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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6일 16시 41분 등록
[백범일지] 아름다운 사람 김구 선생님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니 그 이전에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은 어떠한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백범일지>를 읽어보자.

김구 선생님에 대해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애국자로서의 이미지 이면에 는 인생의 굴곡이 많았어도 끝까지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으셨던 또 다른 김구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

어릴 적 천연두를 앓고 흉한 곰보자국이 선명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관상학 경전인 <마의상서>를 공부하며 외적수양보다는 내적수양으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사춘기시절에 결심했던 내면의 깊이가 느껴지는 청소년을,

많은 갈등 속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왜놈을 죽이고도 다른 곳으로 피신은커녕 떳떳하게 감옥으로 향한 청년기의 의기남아를,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지께서 손가락을 자른 것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허벅지 살을 떼어내어 살은 고기로 피는 약이라 하여 드시게 하면서도 자신은 아버지보다 못한 불효자라 자책하는 자식을,

한때 동학교도 접주로, 또 한때는 법명이 원종인 스님으로 지냈지만, 몽매한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교육 밖에 없다는 신조를 갖고 신교육을 장려하고자 기독교에 몸담은 진정한 자유인을,

오랜 감옥생활 속에서 혹독한 고문에 굴하지 않으며
“후일 우리나라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p254)
는 마음을 가진 참교육자를,

복역 중에 독립정부의 문지기를 소원하면서 임시정부의 일을 시작해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자신이 주도한 것임을 상해신문에 당당하게 발표하고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하는 소신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진정한 의리인을,

해방이후 임시정부의 주석 자격을 포기하고 일개 개인 자격으로 고국 땅을 밟으면서도 끝까지 통일정부에 대한 소망을 갈구하다 같은 민족의 총에 의해 죽음을 당한 안타까운 정치가를,

가족과 제대로 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해 미안한 두 아들에게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지나온 세월을 자상하게 글로 이야기하는 한 아버지를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인류의 행복은 인의(仁義)에서 비롯된다는 철학을 피력하면서 자식의 이름까지 인(仁)과 신(信)으로 붙인 아름다운 사람 김구 선생님께서 만약 셋째 아들을 낳았다면 어떤 이름을 붙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1. 저자에 대하여(백범 연보 참조)


1876년(1세) 음력 7월 11일(양력 8월 29일) - 안동 김씨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남. 아명은 창암.

1878~79년(3~4세) - 천연두를 앓음.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스리듯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벼슬자국이 생김.

1880~82년(5~7세) - 5세 때 강령 삼가리로 이사. 아버지 숟가락 부러뜨려 엿을 사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음. 7세 때 해주 텃골 본향으로 다시 돌아옴.

1883년~86년(8~11세) - 아버지는 불평이 많아 양반을 구타, 도존위에 천거되었다가 3년이 못되어 면직. 1884년 4월 큰아버지 백영 사망. 1885년 어릴 때 젖을 준 핏개댁 사망.

1887년(12세) - 집안 어른이 갓을 쓰지 못하게 된 사연을 듣고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 아버지 청수리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다 글방을 차려줘 공부를 시작함.

1888~89년(13~14세) - 4월에 할아버지 김만목 별세. 아버지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전신불수, 호전되어 반신불수. 부모님은 무전여행으로 문전걸식하면서 고명한 의원을 찾아 떠돌아다님. 백범은 큰 어머니댁, 장연 재종조 누이댁 등을 전전함.

1890~91년(15~16세) - 1890년 4월 할아버지 대상. 그 직후 부모님과 더불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서당에 다님. 서당 선생의 수준에 회의를 느낌. 아버님, <토지문권>등 실용 문서를 배울 것을 권함. 이와 아울러 <통감>, <사략> 등을 읽음. 정문재에게 면비 학생으로 <대학>과 한, 당시와 과문 등을 배움.

1892년(17세) 임진년 경과에 응시하여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 공부 폐지.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공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 그 외 ,지가서>, <손무자>, <오기자>, <육도>, <삼략> 등을 탐독. 가문의 어린이를 모아 1년간 가르침.

