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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4일 03시 02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이기백
1924년 평북 정주군 갈산면에서 출생, 2004년6월2일 별세. 1941년 오산중 졸업.
1944년 일본 와세다大 문학부 사학과 중퇴.
1947년 서울大 사학과 졸업.
1958∼63년 이화여대 사학과 조교수•부교수.
1963∼85년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교수
1966∼67년 미국 하바드大 옌칭연구소 연구교수.
1985∼95년 한림대 사학과 교수.
1995∼98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1999∼2000년 이화여대 석좌교수 역임.
저서는「韓國史新論」,「민족과역사」,「新羅정치사회사연구」,「韓國고대정치사회사연구」,「新羅사상사연구」, 「韓國古代史論」, 「高麗兵制史연구」 「高麗귀족사회의 形成」 등 主전공 분야의 저서를 포함하여 모두 19권이며 번역서도 두 권이나 된다. 학술원상, 인촌상, 용재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고 책에 대한 자문을 구할 때 제일 먼저 거명되는 책으로 이 한국사 신론을 꼽는다. 그만큼 누구나에게 지명도가 상당히 높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1967년에 초판이 간행된 이래 1976년에 개정판, 1990년에 신수판의 두 차례 개정을 거쳤다. 다행이 과거의 책과 달리 이 책은 어려운 한자는 그다지 없어 읽는 데는 큰 불편은 없지만 그래도 역시 구시대의 단어등이 상당히 있어 어릴 적 읽었던 소설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책이다.

사학자로서 평생을 살아온 저자는 20년 이상 간염으로 고생하다가 2004년도에 간암으로 별세했는데 그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간 선생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려주고 있다. 간단하게 저자의 목소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2001년 11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인용)

―선생님의 학문세계에 큰 영향을 준 분은 누구입니까.

『李丙燾 선생으로부터는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고, 孫晉泰 선생으로부터는 역사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孫晉泰 선생은 6•25 전쟁 때 납북되었지요.

『孫선생은 광복 후 新민족주의 사관을 제창했고, 우리나라 초대 내각에서 문교부 차관으로 활동했는데, 6•25 전쟁 때 漢江을 건너지 못해 북한으로 끌려갔어요. 그곳에서 그들의 눈 밖에 난 것인지, 박물관 수위로 강등되어 고생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李丙燾 선생은 왜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日帝 때 朝鮮史編修會(조선사편수회) 참여, 李完用의 친척이란 점이 李丙燾 선생에 대한 비난의 줄거리였습니다. 광복 후 李丙燾 선생과 그 문하생이 한국사학계를 주도한 데 대한 묘한 반발심리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李基白 史觀은 무엇입니까.

『학문이란 것은 전통이 중요한데, 그것을 계승하려 하지 않고 파괴하려고만 해요. 民族主義史觀, 唯物史觀, 實證史學에서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버려야 하는데, 자기 비위에 안 맞으면 무조건 배격해 버리는 풍토는 고쳐야 합니다. 역사는 여러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란 보편성을 띤 여러 법칙에 의해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多元的 普遍主義 發展史觀이라고나 해야 할는지요. 저 자신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 史觀의 장점을 會通하는 것이 선생님의 史觀이라 할 수 있겠군요. 한국사의 발전 방향은 어떤 모습입니까.

『統一新羅 이후 우리 역사는 支配勢力의 저변이 점차 확대되어 오는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신라 말기에 이르면 중앙에서는 六頭品이, 지방에서는 豪族의 세력이 등장하더니 , 드디어는 이들이 신라의 金氏王族 중심의 骨品制를 무너뜨리고 高麗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후삼국시대를 亂世라기보다는 매우 역동적인 시기라고 말합니다』

―高麗는 어떤 사회였습니까.

『高麗는 왕족뿐만 아니라 6두품과 호족 출신의 문벌귀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사회였습니다. 이렇게 지배세력이 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科擧와 같은 관리등용시험을 필요로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文臣 중심으로 짜여 있던 고려사회의 지배세력은 武人정권 시대에 武臣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고려 후기에는 鄕吏 출신의 士大夫 세력의 진출이 눈에 띄게 됩니다』

―신흥 士大夫 세력이 대두한 朝鮮왕조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역사발전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조선은 士大夫 중심의 兩班사회였지요. 따라서 高麗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支配勢力의 수적 증가를 보였습니다. 士林派가 등장하면서 이런 大勢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朝鮮朝 말기에 이르면 兩班의 신분적 특권은 점점 무너지고 중인, 서리, 상공업자의 사회적 참여가 증대됩니다.

