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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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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2일 13시 41분 등록

난중일기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옮김, 서해문집


1. 저자에 대하여

성웅(聖雄) 이순신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돼 고난을 겪었다. 이로 인해서 아버지 이정(李貞)은 벼슬에 뜻이 없이 평민으로 지냈다. 때문에 집안 형편은 더욱 기울어졌다. 하급 무관직인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이는 정규관리가 아니라 임시직이나 명예직쯤으로 여겨진다. 이정은 이순신이 함경도 건원보(乾源堡)의 군관으로 있던 1583년, 향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하지만 이순신에게 부친의 부고는 다음 해인 1584년 1월에 전해졌고, 뒤늦게 고향으로 내려간 이순신은 3년 상을 치렀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草溪) 변(卞)씨 수림(守琳)의 딸이다. 변씨(卞氏)는 1597년 4월 11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후 옥에서 나와 권율의 휘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찾아가는 배 위에서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변씨가 별세한 바로 그날, 어머니의 부고를 아직 전해 듣지 못했던 이순신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오는 노령의 어머니를 몹시 걱정했다.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전쟁 놀이를 좋아했던 이순신은 22살의 늦은 나이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28살 때에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과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을 지냈다.

1586년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가 되었다. 이때 호인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이 되었다. 이후 1589년 선전관과 정읍 현감 등을 거쳐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珙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 여수 충민사, 아산 현충사 등에 배향되었다.


인간(人間) 이순신

무엇보다 ‘난중일기’는 인간 이순신을 가장 잘 알려주는 책이다. 짤막짤막한 문장을 통해, 때로는 서정적인 시구를 통해 이순신 자신의 인간적 면모를 꾸밈없이 드러낸다.

이순신은 부하들과 함께 신중하게 싸움을 준비하고, 부모를 걱정하다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맹리같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전쟁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 이순신은 꿈에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대하여 이야기가 미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아들을 보내놓고 걱정스럽다 못해 병이나고, 홀로 어머님 생각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적에 맞서 싸울 Eoss’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다”라고 외치며 아군의 10배가 넘는 적에게 틈을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진중에서 그는 늘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며 소식을 기다렸다. 어머니로부터의 소식이 늦거나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순신은 종종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며 잠도 이루지 못했다. 아들과 조카에 대해서도 항상 염려와 따뜻한 보살핌을 보냈다. 아들 열이 병에 걸리자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고, 면이 적과 싸우다 죽자 그는 울부짖으며 슬퍼했다. 이순신이 보살핀 것은 그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그의 군사나 동료, 궁핍한 백성들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군사가 백성의 것을 훔쳐 먹었을 때는 엄하게 벌하고 대신 갚아 주기도 했다.

이순신은 늘 걱정이 많았다. 그는 오랜 진중 생활 중 때때로 부하들과 놀이를 하거나 술에 취하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었다. 전쟁 중이라 바다 위 생활을 오래 하고, 육지에 내려오기가 무섭게 배를 만들고 군비를 정비하고 틈틈이 둔전까지 경영하는 동안 이순신은 병이 끊이지 않았다. 잠을 잘 못자는 것은 물론이고 배가 아프거나 구토, 설사,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는 일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때때로 잘 못먹는 술에 흠뻑 취하여 고통을 겪는 모습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일기를 읽다 보면 이순신이 점을 치는 장면이 많은 것도 드러나는데, 그가 점을 많이 치는 것도 힘들고 고독한 가운데 스스로를 위로받고자 했던 것 같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다. 특히 뒷날 그를 모함하여 죽음 직전에까지 몰아넣은 원균에게 이순신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물론 일기를 보면 그가 원균을 나쁘게 본 데는 대개 그럴만한 근거가 따르기는 한다. 일기에 따르면 여러 지후관들이 원균의 잘못이나 흉을 여러 차례 보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영웅으로 불려진 데는 일을 함에 있어, 자기 몸을 보살피지 않고, 조금도 물러섬 없이, 그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면서도 그가 관장한 고을의 공문이나 백성들의 소장을 처리했다. 시간을 미루지도,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도 않았던 것이다.


