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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2일 22시 44분 등록
난중일기(亂中日記)



여태까지의 북 리뷰의 형식은 ‘저자소개 - 인용 - 내가 저자라면’ 의 형식을 따랐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고, 다수의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이순신 장군이란 인물을 처음부터 ‘저자소개’란 타이틀 안에 가두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객관적인 자료로 들어가면서 이순신 장군을 먼저 저자로 소개해야 함이 내키지 않았다. 이번에는 펜 가는 순서대로 해보기로 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에서 수군으로 17전(23전이란 의견도 있다) 전승의 기록을 세우며 조선을 지킨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저술은 많다. 정조 시기의 <이충무공전서>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세의 많은 학자들이 그를 연구하고, 많은 작가들이 그에 관한 작품을 내놓았다.

난중일기,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그가 무슨 전법으로 무슨 해전에서 무슨 공을 세웠으며, 언제 무엇으로 임명되었다가 파직되고 백의종군하였다가 다시 무엇이 되었다는 사실적 이야기는 여기서 크게 의미가 없을 듯 하다. 나는 이번 난중일기에서, 추앙받는 성웅 이순신이기 전 한 인간이며 장군으로서의 이순신에, 인용을 들어 초점을 맞추어보고자 한다.


1592년1월1일~1598년11월17일, 2,539일의 기록

말 그대로 일기이다. 날에 따라 일상의 일을 기록하며 그의 의견과 느낌을 기록하였다. 특이하게 일기는 항상 날씨로 시작한다. ‘맑다.’,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날이 몹시 차다’ 등으로 처음을 연다. 어떤 날은 날씨 이야기가 일기의 전부이다. 항상 날씨를 먼저 나타내는 초등학생의 일기가 유치하게 연상되기도 하였으나, 날씨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수군의 입장으로 그리하였다 짐작된다.

난중일기는 날씨 후에 반복되는 다른 패턴을 보인다. 공무를 본 것, 제삿날이라 관청에 나가지 않았던 것, 몸이 불편하였던 것, 누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전세에 관한 소식과 의견. 점괘의 풀이. 활쏘기 연습. 왜에 관한 소식, 원균에 대한 미움. 어머니의 안부에 대한 근심. 가족의 걱정.

그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다. 권력에서 멀어진 문관 양반의 집안에 태어나, 늦은 나이에 무관이 되어 오랜 기간 동안 미관말직을 떠돌았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고 곧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는 조선의 운명이 그의 어깨에 달린 듯, 중압감과 고뇌에 시달렸다. 왜적에 약탈당하는 백성을 보았고, 피난 가는 왕과 무너져 가는 조선을 보았다. 파직되어 옥살이를 하고 백의종군하였다. 전쟁 중에 어머니와 아들을 잃었다. 전장에서는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 시기의 일기는 기록임과 동시에 자신을 구원하는 수단이며 돌파구였기도 하였을 것이다.

일기에는 점괘를 보아 길흉을 점치는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좋은 점괘가 나와 기뻐하는 장면을 보면, 이것에라도 의지하고픈 약한 인간의 면모가 느껴진다.

“글자로 점을 쳐보았더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如風起浪)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쩐 길흉의 조짐이 있는지 들으려고 점을 쳐 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는 것 같다(如貧得寶)는 괘가 나왔다. 이괘는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 (1596년1월12일)

“13일 비가 계속 내렸다.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격이라고 한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또 유정승(유성룡을 의미함)에 대하여 점을 쳤더니, 바다가 배를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다시 점쳐 보았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좋았다.”(1594년7월13일)

나라를 지켜야 하는 중압감과 고뇌 때문이었을까. 그는 건강이 별로 안 좋았던 것 같다. 건강에 대한 구절도 자주 등장한다.

“마음이 매우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1593년5월16일)

‘저물 무렵에는 가슴속이 답답하고 열이 나서 창문을 닫지 않고 잤더니 바깥 바람을 쐰 탓에 머리가 몹시 아팠다. 걱정스럽다.’ (1593년9월7일)


가족에 대한 사랑

이순신은 사흘이 멀다하고 시종 어머니 안부를 염려 한다.

‘요즈음 탐색선이 엿새가 지나도록 오지 않아 어머니께서 평안하신지 알 수가 없다. 끓어오르는 걱정을 어찌할 수 없다’(1595년5월13일)

그는 전쟁중인 1597년 4월 어머니의 비보를 듣고 당시의 심정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차마 글로 다 옮길 수 가 없어 ‘뒷날 대강 적으리라’라는 문구로 마무리함이 더욱 애절하다.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順和)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1597년4월13일)

왕에게 버림 받고 백의 종군하는 그의 처지에 어머니의 죽음은 더욱 그의 애를 끊는다.

