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7년 6월 18일 03시 11분 등록
1.저자에 대하여

역사 속에서 죽은 한 사람에 대하여 그의 죽음이 명확하지 않을 때 참 난감하였다. 아무렇게나 산 사람도 아니고 평생을 나라의 독립과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전부를 버린 사람인데, 청춘을 감옥에서 보냈고, 중국에서 상해부터 멀리 장사까지 머나먼 길을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지냈는데, 돌아온 것은 민족의 한 사람, 그것도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총에 죽었다. 이러한 아이러니도 있을까. 그러한 민족의 위대한 역사속의 영웅을 그렇게 보내야만 했을까? 그 사건이 발생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배후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래도 되는 것일까.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러한 비열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만주, 간도 등 머나먼 타향에서 독립을 위하여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고 과연 어떠한 모습을 할까? 과연 목숨을 바치면서 그럴 수 있을까? 지금도 친일파의 후손들은 조상들의 더러운 짓을 하고 얻는 땅을 다시 찾기 위해 재판을 하고 있고, 모 유명 여배우는 일본군의 노리개 감으로 수모와 죽음보다 더 처절한 경험을 정신대를 떠올리는 사진첩을 만들었다가 곤욕을 치르고도 다시 드라마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오고 있다. 선생님의 차남(신)은 6.25전쟁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15년 이상을 연좌제로 변변히 취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형벌을 면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다카기 마사오란 일본군인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전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알 수 없는 게 역사라고 하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명백하게 밝혀진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임에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일본 육사에 입학을 하였고 만주로 지원하여 복무를 했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이래도 되는 것일까?

독립운동가로서의 백범선생님의 화려한 활동도 존경스럽지만, 한 개인의 처절한 역사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두 번의 파혼과 두 번의 결혼을 하였지만 마누라 복이 지질이도 없는 사람, 3녀 2남의 자식을 두었지만 다 죽고 차남만 남아 자식복도 역시 없는 사람. 아무리 혼돈의 시대이고 독립운동의 시대라고 하지만, 개인이 넘기에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상놈이라는 사회적 계급도 버렸고, 한 여자의 지아비라는 것도 버렸고,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도 버렸다. 과거를 보고, 동학접주가 되어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것도 버렸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바를 죽을 때 까지 실천하다 간사람
겨레와 민족을 위하여 개인의 삶보다 더 큰 인생을 살다간 사람.
혼동과 미완의 시대에 정확한 등불이 되어 살다간 사람
사형집행도 없어지고, 총알도 피해 가는 상제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에서도 백범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고 한다. 안두희는 그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암살자에 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범죄자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권적 범죄라는 차원에서 우선 도덕적 책임이 있고 또한 사건 뒤처리에서 개입한 것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조사보고서는 또 "이제 백범 암살사건의 전반적 윤곽은 잡혔다"고 진단하였다.


우리는 본 위원회가 국회에 청원한 바 있는 특별법이 제정되지는 못하였으나,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 차원에서 백범 선생 시해진상의 '전반적 윤곽'을 잡아 놓았다는 사실을 온 국민에게 널리 선언하면서, 미흡하지만 본 위원회의 사명을 여기서 끝내려고 하며, 보다 구체적인 내막은 역사에 맡기기로 한다.
1996년 1월 30일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원회


60여년이 지나고도 윤곽만 잡은 상황에서 저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언젠가 당신의 죽음이 비밀이 풀리는 날 다시 쓰기로 약속하고, 그 시기가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바란다.

2.나에게 다가온 책

백범일지는 2003년에 구입하여 읽은 책이었고, 책에 밑줄과 간단한 메모, 그리고 신문검색과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열심히 읽었던 책으로 기억된다. 지금 읽은 것을 비교해보니 그 때는 책을 읽었던 게 아니고 그냥 들고 다녔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인물에 대하여 그리고 1900년대 후반부터 해방전후까지 사상이 복잡하고 나라마저 일본에 빼앗긴 상태에서 걸어온 파란만장한 사나이의 모습이 읽는 모습 내내 떠나지 않았다. 왜 그 당시에는 이러한 장면들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가. 위대함에 대하여

