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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5일 07시 3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가. 다산의 일생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으로서 본관은 나주이며 자는 미용(美容) ·송보(頌甫)이다. 그리고 초자는 귀농(歸農)이며 호는 다산(茶山)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탁옹(翁) ·태수(苔) ·문암일인(門巖逸人) ·철마산초(鐵馬山樵)이고 가톨릭 세례명 요안이다. 또 시호는 문도(文度)이며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신유박해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일으킨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의 장기(長)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나. 다산선생의 조상 및 가족

정씨 집안의 본관은 나주(螺舟 : 押海)다. 고려 말에 배천(白川)에서 살다가 조선왕조를 세울 무렵부터 서울에서 살았다. 맨 처음 벼슬을 한 선조는 승문원(承文院)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으로 이때부터 쭉 이어져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의정부 좌찬성 응두(應斗), 사헌부 대사헌 윤복(胤福), 강원도 관찰사 호선(好善), 홍문관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를 지낸 시윤(時潤)은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었다. 5대조 정시윤은 만년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근처인 ‘마재’에 터를 잡아 은거했다. 정약용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의 3대는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고조의 이름은 도태(道泰), 증조의 이름은 항신(恒愼), 조부의 이름은 지해(志諧), 오직 증조만이 진사였다. 아버지 정재원은 대과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영조 임금의 특별한 지시(음사; 蔭仕)로 벼슬에 나갔다. 연천현감, 화순현감, 예천군수 등 고을 수령을 지냈고, 조정에 들어와 호조좌랑과 한성서윤을 지내고, 다시 수령으로 나가 울산부사를 거쳐 진주 목사(晉州牧使)까지 지냈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 尹氏)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후손이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였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한국 회화사에 유명한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유명하다. 아버지 정재원은 세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의 10남매가 있었다. 첫 부인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남씨(宜寧 南氏: 1729-1752)이다. 소생으로 큰아들 약현(若鉉)이 있다. 둘째 부인 해남 윤씨((海南尹氏: 1728-1770)와 사이에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3형제와 딸을 두었다. 이 딸이 나중에 이승훈에게 시집간다.

다산 정약용의 나이 9세 때(1770년) 어머니 해남 윤씨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12살 때(1773년) 서울에서 20세의 김씨(1754-1813)를 데려왔다. 어린 다산을 친자식처럼 돌봐준 그가 서모 김씨다. 서모 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의택(金宜澤)의 딸로서 슬하에 삼녀 일남(약횡)을 두었다. 큰딸은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에게, 다음은 나주목사를 지낸 이인섭의 서자 이중식(李重植)에게 시집갔다.

다산의 집안은 혼맥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익 계열의 학통을 계승하고, 서학(천주학)에 관련을 맺게 된다. 다산의 누이는 조선 최초의 영세교인인 만천 이승훈(蔓川 李承薰 : 1756-1801)에게 시집갔고, 다산 자신은 이승훈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당시 명망이 높던 이가환(李家煥)은 이승훈의 외삼촌이며 이익(星湖 李瀷)의 종손이었다. 광암 이벽(李檗)은 다산의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이다. 다산은 그를 통해 처음 서학(천주학)을 접하게 된다.
또 백서(帛書)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1775-1801)은 다산의 조카사위이다. 16세 때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수재인 황사영이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의 딸(丁命蓮)에게 장가들었다.

다산의 작은 형 정약종은 형제보다 뒤늦게 천주교를 접했지만 그 믿음이 독실하여 신유사옥 때(1801) 희생되었다. 전도에 힘쓰다가 책롱사건으로 마흔 둘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형 약전과 막내(다산)가 믿음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형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엄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약종의 아들 철상(哲祥), 하상(夏祥), 딸 정혜(貞惠) 역시 천주교로 인해 요절했다.
이가환과 이승훈도 이때 죽음을 당하고, 다산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 경상도 장기로 유배당했다. 뒤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로 인해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어 있던 다산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관련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극형은 면했으나 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형 약전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다산과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의 연(緣)뿐만 아니라 다산의 학문을 알아주는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1801년 11월 하순 함께 귀양길에 올라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후 16년 동안 서로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약전은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떴다.

