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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3일 04시 47분 등록

                [사진] 서울 종로의 이순신 장군 상

들어가며...

이순신 장군!
내게는 거룩한 영웅으로만 여겨졌던 그였다. 『난중일기』를 읽으며 나는 이순신을 좀 더 알게 되었다. 보다 잘 알게 된 이순신은 이전보다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그는 분명 비범한 인물이지만, 그의 삶 속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의 평범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비범한 인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승화시킨 불굴의 의지와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온 몸으로 받아내는 과정에서 연약한 모습을 보여준 범인이었던 동시에, 극심한 고난에도 쓰러지지 않고 시대를 변화시킨 위인이었다. 범인다움과 위인다움이 교차하였던 『난중일기』의 독서여정이 나에게 소중한 경험이 된 것은 세종로에 우뚝 솟은 영웅의 동상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 깨어진 편린이 내 삶 속 곳곳에 침투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 편린이 내 일상을 변화시켜가길 기대한다. 그 변화가 평범한 나를 비범함으로 점차 이끌어주길 소망한다.

■ 저자에 대하여

● 이순신 李純臣 (1545~1598)


“어쩌면 이순신은 역사상 가장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지만 또한 가장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던 인물일지도 모른다. 백전백승의 불패 신화로 미화되고 박해와 시련의 서사만 과잉 부각됨으로써 그의 생애가 왜소화되어왔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범접할 수 없는 영웅이 아니었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초인이나 신은 더구나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때로 다른 인간을 증오했고, 전쟁의 불확실성 때문에 동요했고, 냉혹한 군율로 부하들의 목을 베었고, 육체적 질병으로 땀을 흘리며 신음했고, 알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초조하게 점을 쳤고, 가족의 안부에 노심초사했고, 피붙이를 잃은 슬픔으로 통곡했다.
이순신의 생애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명상적 우수에 잠기고 고독과 울분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은 적들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그는 늘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쟁터에 도사린 피로와 결핍, 소름끼치는 공포, 예측불허의 우연,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는 그도 초연할 수 없었기에 꿈자리마저 사나웠다. 그를 신으로 받들었던 종교의 사제들은 그의 인간적 고통과 슬픔에 애써 눈감은 채 기념비를 세우는 데만 열중했다.”

『인간 이순신 평전』의 저자 박천홍의 말이다.『난중일기』를 읽으며 느꼈던 소감과 인간 이순신에 대한 나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해 주었다. 이순신은 전장에서는 영웅다운 용맹과 탁월한 전략으로, 일상에서는 단호한 품성과 엄격한 규율로 비범한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슬픔과 고통에 힘들어하고, 비극적인 시대를 온몸으로 맞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하는 면모도 보여 주었다. 나에게 이순신 장군은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자신의 그 인간적인 나약함을 훌륭히 이겨낸 교훈적인 너무나도 교훈적인 모델이다.

이순신 장군이 주는 감동은 한계를 극복하여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어두운 현실에서 비애에 젖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쓰러지거나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에는 그가 몸이 불편하여 신음하는 장면이 얼마나 많았던가. 국난으로 인하여 절망하며 시기를 탓하던 적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그는 일본군을 향하여 전진하였고, 그 와중에도 그의 내면은 여전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모든 싸움에서 이겼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조정과의 싸움에서.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그는 승리했다.

그 승리는 모든 조건이 갖춰진 넬슨 제독의 승리와는 다른 것이었다. 정부의 지원도, 최신 성능의 무기도 없었다. 몸이 건강한 편도 아니었다. 이순신의 승리는 ‘당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승리였다. 그래서, 이 위대한 영웅에게서 ‘그는 원래부터 나와는 달랐어’라는 이질감이 아닌, ‘그래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의 비범함 가운데에서 평범함을 발견하게 되고, 그 평범함을 이겨 낸 그의 남다른 극기정신을 생각하니, 이순신의 패러독스적 교훈이라 할 만하다. (이 점은 리뷰 부분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겠다.)