가장 위대한 점으로 다가온 부분은 기록을 남기었다는 부분이다. 선생님께서는 두 아들의 교육과 유서라고 하였지만, 만일 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혀지는 사건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서거후에 실제 선생님이 역사 속에서 다시 복원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이다.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된 사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러 지어낸 것은 전혀 없으니 믿어주기 바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도 이러한 역사적인 사료로 가치가 크다.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역사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인 것 같다. 대신 난중일기는 매일 매일 그날의 일을 기록했다면 백범 선생님은 두 번에 나누어 상권과 하권으로 별도의 집필기간을 가졌다.

나.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백범 선생님의 어머니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보고 싶었지만 알 길이 없었다. 책에는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고 되어있다. 백범선생님의 의기와 노력도 있었지만 강철보다 더 단단하고 호랑이보다 더 용맹한 어머니가 있었기에 그러한 백범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말을 들이시고 어머님이 친히 오셔서 부르셨다. 나는 어머님을 따라 집에 왔다. 어머님은 노하셔서 책망하신다. “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 하였더냐?” 나는 무조건 대죄하였다. 어머님도 어머님이거니와 아내가 어머님께 고발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계획을 낸 것이었다. (274p)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367p)


도대체 이런 어머님의 자세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으로 면회를 올 때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어떻게 변한 것일까? 외아들 하나만 두고 며느리를 맞아 아들이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 대신에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감옥안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라는 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이운환의 총탄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찾아가서 어머니한테 말하니 그 답변이 지금도 얼얼하다.

“자네의 목숨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371p)

백범 선생님을 키운 것은 바로 그 어머니였다.


다. 미완의 시대

자서전을 읽다 보니 에릭 홉스바움의 미완의 시대가 떠오른다. 연구원을 지원할 때 처음 읽었던 책으로 백범 선생님의 자서전을 보니 홉스바움한테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역사철학자로 살아온 인생과 공산주의자로 살아가기에 힘든 면이 있었지만, 백범 선생님에 비하면 미완의 시대라는 제목도, interesting time이라는 제목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04년 한일합방이후 조선의 형세로는 정말 미완의 시대, 혼돈의 시대였을 것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관리들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 살 궁리를 하는데, 조선의 강산을 지킨 것은 의병들이었다. 의병들의 살신성인으로 나라를 구하자, 조정에서는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평가대상에서 제외된다. 한일합방이후에도 지도계급이었던 많은 양반들이 아직도 쇄국정책으로 오랑캐들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는 이상적인 얘기만 한다. 백범 선생님의 스승인 후조 고능선 선생과 같은 생각을 하며, 스승과 제자로서 갈라서고 만다.


박영효, 서광범 과 같은 역적들이 주장하던 것을 자네가 말하고 있네 그려. 만고 천하에 끝없이 존속하는 나라가 없고 만고 천하에 끝없이 장생하는 사람이 없다네. 우리나라도 망할 운명인 바에야 어찌하겠나? 그러나 나라를 구한다면서 왜놈과 양인에게 배우다가는 나라도 구하지 못하고 절의까지 배반하고 죽어 지하에 가게 되면 선왕 선현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180p)

스승과 갈러선 후에도 임시정부의 핵심직책을 얻고서도 이러한 계급구조에 낙담을 한다.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 때에 정치구호가 아닌 나라의 위기 속에서 양반들이 계급을 타파하여 나라를 구하는 구심력으로 삼았으면 어떠하였을까? 그런 기회가 많았지만 번번히 신분차별에 막히다 보니 결과적으로 강대국의 뜻에 따른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완의 시대를 경험하면서 백범 선생님은 핵심적인 결론과 교훈을 얻어왔다. 과거시험에서 그랬고, 동학의 팔봉접주로서의 생활도 그랬다. 후조 선생과의 짧은 인연도 그랬다. 특히 감옥에서 배우는 활빈당의 조직 설정 및 운영에 관한 비법을 전수받으면서 일본과의 독립운동에 관한 귀중한 방법을 배우게 된다. 충무공 이순신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정확하게 할일을 하고 가셨다. 라는 느낌과 더불어 백범도 뛰어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도록 안배한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 교육의 힘

백범 선생님은 후세의 교육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아마 두 번의 옥고를 치루고 당신이 해야할 일이 바로 교육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고향에 가서 보고 느낀바가 있어 교육을 당신이 해야 할 천명으로 여겼을 것이라 생각한다.