선조실록 vs. 선조수정실록 : 이순신과 원균

<선조실록> 1604년 6월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문신으로는 이항복과 정곤수가 호성(扈聖) 일등공신으로, 무신으로는 이순신•권율•원균이 선무(宣武) 일등공신으로 명기돼 있다. 임진왜란의 영웅이자 충신으로 평가되어온 이순신과 일반적으로 역적으로 알려진 원균이 4백년전 똑같이 일등공신으로 책봉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인조때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은 이순신에 대해 칭찬으로 일관하면서도 원균에 대해서는 폄하를 일삼아 원균이 역적이라는 후세 평가의 계기가 된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난 후 의정부와 비변사, 군공청등에서 공신책봉을 위한 엄격한 심사를 벌려서,
이때 이원익•이항복•이덕형 등은 선조에게 원균의 녹공을 이등급으로 정해 올렸으나 원균은 녹공 일등으로 격상되었다. 이는 선조가 이순신을 폄하하고 원균을 옹호하는 입장을 피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적을 토벌할 때 원균은 죽기를 결심하고 매양 선봉이 되어 용맹을 떨쳐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다. 그런데 그 공을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원균이 대패해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한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 대해서도 패인이 원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원균을 윽박질러 출정을 명령한 도원수 권율에게 있다."

이처럼 선조가 심사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균을 일등공신에 책봉토록 한데는 그의 이순신에 대한 시기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선조는 국란이 발생하자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가려고 한 반면 이순신은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에 대한 조정의 평가와 백성들의 신망이 높을수록 한 나라의 왕으로서 본분과 체신을 져버린 선조의 행위는 극명하게 대비가 되어, 선조로선 체면을 위해 이순신을 깍아내릴 필요가 있었고 상대적으로 원균은 과대평가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西人)들은 광해군때 편찬된 <선조실록>이 북인(北人)의 입장에서 쓰여져 다른 당인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됐다고 지적했다. 대제학 이식(李植)은 상소를 올려 실록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선조실록>은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세력들에 의해 수정되었다. 인조반정은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주도하고 이황의 제자들인 남인들이 동조해 성공한 쿠데타이다. 이순신은 남인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아 남인으로 분류되었고 반면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다. 따라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순신을 후하게 기록한 반면 원균에 대해서는 박하게 기록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두 실록 사이의 간극에는 어떠한 역사적 진실이 존재하는가. 이순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원균은 무과에 급제해 변방의 오랑캐를 토벌한 공로로 부령부사가 되었다가 후에 경상우수사가 된 반면, 이순신은 당시 일부 공적이 있었지만 유성룡의 추천을 받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된다. 임란 초기 왜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던 경상좌우수영이 거의 궤멸되자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해 이순신과 함께 옥포•당포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여러 전쟁에서 의기투합했던 이순신과 원균은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선조26년(1593)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에 겸임 발령되자 원균이 반발하면서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

이후 이순신이 물러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를 두고 후세에서는 원균이 모함을 해 이순신이 물러났다고 하지만 사실은 왜적의 정보전에 조정이 당한 결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즉, 왜장 가등청정은 간첩 요시라를 이용해 자신이 어느날 어느 섬에 숙박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유출하였였으며, 조정은 그러한 정보를 그대로 믿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을 치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그것이 계략임을 알고 출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명령불복으로 하옥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과 원균은 당시 조정의 난맥상과 왜적의 계략으로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무장들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이순신이 전쟁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시기적절한 대응으로 큰 업적을 이룬 반면, 원균은 몇 차례의 전공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승부욕으로 군사를 함부로 전장에 내보내 죽게 하는 우를 범하곤 하였다. 원균은 이순신처럼 불패의 명장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용감한 장수이자 왜적과 맞서 싸워 목숨을 바친 공신이므로 이순신을 미화하기 위하여 더 이상 원균이 역적으로 희생 될 필요는 없다.