1893년(18세) - 정초에 포동 오응선을 찾아가 동학 입도, 김창수로 개명. 동학 입도 몇 달 후 연비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음.

1894년(19세) - 가을에 해월 최시형에게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첩주 첩지를 받음. 9월에 황해도 15명의 접주가 회의하여 거사 결정. 백범은 ‘팔봉 접주’로 선봉에 서다. 해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구월산 패엽사로 후퇴, 군대 훈련. 안태훈, 백범 측에 밀사를 보내 상부상조하기로 밀약. 12월에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같은 동학군 이동엽의 공격으로 대패함. 몽금포로 피신하고 3개월간 잠적.

1895년(20세) - 2월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함.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가르침을 받음. 5월 김형진을 만나 청국 기행, 만주까지 감. 11월 돌아오는 길에 김이언 의병의 고산리전투에 참가하나 패함. 귀향 후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하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

1896년(21세) - 2월 다시 중국으로 떠났으나, 안주에서 단발령의 정지와 삼남 의병 소식을 듣고 돌아오기로 결심. 3월 9일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죽임. 5월 해주옥에 투옥. 7월 인천감옥으로 이송됨. 옥중에서 장티푸스에 걸림. 자실을 기도하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살아남. 8~9월에 세 차례 심문받음. 10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 고종은 판결보류. 김창수는 미결수로 감옥 생활을 시작. 감옥에서 <대학>, <세계역사>, <세계지지>, <태서신사> 등으로 서양 근대문물을 접함.

1897년(22세) - 강화인 김주경이 백범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가산만 탕진하고 블라디보스톡 방면으로 잠복.

1898년(23세) - 양력 3월 백범 탈옥. 대신에 부모님이 투옥됨. 백범은 삼남으로 도피하였으며 늦가을에 마곡사에서 중이 됨. 법명은 원종.

1899년(24세) - 봄에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마곡사를 떠남. 4월 부모님을 만남. 5월 평양 대보산 영천암 방장으로 장발의 걸시승 생활을 함. 9~10월경 환속하여 해주 본향으로 돌아옴. 작은 아버지가 백범에게 농사일을 권유함.

1900년(25세) - 2월에 김두래로 변명하고 강화 김주경을 찾아감. 김주경을 만나지 못하고 동생 진경의 집에서 3개월 동안 훈장질을 함. 김주경의 친구 유완무와 그의 동지들을 만남. 유완무의 권유로 구(龜)로 고치고, 자는 연상, 호는 연하로 함. 11월 부모님을 연산으로 모시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감. 도중 고능선 선생 찾아뵙고 논쟁, 세대가 다른 것을 느낌. 12월 9일(양력 1901.1.28) 아버지가 돌아가심.

1902년(27세) - 1월에 여옥과 맞선을 보고 약혼함. 우종서의 권유로 탈상후 기독교 믿기로 결심.

1903년(28세) -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함. 2월 아버님 탈상후 기독교에 입문. 장련읍 사직동으로 이사함. 오인형의 사랑에 학교를 설립함. 장련공립보통학교 교원이 됨. 여름경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을 만나 그의 권유로 안신호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 장련군 종상위원으로 임명됨.

1904년(29세) - 12월 최준례와 결혼. 최준례,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 장련 사직동에서 근 2년 살고 장련 읍내로 이사.

1905년(30세) - 11월 진남포 에버트청년회 총무자격으로 경성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가. 전덕기, 이준, 이동녕, 최재학 등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공개연설 등 구국운동 전개. 12월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고향에 돌아와 교육사업에 매진함.

1906년(31세) - 장련에 광진학교 세움. 장련에서 신천군 문화로 이사. 종산의 서명의숙 교사. 왜병의 종산마을 약탈을 저지함. 첫 딸을 낳음.

1907년(32세) - 1월 김용제 등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 첫딸 사망. 양산학교교사. 여름경 면학회와 백범의 양산학교가 ‘하기 시범강습회’ 주최하여 교사양성에 매진. 최광옥, 이광수 등이 강사로 참여.

