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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2일 14시 25분 등록
1.작가에 대하여

하늘이 내린 사람.
난중일기를 읽고 충무공 이순신(이하 충무공)에 대하여 이 한마디로 밖에 설명하지 못했다. 54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실제로 관리로 있었던 것은 32세 때부터 22년 동안이고, 부친상으로 시묘살이 3년을 제외하고 나면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 두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을 보면 극과 극의 개인사이다. 또한 조선은 건국이후 200여년 만에 맞는 최대의 위기이자 시련의 시기로 충무공이 없는 조선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한 절대 절명의 순간에도 기록으로 남기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최근에 회사의 경영이나 조직의 리더십의 덕목에 충무공을 적용한다는 것은 옛 것을 본받아 오늘을 사는 지혜로 삼는다고는 하지만, 충무공에 대한 배움을 공고히 한 후에 심오한 뜻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고 본다.

가. 호칭에 대하여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잘못된 역사와 왜곡된 사실을 배웠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선 충무공에 대한 호칭에서부터 턱 하니 걸렸다.

“지난 4세기 동안을 돌이켜 볼 때, 이순신은 한국역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영웅적인 인물이다. 그는 전사하기 전에 이미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장수로서 지금 같으면 장관급의 계급에 올라 있었던 바, 현재 그를 장군이나 제독 정도로 낮추어 호칭함은 큰 결례라고 하겠다. 사후에는 정1품으로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의정으로 추서 되었으며, 197년만에 다시 조정에서 그의 역사적인 자료를 수집 집대성하여 「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 그의 시호인 충무공으로 호칭을 통일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충무공으로 시호(諡號)를 받은 공신이 이순신 외에도 6명이나 되는 바, 충무공이라 부를 때는 반드시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완전호칭을 써야 마땅할 것이다.” (국가안보 위기와 지도자의 사명, 李善浩 서문에서 발췌)

그냥 이순신 장군이라고 불렀던 내 자신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선비정신

역사가에 의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 개인의 일기를 통해본 충무공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을 많이 일깨워주었다. 역사적 사실이나 한 단어의 객관성에 국한되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새롭게 들어왔다. 가장 큰 틀이 깨진 것은 선비정신이었다. 공자의 가르침에 따른 충과 효에 대한 기본정신으로 이것이 밖으로 행하여지는 예(禮)를 통하여 다양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나라와 왕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그리고 애민정신 등이 그것이다.

구본형 선생님의 코리아니티 경영에서 나타난 선비의 정신이 다시금 떠올랐다.

조선은 명분의 사회였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 이익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때문에 선비 역시 명분과 개인의 이익을 합치 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득이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을 때는 명분을 따른 것이 선비로서 사는 길이었다. 선비들에게 가장 어려운 마지막 지향점은 중용이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균형과 조화야말로 선비들이 도달하고 싶어한 중정의 상태였다. (중략) 선비의 멋은 호연지기로 불리는 이 정신적 여유와 풍류에 있다. 선비들은 책을 읽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붓글씨를 쓰고, 문집을 내며 자연을 좇아 생활의 멋을 즐겼다. 이것이 일상의 생활이었으니 가난을 즐길 수 있었고, 명분을 잃지 않아 자긍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늘은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최대의 수치로 알았다. (133p)


선비정신으로 들여다 보니 전쟁의 와중에서도 글을 쓰고 시를 짓는 충무공의 모습과 자연을 좋아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제대로 상상이 된다.


다. 충무공의 일생

충무공은 1545년 서울 마르내골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처음 도전한 것이 28세때, 보통 20세 전후에 과거를 보았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나이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 문과에 시험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무과로 전공을 바꾼 연유가 무엇일까? 아마 그 당시 반세기에 걸친 4번의 사화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성웅 이순신 홈페이지의 자료를 보면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돼 고난을 겪었다. 이로 인해서 아버지 이정(李貞)은 벼슬에 뜻이 없이 평민으로 지냈다. 때문에 집안 형편은 더욱 기울어졌다. 피바람의 역사에서 문인 보다는 무인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장인인 변수림이 충무공의 강인함과 재주를 한눈에 알아보고 사위로 삼았으며 장인의 조언으로 과거(무과)를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28살에 과거에 낙방을 하고, 다시 4년 후인 1576년에 식년무과에 4등의 성적으로 합격한다.

임진왜란이 발생하던 1592년부터 충무공의 그간의 힘겨웠던 노력이 전쟁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전투에 대한 기록은 혼란스러웠던 점이 있었으나, 크게 8대 해전을 통하여 일본군의 보급을 끊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보호하면서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화해의 실패로 다시 정유재란이 있었지만, 충무공의 노량해전을 끝으로 지리한 7년 전쟁은 끝이 난다. 충무공도 노량해전에 최후를 맞는다.