다산은 경전의 미묘한 뜻을 낱낱이 파헤친 걸출한 경학자였다. 그 복잡한 예론을 촌촌히 분석해낸 꼼꼼한 예학자였다. 목민관의 행동지침을 정리해낸 탁월한 행정가요. 아동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실천적 대안을 제시한 교육학자이며, 지나간 역사를 손금보듯 꿰고 있던 해박한 사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화성 축성을 설계하고 기중기와 배다리 유형거를 제작해낸 토목공학자요, 기계공학자였으며, 아방강역고와 대동수경을 펴낸 지리학자였고 한편 마과회통과 촌병혹치 등의 의서를 펴낸 의학자였다. 그래서 과학자인가 싶어보면 또 다시 형법의 체계와 법률 적용을 검토한 법학자로 돌아왔고, 어느새 속담과 방언을 정리한 국어학자가 되어 있었다. 백성의 아픔을 아파한 시인이자, 날카롭고 정심한 이론을 펼친 문예 비평가였다. (다산선생지식경영법 14p)

2. 가슴을 치는 구절

[기(記)]

<수종사에서 노닐은 기>

(19p) 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고, 곤궁했을 때 지내던 곳을 입신출세하여 찾아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며, 홀로 외롭게 지나가던 땅을 좋은 손님들과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이끌고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득월당기>

(22p) 무릇 사물 중에서 아름다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물건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욱 많게 되며, 그것을 얻기도 더욱 힘들게 된다. 비옥한 전답과 높은 집, 길다란 인끈과 포근한 갖옷, 아리따운 여자와 좋은 말 같은 것은 평생토록 얻으려고 애쓰지만, 어떤 사람을 얻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얻지 못한다. 그것을 얻을 때는 마치 사나운 새와 짐승이 먹이를 움켜잡고서 사방을 둘러보는 것과 같으며, 그것을 얻지 못할 때는 마치 궁한 귀신이 슬피 울부짖는 것과 같으니 또한 가련하지 않은가.

(23p) 사사로운 욕심과 혼자만이 차지하려는 마음을 없애지 않고서야 참으로 소유할 수 있겠는가?

<여유당기>

(24p) 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으나 부득이 해야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요, 자기는 하고 싶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만둘 수 있는 일이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은 항상 그 일을 하고는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그만둔다.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할 수 있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한 때로는 그만둔다. 진실로 이와 같이 된다면 천하에 도무지 일이 없을 것이다.


[전-傳]

<죽대선생전>

(47p) 와사씨는 논한다. 나는 예전에 죽대 선생과 잘 지냈다.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마치 말을 못할 듯이 보이는 사람은 오로지 죽대 선생뿐이었다. 그런데 죽대 선생만이 능히 번옹을 위해 한마디 하였으나, 선비를 안다 하겠는가? 선생은 진실로 열렬한 의사이고 그 딸 또한 의협심이 있는 여자였다.

<조신선전>

(52p) 도가에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을 신선이 되는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조신선은 욕심이 많으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늙지 않았으니, 혹 말세가 되어 신선도 시속을 면할 수 없어서인가?

<정효자전>

(55p) 그의 아버지는 시섭이라고 하는데 관을 구덩이 속에 묻을 때 곡하며 말하였다. “네가 죽음으로써 나는 세가지를 잃었다. 아들을 잃고 친구를 잃고 스승을 잃었다.

<몽수전>

(57p) "나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도 예법에 구애되어 모른체하고 떠나간다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다"

[가훈 - 家訓]

<학연에게 보여주는 가훈>

(61p)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행하는 일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니, 이 점에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비록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흙담에다 색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62p) 사람을 알아보려면 먼저 가정에서 행실을 살펴야 한다. 만약 그의 옳지 못한 점을 발견하면 즉시 자신에게 비춰보아, 자기에게도 그러한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러지 않도록 힘차게 공부를 하여야 한다.