오늘날 정설로 굳어진 이순신 일대기가 조선 왕조 시대에는 정조에 의해서,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주도된 국가 사업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이순신 장군 연구에 가장 중요한 사료인 <이충무공 전서>는 탕평책을 한창 펼치던 정조의 어명에 의해 1795년에 편찬되었고, 또 이순신 장군에 관련된 유물 유적이 정리되는 등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대통령의 제3공화국 시대였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cafe.naver.com/ljh4726)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25)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고을 전현직 관리들과 여러 색리드리 인사차 왔다. 방답진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고치지 ㅇ낳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우후, 가수 들이 또한 감독을 소홀히 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제 한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병선은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또한 집작하겠다.

(47) 왜적이 배를 댄 곳을 물으니 적은 지금 사천 선창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바로 그곳에 가보니 왜인들은 벌써 뭍으로 올라가서 산봉울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봉우리 밑에 벌려 놓고 재빠르고 튼튼한 태세로 항전했다. 나는 모든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었다. 화살을 빗발치듯 퍼붓고 각종 총통을 마치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들이 두려워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 명인지 알 수가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87) 그러나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좌초에) 걸려 적들에게 공격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었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구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라!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92) 맑다. 새벽에 대궐 쪽을 향하여 예를 드렸다.

(98) 마음이 매우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어씨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105) 남해 현령 기효근이 배를 우리 배곁에 대었느데, 그 배에 어린 처녀를 싣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했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글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니 어찌 하겠는가?

(107) 각 고을의 담당 서리 11명을 처벌하였다. 옥과현의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부실하여 도망간 사람이 거의 1백여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매번 거짓말을 하기에 이날 목을 베어 매달았다. 모짐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도 어지러웠다.

(108) 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언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124) 맑다. 새벽에 꿈에서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마치 서울인 듯 했다. 신기한 일들이 만핬다. 꿈에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이야기가 왕이 피난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였다.

1954년, 명-일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39) 아침에 어머니를 뵈러 배를 탔다. 바람을 따라 바로 고음천에 도착하였다. 어머니를 뵈러 들어갔더니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서 일어나혔는데, 기운이 가물가물하시고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했다. 하릴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 맑다.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쓰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몇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147) 원수(권율)의 답장이 도달하였는데, 명나라 심 유격이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왜적의 간교한 꾀를 미리 알기 어려우니, 이미 술책에 빠져들었건만 또 이렇게 빠져드니 한탄스럽다.

(151)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 볼 뿐이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180) 혼자 앉아서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격이라고 한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또 유정승에 대하여 점을 쳤더니, 바다가 배를 얻는 것과 가타는 괘를 얻었다. 다시 점쳐 보았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좋았다.

(195)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202) 아침 일찍 선봉 부대를 장문포 적의 소굴에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눔을 써서 땅에다 꽂아 놓았는데, 거기에는 “왜국이 명나라와 바야흐로 화친하고자 하니 싸울 필요가 없다”고 쓰여 있었다.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233) 사직의 우이머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251) 선 수사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수를 써 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 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296) 술이 몇 차례 돌고 나서 경상 수사가 씨름을 붙인 결과 낙안 군수 임계형이 일등이었다.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306)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

(326) 새벽에 배를 돌려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 일행과 더불어 배를 타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하루 내내 즐겁게 모시게 되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1597년, 백의 종군에 나서다

(336)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337) 배에서 달려온 중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338)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잇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358) 내가 들어가 뵈니, 원수가 원균에 대하여 “통제사의 일은 도저히 말로 할 수가 없소. 조정에 청하여 안골, 가덕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정말 어떤 마음이겠소? 그럴싸하게 기대어서 싸우지 않으려는 뜻에 지나지 않소.”

(364) 일찍 아침을 먹은 다음 솟구치는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며 떠나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367) 그 편에 수군 20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분하였다. 막을 방책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368) 듣고 나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 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371) 점심을 먹은 뒤 노량에 이르렀더니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명이 와서 통곡하였다. 또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379)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 했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라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382) 혼자 배 위에 앉아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무척 언짢아하였다.

(385)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385)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393)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394)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395).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 째 되는 날인데도 나는 마음 놓고 울어 보지도 못하였다.

