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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4일 10시 18분 등록


기본적인 약력

1924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종조부(從祖父) 이승훈(李昇薰)과 민족운동에 관심이 많던 부친 이찬갑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개념을 익히고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다.

1941년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를 졸업한 뒤 1942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3월~1963년 8월 이화여자대학교 조교수·부교수, 1963년 9월~1985년 2월 서강대학교 교수, 1985~1995년 2월 한림대학교 교수, 1995년 3월~1998년 8월 한림대학교 객원교수, 1999년 8월부터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지난 2004년 6월 2일 세상을 떠났다.

1979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한국사), 한국고대사학회 특별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사학계의 제1세대로서 1960~1970년대에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한국사 시민강좌를 여는 등 한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 대한민국학술원 저작상(1982), 인촌상(1990),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했다.

저서에 《국사신론》(1961) 《한국사신론》(1967) 《고려사병지(高麗史兵志) 역주》(1969) 《민족과 역사》(1971) 《신라정치사회사연구》(1974) 《한국고대사론》(1975) 《한국사학의 방향》(1978) 《신라사상사연구》(1986) 《한국사상의 재구성》(1991) 《한국고대정치사회사연구》(1996) 《한국사를 보는 눈》(1996) 《한국사학논집》(전11권, 1996) 등이 있다.

이번 저자 조사에서의 갈등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위와 같은 개략적인 내용만 확인하고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매주 시간에 쫓기듯 숙제를 하고 있는 처지에 저자 조사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짧은 생각에 '한국사신론'의 저자인 이기백 교수에 대한 조사는 그저 간단히 끝내도 될 것으로 여겨졌다. 국내 한국사를 대표하는 고인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안일한 생각으로 이번 주 저자 조사는 그렇게 슬쩍 넘어가려고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3기 송창용 연구원의 전화를 받으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친일사학자로 꼽히는 이병도 선생의 수제자이면서 역시 친일사학자의 혐의를 받고 있는 이기백 교수의 사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 떨어졌다. 순간 머리 속이 멍해짐을 느꼈다. 역사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이병도씨의 이름조차 낯설었다. '한국사신론'이 친일사학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일전에 얼핏 들었던 것도 그제서야 떠올랐다. 초점을 조금 달리하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하니 정보의 홍수라는 말이 새삼 실감났다. 날카롭고 감정적인 비판이 가득한 글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한참을 그런 격렬한 글들 속에서 헤매다 보니 진실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고 누구는 또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럴만한 지식과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한창 '한국사신론'을 읽으며 몇몇 장면들을 즐기고 있던 즐거움 마음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한참의 혼란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은 비교적 단순한 것이었다. 어느 쪽의 의견에도 치우치지 않게 역사를 보기로 한 것이었다. 친일사학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책을 통해 느껴보기로 했다. 저자 조사를 통해 기본을 파악하고 나머지는 책으로 조율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냥 책을 통해서 저자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냥 가보기로 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터넷을 헤매며 이기백 교수에 대한 많은 글들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친일여부에 대한 논란은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저는 '한국사신론'의 서문과 서장에 매료되어서 친일사학에 대한 혐의가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판단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대신 저자의 사관에 대한 논의는 좀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글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냥 링크로 처리하려다가 본문을 다 가지고 왔습니다. 글이 깁니다.)

먼저 전남대 한국사 김당택 교수의 글입니다.

