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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3일 20시 16분 등록
‘난중일기’를 읽고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난중일기, 송찬섭 엮어 옮김, 출판사: 서해문집

Ⅰ. 이순신과 <<난중일기>>
1)이순신(1545.3.8 ~ 1598.11.18)


이순신은 덕수이씨 12대 손이다.
그의 시조인 이돈수(李敦守)는 고려중엽 고종 때 신호위 중랑장(神虎衛 中郞將)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 선조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1218년 거란의 침입 때 출정한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4대조 때 조선왕조의 개칭을 맞이하면서 문반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 조선시대에 105명의 문과급제자와 정승 7명, 대제학 5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을 낸 덕수이씨는 중종에서 영조 때까지의 3백년간이 가장 융성을 누린 시기로 나타나고 있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돼 고난을 겪었다.
이로 인해서 아버지 이정(李貞)은 벼슬에 뜻이 없이 평민으로 지냈다. 때문에 집안 형편은 더욱 기울어졌다. 하급 무관직인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이는 정규관리가 아니라 임시직이나 명예직쯤으로 여겨진다.
이정은 이순신이 함경도 건원보(乾源堡)의 군관으로 있던 1583년 11월, 향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하지만 이순신에게 부친의 부고는 다음 해인 1584년 1월에 전해졌고, 뒤늦게 고향으로 내려간 이순신은 3년 상을 치렀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卞氏)이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후 옥에서 나와 권율의 휘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찾아가는 배 위에서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이순신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말고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하였으며 항상 마음과 몸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그의 뜻이 드러난 것이었다.’ (징비록,서해문집 p213)

(아래의 내용은 이순신을 알리는 사이트에서 찾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순신은 1545년 조선 제12대 왕인 인종(仁宗) 원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새벽에 한성부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여해(汝諧)이고, 덕수(德水) 이씨 집안의 네 형제 가운데서 셋째 아들이었다. 이 네형제는 중국의 옛 이야기에 나오는 어진 임금 중에 복희씨,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의 이름자를 따서 맏아들은 희신(羲臣), 둘째 아들은 요신(堯臣), 그리고 할아버지가 꿈속에서 일러준대로 셋째 아들은 순신(舜臣)이라 이름지었고, 넷째 아들은 우신(禹臣)이라고 불렀다.

10살 전후하여 아산 백암리 외가로 이사하였고, 그의 가족들은 계속 그곳에 살게 된다. 1566년 22살부터 무예를 시작하였고 1567년 23살에 장남 회를 낳았다. 1571년 27살 차남 울로 낳았고, 뒤에 열로 이름을 고쳤다. 1576년 32살 식년 무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그해 12월, 함경도 동구 비보의 권관으로 첫벼슬길에 나갔고, 이듬해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45세에 정읍현감, 47세에 전라좌수사의 벼슬에 올랐다 사대부 제도가의 자손들이 30세 안팎에 큰 벼슬에 올랐던 사실과 비교하여 출세가 상당히 늦었다.

죽마고우인 유성룡(柳成龍)은 그의 저서 징비록(懲毖錄)에서 “조정에서 공을 밀어주고 끌어주는 이가 없어 급제한지 10여년이 지나도록 출세하지 못했다.”고 술회하였다. 이순신은 자기의 출세를 위하여 권문세가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율곡(栗谷)이 유성룡을 통해 공을 만나보기를 청하였고, 유성룡도 만나보라고 권한 사실이 있었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나이32세가 되던 1576년 2월에 식년무과(式年武科)의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1583년 39살 7월 함경도 병사의 군관이 되어 울기내를 토벌하고 공을 세웠다. 11월 5일 부친 이정이 별세하였고 부친상으로 아산에서 휴관하였다.

조산보 만호로 부임한 이듬해(1587년, 선조 20년) 8월, 공은 녹둔도(鹿屯島)의 둔전관(屯田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 때의 일이었다.
녹둔도란 함경도 경흥 고을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우리 말로는 사슴섬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섬은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있으며, 조산보에서는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녹둔도 둔전관이란 이섬의 농장을 관리하고 개척민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벼슬이었다. 그는 이곳의 군사가 너무 적음을 알고 군병을 더 보내주기를 요청하였으니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후에 이곳 녹둔도에서 오랑캐들을 상대해 공을 세웠으나, 우리쪽의 피해를 입은 것과 수비군사를 더 보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였던 것을 은폐하기 위한 복병사의 거짓 보고가 올려져 그 책임으로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1591년 47살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왜적이 침략해 오리라고 예견하고, 이에 대비하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영내에 앉아있기만 하지 않고 관하 각 포구를 직접 돌아보면서 무기를 점검하며 방비에 전념하였다. 거북선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시험까지 마쳐진 상태였다.

