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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8일 03시 29분 등록


쉽게읽는 백범일지

김구 저, 도진순 엮어옮김, 돌베게


1. 저자에 대하여

개인적 약력
백범 김구는 15세에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고종 30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교구 또는 포교소의 책임자. 포주 또는 장주라고도 함)가 되고 1894년 팔봉도 소접주가 되어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나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패배하였다.

동학혁명군이 패배한 그 다음해부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즈음, 백범은 비록 소년 장 군의 몸이었으나 동학에서 불 붙어온 왜놈에 대한 적개심으로 왜놈 장교를 맨손으로 때려 눕혔다. 그리고 그의 칼을 빼앗아 왜놈의 가슴에 꽂고 거기서 흘러 나오는 피를 빨아먹은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백범의 의로운 행위는 비단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 우리 민중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백범은 을미년 명성황후 살해 사건 때 일인에게 시해 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자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에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가 1899년 환속, 1903년 크리스트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안악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농촌 계몽 활 동을 하였다.

3•1운동 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경무국장•내무총장을 역임하고 1926년 6월 임시 정부의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백범은 즉각적으로 임시정 부를 항일무장 유격전의 본거지로 근본적인 개편을 해나갔다.

1928년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 무력 활동을 시작하여 결사단체인 "한국 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사쿠라다몽 일본 국왕 저 격 사건, 상해 홍구공원 일본 국왕생일 축하식장의 폭탄 투척 사건 등 이봉창, 윤봉길 등 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41년 일제가 드디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세계 정세는 일변하게 되었다. 이에 임시 정부는 그해 12월 9일 바로 일제가 전란을 일으킨 다음 날, 즉각적으로 대(對)일본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5년에는 대한민국이란 국명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 군 산하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 작전을 실시하다 해방을 맞았다. 결국 광복군 훈련에다 열중하다 해방을 맞았을 뿐, 백범의 유격 전술은 국내에서 불을 댕기지는 못하였다. 해외에 있던 백범도 "올 것이 너무 일찍 왔구나!"하고 땅을 치며 울 정도였다.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하였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있었고 또 한 우리민족으로 구성된 무장군대가 있었음에도 해방조국에는 우리군대가 아닌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진주하였다. 이것이 결국 민족 분단의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범이 해방 후 최초로 맞은 시련은 미군에 의한 임시정부의 해체와 신탁통치 문제 그리 고 단독정부수립주의자와 싸우는 자주통일의 노력으로 직결되어 갔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는데 협력하지 않겠다. "

백범은 단독정부 수립반대와 통일조국의 의지를 강력히 보여 주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고, 38선을 넘어 정치회담을 벌였으나 그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다.

1946년 6월 26일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피살당한 백범은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추서 되었다.

백범의 가족과 스승

김구는 독립운동에 전념하느라 가족과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1904년 최준례와 결혼하여 1906년 첫 딸을 얻었으나 곧 사망하였고, 이후 두 딸을 두었으나 감옥을 드나드는 사이에 모두 잃었다. 게다가 큰아들 인(仁)이 태어난 지 석 달만에 상하이 망명길에 올랐으니, 가족 사이의 단란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
김구는 상하이에서 다른 독립운동가의 집을 전전하며 생활하다 1920년 부인과 아들 인이 상하이로 오면서 비로소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또 1922년 어머니도 상하이에 도착하였으며, 그 해 둘째 아들 신(信)이 태어났다. 그러나 둘째 아들을 낳은 직후 허약한 부인이 사고를 당하고 병을 얻어 1924년 1월 사망하였다. 부인의 투병생활에도 일제의 감시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였으며, 부인의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하였다. 이후 1925년 생활의 어려움을 걱정하던 어머님이 둘째아들 신과 함께 귀국하였고, 2년 후인 1927년에는 큰아들 인마저 귀국하여 김구는 상하이에서 다시 홀로 생활하게 되었다.

