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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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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2일 15시 43분 등록
평역(評譯) 난중일기 ( 이순신 원저/ 김경수 편저) - 행복한 책읽기

들어가기에 앞서

임어당( 林語堂)은 내가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줄곤 나의 뒤를 밟고 있었다. 뒤를 밟는 것으로도 모자라 초대하지도 않은 이순신 장군의 술상 한쪽 모서리에 자리 잡기도 한다. 그 특유의 여유로움이 장군과 대조를 이루나 전혀 어색하지 않다. 원 수사의 주사가 시작되면 술상 모서리를 한 번 뚝 쳐주어 장군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가끔은 친구 J.B Priestiy까지 불러들이는 여유를 부린다. J.B Priestiy의 능청스러움을 임어당은 익혀 알고 있는지라 장군의 답답한 심경에 여유를 불어 넣어 보려는 의도적 초대인 것이다.

장군의 병영일기를 읽어 나가면서 줄곧 임어당의 The Importance of Living를 떠 올린 것은 장군에 대한 지극한 연민에서 출발하였다. 일기를 통해 만나는 장군은 33전 33승의
이순신도 아니요. 아전들의 거짓말을 참다못해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엄한 심판관 또한 아니었다. 불행한 역사 속 한가운데 앉아서 번민하고 달밤은 밤이면 시를 짓고 눈물을 평범한 인간적 고뇌를 담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임진년, 계사년에는 몇 번이나 임어당과의 술자리를 주선했었다. 더 이상 지켜보고 있기에 안타까웠고 무거운 어깨를 잠시라도 내려 놓게 하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전장에 서 본 경험도 없고 장군과 같은 위치에 서 보지도 못한 나인지라 뭐라고 딱히 결론짓기는 무엇 하지만 물리적 상황과 관계적 상황은 장군을 극도의 불안 상황으로 몰고 갔음이 분명하다. 잠 못 이루지 못하는 밤이 많음은
우국의 충정일수도 있지만 관계의 불편함에서 오는 정신적 불안정 요인도 상당했으리라. 원칙에서 한걸음 물러서지 않는 꼿꼿함은 주위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고 자신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었겠다. 장군에게는 문요한 변경 선배연구원과의 상담이 필요했다.
어깨를 내려놓고 황무지 언덕길이라도 걸으면서 잠시의 여유를 부리며 원균을 향해 비난의 화살도 날려보고 새소리도 들어야 했었다. 역사상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용맹과 지략이
외부로 오는 정신적 압박 때문에 절반은 감해졌으리라고 단정 짓는 것은 지나침일까.
책장을 덮을 때까지 성웅 이순신에 대한 존경과 감탄의 심정에 앞서 괴로운 심정을 풀어 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나를 괴롭혔다. 장군과 원 균의 관계개선의 결과는 우리 역사를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굳이 나비효과 까지 떠올릴 필요가 없음을 우리는 안다.

홍새나 백조는 일거에 천 리를 날 수 있다. 오직 의지하는 것은 여섯 개의 날개뿐이다. 홍새나 백조 같은 큰 새에게는 등허리에 있는 한 개의 깃털이나 배에 난 한 개의 솜털은 있거나 없거나 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대인(大人)의 활동에는 작은 물건은 아무 힘이 되지 못한다는 말 ( 임어당의 ‘잡편’ ) - 그러나 이순신의 등허리에 있는 한 개의 깃털은 하늘을 나는 장군의 가슴을 찌르고 심장을 후벼 파는 예리하기 그지없는 깃털이었다.

1. 저자에 관하여

李純臣 ( 1545 - 1598 ) 純臣은 순 임금의 신하라는 의미 호 汝諧(여해)는 순 임금이 여러 신하 가운데 우 임금을 지적하면서 ‘너(여)라야 세상을 화평하게 할 것이라는 ’서경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p 369)
서울 중구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사이의 4남1여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백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충을 겪은 후 아버지 정은 벼슬을 외면하고 살았다. 권력의 변방인이 된 아버지 이정은 아예 서울을 떠나 아내 변씨의 친정이 있는 아산의 백리암, 현재 현충사가 있는 방화산 기슭으로 이사하였다.
21세에 보성군수 진의 딸 상주방씨와 결혼함
22세: 무술을 익히기 시작함
23세 맏아들 ‘회.가 태어나남
27세에 둘째 울이 태어나고 방씨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둠
28세에 첫 번째로 무과에 응시한 이순신은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낙방하고 만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4년후에 다시 도전하여 병과 4등급으로 급제함

