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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2일 09시 35분 등록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일기보다 좋은 수단이 있을까. 임진년을 그 시작으로 무술년에 이르는 7년간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난중일기야 말로 '이순신'를 들여다 보는 가장 좋은 창임에 틀림없다. 그런 난중일기를 읽는 마당에 그에 앞서 '저자 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마치 선문답과도 같아서 좀처럼 그 의미 속으로 파고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다른 책의 저자들처럼 그를 들여다 보는 것이 왠지 망설여졌다. 정작 '이순신' 본인은 전쟁 중에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 기록에 별다른 이름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의해 붙여진 '난중일기'라는 제목에 갇혀 한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인터넷에 '이순신'이라는 검색어를 '툭'하고 던져 넣으니, 의례히 그렇듯이 셀 수도 없이 많은 '자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 찾아낸 몇몇 사이트들은 저자 조사를 위해 별다른 추가 검색이 필요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여러 사이트 중에서도 '성웅 이순신 사이트(http://www.e-sunshin.com)'는 그 규모와 내용면에서 단연 압권이었다. 사이트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각종 관련 자료들이 놀랍도록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 사이트는 '이순신의 생애'에서부터 '이순신 탐구', '문화유산', '축제관광' 그리고 '학습관'과 '멀티미디어관'까지 대단히 짜임새 있는 화려한 외관 속에 방대한 자료들을 가득 담고 있었다. 먼저 '이순신의 생애'를 살펴보니 '이순신 소개', '일대기', '주변인물', '임진왜란', '거북선' 그리고 '난중일기'의 여섯 가지 상세 분류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각각의 항목들이 담고 있는 자료들은 상세하고 깊이가 있었다. '난중일기' 항목에서는 난중일기의 전체 내용을 원본과 함께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추가로 제공되는 어린이 난중일기 부분까지 확인하고 보니 사이트의 규모에서 놀란 마음이 감탄으로 토해져 나왔다. 그 외의 메뉴들에는 이순신 개인에 대한 자료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 연구자료들까지 꼼꼼히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로 제공되는 아산 현충사의 모습은 얼마 전에 그곳을 방문했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한 인물이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시간을 나만의 언어로 정리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짤막한 몇 줄의 글로 이 방대한 자료를 압축해낼 재간이 없었다. '일상 속의 저자, 경력 속의 저자를 통해 그를 잠시 가늠'하는 것이 이번에는 유효하지 않을 듯 싶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에, 상세한 내용을 담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요약된 그의 생애는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결론에 닿았다. 그래서 이전까지 해오던 방식의 '저자에 대하여'를 이번에만은 생략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저자에 대한 표면적인 정보는 위에 언급한 사이트의 넘치는 자료로 대신하고 '난중일기'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로 나머지 부분을 조율하는 것이 이번 주의 전략인 셈이다.

자! 이렇게 얼렁뚱땅 '저자에 대하여'를 마감해도 괜찮은 것일까?

'저자에 대해여'를 대충 마무리하려는 얄팍한 마음이 스스로도 부끄러워 뒷머리를 긁고 있는데 한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역사 자료에 대한 보존'이 그다지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우리 현실 속에 유독 충무공 이순신의 사이트만이 이토록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민족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조차도 제대로 구성된 공식 홈페이지가 없는 판에 대규모의 공식 사이트를 가지고 수많은 현대인들의 가슴 속에 영웅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성웅' 이순신의 인기 비결을 단지 개인의 삶과 업적 속에서만 찾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연구원들에게 주어진 '역사'라는 주제의 끝자락에 걸쳤던 탓인지 '필요에 의해 다듬어진 역사'를 조금이나마 확인해봐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금은 불편한, 그렇지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법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순신 영웅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이순신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다는 '영웅 만들기'에 대한 지적은 사실 새삼스러운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막연히 품고 있던 의심을 자료로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이순신을 민족의 영웅이자 정신적인 상징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구한말을 거쳐 해방 직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본격적인 '이순신 영웅 만들기'가 이루어 진 것은 박정희 전대통령 정권기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4월 27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전신 17.4m(좌대 포함)의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것은 영웅 만들기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박정희는 18년 집권 기간 동안 14번에 걸쳐 '이 충무공 탄신일' 행사에 참석했으며 1965년 한ㆍ일 협정이 '굴욕 외교'라는 거센 반대에 직면한 직후인 1966년부터 1977년까지 4차에 걸쳐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시도했다. 심지어 박정희 정권은 이순신의 탄생일인 4월 28일을 국경일로 법제화하고자 했으나 자문기관 등의 조심스러운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4년 출간된 '대중독재의 영웅 만들기(권형진, 이종훈 엮음, 휴머니스트)'는 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영웅 만들기'가 단지 이순신의 이미지를 박정희에게 덮어 씌우려고만 했던 것이 아니라 대중을 근대화 수행의 주체로 만들어내기 위한 일련의 장치 중 하나였다고 이야기한다.
    