임진년(1592년) 4월 15일, 공은 경상수군절도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내습의 급보를 받았다. 이에 부산포가 4월 14일 점령을 당했으며, 왜적은 계속하여 동래(東萊), 양산(梁山)등 내륙지방으로 전진해 오고 있다고 통보가 연이어 들어왔다.
원균은 수영(水營)을 스스로 불사르고 무기를 바다에 던져 버린후, 자기 수군을 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몇명의 부하와 함께 한척의 전선을 몰고 고성(固城)까지 단숨에 200리 길을 도망쳐 버렸다.

1592년 5월 4일 새벅 2시, 이순신은 칠흑같은 한밤중에 함대를 이끌고, 경상도에 침구한 왜수군과 싸우기 위해 여수를 향해 출발하였다. 5월 7일 옥포만에서 적선과 처음 마무친 이순신은 적을 급습하여 26척의 왜선을 격침, 첫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중에 우리 군사가 처음으로 승리한 싸움이었다.) 우리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고 왜군과의 전투에 비로소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계속하여 합포에서 왜선 5척을 무찌르고, 적진포에서 적의 전선 11척을, 사천에서 13척 등 당항포에서 율포에서 연이어 왜적을 수장해 버렸다.

연이은 패전으로 왜적들은 겁을 먹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으므로,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여수로 회군하였다.
여수로 회군한 공은 거듭 훈련을 강화하여 전력을 기르고 있었다. 7월 상순에 들어서면서 왜군이 견내량(見乃梁)에 집결하기 시작한다는 정보를 얻은 충무공은 56척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였다.

견내량은 대 함대가 싸우기에는 불리한 곳임을 판단하고, 적의 함대를 외양으로 유도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돌연히 뱃머리를 180도로 돌려 학익진(鶴翼陣)을 폈다. 마침내 적선 73척중에서 7척은 싸우기도 전에 미리 도망쳤고 66척은 바다속에 가라앉거나 불탔다.

이 싸움에서 적의 장수들은 대부분 전사하였으며, 육지로 도망쳤다가 배를 가르고 자살한 장수도 있었다. 이 해전을 일컬어 한산대첩 또는 견내량대첩이라고 한다.

이 해전은 육지에서 크게 이긴 행주산성 싸움, 진주 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첩이라 한다. 이른바 이 한산대첩은 전국(戰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대첩이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위력에 눌린 왜병은 바다로 나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뿐만아니라 북쪽으로 진군하던 왜적의 육군도 그 기세가 움추려들 수 밖에 었었다. 왜적이 견내량 서쪽바다를 엿보지 않게되자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길목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개전초에 왜적 수군을 거의 섬멸한 이순신은 계속 적을 소탕하여 오다가 여수로부터 진영을 한산도로 이동하였다.

한산도는 산령(山嶺)에 둘러싸여 있어 왜군의 남해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요지였다. 이곳에서 왜군의 길목을 막으면서 둔전(屯田)을 경작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나무를 찍어 전선을 만들며,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들면서 쉬지 않고 다음 전투에 대비했다.

남해해상 연해지역의 소탕작전을 꾸준히 계속하다가 1593년 7월, 좌수영을 여수에서 거제 한산도로 옮겨 왜적침략의 수로를 가로막고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1592년 2월부터는 지난날 이순신의 위력에 눌려 외해로 나오지 못했던 왜선들이 점차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므로 함대를 출동시켜 왜선을 격파하면서 적의 집결지인 당항포를 습격, 21척의 왜선을 불태워 그들의 야욕을 한풀 꺽어 버렸다.

당항포해전이 있은 후, 4개월이 지난 7, 8월부터는 왜군들의 움직임이 전보다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장문포(長門浦)일대를 중심으로 연안과 각 포구마다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공은 수륙협동작전을 계획하고, 곽재우 등과 협동으로 장문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적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하고 함대를 한산도로 회군하고 말았다.