32세에 함경도 권관의 직책으로 국경수비대의 업무를 맡음 (종9품의 수장)
35세에 한성으로 돌아와 훈련의 최하위직인 봉사가 되며 주로 인사관계를 주로 담당했음
같은해 12월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이되었음(종2품의 무관직)
36세 : 전라좌수영 관내에 있는 발포에서 부대장갹인 수군만호 가됨( 종4품)
발포 - 전라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38세 : 군기 경차관(조사관)인 서익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상부에 보고하여 수군만호에서 파직됨
▶ p 371쪽을 보면 서익이 이순신에게 부당한 청탁을 했을 때 이순신이 거절한 앙가픔의 파직이라고 나온다. 서익이 이순신을 모함하는 징계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해 5월에 함경도 훈련원 봉사로 재임용됨
39세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훈련원의 참군으로 승진함(정7품)
11월 15일 아버지가 돌아가셧으나 변방인 관계로 다음해 1월에야 부고를 전해들음. 관직을 쉬고 충청도 아산에서 3년상을 치름
42세 탈상을마치고 사복시 주부에 임명됨(종6품 벼슬)
같은 해 서해 유성룡의 추천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만호로 임명됨. 그러나 여진족의 침입으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생기자 지휘관으로 서의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을 명받음.첫번째 백의종군

45세 전라도 감사 이광 휘하의 조방장이 됨(조방장- 부관에 해당하는 직책) 12월에 전라도 정읍현감이 됨(현감-지방을 다스리는 수령 중에서 가장 낮은 직책으로 품계는 종5품)
47세 진도군수로 임명됨(서해 유성룡이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무렵쓰고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에 승진의 단계를 무시한 파격적 인사가 단행되었음)
48세 : 임진왜란 발발
-옥포해전 승리
- 적진포해전승리
- 거북선활약으로 사천해전 승리(왼쪽 어깨에 적의 탄환을 맞아 부상당함)
- 당항포 해전 승리(기밀문서인 일본의 수군편성표를 노획함)
-울포해전 승리
- 한산도 해전에서 적선 59척을 격파하였으나 존선군은 4척만 불타는 대승을 거둠 정헌대부로 승진( 정2품위의 직책)
-안골해전에서 이억기와 수륙작전을 펼쳐 승리함

49세 : 삼도수군통제사가 됨(경상, 전라, 충청도의 3도의 수군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삼남 지방의 수군 총사령관)
50세 다앙포 해전 승리
장문포해전승리,영등포해전 승리
53세 정유재란 발발
왜군이 거짓으로 꾸민 밀서를 그대로 믿은 조정에서 출동명령을 내리나 이를 어기고 출동하지 않음 -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됨 한성으로 압송, 모진 고문을 받고 투옥됨
투옥 28일만에 출옥하여 권율휘하에서 백의종군함 어머니 사망함
원균이 이끈 삼도수군이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원균이 전사함
삼도수군통제사로 재 임명됨. 군사 120명과 전선 12척으로 전열을 재정비함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셋째아들면이 충청도 아산에서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함)
11월19일 노량해전에서대승을 거두나 유탄을 맞고 선상에서전사.우의정 관직을 받음
맏아들 회도 선상에서 전사함
11월26일 일본군 부산포에서 완전 철수.전쟁종결
충청남도 아산 금성산아래 안장함
영의정에 추증됨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머리말〕일기에는 그 어떤 허세나 윤색이 없다. 나라를 걱정하고 전쟁을 지휘하는 이순신에게는 지사와 장수의 풍모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자식을 애틋해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자에 대한 미움을 숨기지 않는 데서는 인간적 면모가, 시를짓고 피리 소리에 취하며 비 내리는 정취를 감상하는 데서는 풍부한 감성을 느낀다. 「난중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19〕안개비가 내리면서 갰다 흐렸다 했다. 관청에 나가서 업무를 보았다. 김인문이 순찰사영에서 돌아왔다.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사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무고하여 병사를 청하는 일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게 우리가 일본과 함게 딴 듯을 품은게 아니가 하는 의심을 사게 했다. 그 흉측함이 참으로 이를 데가 없다.