이순신 영웅 만들기를 분석한 이상록 한양대 강사(한국근현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순신 영웅 만들기는 국가가 대중들을 근대화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갈 근대적 주체로 만들어내기 위한 일련의 장치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체제의 이순신 영웅 만들기는 대중들이 그저 멀찍이서 이순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대중이 이순신의 정신을 직접 본받아 그 영웅성을 체제의 요구에 맞게 대중 스스로 체현해나가도록 만드는 데 더 치중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충무공과 우리를 연결시켜야 합니다'라고 충무공과 대중의 접속을 강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은 정말 집권세력의 의도에 따라 왜곡되고 부풀려진 것일까? 혹은 아닐까? 몇 주 전 아산 현충사의 유물관에서 전율을 느꼈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한데, 나는 누군가의 장단에 춤을 춘 셈인가? 정말 그런가?

남의 이야기를 실컷 들어보았으니 이제 이순신이 직접 털어놓는 생생한 증언을 통해 진실을 조율할 차례가 되었다.




사도 첨사(김완)에게도 만날 일로 공문을 보냈는데, 혼자서 수색하고 검토했다고 했다. 또 반나절 동안에 내나로도, 외나로도와 대평도, 소평도를 모두 수색, 검토하고 그날로 포구에 돌아왔다고 하니, 이 일은 너무도 거짓된 말이다. 이를 조사하려는 일로 흥양현감과 사도첨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p. 28)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사의 편지에 '쓰시마 도주[종의지]의 문서에, '일찍이 배 한 척을 내어 보냈는데, 만약 귀국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바람에 부서진 것이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매우 음흉하고도 사악하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다 보이는 바다인데 그럴 리가 만무하며, 말을 이렇게 꾸며대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p. 29)

29일_무술_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은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 와서 함께 상의했다. 왜적이 정박한 곳을 물으니, "왜적들은 지금 사천선창에 있다"고 한다. 바로 그곳에 가보았더니 왜인들은 이미 뭍으로 올라가서 산봉우리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산봉우리 밑에 줄지어 매어 놓았는데, 항전하는 태세가 재빠르고 견고했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며 화살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활꾼과 격군 중에서 탄환을 맞은 사람이 또한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태우고 물러나왔다. (p. 38)

아침 식사 후 삼도의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 수사(원균)는 병으로 오지 않고, 전라좌우도의 장수들만이 모여 약속했다. 다만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니, 그 입에 담지 못할 바를 어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 어란포만호 정담수와 남도포만호 강응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술을 함부로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욱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p. 55)

발포의 2선과 가리포의 2선이 명령도 안했는데 돌입하다가 얕은 곳에서 [암초에] 걸려 적에게 습격당한 것은 참으로 통분하여 가슴이찢어질 것만 같다. 얼마후 진도의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내었다. Rㅕㅇ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할 일이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원균 때문이다. (p. 59)

요행과 만일이란 실로 병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p. 75)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p. 84)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p. 102)

적의 꾀란 무척 헤아리기 어렵다. (p. 104)

"실은 왜적들이 아니고, 영남의 피난민들이 왜군차림을 가장하고 광양으로 마구 들어가서 여염집을 분탕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왜적이 아니라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p. 113)

나라 일이 다급한 때
누가 곽리의 충성을 바치리오.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 이루려함인데
회복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달려있네.
관산의 달 아래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슬퍼지네.
신하들이여! 오늘 이후에 그래도 다시 동과 서로 다투겠는가 (p. 134)