선조 29년(1596년)에 4년간을 끌어오던 화의(和議)협상이 깨어지자, 왜군은 다음해 1월에 카토오 및 코니시 등이 임진년 경험을 되살려 선봉군 1만 4천명을 거느리고 재침입의 태세를 취하였다. 그들은 먼저 우리 수군을 격멸하겠다는 전략을 세웠으나, 조선 수군(이순신)과의 정면대결은 오히려 저들에게 불리하고 참패를 면하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새로운 간사한 계책을 마련하였다. 코니시는 그이 부하 요시라를 경상좌병사 김응서(金應瑞)의 진중으로 보내어 밀서를 전달하고, “가또오의 부대가 모일(某日)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해상에서 맞아 싸워달라.”는 정보를 제공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밀서의 내용을 분석하고, 왜적의 간계임을 간파한 나머지, 척후선을 보내어 정탐케 하고 직접 출전하지 않았다. 고니시는 다시 요시라를 시켜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또오가 도착하였다는 사실과 기회를 놓쳤으니 원망스럽다.”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결국 이것을 빌미로 비방하여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은 공직을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는 이변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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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압송된 공은 사형처분을 받을 뻔 하였으나, 판중추 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의 청원으로 4월 1일 간신히 출옥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옥에 풀려나온 이순신은 뒤늦게야 홀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듣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6월에 도원수 권율(權慄)장군의 막하로 들어갔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7월 15일 칠천량에서 왜수군의 기습을 받아, 전 함대를 잃고 목숨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원균의 연합함대가 전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엔 권율 장군이 이순신에게 명하여 우리 수군의 뒷수습을 하도록 하였다. 공은 백의종군의 몸으로써 수군재건의 중대 임무를 맡아 남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패전의원인과 왜 수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칠천량해전에서 도망하여 온 배설로부터 12척 전선을 인계받았다. 또한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진가(眞價)를 뒤늦게 깨닫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다.

(명량해전)
이순신은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어, 겨우 12척의 전선만으로 전세를 수습해야했을 때, 조정에서는 이를 민망히 여겨 해전을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싸우라고 하였으나 해전을 폐(廢)할 수 없음을 말하고, "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 " 라고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당시 왜적은 전선 500여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500여척을 상대로 한 12척의 대전(對戰)은 동서고금의 전사(戰史)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12척의 전선과 120여명의 군사를 거느린 공은, 왜 수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알맞은 유리한 지역인 벽파진(명량해협이 있는 곳)으로 함대를 이동하였다. 남해상에서 서해로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목인 이곳을 지킴으로써 왜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을 수 있으며 적은 수로써 많은 적선을 막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더구나 명랑해협은 길목이 좁은 데다가 조수의 흐름이 빨라 대함대가 자유로이 활동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치열한 9월 14일, 왜선 133척이 조류를 타고 명랑해협에 돌입해 왔다. 울돌목을 빠져나온 왜선들은 외양에 들어서면서 순식간에 12척의 우리 전선을 겹겹으로 포위하면서 포를 쏘아댔다.

아군과 적군의 전선들은 서로 엉키어 총포를 쏘고, 불화살을 날려 우수영 앞바다는 연기와 총성으로 뒤덮여 수라장이 되었다. 공을 비롯한 군사들이 일제히 북을 울리면서 총통과 각종 화살을 쏘며 맹공격을 가하자, 공의 함대는 조수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고, 왜적은 반대로 조수를 안고 싸워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순신은 더욱 병사를 격려하고 독전하여 퇴각하는 왜선을 공격하였다.

한편, 많은 전선을 잃고 맥없이 쫓겨 가던 왜선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울돌목의 물속쇄줄에 걸려 거의 물결과 함께 전복되고 수장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12척의 배로써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랑해전은 전세를 그 이후의 전세를 바꾸는 역할을 하였다.

(노량해전)
1598년 (무술년) 8월 17일, 토요토미가 사망하고, 그의 유언에 따라 무사철귀(無事撤歸)를 위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울산, 부산, 사천 및 순천등지로 집결하면서 일부에서는 그들의 철귀를 위장하였고 일부러 성을 쌓는 등 매우 분주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 진린과 함께 연합함대를 거느리고 왜교(倭橋)에 머무르고 있는 코니시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육군장 유정(劉綎)도 가세하여 수·륙 양면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왜군들이 견고한 진지속에 숨어서 대항함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만 왜교로부터 철귀하는 바다를 봉쇄하고 말았다. 즉 왜교 포구 외양에 위치한 장도(獐島)와 유도(柚島)에 결진하였다.

