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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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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4일 22시 4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이순신은 1545년(인종1년) 3월 8일 자정에 한성(서울) 건천동(지금의 삼청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초계 변씨 사이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백록이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충을 겪은 후 아버지는 벼슬을 외면하고 살았다. 하루는 어머니 변씨의 꿈에 사부 이백록이 나타나 “이 아이가 반드시 귀히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 지으라” 하였다고 한다. 변씨 부인은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대로 이름을 지었다. 이순신의 자는 여해, 본관은 덕수, 시호는 충무이다.

1-1. 임진왜란 이전의 생애

이순신은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도 항상 전쟁놀이를 했고, 그럴 때마다 대장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오늘은 새로운 작전을 지시하겠다. 공격하는 적군은 윗마을 병사들이 맡고, 수비는 아랫마을 병사들이 한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반으로 놔눠 따로 진을 치도록 하겠다” 자그마한 키에 비장한 표정으로 놀이에 몰입한 이순신을 떠올려 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저자는 글공부도 좋아하였지만, 어린 시절 부터 무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했다.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 왜적들에게서 부모와 백성을 지키고자 하여 군사에 관한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타기 연습, 활쏘기, 칼쓰기, 창쓰기를 계속해서 익혀나갔다. 그는 늘 활을 가지고 다녔는데, 동네의 어른이라도 옳지 못한 일을 할 때에는 곧 활을 당겼다고 한다. 난중일기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활쏘기는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익혀온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일상으로 자립 잡은 것이었으리라.

21세 때, 이웃 동네에 살던 전 군수 방진의 딸과 혼인하였다. 상주 방씨 부인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또한 무과에 응시하여 낙방한 뒤 얻은 해주 오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이순신은 1572년(소조5) 8월, 28세에 훈련원의 별과 시험에 응시했다. 그 시험에서 말을 달리다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곧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 껍질을 벗겨 상처를 싸매고 곧바로 말을 잡아타고 다시 달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감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사고로 과거에는 낙방하였다.

드디어 1576년(선조9) 봄, 그의 나이 32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12월 함경도 동구비모의 권관이 되었다. 이것이 그의 벼슬길로의 첫 출발이다. 1579년(선조12년) 2월, 그의 나이 35세 때 훈련원 봉사로 영전하였다. 그 때 병조정랑 서일이 자기의 친구를 껑충 뛰어 참군으로 승직시키려는 것을 위법이라고 제지하여 원한을 샀다. 이로써 이순신은 불의에 항거하는 공명정대한 강직한 일면을 보여 주었다. 그해 10월에 충청 병마절도사의 군관이 되어 갔다가 1580년(선조13년) 7월, 36세에 전라도 발포 만호가 되었다. 그런데 1582년(선조15) 1월 서울에서 군기경 차관이 발포에 와서 군기가 엉성하다고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이것은 훈련원에서 그의 청을 거절하였던 서익의 보복 조치였다.

그 해 5월, 이순신은 다시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가 1583년(선조16) 7월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용 막하의 군관이 되었다. 다시 그 해 10월에 함경도 건원보 권관이 되어 호족을 울지내의 칩임을 막아 공을 세웠다. 다음달 11월에 정기적인 승진으로 훈련원 참군이 되었으나, 15일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고향인 아산으로 달려가 삼년상을 치렀다.

1586년(선조19) 1월, 42세로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가 된 지 16일 만에, 북방의 호적 방어의 중임을 맡아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가게 되었다. 다음해 8월에 러시아와의 국경지대 강호를 위하여 병력 증강을 요구하였으나 절도사 이일에게 거절당했다. 그해 가을 호적이 대거 침입하여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순신은 호적과 싸워 포로 60여 명을 생포하였다. 절도사 이일은 피해의 책임을 이순신에게 돌려, 그를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무죄가 판명되어 해임으로 그치고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1588년(선조21) 윤6월, 이순신은 복변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하여 한가롭게 보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589년 2월, 45세 때 전라 순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군관이 되고, 11월에 선전관을 겸했다가 12월 정읍 현감이 되었다. 1590년(선조23) 7월, 46세로 고사리진 첨사가 되고, 8월에는 마포진 첨사로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항의로 다시 정읍 현감이 유임되었다. 1591년(선조20)년 2월에 진도 군수로 임명되어 부임도 하기 전에 가리포 첨사로 전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도 부임하기 전에, 같은 달 12일에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좌수영으로 부임하였다.

당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였다.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관직에 있던 이순신이 수군절도사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죽마고우 이며 중책을 맡고 있었던 유성룡의 힘이 컸다. 전라 좌수사가 되자 그는 전쟁이 있는 것을 예측하여, 미리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1-2. 책의 내용과 구성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의 진중 기록이다. 이것은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1592년(선조25년) 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병영 생활을 기록한 개인 일기이자 공적 일기이다. 이 일기는 이순신이 직접 쓴 필사본으로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어 현재 아산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초고 필사본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것 등 2종류가 있다.