최근 김기봉 교수는 이기백 사학을 점검하는 자리에서, ‘(이기백에 의해) 두계사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병도의 실증사학 흐름이 최고 정점에 도달했다’고 자리매김했으며, 이기백을 ‘한국 역사학의 랑케’라고 지칭했다(김기봉, “모든 시대는 진리에 직결되어 있다”-한국 역사학의 랑케, 이기백). 이는 15권에 달하는 이기백한국사학논집에 실린 글들을 분석한 결과인데, 서양의 역사이론을 전공하는 학자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김 교수의 학문적 열정과 넓이에 압도된 가운데, 이기백 사학을 공부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기백이 왜 그토록 ‘역사적 진실’을 강조했으며 그가 말한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략하게나마 피력할 필요를 느낀다. 김 교수가 제기한 ‘이기백이 생각한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되고, 나아가 한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이기백 사학을 이해하는데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이기백은 ‘역사적 진실’에 충실한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역사의 기록 자체가 어차피 주관적인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이기백이 왜 그처럼 ‘역사적 진실’을 강조했으며 그가 말한 ‘역사적 진실’이란 무엇일까. 고조선의 국가 형성이나 민란에 대한 한국 사학자들의 해석은 이와 관련하여 참조된다.

한국사에 있어서 최초의 국가로 알려진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에 형성되었으며, 그 영역은 그리 넓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형성된 초기 국가들의 경우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기백이 말한 ‘역사적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고조선의 형성시기를 청동기시대 이전으로 끌어올리고, 고조선이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대제국이었음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단군신화를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인물들까지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민족의 우수성을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사의 민란을 다룬 연구 가운데는, 1980년대 당시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민중의 항쟁을 부추기려는 의도 아래, 민중항쟁의 성과를 지나치게 과장한 경우가 있었다. 이처럼 민족, 혹은 민중이라는 현재적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해석을 낳을 소지가 있다는 것이 이기백의 주장이다.

역사학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나 미래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해석에 있어서 현재적 관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기백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역사학이 단순히 사실을 밝히는데 그친다면 이는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단순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왜 그랬으며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를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두고 고민하였다. 그가 자유의 확대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사를 시대구분한 것은 그 결과였다.

이기백은 일제 식민주의사학을 비판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일찍이 1961년에 출판된 『국사신론』에서 민중의 생활을 하나의 소제목으로 설정했는데, 이후 1967년의 『한국사신론』에서도 그러한 체제를 유지했다. 오늘날의 한국사 개설서들 대부분이 민중의 생활을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지 않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특이하다.

따라서 그는 민족과 민중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기백이었지만, 민족이나 민중, 혹은 자유나 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것에는 반대했던 것이다. 이는 역사학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현재의 필요에 의해, 신라시대에 자유나 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으며 민중의 역량이 향상되었다고 한다면, 역사학은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역사적 진실’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기백은 그의 自撰 墓碑에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고 적었다. 그는 또한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고 하면서 학문을 하는 목적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진리’란 무엇인가.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역사학이고, 하나의 사실이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역사학인데, 여기에 무슨 ‘진리’가 있다는 말인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자처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많은 역사적 죄악을 저지르고 결국은 패망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민족이 자신들만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민족을 멸시하면, 결국 죄악을 저지르고 패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기백은 이것이 역사적 ‘진리’이며, 이러한 역사적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역사학자의 임무라고 여겼다.

이러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파멸을 막을 원동력이 됨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그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는 민족을 강조해야 하는 현재의 필요성 때문에 종종 묻혀버리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있다. 이기백이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고 한 것은 이를 경계한 것이었다.

이기백은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을 비판하였다. 외국의 침략을 비판하고 우리나라를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우리나라와 외국 침략주의자와의 싸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침략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이 한국사의 연구를 통해 인류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가 말한 ‘진리’는 우리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이기백이 ‘역사적 진실’을 강조한 이유나 그가 말한 ‘진리’에 대한 필자의 이제까지의 서술에 잘못이 없다면, 그의 사학은 ‘21세기에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연구에 임하는 역사학도가 도달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아울러, 이기백이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사학을 ‘이병도 실증사학의 최고 정점’으로 규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그의 사학은 이병도의 실증사학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가 한국사의 체계화에 노력하여 최초로 독창적인 시대구분을 시도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랑케의 생각이나 주장했던 바를 이기백이 그대로 따라했다면 모르거니와, 그러하지 않았다면 이기백을 ‘한국 역사학의 랑케’라고 지칭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기백사학을 어떻게 명명하고, 자리매김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다음은 이에 대한 경기대 사학과 김기봉 교수의 글입니다.