〔35〕이날 밤 군대 비밀 구호는 용호, 대답할 말은 산수라고 했다.

〔51〕우수사 이억기와 힘께 일에 대해 의논하면서 바다에서 잤다.

〔43〕새벽녁에 앉아서 꿈을 생각해 보니 , 처음에는 나쁜 것 같았으나 도리어 좋은 것이었다. 가덕으로 갔다.

〔47〕아침에는 흐리더니 늦게 갰다. 동트기 전에 나발을 불고, 날이 밝을 무렵에는 둘째 번과 셋째 번 나발을 불고 나서 배를 풀고 돛을 달았다. 그러나 정오에는 바람이 거꾸로 불어 날아 저물어서야 사량에 정박하고 그곳에 잤다.

〔49〕증조부 제삿날이다. 이른 아침에 본영의 전쟁 상황을 알리기 위해 연락선이 도착했다. 아침식사 후에 3도 군사들을 모아 전략을 논의 할 적에 영남 수사 원균은 신병으로 오지 못하고, 전라 좌우도 여러 장수들만 모여서 약속했다. 기막힌 꼴을 어지 모두 말할 것인가.
〔51〕서풍이 크게 불었다. 배를 띄울 수 없어서 그대로 머무르고 떠나지를 못했다. 남해 수령에게 붓과 먹을 보냈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왔다. → 적진과 대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붓과 먹을 생각할 수 있는 냉철함, 붓과 먹을 보낼 수 있는 여유.

〔53〕우도의 여러 장수 배중에서 변변치 못한 것을 골라 동쪽으로 보내어 역시 상륙할 것처럼 꾸미게 하였다. 이러한 전략에 왜적들은 갈팡질팡하였다. 이 때를 틈타서 전선을 모두 모아 무찌르니 저들은 세력이 나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 당하였다. 발포2호선과 가리포 2호선이 명령도 안했는데 돌입했다가, 얕은 곳에 걸려서 적들에게 습격을 당하였다. 마음이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얼마 뒤에 진도 지휘선 역시 적에게 포위되어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 냈다. 경상도의 좌위장과 우부장은 끝내 본체하며 구원해 내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참으로 통분했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에게 질문도 했는데 실로 한심한 일이다. ⇒ 원균과의 불화로 인한 고통이 엿보임

〔59〕어머님 생신이었으나,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祝壽의 술잔을 받치지 못하였다. 평생의 한이다.

〔61〕선전관 성문개가 방문해서 피란 중인 임금의 사정을 자세히 전했다.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다.

〔62〕13일 (병인) 맑음 조그마한 산등성위에 베로 만든 과녁을 치고 순천, 광양 방답, 사도, 우후와 발포 등 여러 장수들과 활을 쏘아 승부를 다투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밤에 들으니, 경상도 우수사에게 선전관 도언량이 왔다고 했다. 이날 밤, 달빛은 배위에 가득 차고 혼자 앉아 있으니 이 생각 저 생각에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밀었다. 잠이 오지 않다가 닭이 울어서야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14일 (정묘) 선전관 영산령 예윤이 임금의 명령서를 가지고 왔다. 그들에게서 피란 중인 임금의 사정과 명나라 장수들이 하는 짓을 들었다.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나는 우수사 이억기의 배를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를 하며 술을 두어잔 나누었다. 영남 수사원 평중(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리므로, 배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영산령이 취해 넘어져 정신을 못 차리니 우습다. 이날 밤, 두 선전관이 돌아갔다.

〔63〕16일 (기사) 조카 해와 아들 회가 함께 돌아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서 신음하던 중에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뭇거리는 것은 무슨 딴 꾀가 없지 않는 것 같다” 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았던 차에 이와 같은 일도 있으니, 더욱 한심스러워 눈물이 났다. 점심 때 윤 봉사에게 관동 아주머니가 양주로 피란 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울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찌 세상일이 이렇게도 차가 운고, 장례는 누가 맡아서 치렀을까? 대진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더욱더 가슴이 아프다. 고성 수령이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또 약술과 쇠고기 음식 한 꼬치와
꿀통을 보냈는데 服中 이라 받기가 미안했다. 정으로 보낸 것이라 돌려보낼 수 없어 군관에게 주었다.

