽었다. 감리서 직원들이 종종 와서 내가 신서적에 열심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는 빛을 보였다.

[117] 세 번째. 대서 . 그 시대에도 이치에 닿지 않는 원통 억울한 송사가 많았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자를 위해 말을 자세히 들어보고서 소장을 지어주면 간혹 소송에서 이길 적도 있었다. 갇혀 있는 사람 중에는 감옥 바깥에 소식을 보내 대서 비용을 써가면서도 곤란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러나 내가 대서하면 서로 상의해서 인지만 사다가 써 보내면 되니 편하기도 하고 또 비용 한 푼 없이 성심껏 소장을 지어주는 탓에 김창수가 쓴 소장은 거의 다 승소한다고 와전이 되어, 옥내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관리의 대서까지도 한 일이 있다. 대서뿐 아니라 백성을 어려움에 빠뜨리고 돈을 강제로 빼앗는 사건이 있으면 상급 관리에게 권계하여 파면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간수들이 나를 꺼려 죄수들을 함부로 학대하지 못하였다.

[146] 나는 마곡사란 말이 심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우리집에 <동국명헌록>이란 책이 있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동지하례에 참례하여 크게 웃으니, 임금이 물었다. “ 경은 무슨 일로 무리 가운데서 혼자 웃느냐?” 화담이 아뢰었다. “오늘 밤 마곡사 상좌승이 밤중에 죽을 끓이려고 불을 때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죽솥에 빠져 익사하였는데 다른 중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죽을 퍼먹으며 희희낙락하는 것을 생각하지 우습습니다.” 임금이 곧 파발마를 놓아 하루 밤낮 쉬지 않고 300여리를 달려 마곡사로 가서 조사하게 하였더니, 과연 그런 일이 있었더라는 이야기다. 아버님이 늘 소설로 이야기하시던 것이 연상되었다.
[148] 경상도 지방의 반상 간에는 다른 지방에 없는 특수한 풍습이 있다. 삼남에서는 소 잡는 백정이 망건을 쓰지 못하는 것이 상례로 맨머리에 패랭이를 쓰고 드나들게 되어 있다. 패랭이 밑에 대테를 둘러대고 거기다가 끈을 맨 것이 백정놈이다. 백정이 길을 가다가 길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길 아래로 내려서서 “소인 문안드리오”라고 인사하여야 한다. 행인이 지나가고 나면 그제서야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52]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의 길을 간다.

[178] 나는 그 사이에 깨달은 세계 사정에 대해 말씀드렸다. 또 선생님께서 평소에 교훈하시던 ‘존중화양이적’주의가 정당한 주의가 아니라는 것과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은 사람이면 덮어놓고 오랑캐라고 배척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의 경국대강을 보고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사람의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탐관오리들이 비록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금수의 행실이 많으니, 이것은 참으로 오랑캐의 소행입니다. 또 지금은 임금이 스스로의 벼슬 값을 매겨 팔고 있으니 그것은 오랑캐 임굼의 소행입니다.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저 대양 건너에 사는 각 나라에는 제법 국가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문명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공자, 맹자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달된 법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계속 ‘오랑캐, 오랑캐’하면서 배척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소견에는 오히려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공맹에게서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179] “선생님이 피발좌임을 말씀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머리털은 곧 피가 만든 거싱요, 피는 곧 음식이 소화되어 만들어진 정액이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머리털도 자라날 수 없습니다. 설사 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서 매우 크고 훌륭한 상투를 위에 얹었다 손 치더라도 왜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도 녹의복건을 아무리 훌륭하게 입었다 하여도 왜인이나 양인들이 우러러 절하지도 않을 것이고 무릎 꿇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학문과 도덕을 공부한 상류층 사람들이 백성을 잔인하게 학대하는 최상의 도부수들입니다. 진실로 온 나라의 백성들은 거의 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이 이익을 쫓으니, 자기의 권리와 의무는 모르고 마땅히 탐관오리와 토호의 업신여김과 학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탐관오리와 토호들이 자기 백성을 업신여기고 학대함과 같이 왜와 서양을 학대한다면, 왜와 서양은 멸종되고 그네들이 천하를 다 호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백성의 고혈을 빨아 왜놈과 양놈에게 바치고 아첨하면서, 자기가 누구보다 뛰어난 도부수임을 자랑하고 있으니, 필경 우리나라는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192] 처음에는 교회의 금지 권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교회가 책벌을 선언하였으나, 끝나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더니, 군예빈이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을 해제하였다.

[193] 나는 진남포 에버트 청년회 총무의 직임을 이어받아 그 회 대표로 뽑혀 경성에 파견되어 경성 상동교회에 가서 에버트청년회의 대표 위임장을 제출했다. 그 때 각 도에서 청년회 대표가 모여 토의하는 것은 겉으로는 교회사업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순전히 애국운동이었다.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산림학자들을 구사상이라 하면 예수교인들은 신사상이라 하겠다.