西洋의 새로운 지식에 흥미를 갖고 開港 정책을 이끌어낸 것도 이들입니다. 한편 농민층도 점점 성장하여 이들이 東學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3•1 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운동도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먼저 한 가지 사례를 들겠습니다. 초기에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분의 부친은 노비였습니다. 이렇게 身分制가 부정되고 온 국민의 사회 참여가 보장되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한국은 출발부터 대단한 역사의 발전을 이룩한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민주국가의 건설이야말로 민족사적 이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의 大勢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어 온 귀절]

서장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민족성이 역사의 산물인 것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은 아니다. 4p

일반적으로 말해서 순수하게 고유한 문화란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또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민족 문화는 인류문화의 보편성을 근거로 하고 자기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적합하도록 창조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4p

유교적인 개인 중심의 역사 이해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서 중요시된 것이 제도사학이었다. 물론 군주(君主)이건 영웅(英雄)이건 간에 개인 중심의 역사관은 청산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제도가 인간 없이 운영되었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누가 필요로 해서 그런 제도를 만들었는가 하는 데 대한 해명이야말로 그 제도를 이해하는 핵심문제가 아닐 수 없다.7p

인간 집단이 존재하는 양상이나 변화해 온 과정을 다른 민족의 경우와 비교하여 어떤 점이 같았고 어떤 점이 달랐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국민족도 결국은 인류의 한 구성원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인류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또 차이점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민족의 역사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하나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의 인식은 다른 말로 한다면 그 보편성(普遍性)과 특수성(特殊性)의 인식이 되겠다. 8p

제 10장 사림세력의 등장

성종이 훈구 세력의 일방적인 비대를 막기 위하여 등용함에 미쳐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주로 3사(司)계통에 자리를 차지하고 언론 문필을 담당하였다. 이리하여 정계에는 훈구 세력과 사림세력의 사이의 대립이 조성되었고 이것이 드디어는 사화(史禍)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구 세력의 정치적 보복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227p

붕당이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서원이 붕당의 근거지가 되는 경향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232p

동족 관계에 대한 지식이 보학이라면 동족 관계에 따르는 상장제례에 관한 지식은 예학(禮學)이었다…………..한 집안이나 한 나라에 있어서의 계통과 질서를 바로 하기를 원하는 것이 예학인만큼 결국 이것은 양반 사회의 질서를 옹호, 유지하는 구실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240p

제11장 광작 농민과 도고 상인의 등장

서인이 송시열계열의 노론(老論)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갈린 뒤에는 노론이 주로 정치의 권좌에 눌러앉아 있었다. 이같이 하여 서인, 특히 노론을 중심으로 한 장기 집권가문 즉 벌열(閥閱)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242p

대체로 광작하는 농민들은 부농(富農)이었으며 이들은 이미 자신의 소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으로 팔기 위하여 생산하는 기업농(企業農)이었다. 248p

이와 같이 이 때의 농민들은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인한 생산고의 증대, 농업 경영 방식의 발전, 상업적 농업생산의 발달등에 따르는 부의 축적으로 인하여 부농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평민지주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은 심지어 일정한 양의 곡식을 바치고 성명이 기재되지 않은 관직수여증인 공명첩(空名帖)을 사서 신분상승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 250p

실학의 탄생은 정치와 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정권 담당자들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이리하여 오랫동안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南人)들 중에 실학자가 많이 나게 되었다. 255p

약한 자를 억누르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골몰하는 벌열들이나 부농, 거상들로 말미암아 빚어진 모순에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이에 비판적인 재야학자들이 이 서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암담한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던 일부 경세치용의 실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데 새로운 희망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서학이 유행한다는 것은 벌열중심의 양반사회, 성리학 지상주의의 사상적 질곡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이러한 초기 서학 신봉자들의 사상은 이벽에 의하여 잘 대표되고 있다. 261p

성리학에 있어서도 주자(朱子)의 설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는 숙종 때의 윤휴와 박세당을 들 수있다…………….이들은 요컨대 실증적인 태도로 유교의 경전들에 접근하여 주자가 아닌 공자(孔子)의 본뜻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공자의 본뜻을 실증적으로 찾아보자는 입장에서 경서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학자로는 또 정약용이 있었다. 264p