안악으로 이주한 뒤에도 교육사업에 열중하다가 성묘차 고향에 갔다. 여러 해 만에 고향 땅을 방문하니 어릴 때 공부하고 놀던 옛 추억에 대한 감회가 형언할 수 없다. 나를 안아주고 사랑해 주던 노인들은 태반이나 보이지 않고 내가 어리게 보았던 어린 아이들은 거의 다 장성하였다. 성장한 청년 중에 쓸만한 인재가 있는가 살펴보았지만,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까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203p)


그냥 밥벌레에 불과했다. 아마 선생도 텃골에서 그냥 있었다면 이와 같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환경이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변화경영연구원의 자세도 다시 가다듬게 되었다. 배움의 환경이 그만큼 중요하다.


마. 태백산맥에서 찾은 백범 선생님

태백산맥을 찾아보니 백범 선생의 죽음과 관련하여 김범우와 손승호의 대화가 나와 있어 백범 선생님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죽음의 배후에 대해 나와 눈에 번쩍 띄여 옮겨 본다.

경교장 바로 앞이 적십자병원인데도 운명했다면, 치명상을 입은 모 양이군." 긴 침묵에서 벗어나며 김범우가 흘린 혼잣말이었다. 침통한 그의 얼굴은 어떤 분노를 담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갔어… 비참하고 허망해…" 손승호는 하늘로 먼 눈길을 보낸 채 중얼거렸다. 김범우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를 깊이깊이 빨아들였다. 이상스럽게도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벌떡거리고, 갑갑하면서도 출렁거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와 절망과 증오와… 그런 것들이 뒤죽박죽되어 있는 감정을 그는 다스릴 수가 얼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투박할 이만큼 두꺼운 질감과 굵은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에 동그란 테의 안경을 낀 그 독특한 백범의 모습이 연기 속에 뚜렷이 떠올랐다. 질그릇처럼 소박하게, 그리고 무쇠 솥 같은 강인함을 지닌 얼굴이었다. 결코 미남일 수 없으되 의지로운 힘과 믿음직스러운 무게를 지닌 혁명가다운 얼굴이었다. 그분을 총으로 쏴서 죽이다니… 정말 이 나라는 끝장난 것인가.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하게 평생을 바쳐 이국땅에서 조국 독립투쟁을 하다가 명색이 해방된 땅에서 사년을 다 못 살고 총을 맞아 죽어야 하다니… 일흔넷, 그분의 일생을 이렇게 허망하고 참담하게 종지부 찍게 만든 그놈들, 그놈들을 다시 죽여야 할 게 아닌가. 그분을 미워하고 적개심을 품은 놈들은 뻔하지 않은가. 첫째가 이승만이었고, 둘째가 한민당을 위시한 친일반역 집단이었다. 그분은 줄기차게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민족 자주성의 확립을 위해 민족반역자들의 일소를 변함없이 역설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세력 중 어느 하나가 그분의 가슴에 총을 쏴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두 세력이 손을 맞잡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결국 뿌리는 하나고 가지는 두 개로 뻗었을 뿐인 한 나무에 불과하니까. 이건 속단이 아니다, 경솔도 아니다. 대낮에, 군인이, 경교장까지 들어가서 총질을 해댔는데 더 뭘 볼 것이 있는가. 그 무모할이 만큼 대담한 수법은 반민특위를 습격한 수법이나 뭐가 다른가 정말 이 나라는 끝장이 난 것인가… 몽양을 죽이고, 그분마저 죽이다니… 무법천지가 앞으로 어떻게 돼갈 것인가…


3. 내 가슴을 울리는 글귀

<백범 출간사>

(13p) 애초에 이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사건 이후 중일 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이 남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14p)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은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15p)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 이다.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한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15p)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 하는 것이니 자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9p)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된 사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러 지어낸 것은 전혀 없으니 믿어주기 바란다.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0p) 아버님이 사람을 잘 때리셨던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고 순전히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을 피하였다.