부(父)
『아버님은 집안의 둘째로 태어나, 가난하여 늦도록 노총각으로 지내시다가 스물 네 살에 삼각혼(三角婚) 이라는 괴상한 방법으로 결혼하셨다. 겨우 이름 석자 쓸 줄 아는 학식만 있으셨지만, 기골이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셨다. 술 취하면 양반 강씨와 이씨를 만나는 대로 때려 1년에 몇 번씩 해주 관청에 구속되는 소동을 일으키셨다. 아버님께서 자주 그리하신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의 영웅들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참지 못하셨다. 그러므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존경했고 양반들은 무서워서 피하였다.
아버님 어렸을 적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갈 때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넣어 드리고 사흘이나 더 사시게 하였다고 한다.』
『나는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체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수강료로 쌀과 보리를 가을에 모아주기로 하고 청수리 이 생원을 선생으로 모셔왔다. 그 분은 양반이지만 글이 넉넉지 못하여 '양반의 선생'으로 고용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같은 '상놈의 선생'이 된 것이다. 』
아버님은 나의 동학 입도를 흔쾌히 승낙하고 필요한 예물을 준비해 주셨다. 나는 곧바로 입도하였고, 뒤이어 아버님도 입도하셨다.

모(母)
『지금 생각해보면 집안의 이러한 추태는 상놈의 행위라 하겠다. 그때 어머니은 “우리 집안의 많은 풍파가 모두 술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나는 차라리 자살하고 그 꼴을 안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
『인천 감리서에서 나진포로 이동하던 중 효자 이창묘의 묘를 보며
눈으로 비문을 보고 귀로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순검들이 알 새라 어머님이 알세라, 피 섞인 눈물을 흘렸다. 부모 죽은 후까지 저렇듯 효도한 자취를 남겼으니, 부모 생전에는 어떠했을지 알 것 같았다. 이창매가 다시 살아나 나를 꾸짖는 듯싶었다. 허둥지둥 내 뒤를 따라다니시느라 넋이 다 빠져서 하염없이 한숨만 짓고 계시는 어머님을 차마 뵐 수 없었다. 일어나서 출발할 때, 이창매의 무덤을 다시 되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을 하였다』
『어머님은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핬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종을 부렸고,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긴 뒤에는 돈으로 사람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어머님은 일찍부터 당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종’은 물론이고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팔십 평생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지으셨다.』
『9년만에 다시 만나서 어머님이 하신 첫 말씀은, “나는 지금부터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말로만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많은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 주자는 것일세”였다. 이로써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내리는 큰 은혜를 입었다. 』
『어머니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어서 독립이 되도록 노력하고, 독립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서 고향에 묻어라”』

아내(妻) 최준례
『전에는 아내와 어머님 사이에 부딪치는 점도 없지 않았으나, 내가 체포된 후 4~5년간 서울과 지방을 전전하며 별별 고생을 다 같이 겪으면서 이제는 한 몸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경성에서 지낼 때 아내는 경제적인 궁핍 때문에 어머님께 화경이를 맡기고 왜놈 토지국의 책 공장에서 매일 고된일을 하였다. 또 어떤 서양 여자가 아내에게 학비를 대 주며 공부시켜 주마 하였으나, 어머님과 어린 화경이를 돌보기 위해 그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종종 나와 뜻이 맞지 않을 때 아내는 반드시 그 이야기를 하였다. 다른 집에서는 부부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어머니가 주로 아들 편을 들지만, 우리 집에서는 어머님이 열 백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우신다.
“네가 감옥에 들어간 후, 너 동지들의 젊은 부인들은 남편이 죽을 곳에 있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이었다. 그러나 네 처의 행동은 나뿐 아니라 네 친구들까지 감동시켰다. 결코 네 처를 박대해서는 못쓴다.”』
『아내는 둘째 신을 낳은 후, 몸도 채 회복하지 못한대 2층에서 세숫대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층계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후 늑막염이 폐병이 되어 고생하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스승(師) 고능선
『사람들은 그를 ‘고산림’이라고 불렀다. 해서 지방에서 품행이 바르기로 이름난 학자였는데 어느 날 고선생이 내게 말했다.
“창수, 내 사랑 구경은 좀 아니하겠나?”
나는 감동하여 다음날 고선생 댁을 찾아갔다. 그는 나더러 매일 자기 사랑에 놀러와서 세상일도 논하고 학문도 토론하자고 했다.
“선생님이 이처럼 너그러우시니 황공 감사하지만, 제가 감당할 만한 자질이 있겠습니까?”
당시 내 마음은 매우 절박한 상태였다. 과거장에서 낙심하고, 관상 공부에서도 실망하였으며, 동학당이 되어 ‘새로운 국가’, ‘새로운 국민’을 꿈꾸었으나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일이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실패한 패장 신세가 되어 겨우 생명만 부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장래를 생각하면 대체 어디다 발을 디뎌야 할지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러니 과연 내가 고선생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오히려 선생께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앞섰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아무쪼록 성현의 발자취를 밟아 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자리에 이른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으며, 중도에 자포자기하는 짐승만도 못한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이르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선생님의 말씀은 내게 위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리던 아이가 젖을 빨아 먹는 것과 같았다.』
『 마음이 자못 어지러워 고민하고 있는데, 홀연히 한 가닥 빛이 비치듯 고능선 선생의 교훈이 떠올랐다.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나는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았다.
‘너는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그렇다.’
‘너는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그렇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4) 무릇 한 민족이 국가를 세워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라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한 채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치를 깨달아 행한다면, 우리 나라가 완전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길이 보전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 생각하고 행한 일이 다 이러한 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바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사람이지만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층민 백정과 평민인 범부를 의미하는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의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17) 인, 신 두 아들에게
이 일지를 기록하여 전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나는 너희들이 역사상 많은 위인들을 배우고 본받기를 원한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면 아비의 삶을 알 길이 없겠기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오래된 사실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아 유감스럽지만, 일부러 지어낸 것은 없으니 믿어 주기 바란다.

