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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8일 00시 53분 등록
백범일지(白凡逸志)

도진순 주해 / 돌베게


그는 누구인가.

김구란 인물은 누구인가. 또 다시 나의 역사적 지식의 일천함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나는 그가 구한말의 독립운동가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미지의 무엇을 탐험한다는 설렘마저 들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아명 창암(昌巖)

1876 황해도 해주 출생
1893 ~ 동학 입교
1894 ~ 해주에서 동학혁명 지휘
1895 ~ 김의언 의병단 가입
1895 ~ 명성왕후 시해한 일본군 살해 후 사형 선고
1910 ~ 신민회 참가
1911 ~ 105인 사건으로 체포 17년 형 선고
1914 ~ 농장 농감으로 농촌계몽 운동
1919 ~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1929 ~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 조직
1932 ~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
1933 ~ 난징에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
1935 ~ 한국 국민당 조직
1940 ~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설치
1944 ~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1945 ~ 대한민국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
1948 ~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8 ~ 유엔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1948 ~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제창
1949.6 ~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

그의 간단한 경력이다. 물론 그의 행적을 따라가면 연루된 사건이나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아 그것을 여기에 다 털을 수는 없다.

백범일지는 그의 자서전이다. 그가 그의 입으로 직접 털어놓은 이야기이다. 나는 백범일지를 통하여, 그 전에는 아는 바가 없었던 김구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느껴보려 하였다. 그는 누구인가.


사상의 궤적

그는 상놈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양반에 대한 울분과 꿈이 컸던 그는 양반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졸라 서당에 나가게 된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부모님의 후원으로 공부를 힘들게 이어나갔고, 드디어 과거를 보게 된다. 그러나 부정으로 얼룩진 과거장을 보고 그는 과거를 접고 관상에 잠깐 빠진다.

18세가 되던 해 동학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입문하게 된다. 그는 당시 동학이라는 사상에 매우 흡족해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과거에 낙방한 뒤 관상 공부하면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터라,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먼저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동학에 들기만 하면 차별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앞으로 평등한 새 나라를 건설한다는 말에서, 지난해 과거장에서 품었던 비관을 넘어설 방법을 발견하였다.” 34p.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동학 의병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그는 다시 절박한 상태에 빠졌다. 스무 살이었던 그 해 그는 스승 고능선을 만난다. 고능선은 김구의 절박함과 열망을 보고 말하였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실패와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이르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상심말게.” 47p.

김구는 큰 위안을 받고 그에게 의탁한다. 김구는 모든 힘을 다해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는다.

“나는 날마다 고선생 사랑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선생은 책을 차례대로 가르치지 않고,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 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口傳心受)의 방법을 이용하셨다. 선생은 주로 의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아무리 뛰어난 재주와 능력이 있어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를 밟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48p.

고능선은 김구에게 견문을 넓히려 청국으로 가라 조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척왜척양(斥倭斥洋)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의 김구는 그런 그의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21세 되는 1896년, 김구는 일명 치하포 사건으로 일인을 살해하고 옥에 갇힌다. 그는 투옥 기간 동안 무엇보다 책읽기에 힘썼다. 김구의 아버지가 보내 준 대학(大學)을 외우다 시피 읽고, 신지식 서적도 많이 접했다. 당시 인천은 개항항이라 외국인과 교회당도 여럿 있었고 신서적을 권하는 감리사 직원도 있었다. 김구는 신지식 서적을 보고 새로이 깨달았다.

“청계동에서는 오로지 고선생만을 하나님처럼 여기고 섬겼으나, 그분의 말과 행동이 다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옥에서 알게 되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는 세계 각국에서 배워 적용하는 것이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선생이 이미 망해 버린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永歷) 이백 몇 년’을 써서 제문을 읽던 것이나, 양학을 한다는 이유로 안진사와 절교한 일도 잘한 일로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서양의 역사를 기록한 신서적 <태서신사> 한 권만 보더라도, 저 눈이 푸르고 코가 우뚝한 서양 오랑캐들이 오히려 더 선진적인 법규로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86p.