왜군들은 육지와 바닷길이 막히자 크게 당황하여 유정과 진린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뱃길을 열어 왜군의 철수를 허용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이순신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더욱더 해상방비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왜군은 남해 등지에 산재해 있는 그들의 전선을 총 동원하여 유도 등지를 가로막고 있는 연합함대를 견제 또는 격파하면서 마지막 탈출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18일 저녁, 무수한 왜선들이 노량에 집결하여 공격의 횃불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순신이 예상한 바와같이 노량과 왜교의 중간지점에 결진하고 있는 우리 연합함대를 협공하려는 것이었고, 그 수는 무려 500여척에 달하였다. 이순신은 그날 밤, 왜교의 해상봉쇄를 해제하고 유도를 출발하여 노량근해에 집결한 왜함대를 섬멸하기 위해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다음날 새벽 2시경, 공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노량에 도착하여, 여기서 전함대를 좌우로 나누어 전투태세를 갖추고 주위의 성에는 복병을 배치한 후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밤새도록 치열한 격전이 계속 되었다. 맹렬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왜적은 사기가 저하되어 관음포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칠 물길이 이미 우리 함대에 의해 막혀 있음을 알았다. 궁지에 몰린 왜선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며 반격을 전개함에 따라 또다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리의 수군과 명나라 군은 서로 도우며 혈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에 함상에서 독전고를 두드리며 지휘하던 이순신은 적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때는 1598년(무술년)11월 19일 새벽, 나이 54세였다. 유언대로 공의 큰 아들 회(회)와 조카 완(莞)은 공을 배안으로 옮기고 공 대신에 독전기를 흔들면서 전투를 계속하여 낮 12시경에 20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
왜장 코니시는 격전중에 간신히 달아나고 그때까지 도주하지 못한 50여척의 왜선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의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2) 난중일기에 대하여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끝나는 순간을 앞에 두고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전사하기까지(1592. 1. 1~1598. 11. 17), 진중에서 있었던 7년간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난중일기》는 두 가지의 전적이 있다. 하나는 이순신이 진중에서 친필로 기록한 초고본으로서 7책 205장이 전해지며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실려 있는 것인데 4권(권5~권7)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를 두고 특별히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이순신이 전사한 후, 198년이 지난 1798년(정조19년)에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찬자의 편의상 이름이 붙여진 데에서 연유한다.
《이충무공전서》는 정조대왕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규장각(奎章閣) 문신(文臣)인 윤행임(尹行恁)과 예문관(藝文館) 검서관(檢書官) 유득공(柳得恭)이 1793년부터 3년간에 걸쳐 그의 모든 행적을 모으고 기록하였으며, 시·잡저(雜著)·장계(狀啓)·난중일기·부록 등의 총 1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개인적 전장체험뿐만 아니라 전쟁전의 상황과,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알 수 있는 객관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예를 들어 임진년의 일기를 간단히 살펴보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전쟁준비에 충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국가의 제삿날에도 업무에 임하는 열정과, 진지와 병영관리에 태만하거나 소홀한 부하관리를 문책·처벌하는 엄중함도 보인다. 거북선의 제작과정과 개전초기의 전황, 4차 출전(부산포해전)까지의 전투기록 등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부산포해전 이후 8차 출전까지의 해전상황과 전적, 가족과 친지들과 관련한 개인사, 관리들의 인사조치, 정치군사에 관한 서신교환 등이 수록되어 있다.

Ⅱ. 감상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끝나던 해인 1598년까지의 일을 일기 속에 꼼꼼하면서도 간결하게 담아냈다. 그간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순신의 이미지는 ‘구국의 영웅’, ‘성웅’, ‘불패의 리더’ 였다. 이 책의 역자의 말대로 그것은 “1960년대 군사 정권이 영웅사관을 통하여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의해 어느 정도 부풀려진 것이었다.
<<난중일기>> 자체에서는 인간 이순신을 만났다. 어쩌면 너무나 나약하여 안쓰럽고, 혹은 웃음이 나기까지 하는, 그리고 나라 걱정, 가족 걱정하느라 자주 몸져 눕는, 그리고, 외골수의 따뜻한 인간 하나를 보게 되었다.