김당택 교수는 21세기 한국사학은 이기백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더 많은 것을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 이기백 사학은 결코 극복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라는 반론을 제기했다. 필자는 이러한 김 교수의 주장이 이기백 사학을 '박제화' 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기백 사학을 "모든 시대는 신에 직결되어있다"는 랑케의 명제가 "모든 시대는 진리에 직결되어있다"로 변형된 진리지상주의로 특징 지웠다. 이기백 선생에게 진리는 곧 신이었다. 선생은 말년에 이를수록 직업으로서 역사학이 아니라 종교로서 역사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리와 신에 관한 명상은 세속화된 근대인에게 끊임없는 화두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파스칼의 명상이다. 그는 "피렌체 산맥 이쪽에서의 진리는 저쪽에서는 거짓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그 존재 증명은 '파스칼의 내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파스칼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도록 만들 수 있을까"였다. 그는 확률을 공부하다가 마침내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내기를 걸면 된다는 것이다. "내기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내기에서 지더라도 특별히 잃을 것이 없으니 신이 있다는 쪽에 일단 내기를 걸고 살아보라"는 게 파스칼의 권고였다.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역사가는 역사의 진리를 믿음으로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진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의 물음을 제기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베버는 합리화 된 세계에 사는 인간은 '가치의 다신교(Polytheismus der Werte)' 시대에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가치의 다신교'는 신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가 아니라 어떤 신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를 야기함으로써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한다. 신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될 때, '파스칼의 내기'는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기독교도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도 똑같은 논리로 사람들에게 알라신을 절대적으로 믿을 것을 설득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내기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우리는 일본과 중국과의 역사분쟁에서 위와 같은 가치 상대주의 문제에 봉착한다. 2002년 일본 후쇼사 발행 『새역사교과서』는 머리말에서 워싱턴은 미국인들에서는 건국의 영웅이지만 영국인에게는 반역자라는 예를 들어 역사적 상대주의를 옹호했다. 이기백 선생은 민족이라는 개체적 가치가 아니라 진리라는 보편적 가치에 입각할 때만이 역사적 상대주의를 극복하고 과학적 역사학을 정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헤겔의 말대로 "진리란 전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보편적 인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독일인 등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인류사가 아니라 각 국사로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한다. 이러한 '국사'의 시각을 넘어서기 위해 이기백 선생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서 한국사를 시대구분 하는 방식으로 한국사의 전체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그 성과물이 『한국사 신론』이다. 김당택 교수는 이런 선생의 업적은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아니라 계속 올라가야 할 정상이라고 주장했다.

이기백 선생은 『한국사 신론』 머리말에서 자신의 책이 학문적 진리를 말하는지 아닌지는 10세기 후에 판단할 문제라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그럴 수 없는 이기백 사학의 한계를 세 가지로 열거하고자 한다. 첫째, 선생은 진리를 민족에 앞선 가치라고 주장하면서도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묘비명을 새기라는 유언을 남겼던 것처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민족주의사학을 지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한국사연구의 목표는 한마디로 한국민족의 역사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리지상주의를 내세웠지만, 그가 서술한 한국사의 문제지평은 어쩔 수 없이 민족으로 한정되어 있다. 단지 그가 다른 민족주의사학자와 구별되는 점은 그는 한국사를 지배세력의 확대과정으로 파악했으며, 이런 방식으로 한국민족의 형성과정을 역사화 했다는 점이다.

둘째, 그는 신채호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으로 파악함으로써 동아시아와 세계사의 맥락에서 우리 역사문제를 보지 못하고 결국은 '국사'의 시각에 머물고 말았다. 이는 그의 개인적 한계라기보다는 그가 산 시대가 만들어낸 사고의 '감옥'이다. 그는 지정학적 요인을 강조하는 모든 한국사서술의 경향을 식민주의사학의 발로라고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전근대에서의 나당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근대 이후의 러일전쟁과 한국전쟁 그리고 현재 북한 핵문제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한국사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를 이루는 브로델이 말하는 장기지속의 구조다.