이순신은 덕수 이씨 출신으로 사화로 몰락한 사림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원래 뼈대있는 가문이었다. 이순신의 고조부 이효조는 통례원 봉례 관직(정4품)까지 올랐고, 증조부 이거는 정3품에 해당하는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은 낮은 관직인 종8품의 봉사를 지냈다. 갑자기 가문이 고위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중종 때에 발생한 기묘사화(1519) 때문이었다. 당시 정치를 장악한 훈구 세력에 대항한 세력이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였다. 사림파는 성리학에 바탕을 둔 도학 정치와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을 요구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다. 훈구 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하였고, 이 충돌은 보다 세력이 우세했던 훈구파가 사림 세력을 모두 숙청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 때 이순신의 아버지 이백록도 사림과 친교를 맺었다가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했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이 관직에 나갔느냐에 관해서는 기록이 다르지만, 이백록이 사화로 죽음을 당한 만큼 관직에 있지 않았다는 의견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이순신이 태어날 때는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참변을 당하였고, 아버지도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나라에서 주는 보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두 명의 형이 있었고, 동생이 하나 있었다. 형제들은 모두 공부에는 별로 재능을 보이지 못했다. 이순신도 문인으로 입신양명을 위하여 22세까지 별다른 소득없이 공부를 계속했다. 21살 에 결혼하였으니 이미 지아비가 된 후였다. 그의 나이 22살 때, 그는 돌연 무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6년 동안 무과 시험 공부를 하여 28세가 되는 8월에 시험을 보았으나 떨어졌다. 그후 공부를 더하여 1576년 2월, 32세의 늦은 나이로 병과에 합격했다. 이 시험은 3년에 대략 28명 정도를 뽑는 어려운 시험이었는데, 이 중에서 이순신은 12등을 하였다.

조일전쟁 전의 이순신은 승진과 좌천을 거듭하는 그저 한 사람의 무인에 불과했다. 그는 조일전쟁이 일어난 임진년의 전 해(1591년)에 전라좌수사(정3품)로 임명되었다. 지금의 소장(★★) 계급에 해당된다. 소위, '투 스타‘라고 불리는 막강한 지위였다. 그런데,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기 전의 이순신의 직위는 고작 ’현감‘이었다. 지금의 군대 계급과 비교하면 대위 정도에 해당된다. 일개 대위가 소장(★★)이 되었으니, 아무리 인재가 부족했다는 선조의 이유를 들어봐도 언뜻 이해하기는 힘들다. 대신들이 그대로 받아들일 리가 만무하다.

이순신 파격 승진의 비결은 유성룡에게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이순신을 보아온 유성룡은 이순신의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능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훗날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인재를 알아보는 인물이 없음을 탄식했다. “아아, 요즘인들 그러한 사람(이순신 같은)이 없으리오마는 특히 알고 천거하는 사람(유성룡 같은)이 없음을 어찌하랴.”

이후, 임진년(1592년)에 조일전쟁이 발발했다. 이때의 이순신의 면모는 『난중일기』를 통하여 직접 알아보기로 하자. 난중일기는 단순한 전쟁일지가 아니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과 적을 향한 적개심, 또한 가족을 향한 사랑이 묻어나는 인간 이순신을 알 수 있는 일차 자료이다. 난중일기 중에서 ‘내 마음을 치고 들어온 글귀’는 다음과 같다. (몇몇 내용은 책의 페이지를 무시하고 이순신의 어떤 특정한 모습을 주제로 하여 묶어 정리하였다.)

■ 내 마음을 치고 들어온 글귀

들어가면서

[4] 그가 강인한 정신과 기개로 무장한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가 자연에 대한 낭만도 느낄 줄 알았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을 느낀다. 그의 유묵遺墨에 “어느 날 신선의 별장에 이르렀을 때 매번 서호 월악산의 구름과 수죽의 경치를 그리워하여 마음이 이에 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 사실에서 그런 감성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5] 그는 항상 죽기를 각오한 자세로 임전臨戰하였으니, 이른바 견위수명見危授命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특히 전략과 전술에도 뛰어나서 지리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는 등 국가 방어에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란 중에 늘 국가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느라 개인의 가정사는 돌볼 겨를도 없었고 그에게는 오직 진중 생활이 곧 일상적인 생활 무대였던 것이다.
→ 견위수명 : 나라의 위태(危殆)로운 지경(地境)을 보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을 말함

[5]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곧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나온다’는 말이 생각난다.