속화의 유행은 양반의 유교주의에 대한 예술면에서의 항의였고 인간주의의 표방이었다. 268p

제12장 중인층의 대두와 농민의 반란

천주교가 서울을 중심으로 퍼져갔다고 하면 동학(東學)은 농촌 속에서 자라났다. 농민들의 사회적 불만이 동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동학은 철종(1849~1863)때에 최제우가 제창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儒), 불(佛),선(仙)3교의 장점을 취하여 서학에 대항한다고 하였으나 그 교리 속에는 천주교에서 취한 것도 있으며, 또 민간의 무술(巫術)신앙에서 받아들인 것도 있었다. 281p

서원탄압은 당시 유학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고 이러한 사정이 드디어는 대원군 하야의 한 원인이 되었다. 286p

제13장 개화세력의 성장

일본의 이러한 일방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강화도 조약이 지니는 역사적인 의의는 컸다. 그것은 조선이 국제적인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첫 출발이 되었기 때문이다. 293p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양반사회의 부정부패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들의 반항운동이었다. 동학은 농민을 결집시킬 수 있는 조직을 제공하여 주었다. 311p

제14장 민족국가의 태동과 제국주의의 침략

독립협회는 신지식층을 선두로 하고 새로이 성장한 시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면서 발전해 갔던 셈이다. 325p

융희 원년(1907)에는 이인영.허위등이 전국의 의병 약 1만으로 전국적 의병 연합군인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통감부를 격파하려고 그 선발대가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까지 진격했던 사실만 보더라도 의병활동이 얼마나 왕성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338p

한국인은 민족적인 감정으로 말미암아 총독부에 신고하지를 즐겨하지 않았다. 또 일반 농민들에게는 이 사실이 철저하게 알려지지 않아서 신고가 소홀히 되었다. 그리고 동중(洞中)이난 문중(門中)의 공유지도 개인의 이름으로 신고하기가 어려워 신고가 소홀히 되었다. 이같이 사유지이면서도 신고를 하지 않은 토지는 모두 총독부에게 몰수당하였다. 340p

이것은 한국인의 지식이 향상하여 일본의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사상을 주장하게 될 것을 주장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일본은 지도적인 인물보다도 행정, 기술 면에서 심부름을 잘하는 정도의 인물을 필요로 하였을 뿐이었다. 그 결과 일본은 보통 교육과 실업교육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보통교육에서는 일본어를, 그리고 실업교육에서는 정신력 함양을 배제한 기술만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존속한 사립학교들은 여전히 민족교육의 중심지로서 민족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355p

이같이 신교가 비단 종교적 신앙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교육,문화의 각 방면에서 크게 환영 받은 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민족의 죄악을 속죄해주기를 바라는 절박한 심정때문에서였다. 356p

제15장 민족운동의 발전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바라고 일본의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광공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노동쟁의(勞動爭議)도 또한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29년의 원산 노동자의 총파업이었다………이 파업은 결국 타협으로 매듭지어졌으나 노동쟁의가 민족운동과 연결되는 양상을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노동쟁의는 임금인상을 요구하여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으나 뒤로 가면서는 점점 단체교섭권의 부여,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등을 요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항일운동의 일부로서 점점 전국적으로 보편화 되어갔다. 382p

하기 방학을 이용한 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브 나르도 운동) 도 농민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생활을 개선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신문사의 역할이 컸다. 389p

신채호 역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입장에서 고대사의 연구에 주력하였고 특히 고유한 낭가사상(朗家思想)을 크게 강조하였다. 390p

제16장 민주주의 성장

4월 혁명에 의하여 이승만의 독재가 타도되고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에 의하여 윤보선 대통령,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민주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제 2공화국에서 국민은 오랫동안 희망해오던 민주정치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민주정치하에서 여러 계층의 갖가지 욕구가 일시에 분출하여 각종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국민 여론의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민주정치가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혼란으로 규정하고 이 혼란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일어난 것이 1961년 5월에 있은 516군사 쿠데타였다. 405p

북한에서 민주화의 서광이 비치게 되는 날이, 또한 통일의 서광이 비치는 날이 되기도 할 것이다. 406p

종장 한국사의 발전과 지배세력

역사를 체계화하는 것은 결국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러면 이 책에서 시도한 바와 같이 지배세력(주도세력)의 변천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사의 흐름은 어떻게 요약될 수 있는 것일까. 407p

그러면 이 같은 지배세력의 변천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된 것인가. 거기에서 어떤 법칙성 같은 것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 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주목된다. 즉 대체로 말해서 처음에는 지배층을 형성한 여러 세력들 중에서 보다 유력한 세력이 독점적으로 권력을 향유하는 방향으로 좁혀 들어갔다. 그것이 통일 신라기 이후에는 지배세력의 바로 밑 계층이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곤 하여 점점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이 확대되어 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409p

