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7년 6월 9일 00시 01분 등록
'한산에 뜨고, 노량에 지다.' _ 이순신의 ‘난중일기’을 읽고

#1. 저자에 대하여



이순신은 1545년(인종 1년) 4월 28일(음 3월 8일), 서울 중구 건천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邊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순신의 집안은 대대로 문신(文臣) 관직을 지냈으나,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百祿)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충을 겪은 뒤, 그의 아버지 이정은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권력의 변방에서 일생을 보냈다. 때문에 이순신이 태어날 무렵에는 가세가 크게 기울어, 자식의 출세에 도움을 주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후 이정은 아예 서울을 떠나 아내의 친정이 있는 아산의 백암리, 현재 현충사가 자리하고 있는 방화산 기슭으로 이사하였다.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전쟁 놀이를 좋아했던 이순신은 22살의 늦은 나이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으나,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로 인해 낙방하고, 4년 뒤인 1576년 32살에야 비로소 급제하였다. 그 해 12월 한남 삼수(三水)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으로 임명되었다.

3년의 임기를 오지에서 보낸 그는 35세에 서울로 돌아와 훈련원 봉사(奉事)로 재직했지만, 서울 생활 8개월 만에 다시 해미에 있는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발령을 받는다. 그리고 보좌관 생활 9개월 만에 전남 고흥읍의 발포 만호(萬戶)로 수군과 첫 인연을 맺게 되지만, 훈련원 봉사 시절 상관이었던 서익이 이순신을 모함하는 장계를 올림으로써 그의 나이 37세, 1581년에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다행히 다음해 5월에 복직은 되었으나, 한동안 일이 없이 지내다 이듬해 5월에 다시 훈련원 봉사에 임명된다. 이때 이조판서로 있던 이이가 그에게 만나자고 했지만 이순신은, “이 판서께서는 나와 동성동본의 웃어른이시므로 내가 먼저 찾아 뵈어야 도리이지만, 그분께서 최고 인사권자로 있는 지금, 굳이 만나는 것은 서로 간에 누가 될 뿐이다”라며 만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순신의 강직함과 사려 깊은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렇게 맑은 사람이어서 보다 나은 자리를 얻기 위해 권력에 줄을 대거나 상관에게 아부할 줄 몰랐다. 이리저리 밀고 당기는 연줄이 없었기에 승진도 더디고 공을 인정받기도 어려웠다. 훈련원에서 14개월을 보낸 그는 함경도 남병사의 군관으로 북청에 부임했다가 3개월만인 10월에 경흥 건원보의 권관으로 수평 이동하였다. 1583년 10월에 여진족 추장을 잡는 공을 세웠으나, 포상은커녕 북병사 김우서의 모함을 받기까지 하였다.

근무지인 변방은 중앙에서 고립되어 소식이 느렸다. 같은 해 11월, 아버지가 돌아갔지만 그는 1월이 되어서야 겨우 부고를 받게 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3년상을 치렀다. 탈상을 마치자 사복시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16일 만에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는데 이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이뤄졌다. 이듬해 8월에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하게 되는데, 여진족의 침입으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생기자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을 명 받는다. 1587년, 그의 첫번째 백의종군이었다.

1588년 1월 백의종군이 해제되었고, 1589년 2월 전라감사 이광의 부름을 받아 군관 겸 조방장 자리에서 상관의 인정을 받은 뒤, 같은 해 12월 정읍 현감(정6품)에 임명된다. 이 때서야 비로소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있게 되는데,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자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 때부터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보낸 한 많은 어머니와 두 형이 남긴 조카들을 제대로 건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그의 직책은 어지럽게 바뀌는데, 이는 그 당시 조정의 혼란한 상황을 반영한다. 그는 1590년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절제사(종3품)에 임명되었으나,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대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 이순신의 선정이 칭찬을 받아 정읍에서 진도 군수로 이배되어 부임되었으나, 다시 가리포(완도) 첨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실제로 부임하기도 전에 그와 조선의 운명이 걸려 있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승진의 단계를 무시한 이러한 발탁은 당시 좌의정이었던 우성룡이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느 자리에 가든 자신의 임무와 역할의 기본에 충실했던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터지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 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조선의 국토와 백성들은 왜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유린되었다. 이순신은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9일 새벽 노량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7일까지의 7년 동안의 병영 생활을 몸소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한 대로 ‘난중일기’에 기록하였다. 전쟁 중 그의 생각과 일상은 본문을 통해 되짚어보기로 하고, ‘난중일기’의 기록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전쟁 중 행적을 그의 대표적인 해전을 중심으로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옥포 해전 (1592년 5월 7일) _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참전한 최초의 해전으로 옥포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은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경상우수사 원균과 당포 앞바다에서 합세한 이순신은 자신의 기함을 중심으로 횡렬로 늘어서서 왜군의 중심부를 공격, 결국 왜군의 함대 26척을 격침하여 최초의 승리를 장식하였다.