1908년(33세) - 여름에 제2차 하기 사범강습회 성황리에 개최. 9월에 양산학교 중학부 개설, 중학부는 이인배, 김홍량이 담당, 백범은 소학부 담당. 가을경 황해도 교육자들과 해서교육총회를 조직. 백범은 학무총감 역임.

1909년(34세) 해서 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황해도 각 군을 순회하며 환등회, 강연회를 열어 계몽운동을 전개함.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한 달여 만에 불기소 처분. 12월 양산학교 소학부와 더불어 재령 보강학교 교장 역임. 당시 나석주, 이재명 등과 만남.

1910년(35세) - 둘째딸 화경 태어남. 11월 경성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 양기탁, 이동녕, 안태국, 이승훈, 주진수, 김도희, 김구 등 참석. 서울에 도독부 설치. 만주 이민과 무관학교 창설 등을 결의. 11월 20일 안악으로 돌아옴. 12월 안명근, 양산학교로 백범을 찾아옴.

1911년(36세) - 1월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김홍량, 도인권 등과 함께 경성으로 압송. 총감부 임시 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함. 종로 구치감으로 이감. 어머니가 옥바라지. 7월 경성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판결.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됨. 당시 죄수번호 56호. 감옥에서 의병, 신사 등을 만남. 특히 활빈당 간부 김진사에게서 비밀결사의 요령을 들음.

1912년(37세) - 9월 일왕 명치가 죽어 15년형이 7년으로 감형. 다시 명치의 처가 죽음 5년으로 감형. 이름 구(龜)를 구(九)로, 호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침.

1914년(39세) - 인천감옥 이감(죄수번호 55호). 17년 전의 감방 동료였던 문종칠 만남. 매일 쇠사슬을 묶인 채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됨. 투신자살을 결심하나 곧 마음을 고쳐 열심히 일해 상까지 받음.

1915년(40세) - 둘째 딸 화경죽음. 8월 가출옥.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로 감.

1916년(41세) - 문화 궁궁농장 간검. 셋째딸 은경 태어남.

1917년(42세) - 1월에 준영 숙부 별세. 2월 말썽 많은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 세움. 셋째딸 은경죽음.

1918년(43세) - 11월에 아들 인 출생.

1919년(44세) - 3․1운동으로 안악에서도 만세운동. 어머님, 환갑잔치를 사양. 3월 29일 백범, 안악에서 출발. 평양, 신의주, 안동을 거쳐 상해로 망명. 9월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됨. 국무총리 이동휘와 사상 알력.

1920년(45세) - 8월 아내 최준례, 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옴.

1922년(47세) - 어머니도 상해로 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의원으로 선출됨. 9월에 백범,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됨. 차남 신 출생. 10월 백범, 여운형, 이유필 등과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이 됨.

1923년(48세) - 6월 임정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 내림. 12월 상해교민단에서 의경대 설치. 백범을 고문으로 추대함.

1924년(49세) - 1월 아내 최준례,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 6월 백범, 노동국총판을 겸임. 8월 이동녕, 대통령 대리에 임명됨. 12월 박은식,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선출됨.

1925년(50세) - 8월 29일 나석주 의사가 옷을 저당 잡혀 생일상을 차려주어 가장 영광된 생일을 보냄. 11월 어머니 곽낙원, 차남 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감.

1926년(51세) - 12월 국무령 홍진 등 임시정부 전 국무위원 총사직. 백범, 국무령에 선출됨.

1927년(52세) - 9월 장남 인, 고국으로 보냄. 3월 임시정부, 3차 개헌을 통해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 백범, 국무위원에 선출됨.

1928년(53세) - 3월 <백범일지> 상권 집필 시작. 임시정부의 활동 침체로 독립운동가들이 임정을 떠나자, 백범은 미주 교포들에게 편지 보내기 정책을 실시함.

1929년(54세) - 5월 1년 2개월 만에 <백범일지> 상권 탈고. 8월 상해 교민단 단장이 됨.

1930년(55세) - 1월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조소앙, 이시영, 김두봉, 안공근, 박찬익, 윤기섭, 이유필, 엄항섭, 차이석, 김붕준, 송병조 등과 한국독립당 창당.