[204] 안악에서 시범강습을 마치고 양산학교를 확장하여 중학부와 소학부를 두었다. 김홍량이 교주 겸 교장에 되어 교무를 맡았고, 나는 최광옥 등 교육자와 힘을 합쳐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을 맡아 전 도내에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는 책임을 지고 각 군을 수행하였다.

[215] 이에 앞서 국내 국외를 통하여 정치적 비밀결사가 조직되니, 곧 신민회였다.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귀국하여 평양에 대성학교를 병설하여 청년을 교육하는 것을 표면으로 내세우면서 이면에서는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과 그 외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 40여명 정수분자로 조기된 단체, 즉 신민회를 훈련, 지도하였따. 그 때문에 안창호는 용산 헌병대에 잡혀 수감된 일도 있었다.

[225] 사회에서 나를 이같이 동정해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의 한 숨까지 동지를 위하여 분투하고 원수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그리고 김홍량은 여러 가지로 활동할 능력과 품격이 나보다 나으니, 신문 받을 때 이롭도록 말을 하여 그를 풀어주게 하리라. 그렇게 생각하여 “거북이는 진흙 속에 빠지리니 기러기는 해외로 날으라”는 구를 혼자 읊었다.

[236]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에도 학생들이 나를 숭배함보다, 내가 학생들에게 천배 만배의 숭배와 희망을 두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교육을 충분히 받이 못하여 망국민이 되었으나, 학생들은 후일 건국영웅이 될 것을 바라던 마음도 헛된 것으로 돌아갔다. 또한 아내도 자기 언니가 헌병의 첩질 한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영구히 만나지 않기로 결심하였건만, 내가 이 지경이 되니 하는 수 없이 찾아갔을 것이다.

[238] 나의 심리 상태가 체포된 이전과 이후에 큰 변동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체포되기 이전에는 십수년 동안 성경을 들고 교회당에서 설교하거나 교편을 들고 교실에서 학생을 교훈하였으므로. 하나하나 일마다 양심을 본위로 삼아서, 삿된 마음이 생길 때마다 먼저 자기를 자책하지 않고는 감히 다른 사람의 그릇됨을 탓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습관처럼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학생들과 친우들 간에 충실하다는 신망을 받고 지냈고, 매사에 자기로부터 실천하여 남에 미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건만, 어찌하여 불과 반년만에 심리에 큰 변동이 생겨났는가를 연구해보았다.

[427]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다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생활이 속박되는 것은 자유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에 달려 있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429] 개인 생활을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고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는 몇 사람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도 있지 아니한가!

[431]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치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3. 내가 저자라면
가) 그 분이 나에게 청혼을 해 온다면
[ 싫소이다 정말 싫소이다 ]
① 그 분이 내 건 조건
- 돈에 대해 말이 없을 것

돈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었사옵니까? 동지들이 굶주릴때 피눈물만 흘리면 무엇하나요. 독립 자금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그 때, 돈은 정녕 말없던 것인가요? 돈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합니다. 차라리 ‘돈에 대해서 철저할 것, 단 돈의 노예가 되지는 말 것. 이라고 내 세우심이 훨씬 당당해 보이십니다. 교육을 통해서 나라 소중함을 일깨우시는 것도 좋지만 방법적인 측면도 교육하셔야지요. 어머님 생신상 대신 그 돈으로 어머니가 소총 두자루 사신것에 모두 감동해 우셨다지요. 돈은 자기자신에게 충실하고 계획적이고 명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을 때 나와 우리를 따른답니다.

- 학식이 있을 것
학식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배우고 따르면 되겠사옵지요.

- 서로 얼굴을 마주해서 말을 해 볼 것
전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님의 얼굴에 얼마 만한 자국이 있나 확인하는차원에서 서로 마주대하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계시죠?

② 성정이 너무 급하시옵니다. 님이 무서워서 아니되겠사옵니다.
- 어느 날 그들은 짜고서 창암을 때렸다. 말하자면 텃세였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해 집으로 와서 식칼을 들고 달려갔다. 모두들 질려죽일 작정이었다.

- “우리 국모를 죽인 이 원수놈! 내 오늘 너를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그러고는 일본놈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난도질을 했다. 얼음이 깔린 땅위에 피가 샘솟듯이 했다. 창수는 일본놈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든 채 방안을 들어서면서 호령했다.

- “네가 오늘 밤으로 네 자식을 내다 버리고 이 지방을 달아날 터이냐?”(중략)
강경포를 채 벗어나기 전, 거리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지난 새벽에 갯가에서 어린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끊어진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아마도 그 아이는 죽은 것이라고 야단들이었다.