(29p)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인해 생긴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였다. 나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겼다.

(31p) 어느 날 내가 아침도 먹기 전에 그 선생님이 집에 와서 작별을 고하셨다.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목놓아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하였다. 작별하고 나서도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다.

(34p) 아버님이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免費學童)이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 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2. 시련의 사회진출>

(39p)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나.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61p)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잘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고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힌 헛된 일이었다.

(63p)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이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실행·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 주셨다.

(65p)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백석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을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3. 질풍노도의 청년기>

(94p)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은 것은 가히 장부로다.

(94p) 자문자답 속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속에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103p) 이창매는 본시 연안의 통인으로 그 부친 장례 후에 사시장철 비바람을 맞으면서 지성으로 산소를 모셨다고 한다. 얼마나 극진하게 묘를 묘셨던지, 묘앞의 신 벗은 자리에서부터 절하는 자리까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갔던 자국들과 두 무릎을 꿇었던 자국, 그리고 향로와 향합을 놓았던 자리에 영영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115p)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감리서 직원들이 종종 와서 내가 신서적에 열심 하는 것을 보고 매우 좋아하는 빛을 보였다.

(131p) 감옥 담을 넘을 줄사다리를 매어 놓고 나니 문득 딴 생각이 들었다. ‘조덕근 등을 데려가려다가 무슨 일이 날지 모르니 이 길로 곧 가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자들은 결코 나의 동지가 아니다. 기필코 건져내서 무엇 하리’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마침내 두 번째 생각이 이기고 말았다.

<4. 방랑과 모색>
(135p) 볏짚을 안아다가 방앗간에 펴고 하룻밤을 보낼 훌륭한 방을 준비하였다. 볏짚을 깔고 볏짚을 덮고 볏짚을 베고 누우니, ‘인천감옥 특별방서 2년 동안 지내던 연극의 1막이 내리고 지금은 방앗간 잠으로 제2막이 열리는구나.

(155p)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165p)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을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179p)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은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180p) 아. 슬프도다. 이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 하시던 훈육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 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181p)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 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시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 백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5. 식민의 시련>
(203p) 안악으로 이주한 뒤에도 교육사업에 열중하다가 성묘차 고향에 갔다. 여러 해 만에 고향 땅을 방문하니 어릴 때 공부하고 놀던 옛 추억에 대한 감회가 형언할 수 없다. 나를 안아주고 사랑해 주던 노인들은 태반이나 보이지 않고 내가 어리게 보았던 어린 아이들은 거의 다 장성하였다. 성장한 청년 중에 쓸만한 인재가 있는가 살펴보았지만,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까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215p)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의무를 다하였다.

(221p)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나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잇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찼다.

(225p) 그러고 보니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딘다. 나는 평소 우리 한인의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지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238p)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대말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해져서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246p) 근 일고 여덟달 만에 면회하는 어머님은 태연하신 안색으로 말씀하셨다. “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 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 까지 데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번에 한 사람 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증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라?” 오랜만에 모자 상봉하니 나는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저같이 씩씩한 기절을 가지신 어머님께서 개 같은 원수왜놈에게 자식 보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생각하니 황송한 마음이 그지없다.

(252p) 간수 놈들의 심술은, 감방에서 무슨 말소리가 났는데, 누가 말을 하였나 물어보아 말한 자가 자백을 않고 누가 말했다고 고발도 없을 때는 여름철에는 방문을 닫아버리고 겨울철에는 방문을 여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감시의 묘방이다.

(264p)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옥중의 수인들 중에도 이 같은 강도의 인력이 제일이므로, 왜놈에게 의뢰하여 순사나 헌병 보조원 등 왜 관리를 하다가 들어온 자는 감히 수인들 중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사기·절도·횡령범들도 강도 앞에서는 옴짝을 못하기 때문에 수인계의 권위를 강도가 잡고 있었다.