사천포 해전 (1592년 5월 29일) _ 사천포 해전은 최전방 돌격선인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했으며, 지형과 조수를 적절히 이용한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먼저 거북선을 전직으로 들여보내 각종 화포를 집중 발사하여 왜군을 분산시키고 사천 포구 쪽으로 돌아간 후, 만조를 이용하여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으로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_ 한산도 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지는 사상 최대의 해전으로, 이를 통해 왜군의 수륙병진정책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한 이순신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견내량이 협소하여 해전에 적합하지 않음을 파악하고, 왜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전을 펼쳐 왜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부산포 해전 (1592년 9월 1일) _ 부산포해전은 왜군의 수상 활동을 위축시키고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해전이다. 이 때의 전력은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했으며, 지리적 조건 역시 높은 언덕을 점유하고 있는 왜군에 비해 바다에 완전히 노출된 불리한 위치였다. 그럼에도 장사진을 짜고 유인 전술이 아닌 정공법으로 적진에 진군하여 적의 사기를 꺾고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처럼 이순신의 연전연승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조선 수군은 여수에서 한산도로 본영을 옮기고, 이후 거제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과 대치하게 된다. 왜군은 육지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지만, 해상에서의 거듭된 패배와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쟁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이후 기나긴 강화회담이 진행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이순신은 통영 앞 바다의 외딴 섬인 한산도를 조선의 최전방 요새이자 병기창으로 변모시킨다.

그러나 지리한 강화회담으로 대치 상태가 길어지자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시작되었고, 혼탁한 조정도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간계에 넘어가서 결국 1597년 2월 25일 이순신을 통제사 직에서 해임하여 한성으로 압송하고, 원균에게 그 직책을 인계한다. 4월 1일 겨우 사면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아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때 옥에 갇힌 아들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오던 어머니가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그는 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지만, 다시 슬픔으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권율의 본진으로 향한다.

그 해 7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끈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자 당황한 조선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그 때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 도중 배설이 이끌고 도망친 전선 12척과 도망친 군사 120명이 남아있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그가 그토록 애써서 가꾸어 놓은 대함대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는 비통한 마음을 삼키며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겨, 다가올 전투에 대비하여 전열을 재정비했다.



명량 대첩 (1957년 9월 16일) :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대파하고 승승장구하던 왜군의 기세를 꺾어버린 해전으로 정유재란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순신은 진도 부근에 있는 울들목(명량)이 수로가 협소하고 조류가 국내에서 가장 빠른 점을 이용하여 해상에 쇠줄을 설치하고 기다리다, 일자진을 펼쳐 왜군을 섬멸하였다. 13 대 133이라는 절대적인 수적열세를 이겨낸, 세계 해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완전한 승리였다.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 _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조선에 주둔해 있던 왜군이 철군을 위한 최후의 결전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명나라 수군과의 협공으로 왜군을 관음포로 유도하고 항로를 차단하여 결전을 벌였다. 이 해전으로 이순신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고, 왜군은 200여쳑 군선이 파괴되고 겨우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임진왜란을 온 몸으로 막았던 위대한 장군의 죽음과 조선 수군의 피 튀기는 한풀이를 끝으로 7년 동안의 처절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제 ‘난중 일기’를 통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온 몸으로 겪어냈던 한 장수가 짊어졌던 무거운 마음의 짐과 그가 겪었던 전쟁 중의 일상의 풍경을 살펴보도록 하자.