(63p)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란 임금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임금에게 신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64p) 지위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는 온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공무에 힘을 서야 하고 언관言官의 지위에 있을 때는 모름지기 날마다 격언과 곧은 의론을 올려서 위로는 임금의 과실을 비판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 혹 사악한 관리를 공격하여 제거하되 모름지기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해야 하며,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은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것만을 지적해야지, 의리에만 치우쳐서 자기와 뜻이 같은 사람이면 편을 들고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이면 공격해서 함정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두 아들에게 주는 교훈>

(67p) 내가 죽은 뒤에 아무리 청결한 희생과 풍성한 안주를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준다 해도 내가 흠향하고 기뻐하는 것은 내 책 한편 읽어주고 내 책 한 장을 베껴주는 일보다는 못하게 여길 것 이니 너희들은 이점을 기억해두어라

(70p) 대체로 저술하는 법은 우선 경적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고 그 다음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학문이어야 하며, 국경을 지키고 성을 쌓는 기구의 제도로 외침을 막아낼 수 있는 분야의 것들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자질구레한 이야기들로 구차하게 한때의 괴상한 웃음이나 자아내게 하는 책이라든지, 진부하고 새롭지 못한 이야기나 지루하고 쓸데없는 논의와 같은 것들은 다만 종이와 먹만 낭비할 뿐이니, 좋은 과일나무로 심고 좋은 채소를 가꾸어 생전의 살 도리나 넉넉하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또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72p) 무릇 시에는 정신과 기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쓸쓸하고 산만하기만 하여 결속과 단속의 묘미가 없는 시는 그 사람의 빈궁과 영달은 고사하고 수명도 길지 모사니, 이 점은 내가 여러 차례 시험한 것들이다. 시경 3백 편은 모두 성현들의 뜻을 잃고 시대를 근심한 작품들이다. 그러므로 시에는 반드시 마음에 깊이 느낀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절대로 미묘하고 완곡하게 표현을 해야지 얄팍하게 드러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74p) 이러한 때에, 만약 어떤 도량이 넓은 남자가 아리땁고 지혜로운 부인을 감동시켜 숲 같은 도량을 넓혀주고 태양처럼 밝은 마음을 갖게 하여 여자의 도리를 지켜 어린 아이처럼, 창자 없는 것처럼, 뼈 없는 벌레처럼, 갈천씨의 백성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정에 들어간 승려처럼 하여 저쪽에서 돌은 던지면 이쪽에서는 옥돌로 보답하고, 저쪽에서 칼을 가지고 나오면 이쪽에서는 단술로 대접해주지 않는다면, 서로 눈을 흘겨보며 성내고 다투다가 죽이기까지 하는 등 결국 집안을 망치고야 말 것이다.

(75p)나는 지금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들에게 우선은 시골집에서 숨어 지내도록 하였다만, 뒷날의 계획은 오직 서울 10리 안에서 거처하는 것이다. 만약 가세가 기울어 도성으로 깊이 들어가 살 수 없다면 모름지기 잠시 근교에 머무르면서 과수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산이 좀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도심의 중앙에 들어가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부터 화를 당한 집안의 자손들은 반드시 놀란 새가 높이 날고 놀란 짐승이 멀리 도망하듯이 더 멀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이렇게 하면 결국 노루나 토끼처럼 되어 버리고 말 뿐이다.

(77p)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루아침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먼 시골로 이사가버리는 사람은 천한 무지렁이로 끝나고 말 뿐이다.

(80p) 형체가 있는 것은 파괴되기 쉽지만 형체가 없는 것은 없애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기가 자기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형체로 사용하는 것이요, 제 재물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은 정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물질로써 물질적인 향락을 누리면 해지고 파괴되느니 수밖에 없지만 형체 없는 정신적 환락을 누린다면 변하거나 없어지는 낭패를 당하지 않는 법이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77p) 군자가 책을 지어 세상에 전하려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 알아주기만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 것이다. 만약 나의 책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나이가 많으면 너희들은 아버지로 섬기고 너희와 엇비슷한 나이라면 너희들이 형제로 맺는 것도 좋을 것이다.

(79p) 너희들은 이 점을 알아서 학문이 깊이 연구하는 노력은 조금 늦추더라도 먼저 올바른 몸가짐의 공부에 힘써 육중한 산처럼 우뚝 솟은 모습으로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를 익혀야 한다. 한 구절의 글이 모두 남들이 아끼고 애호하는 바가 될 것이다. 만약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경시하여 땅에 버려진 흙같이 한다면 이는 정말 끝나버리는 일일 뿐이다.

