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7년 6월 12일 11시 14분 등록
[난중일기] 외로운 남아 이순신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노승석 옮김, 동아일보사>


임진왜란 당시 전쟁의 상세한 상황과 심정을 기대하거나 영웅의 일대기를 기대하고 난중일기를 본다면 큰 실망을 할 것이다. 난중일기는 자서전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난중일기>는 개인의 일기이다. 단지 성웅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7년간의 기록이라는 면에서 큰 가치를 지닌 것이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순신에 대해 일기만큼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난중일기>란 이름도 1795년(정조 19)에 윤행임이 왕명으로 발행한 <이춤무공전서>의 일부로 편집되면서 붙여진 이름이고 본래는 7책으로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정유, 무술일기>, <무술일기> 등으로 불린다.

또한 멸실된 부분도 많고 전란 중에 일기를 쓸 수 없는 상황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기대할 수 없다. 일부 몇 개의 전투만의 상황에 적혀 있을 뿐이다. 대신에 충무공 이순신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자식으로서, 부모로서의 이순신을 느낄 수 있어 지금도 일본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에게 훨씬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기록물이고 멸실된 부분도 많기 때문에 일기의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한 책을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완역본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1. 저자에 대하여(<평역 난중일기, 김경수 편저, 행복한 책읽기> 와 백과사전 참조)


이순신(李純臣)은 1545년(인종1년) 4월 28일(음 3월 8일)에 서울 중구 건천동에서 이정(본관: 덕수)과 초계 변씨 사이의 4남 1여(희신, 요신, 순신, ?, 우신)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할아버지 백록이 중종때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충을 겪은 후 아버지 정은 벼슬을 외면하고 살았다. 권력의 변방이 된 아버지 이정은 아예 서울을 떠나 아내 변씨(본관: 초계)의 친정이 있는 아산의 백암리, 현재 현충사가 있는 방화산 기슭으로 이사하였다.

여느 양반가의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두 형과 함께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하였지만 22세 겨울부터 무술을 익히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차 많은 비중을 두어 무예를 연마해 나갔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던 시대에 무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순신은 이웃 동네에 살던 전 군수 방진의 딸과 21세에 혼인하였는데 이 상주 방씨 부인과의 사이에 3남 1여(회, 열, 면, 딸 홍비)를 두었다. 그리고 무과에 응시하여 낙방한 후에 얻은 해주 오씨 사이에서 2남 2여를 두었다.

28세에 첫 번째로 무과에 응시한 이순신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4년 후에 다시 도전하여 병과 4등으로 급제하였고, 그해 12월에 한남 삼수 동구비보의 권관(요즘의 소위)에 임명되었다.

3년의 임기를 오지에서 보낸 그는 35세에 서울로 돌아와 훈련원 봉사로 재직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자신의 상관인 병조정랑 서익이 제의한 부당한 인사 청탁을 거절한 것이다. 상관이 서익에게는 사사로운 감정의 앙금을 남기게 된다.

그는 서울 생활 8개월 만에 다시 지방 근무를 떠난다. 해미에 있는 충청병사의 군관(보좌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보좌관 생활 9개월 만에 전남 고흥읍의 발포(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만호로 수군과 첫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발포 생활도 길게 할 수 없었다. 서익이 검열관(군기경차관)으로 내려와 이순신을 모함하는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이순신은 변론의 여지없이 파면되었다. 1581년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다행히 다음해 5월에 복직은 되었으나 한동안 일없이 지내다가 이듬해 5월에 다시 훈련원 봉사에 임명된다. 이때 당시 이조판서였던 율곡 이이가 자신을 한번 찾아오라는 뜻을 넌지시 전하였으나 이순신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거절하였다. 이순신의 소신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훈련원에서 14개월을 보낸 그는 함경도 남병사의 군관으로 북청에 부임했다가 3개월만인 10월에 경흥건원보(함경북도 경원군)의 권관에 임명되었다. 승진이 아닌 동일한 직계로의 수평이동이었다. 1583년 10월에는 여진족 추장 울지내를 잡는 공을 세웠으나, 포상은커녕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이 일로 북병사 김우서의 모함을 받았을 뿐이다.