두 번의 백의종군이 말해주듯이 충무공의 관직의 길은 험난하였다. 42세 이순신이 합경도 의 조산보만호(종 4품)을 보직되었고,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얼마 후 녹돈도는 여진족의 침입을 받게 되고, 이순신의 원군요청을 무시한 북병사 이일의 모함으로 백의종군을 명한다. 두 번째 백의종군은 정유재란 때(1597년)이다. 일본군의 간계와 원균의 모함으로 다시 파직되고 백의종군하게 된다. 관리로서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하는 상황은 끔찍한 기억이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이며, 그동안 쌓아왔던 탑이 한순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충무공은 매일 아픈 몸을 이끌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육신의 아픔은 늙어가는 충무공의 정신을 계속 붙잡고 있을 테지만, 쉴 줄을 모르고 끊임없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에만 전념을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하고 전쟁이 계속 이어지면서 매일 활을 쏘고 부하들과 계획을 논의하고 의견을 듣는다. 역경을 새로운 아이디어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극복한다. 충무공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다. 그는 자유인이었으며, 혁명가였으며, 위대한 실천가였다. 6월에 만나는 첫 사람이 너무나 마음에 들고 크게 다가왔다.


2. 나에게 다가온 책


가. 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충무공의 모습은 너무나 아프고 슬픈 느낌만 들었다. 지금의 내 나나의 충무공은 녹둔도의 둔전관으로 매일 여진의 정세를 정찰하고, 개간 일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강인한 정신력 뒤에 숨어있는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번뇌를 엿볼 수 있었으며,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에 흠뻑 빠져 나오질 못했다. 그중 하나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지극한 효성이었다. 모친이 계신 아산에 군관을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고, 이후에는 한산도 인근으로 옮겨와 모셨다.

정월 초1일 -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라 일을 행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다. (239p)

4월 19일_기묘_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서 하직을 아뢰고 길을 떠났다.(389p)


두 번째로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멀리 전장에 있으면서도 아들에 대한 편지가 그러한 커다란 아버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막내 면의 죽음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편지를 전하는데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을 보니 통곡(慟哭) 두 글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고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 (469p)


또 전장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원균의 어이없고 낭패한 일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기는 하지만,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언제나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늘 부하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현장에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한다. 특히 두 번째 백의종군에서 명량대첩까지 한달여에 걸쳐 민심을 무마하고 다시 싸울 재기의 기회를 노려 성공한 것이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나. 난중일기에 대하여

왜 힘든 일기를 썼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육지에서 싸움을 하는 육군과 달리 해군은 배란 한정된 공간 내에서 싸워야 하고 기상상태나 보급품 등 챙겨야 될 것도 많고 격군들에 의하여 배를 움직이는 것 등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몸도 불편하였을 텐데 매일 일기를 쓴 이유를 무엇일까? 그것도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임진년부터 쓰기 시작하였을까?
오늘의 역사는 아프고 슬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큰 사건 밖에 남질 않는다. 큰 사건을 사건의 모양만 클 뿐,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 껍데기 일뿐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한테 쉽게 잊혀지고 없어질 껍데기가 아니라 본질을 남겨놓고 싶다. 펄펄 뛰는 역사, 참혹한 수탈의 역사와 그것을 극복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러면서 아픈 몸을 부여잡고 일기를 쓰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어이없게도 200여년 뒤에 다시 병자호란에 다시 국토가 유린당했고, 최고의 전략을 자랑하던 막강 조선 해군은 그 뒤로 슬슬 빛을 잃기 시작한다. 오히려 엔진과 철로 건조된 전함에서 위용을 발휘하는 포격전이 판옥선에서 멈추었다. 조선 후기 미국이나 영국 등의 나르는 막강한 해군력을 앞세워 개항을 무력으로 추진하였다. 충무공은 혹시 이러한 일을 예건하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일기 덕분에 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당신을 알 수 있다. 나라를 사랑하고 몸소 실천한 것을..

다. 역경을 이기는 힘.

역경을 이기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특히 정유재란 때인 1597년 두 번째 백의종군은 참 힘들었을 것이다. 난중일기 곳곳에서 허탈함이 묻어 나온다.