<또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훈>

(83p)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필요한 곳에 쓴다 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근’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때까지 미루지 말며, 전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끌지 말며, 비 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검’은 모든 맛있는 횟감이나 생선도 입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버리므로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전에 사람들은 더럽다고 침을 뱉는 것이다. 사람이 천지간에 살면서 귀히 여기는 것은 성실한 것이나 조금도 속임이 없어야 한다. 하늘을 속이는 것이 가장 나쁘고, 임금을 속이고 어버이를 속이는 데서부터 농부가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상인을 속이는데 이르기까지 모두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오직 하나 속일 게 있으니 바로 자기의 입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식물로 속이더라도 잠깐 그때를 지나면 되니 이는 괜찮은 방법이다.

(83p)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백성들이 수만 명이나 되므로 하늘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내가 굶어죽는 사라들을 살펴보니 대체로 모두 게으른 사람들이었다. 하늘은 게으른자를 미워하여 벌을 내려 죽이는 것이다.

(85p)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모름지기 이런 생각을 가져라. 정력과 지혜를 다하여 변소간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으리라. 이러한 생각은 눈앞의 궁한 처지를 대처하는 방편일 뿐 아니라, 비록 귀하고 부유함이 극도에 다다른 사군자 일지라도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이 ‘근’과 검‘ 두 글자를 버리고는 손을 댈 곳이 없을 것이니, 너희들은 반드시 가슴깊이 새겨두도록 하여라.

<학유가 떠날 때 노자 삼아준 가훈>

(95p) 도량의 근본은 용서함에 있다. 용서만 할 수 있다면 좀도둑과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라 할지라도 아무 말 없이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야 말할 게 있겠느냐?

(97p) 요컨대 알아야 할 점은 아침에 햇빛을 먼저 받은 곳은 저녁 때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진리인 것이다. 운명은 돌고 돌고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 때문에 마침내 청운의 뜻까지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지니고서 천지가 눈 안에 들고 우주가 손바닥 안에 있듯이 생각하고 있어야 옳다.

<두 아들에게 답함>

(113p) ‘고려사’에 대한 공부는 아직도 착수하지 않았느냐? 젊은 사람이 먼 생각과 통달한 견해가 없으니 한탄할 노릇이다. 네 편지 중에 모든 의심나고 모르는 부분을 질문할 곳이 없다고 한탄하였는데 과연 네 마음에 참으로 의심나서 견딜 수 없고 생각이 나서 감내할 수 없다면, 왜 조목조목 기록해서 인편에 보내오지 않느냐? 부자간에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117p) 독서에는 반드시 먼저 근기(根基)를 세워야 한다. 무엇을 근기라 하는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니 학문에 뜻을 둔다면 반드시 먼저 근기를 세워야 한다. 무엇을 근기라 하는가? 효(孝)와 제(悌)가 그것이다. 모름지기 먼저 효, 제를 힘서 근기를 세운다면 학문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학문이 몸에 배게 되면 독서는 따로이 그 층절(層節)을 논할 것이 없다.

<두 아들에게 부침>

(127p) 보내준 편지는 자세히 보았다. 전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시비의 기준이요. 또 하나는 이해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분에서 네 종류의 큰 등급이 생기는 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요,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켜서 해를 받는 것이며, 그 다음은 나쁜 것을 쫓아 이익을 얻는 것이며. 가장 낮은 등급은 나쁜 것을 쫓아서 해를 받는 것이다.

<연아에게 답함>

(130p) 그런데 너는 한마디도 누가 먼저 글을 전해야 하는가를 밝히지 않고서 머리를 숙여 그 사람의 말만 옳다고 하고 있으니 너 또한 부귀영화에 현혹되어 부형을 천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냐. 어찌 슬프지 않으냐. 저 사람은 나를 모욕해도 괜찮은 폐족으로 여겨 먼저 편지를 보내오지 않고 있는데, 내가 고개를 숙여 뻔뻔스런 낯으로 먼저 동정을 애걸하는 편지를 쓴다는 것은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느냐.

<연아에게 부침>

(137p) 백방으로 생각해서 집에 있으면서도 학습할 가망이 있거든 네 아우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서 동생과 교대하고 이곳으로 오도록 할 것이며, 만일 사정상 전혀 가망이 없거든 내년 봄 날씨가 따뜻해진 뒤에 모든 일을 제쳐놓고 이리로 내려와서 함께 공부하도록 하여라.