근무지인 변방은 중앙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소식도 느렸다. 같은 해 11월 15일,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그에게는 그 이듬해 1월에야 부고가 전해졌다.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와 3년상을 치렀다.

탈상을 마치자 사복시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16일 만에 조산보(함경북도 경흥군) 만호로 임명되었는데, 이 일은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두만강 입구의 작은 섬)의 둔전관을 겸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입으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생기자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을 명받는다.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1588년 1월 백의종군이 해제되었고, 6월에 서울로 돌아와 지내다가 이듬해 2월 전라감사 이광의 부름을 받는다. 군관 겸 조방장 자리였는데 이것이 상관에게 인정받는 첫 무대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정읍 현감에 임명되는데, 이때서야 비로소 가장으로서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물론이고 두 아들마저 앞세운 한 많은 어머니를 한 지붕 아래서 모실 수 있었고, 두 형이 남긴 조카들도 제대로 건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이시기에 고사리진(평북 강계군)과 만포진의 첨절제사에 임명되었으나, 현감 재직 기간이 8개월밖에 안된다는 대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순신이 진도군수로 발령받은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이었다. 그런데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리포(완도)첨사, 전라좌수사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승진의 단계를 무시한 이러한 발탁은 유성룡이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월 13일 여수의 전라 좌수영에 부임하게 된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珙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5]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곧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나온다’는 말이 생각난다.

[15]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날 일도 짐작할 만하다.

[25] <증손전수방략>을 보니 수전, 육전, 화공전 등에 관한 전술을 낱낱이 설명했는데,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이론이다.

[29]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사[김수]의 편지에 ‘쓰시마 도주[종이지]의 문서에, 「일찍이 배 한 척을 내어 보냈는데, 만약 귀국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바람에 부서진 것이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매우 음흉하고도 사악하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다 보이는 바다인데 그럴 리가 만무하며, 말을 이렇게 꾸며대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38] 이 날 여도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도망갔는데,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내다 걸었다.

[39]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44] 일본은 해중지역에 살고 있어서 비록 추운 겨울을 만나도 바람이 오히려 따뜻하여 장정들은 오직 짧은 소매 옷만 걸치고 긴 옷에 겹주름도 하지 않고 지내지만, 이제 흉적들은 오랫동안 남의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풍토에 익숙하지 않아 한겨울 추위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내기 어려워할 뿐 아니라, 군량이 이미 다 떨어져 기력도 다하였으니, 이 기회를 틈타 급히 공격하여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왕실을 재건하는 일이 바로 이 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해가 장차 바뀌려 하는데도 아직 적을 섬멸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 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47] 국가가 저 호남과는 마치 제나라의 거즉묵(莒卽墨)과 같은 것이니, 이는 바로 온몸에 폐질이 있는 자가[기맥만 남아 있는] 구하기 어려운 다리 하나만을 간신히 간호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53] 아침에 영남 우수가 원균이 내 배로 와서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기약 어긴 잘못을 몹시 탓하고는 지금 먼저 떠나겠다고 했다. 나는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지기 전까지 도착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서 모임에 왔다.

[55] 아침 식사후 삼도의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수사(원균)는 병으로 오지 않고, 전라좌우도의 장수들만의 모여 약속했다. 다만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니, 그 입에 담지 못할 바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어란포 만호 정담수와 남도포 만호 강응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술을 함부로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욱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59] 얼마후 진도의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우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할 일이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원균 때문이다.

[60]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흉악하고 음험함이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67] 어제 적을 만나 지휘할 때 교묘히 피하여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았는데, 너무도 통분하였다. 즉시 마땅히 규율에 따라 처벌하려 했으나 이전 일이 오히려 많고 또한 거듭 명령한 법이 있을 뿐 아니라, 더욱 힘을 내어 병가의 일에 힘쓰라고 분부하셨기에 우선 그 죄를 용서하고 적발하지 않았으니 감결[조선시대에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에 보내던 공문]안에 갖춘 사연대로 일일이 받들어 행하라.