1931년(56세) - 일본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창단.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의 교포에게 편지로 금전적 도움을 얻어 이봉창 의거 계획을 세움.

1932년(57세) - 1월 8일 이봉창 의사 일황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황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을 즉사케 함. 윤봉길 의거직후 신변의 위험을 느껴 미국인 피치씨 짐에 피신함. 5월 한인애국단원 이덕주, 유진식, 조선총독 암살을 위해 국내에 파견되었으나 체포됨.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최홍식 등, 관동군 사령관 혼조시게루를 암살하기 위하여 만주로 파견되었으나 대련에서 체포됨. 상해 각 신문에 상해폭탄 사건의 주모자가 김구임을 발표. 백범, 상해에서 탈출.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로 옮김. 항주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개각을 단행하여 김구를 군무장에 임명함. 6월 백범, 임시정부에서 이탈. 임정의 기반이 취약해짐. 백범, 가호, 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 또는 장진으로 행세함.

1933년(58세) -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 필담 결과 낙양군관학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 11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 설치. 이청천, 이범석이 교관, 영관으로 지도.

1934년(59세) - 4월 9년 만에 가홍에서 어머님과 아들 인, 신 만남. 가홍의 여사공 주애보를 월 15월씩 주고 남경으로 데려와 회청교 부근에서 동거. 12월 남경에서 중앙군관학교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인특무독립군 조직

1935년(60세) - 2월 남경에 학생훈련소 설치하나 왜에게 발각되어 강소성 징광사로 이전. 5월에 백범, 임정 해소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발표. 조소앙 등 임정국무위원 5명 사직. 10월 임정의정원의원 16인, 가홍 남호에서 선상 비상회의. 이동녕, 김구, 조완구 등을 국무위원으로 보선. 임정의 김구시대 개막.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한국국민당을 조직.

1936년(61세) -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진중음 <서해어륭동>, <맹산초목지>를 휘호로 씀.

1937년(62세) - 7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인애국단, 미주 5개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 중일전쟁으로 남경 폭격, 주애보와 어머니 무사. 호남성 장사로 피신하기로 하고 대가족 백여 식구는 목선으로 남경을 떠남. 백범, 남경에서 주애보와 헤어짐. 안공근을 상해에 파견하여 안중근 의사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함.

1938년(63세) - 장사에 와서 본명사용. 중국 중앙정부의 보조와 미국 교포들의 후원으로 생활에 곤란은 없었음. 5월에 3당 합당 문제가 활발해져 남목청에서 회집, 백범, 이운황의 저격으로 의식 불명. 한 달간 입원. 현익철은 절명. 7월 임시정부, 장사가 위험하여 광주로 옮김. 10월 임시정부, 유주로 옮김.

1939년(64세) - 3월 임시정부, 유주에서 사천성 기강으로 옮김. 4월 어머니 곽낙원(81세) 인후염으로 돌아가시다. 5월 민족운동단체의 연합을 위하여 김원봉과 공동명의로 <동지, 동포 제군에게 고함>을 발표. 7월 김원봉계인 조선민족전선연맹과 협의하여 전국연합진선협회 결성. 11월 중일전쟁 이후 화북지역 한인들에 대한 초모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성환을 단장으로 한 군사특파단을 섬서성 서안으로 파견.

1940년(65세) - 2월 임시정부 대가족, 토교로 이사. 5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결성. 백범, 중앙집행위원장. 9월 임시정부, 기강에서 중경으로 옮김. 중경 가릉빈관에서 광복군(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 성립식. 서안에 사령부를 두고 간부 30영명을 그쪽으로 보냄. 10월 임시정부, 헌법 개정. 백범, 주석으로 선출됨.

1941년(66세) - 6월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수벨트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함을 보냄. 10월 임시정부 승인문제로 중국 외교 총장과 회담. <백범일지>하권을 집필을 시작. 11월 임시정부, <대한민국건국강령>제정 발표. 12월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

1942년(67세) - 3월 임시정부, <3․1절 선언>을 발표하여 중, 미, 영, 소에 대해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 4월 임시정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과 김원봉의 광복군 부사령관 임명 결의. 7월 광복군,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전개하기 시작. 10월 김원봉 등 좌파, 임시정부에 참여,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됨.