(405) 도원수의 군관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이번 선전관 편에,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고기를 먹는 것)를 좇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걱정스럽게 여긴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랏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 용감하려면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떨어진 자로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다. 예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는 것처럼 꼭 원칙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서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좇도록 하라.”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였다.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416) 바로 나갔더니 도독이 “순천 왜교의 적들이 초 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습니다.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막읍시다.” 하였다.

(417) – 마지막 일기
어제 복병장인 발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나갔던 일을 보고하였다. 왜적은 한산도에서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이었다.



3. 감상/내가 저자라면

독자로서의 감상
역자 송찬섭이 서두에 밝힌 것 처럼 난중일기를 통해 만난 이순신은 ‘성웅(聖雄) 이순신’이 아닌 ‘인간(人間) 이순신’ 이었다. 그는 단순히 군사를 호령하고 함대를 이끌고 왜적을 쳐부순 무패의 장수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건강을 노심초사 걱정하고, 나라 걱정에 밤을 지새우고,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고, 부하들의 궁핍한 사정에 기꺼이 옷을 벗어주는 사람이었다. 눈물은 왜 그리 많은지, 아프기는 또 왜 그렇게 자주 아픈지. 원균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을 가소(可笑)롭다고 자주 욕하고, 점을 쳐서 근심을 달래려는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구국의 영웅’으로 알고 있던 그의 이미지가 깨어졌지만 오히려 그런 인간적인 모습에 더욱 끌리는 것은 왜일까. 박통 시대부터의 군사 정권이 영웅 사관을 통하여 그들의 권력을 더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의하여 그 이미지를 지나치게 부풀려 놓았기에 그의 새로운 모습에 약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이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을 담은 일기라는 점을 기억해내고는 고개가 수그러졌다. 어렸을 적 통영에서 자란 탓에 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나로서는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6월, ‘인물’ 테마에 들어가면서 사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개인의 역사, 즉 개인사로 들어 갈 것이니 한 개인에게 투사된 그 시대를 집어보라. 그리고 그대에게 투사된 현대를 그려보라. 끊임없이 연결하라. 책과 책을 연결하고 사상과 사상을 연결하고,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그들과 그대를 연결하라.”

책을 읽으면서 이순신과 내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눈물이 많고, 노심초사 매사를 걱정하며, 자주 몸이 아픈 모습. 좋다/나쁘다가 아닌 옳다/그르다 라는 기준으로 사람과 상황을 평가하고, 무언가를 계획하고 준비하는데 철저한 모습. 믿고 따르는 몇 사람에게는 끔찍하게 믿고 의지하되, 싫은 사람들은 속으로 무시하는 모습에서 나를 잠시 엿볼 수 있었다.

가장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았던 것은 이순신의 ‘꿈’에 관한 것이었다. 책 곳곳에서 놀랄 정도로 그의 꿈이 잘 맞아 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꾼 악몽(그 때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이라던가, 아들 면이 죽기 전에 꾼 꿈, 명랑 해전을 앞두고 직전에 꾼 꿈(그것이 임진년에 승리할 때의 꿈과 대체로 같다고 이야기하였다)이나 신인(神人)이 나타나 싸움 전의 병법을 들려준 꿈에 관한 것들이 정말 거짓말처럼 적중하는 모습이 놀랍다.

말로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 – 그곳에서는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에 보면 호주 원주민들이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 그들의 꿈에 대해 토론하고 조언해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난중일기를 읽다가 이것이 다시 떠올랐다.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꿈(Dream)’은 밤에 꾸는 꿈과 미래의 비전을 모두 설명하는 점이라는 것을 볼 때, 어쩌면 우리가 꿈(夢)을 미래에 대한 힌트로서 해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관심있게 지켜볼 주제이다.