〔65〕21일(갑술) 오후 2시경부터 비가 내려 농작물이 약간의 생기를 띠었다. 이영남이 다녀갔다. 이원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부대를 크게 동요 시켰다. 진중에서도 이렇게 속이니 그 음흉하고 고약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밤에 바림이 미친 듯이 불고 또 비가 내렸다.

〔65〕25일(무인) 명나라 관원과 선전관들은 어제 취한 술이 쉽게 깨지 않는 모양이다. 아침에 다시 통역관 표헌을 청하여 명나라 장수가 무엇이라고 했는지 물었다. 그런데 명나라 장수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고 다만 왜적을 쫒아 보내려고만 한다고 했다. 또 역관은 “송시랑이 수군의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야불수 (군중의 탐정을 의미하는 중국의 속어)양보를 보낸 것인데, 수군이 이렇게도 장하니 기쁘기 비할 데 없다고 했다.

〔66〕 늦은 아침에 경상도 우수사가 왔다 .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나친 말이 많으니 가소롭다.

〔68〕원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을 혼자서 쓰려고 꾀하던 중 병사의 공문에 따라서 나누어 보내라고 했을 때, 공문서도 내려고 하지 않고 독차지 하려고 하다니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나해 기 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안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 남이 알까봐 두려워했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고 놀기까지 하니, 그 사람됨은 말할 것이 없다.

〔71〕옥과의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잡아서 보내는 일을 성실하 하지 않아서 도피자수가 거의 100여명이다. 그나마 매번 거짓말을 꾸며 왔기 때문에, 이날 목을 베어서 일반인에게 보였다. 거친 바람은 그치지 않고 마음속도 산란하다.

〔97〕 12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세 번 타이르면서도 헤어지는 슬픔을 말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와서는 몸이 불편한 것 같아서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01〕 우수사 우후와 여도 김인영이 활쏘기를 겨루었는데 여도가 7분을 이겼다. 나는 10순을 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20순을 쏘았다. 저녁 때 종 허산이 술병을 훔치려다 붙잡혔기에 곤장을 때렸다.

〔97〕비,비 종일토록 내리고 밤새도록 내렸다. 새벽에 여러 배들이 무사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몸이 불편해서 저녁 내내 누워서 신음했는데 큰바람과 파도로 배들이 안정치 못해서 마음이 몹시 삼란했다.

〔156〕새벽에 비가 잠깐오더니 늦게 날이 갰다. 배 만들 목재를 운반해 왔다. 새벽에 꿈을 꾸었다. 영의정은 이상한 모양새를 갖추었고, 나는 관을 벗은 채로 민종각의 집에 가서 이야기를 하다가 꿈을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알수가 없다.

〔157〕저녁때 윤연이 자기 누이의 편지를 가져왔는데 망언이 많았다. 우스웠다. 버리고자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 있는 듯하다. 결국은 세 아이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15일은 아버님 제삿날이라 오늘부터 업무를 보지 않았다. 밤의 달빛이 밝아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거의 날을 샜다.

〔158〕맑음. 따뜻하기가 봄날과 같았다. 음양이 질서를 잃은 모양이니 그야말로 재변이다. 아버님 제삿날이라 업무를 보지 않고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슬픔과 마음의 회한을 어찌 다 말하랴. 저물어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순천 교생이 교서의 등본을 가지고 왔다.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어머님께서 변함없이 평안하시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상주의 사촌 누이 아들 윤엽이 본영에 이르러 어미의 편지와 자기 편지를 보내왔다. 그것을 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영의정의 편지도 왔다.

〔159〕새벽꿈에 순변사 이일과 만나 많은 말을 하였는데 “이같이 국가가 위태로운 시기를 당해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배짱 좋게 음란한 계집을 끼고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 바깥 여염집에 있으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그것이 무슨 일이며, 또 수군 각 고을과 포구에 나눠 배정된 병기를 육군에서 독촉하기에 바쁘니 이것은 또한 무슨 까닭이냐 하니, 순변사 이일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지개를 켜며 깨어나니 한갓 꿈이었다. 식사 후에 대청에 나가서 업무를 보았다. 조금 있으니 우우후, 금갑도 만호가 와서 젓대를 듣다가 저물어 돌아갔다. 흥양의 총통 만드는 색리들이 와서 재정 상태를 밝히고 돌아갔다.

〔164〕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이경명과 장기를 두었다. 장흥이 방문했다. 그에게서 순변사 이일의 처사가 극히 형언할 수 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를 쓴다는 말을 들었다. 참으로 가소롭다.