그는 23세였던 1898년 3월 탈옥하여 삼남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삭발을 하고 원종이란 법명의 스님이 된다. 그가 어쩌다 불교에 귀의할 생각을 했을까? 그는 그간 길지 않은 세월동안 거친 역정에 지치고 편안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며 내 귀에대 대고 세상 번뇌에서 해탈하여 입문하라고 속삭이는 듯 하였다......하룻밤 사이, 청정법계에서 속세의 만 가지 생각이 다 없어진 듯 하여 중이 되기로 승낙하였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111p.

김구가 순수히 종교에 대한 열망으로 스님이 된 것은 아니나 그는 마곡사에 있을 때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영웅심과 공명심의 허황됨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상놈의 껍질을 벗고 남보다 뛰어난 양반이 되어 그동안 당한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도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이 되고 보니 그런 생각이야말로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만일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싹트고 자라면 부처님께 의뢰하여 물리쳐 내야 하는 것이다.” 112p.

김구는 불가에 입문하였지만 세상과의 인연을 끊지 못하였다. 잠깐 숨어 있으려고 들어온 것이지 불교에 일생을 바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는 그 해 가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스승이었던 고능선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대양 건너 각 나라에는 제법 국가 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문명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공자 맹자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달된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계속 오랑캐라고 배척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소견에는 오히려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공맹에게서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126p.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문명국의 교육 제도를 본받아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을 교육하여 건전한 2세로 길러야 합니다. 또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이 어떤 것인지도 알도록 해야 합니다.” 127p.

청년 김구의 마음에는 교육으로의 구국 사업과 애국 독립운동이 이미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예수교(기독교)에서 신교육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애국사상을 지닌 다수의 사람들은 기독교인이었다. 1903년 가을 김구는 기독교에 입교하여 열심히 교육활동에 전념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준, 최재학 등과 함께 조약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후에도 장소를 옮기며 교육 사업에 열을 올린다. 1908년에는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고 각 군을 순행하였다.

그는 1911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받고 투옥되어 수감된다. 그는 갖은 고문을 당하고 明治 日王이 죽어 15년형이 7년으로 감형. 다시 명치의 처가 죽어 5년으로 감형된 후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다. 그는 그 후 그의 심리에 변화가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나는 비록 몸은 갇혔지만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처럼 여기고, 죽는 날까지 쾌활한 마음으로 지내기로 했다.” 168p.

“체포되기 이전에는 수년 동안 성경을 들고 교회당에서 설교하거나 교편을 들고 교실에서 학생을 교훈하면서 일마다 양심을 본위로 삼아서, 삿된 마음이 생길 때마다 먼저 자기를 자책하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어찌하여 불과 반년 만에 심리에 큰 변동이 생겨났는가를 연구해 보았다.” 168p.

“......자기 가슴에는 X광선을 붙이고 있어 나의 일체 행동을 투시하고 있으니 터럭만큼이라도 숨기면 당장 쳐죽이겠다고 협박하던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의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169p.

김구는 1914년 출옥하여 아내가 교원으로 있던 안신학교에서 있다가 잠시 신천 동산평의 농감이 된다. 그는 그 곳에서 소작인들에게 근검절약과 상부상조의 정신을 가르치고 학교를 세웠다. 동산평은 차차 변모하였다.

그가 동학, 불교, 기독교 등 여러 곳에 자취를 남기고, 학교와 감옥을 오갔지만 그의 사상에서 일관된 면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애국이었다. 이는 또 그의 자주 독립 사상으로 연결되었다.

김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범은 자유롭게 뛰어들지 못하는 자신의 가석방 신세를 생각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망명이었다. 3월 3일 사리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백범은, 1945년 11월 23일 그의 나이 70세에 환국하기까지, 27년간 근대사에서 가장 긴 시간을 버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붙들게 되었다. (김구기념사업회 페이지 발췌)

대담함과 기개, 결연한 의지

백범일지를 읽으며 우선 다가온 그의 인간됨은 대범함, 용감함, 그리고 넘치는 기개였다. 치하포에서 일인 스치다를 죽일 결심을 하는 장면과 투옥되어 신분 받을 때의 장면이다.

“지금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올랐다.” 69p.

“나는 ‘이놈!’하고 큰소리로 죽을 힘을 다해 호통을 쳤다. ‘만국공법 어디에 통상화친조약을 맺은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라는 구절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살면 몸으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나라의 치욕을 씼으리라!’ 통렬히 꾸짖는 서슬에 겁이 났던지 와타나베는 욕을 하며 대청 뒤쪽으로 숨고 말았다.”80p.