5월 25일 을묘_ 비가 내렸다.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다가 비 때문에 가지 않고 혼자 시골집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슬프고 그리운 생각을 어찌하랴 (403p)


무엇이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였을까? 임진년부터 싸워온 5년 동안의 힘든 노력이 화친조약에 의하여 무너졌고, 평화협상이 깨지고 명나라의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투의 최일선에서 싸워온 그를 집권층에서는 거부하였고, 두려워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의지하던 어머님마져 돌아가시었고, 임종도 못하였다. 천하의 죄인이었고, 불효자였다. 고문으로 처참하게 망가진 몸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내 나라와 내 백성들을 사랑하던 마음이었다. 다시 왜적의 말발굽에 유린되어서는 아니된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 다시 현장으로 간다. 원균의 독선과 아집으로 전멸한 처참한 현장으로 돌아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다. 얼룩지고 찢어진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군사들을 모은다.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전략을 세운다. 부하들을 독려한다. 끝내 다시 승리한다.

라. 내가 배우고 실천해야 될 부분

내가 배울 것들이 많지만 가장 먼저 적용해야 할 부분은 관례를 답습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공무원인 나로서 부끄러운 부분들이 많았다. 전례와 선례를 따르고 애매한 규정으로 내가 편하게 일을 한 부분이 많았다.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면서 병기고를 점검하러 갔을 때 가장 많이 들었다는 말이 역대 좌수사도 병기를 점검하는 등의 업무는 하지 않았고, 그렇게 자리를 채우다 갔다는 말을 해서 충무공의 대노와 함께 다시 전함, 병기들이 철저하게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난중일기에서 보면 현장 감사를 통하여 잘못된 일이 있을 경우 벌을 주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추진하는 적극성이다. 그동안 지나온 17년의 시간만 생각하고 느릿느릿 여유있게 가서는 안 된다. 충무공은 한번 한번의 전투가 죽음과 연관되어 있고, 조선의 미래가 달려있는 한판이었다. 그런 긴장감을 유지하고 늘 나를 알고 적을 아는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이 밖에도 청렴과 결백, 인사청탁 등 어찌보면 나라 녹을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빠지기 쉬운 함정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에게 충무공은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3.내마음에 들어온 글귀

<들어가면서>

(4p) 그가 강인한 정신가 기개로 무장한 장군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가 자연에 대한 낭만도 느낄 줄 알았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을 느낀다. 그는 유묵에, 어느 날 신선의 별장에 이르렀을 때 “매번 서호 월악산의 구름과 수죽의 경치를 그리워하여 마음이 이에 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고 한 사실에서 그런 감성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5p) 한편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자주 눈에 띄는 대목이 있는데, 그 내용들이 가슴에 종종 간절하게 와 닿는다. 전쟁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수시로 사자를 보내어 어머님의 안부를 대신 묻게 하고 또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의 글로써 자주 적은 것이다.

<임진년(1592년>

(20p) 아산 어머니께 문안드리려고 나장 2명을 보냈다

(23p) 여러 가지 전쟁준비에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었으며,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어 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 가장 못한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그 죄상을 조사하지 못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23p)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은 쓸만한 하나도 없어 걱정했으나 전투선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기쁘다

(25p)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불성실하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하시다 하니 다행이다.

(27p) 일찍 아침 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소풍 갔다. 쇠사슬을 가로질러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고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았다. 겸하여 거북함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33p) 해질 무렵 영남우수사(원균)가 통첩을 보내왔는데, “왜선 90여척이 와서 부산앞 절영도에 정박했다.” 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는데, “왜적 350여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미 도착했다.”고 한다.

<계사년(1593년>

(59p) 얼마후 진도의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도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수사 원균 때문이다.

(72p) 가뭄과 더위가 이렇게 심하여 강여울도 매우 얕아져서 더욱 적을 도와주게 되었으니, 드디어 독한 왜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는 것은 촛불이 옮겨 붙은 것과 같습니다.

(75p) 하삼도 안에 겨우 온전한 것은 이 도만이 조금 그러한데, 만약 이 도를 잃는다면 회복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시름하느라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입니다.

(85p) 글로 적기를 생각하면서도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다시 계속한다.

(88p) 그들에게서 피난 간 임금님의 사정과 명나라 군사들이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102p)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16p)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 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124p) 12일_계사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신음했다. 식은땀이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시어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136p)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내리는데 마음을 다했는지의 여부를 기회와 사정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혹은 먼저 진격하기를 주창하다가도 돌진하여 싸우게 되는 때가 되면 사랑하는 이를 돌아보고 살기를 탐하여 중도에 빠지는 자가 있었고, 혹은 공로와 이익을 탐하여 승패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다가 적의 손에 걸려들어 마침내 나라를 욕되게 하고, 몸을 죽게 하는 우환을 만드는 자가 있었다.