〔168〕맑음. 한식. 원균이 포구에 있는 수사 배설과 교대하려고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게 하였더니 불평하는 기색이 많았다. 두세 번 거듭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 너무도 무식한 것이 가소로웠다.

〔170〕비가 걷히는 듯했다. 면과 허주. 박인영 등이 돌아갔다. 이날 군량을 계산하여 쪽지를 붙였다. 충청 우후 원유남이 급히 보고하되, “수사 이계훈이 배에 불을 내고 빠져 죽었으며, 군관과 격군 140여명이 타죽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늦게 우수사 이억기가 급히 보고하되, “견내량의 매복한 곳에서 온 항복한 왜인 심안은기를 문초한즉, 그의 아들 충항을 두고 곧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175〕새벽 2시부터 비가 오더니 오전 6시쯤에 맑아졌다. 해남 현감 최위지와 공사례를 마쳤다. 하동 현감이 두 번이나 기일을 어겼기 때문에 곤장 90때를 때리고 해남 수령은 곤장 10대를 때렸다. 미조항 첨사는 휴가를 고했다. 세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했다. 노윤발이 미역 99동을 따 가지고 왔다.

〔178〕흐리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은 평안하시다 하고 아내는 불난리로 심신이 많이 상해서 천식이 더해졌다고 했다. 큰 걱정이다. 비로소 해 일행이 잘 간 것을 알았다. 활 20순을 쏘았는데 권 동지가 잘 맞혔다.

〔178〕흐림. 오늘은 반드시 본영에서 누군가 올 것 같은데, 어머님 안부를 몰라 자뭇 답답했다. 종 옥이와 무재를 본영으로 보냈다. 포어, 소어, 젓갈 어란쪽 등을 어머니께 보냈다. 아침에 나가 업무를 보았다. 항복한 왜인들이 와서 고하되, “저희 동료 왜인으로 산소란 자가 흉측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죽이겠다”고 했다. 그래서 왜인을 시켜 그의 목을 베게 했다. 활 20순을 쏘았다.

〔180〕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을 뿐인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치는 바가 있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면서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음을 어찌하랴.

〔196〕맑음. 우수사 이억기와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였는데, 병영 군사들에게 떡 한 섬을 나누어 주고, 초저녁에 헤어져 돌아왔다.

〔199〕해평군 윤근수의 공문을 구례 선비가 가져왔는데 김덕령이 전주 김윤선 등과 함께 죄 없는 사람을 때려 죽이고 수군 진영으로 도망해 들어갔다고 하였다. 수색해 보니 9월 초 10일 경에 보리씨를 바꾸러 진에 왔다가 곧 돌아갔다고 했다.

〔201〕이설이 휴가를 청했으니 허락하지 않았다. 늦게 우우후 이정충, 금갑 만호 가안책, 이진 권관 등이 방문했다.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아 공태원을 불러 왜의 정세에 대해 물었다.

〔208〕맑음. 아침 식사 후에 나가 앉아서 군사들에게 한턱 먹이고, 끈난 뒤에 제찰사가 길을 떠나므로 나도 배로 내려왔다. 바람이 몹시 사나워 배가 떠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머무르면서 밤을 지샜다.

〔212〕맑았으나 서풍이 세게 불었다.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여부를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또 치니 ‘임금을 보고 모두들 기뻐하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좋은 괘였다. 식사 후 대청에 나가 앉아서 업무를 보았다. 우우후와 어란이 방문했다.사도도 왔다. 세 위장을 시켜 제찰사가 보낸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웅천, 곡포, 삼천포, 적량도 방문했다.

〔221〕아침에 장계 초안을 수정하고 늦게 나갔다. 장흥 부사, 우우후, 가리포 등이 와서 함께 활을 쏘았다. 지난번에 졌던 군관들 편에서 한턱을 내어 모두 술이 몹시 취해 가지고 헤어졌다. 이날 밤에 너무 취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밤을 밝혔다. 봄철의 피곤한 기운이 벌써 이렇구나.

〔225〕맑음. 새벽에 망궐예를 드렸다. 아침에 경상 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늦게 해남 현감 유형, 임치 첨사 홍견, 목포 만호 방수경 등에게 기한을 어긴 죄로 처벌했다. 해남 현감은 새로 부임했기 때문에 매를 때리지 않았다.