안악 사건으로 투옥되어 신문을 받을 시에도 김구는 한 점 수그러듦 없이 말하였다.

“ ‘나를 논밭의 뭉우리돌로 알고 파내려는 그대들의 노고보다 파헤치려는 나의 고통이 더욱 심하다. 차라리 내가 자결하는 것을 보라!’ 그는 기둥에 머리를 받고 쓰러졌고, 여러 사람이 인공호흡을 하고 찬물을 끼얹고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161p.

동산평 농감으로 있을 때 일이다. 이전 농감이었던 노형극이란 인물은 부정과 착취를 일삼던 음흉한 인간이었다. 김구가 새로이 농감으로 들어와 개혁을 가하자 해코지가 들어왔다. 동네사람들 중 말리는 이 하나 없었다.

“‘이같이 무례한 놈에게는 의리도 소용이 없으니, 당장 완력으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노가는 나보다 젊고 힘도 세다. 그러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그놈의 오른쪽 팔을 힘껏 물고, 치하포에서처럼 용기를 내어 끝까지 저항하였다..... 나는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형근이 한 명으로는 내 적수가 못 되니, 모두 숨어 있지만 말고 나와서 도적질을 하든지 사람을 죽이든지 계획대로 하여 보아라!” 197p.

사실 위의 장면들에서는 영웅으로 부각되는 신화와 같은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 넘어 그의 대담한 성품과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였다.

그 밖에 김구가 19세의 어린 나이로 동학의 팔봉 접주가 되고 선봉장이 된 일, 김이언 의병 부대에의 투신,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조직과 이봉창(李奉昌)의사,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의거 지휘한 일, 광복군 창군 등에서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대담함과 굳은 의지로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던 그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김구의 어머니

백범일지에는 김구의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서술이 많이 나오는데, 김구의 성품은 아마
어머니에게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김구의 어머니는 파란만장한 김구의 역정을 따라 역시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그는 김구가 옥에 갇힐 때 죽을 힘을 다해 옥바라지를 하였고, 교육 사업을 한다고 여기저기 이사다닐 때나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여러 도시로 옮겨다닐 때, 언제나 물심 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아들의 엇나감이 보이면 단호하였다. 안악 사건 연루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온 후 친구들이 위로 차 가무를 즐기게 해주었는데 어머니는 그를 꾸짖었다.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191p.

1925년 상해 임시정부 시절 안악에 있던 어머니는 상해에 있는 김구에게 가려 하였으나 일본 경관에게 저지되었다. 어머니는 크게 노하여 호통하였다.

“내 아들을 찾는 일은 내가 그대네 경관보다 나을 것이다. 언제는 출국을 허가한다 하기에 살림살이를 다 처분하였는데 이제 와서 출국을 허락지 않는다 하니, 남의 나라를 빼앗아 이같이 하고도 오래갈 줄 아느냐?” 260p.

어머니는 목공을 불러 집을 수리하고 오래 살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몇 달 뒤 김구의 아들들을 데리고 만주 안동행 열차를 탄다. 일본 경찰의 검문이 있었지만 큰아들인 인이 어린 동생과 늙은 할머니를 친척집에 맡기러 간다하고 통과하였다. 김구에게서도 읽을 수 있었던 주도면밀함이 엿보이는 면이었다.

어머니의 김구의 대한 믿음은 각별했다. 어머니는 임정생활의 김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지금부터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말로만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많은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 주자는 것일세.”

1938년 김구는 이운환의 저격에 큰 부상을 당한다. 병원 퇴원 후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어머니는 흔들리는 기색 없이 말씀하였다.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허나 참으로 유감스럽네. 정탐꾼 이운환도 한인이니,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백범(白凡) 김구(金九)

나는 본래 이름이 창암(昌巖)이었던 그의 이름이 김구로 바뀌고 백범으로 불린 사연이 궁금하였다. 김구는 안악 사건으로 인한 투옥 시 스스로 이름과 호를 고쳤다. 그의 이름 사연에서 또한 그의 사상이 나타난다.

“나 역시 석회질을 품은 몽우리돌이면 차라리 만기 이전 깨끗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리하여 굳은 의지를 다지는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 동지에게 알렸다. 구(龜)를 구(九)로 고침은 왜의 호적부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白凡)으로 고친 것은 우리 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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