첫째 이유는 날로 마음씨가 나빠지고 행동이 비루해져가니,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하겠고, 둘째는 안목이 좁아지고 지기가 상실되어가니,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하겠고, 셋째는 경학이 조잡해지고 식견이 텅 비어가니,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하겠다. 소소한 사정은 족히 돌아볼 것이 못 된다.

(139p)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일을 인용하는데,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 모름지기 삼국사지, 고려사, 국조보감, 여지승람, 징비록 연려실기술과 기타 우리나라의 문헌들을 취하여 그 사실을 채집하고 그 지방을 고찰해서 시에 넣어 사용한 뒤에라야 세상의 명성을 얻을 수 있고 후세에 남길 만한 작품이 될 것이다.

(141p) 나는 또 생사고락의 이치를 대략 알고 있는 터에도 이처럼 비통한데 하물며 너의 어머니는 직접 품속에서 낳아 흙 속에다가 묻었으니, 그 애가 살았을 때의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던 한마디 말과 한 가지 몸짓들이 모두 귀에 쟁쟁하고 눈에 삼삼할 것이다. 더군다나 감정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부인들에 있어서랴.

(149p) 채소밭을 가꾸는 요령은 모름지기 지극히 평평하고 반듯하게 해야 하며 흙을 다룰 때에는 잘게 부수고 깊게 파서 분가루처럼 부드럽게 해야 한다. 씨를 뿌릴 때는 지극히 고르게 하여야 하며, 모는 아주 드물게 세워야 하는 법이니 이와 같이 하면 된다. 아욱 한 이랑, 배추 한 이랑, 무 한 이랑씩을 심고 가지나 고추 따위도 각각 구별해서 심어야 한다. 그러나 마늘이나 파를 심는 데에 가장 주력해야 하며, 미나리도 심을 만하다. 한여름 농사로는 오이만한 것이 없다. 비용을 절약하고 농사에 힘쓰면서 겸하여 아름다운 이름까지 얻는 것이 바로 이 일이다.

<두 아들에게 부침>

(152p) 가령 내가 몇 년 안에 유배에서 풀려나 너희들로 하여금 몸을 닦고 행동을 가다듬어 효도와 공경을 숭상하고 화목을 일으키며, 경사를 연구하고 시와 예를 담론하며, 서가에 3, 4천 권의 책을 꽂아놓고 1년을 지탱하는 양식이 있으며, 뒤란에 뽕나무, 삼, 채소, 과일, 꽃, 약초들이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어 그 그늘을 즐길 만하며, 마루에 오르고 방에 들어가면 거문고 하나와 투호 일구와 붓, 벼루, 책상에 볼 만한 도서가 있어서 그 청아하고 깨끗함이 기뻐할 만하며, 때때로 손님이 찾아오면 닭을 잡고 회를 만들어서 탁주나 좋은 나물 안주에 흔연히 한번 배불리 먹고 서로 더불어 고금의 대략을 평론할 수 있다면, 비록 폐족이라 할지라도 장차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 흠모할 것이니, 이렇게 세월이 점점 흘러간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느냐? 너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차마 이것을 하지 않으려느냐?

(153p) 그러므로 일종의 학술은 오로지 반관으로 명목을 삼아 외모를 꾸미는 것을 거짓이라 가리키며 약삭빠르고 방탕하여 속박을 싫어하는 젊은이 들이 이말을 듣고 뛸 듯이 드디어 기초적인 몸 움직임의 에절까지 멋대로 한다.

(171p) 나는 몇 년 전부터 독서에 대하여 대략 알게 되었다. 책을 그냥 읽기만 하면 하루에 천백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한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연구해서 그 근본을 터득하고 따라서 그 글의 전체를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을 계속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 아울러서 수백 가지의 책을 널리 찾아보게 될 것이요. 따라서 본서의 의리에 대해서 분명히 꿰뚫을 수 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172p) 무릇 책의 내용을 뽑아서 쓰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자기의 뜻을 정해서 만들 책의 규모와 항목을 세운 뒤에 뽑아야만 일관된 묘미가 있는 법이다. 만약 세워놓은 규모와 항목 이외에 뽑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모름지기 책 하나를 따로 갖추어 놓고 얻는 대로 기록해야 확고한 힘을 얻게 된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쳐놓았는데 기러기가 걸렸다고 해서 어찌 버리겠느냐.