“오늘은 단오인데, 천리 밖 먼 곳으로 어머니 영위를 떠나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1597년5월5일)

다음은 셋째 아들 면을 잃었을 때의 비통한 심정이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1597년10월14일)

5일 후의 일기에도 그는 애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다음과 같은 글을 다시 남긴다.

“어두울 무렵에 코피가 터져 한 되 넘게 흘렸다. 밤에 앉아 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이제 죽은 영혼이 되었으니 이렇게 불효를 저지를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

그 역시 자식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버지였다.


우국충정의 마음

1595년 뜸한 전쟁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앞으로의 해전에 대비하여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준비하고 배와 무기를 재정비하였다. 웅천 등지에서 기회를 엿보는 왜적의 탐색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강화가 결정되고 이순신 장군은 다음과 같은 우려의 글을 남긴다.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나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제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였다.”(1595년7월1일)

1596년은 왜적이 철수하던 해이다. 당항포 해전을 달포 앞두고 그는 전장을 정비하던 중 아래와 같은 일기를 남긴다.

“새벽 2시쯤 꿈을 꾸었는데, 잘 알지 못하는 곳에 가서 영의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둘이 다 의관을 벗어 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 걱정을 터어놓았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 놓았다. 그러는 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퍼부어서 계속 함께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계속하는 사이, 만일 서쪽의 적이 재빠르게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빈다면 임금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되풀이하여 걱정하다가 할 말을 잊었다.”(1596년1월12일)


장군으로서의 기개와 리더십

이길 수 없어 보였던 싸움을 승리로 이끈 명량해전, 이순신 장군은 13척의 배로 133척의 적선을 상대해야 했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선의 대부분을 소실하였으므로, 인계한 전선의 수는 13척이 전부였다. 거북선은 없었다. 결전의 전날 그는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일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1597년9월15일)

결전의 날, 수적으로 기가 질린 장수들은 쉽사리 진격하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거제 현령 안위와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을 불러 말하였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정녕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에게 말하였다.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1597년9월16일)

이순신의 일기는 1598년 11월17일을 마지막으로 한다. 적선이 군량을 싣고 남해를 건너가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가 잡았으나 왜적은 한산도 육지로 달아나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돌와왔다는 기록이 마지막이다. 이틀 후 일어난 노량해전에서 그는 왜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히 생애를 마친다. 이 때 이순신이 남겼다는 최후의 말은 유명하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戰方急愼勿言我死)”

일기에 있는 구절은 아니나, 장군의 칼에 새겨져 있다는 다음의 문구도 인상적이다. 인간적인 이순신의 모습을 그리다가 갑자기 이런 문장을 접하니 조금 섬뜩한 기분도 들지만, 장군으로서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三尺誓天山河同色, 一揮掃蕩血汚山河)“



학익진(鶴翼陣)이라는 육전의 전술을 해전에 응용하여 성공하고, 울돌목의 빠른 해류를 적절히 이용하여 아군의 승리를 이끌어 낼 줄 알았다. 전투가 뜸한 때에도 군기를 잡고 배나 무기의 정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둔전을 잘 관리해 재정적인 비축도 신경썼다. 언제 기습할 지 모르는 적에 대한 정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승의 성과는 우연이 아니다. 이런 그는 분명 명장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나라와 임금에 대한 걱정에 밤을 지새우고 앓기도 했던 군신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안부를 늘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아들이었으며, 자식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아버지였다. 군기를 바로 하기 위해 도망병을 참하기도 하였으며, 주저하는 부하는 엄히 꾸짖는 장군이었다.

그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난중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그 해 11월17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은 또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조선은 그로 인해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을까. 못내 궁금하다.


이제, 역시 이순신의 우국충정의 고뇌와 갈등이 묻어나는 그의 시 한편을 적어보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한산도 제승당에 걸려있는 이 시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밤에 수루에 올라 한산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잠못 이루던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이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閑山島月明夜上戌樓
撫大刀深愁時何處
一聲胡笛更添愁

IP *.142.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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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6.12 08:39:24 *.244.218.10
음...... 이런...이게 아닌데...
저녁 때 수정 좀 보아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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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완
2007.06.12 09:24:01 *.47.187.34
이순신 장군님과 대화하듯이 써봐라. 내가 보기에 너는 그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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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6.12 13:12:25 *.227.22.57
민선! 형식 파괴라~ 좋네. 오고가고 힘들고 바빴을텐데, 남자친구의 성화를 당당히 넘어서 리뷰 올린 정성에 박수를 보내~

승완! 상대를 부쩍 크도록 도와주고 싶어하는 모습도 좋지만, 한가지, 그런 남자의 모습을 민선이처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여자는 흔치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거지? 민선의 어디가 이순신과 닮았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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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6.12 13:49:43 *.244.218.10
저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칼럼에 쓴 거 말고도 한 껀 더 있는데 그것도 올려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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