(267p)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지어준 ‘몽우리돌’이다. ‘몽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중에 왜놈의 가마솥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몽우리돌’ 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사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 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6. 망명의 길>

(274p) 그 말을 들이시고 어머님이 친히 오셔서 부르셨다. 나는 어머님을 따라 집에 왔다. 어머님은 노하셔서 책망하신다. “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 하였더냐?” 나는 무조건 대죄하였다. 어머님도 어머님이거니와 아내가 어머님께 고발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계획을 낸 것이었다.

(288p)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빈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옥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290p)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이 없고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란 곳은 혹을 떼러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 온 후 서반아 감기로 20일 동안 치료한 것뿐이다.

<백범 일지 하권 - 하권을 쓰고 나서>

(295p) 『백범일지』 상권은 53세때 상해 법조계 마량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 시간을 들여서 기술한 것이다. 그 동기로 말하면, 젊은 나이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체 나의 보잘 것 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년 동안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298p)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돌아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도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이 잠드는 것이다.

(298p)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고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23p) 과연 이씨는 의기남자로 살신성인할 큰 결심을 품고 일본에서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씨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맞본 방랑생활을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5p)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네가 민단 사무실에 가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손으로 국수를 사다가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사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331p) 이에 윤군은 쾌히 응낙하며 말하기를 “저는 이제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 하고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336p)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352p)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힘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혈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후에 또 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운동을 먼저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은가.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 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 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가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367p)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371p) 퇴원 후 즉시 걸어서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어머님께는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지내다가, 거의 퇴원할 무렵이 되어서야 신이가 사실을 알려드렸던 것이다. 내가 뵈올 때에도 어머님은 조금도 동요되는 법이 없이 “ 자네의 목숨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중경임시정부와 광복군>

(377p) 그들은 어머님을 잘 모시지 못하는 나의 형편을 알고, 자신들이 어머님 시중을 들겠으니 나는 마음놓고 독립사업에만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런 성심을 품고 남안에 도착하였을 때, 어머님은 이미 인제의원에서도 손을 놓고 퇴원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던 때였으니, 한스럽기 그지없다.

(379p)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하셨다. 종전에 우리나라는 노복을 사용하였으나, 국가가 병탄된 뒤 경향에서 동포들의 양심 발동으로 “내가 일본인의 노예가 되어 어찌 차마 동포를 종으로 사용하랴” 하고 자연히 노복을 물리치고 고용제를 고용하였다.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평생 ‘고용’ 두 글자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 까지도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387p) 비통하고 슬프도다! 하느님이 진정 무심하신가. 어린 아들, 어린 딸도 왜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러고도 인간이란 말인가. 나라를 잃은 이래 왜구에게 일가족이 도륙됨이 무릇 몇 백 몇 천 집이랴만. 기미 3.1운동 이래 상해 운동가들이 당한 것에서는 이명옥군이 당한 비극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무릇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노니, 광복 완성 후 이명옥일 가를 위해 충렬문을 수아하고 고향에 세워서 영구히 기념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

<6. 해방전후의 대륙>

(399p)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고 하였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아싸. 서안 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403p) 즉시 마로가 어머님 댁을 찾아가 보니 천만 다행으로 안전하셨다. 과히 놀라시지나 않으셨는지는 여쭈어 보았더니 “잠이 깊이 들었을 때 침상이 흔들렸는데, 그것이 폭탄 때문인가? 이같이 말씀하셨다.

<7. 조국에 돌아와서>
고국을 떠난지 27년마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호흡하며, 상해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후손들이 왜적의 악정에 주름을 피지못하리라 우려하였던 바와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망시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반면 차장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져 집이 땅같이 낮게 붙어 있다. 동포들의 생활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

(412p) 의구한 산천은 나를 반겨주는 듯 하다. 법당 문 앞에 당도하니 대웅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도 변치않고 나를 맞아준다. 48년전 무심히 보았던 글귀를 금일 자세히 보니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라고 되어 있다.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이 글귀는 과연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나의 소원>

(428p) 그러므로 어는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않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피여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고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고야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429p) 모든 생물은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을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 해가 많다.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이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4.내가 저자라면