[74] 비록 죽을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 앞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쳐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차도가 없으며, 또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84]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88] 영남우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이 심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배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의 허튼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92] 수사 원균이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대군을 동요하게 했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흉포하고 패악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02]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13] 이 날 밤마다에 뜬 날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116] 가을 기온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의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 달빛이 배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126] 이 날밤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아 회포를 견디기 어려웠다.

[136] 칼날 휘두르며 이르는 형세가 비바람과 같으니 흉도의 남은 넋들도 달아나 숨고, ...
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 도다.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하는 마음 그지 없네.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145] 수사 원균, 공연수, 이극성이 서로 좋아하던 여자들을 모두 다 관계했다고 한다.

[156]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

[158] 암행어사 유몽인은 나라의 위급한 난리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눈앞의 임시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고 변명하는 말만 들으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170]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이 애통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174] 오늘 우도에서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191]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하고 염려하여 글자를 짚어 점을 쳐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 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유정승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무척 좋았다.

[200] 달빛이 비단결처럼 고와 바람도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바다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204] 이 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구나.

[206]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가볍게 나아가 칠 수가 없을 뿐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207] 닭이 운 뒤에 머리가 가려워 견딜 수 없어서 사람을 시켜 긁게 했다.

[210] 홀로 앉아 간 밤의 꿈을 기억해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와 눈앞에서 주춤 섰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나는 준마를 카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210] 일찍 솔숲사이에 옛 절의 동쪽을 사랑했나니 바위의 샘물소리 옥 울리듯
오직 노선께서 계시니 지금도 잊지 못하고 종종 옛적 노닐던 곳 찾아와 담소하네

[223]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음양의 조화가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재난이라고 할만하다.

[223] 상주의 사촌 누이 편지를 가지고 그 아들 윤엽이 본영에 이르렀다.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226]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226]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설이다.

[271]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같은 인물의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339]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뛰놀게 하는 것은 스스로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주고자 한 생각에서였다.

[344]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362] 마량첨사 김응황이 직무평가에서 하등급을 맞고 떠나갔다.

[362] 어둬질 무렵 달빛은 비단같고, 나그네 회포는 만 갈래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374] 내산월도 와서 만나고 술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져 헤어졌다. 누워서 자는데 어찌됐든 좋았다.

[387] 새벽꿈이 매우 심란하여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다. 덕이를 불러서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도 말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늘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종을 보내어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387] 얼마후 종 순회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적었다.

[394]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리 밖으로 떠나와 근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도대체 누가 일을 주관한단 말인가.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 와서 근심하고 애달파함을 이렇게까지 한 것이니 비통함을 금치 못하겠다. 또 남원의 추수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 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말없이 걱정하여 주는 터이라 마음 아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가. 왜 어서 주지 않는지.

[401]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406] 아침에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기에 종들을 매질하고 밥쌀을 도로 갚아 주었다.

[427]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장의 잘못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430]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랴. 비통할 따름이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440]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무려 2백여척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백 30여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 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고 했다. 그러고서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1마장쯤 물러나 있었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있어 묘연했다.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차 다가와서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 중군의 영하기[군령내리는 기]와 초요기[싸움터에서 대장이 부하 장수를 부르고 지휘할 때 사용하던 기]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왔다.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곧장 적진에 들어가 교전하려 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기에 안위의 격군 7, 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대고 내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어 적선 2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다. 우리를 에워쌓던 적선 30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고 했으나 물이 빠져 배를 대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건너편 포로 진을 옮겼다가 달빛을 타고 다시 당사도로 옮겨 밤을 지냈다.

[458] 1년 중 명절이므로 비록 상복을 입은 몸이지만, 여러 장병들이야 먹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주에서 온 소 5마리를 녹도와 안골포 두 만호에게 주어서 장병들에게 먹이도록 지시했다.

[459] 꿈이 이상했다. 임진년에 크게 승리할 때의 꿈과 거의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었다.