임진년 (1592년 4월 13일 일본, 21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 침입)

[13]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15]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날 일도 짐작할 만하다.

이순신의 감성적인 면모
[17-18] 선창으로 나가 쓸 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 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2천여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서 우후 이몽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함께 새 봄의 경치를 즐겼다.
[20] 2월 12일 침렵치를 구경했는데 매우 조용했다. 군관들도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이 시 절구를 읊었다.
[21] 2월 29일 비가 온 뒤라서 산꽃이 활짝 피었는데 그 경치의 빼어남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20일 영주(고흥)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그림과 같았다.
22일 경치의 빼어남이 이 경내에서 제일이었다.

군율에 엄격한 이순신
[18] 쌓은 곳이 매우 좋아 전혀 무너질 리가 없었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23]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에 북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외딴 섬인지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하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25]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불성실하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26] 아침 식사 뒤 나가 앉아 군기물을 점검했는데, 활,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 등이 깨지고 헐어서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색리, 궁장, 감고 등의 죄를 따졌다.

[33] "부산의 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40]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을 비오듯 마구 쏘아대었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모든 왜적이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모조리 섬멸하여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41] 왜장 7명의 머리를 베었고 나머지 왜병들은 육지로 내려가 달아났지만, 나머지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계사년 (1593년)

[55]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술을 함부로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욱 말로 나타낼 수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견원지간인 원균
[59] 얼마후 진도의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할 일이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원균 때문이다.
→ 모두가 원균 때문이라는 표현에서 왠지 충무공의 인간적인 면모가 풍긴다.
[60]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흉악하고 음험함이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88] 그(원균)의 허튼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88] 조금 뒤에 윤동구가 그의 대장 원균이 올린 장계의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의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97] (원균을 가리켜) 가소롭다. 명나라의 고관이 보낸 화공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심하여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123] 그러나 원수사와 그의 군관은 평소에 헛소문을 잘 내니 믿을 수가 없다.

[84] 글을 적기로 생각하면서도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다시 계속한다.

[89]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 신음하던 중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무르는 것은 무슨 교묘한 술책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았던 차에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더 탄식이 일고 눈물에 잠겼다. 점심 때 윤봉사에게서 “서울 관동의 숙모가 양주 천천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어찌 세상사가 이렇게 가혹한가. 장사는 누가 맡아서 치렀을까. 대진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더욱 더 애통하다.
→ 이순신이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신음하다. 그의 가족이 피난 중 죽다. 이로 인해 슬퍼하다. 이순신의 영웅적인 업적 뒤에는 이러한 비극적인 개인사가 있다.

[102]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13] 이 날 밤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 무엇이 충무공에게 이런 근심을 안겨다 주었을까? 전장에서의 두려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갑오년 (1594년)

[156]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

[164~167] 몸이 불편했던 이순신. 갑오년 3월에 거의 한 달 동안을 꼬박 앓았다. 이는 4월에도 마찬가지다.
초7일_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초8일_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다.
초10일_병세가 차츰 덜해졌지만 열기가 치올라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14일_몸은 나은 듯하지만 머리가 무겁고 불쾌했다.
16일_몸이 매우 불편하다.
17일_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18일_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21일_몸이 불편하다.
23일_몸이 여전히 불편하였다.
27일_몸이 좀 나은 것 같다.

[173] 갑오년_4월 25일_새벽부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괴로워했다.