* 참고 자료 - ‘평역 난중일기(김경수 교수 편저, 행복한 책읽기)’, 이순신 – 한국의 명장(www. koreandb.net), 이순신 정보관(www. e-sunshin.com), 네이버 테마 백과, 위키 백과사전 등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


난중일기 완역본, 노승석 옮김, 동아일보사

* ‘난중일기’란 이름으로 나온 책이 많아 책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인용문은 노승석의 ‘난중일기 완역본(동아일보사)’을 이용하였다. 이 책은 원문에는 충실한 듯 하였으나, 일기 이외의 시대상이나 당시 전황 등을 설명하는 보조 자료가 부족하여 임진왜란 전체의 흐름을 살피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서점을 살펴보니, 김경수의 ‘평역 난중일기(행복한 책읽기)’가 쉽게 읽기에 적당한 듯 보였다.

들어가면서

(4) 우리가 오늘 첨단과학이 발달한 문명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1545~1598)을 400여년이 지난 후에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혁혁한 자취에서 느껴지는 유방流芳의 향기가 후대의 우리에게 더욱더 깊이 스며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강인한 정신과 기개로 무장한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가 자연에 대한 낭만도 느낄 줄 알았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을 느낀다. 그의 유묵遺墨에 “어느날 신선의 별장에 이르렀을 때 매번 서호 월악산의 구름과 수죽의 경치를 그리워하여 마음이 이에 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 사실에서 그런 감성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충무공의 저작인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임진왜란 중에 쓴 7년간의 진중陣中 일기이다. 여기에는 전쟁 중 진영에 나아가 업무를 본 것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고, 전쟁상황 및 임금에게 장계를 올린 것, 각 관청에 공문을 발송한 것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혀 있다. 또, 간혹 일기 사이에 따로 적어 놓은 옛 선인들의 명언, 또는 시를 짓거나 감회를 적은 내용들을 보면 그이 우국충정憂國衷情에 대한 염원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옥포해전을 비롯하여 거북선을 처음 사용한 노량해전, 당항포해전, 해산해전에서 대첩을 거두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명장이었다. 그가 이처럼 승전을 거듭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항상 죽기를 각오한 자세로 임전臨戰하였으니, 이른바 견위수명見危授命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특히 전략과 전술에도 뛰어나서 지리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는 등 국가 방어에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란 중에 늘 국가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느라 개인의 가정사는 돌볼 겨를도 없었고 그에게는 오직 진중 생활이 곧 일상적인 생활 무대였던 것이다.

한편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자주 눈에 띄는 대목이 있는데, 그 내용들이 가슴에 종종 간절하게 와 닿는다. 전쟁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수시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어머님의 안부를 대신 묻게 하고, 또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글로써 자주 적은 것이다. 여기서 그의 어머니에 대한 자상하고 효성스런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고 하였다.

임진년 1592년

(15)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날 일도 짐작할 만하다.

(17-18) 초1일_임진_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안개비가 잠깐 뿌리다가 늦게 갰다. 선창船艙으로 나가 쓸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水場 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2천여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대로 전선 위이ㅔ 앉아서 우후 이몽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함께 새 봄의 경치를 즐겼다.

(39-40) 초2일_경자_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곧장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20여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우리 배가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1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 만 하였다. 배 위에는 누각을 꾸몄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끄덕도 하지 않았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을 비오듯 마구 쏘아대었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모든 왜적이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모조리 섬멸하여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계사년 1593년

(55)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술을 함부로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욱 말로 나타낼 수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59)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할 일이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원균 때문이다.

(67) 그러나 어제 적을 만나 지휘할 때 교묘히 피하여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았는데, 너무도 통분하였다. 즉시 마땅히 규율에 따라 처벌하려 했으나 이전 일이 오히려 많고 또한 거듭 명령한 법이 있을 뿐 아니라, 더욱 힘을 내어 병가兵家의 일에 힘쓰라고 분부하셨기에 우선 그 죄를 용서하고 적발하지 않았으니 감결甘結안에 갖춘 사연대로 일일이 받들어 행하라.