1943년(68세) - 3월 임시정부, 중경에서 3․1운동 24주년 기념식 거행. 7월 중국 군사위원회 접객실에서 장개석 총통과 회담. 8월 임정의 헌법 개정안 문제로 임정내 좌파와 갈등. 백범, 주석직 사직을 발표하였다가 갈등 해소로 복귀.

1944년(69세) - 4월 임시정부,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 백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 10월 장개석을 면담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

1945년(70세) - 1월 일본군에 끌려간 학병 50여명, 탈출하여 임시정부로 찾아옴. 2월 한중 문화회관에서 탈출 학병 환영대회. 3월 장남인(28세),부인 안미생과 딸 효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남. 4월 임시정부, 중국과 새 군사협정 체결. 7월 협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 설치. 미군과 연합작전 추진. 8월 서안에 가서 미국 다노베 장군을 만나고, 한인 학생들의 훈련 참관. 8월 10일 섬서성 주석 축소주한테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음. 9월 한국독립당, 입국에 대비하여 당면 정책 14개항 발표. 11월 미군정의 반대로 정부 자격으로 귀국좌절.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각각 임시정부 송별연을 베풀어줌. 임시정부 국무위원, 두 차례로 나뉘어 귀국.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한 임시정부 환영회.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총동원위원회를 조직.

1946년(71세) - 2월 백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됨.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됨. 4월 한독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한독당으로 통합. 백범,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 6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천장식을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모심. 8월 연합국 원수 및 정당 대표에게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의 지원을 요망하는 메시지를 발표함. 10월 좌우합작 7원칙 지지성명 발표.

1947년(72세) - 1월 반탁 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 전개. 2월 비상국민회의를 확대, 강화하여 국민의회 조직. 3월 인재양성을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 개설. 5월 한독당원들에게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불참할 것을 성명. 10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남북대표회의 의결. 11월 한독당, 정당 협의회 참가 보류. 12월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

1948년(73세) - 1월 UN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의 의견서를 보냄. 2월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발표.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냄.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회와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표명. 4월에 북행, 남북연석회의에 참여. <공동성명서>발표. 5월에 평양에서 서울로 귀환. 7월 북한의 단정수립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힘. 통일독립촉진회 결성. 8월 어머니 곽낙원과 부인 최준례, 맏아들 인의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 9월 이동녕, 차이석 선생의 천장식을 사회장으로 하여 효장원에 모심. 11월 미소양군 철퇴후 통일정부수립이 가능하다는 요지의 담화발표.

1949년(74세) - 1월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움. 3월에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 세움. 6월 26일 낮 12시 36분,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 7월 5일 국민장 거행. 효장원에 안장.

1962년(서거 13주년) - 3월 1일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에 추서

1969년(서거20주년) - 8월 23일 남산에 백범 김구 동상을 세움.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글씨] 눈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글씨] 영욕에 초연하여 그윽이 뜰 앞을 보니 꽃은 피었다 지고 가고 머무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가 바라보니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는 구나. 맑은 창공 밝은 달 아래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도 불나비는 유독 촛불만 쫓는다. 맑은 물 푸른 숲에 먹을 것 가득하건만 수리는 유난히도 썩은 쥐를 즐긴다.

[14]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이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14]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15] 무릇 난 자는 다 주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15]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15]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은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9]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28] 아버님이 어렸을 때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날 영원히 돌아가셨다.

[30]"그 사람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 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첨산 강씨의 선조는 우리만 못하나 현재 진사가 세 사람이나 있지 않느냐. 별담 이진사 집도 그렇다."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체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수강료로 쌀과 보리를 가을에 모아주기로 하고 청수리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왔다. 그 분은 양반이지만 글이 넉넉지 못하여 '양반의 선생'으로 고용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같은 '상놈의 선생'이 된 것이다.

[33]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서에나 주력하여라.”

[37]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38] 관상서를 공부하는 방법은 먼저 거울로 자신의 상을 보면서 부위와 개념을 익힌 다음, 다른 사람의 상으로 확대, 적용하는 것이 첩경이다.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39] 그런데 <상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62]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3]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난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등.