[460]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중략) 이 날 밤 꿈에 신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69] 저녁에 어떤 사람이 와서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482]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 선전관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쫓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진[전쟁터]에서 용맹이 없으며 효가 아니다“고 하였다. 전진에서 용감하다는 것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법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으니, 꼭 고정된 법만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방편을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유지와 함께 고기반찬을 하사하셨는데, 마음은 더욱 비통하였다.

[503] 11월 19일 사경[새벽 2시경]에 적이 도독을 매우 급하게 포위하자, 공이 곧바로 전진하여 그를 구하였다. 그리고 친히 시석을 무릅쓰고 손수 스스로 북을 치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아 쓰러졌는데, 운명하기 직전에 휘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도독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져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하였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머리 속에 심어진 이순신에 대한 이미지는 ‘외로움’이다. 일기 속에 그려진 나라에 대한, 동료에 대한, 가족에 대한, 부하에 대한, 백성에 대한 애정 속에는 알게 모르게 외로움이 근저에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아무리 전란 중이라도 가끔은 기쁜 일도 즐거운 일도 있었을텐데 그것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편안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행이다’이라는 자제된 표현으로 적을 뿐이었다.

작게는 건강에서부터 크게는 나라의 안위를 위해 자신과, 적군과, 심지어 내부의 적들과 홀로 싸워야 하는 외로운 싸움이었다. 1592년 48세에 적지 않은 나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들과 싸우기 이전에 나이와의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1593년 6월 12일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p 102)

더구나 수군의 장수로서 배를 타야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매일 활을 쏘며 체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한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나이에 따른 건강의 약화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몸의 불편하여 식은 땀을 흘리고, 신음하고, 밤새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는 빠짐없이 수행하였고, 일기도 매우 썼으며, 찾아온 사람과 이야기하며, 심지어 술까지 대접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특히 노량해전에서 탄환이 어깨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후부터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요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수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으니 더욱 건강과 오랜 싸움이 계속되었다.

"1592년 5월 29일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p 39)

"비록 죽을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 앞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펴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차도가 없으며, 또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p 74)

이런 와중에 힘을 모아 싸워도 힘든 판국에 자기만 살고자 도망가고, 빼돌리고, 중상모략 하는 소인배들이 많았으니 참으로 분통터질 노릇이었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날 일도 짐작할 만하다." (p15)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사[김수]의 편지에 ‘쓰시마 도주[종이지]의 문서에, 「일찍이 배 한 척을 내어 보냈는데, 만약 귀국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바람에 부서진 것이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매우 음흉하고도 사악하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다 보이는 바다인데 그럴 리가 만무하며, 말을 이렇게 꾸며대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p29)

"암행어사 유몽인은 나라의 위급한 난리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눈앞의 임시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고 변명하는 말만 들으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p158)

"영의정 유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만들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가 없다. 이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더욱 심해져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p191)

"김양간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하는 뜻이 많이 담겨 있었다. 원수사의 일은 매우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년을 두고 한탄할 일이다." (p205)

자신의 생사와 나라의 안위를 걸고 싸우는 최전선에서 아무리 의연하게 몸과 마음을 다지고 무장하여도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정신적 한계는 있었다. 그런 인간적인 불안과 고독이 가족을 그리워하는 외로움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1593년 5월 4일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p84)

“1593년 7월 9일 이 날 밤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p113)

“1594년 8월 30일 이 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구나.” (p204)

"1597년 4월 13일 얼마후 종 순회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적었다.“ (p387)

"1597년 10월 14일 저녁에 어떤 사람이 와서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p469)

이러한 짙은 외로움의 감정을 뛰어난 무장이지만 문인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표현과 감성으로 시조를 남겼다. 그 유명한 한산도가를 비롯하여 무제시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바다와 맹세하니 어룡이 느끼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이네
한산도 군영에서 쓰고 칼에 새김. 여해“ (p50)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줄줄 흐르네
배를 부린 몇 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누구에게 능히 평정을 맡기리요
배를 몰던 몇 해의 계책은
이제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중원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을 몰아낸 곽자의를 사모하네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슬픈 마음은 쓸개가 찢긴 듯
쓰라린 가슴은 살을 에는 양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줄줄 흐르네
쓰라린 가슴은 쓸개가 잘린 듯
슬픈 마음은 살을 에는 양
산하가 참혹한 빛을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태평세월 2백년에
화려한 문물은 3천 모양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평정을 맡길 인재 없네
여러 해 방비할 계책 세우노라니
중원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을 몰아낸 곽자의를 사모하네“ (p233)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 차고 깊은 시름할 때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
정유년 중추 이순신 읊다“ (p382)