(138p) 추악한 적에게 함락된 지 두해가 되어 가는데 국가를 회복할 시기는 바로 오늘에 달려있다. 한창 명나라 군사의 거마 소리를 기다리느라 하루를 1년같이 여겼지만, 적을 쳐서 무찌르지 않고 화친을 위주로 하여 우선 융악한 무리를 퇴각만 시키고 우리나라가 수년 동안 침입당한 치욕을 씻지 못했으니, 하늘에까지 미친 분함과 부끄러움이 더욱 간절하다.

<갑오년- 1954년>

(143p) 아침 식사 후에 어머니께 고하니, “잘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한다.” 고 두 세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47p) 21일-경자 맑음. 아침에 본영의 격군 472명에게 술을 먹였다.

(187p) 각 배에서 여러 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처형했다.

(191p) 13일-기축.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하고 염려하여 글자를 짚어 점을 쳐보니, ‘ 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200p) 달빛이 비단결처럼 고와 바람도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바다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206p) 더욱이 ‘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 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210p) 20일 - 을미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으나 비가 잠깐 그치었다.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와 눈앞에서 주춤 섰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223p) 11월 15일-기축 맑음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음양의 조화가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 말로 재난이라고 할만하다. 오늘은 아버님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고 홀로 방에 앉아있으니, 슬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리오.

(224p)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224p)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적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진리이다.

<을미년- 1595년>

(239p) 정월 초1일 -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라 일을 행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다.

(263p) 5월 29일 신축 -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부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271p) 7월 초1일 임신-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혼자 다락에 기대어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84p) 7월 29일 무진-맑음 이른 아침에 제찰사와 부사, 종사관과 함께 수루위에 앉아 여러 가지 폐단을 의논하였다.

(287p)
북쪽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하더니
남쪽에 와서도 죽고 삶을 함께 했네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 나누고 나면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지겠구려

(297p) 11월 15일_ 계미 아버지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혼자 앉아서 그리워하니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달랠 길 없다.

<병신년 1596년>

(308p) 1월 13일 _ 경진_이날 바람이 자고 날씨가 따뜻했다. 이날 저 달빛은 대낮같고 바람 한 점 없었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328p) 3월 17일 _갑신. 이날 밤에 식은땀이 등을 적셔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 몸이 불편하였다.

(331p) 3월 24일 저물 무렵 몸이 몹시 피곤하고 수시로 많이 흐르니 이 또한 비가 올 징조다.

(344p) 5월 25일_신묘_비가 계속 내렸다. 저녁 내내 홀로 수루위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354p) 7월 13일 _ 어두워질 무렵 항복해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된 자로서는 그냥 두고 볼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하여 따르는 왜인들이 마당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금하지 않았다.

(358p) 7월28일_계사_ 밤 10시쯤에 꿈속에서도 땀을 흘렸다.

(365p) 8월 21일_병진_맑음 식사 후에 활터 정자에 가서 아들들에게 활쏘기를 시키고 말달리면서 활 쏘는 것도 연습을 시켰다.

(368p) 윤8월12일_병자_맑음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10시경에 이르렀다. 백발이 성한 채로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378p) 10월 9일_임신_맑음 하루 내내 어머니를 모셨다. 내일 진중으로 들어갈 일로 어머니께서는 몹시 서운해 하시는 빛이었다.

<정유년 1597년>

(389p) 4월 19일_기묘_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서 하직을 아뢰고 길을 떠났다.

(403p) 5월 25일 을묘_ 비가 내렸다.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다가 비 때문에 가지 않고 혼자 시골집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슬프고 그리운 생각을 어찌하랴

(419p) 7월 2일_신묘_ 오늘은 곧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신인데, 멀리 천리 밖에 와서 군영에서 복무하고 있으니 인간사가 어찌 이러한 것인가

(427p) 7월21일 그들은 대장의 잘못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과 새벽 2시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430p) 8월 3일_신유_맑음 이른 아침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속 정유년>

(451p) 8월9일_정묘_맑음 일찍 출발하여 낙안군에 이르니 관사와 창고와 병기가 모두 탔다. 관리와 백성들도 눈물 흘리며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52p) 8월 12일 경오_맑음 아침에 장계초안을 수정하였다. 늦게 거제현령과 발포만호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 편에 경상수사 배설의 겁내하던 꼴을 들으니 괘씸하고 한탄스러움을 참지 못했다. 귄세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치 못할 지위에 까지 올라가서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쳤건만 조정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454p) 8월21일 _기묘_ 새벽 2시경 곽란이 일어났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셔서 치료하려 했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했다.