[63]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하였다.

[63]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65] “만고 천하에 흥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고 망해보지 못한 나라가 없네. 종전에는 토지와 백성은 가만두고 군주 자리만 빼앗는 것으로 흥망을 논하였지. 그러나 지금의 망국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과 주권을 모두 강제로 집어삼키는 것이네. 우리나라도 필경은 왜놈에게 망하게 되었네. 소위 조정대관들은 전부 외세에 영합하려는 사상만 가지고, 러시아를 친하여 자기 지위를 보전할까. 혹은 영국이나 미국을, 혹은 프랑스를, 혹은 일본을 친하여 자기 지위를 견고히 할까, 순전히 이런 생각들뿐이라네. 나라는 망하는데, 국내의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들도 한탄하고 혀만 차고 있을 뿐 어떠한 구국의 경륜도 보이지 않으니 큰 유감일세. 나라가 망하는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71] 조선의 사대물이라 함은 경주의 인경(성덕대왕 신종)과 은진 미륵(석조미륵보살입상), 연산의 쇠솥, 함흠의 장승을 이르는 것이다.

[94]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문: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답: “그렇다.”
문: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100]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한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일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54] 중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며,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수나 곤충에게까지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155]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곧 호법선신께 의뢰하여 물리쳐내야 하는 것이었다.

[174]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金龜)라 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연산 이천경이나 지례 성태영이 다 내 동지인데, 우리는 새로 동지가 생겼을 적에 반드시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1개월씩 함께 지낸다오. 그리하여 각자 관찰한 바와 시험한 것을 모두 모아서 어떤 사업에 적당한 자질이 있는지를 판정하여, 벼슬살이에 적당한 자는 자리를 주선하고 상업이나 농사에 적당한 인재는 상, 농으로 인도하여 종사케 하는 것이 우리 동지들의 규정이오. 연하는 동지들의 시험한 결과, 아직 학식이 얕고 부족하니 공부를 더 하되, 경성 방면의 동지들이 전적으로 맡아 어느 정도 수준을 이루도록 할 것이오. 연하의 출신이 상인계급이니 불가불 신분부터 양반에게 눌리지 않도록 만드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기금 연산 이천경이 소유하고 있는 가택과 논밭, 그리고 가구 전부를 그대로 연하의 부모가 생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려 하오. 그 고을의 큰 성씨 몇몇만 잘 단속하면 족히 양반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연하는 경성에서 유학하면서 잠깐씩 부모님 얼굴이나 뵙게 할 터이니, 곧 고향으로 가서 오는 2월까지 부모님 몸만 모시고 서울로 오시오. 서울서 연산까지 가는 길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이다.”

[179] “선생님이 피발좌임을 말씀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머리털은 곧 피가 만든 것이요, 피는 곧 음식이 소화되어 만들어진 정액이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머리털도 자라날 수 없습니다. 설사 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서 매우 크고 훌륭한 상투를 위에 얹었다 손 치더라도 왜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또 녹의복건을 아무리 훌륭하게 입었다 하여도 왜인이나 양인들이 우러러 절하지 않을 것이고 무릎 끓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학문과 도덕을 공부한 상류층 사람들이 백성을 잔인하게 학대하는 최상의 도부수들입니다. 진실로 온 나라의 백성들은 거의 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이 이익을 쫓으니, 자기의 권리와 의무는 모르고 마땅히 탐관오리와 토호의 업신여김과 학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탐관오리와 토호들이 자기 백성을 업신여기고 학대함과 같이 왜와 서양을 학대한다면, 왜와 서양은 멸종되고 그네들이 천하를 다 호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백성의 고혈을 빨아 왜놈과 양놈에 바치고 아첨하면서, 자기가 누구보다 뛰어난 도부수임을 자랑하고 있으니, 필경 우리나라는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들로 하여금 나라 잃은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196]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줄 깨닫고, 왜 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203]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의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203] 여하튼 양반의 세력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 당당한 그 양반들이 보잘것없는 상놈하나 접대하기에 힘이 딸려 애쓰는 것을 볼 때 더욱 가련하였다. 나라가 죽게 되니까 국내에서 중견세력을 가지고 온갖 못된 위세를 다 부리던 양반부터 저 꼴이 된 것이 아닌가. 만일 양반이 살아나 국가가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더 받더라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일어났다.