[176]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침침하여 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190] 영의정 유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만들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 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스스로 겉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더욱 심해져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을미년 (1595년)

효자 이순신
[239] 정월 초1일_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261] 5월 15일_어머니께서 평안하신지 소식을 듣지 못한지가 벌써 이레나 되니 몹시 애가 타고 걱정이 된다.
[261] 16일_어머님은 평안하시다고 하지만, 아내는 불이 난 뒤로 심신이 많이 상하여 천식이 더해졌다고 한다. 매우 걱정이 된다.
[304] 병신년 1월 초1일_저녁에 어머니께 하직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몹시 심란하여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363] 병신년 8월 12일_오랫동안 어머님의 안부를 듣지 못하여 매우 답답하다.
[365]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매우 다행이다.
[368~369] 윤8월 12일_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10시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369] 13일_어머니를 곁에 모시고 아침 식사를 드시게 하니 대단히 즐거워하시는 빛이었다.
[387] 4월 11일_새벽꿈이 매우 심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덕이를 불러서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도 말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종을 보내어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387-388] 정유년 13일_일찍 식사 후에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나갔다.(중략)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에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적었다.
[271] 정유년 7월 초1일_혼자 다락에 기대어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재목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내내 뒤척거렸다.

[287] (우수사와 경상우수사가 와서 이별주를 함께 나누고 헤어질 때, 선수사(거이)와 작별하며 이순신이 써 준 시 한 수)
북쪽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하더니
남쪽에 와서도 죽고 삶을 함께 했네
오늘 밤 달빛 아래 한잔 술 나누고 나면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지겠구려

[292] 이 날밤 바람은 몹시도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은 대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리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었다.
→ 이순신은 이렇게 자주 고민과 염려로 잠을 뒤척였다.

병신년 (1596년)

[318] 2월 17일_이 날 어두울 무렵에 서풍이 세게 불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들이 떠나간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다. 답답한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 봄기운이 사람을 괴롭혀 몹시 노곤하였다.

[339-340]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스스로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생각에서였다.

[341] 10일_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11일_몸이 불편하여 일찍 들어와 신음했다.

[375] 9월 12일_저물 무렵 무장(전북 고창)에 이르러 여진과 잤다.
9월 15일_여진과 함께 잤다.

[377] 9월 27일_일찍 출발하여 어니미를 뵈러 갔다.

정유년 1597년

[382] 한산도가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찰 차고 깊은 시름할 때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
정유년 중추 이순신 읊다

[389] 19일_기묘_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394]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밖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95]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말없이 걱정하여 주는 터이라 마음 아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가. 왜 죽지 않는지.

[396] 원(원균)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을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 p.458

[427]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하던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을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장의 잘못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중략)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440] 적선 1백 30여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고 했다.

[440~441]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차 다가와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 중군의 영하기와 초요기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왔다.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곧장 적진에 들어가 교전하려 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기에 안위의 격군 7, 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 대고 내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소아대어 적선 2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다. 우리를 에워쌓던 적선 30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444] 대저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사의 위태함은 마치 머리털 하나에 천균(3만근)을 매단 것과 같아서, 이는 신하된 자가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떠난다는 말을 진정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될 것이거늘, 하물며 어떻게 입 밖에 낼 수가 있단 말인가.

[445] 쇠한 몸을 피눈물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되 일의 형세가 여기까지 왔으나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죽을 때가지 계속 주장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선 그들의 계책(화친)을 따라 자신이 그 사이에 간여하여 일을 낱낱이 꾸며 맞추어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혹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이치가 있을 것이다. 강의 계책은 이러한 데서 나오지 않고 떠나가기만을 구하고자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내맡기고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속 정유년

[448] 이순신 장군의 글씨 “必死卽生, 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458]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나 적합할까 대장감이 못되는 사람인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임명하여 보낸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 p.396

[460]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리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69-470] 10월 14일_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루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10시 경에 비가 내렸다.

[471] 어두울 무렵 코피를 한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말로 다하리요. 이제는 죽은 혼령이 되었으니 불효를 이토록 저지를 줄을 어찌 알 것인가.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수가 없었다.

무술년 (1598년)

[493] 나로도에 명나라 도독 진린과 함께 술을 마셨다.
→ 9월 16일, 17일 이틀에 걸쳐 충무공은 진린과 함께 술을 마셨다. 어떤 얘길 나눴을까?