초고본 일기는 7권 8책으로 1592년(선조25) 임진 5월 1일부터 1598년(선조31) 무술 9월 17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장계, 등본, 별책 등이 첨부되어 있다. 일기의 내용 중에는 빠진 부분이 많은데,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한 뒤에 없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충무공전서]는 1795년에 왕명에 의하여 규장각 문신 윤행임과 예문관 검서관 유득공이 주동이 되어 3년간에 걸쳐 편집하고 간행한 것이다. 이 내각본 [이충무공전서]는 14권으로 여기에 수록된 난중일기는 초고본에 없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본래 일기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았으나 [이충무공전서]의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인 뒤부터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2. 내가 저자라면

3-1.
난중일기’는 7년간 진중의 안팎에서 있었던 일을 날씨와 함께 꼼꼼히 기록한 일기다. 글은 차분하며, 대부분 감정 개입 없이 사실만을 기록한다. 하지만 간간히 드러나는 간결하고 서정적인 글귀들은 난중일기를 단지 서술형 일기가 아닌 문학적, 예술적 가치를 더하기에 충분하다. 1593년 7월 15일 일기를 보면,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져서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느덧 닭이 울었다.”라고 쓰여 있다.

또 1595년 9월 14일에는 함경도에서 고락을 같이했던 선 수사에게 선사한 를 보면 이러하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구나.(北去同勤苦 南來共死生) /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一杯今夜月 明日別離情)” / 굳이 한산도 제승당 수루 현판에 걸려 있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3-2.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난중일기를 통해서 전쟁영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들을 떠나 보내고 걱정스러워 하는 모습이나, 홀로 어머님 생각에 눈물 흘리는 이순신의 모습. 꿈에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다른 사람을 못마땅해 하거나 부하들이 다른 장수를 흉보는 것에 귀 기울이기도 했던 이순신. 아들 면의 아프다는 소식에 점을 치고는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라는 괘를 얻고는 좋아하는 모습. 또한 그의 병사나 동료들에게 더없이 자상한 모습도 보여준다. 1596년 1월 23일 일기,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하게 불었다.” 그리고 궁핍한 백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597년 5월 13일 일기,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하는 등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신중하게 싸움을 준비하고, 매일같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전쟁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음속에는 늘 ‘사람’이 살아 숨쉬고, 감정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인간 이순신 이었다.

3-3.
정세 판단에 뛰어났던 이순신은 매번 싸움에 앞서 지형과 조류, 적의 정보를 치밀하게 보사하고 분석하였다. 정탐선을 운영하고, 피난민과 포로로부터 정보 수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백의종군하고 있던 그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을 때, 한 달 이상 걸리는 복귀 여정을 무려 300여 Km의 전라도 내륙 지방을 순회하면서 부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면서 정확한 상황을 판단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보 수집과 분석 능력은 풍부한 독서를 통하여 쌓은 지식에서 온다. 이순신은 무인이었지만 문인을 능가할 정도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선비와 같은 태도로 병서뿐만 아니라 사서오경 등 많은 책을 읽었다. 또한 철저한 기록 정신으로 7년에 걸친 왜란 중에서도, 때로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일기를 써 [난중일기]를 남겼다. 또한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도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보고 하였고, 이 자료들은 [임진장초]로 남아 있다. 이러한 그의 기록 정신 때문에 우리는 400년이 휠씬 지난 오늘날에도 임진왜란의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3-4.
조정에서는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다, 아닐 것이다 하고 입씨름만 하고 있을 때, 이순신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자마자 철저하고 꼼꼼한 자세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순신이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순신이 모든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러한 미리 준비하는 자세에 있을 것이다. 그의 일기로 추정해 볼 때, 그 때 당시의 우리나라는 평화로 군기가 해이해졌으며 적당주의가 판을 치는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순신은 스스로 앞장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부하들의 고된 훈련을 이끌어 나갔다. 또한 이순신은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나는 나라를 욕되게 했다. 오직 한 번 죽는 일만 남았다”라고 자주 말했다.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고 더욱 철저하게 대비하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미리 준비하는 자세와 겸손함의 정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울림을 준다.

3-5.
또한 이순신은 누구보다도 일본 수군의 강점을 무력화시키고, 우리의 강점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을 강구 하였다. 일본 수군은 우리에게 없는 조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칼싸움에 능숙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적의 강점인 조총을 무력화시키고 적이 우리 배에 올라와 칼싸움을 할 기회를 없애기 위하여 배 위를 목판으로 덮은 거북선을 개발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가진 창의성이다. 이렇게 강점은 창의성으로 직결된다.


이순신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를 떠올려 볼 때, 군복대신 현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그는 한 기업의 진정한 리더였을 것이다. 온갖 힘든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찬란한 승리를 거두어 냈으며, 인력, 설비 등이 없거나 크게 부족하더라도 강점을 살려, 창조적인 대안과 전략들로 적군을 압도하였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삶을 봐도 그렇고, 주의의 많은 이들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는 없는 것만 탓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배경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할일을 못한다고 탓하곤 한다. 이런 태도로는 자기 개발과 배움의 자세를 갖기 어렵다.

현대 사회는 앞서 미래학자들이 말해준, 정보화 사회 혹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식중심의 사회로 변해 가고 있다. 정보 수집과 지식 이야말로 현대사회의 경쟁력에서 승리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오늘날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남이 아닌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순신의 정신과 자세를 마음깊이 되새겨야 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꾸준한 독서, 뛰어난 정보 수집력과 기록정신, 강점을 살려 전쟁을 승리를 이끌었던 모습, 매일매일 목표를 통해 활을 쏘았던 이순신, 그리고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알았던 이순신은 연구원의 누구누구 스승님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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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13 23:12:59 *.70.72.121
누구 누구는 이순신을 닮았데~요? 소라는 또 누구 누구를 닮아간데~요.
강점을 계발하여 창의적으로 확장시켰구나. 소라도 그렇겠네.
소라의 많은 생각들이 일상으로 녹아드는 모습이 느껴지네. 엄마에게로, 사랑하는 님(?)에게로, 그리고 누구보다 소라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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