[220]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221]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226] “나를 논밭의 자갈돌로 알고 파내려는 그대들의 노고보다, 파내어지는 나의 고통이 더욱 심하니 내가 자결하는 것을 보라!”

[228] “나의 육체를 욕보일 수 있을지언정 나의 정신을 뺏을 수 없다”고 같이 수감된 동지들에게 주창하던 기개와 절개를 생각하면서, 이러다가 인간의 본성은 사라져 없어지고 짐승의 본능만 남는 것이 아닐까 자책하던 때, 아카시의 방에서 나를 극진히 우대를 하면서 신문한 것이었다.

[249] 수인들의 품행이, 열 번 내 밥을 먹는다면 먹을 때는 죽어도 은혜를 잊지 못하겠다고 치사를 하던 자라도, 아침밥을 얻어먹고는 저녁밥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보면, 그 즉시로 욕설을 퍼부었다.
“제 놈이 네 의붓애비냐? 이야, 효자문 세우겠다.”
그러면 밥을 얻어먹는 자가 또한 나를 옹호하는 말로 맞대고 욕설을 하다가 간수에게 발각되어 함께 벌을 서는 까닭에, 선을 행함이 도리어 악을 행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254] 후일 우리나라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267]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275] 다른 가정에서는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주로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 우리 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에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우신다. 가만 경험하여 보면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처리한 적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288]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289]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위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96]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를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296]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두 번이나 -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어 인천옥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리고 17년 후 다시 인천감옥으로 돌아와 인천항 축항공사를 할 때-자살하려다 실패하였다.

[296]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307]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09]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1919)에는 국내외가 일치하여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세계사조가 점차 봉건이니 사회주의니 복잡해지면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계에도 사상이 갈라지고 음양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323]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천황을 왜 못 죽입니까?”
“일개 문무관도 죽이기가 쉽지 않은데, 천황을 죽이기가 쉽겠소?”
“내가 작년 동경에서 천황이 능행한다고 행인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내게 지금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 까 싶었습니다.”

[323]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 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34] “여보, 그것이 무슨 말이오? 포수가 꿩을 쏠 때에도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고 숲 속에서 자고 있는 사슴은 달리게 한 후 쏘는 것이 사냥의 진정한 맛이오. 군이 지금 그러는 것은 내일 거사에 성공할 자신감이 미약하기 때문이 아니오?”

[336]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 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352]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당파가 생겨 수백 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353]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가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79]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하셨다. 종전에 우리나라는 노복을 사용하였으나, 국가가 병탄된 뒤 경향에서 동포들의 양심 발동으로 “내가 일본인의 노예가 되어 어찌 차마 동포를 종으로 사용하랴” 하고 자연히 노복제를 물리치고 고용제를 사용하였다.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395]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차 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가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403] 중경에서 폭격을 당할 때엔 중국의 국민성이 위대한 것을 깨달았다. 높고 큰 건물이 삽시간에 재가 되는데도 집주인들은 한편으로 가족 중 피살자를 매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생존자들은 불붙지 않은 나머지 기둥과 서까래를 모아 임시 가옥을 건설하였다. 그 일을 하는 중에 웃는 얼굴로 비장한 빛을 보이지 아니하므로, 나는 그들을 볼 때 이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 동포들이 저 지경을 당하였다면 어떠할 까? 화가 나느니 성이 나느니, 홧김에 술을 마신다 성난 김에 싸움을 일으킨다 하여, 소란만 일으키고, 태만하지나 않을까.“

[423]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말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4]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는 높고 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425]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427]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데 달렸다. 자유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427]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428]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428]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429]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429]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430]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430]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이다.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431]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431]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432]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433] 옛날 한토(漢土)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3. 내가 저자라면


책을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놀라움’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백범, 스스로 상놈이라고 칭하지만 범부라고 하기에는 놀라운 점들이 너무나 많다. 많은 느낌들 중에서도 한 인간으로서 다가오는 부분들이 더 가슴을 울린다.