이기백 선생과 같은 1세대 한국사학자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났다. 식민주의사학을 탈피하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거울로 해서 자기 학문의 정체성을 세워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그들에게 식민주의사학은 하나의 '원죄'와 같은 것이었다. 식민주의사학이 심어 놓은 타율성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새로운 한국사를 정립하는 것을 시대적 소명으로 각성했던 이들에게, '국사'를 넘어서는 동아시아사의 관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21세기 한국사학이 여전히 '국사'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이다.

셋째, 이기백 사학을 한국 역사학의 랑케로 자리매김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다. 김당택 교수는 이러한 자리매김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이기백 선생이 한국역사학의 랑케인가 아닌가는 필자에게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필자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이기백 선생이 한국역사학의 랑케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랑케 역사학은 초기 "모든 시대는 신에 직결되어 있다"는 말로 대변되는 역사신학에서 점점 탈피하여 사료비판에 의거한 실증사학으로 발전함으로써 근대 역사학의 첫 번째 과학모델을 정초했다. 이에 반해 이기백 선생은 정반대로 과학적 실증사학에서 출발했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역사신학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왜 그랬을까?

이기백 선생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진정으로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회의했다. 역사의 현실과 당위는 불일치한다.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고뇌로부터 선생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는 실패로 끝난 비극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승리일 수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세계와 절대적인 세계에서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정반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기백 선생이 말하는 역사의 진리란 어느 세계의 가치판단을 의미하는가?

이기백 선생은 "역사적 사실을 보고, 거기에 나타난 뜻을 살려, 시대의 전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원리·원칙"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진리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진리에 따르면 좋지만,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믿음으로 역사연구를 해왔다고 신앙고백을 했다. 그는 하늘의 섭리를 진리라는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말하길, "이 세상만 두고 보면 비극이겠지만, 하늘을 상대로 하고 보면 승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비극이 없다는 것은 결국 하늘에 대한 믿음, 진리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뜻도 된다." 동아시아에서 역사의 탄생은 이 세상에서의 비극을 초월할 수 있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마천의 결단으로부터 이뤄졌다. 이 같은 동아시아 전통적인 역사신학을 20세기에서 이기백 선생은 기독교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실증사학자로서 이기백과 역사신학자로서 이기백의 불일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직도 이기백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갈 때가 아니라고 믿는 분들이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할지 필자로서는 무척 궁금하다. 후대의 역사가는 이기백 사학을 그의 텍스트를 성경처럼 읽거나 또는 그의 실증사학을 하나의 역사신학으로 변형시키는 이른바 '말씀'사학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사신론을 저술하면서 저자가 가장 뜻을 둔 바는 크게 둘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구체적 사실은 올바른 역사가 성립하는 토대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섣불리 남이 거부하기 힘든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들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예가 종종 있어 왔다. 저자는 이 같은 풍조에 대항해서 일종의 투쟁을 해왔고, 그 점을 '한국사신론'에 반영시켰다. 둘째는 구체적 사실들의 시대적, 사회적 연결관계를 찾아서 이를 체계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서 살아 있는 역사를 생동감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에 힘썼다. 이에 따라서 '한국사신론'에는 저자 나름의 독자적 시대구분이 시도된 것이다. (p. iii)

학문의 이상은 진리를 찾아서 이를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데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 진리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값어치를 지닌다. 진리를 저버리면 학문은 곧 죽는 것이며, 죽은 학문은 민족을 위하여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p. iii)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선적인 과업은 식민주의사관을 청산하는 일이다. 식민주의사관은 한마디로 말하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된 한국사관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한국민족의 자주정신, 독립정신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짜여진 것이었다. 한국사의 객관적 진리를 존중하기보다는 현실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것이었다. (p. 3)