사직의 존엄한 신령에 힘입어 겨우 작은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초월하여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지닌 몸이지만 세운 공은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하여 입으로는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p. 138)

수사 원균, 공연수, 이극성이 서로 좋아하던 여자들을 모두 다 관계했다고 한다. (p. 145)

군수 이광악이 술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도 왔다. 임치첨사[홍견]도 같이 왔다. 곤양군수가 몹시 취해서 미친 소리를 마구 해대니 우습다. 나도 잠깐 취했다. (p. 173)

면의 병세는 중하다고 하였다. 몹시도 애타지만 어찌하랴. 영의정 유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만들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 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더욱 심해져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p. 190)

아침에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보냈다. (중간 생략)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구나. (p. 204)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설이다. (p. 226)

정월 초1일_갑술_맑음.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p. 239)

29일_신축_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부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p. 264)

28일_을미_맑음. 늦게 나가 공무를 보았다. 정오에 순찰사가 와서 활을 쏘고 같이 이야기했다. 순찰사가 나와 함께 활쏘기를 겨루다가 7푼을 졌는데, 섭섭한 기색이 없지 않았다. 우스웠다. 군관 3명도 다 졌다. 밤이 든 후에 취하여 돌아갔다. 우스웠다. (p. 312)

12일_병자_맑음.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10시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p. 369)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 차고 깊은 시름할 때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
정유년 중추 이순신 읊다 (p. 382)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적었다.

16일_병자_궂은비가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기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p. 388)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최호] 및 여러 장수들이 많은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p. 426)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장의 잘못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안위]과 새벽 2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p. 427)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를 한 뒤에 삼가 받은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 길을 떠나 바로 두치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p. 431)

21일_기묘_맑음. 날이 채 새기도 전에 곽란이 나서 심하게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셨더니 얼마 뒤 인사불성이 되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앉아서 밤을 새웠다. (p. 435)

16일_갑진_맑음.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무려 2백여척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백 30여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고 했다. 그러고서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1마장쯤 물러나 있었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있어 묘연했다.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차 다가와서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 중군의 영하기[군령내리는 기]와 초요기[싸움터에서 대장이 부하 장수를 부르고 지휘할 때 사용하던 기]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왔다.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곧장 적진에 들어가 교전하려 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기에 안위의 격군 7, 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도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 대고 내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어 적선 2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다. 우리를 에워쌓던 적선 30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p. 441)

대저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p. 444)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이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p. 470)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p. 470)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진[전쟁터]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고 하였다. 전진에서 용감하다는 것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p. 483)

"오늘은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원컨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 (p. 502)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 (p. 503)




지난 5월에 다시 찾은 아산 현충사의 모습은 여전히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전날 내린 비 덕분인지 하늘은 맑았고, 그 아래 넓게 자리잡은 현충사는 투명한 기운 사이로 그 모습이 선명했다. 햇살은 머리를 따끈하게 간질였고 그 사이로 바람은 향긋했다. 인물의 달, 6월의 첫 주인공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어서 과제에 쫓기는 바쁜 마음을 다독이며 찾은 현충사에서 나는 뭔가를 느껴야 한다는 우스운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어디 느낌이 부른다고 오던가? 눈물이 맘대로 터져 주던가?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긴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나니 마음이 하늘처럼 개었다.

아이의 유모차를 밀며 넓은 현충사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시간은 이마에 맺히는 땀과는 달리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옛 본전의 모습과 새롭게 지어진 본전의 모습을 함께 살피는 재미도 쏠쏠했고, 넓지만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녹음 속을 유유히 걷는 것도 즐거웠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번 현충사 방문의 백미는 유물관이었다. 따끔한 햇볕에서 숨어든 유물관의 서늘한 기운은 상쾌했다. 조금은 비장한 마음으로 관람객을 위해 준비된 동선을 따라 전시된 이야기들의 사이를 흐르다가 한 곳에서 발이 딱 굳었다. 난중일기 원본이 전시된 유리상자 앞에서 내 심장은 옆 사람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세차게 뛰고 있었다.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낡은 종이에서 향이 풍기는 것도 같아서 한참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보채지 않았더라면 한참을 더 그렇게 가슴 뛰는 멍한 기운 속에 서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난중일기를 등지고 유물관을 빠져 나오니 짧은 시간이지만 마치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듯 했다.