③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님은 마음은 백범이시나 그릇은(白虎)이시니 차라리 결혼 하시지 마옵소서. 누이 같이 열심히 지원은 해 드리겠나이다.
나라도 소중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도 소중한 것이지요. 큰 뜻을 품은 분의 뜻에 다 따를 수는 없사옵니다. 저는 ‘나라를 위한다’ 는 위로의 말로 내 님이 일평생 쫒기고, 감옥가고, 뼈가 들어나는 모진 고문을 당하는 그 과정을 차마 지켜볼 수 없나이다. 또한 내 자식 던져두고 ‘나’ 던져두고 밖으로 떠 도는 님을 지켜볼 수 만은 없사옵니다. 쓰신 유서를 보니 첫딸은 동사(冬死)나 마찬가지 더군요. 둘째 딸도 감옥간 아버지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또 먼저 갔다지요? 신과 인은 행복했나요? 그렇다고 백 범 당신을 만백성이 기억하고 우리 조국의 영원한 국부라고 칭송하면서 그 뜻을 받들고 있나요? 이 제 다시 이승으로 오신다면 그 냥 평범한 가장이되셔요. 그리고 가족, 부모님,한 껏 이끼고 사랑 듬뿍 주세요.

나) 2007년 12월 대선에 출마를 하신다면
-- 검증이라고 아옵니요? --
① 국민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충복이 되겠사옵니까?
--- 서대문 형무소 뜰을 쓸며 ---
- 하느님,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 보고 죽게 해 주옵소서.
- 백 범 : 가장 평범하고 낮은 사람의 뜻, 가장 낮은 사람까지도 글을 깨치고 애국심을 갖게 되어야만 우리 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될 수 있다.

② 경제적,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국가로 만들겠습니까? 혹시 돈에 대해 말을 하지 않으시려는 것은 아닌지요? 지금은 산업 정보화 사회 이옵니다.
-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치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저도 전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많은 유권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높은 문화는 튼튼한 경제력의 바탕위에 마련되는 것이라 생각하므로 몇 군데 수정을 가하셔야 많은 표를 얻을 수 있겠습니다.

③ 지나친 규제나 통제는 아니하시겠지요?
개인 생활을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고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는 몇 사람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도 있지 아니한가!

④ 철학과 문화가 있는 교육정책을 펴나가겠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 황해도 문화 초리면 종산에 있는 서명의숙에서의 교원생활, 안악에서 양산학교 교원과 사범 강습회, 인천감옥에서의 공부와 교육활동, 농촌교육활동등의 경력으로도 교육분야는 합격이십니다. 그리고 대학정책은 대학의 자율에 맡기실거죠?

⑤ 환경 우선정책을 펼치시렵니까?
우리 나라의 산에는 산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 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까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 혹시 일부 유권자들은 보존 정책보다 개발정책을 바라고 잇는지 모르니까 혹시 표를 적게 얻으시더라도 실망마십시요.

⑥ 정치 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다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생활이 속박되는 것은 자유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에 달려 있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⑦ 위의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때 저는 백 범 후보자께 표를 던집니다. 그러나 한 두가지 덧붙여서 말씀드리자면, 측근은 덕망이 있고 각 분야 전문가를 드십시요, 개인적인 정리나 사욕을 앞세우는 사람, 일신의 명예와 영광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멀리하셔야 합니다.
꼭 당선되시기를 바라오며 동시에 우리 나라가 제2 도약의 시대를 맞이하기를 바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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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26 13:11:06 *.72.153.12
'청혼을 해온다면','후보로 나온다면' 잘 봤습니다. 헤헤
이렇게 보니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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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26 13:41:22 *.75.15.205
그 집에 가면 탁주가 있다.
설령 주인 아낙이 없더라도 나는 괘의치 않는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훗날 기자의 질문에 이심전심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발에 탁주을 들이 붓고 그녀가 담궈놓은 김치들을 내온다.

술독을 바라보다 그녀가 펼쳐 놓음직한 CD 한 장을 주어들고 오디오를 켠다.

그녀의 탁주에서는 그녀가 켜는 첼로 음악이 넘실댄다.
코끝으로 입안으로
가슴으로 이상으로

주인이 없어도 나는 그녀의 집에 간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말했다. 이심전심이었노라고.
언제나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들은 공연히 발 구른다.
누군가는 핏대를 세우고 어느 이는 자리를 비껴간다.

해질 녘
나는 그녀가 빚은 탁주를 마신다. 그녀의 출렁이는 우주와 함께
살아온 만큼의 단단한 그/그 녀를 신뢰하며
그녀/그의 숨소리를 듣는다.

온니야, 니그 집에 막걸리 떨어지지 말그레이.
그라고
우리 사량도에 가믄 좋겄다. 거게에 가면은 문디 같은 여편네가 꼴탑하게 빚어내는 솔잎막걸리가 있는데 괜찮데이. 그라고 거게 등산도 할만 하다쿠더라.
배타고 바다 건너서 등산하고 해질 녘에 사량도 앞바다가 내려다뵈는 문패도 없는 그녀 집 앞에서 그녀가 즉석에서 빚어내는 솔잎막걸리 한 잔 땡기면 마 직인다. 우째, 니도 가고 싶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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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27 20:30:46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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