[493] 편집자주 751. 진린. 명나라 광동 사람. 선조 30년(1597년)에 수병제독이 되어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1598년에 수로의 왜적을 정벌하는데, 처음에는 위세를 부리며 우리 군사를 침범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등 말썽을 부렸다. 그러나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에 감복하여 수군의 협공작전에 적극 응하였다.

[503] 11월 19일 사경(새벽 2시경)에 적이 도독을 매우 급하게 포위하자, 공이 곧바로 전진하여 그를 구하였다. 그리고 친히 시석을 무릅쓰고 손수 스스로 북을 치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아 쓰러졌는데, 운명하기 직전에 휘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도독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져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그리고 남민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중략)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계상(고을 경계위)에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 『난중일기』를 읽고 사부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사부님께서는 지난 번 나의 과제 댓글에 이렇게 쓰셨다.
“역사는 미래에 닿아 있다. 미래를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인 것이다. 그대가 역사를 한 달 더 하고 싶다면 걱정하지마라. 이제 개인의 역사, 즉 개인사로 들어 갈 것이니 한 개인에게 투사된 그 시대를 집어보라. 그리고 그대에게 투사된 현대를 그려보라. 끊임없이 연결하라. 책과 책을 연결하고 사상과 사상을 연결하고,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그들과 그대를 연결하라.” 이 말씀이 이번 달에 주어진 과제의 실마리다. 실마리치고는 꽤 난해하다. 실타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나는 앉아서 실타래를 한 줄, 두 줄 풀어내는 집중력과 인내력이 없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선생님이 주신 실마리는 실타래만큼 복잡하지 않다. 그저 조금 난해할 뿐이다. 키워드가 몇 가지 등장한다. 역사, 미래, 현대, 그리고 연결. 이 키워드의 중심에 ‘나’가 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한 개인에게 투사된 그 시대를 집어보자. 이순신에게 투사된 시대는 어떠한가? 조일전쟁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조정은 하늘의 기운처럼 드리워진 전쟁의 암시를 끝내 무시했다. 이렇게 전쟁의 조짐이 이곳 저곳에서 보일 무렵(1591년)에 이순신은 변방의 장수로 임명되었다. 『난중일기』를 읽으며 마치 전쟁이라는 불운이 그의 어깨 위에 운명 지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애였을지라도 나라와 민족에겐 엄청난 축복이었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기 불과 이틀 전에 거북선이 완성되었음을 보니 그 축복까지도 운명처럼 이뤄진 것 같다. 온 나라가 전쟁 가능성을 부인할 때, 그는 임진년 4월 일본군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묵묵히 군기물을 점검하고 부하들의 기강을 다잡았다. 꼼꼼하게 그는 전쟁을 준비하였다. 마치 운명처럼.

그의 일기를 들춰보자. 운명처럼 전쟁을 준비한 그의 모습이다.
“쌓은 곳이 매우 좋아 전혀 무너질 리가 없었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에 북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외딴 섬인지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하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불성실하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아침 식사 뒤 나가 앉아 군기물을 점검했는데, 활,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 등이 깨지고 헐어서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색리, 궁장, 감고 등의 죄를 따졌다.”

『인간 이순신 평전』을 쓴 박천홍은 이순신을 비극적인 인간으로 묘사했다. “이순신은 비극적인 인간이었다. 그의 시대가 비극적이었고, 그의 개인사 또한 비극의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난중일기』를 읽는 내내, 침통함과 슬픈 기운을 직접 느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아들과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들어야 했고, 밖으로는 일본군과 싸웠으며 안으로는 자신에 대한 조정의 불신과 싸워야 했다. 또한 육체적 질병으로 신음해야 했고, 알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점을 치기도 했다. 그야말로 비극의 시대를 비극적인 운명으로 살다 간 비극의 영웅이었다. 그의 비극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비록 지금에야 민족의 성웅으로 추앙받지만, 이것은 충무공의 사후에 즉각 얻은 명성은 아니었다. 이순신과 자주 비견되는 넬슨은 사망 후에 곧바로 영웅 대우를 받으며 초국가적인 명성을 날렸지만, 이순신의 기념비적인 업적은 국왕과 대신들의 오랜 논란을 거친 후에야 겨우 인정을 받았다.