〔229〕종일 가랑비가 오고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늦게 나주 판관이 왔기에 술을 취하도록 권해서 보냈다. 저물 무렵에 박자방이 들어왔다. 이날 밤에 식은땀이 등을 적시고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 심기가 편치 않았다.

〔270〕비변사 낭청, 종 이순지가 방문했다. 울적한 마음을 이기기가 더욱 어려웠다. 윤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식사 후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정으로 술잔을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치 못하고 억지로 술을 마시고 몹시 취했다. 영공 이순신이 술을 가지고 와서 취하며 이야기 했다. 영의정 유성룡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관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들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해 땀이 몸에 흠신 배었다.

〔271〕산소에 나아가 울며 절하고 한참 동안 일어나지를 못했다. 저녁때가 지나서야 외가로 내려가 사당에 절하고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선대의 사당에 울면서 절했다. 들으니, 남양 아저씨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저물어서 집에 이르러 장인, 장모님의 신위 앞에서 절하고, 바로 작은 형님과 여필의 부인되는 제수의 사당에도 다녀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심회가 편치 않았다.

〔271〕일찍 아침 식사를 하고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잠깐 들어 이야기 하는 동안 울이 종 애소를 들여보내 “아직 배오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슬병을 들고 흥백의 집에 왔다고 하므로 홍과 작별하고 흥백의 집에 이르렀더니 ,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둥그러지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


〔271〕늦게 입관했다. 친한 벗 오종수가 진심으로 호상을 정성껏 해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기 어렵다. 관에 대해서는 다른 유감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 수령이 들어와서 행상을 준비하고, 전경복이 연일 진심으로 상복 만드는 일을 돌봐 주니 슬프고 감사한 일을 어찌 말로 다하랴.

〔271〕궂은 비. 배를 끌어 중방포에 옮겨대어,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가다릴 따름이다.

〔281〕 원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드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았으며, 그렇게 해서 날이 갈수록 심히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287〕비, 비 일찍 더나 청수역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게하고, 저물어 단성 땅과 진주 땅의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사짓는 종의 집에 들어갔다. 주인이 반갑게 접대하기는 하나, 잘 방이 좋지 못해서 간신히 밤을 지샜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기름종이 하나, 장지 2축, 백미 한 섬, 참깨 5말, 들깨3말, 꿀5되, 소금 5말, 미지 다섯을 하동 수령이 보내 주었다.

〔294〕새벽에 닭이 세 번 홰를 쳐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 진중에 이르니 달이 훤히 밝았다. 진에 이르니 원수와 종사관이 함께 나와 앉았다. 내가 들어가 보니 원수가 내게 원균의 일을 말하되 “통제사의 일은 말 할 수 없소. 조정에 청하여 ‘안골과 가덕을 모두 무찌르고 뒤에 수군이 나가서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

〔300〕새벽에 열과 변존서를 보낼 일로 앉아 날이 새기를 가다렸다. 일찍 아침식사를 하였는데, 정을 스스로 억제치 못하고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구례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염려된다. 열과 변존서 등이 막 떠나자 종사관 황여일이 와서 한참동안 이야기 했다. 늦게 서철이 왔다. 정상명이 종이로 말가죽 만들기를 끝냈다. 저녁에 홀로 빈방에 앉아있노라니 많은 생각이 끓어올라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거리기만 했다.

〔309〕일직 길을 떠나 낙안에 이르니 5리 밖까지 많은 사람들이 보기 위해 나왔다. 흩어져 달아난 까닭을 물으니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변사 이복남이 왜적이 쳐 들어온다고 떠들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까닭에 백성들도 도망가는 것” 이라 했다.

〔311〕날이 새기도 전에 곽란이 일어 몹시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소주를 마셨다. 이윽고 인사불성이 되어 깨어나지 못할 뻔 하였다. 밤을 새웠다.

〔312〕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마음이 복잡하다.

〔312〕그리고 내가 탄 배를 먼저 적에게 향해 달려들면서 포를 쏘니, 적군은 당해내지 못하고 자정께 달아났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었다.

〔324〕새벽 2시쯤 복통이 일어났다. 몸을 차게 한 까닭인가 싶어 소주를 마셔서 치료하려 했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었다. 거의 구하지 못할 뻔 하였다. 토하기를 10차례를 하고 밤을 새웠다.