(173-174p)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는 것이다. 소가 물을 마시듯 마시는 저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는 적시지도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데 있는 것이다. 저 얼굴빛이 주귀朱鬼와 같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자들이야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대부분 별안간 죽게 된다. 술독이 오장육부에 스며들어 하루아침에 썩기 시작하면 온몸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크게 두려워할 만한 점이다.

[설 - 說]

<수령이 조심해야할 네가지 일>

(183p) 초하루와 보름에는 망궐레를 행할 것이다. 먼저 향을 피우고 반드시 잠시 고개를 숙이 엎드려 요사이 행한 일이 우리임금에게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없었는가 하는 것을 묵묵히 생각해야 한다.

[논 - 論]

<기에에 대해 논함>

(186p) 우리 나라에 있는 모든 공장의 기예는 모두 옛날에 배웠던 중국의 법인데, 수백 년 이후로 딱 잘라 끊듯이 다시는 중국에 가서 배워올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이와 반대로 중국의 새로운 신묘한 제도는 날로 증가하고 달로 많아져서 다시 수백 년 이전의 중국이 아닌데도 우리는 또한 막연하게 서로 모르는 것을 묻지도 않고 오직 예전의 것만 만족하게 여기고 있으니, 어찌 그리도 게으르단 말인가.

<용모에 대해 논함>

(194p) 무릇 능히 움직여 손가락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힘이라 이르고, 능히 화합하여 생활하는 기관을 가진 것을 신이라 이르고, 능히 왕래하고 동작하고 정지하면서 법이 있어 문란하지 않는 것을 법도라 이른다. 이 세 가지를 알고 나서 맥이 움직이고 가라앉음과, 더디고 빠름과, 크고 작음과, 미끄럽고 껄끄러움과, 팽팽하고 허한 것과 긴장되고 완만함과, 맺히고 잠복하는 징후에만 자세히 주의한다면 맥 짚은 의원의 일은 다 마친 셈인데 또 무엇을 구하겠는가.

<풍수에 대해 논함>

(202p) "아니 그렇게 좋은 자리라면 어째서 너의 어미를 장사지내지 않고 남에게 주었느냐?"

<효자에 대해 논함>

(214p) 그런데 저 효자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째서 기필코 꿩, 잉어, 사슴, 자라, 눈 속의 죽순만을 즐겨 찾는단 말인가. 또 호스이나 다사처럼 용이 내려오고 호랑이가 호위하여야만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야말로 부모를 빙자하여 명에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들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ㅇ

<충신에 대해 논함>

(223p)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대개 부모처자를 보호하고 또 스스로 자신의 징역을 면하기 위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 의병이 국가에 도움을 준 것은 얼마 안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공이 있는 사람은 구휼하여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헤도 없고 힘도 약하여 적에게 사로잡혀 죽은 사람은 취할 것이 뭐 있겠는가?

<서얼에 대해 논함>

(228p) "하늘은 지극히 높지만 하늘이라 부르지 않은 적이 없고, 임금 또한 지극히 높지만 임금이라 일컫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서얼은 자기 부모를 부모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환상에 대해 논함>
(232p) "이 곡식이 전에 우리 집에서 실어갔던 건가요? 어째서 묵은 쌀과 변질된 쌀이 섞여 있고 또 싸라기는 왜 이리 많아요? 이것은 시동생 집에서 실어다 두었던 것과 바뀐 것이 아닌가요? 아니면 광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공모하여 협잡한 것인가요? 지난 번에 우리가 굶주릴까 봐 걱정한다고 한 것이 결과가 이 모양이란 말입니까?"