<<난중일기>> 중에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자주 나와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졌다. 그들에 대한 다른 사람의 서술을 찾아 보았다. 유성룡의 <<징비록>>이다. 거기에는 이순신이 언급한 몇몇의 인물과 그리고 이순신에 대한 서술이 있었다. <<난중일기>>에서 원균에 대한 서술은 ‘가소롭다’ ‘음흉한 원균’이다. <<징비록>>도 같은 맥락이다. <<징비록>>을 통해서는 임진왜란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알 수 있었다. 통신사의 엇갈린 보고, 선조의 피난, 각각의 주요 성을 지키고, 또 패한 장수이야기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지난달 ‘과거’ ‘역사’에 대한 테마를 다루면서 생긴 호기심이 꺼지지 않아서 역사관련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그것은 해방전후 60년의 독립운동을 다룬 것이었다. 그것은 다음주에 ‘김구’를 다루면서 보면 더욱 도움이 되겠지만, 서둘러서 몇편을 보게 되었고, 거기에서 묘하게 임진왜란과 닮은 것을 찾게 되었다. 그 공통점은 침략세력이 조선시대에는 ‘왜’라고 불리고, 후에는 일본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똑같은 이라는 사실과, 위태한 왕조와 부패한 관리가 여전히 존재했다는 것과, 위기의 상황에 충성을 다한 관리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가장 큰 피해자 백성들, 그리고, 스스로 일어선 수많은 의병들, 그리고 외부세력(명, 청)이다. 역사는 사건이 일어난 날짜와 주인공만 바뀌었을 뿐 되풀이된다는 말이 들어맞는 예이다.

사극이나 영화를 통해서 나를 흥분하게 했던, 이순신의 생애에서 몇몇 해전이 빠지고, 그리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선의 백성들의 이야기가 빠진 난중일기는 밋밋하다. 인생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몇가지 중요한 장면이 빠지면 밋밋할 거란 생각이 든다. 그 장면들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 지지 않는다. 흥분시키지 않는 몇일, 몇년이 모여서 어느 순간에 그 정점에 만들어진다.

<<난중일기>>는 ‘위인전’이 아니다.
영웅이라는 화려한 옷을 입힌 이순신이 아닌 <<난중일기>> 속의 이순신을 보면서, ‘위대한 인간’ 혹은 ‘영웅’은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시작은 이순신에서 시작했고, 비교는 일본의 장수들이었다. 조금 심한 비약하기 하지만 우리나라를 침입한 왜장과 어떻게 ‘이순신’을 비교할 수 있냐 묻겠지만, 우리에게 이순신이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듯, 많은 화려한 옷으로 가려진 인물이듯, 일본에서의 ‘가토 기요마사’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추앙받는 주요인물들이다. 민족이라는 테두리로 엮어서 우리나라의 역사로 보면 왜장들은 영웅이 아니오, 욕으로 잔뜩 수식어가 붙을수도 있는 인물들이지만, 일본에서는 반대로 될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정하는 기준이 지역성(민족)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극복해야 할까? 이것 하나면 적용하더라도 ‘구국의 영웅’이란 수식어 하나 정도는 내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위대한 인물이게 한 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다음주의 주체 ‘김구’의 백범일지를 읽을 때 쯤이면 찾아졌으면 좋겠다. 국난이라는 위기상황도 비슷하고, 일부는 가려지고 일부는 극대화 시켜서 미화되었다는 것도 비슷해서 공통점과 다른 점을 찾다보면 ‘위대한 인물’이란 어떤 사람인지 더 진지하게 탐색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Ⅲ. 내가 저자라면
1. 아쉬운 점
일기에 대하여 뭔 아쉬운 점이 있을 것인가? 자기의 마음대로 쓰는 것이 일기인데, 단지 나는 번역에 대해 그리고 엮음에 대해 아쉽다. 내가 읽은 <<난중일기>>는 ‘서해문집’에서 발간한 것으로 송찬섭님이 엮어서 옮겼다.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인 날의 일기는 빠져서, 해전에 관한 부분은 일기 속에선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 부분을 역자는 1~2페이지로 장계를 빌어서 서술하였는데, 해전에 대해 궁금증을 덜기에는 미약하다. 그 미약이 인간적인 이순신을 더욱 가까이 만나게 하는 이점이 되기도 한다. 이순신의 해전을 보고 싶다면 다른 책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대상황이나 조정의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 보고 싶다면 역시 다른 책(징비록, 왕조실록)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순신의 서정적인 싯구도 없다.
엮음에 절대적으로 아쉬운 점은 예전에 다른 문고판으로 보았을 때, 보았던 부분이 무더기로 빠져있는 것이다. 어떤 내용이 구체적으로 빠졌는지는 모르겠다. 15년도 넘게 오래된 것이라, 기억이 없다. 단지 내가 기억하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는 음력을 사용하였고, 음력에는 윤달이 있다는 것. ‘윤 8월’이런 대목이다. 이순신의 생애 조사를 하다가, 일기가 인용된 사이트를 찾았는데, 거기서는 ‘윤 8월 ○일’이라고 되어있어서 이다. ‘8월’이 있고, ‘윤 8월’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 번역본은 그렇게 몇 달이 무더기로 빠져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 기록의 힘
이순신을 매일 깨어있게 했던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하루를 돌아보고 그것에 대해 기록한 것에 대해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기록해 놓은 것에 대해서.