번역서에 대한 ‘내가 저자라면’

송찬섭과 노승석의 책을 비교해 볼 때
이번에 책을 살 때 노승석의 책(완역본)과 송찬섭의 책을 모두 구입하였다. 자연스레 송찬섭의 책에 손이 간 것은 그만큼 읽기 쉽고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송찬섭의 책은 일기가 빠진 곳곳을 장계들과 다른 책들을 이용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여 중요한 공백을 메꿨다. 매 두세 페이지마다 일기 내용에 드러난 사진과 그림들을 삽입하여 이해를 도왔고, 챕터가 시작하기 전에는 꼭 그 해의 중요 사건들을 요약하여 흐름을 짚어 주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설명해주거나 이해에 필수적인 사료(史料)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돋보인다. 이번 꿈벗 모임에서 비즈니스 팀이 발표한 “비즈니스는 고객이다”라는 말에 출실하게 부합하는 번역서이다.

반면, 다른 연구원들이 지적했듯, 노승석의 책은 8500자를 새롭게 해석하고 100여곳에서 150자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고 잔뜩 자랑하지만, 번역만 더 되어 있을 뿐 독자에게 주는 이렇다할 유익이 없다. 독자가 '인간' 이순신을 가슴으로 이해하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종윤이형의 말처럼 “저자에 대한 이해가 빠진 책 읽기는 그래서 반쪽 짜리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난중일기 완역본은 완벽에 가까운 반쪽 짜리 책이다.”는 평은 적절하다.

노승석의 책이 단순한 번역본이라면, 송찬섭의 책은 역사적 흐름의 곳곳에 끼워넣은 이순신의 일기이다. 따라서 역사적 흐름과 이순신의 생각과 행동을 매치시켜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사료들을 취합하는 작업이 필시 쉽지 않았으리라. “이 작업이 필자에게는 대단히 힘에 벅찼음을 고백한다”고 서두에 밝힌 그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누군가 난중일기 책을 추천해 달라한다면 단연 송찬섭의 책을 추천해주리라.

아쉬운 부분
그럼에도 부분적으로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우선은 ‘주’에 대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일기를 번역한 것이다 보니 자연스레 많은 수의 사람 이름과, 직함, 지명과 문서명 등이 나오는데, 독자가 일일히 찾아볼 수 없어 페이지 옆에 친절히 주를 단 것이 참 좋았다. 그러나 그 양이 너무 많다보니, 읽는 도중에 까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복적으로 쓰여진 일기이다 보니 그 용어가 다시 눈에 띄는데, 주는 그 단어가 처음 나올때만 설명되어 있어 다시 찾아보기가 무척 곤혹스러웠다. 페이지 옆의 주는 그대로 살리되, 또 한번 찾아볼 때를 대비해서 책의 뒤편에 주를 전체 종합하여 정렬하여 ‘찾아보기’를 만들어 두었으면 어땠을까? 색인을 편집하는 것이 쉬운 작업임은 자명하고, 분량이라고 해 보아야 10페이지 내외 정도가 더 나올 것 같다.

이순신의 일대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의 일생과 임진 왜란에 대한 짧은(10페이지 정도)의 설명이 책 초반에 나와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책의 뒤편에 임진왜란의 주요 사건 연표가 나와있지만 역사에 문외한 일반 사람들에게는 숫자와 글자의 조합일 뿐, 매력적이지는 못하다. 옹박처럼 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런 간결한 흐름 요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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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6.12 14:44:18 *.99.241.60
검색을 하다보니, 선조와 원균,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관계에 대한 부분이 많이 나오던데, 너무 일방적인 해석만 하고 있고, 현재 정치에 염두를 보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쉽게 다가오지는 않더라구.

송찬섭씨의 책을 꼭 한번 봐야 되겠다.
노승석씨의 책은 두어번 보니 조금 들어오더라구..

잘 읽고 간다.
그리고 과제물 무난히 제출한 것도 축하한다.
고생많았겠다.. 이번주도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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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13 06:13:17 *.72.153.12
결국 일대기를 정리했구나. 내 경우엔 자기 말로 정리 안하면 완전히 까먹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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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6.13 12:09:27 *.218.205.7
형이 고생 많았죠. 꿈벗 모임 준비, 쉬운게 아닌걸 아는걸요.
등산하자고 했던 기억 나세요? 그게 6월 아니던가?

정화누나, 저자에 대해서.. 정리가 저에겐 참 어렵네요. 자꾸 미루게 되다가 결국 인용만 하고 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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