〔331〕그래, 다마시다. 하고 말하였다. 곧 명령하여 다마시의 시체를 토막내 적에게 보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였다.

〔336〕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헛디디어 내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 않았는데, 끝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감싸 아는 것 같은 형상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중략) 미처 봉함을 뜨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자가 씌어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했다.

〔348〕눈보라 치고 몹시 추웠다. 배 조방장이 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왔는데, 평산 만호와 영등 정응두는 오지 않았다. 부찰사 호이상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해가 다 끝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마음이 더욱 그랬다.

〔357〕17일 어제 복병장 발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로부터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모두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 이순신의 일기는 17일로 절필 되었고 이틀 뒤인 11월19일 새벽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3. 내가 저자라면

장군이라 부르오리까, 아니면 충무공이라고 부르오리까.

임진년에서 시작하여 갑오년을 거쳐 병신년까지는 그냥 가슴이 미어지고 때로는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웬 가슴앓이를 그렇게도 많이 하셨는지요? 달은 왜 그렇게 자주 떴으며 비 또한 자주 내렸더군요. 물론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세상이 뜻 같지 않고 사람이며 조정 또한 정도를 벗어날 때 그 답답함 오죽하셨겠습니까. 범부는 포기했겠지요. 아님 타협을 했거나, 어쨌든 당신 같은 결정은 그 누구도 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 정말 답답했습니다. 원균을 비롯한 주위의 부당한 처사로부터 오는 절망과 답답함을 당신이 이끌어간 방법 밖에 없었을까요? 가소롭기야 말해 무엇 하오리까. 그러나 대 타협이라든지 장수 대 장수로 원균을 철저하게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시지는 않으셨는지요. 저는 당신의 일기를 따라 그 긴 전란의 시기를 함께 겪어 가면서 원 균에게도 작은 연민의 정을 보냈습니다. 그의 세세한 면모를 엿볼 기회가 없어서 성급한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도 알고 보면 조선의 장수였지요.

〔294〕새벽에 닭이 세 번 홰를 쳐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 진중에 이르니 달이 훤히 밝았다. 진에 이르니 원수와 종사관이 함께 나와 앉았다. 내가 들어가 보니 원수가 내게 원균의 일을 말하되 “통제사의 일은 말 할 수 없소. 조정에 청하여 ‘안골과 가덕을 모두 무찌르고 뒤에 수군이 나가서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
(원균은 왜군의 전선이 우리보다 훨씬 많으니 정면승부를 피하고 수륙양면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역자 주)
제가 너무 무례했나요.)

그러나 이는 당신의 업적이나 성품에 토를 달고자 하는 의도는 아닙니다. 고뇌에 찬 당신을 차마 지켜보기가 안타까워 드리는 말씀이지요
.
당신의 달은 항상 우수에 차있더군요. 애간장을 다 끊어내고 새벽녘까지 잠 못 이루게 하는 서러운 달 말입니다. 그러하실 때 저나 임어당을 불러 실컷 취해보는 것도 좋았을 법 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때론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는 것도 가슴에 쌓인 울분을 씻어내리는 좋은 방법이 되곤 하거든요. 저도 ‘달’ 과는 당신처럼 슬픔의 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흔을 훌쩍 넘기고도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요즈음은 세월 때문인지 아님 체력의 한계인지 다소 옅어지긴 했습니다.

당신께서 전사하시고 생의 끝자락에서 보내신 노량, 남해, 하동은 저와의 연이 깊은 곳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숙부님의 근무지가 노량이기도 했지요. 초등학교 시절에 익혀 부르던 노래, 당신을 기억하던 노래는 아직, 낱글자 하나 빠트리지 않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섬진강 맑은 물은 우리의 결백, 노량 앞 바닷물은 충무공이다. 오곡이 무르익는 기름진 옥토 ----,

오늘 새벽녘에 당신이 백의종군하시던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 길은 저의 어머님이 당신처럼 눈물뿌리면서 다니시던 길이더군요. 저의 어머님도 하동 하며 남해, 그리고 정수부근을 피눈물 흘리며 다니셨던 애 닮고 한 서린 세월을 간직하고 계십니다. 저도 그 때 어머니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면 한 잠 이룰 수 없지만 어머님 저 탐탐치 않게 생각하심을 핑계 삼아 문안인사조차 자주 드리지 못하는 불효자식이옵니다.