(68) 다만 지난번에 후퇴하여 돌아온 뒤로 얼마 안 가서 다시 병사를 징발하였지만 민심이 이미 무너져있기에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84) 글을 적기로 생각하면서도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다시 계속한다.

(89) 점심 때 윤봉사에게서 “서울 관동의 숙모가 양주 천천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어찌 세상사가 이렇게 가혹한가. 장사는 누가 맡아서 치렀을까. 대진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더욱 더 애통하다.

(97) 남해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 그 대장이라는 원수사부터도 그러하니 어찌하랴!

(102) 12일_을미_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13) 이 날 밤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116)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 /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123) 그러나 원수사와 그의 군관은 평소에 헛소문을 잘 내니 믿을 수가 없다.

갑오년 1594년

(156)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는 것이었다.

(176) 9일_병술_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침침하여 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190) 이 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스스로 겉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더욱 심해져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200) 달빛이 비단결처럼 고와 바람도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바다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206) 초3일_무인_ 비가 조금 내렸다. 새벽에 유지有旨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3년 동안 해상에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가볍게 칠 수가 없을 뿐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안았던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210)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와 눈 앞에서 주춤 섰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름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을미년 1595년

(239) 정월 초1일_갑술_ 맑음.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249) 그 내용은 “풍신수길이 출병한지 3년이나 지났어도 끝내 성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내어 바다를 건너와 부산에다 진영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이미 정해졌다”고 하였다.

(251) 23일_병신_맑음. 아침식사 후에 세 조방장 및 우후와 함께 걸어서 앞산 봉우리에 오르니, 삼면으로 바라보아 막힌 곳이 없고, 북쪽으로 길이 트여 있었다. 과녁 세울 자리를 설치하고 앉을 데도 만들어 놓고서 종일토록 돌아올 것을 잊었다.

(271) 혼자 다락에 기대어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재목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내내 뒤척거렸다.

(287) 북쪽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하더니 / 남쪽에 와서도 죽고 삶을 함께 했네 / 오늘 밤 달빛 아래 한잔 술 나누고 나면 /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지겠구려

병신년 1596년

(339-340)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스스로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생각에서였다.

정유년 1597년

(382) 한산도가 _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 큰 찰 차고 깊은 시름할 때 /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 / 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 / 정유년 중추 이순신 읊다

(383) 4월 초1일_ 신유_맑음 옥문獄門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 분과 아들 울이 윤사행, 원경과 더불어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만났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387)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387-388) 13일_계해_맑음. 일찍 식사 후에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나갔다. …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에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적었다.

(389) 19일_기묘_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394)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이 한산도로부터 와서 원공(원균)의 흉포하고 패악함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이탈하여 반역하니, 그 형세가 장차 어찌될지 헤아리지 못하겠다 하였다.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밖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95)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가. 왜 죽지 않는지.

(396) 원(원균)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을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401) 밤이 깊도록 이야기 하는 가운데에 “일찍이 임금(선조)의 분부가 있었는데 거기에 미안하다는 말이 많이 있었던 바, 그 심정이 미심쩍었으나 어떤 뜻인지는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또 말하되 “음흉한 자(원균)의 무고하는 소행이 극심하건만 임금이 살피지 못하니 나라 일을 어찌할고”하는 것이었다.

(401-402)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406) 아침에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기에 종들을 매질하고 밥쌀을 도로 갚아 주었다.

(424) 늦게 변의정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는데, 그 꼴이 형편없어 어리석고 용렬해 보였다. 후미진 촌에 사는 사람인지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이 역시 소박하고 순후한 모습이다.

(426)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최호) 및 여러 장수들이 많은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얼마 뒤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오전 10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수가 기뻐하기를 마지 않았다.