(촬영금지라는 안내문 옆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찍었다. 왜 그랬을까?)

몇 년 전 부모님과 함께 찾았던 현충사의 첫인상은 사실 좀 뜻밖이었다. 많은 문화재가 제대로 보호되지 못한 상태로 방치되는 현실 속에서 그저 큼직하고 깨끗한 절 같은 모습을 기대했던 나의 눈 앞에 펼쳐진 현충사의 규모와 위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보는데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릴 정도로 넓었고, 축구장을 연상시킬 만큼 잘 손질된 잔디와 멋들어진 조경은 너무 잘 정돈되어 있어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규모로 가치를 논하는 것도 우습거니와 가치로 감동을 계량할 수도 없지만, 규모만 놓고 본다면 현충사는 다른 어떤 문화재와 견주어도 상대를 압도할 만큼 웅장했다. 그런데 그 점이 수상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크고 대단한 모습의 장소를 일구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나를 사로잡았다. 왕이 살았던 도성의 궁궐보다도 크고 대단한 모습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유적지를 땅값이 싸서라고 폄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강북의 대형 마트들이 강남의 그것들보다 훨씬 넓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에 빗대어 해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화 유적지라는 느낌을 넘어 야릇한 종교적 성지의 느낌마저 풍기는 현충사의 분위기는 이번 저자 조사를 통해서 확인한 '이순신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는 의혹과 나름의 댓구를 이루는 듯 했다.

난중일기를 더듬어 나가는 일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성웅' 이순신과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는 '인간' 이순신의 괴리를 확인해나가는 여정이었다. 또 화려하게 꾸며진 현충사의 안내 표지판에서 정작 이순신의 시신은 다른 곳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조금은 기운 빠지는 경험이었다.

갑옷에 투구까지 쓰고 커다란 칼을 공중으로 높게 세운 채 군사들을 독려하는 장군의 모습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우리와 똑같이 아프고 번민하는 인간 이순신이 난중일기 안에 있었다. 그는 매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고, 꾸준히 활을 쏘았다. 자주 아팠고, 그로 인해 힘들어했다. 때론 누군가를 향한 모진 마음을 아낌없이 털어놓았고 잘못에 대해서 엄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잘못한 이를 내치는 대신 술자리로 불러들였고 함께 취했다.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p. 470)

그는 우리네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길 떠난 아들의 뒤 켠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달래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전장에서도 내내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쏟고, 그 어머니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여린 심성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막내 아들의 죽음으로 가슴 속에 피를 흘렸을 그 순간에도 자신의 맡은 일을 놓을 수 없었던 불쌍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난중일기 속에는 그동안 우리가 '영웅' 이순신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하이라이트라고 주저 없이 뽑아 올리던 명장면들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난리가 터진 임진년에 쓰기 시작하여 적탄에 목숨을 잃기까지 7년의 전장 기록을 담고 있으니 전쟁에 앞서 그가 겪었던 인생의 굴곡은 난중일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전승기록의 해전에 대해서도 별다르게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을 모함한 사람들과 그 사이를 헤쳐나가는 정치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렇듯 난중일기는 박진감 넘치는 전쟁이야기가 아니고 감동적인 인생역적의 드라마도 아니다.

난중일기는 빛나는 역사적 순간들의 사이를 가득 채웠을 '인간' 이순신의 고된 일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가슴 아픈 기록이다. 조금은 지루하고 때로는 답답한 하루하루의 퇴적물이다. 하지만 그의 지난한 일상은 피어야 할 순간이 되었을 때 그를 가장 맹렬히 타오를 수 있도록 만든 힘의 원천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꾸준히 살피고 모색했고 준비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을 태우고 세상을 밝혔다.

'이순신 영웅 만들기'에 대한 혐의를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아직 온전히 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채로 끙끙대며 '난중일기'를 통과하고 보니 영웅의 이야기 속에서 그의 일상은 분리해낼 수 없는 한 부분임을 느끼게 된다. 이 둘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완벽한 짝을 이룬다. 결국 왜곡과 활용의 경계를 해석하는 문제는 인물의 달 6월이기에 조금 고삐를 늦추어도 될 듯 싶다. 이순신의 시신은 현충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갑옷을 벗고 하얀 선비의 옷을 입은 이순신에게 술잔을 기울이며 던질 질문을 준비해야겠다.