(234p) 무릇 직책은 하찮은데도 재주가 넘치면 간사하게 되고, 지위는 낮은데도 지식이 많으면 간사하게 되고, 노력을 적게 들였는데도 효과가 신속하면 간사하게 되고, 나는 한 자리에 오래 있는데도 나를 감독하는 사람이 자주 교체되면 간사하게 되고, 나를 감독하는 사람의 행동 또한 정도正道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간사하게 되고, 아래에는 동료들이 많은데도 윗사람이 외롭고 어리석으면 간사하게 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나보다 약한 탓으로 나를 두려워해서 고발하지 못하면 간사하게 되고, 내가 꺼리는 사람이 다 같이 죄를 범했는데도 서로 버티고 고발하지 못하면 간사하게 되고, 형벌이 문란하여 염치가 확립되지 않으면 간사하게 된다. 간사한 탓으로 지위를 잃기도 하고 오히려 잃지 않기도 하고, 간사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간사한 짓을 했다는 것으로 지위를 잃는다면 간사하게 된다. 간사함이 발생하기 쉬운 것이 이러하다.

<간사한 아전에 대해 논함>

(238p) “아전이 본디부터 간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을 간사하게 만드는 것은 법이다.” 아니다. 이른 단지 본성을 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일 뿐이다. 아니다 이는 단지 배우지 못한 오만한자 일뿐이다. 아니다 이는 비슷할 뿐이요 역시 작은 도적이다. 큰 도적이 있다. “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 죽을 것이다.”

[원- 原]

<가르침>
(245p) 하늘이 명한 것을 성 이라 하고, 성대로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

<정사>
(245p) 정은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똑같은 백성인데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을 아울러 차지하여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 혜택을 받지 못하여 빈번하게 살것인가 . 이 때문에 토지를 개량하고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그것을 바로 잡았으니 이것이 정이다.

<덕성>
(249p) 사람마다 자기의 천한 이을 친근히 하고 자기의 존장을 존장으로 섬겨야 온 세상이 다스려질 것이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만으로는 덕이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사면>
(249-250p) 형벌의 의의가 그 사람이 미워서 그를 아프고 괴롭게만 하려는 데 있는 것인가? 그를 아프고 괴롭게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허물을 고치고 착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죽도록 사면이 없다면 그가 한번 형벌에 빠졌을 때 곧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되어 이름은 비록 살아 있을지라도 사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원망>
(253p) 결국 원망이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 나머지 성인으로서도 인정한 사실이고, 충신, 효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충정을 나타내는 길이다. 그러므로 원망을 설명할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시를 말할 수 있고, 원망에 대한 의의를 아는 자라야 비로소 충효에 대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

<목민>
(253-254p)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곡식과 베를 생산하여 목민관을 섬기고, 또 말과 수레와 하인을 내어 목민관을 전송도 하고 환영도 하며, 또는 피고름과 진수津髓를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우고 있으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하여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소 - 疏]

<자평을 사양하면서 과거의 패단을 진술하는 소>

(259p)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나라의 큰 정사는 사람을 등용하는 일보다 앞선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인재 등용은 오직 3년마다 실시하는 과거뿐인데 그 실상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여기에도 뽑은 사람은 대부분 폐기되어 이름이 문과 방목에 오르고도 기껏해야 낭관에 지나지 않으며, 저 묘당에서 관복을 입고 국정을 담당하는 우직으로 말하면 오직 별시와 반제에 급제하여 올라온 자라야 차지합니다. 이는 마치 아침, 저녁의 식사는 폐하고 오직 차와 과일만을 먹는 것과 같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맞지 않음이 이보다 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 "본래 시골 샌님들을 수재로 만들려고 했다가 이제 도리어 수재를 시골 샌님으로 만들고 말았다" 한 말에서 벌써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266-267p) 신은 이른바, 서양 천주교에 대한 책을 일찍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책을 본 것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말을 야박하게 할 수 없어 책을 보았다고 했지, 진실로 책을 보고 말았다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대개 일찍이 마음속으로 좋아하여 사모했고, 또 일찍이 이를 거론하여 남에게 자랑했습니다. 그 본원 심술은 일찍이 기름이 스며들고 물이 젖어 들며 뿌리를 내리고 가지가 얽히듯 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무릇 이미 한 번 이와 같이 되면, 이것은 맹자 문하의 묵자요, 정자 문화의 선파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증자가 말하기를, "나는 정도(政道)만 얻고 죽으면 그만이다." 하였는데, 신 또한 정도를 얻고 죽고자 하오니, 한마디 말로써 스스로를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74p) 대개 이 사학邪學은 곧 몇천만 리 밖, 풍속이 다른 이역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 하나라도 죄역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해괴하고 두려운 것이 짐승이 사람 속에 있는 것 같이 분명하여 하루도 구차하게 함께 거처할 수 없으니, 단연코 관적에 올라 벼슬하는 집안과 풍속에 따라 교유하는 사람으로서는 거스름 없이 병행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천하고 한미한 사람은 혹 행하더라도 무사하지만, 사대부에 속한 종족으로서 드러나게 칭송할 만한 이는 그 화가 바로 이르니, 어찌 열흘 간의 목숨인들 지탱하겠습니까.