〔287〕비, 비 일찍 더나 청수역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게하고, 저물어 단성 땅과 진주 땅의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사짓는 종의 집에 들어갔다. 주인이 반갑게 접대하기는 하나, 잘 방이 좋지 못해서 간신히 밤을 지샜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기름종이 하나, 장지 2축, 백미 한 섬, 참깨 5말, 들깨3말, 꿀5되, 소금 5말, 미지 다섯을 하동 수령이 보내 주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당신이 우리 마을 옥종을 지나치실 때 하동수령이 그냥 지나치지 않으심이 감사하고 또 감사해서 몽땅 옮겨 적어보았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말씀드리오건데, 저는 당신의 병영일기를 이전에 다 읽어 보지를 못햇습니다. 말씀드리기 무엇하지만 알고 있어야 할 선가지만 알았던 게지요. 그러나 지난 주 월요일부터 접하기 시작한 당신의 일기는 처음에는 저를 부끄럽게 만들고(일기를 꾸준히 쓰지 못함에 대한 부끄러움), 수요일경에는 저를 답답하고 안타깝게 만드셨더랬습니다.

〔300〕새벽에 열과 변존서를 보낼 일로 앉아 날이 새기를 가다렸다. 일찍 아침식사를 하였는데, 정을 스스로 억제치 못하고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구례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염려된다. 열과 변존서 등이 막 떠나자 종사관 황여일이 와서 한참동안 이야기 했다. 늦게 서철이 왔다. 정상명이 종이로 말가죽 만들기를 끝냈다. 저녁에 홀로 빈방에 앉아있노라니 많은 생각이 끓어올라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거리기만 했다.

이 부분의 당신 일기에서는 당신의 누이동생이 되고 싶었던 제 마음 아실련지요. 함께 울고 함께 통곡하고 싶었던 거지요.

지금 이 시각은 너무도 행복합니다.
당신에 대한 연민과 측은의 마음도 사라지고 오직 엎드려 존경의 염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한결 같은 모습 그 절개와 지조. 충성스러움. 이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명석한 분들, 당신을 받들어 모실 줄 아는 지혜로운 분들의 깊이를 알겠습니다. 임어당의 한가론보다 당신의 그 한 맺힌 ‘난중일기’를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현명한 우제가 될 수 있음을 당신 앞에 엄숙히 선서할 수 있습니다.
옛날 중국 여자(呂子)의 말씀에 저의 마음을 담아봅니다.

“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형용이 있는 세 가지 도둑을 두려워 할 줄 알지만 형용이 없는 도둑을 두려워 할 줄 모른다. 욕심이 사람에 대해 도둑이 됨은 전쟁보다 더한 것이다.”
집착을 들어내고 지혜로움과 손 맞잡아 당신에게로 다가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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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13 06:34:38 *.72.153.12
논문 발표 하시랴 책 읽고 리뷰 쓰시랴 힘드셨을 우제님과 함께 달빛 아래서 술 한잔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 고뇌하다 자주 아픈 이순신 장군도 같이 했으면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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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6.13 08:56:31 *.114.56.245
한 잔 하고픈 연구원 모두 모이기로 했다. ^-^ 그런데 지금 한잔 속에 달은 어렵겠다. 달 없으면 대신할 벗하고 마시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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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06.13 09:43:26 *.152.82.31
어느덧 님의 팬이 되어 있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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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6.13 10:02:23 *.114.56.245
올인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황송함.
언제 제가 한 잔 대접해도 되남유. 직접만든 농주는 다음기회로 미루고 이 번에는 그냥 소주도 좋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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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6.13 21:12:40 *.142.242.216
아.. 괴롭습니다.
왜들 이러신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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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근
2007.06.16 11:04:07 *.124.218.100
샬롬!
항상 독특한 향기를 품어내는 글을 쓰셔서, 그것 자체가 감동이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순신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냥 괴로운 것은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늦게 공부하신다니 몹시 힘들겠습니다. 대충 다니고 있는 저도 힘이 드는데....ㅋㅋㅋ
화이팅 하십시오. 언제 쌤의 용안을 한번 뵐 수 있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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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6.16 13:16:22 *.114.56.245
저도 뵙고 싶네요. 꼭꼭 숨으셔도 다 안답니다.
남자 천사라는 것. ^-^ 참 천사도 성별 구분이 가능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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