과연 나라면 쓸 수 있었을까?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역사를 쓸 수 있을까? 백범 선생님은 묵묵히 유서를 남기는 심정으로 사건을 회고하면서 적어나갔다. 유독 백범일지의 하권에서부터 나의 소원을 읽을 때까지 만일 이라는 가정이 수없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작가의 소개에서 느꼈던 울분이 나의 소원 부분에서는 자괴감으로 바뀌었다. 고문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 신문보도에서 사라진지 약 20여년이 되었다. 변화경영연구소에서 7월의 과제 보조도구로 내 준 흑수선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6.25 전쟁당시 포로수용소인 거제를 배경으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건들이 죽 이어진다. 포로들의 처참한 생활이 나오고 탈출을 위한 수많은 죽음이 나온다. 고문이라는 행위도 여기 저기 나타난다. 내가 군대에서 캄캄한 밤에 산에 올라가서 심한 매를 맞았던 기억도 다시 떠올랐다. 오랜만에 떠오르는 싸늘한 기억이다. 백범일지를 보면 고문당하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내가 너무 편하게 살아온 것인가. 아니면 너무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백범 선생님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백범 선생님을 잃으면서 나라의 절반을 잃었다. 38선 이북의 땅을 내주어야 했다. 비단 땅을 준 것만 아니라, 오히려 독립운동의 메카였던 만주와 간도를 잃었고, 거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싸워온 흔적들이 없어져 버렸다. 수많은 영웅들이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점에서 백범일지의 가치가 돋보였다. 늘 선택의 순간에서 되뇌였던 말이 가슴에 많이 남는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得手樊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은 것은 가히 장부로다.(懸崖撤手丈夫兒)

IP *.118.101.75

프로필 이미지
한정화
2007.06.19 07:09:10 *.72.153.12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得手樊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은 것은 가히 장부로다.(懸崖撤手丈夫兒)

이 말은 도약을 만들어내는 뭔가가 숨어있어요. 김구 선생님을 찾게 하네요.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목요일 도서관에서 계속 만나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92 (14) 쉽게 읽는 백범일지 - 도진순 엮어옮김 [2] 박승오 2007.06.18 4083
» [독서014]백범일지/도진순 주해 [1] 素田 최영훈 2007.06.18 2438
890 백범 일지/도진순 주해 香仁 이은남 2007.06.17 2393
889 백범일지(白凡逸志) / 김구 好瀞 김민선 2007.06.18 2662
888 야생초 편지를 읽고 (마음이 환경보다 우선이다.) 산골소년 2007.06.17 2289
887 [백범일지] 아름다운 사람 김구 선생님 [4] 余海 송창용 2007.06.16 3519
886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2] 도명수 2007.06.16 2157
885 [013]『난중일기』를 읽고 file [5] 현운 이희석 2007.06.13 3767
884 난중일기(13)- 역자의 세심함에 감사드리며 [7] 최정희 2007.06.12 2605
883 (13) 난중일기 - 송찬섭 엮음 [3] 박승오 2007.06.12 2408
882 [13] 난중일기(이순신/ 노승석) [6] 써니 2007.06.14 3501
881 [리뷰11] 난중일기 : 이순신 [1] 박소라 2007.06.24 2354
880 [난중일기] 외로운 남아 이순신 [1] 余海 송창용 2007.06.12 2447
879 [독서013]난중일기 완역본/노승석옮김 [3] 素田최영훈 2007.06.12 2462
878 [리뷰013]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노승석 옮김 [2] 香山 신종윤 2007.06.12 2627
877 (013) 난중일기를 읽고 [3] 校瀞 한정화 2007.07.13 2398
876 난중일기, 2,539일의 인간적 기록 [4] 好瀞 김민선 2007.06.12 2207
875 (13) '한산에 뜨고 노량에 지다' _ 난중일기를 읽고 [6] 時田 김도윤 2007.06.09 2761
874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를 읽고 (무서운 열정) [4] 산골소년 2007.06.08 2432
873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를 읽고 [1] 현운 이희석 2007.06.07 2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