한 인간으로서 이순신을 느낄 수 있어 더욱 가깝게 다가온 반면에 일기만으로 느낄 수 없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 완역본이라는 성격에 충실하여 임진왜란 중 중요한 전쟁을 파악할 수 없어 그 때의 수정으로서의 감정을 완벽하게 느낄 수 없다. 전투의 상황이나 전란의 상황 등을 그림이나 지도를 추가하여 설명하면 훨씬 더 읽는 맛이 날 것 같다.

둘째, 일기 속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나 주석이 부족하여 어떤 관계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야여문 같은 항복한 왜군 장수를 이순신이 많이 활용을 했는데 이에 대한 행적이나 영향 등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면 임진왜란 당시의 문화적인 충돌 상황들에 대해 좀더 이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왜곡되었던 부분들이 역자의 노고에 의해 바르게 전해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 책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원본의 뜻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함으로써 그 당시 이순신의 감정과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 후에 작업을 한다면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을 추가한다면 <외로운 남아 이순신>의 느낌을 한 층 더 깊이 느낄 것이다. 그런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IP *.211.61.227

프로필 이미지
최영훈
2007.06.12 14:35:12 *.99.241.60
외로움을 타는 시간에도
아마 전략 아이디어를 짜내고 지역 특성을 살피고
바쁘게 지냈을 것 같아요.
낮의 그런 열정으로 정신없이 보내다가 밤이 되서
혼자가 되면 아프고 다시 아침에 일어나면 멀쩡하게 일하고..
그런 생각이 드네요.

조선은 충무공 이순신을
너무 쉽게 보낸것 같아 좀 아쉬워요.
잘 읽고 갑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92 (14) 쉽게 읽는 백범일지 - 도진순 엮어옮김 [2] 박승오 2007.06.18 4083
891 [독서014]백범일지/도진순 주해 [1] 素田 최영훈 2007.06.18 2439
890 백범 일지/도진순 주해 香仁 이은남 2007.06.17 2394
889 백범일지(白凡逸志) / 김구 好瀞 김민선 2007.06.18 2664
888 야생초 편지를 읽고 (마음이 환경보다 우선이다.) 산골소년 2007.06.17 2290
887 [백범일지] 아름다운 사람 김구 선생님 [4] 余海 송창용 2007.06.16 3520
886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2] 도명수 2007.06.16 2157
885 [013]『난중일기』를 읽고 file [5] 현운 이희석 2007.06.13 3767
884 난중일기(13)- 역자의 세심함에 감사드리며 [7] 최정희 2007.06.12 2605
883 (13) 난중일기 - 송찬섭 엮음 [3] 박승오 2007.06.12 2408
882 [13] 난중일기(이순신/ 노승석) [6] 써니 2007.06.14 3501
881 [리뷰11] 난중일기 : 이순신 [1] 박소라 2007.06.24 2354
» [난중일기] 외로운 남아 이순신 [1] 余海 송창용 2007.06.12 2447
879 [독서013]난중일기 완역본/노승석옮김 [3] 素田최영훈 2007.06.12 2462
878 [리뷰013]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노승석 옮김 [2] 香山 신종윤 2007.06.12 2627
877 (013) 난중일기를 읽고 [3] 校瀞 한정화 2007.07.13 2399
876 난중일기, 2,539일의 인간적 기록 [4] 好瀞 김민선 2007.06.12 2207
875 (13) '한산에 뜨고 노량에 지다' _ 난중일기를 읽고 [6] 時田 김도윤 2007.06.09 2761
874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를 읽고 (무서운 열정) [4] 산골소년 2007.06.08 2432
873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를 읽고 [1] 현운 이희석 2007.06.07 2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