(23) 이 할아버님은 아버님과 동갑이셨지만 손윗사람의 권위로 나를 풀어 주셨다. 게다가 아버님의 설명은 들을시지도 않으시고, “어린 것을 그다지 무지하게 때리느냐?”고 꾸중하시며 매를 빼앗아 한참 동안 아버님을 때리셨다. 나는 할아버님이 무척 고마웠고, 아버님께서 매 맞으시는 것도 퍽 고소하였다

(32)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얼굴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46) 당시 내 마음은 매우 절박한 상태였다. 과거장에서 낙심하고, 관상 공부에서도 실망하였으며, 동학당이 되어 ‘새로운 국가’, ‘새로운 국민’을 꿈꾸었으나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실패한 패장 신세가 되어 겨우 생명만 부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장래를 생각하면 대체 어디다 발을 디뎌야 할지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러니 과연 내가 고선생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오히려 선생께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앞섰다.

(47)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아무쪼록 성현의 발자취를 밟아 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자리에 이른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으며, 중도에 자포자기하는 짐승만도 못한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이르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 백범의 스승 고능선의 격려

(68) 마음이 자못 어지러워 고민하고 있는데, 홀연히 한 가닥 빛이 비치듯 고능선 선생의 교훈이 떠올랐다.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나는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았다.
‘너는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그렇다.’
‘너는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그렇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75) 인천 감리서에서 나진포로 이동하던 중 효자 이창묘의 묘를 보며
눈으로 비문을 보고 귀로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순검들이 알 새라 어머님이 알세라, 피 섞인 눈물을 흘렸다. 부모 죽은 후까지 저렇듯 효도한 자취를 남겼으니, 부모 생전에는 어떠했을지 알 것 같았다. 이창매가 다시 살아나 나를 꾸짖는 듯 싶었다. 허둥지둥 내 뒤를 따라다니시느라 넋이 다 빠져서 하염없이 한숨만 짓고 계시는 어머님을 차마 뵐 수 없었다. 일어나서 출발할 때, 이창매의 무덤을 다시 되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을 하였다.

(83) 법정에 들어가 앉으니 김윤정이 슬쩍 내 곁을 지나가며, “오늘도 왜놈이 왔으니 기운껏 호령을 하시오” 한다.

(84) 며칠 후에는 왜놈들이 내 사진을 찍는다고 하여 경무청으로 업혀 들어갔다. 그날도 청사 안팎에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김윤정이 슬쩍 내 귀에 들리게 말하였다.
“오늘 저 사람들이 창수의 사진을 찍으러 왔으니, 주먹을 쥐고 눈을 부릅뜨고 사진을 찍으시오”

(86) 신서적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청계동에서는 오로지 고선생만을 하나님처럼 섬겼으나, 그 분의 말과 행동이 다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옥에서 알게 되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는 세계 각국에서 배워 적용하는 것이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2)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상놈의 껍질을 벗고 남보다 뛰어난 양반이 되어 그 동안 당한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도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이 되고 보니 그런 생각이야말로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만일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싹트고 자라면 부처님께 의뢰하여 물리쳐 내야 하는 것이다.