Ⅳ. 인용

1592.1.1 - 다만 어머니 곁을 떠나서 두 해째 남쪽에서 설을 쇠자니 슬픔이 북받쳐 온다.
* 그는 그 이전의 해에서 변방을 떠돌던 장수였다. 어머님과 같이 지내지 못하는 것이 한두해가 아닐 것인데, 그는 여전히 그것을 상기한다.

1592.2.27 - 외톨이로 떨어진 섬(개이도)이라 사방으로 적의 침임을 받을 터인데, 성과 해자가 몹시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어찌할 것인가?

1952.3.5 - 좌의정(유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다.

1952.5.1 -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하지 않았다. 과연 의로운 자들이라 할 만하다.

1952.5.3 - 본도 우수사가 수군을 끌고 오기로 함께 약속을 정하였는데, 방답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가 오는 줄 알고 좋아하였다. 그러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진의 배였다. 매우 실망하였다. 조금 뒤에 녹도 만호가 뵙겠다고 하였다.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잃는다면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곧 중대장 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쓰고는 보냈다.
* 이순신 혼자만이 아니었다. 전시에 때를 놓치지 않고, 일을 해나가게 하는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들의 말을 제대로 들을 줄 알았던 듯 하다.

[48]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

[53] 임금께서 평안도로 옮겨 가셨다는 기별을 들었다. 놀라움과 분함이 극도에 달하여 하루 내내 서로 붙들고 오장이 찢어지는 듯 통곡하였다. - 1592.5.10. : 옥포파왜병장

1592.9.2. 녹도 만호 정운은 변란이 생긴 뒤로 나를 위한 마음이 솟구쳐서 적과 함게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세 번 싸움에 매번 앞장섰다. 부산 싸움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이 쏜 총알에 이마를 뚫려 전사하였다. 지극히 슬프고 가슴 아팠다. 여러 장수 중에서 따로 차사원을 정하여 각별히 정운의 초상 치르는 일을 맡아 보살피도록 하였다. (부산파왜병장 1592.9.17)
* 이순신 그의 말대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솟구쳐서 왜군을 무찌르는 데 앞장선 녹도 만호가 죽었다. 위대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결국은 전란을 다 수숩할 만큼 (운좋게) 오랜 기간 살아남아야 하는가라는 헛된 질문을 해본다. 변란 이후의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 의 기억 속에 녹도 만호 정운은 없었다. 그의 삶과 죽음은 기억에 없다.

1593.2.10. - 두 번이나 꾀어냈으나, 우리 군대에 지레 겁을 먹고는 나올 듯하다가도 들어가 버리므로 끝내 잡아 없애지 못하였다. 매우 분하였다.!

1593.2.14. - 큰 적을 무찌르려 작전을 약속하는 이때에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 할말이 없다. 분통을 이길 길이 없었다!

1593.2.22. -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좌초에) 걸려 적들에게 공격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죄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1593.2.28. - 경상수사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탐색선 두 척이 섬사이를 들락날락 하였다. 그 하는 꼴이 황당하여 잡아다가 경상 수사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수사가 크게 화를 내었다. 그 본래 뜻이 군관으로 하여금 고기잡이 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 이런 황당한 일이.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다니 그일을 할만한 사람들은 우리나라 백성이 아닌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탐색선이 탐색을 하려는 것인가 수급을 취해 전승의 공적을 세우려 하는가? 왜놈들을 공격하나 백성을 공격하나?