[잡문 - 雜文]

<곡산향교에서 효도를 권장하는 글>

(291p) 아내와 재물은 본래 부모에게 효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아내라는 것은 곧 그로 하여금 부모가 살아서는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게 하고 부모가 돌아가셔서는 제사를 받들게 하며 자손을 낳아 길러서 선조의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이요. 재물이란 것은 곧 부모의 의식을 만족시켜 드리는 것이며, 부모의 장레와 제사를 받드는 것이니, 아내와 재물이 아니면 사람의 자식된 자가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292p)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모두가 빈손이다. 그것을 입혀주고 먹여주며 논밭과 집까지 아울려 물려준다. 비록 억만금을 가지고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는 것이 부모가 아니던가. 앞서 친구에 대해서는 어느 날 입은 하루의 은혜를 죽을 때가지 잊지 않고, 앞서 비복에 대해서는 어느 날 받은 하루의 노고를 마음에 새겨 잊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부모에 대해서는 그 은혜가 하늘과 같이 커서 다함이 없으되 막연히 잊어버리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여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여 사례하고자 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 사람의 자식 된 자가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3. 내가 저자라면

75세의 인생을 살면서 다산은 너무나 많은 업적을 남기었다. 이 책은 그러한 업적의 위대함이 아닌 인간적인 면이 뭉클 묻어난다. 개인과 집안의 몰락과 신유교난으로 유배의 길로 들어서서 관리로서의 인생은 끝이 났지만 오히려 학자로서, 다양한 연구와 저술활동 뒤에 나오는 배경 뒤에서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로써, 자연에 대하여, 친구에 대하여, 세상사의 다양한 면이 마음에 들어왔다. 6월의 과제인 위대한 리더들과의 만남은 커다란 업적만을 좇고 단순한 암기만을 해오던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위인들이 살다간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스쳐지나간 자신의 얄팍한 지식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다산이 18년 동안 긴 유배생활을 극복하고 많은 저술과 세상을 바라보는 힘은 바로 배움에 대한 열린 마음과 뜨거운 열정이 아닌가 한다.


“ 빈곤하고 궁약한 고통이 심지를 단련시키고 슬기로운 생각을 개발해서 인정과 사물의 모습의 진실과 거짓을 두루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151)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의 구성부분이다. 기(記)와 전(傳), 서(書) 설(說) 등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내용 각론으로 들어가서 배경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면 더욱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특히 서(書) 부분에 두 아들에게 답함이라는 23편의 내용은 연대기별로 적어놓거나 아니면 두 아들이 몇 살 때라던가 어떤 학문을 배우고 있다는 등의 배경상황을 조금만 설명해 주었다면 책의 구성과 더불어 내용면에서도 더욱 좋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월에 만난 3명의 위대한 리더들은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시대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자기 한 몸을 아낌없이 희생하였다. 미완의 시대에, 혼돈의 시대에 등불이 되었으며, 자기의 현실을 극복하는 변화의 순간이 되었다. 기록이 그러한 힘을 만들었고 후세에 교훈을 주는 소중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4개월 연구원 생활의 나태함이 나타나기 시작을 하였고, 여러 가지 개인사에 점차 게을러지는 나에게 다산선생님의 호된 질책이 다시금 연구원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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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6.25 08:28:57 *.114.56.245
소전님은 자기를 소중히 껴안아 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 제가보기에는 매진에 매진을 거듭하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책망도 필요하지만 위로와 격려도 필요합니다. 소전님이 함께함에 감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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