(427)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을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장의 잘못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430) 8월 3일_신유_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를 한 뒤에 삼가 받은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 길을 떠나 바로 두치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440-441) 16일_갑진_맑음.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무려 2백여척이 명량을 거쳐 곧장 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백 30여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고 했다. 그러고서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1마장쯤 물러나 있었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있어 묘연했다.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차 다가와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 중군의 영하기와 초요기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왔다.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곧장 적진에 들어가 교전하려 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기에 안위의 격군 7, 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 대고 내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소아대어 적선 2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다. 우리를 에워쌓던 적선 30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444-445) 아, 슬프도다. 그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이 떠나고자 했는가. 떠나면 또 어디로 가려했던가. 대저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사의 위태함은 마치 머리털 하나에 천균(3만근)을 매단 것과 같아서, 이는 신하된 자가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떠난다는 말을 진정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될 것이거늘, 하물며 어떻게 입 밖에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강을 위한 계책을 세운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쇠한 몸을 피눈물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되 일의 형세가 여기까지 왔으나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죽을 때가지 계속 주장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선 그들의 계책(화친)을 따라 자신이 그 사이에 간여하여 일을 낱낱이 구며 맞추어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혹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이치가 있을 것이다. 강의 계책은 이러한 데서 나오지 않고 떠나가기만을 구하고자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내맡기고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속 정유년

(448) 必死卽生, 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452) 그 편에 경상수사 배설의 겁내하던 꼴을 들으니 괘씸하고 한탄스러움을 참지 못했다. 권세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가서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쳤건만, 조정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458)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나 적합할까 대장감이 못되는 사람인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임명하여 보낸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460) 15일_계묘_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리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69-470)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루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10시경에 비가 내렸다.

(471) 어두울 무렵 코피를 한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말로 다하리요. 이제는 죽은 혼령이 되었으니 불효를 이토록 저지를 줄을 어찌 알 것인가.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수가 없었다.

무술년 1598년

(500-501) 11월 17일_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다.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3.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을 내려놓자, 그가 죽기 이틀 전에 담담하게 기록해 놓은 일상의 풍경과 그의 죽음 사이의 텅 빈 두 장의 간격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렇게 조금은 먹먹해진 가슴을 추스르고 나니, 이달의 주제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4월의 주제는 ‘미래’였고, 5월의 주제는 ‘역사’였다. 그렇다면 6월의 주제는 무엇일까? 사부님께선 희석의 글에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이제 개인의 역사, 즉 개인사로 들어 갈 것이니 한 개인에게 투사된 그 시대를 집어보라. 그리고 그대에게 투사된 현대를 그려보라. 끊임없이 연결하라. 책과 책을 연결하고 사상과 사상을 연결하고,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그들과 그대를 연결하라.”

사부님의 말씀처럼 이 달의 테마는 ‘개인의 역사’이고, 우리는 ‘그들은 어떤 삶은 살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들의 삶의 거울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고, 그들의 시대에 우리의 시대를 비추어보고, 그들의 생각에 우리의 생각을 비추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달의 리뷰에서 ‘내가 저자라면’은 그의 책을 ‘내가 한번 써 본다면’의 의미보다는 ‘내가 그의 삶을 한번 살아본다면’의 의미가 더욱 클 듯 하다.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김훈이 ‘칼의 노래’를 통해 그의 삶을 이순신 장군의 서슬 퍼런 장검 같은 삶에 비쳐보았다. 그의 책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래, 그의 삶은 그렇게 고단한 것이었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태어나면서부터 삶은 전쟁이었고, 마음은 그렇게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삶은 텅 빈 바다 위에 비친 차가운 달빛처럼 외로운 것이었고,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문짝처럼 덜컹거리는 것이었다.

그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지도 못했고, 정계의 두터운 인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최악의 상황에서 너무나 막중한 책임을 떠맡았으며, 안과 밖에는 온통 적들뿐이었다. 김훈의 표현처럼 ‘칼로 벨 수 있는 적’과 더 무서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과 싸우는 일이었다. 그는 타고난 체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그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정신력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난의 시대가 자신에게 던져준 절대절명의 과업을 완벽하게 수행해냈다.

그는 ‘난중일기’를 통해 그런 자신의 치열한 일상을 묵묵히 기록했다.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자신을 갈고 닦았다. ‘난중일기’ 속에서 그는 어머니와 자식을 사랑하는 따뜻한 사람이었으며, 가슴 한 구석의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외로워하는 유약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했으며, 최후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구체적인 대안을 강구했으며, 정신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다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항상 선두에 서서 군사들을 지휘했다.