(126) ' 선생님이 머리 풀고 다니는 오랑캐를 말씀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머리털은 곧 피가 만든 것이요, 피는 음식이 소화되어 만들어진 진수이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머리털도 자랄 수 없습니다. 설사 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서 크고 훌륭한 상투를 얹는다 치더라도 왜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의 상류층은 백성을 학대하는 약탈자에 불과합니다. 백성들은 일자무식이라 탐관오리와 토호의 학대를 당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만약 탐관오리와 토호들이 자기 백성을 학대함 같이 왜와 서양을 학대한다면, 왜와 서양은 멸종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의 피를 빨아 왜놈과 양놈에게 바치고 아첨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문명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을 교육하여 건전한 2세로 길러야 합니다. 또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이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해야 합니다.‘

(128) 산골 가난한 집에서 이름 있는 의사를 부른다거나 기사회생의 명약을 드시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님께서 손가락을 자르신 것도 이런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또 그리하면 어머님의 마음이 상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이 계시지 않는 틈을 타서 왼쪽 넓적다리 살을 한 조각 베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원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살을 베어내려 했으나, 살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처음보다 천백 배 용기를 내어 다리 살을 베었지만, 두 번째는 결국 베어 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145) 환등기를 가지고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 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절규하였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152) (이재명 의사 의거 후) 그런지 한 달이 못 되어 이의사가 동지 몇 명과 함께 경성에 도착하였다. 그는 군밤장수로 가장하고 길거리에서 밤을 팔다가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이완용은 생명이 위험하고, 이의사와 그의 동지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만약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이다. 우리가 눈이 멀어 그의 행동을 간섭하고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154) 1910년 합병 당시 인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원로대신과 내외 관리 중 자살하는 자도 많았고 교육계의 배일사상도 극도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일반 농민들 중에는 합병이 무엇인지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도 많았다. 나는 망국의 치욕 속에서도 국민이 한마음으로 분발하기만 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양양하는 길밖에 없으므로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소/중학부의 학생을 늘려 모집하는 등, 교장으로서 임무를 다했다.

(157) 세 놈이 나를 들어다가 유치장에 눕혔을 때는 이미 동창이 밝아 있었다. 신문실에 끌려간 것은 전날 해가 진 후였다. 처음에 신문을 시작한 놈이 불을 밝히며 밤을 새운 것과 그 놈들이 온 힘을 다해 자기 일에 충성하던 것을 행각하니 자괴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 성심껏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저 왜구들처럼 밤새워 일한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 고통스런 와중에도, 혹시 내게 망국노의 근성은 있지 않은가 하는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158) 경무총감부가 있는 진고개 산기슭 여기저기에서는, 도살장에서 소나 돼지를 때려잡는 것 같은 고문 소리가 밤낮 끊이지 않고 들렸다. 하루는 나를 최고 신문실로 끌고 갔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17년 전 인천경무청 방청석에 앉았다가 내 호령소리를 듣고 욕하면서 나가 버렸던 와타나베 놈이, 검은 수염을 늘어뜨리고 노쇠한 얼굴로 총감부 기밀과장의 제복을 입고 내 앞에 턱 마주 앉아 있을 줄이야.

(163) 몸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나를 달아매고 때릴 때는, 조선시대 박태보가 보습단근질을 당하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했다는 일화를 기억했다. 겨울철이나 겉옷만 벗기고 속옷을 입은 채로 때리는데, 나는 ‘속옷을 입어 아프지 않으니 다 벗고 맞겠다’고 자청하여 알몸으로 매를 맞아 살가죽에 온전한 데라곤 없었다. 바로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 음식냄새를 맡을 때면,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해서 밥을 받아먹을까, 또 아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을 해다 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중국 한나라 때 소무가 흉노에게 잡혀 19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굶주리면서도 옷 솜털을 씹어 먹으면서 끝내 절의를 지켰다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170) 나는 왜놈이 나를 뭉우리돌로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기뻤다. 죽는 날까지 왜놈의 법률을 하나라도 파괴할 수 있다면 그리하고, 왜놈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서는 맛보기 어려운 삶의 진수를 맛보리라 결심하였다.

(174) '의병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니 국가에 대한 의무도 너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찍이 고능선 선생에게 의리가 무엇인지 배웠고, 또 삼척동자라도 개나 양에게 절하라고 시키면 응하지 않는다고 2세들에게 가르치던 네가, 왜놈 간수에게 머리 숙여 절하느냐? 지금 왜놈이 주는 콩밥과 붉은 옷 때문에 네가 왜놈에게 순종하는 것이더냐? 명색이야 의병이든 도적이든, 왜놈에게 종신형이나 10년 형을 받고 갇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히 의병으로서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 남자는 의로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지 않는다고 어린 학생을 가르치던 네가 지금은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

(184) 그리하여 굳은 의지를 다지는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으로 고쳐 동지들에게 알렸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고친 것은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과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210) 임시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내게 와서 국무령으로 조각하라고 강권했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굳이 사양하였다.
첫째, 임시정부가 아무리 위축되었다 하더라도, 해주 서촌 미천한 김존위의 아들인 내가 한 나라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다. 둘째, 이상룡과 홍진 두 분도 함께 일하려는 인재가 없어 실패하였는데, 내가 나서면 더욱 호응하는 인재가 없을 것이다.