1593.5.16. - 마음이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1593.7.19. - 저녁에 광양 현감이 진주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명부를 보내왔다.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1593.8.2. - 방답 첨사 이순신이 집에 가서 부모님을 간절히 뵙기를 원한다고 했으니, 장수들은 아직 나가지 못한다고 답하였다.
* 나라일을 할때는 집에 가족들을 돌보기가 쉽지 않다.

1594.1.11. - 어머니를 뵈러 들어갔더니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서 일어나셨는데, 기운이 가물가물하시고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했다. 하릴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1594.1.12. -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선창에 되돌아오니 몸이 불편하여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594.2.2. 원식이 남해 현령에게 쇠붙이를 바치고 면천공문을 한 장 대신 받아갔다.
* 신분제도가 무너지고 있다.

1594.2.9. 또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인데, 앞으로 이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물었다.

1594.2.16.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 이순신은 현실의 벽 앞에서 고뇌하고 있다.

1594.5.9.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 하였다.

1594.7.12. 순변사에게 유정승(유성룡)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유 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 유성룡이 죽지 않았을 것을 알면서도 의심이 이는 이 나약한 마음.

1595.3.17. 우후가 급히 보고하기를 수사 이계훈이 실수로 불을 내고는 자신은 물에 빠져 자살하고, 군관과 사공 모두 1백 40여 명이 타 죽었다고 하였다. 놀랍고도 놀라웠다.
* 믿기지 않는다. 배에 불이 났다면 옆에 물이 있을 터인데 왜 불을 진압하지 못했나? 놀랍고도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수군이다. 물에 빠져 죽지 왜 타죽나? 놀랍고도 놀라울 뿐이다. 일기를 읽다보면 뭐가 이렇게 이상한 일이 자꾸 생기는 지.

1595.5.29. 사직의 위엄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새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1596.1.23.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 더 주었다.

1596.7.10.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
* 그는 꿈을 자주 일기에 적고 있다. 그는 근심이 많은 사람인 듯 하다. 그리고, 점을 자주 친다.

1596.8.12. - 하루 내내 노를 빨리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1596.8.13. 어머니를 모시고 옆에 앉아 아침 진지를 올리니 대단히 즐거워하시는 빛이었다. 늦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오후 6시쯤 작은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재촉하였다.

1597.4.13. 조금 있자니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4.11일 돌아가신 듯 하다. 그날은 번잡스런 꿈을 꾸었다.

1597.4.16.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 그는 이때부터 죽기를 각오했던 것일까?

1597.7.21. 점심을 먹은 뒤 노량에 이르렀더니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명이 와서 통곡하였다. 또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이 시절은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절이었나 보다.

1597.8.21.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 했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라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 말도 안돼.

1597.9.9. 9일 중양절 1년 가운데 손꼽히는 명절이다. 나는 비록 상복을 입은 몸이지만 여러 장수들과 군졸들을 먹이지 않을 수 없었다.

1597.9.11.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았다. 혼자 배 위에 앉아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무척 언짢아하였다.

1597.9.15.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1597.9.16.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도리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1597.9.14.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중략)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1597.10.16.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 째 되는 날인데도 나는 마음 놓고 울어 보지도 못하였다.
* 아무리 많이 운다 한들 그 슬픔이 풀리겠는가.

1597.10.21. 새벽 2시쯤 비가 오다 눈이 오다 하였다. 바람이 몹시 차가워 배에 탄 사람들이 추워서 얼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1597.12.5. 도원수의 군관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이번 선전관 편에,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좇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걱정스럽게 여긴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랏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 용감하려면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떨어진 자로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다. 예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는 것처럼 꼭 원칙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서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좇도록 하라.”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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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6.12 13:16:26 *.227.22.57
나라 걱정, 가족 걱정하느라 앓아 누운 건지... 혹은 잦은 술자리로 더 아팠던 것이나 아닌지...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 했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라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 이 부분은 읽을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네요.

난중일기를 넘어 징비록까지 읽어낸 노력과 정성에 박수를!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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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13 06:02:47 *.72.153.12
난 여전히 한쪽 눈만 뜨고, 한쪽은 눈은 감은 채 세상을 보나봐. 그리고 그게 진실이길 바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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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7.13 20:17:19 *.72.153.12
2007.7.13. 오탈자가 많아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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