혼란하고 혼탁한 시기였다. '하늘의 해도 검은' 시절이었다. 임진왜란의 짙은 먹구름이 조선 땅을 뒤덮었던 그 때 백성들의 참상은 지옥 그 자체였다. “부자가 서로 잡아먹고 부부가 서로 잡아먹었다. 뼈다귀를 길에 내버렸다. (징비록)”,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널렸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 뜯어 먹은 자들도 머지 않아 죽었다. (난중잡록)”, “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박고 빨아먹었다. 힘이 없는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뒷전에서 울었다. (난중잡록)”

그런 백성들의 참상에도 불구하고 윗것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정쟁놀음을 일삼코 있을 뿐이었다. ‘뇌물을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있으며’ ‘돈을 주고 벼슬과 자리를 사고 있는 시대였다.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고,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재목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는 어지러운 시대였다. 사방이 바다였고, 사방이 벽이였다.

더 말해 무엇하랴. 달빛에도 눈물을 흘리곤 했던 감수성이 풍부했던 장군에게 살기 위해 인간의 목을 베고, 포상을 위해 코를 베는 전쟁의 일상을 견뎌내는 것은 그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그도 모자라 큰 상을 주어도 모자랄 판국에 모함을 당해 옥살이를 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종과 같은 신분으로 백의종군하고, 그 와중에 어머니를 잃고, 아들을 잃은 그 마음의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의 기록처럼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탄만으로 세상을 등지지 않았다. 통곡한 뒤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끊임없이 정세를 살폈으며, 날씨를 살폈으며, 지형을 살폈고, 동료와 적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는 어려운 시대임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안간힘을 다하여 자신의 최선을 이끌어내고, 얼마 남지 않은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변방에서 보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때는 왔고, 그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처럼 멋진 날개를 펼쳤고, 노량에서 그 장렬한 삶을 끝마쳤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약한 인간임을 알았기에 더없이 강한 영웅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삶이 행복한 것이었는지, 슬픈 것이었는지,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한스러운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다였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행복하지만 슬픈 것이고, 아름답지만 또 그토록 처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11월 차가운 바다에 한줄기로 내린 푸른 달빛처럼 내게 묻는다. ‘너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마음의 칼을 갈고 닦을 뿐이다. 바램이 있다면 내 마음의 칼이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데 쓰였으면 좋겠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으로 물들이다.’ 그의 검이 피로써 세상을 구했다면, 나는 무엇으로 세상을 구할 것인가. 아니, 우선 자신을 구할 것인가?




이렇게 책을 읽다보면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 것인가, 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나는 내가 살던 바로 그 곳에 그가 그토록 가까이 있었음을 모른 채 매일 무심코 지나쳤었다. 충무와 통영이란 이름과 내가 매일 국민학교를 갈 때 지나다니던 착량묘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 통영 앞바다에 수장되었을 수많은 생명들의 외침 소리와 장군을 울게 하던 달빛과 바람의 넋두리를 단 한번도 듣지 못했다.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삶의 빈 칸이 채워진다. 무심코 지나쳤던 그 빈 칸들 속에서 더 많은 의문들이 싹을 틔운다.
IP *.60.237.51

프로필 이미지
김도윤
2007.06.09 00:09:42 *.60.237.51
이제 짐을 챙겨야겠습니다. 내일 안성에는 모두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네요. 저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겠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에 돌아오는 관계로, 다음 한 주는 책은 읽겠지만 리뷰는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잠시 연재(^^)를 멈추고, 다른 생각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주말 되세요!
프로필 이미지
한정화
2007.06.09 01:29:51 *.72.153.12
결국은 다 해놓고 가는구나. 잘 다녀와.