(217) 내 육십 평생을 돌이켜 보면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고 궁하면 귀함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직위가 올라가 귀해져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나라가 독립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지 모르겠으나, 하늘 아래 넓고 큰 지구에 한 치의 땅도,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218) 자식들에게 아비 된 의무를 못하였으므로 너희들이 자식 된 의무를 해 주기도 원치 않는다. 다만 너희들은 이 사회의 은혜로 먹고 입고 배우고 있으니, 스스로 사회의 아들이라는 마음을 갖고, 사회를 부모처럼 섬기면 더 이상 만족이 없을 것이다.

(226)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묻는다면, 제일 큰 소원은 독립 달성 이후 본국에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다. 그것이 안 된다면, 작은 소망은 임시정부를 후원한 미주/하와이 동포들이라도 만나 보고 돌아오다 비행기에서 시신을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에 떨어져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 또한 어렵다… 칠십 평생을 돌이켜보니,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28) 이봉창의 말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늙은 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독립 운동에 몸을 던지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230) 그 길로 함께 안공근의 집에 가서 선서식을 거행한 뒤, 폭탄 두 개와 돈 300원을 건네 주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생은 마지막 가시는 길이니 이 돈을 동경에 도착할 때까지 다 쓰시오. 동경 도착 이후 전보하시면 다시 돈을 보내오리다.”
그리고 사진관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 얼굴에 슬픈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저는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238) 마침 오전 7시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2월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라며 내 시계와 바꾸자고 하였다. 나는 기념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윤봉길)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내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멘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255) 우리 민족의 비운은 대체로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의 실질적인 행복은 내 모른다 하고, 창시자 주희 이상으로 성리학만 주창하여 사색당파로 수백 년이나 다투어 왔으니, 민족 원기는 다 닳아 없어지고 남에게 의지하려는 생각만 남았다. 이러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으리오.
슬프다. 오늘날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향하여 낡고 봉건적이라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문제 또한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을 한꺼번에 할 것을 극력 주장하다가도, 레닌이 ‘식민지는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뒤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자,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먼저 해야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청년들은 중국 정자와 주자의 방귀조차도 향기롭다는 옛사람들을 비웃지만, 같은 입과 혀로 러시아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정신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자, 주자 학설의 신봉자도 아니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위해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260) 9년 만에 다시 만나서 어머님이 하신 첫 말씀은, “나는 지금부터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말로만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많은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 주자는 것일세”였다. 이로써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내리시는 큰 은혜를 입었다.

(279)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내게 이 말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노력한 참전 준비가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다. 서안훈련서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 받은 우리 청년들을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투시킨 후 조직적으로 공작하게 하려고 미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는데, 한 번도 실행해 보지 못하고 일본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305~318) 나의 소원 전문(全文)
내 인생에서 만난 최고의 글 중 하나.



3. 내가 저자라면

대부분 중고생 시절에 한번쯤 이 책을 접해본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수학 문제 풀기에 바빴던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밝혀두고 싶다. 개인적으로 <백범일지>는 연구원 생활을 하며 지금까지 읽은 14권의 책 중 가장 큰 감명과 통찰을 준 책이었다. 숨이 차올라 한숨을 내쉬며 구절들을 되풀이 해보느라 몇 번이고 책을 ‘탁’하고 덮어야 했다. 눈을 감으면 선생이 아직 살아서 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7년간의 일기로 구성된 난중일기와는 달리 전 생에게 걸친 그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 일지(逸志)’ 이기에, 평범에서 비범으로 성장하는 백범의 내면세계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살아 숨쉬는 듯한 장면과 대화들
책이 딱딱하지 않았던 이유는 장면 위주로 쓰여졌던 탓이다. 책의 대부분에서 상황 설명을 간단히 하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과 대화가 나와 덕분에 그 상황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본래 이 글이 그의 어린 두 아들에게 아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썼던 것임을 생각하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중학생 정도의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써라’는 누군가의 글쓰기 충고가 이 대목에서 딱 들어맞는 듯 하다. 그가 5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억들을 생생히 떠올려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 퍽 놀랍다.