지배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사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문제는 사회적인 지배세력과 정치적인 집권자와의 관계이다. 크게 볼 때에 이 양자는 일치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다만 정치적인 집권자는 그 수가 소수에 국한된 것이므로 사회적인 지배세력 모두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지배세력 안에서 정치적인 집권자는 탄생했던 것이다. 즉 집권자는 지배세력 안에서 선택된 지배세력의 대표자였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에 있었다. 410p

한국사의 큰 흐름을 더듬어 볼 때에 이 결론은 객관적 사실과 일치한다. 그렇다고 해서 집권자가 항상 지배세력의 대표자였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410p

지배세력을 중심으로 하고 한국사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할 때에 일어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사회적인 지배세력과 민중과의 관계이다. 한국사의 오랜 기간 동안 민중은 지배세력의 지배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역사의 표면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그 결과 기록을 통하여 그들의 과거를 더듬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면서도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국사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는 존재가 민중이다. 411p

민주의 반항은 종종 지배세력의 재편성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곤 하였다. 411p

[내가 저자라면]

한국의 산하를 여행하다 보면 그 고즈넉함과 수줍은 듯한 아름다움에 숨이 멎을 지경이다. 듬성듬성 인적 없는 산에 무더기로 피어있는 진달래며 흐드러지게 피어 가쁜 숨을 몰래 쉬는 한 무더기의 이름 모를 꽃들을 보면 마치 함부로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의 표현처럼 그저 진한 꽃 향기로 자신을 감싸고서는 무심한 현대인들에게 딱 그만큼만 보이고 그들의 발길을 돌려 보낸다.
그러나 잠시 서서 살짝 눈을 감고 우주의 몇 십 억년의 시간을 기억해 보노라면 가만히 가만히 이 땅에서의 영광의 시간과 서글픈 시간들을 영화필름처럼 쏟아내 주곤 한다. 과거로의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만 살포시 열어준다.

역사를 읽으면서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오래된 역사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보니 오늘날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커다란 골격을 보자면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양상은 그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진배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역사를 읽을 때와는 달리 자국의 그것을 읽는 느낌은 편안하거나 흥미롭거나 하진 않는다. 때때로 주먹을 불끈 쥐게 하거나 안타까운 대목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아니면 비속어가 저절로 나오게 까지 되며 정체 모를 스트레스까지 남긴다.

이 책에서는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의 변천을 기준으로 하여 한국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지배라는 말 자체에 벌써 많은 민중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며 그 둘의 세력의 변화가 고대사에서 시작해 현대사까지의 재구성되는 모습들은 사뭇 진지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극렬한 차이에서 시작해 무조건 지배했던 사회에서 조금씩 변화되어 온 오늘날까지 정말이지 민중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수탈의 대상이 되었는지 어찌 보자면 수탈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동학혁명의 기술에서는 전봉준의 봉기에 대해 당연함을 갖게 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탐관오리와 욕심 많은 이들이 가난한 농민들의 재산을 착복 하고 이 나라 사람 저 나라 사람들이 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가려는 인간들이 도대체 어찌 그리 많은 지 분통이 터진다.
결국은 이런 압제들이 민중이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며 그 후로 독립협회나 삼일운동에 이어 주동세력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서도.

한국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는 한번쯤은 누구나 읽었을 한국사 신론.
여러 가지 저자에 대한 말도 많고 평도 많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한국의 역사에 대한 윤곽을 더듬어 보았으며 어느 부분에서는 새롭게 얻은 지식에 저자에게 감사한다.
E.H.카아나 그 외 여러 학자들이 이야기 하는 역사에 있어서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 책의 서술방법을 통해 머리를 끄덕이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역사를 보아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내게 묻는다면 여전히 입을 다물게 된다.겨우 이제서야 그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으므로.
IP *.48.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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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04 14:50:09 *.99.120.184
딱딱함도 부드러움으로 바꾸어버리는 마력에 빠집니다.
그것을 흉내라도 한번 내보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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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04 20:05:35 *.72.153.12
<저자에 대하여> 인터뷰 내용에서 하나 건져갑니다.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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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6.12 14:30:29 *.48.34.49
늦었지만 답글 감사.
에어콘 수리중이라는 방송인데 이 더위에 다들 건재하시는 듯..
삼계탕이라도 먹고 몸 상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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