저자에 대한 조사와 본문을 읽는 것은 서로의 행간을 보충하고 조율하는 작업이다. 저자에 대한 이해가 빠진 책 읽기는 그래서 반쪽 짜리일 수 밖에 없다. 연구원을 시작하고 읽은 다른 책들에서는 이런 보충과 조율을 비교적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었고 서로의 빈 공간을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난중일기'는 앞선 책들과는 경우가 좀 달랐다. 극도로 흥분한 목소리로 '영웅' 이순신을 연호하는 환호의 인파 속에서 담담한 목소리의 난중일기를 읊어내는 과정은 내내 혼란스러웠고 가끔은 힘겨웠다. 평범한 영웅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분명 색다른 즐거움이었지만 한편으론 '영웅' 이순신에 익숙한 스스로를 달래고 '영웅'을 놓아 보내는 진혼곡과도 같은 두려움이기도 했다.

이전의 책들을 위한 저자 조사에서는 저자의 다른 저서들을 참조할 수 있었고 객관적인 타인의 음성에서 일말의 비슷한 톤을 찾아낼 수 있었다면 '난중일기'와 '불멸의 이순신' 사이에는 쉽사리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존재했다. 자신이 담담히 써내려 간 일기 속의 '인간' 이순신과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하는 '영웅' 이순신의 이질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난중일기 완역본은 완벽에 가까운 반쪽 짜리 책이다. 노승석씨는 8500자를 새롭게 해석하고 100여곳에서 150자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고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자랑하지만 그것은 독자가 '인간' 이순신을 좀더 깊이 가슴으로 이해하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독자들을 '난중일기' 속으로 한걸음 더 불러들이는 것은 비어있는 반쪽에 대한 독자의 욕구를 얼마나 적절히 채울 것인가 하는 문제일 듯 싶다. '인간' 이순신과 '영웅' 이순신의 조율. 그것이 독자를 즐겁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독자가 꼭 즐거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건 작가의 선택이다. 그러나 '독자가 없는 작가는 무주공산의 달'이라는 초아선생님의 충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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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6.12 14:57:07 *.99.241.60
이순신 영웅 만들기에 대한 부분은 나도 어렵더라구.

나라가 어려우면 무인(군인)이 나라를 구한다는 사실로
5.16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는 말하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읽고 난 지금에는
이런 것이야말로 오히려 장군을 더 폄하하는것이 아닌가.
충무공과 정치는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것 같다.

불멸의 이순신과 난중일기의 차이에 대하여는
그만큼 우리가 단순화된 시대에 살고 있고,
단절된 역사를, 그것도 혜안이 없는 고리타분한 과거로만
느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현재 청산하지 못한 역사와 일본의 문제도
마음으로 역사를 느끼는 것이 아닌 구호로만 끝이나고
다시 반복을 되풀이 해서 그런게 아닌가 하는생각이 들더라구,

문제는 계속 진행형이고 그에 대한 답을 계속 찾아나가야 하겠지.
잘 읽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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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13 23:43:37 *.70.72.121
나, 찾았어. 375쪽이야.
병신년 9월 12일- 을사 -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 저물 무렵 무장(茂長)[전북 고창]에 이르러 여진(女眞)과 잤다.
여진(女眞): 계집종의 이름 조선시대의 노비에 관계된 자료중 신최흥(辛最興)이 관에 올린 소지(所志)를 보면. 여진이 노비의 이름으로 쓰인 예를 볼 수 있다. "右謹言以奴婢事 ...而二分 介也之 女眞等 俱是可外德之所生... "

14일 -정미- 맑음. 하루를 더 묶었다. 여진과 함께 잤다.
15일 -무신- 맑음. 여진과 함께 잤다.

일기에다 적을 정도면 뭔가 의미가 있었을까? 사랑했다는 이야기인가?
다시 만나고 싶다는 걸까? 황진이 만큼 이뻤다는 걸까? ... 女眞이었을까 眞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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