성스러움이 묻어나는 글 : 솔직한 고백
<백범일지>는 유난히 성(聖)스러운 느낌의 글이었다. 나는 이런 류의 글이 참 좋은데 처음에는 문체 때문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이런 느낌이 드는 책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파커 파머(Parker Pamer)의 ‘삶이 내개 말을 걸어올 때’이다. 오랜만에 책장을 뒤져 낡은 책을 꺼내 들고 둘간의 공통점을 찾아보니 자신의 허물마저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백범 선생의 살인 - 일본인 스치다 라는 일본인을 난도질 하여 죽인 후 손으로 그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에 들어가 호통을 치는 – 모습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아, 그렇구나. 문체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였구나. 자신에게 잔인하리 만큼 솔직해지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나의 소원’ – 마술의 공식
마지막 장인 ‘나의 소원’을 읽으며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그가 앞에서 솔직하게 풀어놓은 자신의 인생 경험과 연결되어 그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가슴속을 무찔러 들어왔다. 카네기의 교육에서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소위 ‘마술의 공식(Magic Fomula)’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하도록 수강생을 격려한다. 이름은 유치찬란하지만 이것이 마법처럼 정말 효과가 있음을 영업전선을 뛰면서 피부로 느낀다. 이 마법의 공식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사건부터 시작하여 메시지는 짧고 간결하게 마지막으로 미루는 것이다. 그리하여 청자들이 ‘무슨 이야기일까?’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김구 선생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공식처럼 책의 구성이 ‘사건’ 부분인 자서전과 ‘메시지’ 부분인 ‘나의 소원’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정리된 탓에 전달력이 더욱 커진 듯 하다.

엮은이 도진순 : 알기 쉽고 간결하게 정리

내가 읽은 것은 주해본을 펴낸 도진순씨가 대중화를 위해 다시 정리한 ‘쉽게 읽는 백범일지’로, 깔끔한 구성과 정리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백범이 기억하지 못한 관련 인물, 유적 등에 대한 자료를 보충하여 주해본을 정비, 체계를 다시 잡았다. 역자가 밝혔듯, 백범일지 원본은 과거의 일을 기억에 의존해 기록한 것이라 시기가 모순되거나 인명, 지명에도 착오가 적지 않아 주해본에서 수정이 쉽지 않았는데, 대중용 및 청소년용으로 이 책을 펴내면서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했다.

둘째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설명해주거나 이해에 필수적인 사료(史料)에 해당하는 것을 적절히 끼워 넣은 그의 편집이 돋보인다. 관련 사진과 자료, 그리고 백범의 동선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도 등을 100컷 이상 설명하여 본문에 다양한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아주 매끄럽게 읽히며 쏙쏙 들어온다. 일본 천황 시해를 시도한 이봉창 의사나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거사 전 사진과 선언문, 그들의 유서까지 실려 있어 당시의 비장함을 엿볼 수 있었다.

편집에서 아쉬운 부분이라면, 난중일기(송찬섭 엮음)에서 보여진 시대적 흐름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다. 사진이나 신문 기사 등에서 간략히 흐름을 짚어 주고는 있으나 약간 부족하다. 챕터가 시작하기 전 그 당시의 중요 사건들을 요약하여 흐름을 짚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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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훈
2007.06.19 13:06:46 *.126.46.122
연구원 칼럼이나 가끔 읽게되는 북리뷰를 보게되면 꼭 책을 사게 돼.
저번에도 미래의 물결, 소유의 종말등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사 놓고선 아직도 '미래의 물결'을 쥐고 있다.
'연구원 생활을 하며 지금까지 읽은 14권의 책 중 가장 큰 감명과 통찰을 준 책' '내 인생에서 만난 최고의 글 중 하나'라고 표현하고 있는 너의 글을 보고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솟구친다.
자꾸만 책은 책장에 쌓이고 현실 속에서의 읽는 속도는 자꾸만 뒤쳐지는 참 한심한 모습의 나로군. ^^
좋은 북 리뷰 잘 읽었어.
너의 글은 참 좋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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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7.06.20 10:06:34 *.149.18.15
최고의 책이라 극찬하던 오빠의 말처럼,
글에도 오빠의 감동이 묻어나네..ㅎ

나도 '나의 소원'전문 보고 몇번이고 받아적을 정도로 좋아했는데.

잔인할 정도로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글,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글,
성스러운 글.....오빠라면 잘 쓸수 있을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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