먼저, <백범일지>를 기록하는 측면이다. 단지 기억에 의존하면서 53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지난 일들을 상세하게, 그것도 정확한 날짜까지 언급하면서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특히 어머님과 서신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는데 어머님은 오히려 70세의 고령이라는 점이 더욱 경이롭기까지 하다. 수많은 사건과 등장인물들을 거의 정확하게 기억하는 기억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둘째, 70 평생 산전수전, 인생역경 등 온갖 문장을 동원하더라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이다. 거리상으로 돌아다닌 것만 계산해도 수백만 킬로이고 지역으로 따져서도 참 많이도 유랑했다. 물리적인 면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면은 더욱 처절하였다. 자신도 생과 사를 넘나들어야 했던 안타까운 순간도 많았지만 동지들의 생사를 직접 주도하고 지켜보아야 했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셋째, 상놈을 벗어나고자 시작한 개인적인 욕심이 결국은 백성을 위한 민족적인 일이 되었으니 하늘은 사람의 쓰임을 미리 정하였는지 모르겠다. 순간순간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천운으로 극복하고 일말의 희망도 버리지 않았다. 전기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자서전은 그런 자연스러운 결말이 없다고 했던가. 마지막 죽음에 대한 의혹이 아직 남아있어 책을 읽다가 중간에 그만둔 허전한 뒷맛이 남아있다. 그러나 마지막 돌아가시는 장면은 원래 하느님의 각본에도 없었던 부분이 아닐까 한다. 만약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선생님의 소원대로 부강한 나라보다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곰보로 흉한 얼굴에 거칠고 험한 인생을 살아온 분이 그렇게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었을까? 아니 이 아름다운 꿈 때문에 오히려 힘든 인생을 살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백범일지>는 순전히 개인이 자식들에게 지난 일을 전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목적으로 쓴 자서전이다. 하지만 워낙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고 자서전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경과를 책 중간에 곁들였다면 전체적인 관점에서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에릭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와 비교가 된다.

또한, 김구 선생님이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성명서나 발표문 등을 부록으로 싣고 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한다면 선생님의 사상이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더구나 해방이후 상황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복잡하게 대립되어 있었고 외국과의 이해관계 또한 서로 얽혀있어서 그 한복판에 서있었던 김구 선생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매우 민감한 부분이라 어려울 수도 있지만 말이다.

현재 김구 선생님이 원하는 진정한 자주독립을 이루었는가? 정통만을 고집하는 독립이 아닌 자신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는 그런 독립을 이루어가고 있는가?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안으로 교육을 강조한 선생님의 소원대로 현재 교육은 우리의 문화를 활성화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가?

현재 교육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뒤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았다.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책 표지에 계신 김구 선생님께서 미소를 지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을 하신다.

"옛날 한토(漢土)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p433)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릭 홉스봄도 재차 조언한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IP *.211.6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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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6.16 20:51:58 *.140.145.63
전 사실 김구선생님을 충분히 알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존경해 왔습니다. 그분이 남긴 짧지만 인상적인 다음의 이야기때문이었죠.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우리 대한민국의 아름답고 힘찬 비전으로 제 가슴속에 남아 있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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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16 22:33:32 *.211.61.242
나도 이 글때문에 감동받아서 김구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었지.
그런데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면모도 세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어. 직업병은 어쩔 수 없나봐 자꾸 교육적인 부분이 더 먼저 들어오니 말이야.

김구선생님이 조금만 더 오래 사셨다면 더 아름다운 대한민국이 되지 않았을까? 가슴이 저미어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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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06.16 23:01:53 *.152.82.31
그래,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지.
좋은 책이고 좋은 글이야.
그대의 눈으로 다시 본 백범선생의 삶에 머리숙여 경의를 표하고 싶다.
언제나 같은 모습의 당신에게도 감사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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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18 19:57:27 *.211.61.240
자로형님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걸 축하합니다.
부족한 글에 활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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