(459p) 9월 11일_기해 흐리고 비 올 징조가 있었다. 홀로 배위에 앉아있으니 어머님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언짢아했다.

(460p) 9월 15일 계묘_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고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리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재차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에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69p) 10월 14일_신미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편지를 전하는데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을 보니 통곡(慟哭) 두 글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고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

(470p) 10월 16일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부록 다른 문헌에 남은 이순신의 최후기록>

ㅇ 연려실기술 17권, 선조조고사본말
11월19일 아침에 순신이 직접 북채를 잡고 먼저 배에 올라가 추격해 죽이니 적이 배꼬리에 엎드려 일제히 순신을 향하여 총을 쏘았으므로 순신이 탄환을 맞았다. 급히 장좌와 아들 이회에게 명하여 방패로 자신의 신체를 가리게 하고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이회가 명령에 따라 직접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두르니 해가 아직 한낮도 되지 않았는데 물에 빠져 죽은 적군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죽음을 면하고 도망친 것은 겨우 50여척 뿐이었다.

4. 내가 저자라면

가. 생생한 기록에 대하여

약 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기록. 그것도 전쟁이라는 절대 절명의 순간의 기록은 생생하다. 역사가의 손을 거쳐서 보았다면 그런 생생함과 비장함을 느낄수 없을 것이다.
이기백 선생님의 한국사 신론을 보면 충무공에 대한 활약이 한페이지에 걸쳐서 나온다.

우선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이 주목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년에 부임한 그는 해군이 필요함을 통감하고 함선을 건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의 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만든 거북선은 과거의 것을 모범으로 하여 배 위에 뚜껑을 덮어 적의 화살이나 총탄을 막을 수 있도록 하고, 게다가 송곳을 꽂아서 적의 접근을 방지하도록 한 것이었다. 한편 선체 주위에는 포구를 만들어 놓아 아편에서 자유로이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비를 갖춘 이순신은 왜의 함대가 다가온다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출동하여 각처에서 적선을 격파하였다. 옥포에서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어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 등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의 해전을 가장 유명한 것으로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34p)

그러다가 토요토미가 죽자 그를 핑계로 모두 철퇴해 버리고 말았다. 이 철퇴하는 왜군은 노량에서 이순신이 거느린 해군에 의해서 크게 격파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전사하였다. (236p)


일기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진다는 일이고, 추호의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 그러기에 일반사람들은 게으르다는 핑계로 일기를 쓰지 않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상황에서 남기는 일기는 계속 역사속의 명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나. 한문에 대하여

항상 우리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 중에서 아쉬운 부분이 바로 한문이다. 한문 옹호론자나 한글만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선택이 대안은 아닌 듯 하다. 그 목적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선택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알기 위해서 한자의 공부는 필요하다고 본다. 난중일기 초본이 최근에 나온 것은 1935년 식민사관을 전파한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한 자료이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난중일기뿐만 아니라 충무공의 연혁이나 해전의 날짜도 정확한 것이 없다. 최근 드라마의 영향으로 빛나는 해전이 23전 23승이라는 말도 나오고 일각에서는 43전 38승 5무라는 말도 나온다. 이러한 전투 횟수의 중요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이가 적어서 이른 말이다. 역자의 말대로 그동안 지명이나 해석이 잘못된 내용을 찾았다고는 하나 부족한 한문 실력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도 한 여름에도 식은 땀을 흘리면서 콜록거리는 기침을 참고 먹을 갈고 붓을 들고 일기를 쓰는 충무공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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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6.12 13:28:15 *.227.22.57
유관순 누나는 아직도 누나인데, 이순신 장군은 장군이어야 공평한거 아닌가요? ㅎㅎ 장군으로 절정을 사셨으니 장군이란 호칭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 연구원을 통틀어 '난중일기'를 형처럼 가슴으로 읽은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원래도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인가? 아는 만큼 보인다를 형 보면서 또 느낍니다. 고생하셨어요.

참! 그리고 꿈벗모임도 형덕분에 아주 즐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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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6.12 14:29:36 *.99.241.60
가슴으로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40년동안 알고 있던 장군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서
정말 놀랬어..사람의 기억이, 그리고 드라마에 의한 시각이 이렇게
고착될 수 있나 하고 의아해 하고..

너무 승리에 비쳐서, 일본의 패전에 눈이 멀어서 그럴지도 모르고.
역사는 늘 화려함만 기억하게 되나보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은 이미 자기가 해야할 일과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알고 가신것 같기도 해.

나도 덕분에 즐거웠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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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6.13 21:30:53 *.142.242.216
호칭에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날짜 잡아주시는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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