만화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지.
칼잽이. 아무때나 칼을 휘드르기에 그의 칼집은 칼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지만,
매번 칼을 쥘 때마다, 내가 이 칼을 뽑아서 어떤 결과를 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자의 칼집은 칼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칼잽이의 마음까지 단속한다고. 그게 자신을 향해 드는 칼이라고 하더라. 타인을 향해 드는 칼과 다른점이라고.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7.06.09 04:58:46 *.70.72.121
그래, 멀리 가지. 그 나라 사람이 되어봐. 실컷 샅샅이 다 살피고 과제한다고 촌스럽게 굴지 말고... 우리 생각은 선물 살때만 혀. ^-^
프로필 이미지
오리쌤
2007.06.09 11:22:25 *.207.221.12
허~~ 고교때 읽은 난중일기에서 지금 생각나는 부분은... 원균의 뒷담화를 전해 듣고 "모두 헛된 짓이다"라고 말한 부분과 왜군 포로들에게 그들의 명절을 즐길 수 있게 배려해준 도량, 그리고 어머님 돌아가심에 애끓이던 모습...

도윤님의 서평을 읽고 나니 난중일기를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읽으면 읽고 난 후에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듯...

근데...^^;; 어디 나갔다 오시나요??
혹시...^^;; 도윤님 글에 덧글 단 사람한테 선물같은 것 주는건가요??
.......
연락처 남길까요?? ^^;;
프로필 이미지
종윤
2007.06.12 13:08:34 *.227.22.57
여러 사람을 떨게 하는 도윤이의 리뷰답네~^^

맨날 연락하던 것도 아닌데, 막상 출장 가 있다고 생각하니 궁금하네 그랴. 멀리 갔다가 또 훌쩍 변해서 오는건 아닌가 모르겠네.

‘내가 저자라면’은 그의 책을 ‘내가 한번 써 본다면’의 의미보다는 ‘내가 그의 삶을 한번 살아본다면’의 의미가 더욱 클 듯 하다. <-- 요것 괜찮은 아이디어네. 근데 난 이순신처럼 말고 사부님처럼 살고파.

그리고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 그림은 일부러 작게 붙이는거야? 조금 더 컸음 싶은데, 아니면 클릭하면 별도의 창으로 뜨게 해줘도 좋고...

고맙네. 잘봤어~
프로필 이미지
김도윤
2007.06.18 09:26:55 *.249.167.156
잘 다녀왔습니다.. 와! 제가 없는 동안 홈페이지가 북적북적거렸네요^^
빨리 시차 적응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겠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92 (14) 쉽게 읽는 백범일지 - 도진순 엮어옮김 [2] 박승오 2007.06.18 4083
891 [독서014]백범일지/도진순 주해 [1] 素田 최영훈 2007.06.18 2439
890 백범 일지/도진순 주해 香仁 이은남 2007.06.17 2394
889 백범일지(白凡逸志) / 김구 好瀞 김민선 2007.06.18 2664
888 야생초 편지를 읽고 (마음이 환경보다 우선이다.) 산골소년 2007.06.17 2290
887 [백범일지] 아름다운 사람 김구 선생님 [4] 余海 송창용 2007.06.16 3520
886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2] 도명수 2007.06.16 2158
885 [013]『난중일기』를 읽고 file [5] 현운 이희석 2007.06.13 3768
884 난중일기(13)- 역자의 세심함에 감사드리며 [7] 최정희 2007.06.12 2605
883 (13) 난중일기 - 송찬섭 엮음 [3] 박승오 2007.06.12 2408
882 [13] 난중일기(이순신/ 노승석) [6] 써니 2007.06.14 3501
881 [리뷰11] 난중일기 : 이순신 [1] 박소라 2007.06.24 2354
880 [난중일기] 외로운 남아 이순신 [1] 余海 송창용 2007.06.12 2448
879 [독서013]난중일기 완역본/노승석옮김 [3] 素田최영훈 2007.06.12 2462
878 [리뷰013]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노승석 옮김 [2] 香山 신종윤 2007.06.12 2627
877 (013) 난중일기를 읽고 [3] 校瀞 한정화 2007.07.13 2399
876 난중일기, 2,539일의 인간적 기록 [4] 好瀞 김민선 2007.06.12 2208
» (13) '한산에 뜨고 노량에 지다' _ 난중일기를 읽고 [6] 時田 김도윤 2007.06.09 2761
874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를 읽고 (무서운 열정) [4] 산골소년 2007.06.08 2433
873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를 읽고 [1] 현운 이희석 2007.06.07 2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