비극적인 시대나 비극적인 가정환경에서 태어나는 경우, 대개의 경우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위대한 영혼과 힘을 가진 사람은 늙은 개처럼 머리를 돌려 자신의 꼬리를 핥는 것을 거부한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이다. 순간적인 자기 연민에 빠져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이순신도 여러 번 자신의 시대를 한탄하였다. 난중일기 정유년 5월 8일과 9월 8일에 각각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고 썼다. 때로는 난국이 영웅 탄생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반면, 범인에게는 난국이 자기 연민의 조건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시대적인 비운에 굴복하지 않았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대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비극적인 시대에 자신을 내던져 자신의 꽃을 힘껏 피워냈다. 그 꽃은 화려한 아름다움이기보다는 비장한 결의가 깃든 숭고함의 향기를 조선의 바다에 흩날렸다. 조선의 병사들은 그 향기에 취해 승전가를 높이 올렸고, 일본의 병사들은 그 향기에 질식해 고개를 떨구었고, 목숨을 내놓았다.

이것이 이순신에게 주어진 시대상황이었고, 그 상황을 온 몸으로 이겨낸 이순신의 모습이다. 요컨대, 이순신은 불운한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동시에, 암흑의 시대를 딛고 일어선 위대한 영웅이었다. 영웅은 시대의 요청에 화답하여야 한다. 시대가 창업을 필요로 한다면 나라를 일으키고, 시대가 수성을 요청한다면 길이 보존하고 지켜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어떠한 시대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가? 고민해 볼 일이다. 동시에, 나의 문제에 함몰되어 시대의 변화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 시대를 잘 읽어내어, 나를 잘못된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분별하자. 그리하여 내가 있는 곳에서 시대의 요청에 화답하기 위하여 내게 주어진 삶을 힘껏 살아내자. 때로는 시대가 어두울지라도 이순신처럼 밝은 미래를 바라보자. 온 몸으로 이 시대를 맞으며, 불굴의 의지와 개척정신으로 한발짝, 한발짝 전진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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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6.13 09:40:07 *.114.56.245
이렇게 진한글을 쓰려고 마지막으로 올렸군요. 장합니다.
글이 글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가와 미풍이되고 때로는 광풍도 되고--- 좋은글 감사해요. 희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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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6.13 09:45:59 *.99.241.60
주제별로 묶어서 인용한 것이 읽기가 좋았다.
그리고 시대상황과 연결한 부분이 정말 좋구나.

비극적인 시대에 자신을 내던져 자신의 꽃을 힘껏 피워냈다..공감백표

다시 찾은 너다움을 느끼게 한다.
좋은 글 잘 읽고 간다. 희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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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수
2007.06.13 16:39:01 *.84.6.38
이 한편의 글이 나오기까지의 여정이 전쟁을 준비하는 이순신장군의 여정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희석님이 여물어져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불굴의 의자와 개척정신으로 한발짝, 한발짝 전진해 나가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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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6.13 21:08:52 *.142.242.216
이 사람이 정말...

아무리 어제의 나와 경쟁한다 하지만
이런 글을 읽으면 자극을 아니 받을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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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7.06.17 08:04:28 *.134.133.173
정희누님.
고마워요. '진한 글'이라는 표현에 무척 기분이 좋아집니다. ^^

영훈형.
문득 형의 팔베개가 생각나네요. 제 기억으로는 누구나의 팔을 베고 누운 것이 처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참 따뜻했지요.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처럼 형은 저에게 따뜻함을 안겨주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감동적이네요. 고마워요. 오늘의 저 칭찬에도 감사~ ^^

양수형님.
당신의 밝고 맑은 눈과 웃음을 잊을 수가 없네요. 안성에서 형님을 처음 보았던 순간에 아, 나도 저런 웃음을, 저런 눈망울을 가지고 싶다, 라는 생각을 가졌었지요. 그 비결을 팀구호 발표 때에 조금 알 수 있었지요. ^^ 앞으로 형님을 더욱 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호정누나.
정말~?
누나의 이런 댓글을 읽으면 저도 정체되어 있을 수 없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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