근대사학의 전통
현대의 한국 사학은 일제 어용사가들의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타파하는 한편, 한국학자들 자신이 쌓아 올린 근대사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성장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악조건 밑에서도 한국의 사학자들은 올바른 한국사학을 키우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렇게 해서 성립된 여러 학파를 크게 정리한다면 민족주의사학, 유물사관, 그리고 실증사학의 셋이라고 할 수가 있다. (중간 생략) 이러한 세 학파는 각기 그 입장과 주장이 달랐으나, 모두 그들이 짊어진 일정한 역사적 구실을 담당하였다. 즉, 민족주의사학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하여 주었으며, 유물사관은 전통적인 양반사회의 개혁을 정당화하여 주었으며, 또 실증사학은 한국사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우리 자신이 이루어 놓은 학문적 전통 속에서 오늘의 한국사학은 성장 발전하였다. (p. 5)

고조선이 마치 건국 초기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대제국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발전을 무시한 잘못된 생각이다. 이러한 사회적 발전의 시기를 확인하기는 힘드나 B.C 4세기 이전이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주가 쇠약해지고 연이 '왕'을 칭할 무렵에 고조선에서도 스스로를 왕을 칭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B.C 4세기경에는 중국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므로, 고조선은 더 한층 국가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생각된다. (p. 31)

실학의 탄생은 정치와 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정권 담당자들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권 담당자의 일부에서도 현실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말한다면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측에서 그러한 노력이 더 많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南人)들 중에서 실학자가 많이 나게 되었다. (p. 255)

사농일치(士農一致)의 원칙에서 신분적인 차별을 없이하고, 교육의 기회를 균등히 하여 능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하며, 상공업의 발전이나 화폐의 유통에 의한 농촌경제의 침식을 방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같이 이들이 농업을 중심으로 한 이상국가를 구상하였으나, 그렇다고 인위적인 질서를 배격하고 자연질서를 존중하여 경제분야에서 농업을 중요시하는 중농주의(重農主義)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p. 257)

이 시대에 만주사(滿洲史)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가령 이종휘는 '동사(東史)'의 지(志)에서 고구려에 대하여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방면의 대표적 저작은 아무래도 유득공이 정조 8년(1784)년에 지은 '발해고(渤海考)'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한 것이고 북쪽에 발해가 있었으므로 이는 응당 남북국(이라 불러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같이 한국사의 무대가 반도와 만주에 걸치는 것이었다는 생각은 실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며, 고조선(古朝鮮)이 요동에 있었다든가 하는 의견도 종종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서 흥양호가 정조 18년(1794)에 저술한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이 주목된다. 이 책에는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명장들의 전기가 실려 있다. (p. 259)

신윤복은 같은 속화라도 부녀자를 중심으로 한 인물속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대표작은 '여인도(女人圖)'와 '풍속화첩(風俗畵帖)'인데, 화첩 속에는 그네 뛰는 아낙네, 빨래하는 여인들, 술 파는 여자, 희롱하는 난봉장이 등 색정적인 장면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 같은 속화의 유행은 양반의 유교주의에 대한 예술 면에서의 항의였고 인간주의의 표방이었다. (p. 268)

이러한 지방행정의 문란은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을 짊어 지울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까지도 위협하였다. 이에 그들의 악행을 규찰하기 위한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다. 그들은 변장을 하고 각지로 다니면서 관리들의 부정 행위를 조사하여 보고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써 지방행정의 잘못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비록 비교적 청백한 관리가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하더라도 도도한 시세를 거역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p. 271)

이들이 천주교에 이끌린 것은 우선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천주의 자녀라는 평등사상(平等思想)에 공명한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인이나 상민들이 천주의 자녀로서 양반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천주를 예배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부녀자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또 현실에 낙망한 그들에게 천국에 대한 설교는 그대로 복된 소식이었을 것이다. 내세신앙은 그들이 천주교에 귀의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천주교의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이 더욱 심각해져 가는 경향을 엿보게 된다. (p. 281)

19세기 말에는 흔히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의 3대의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는 장승업(張承業)이 유명하였다. 그는 고아로서 어깨 너머로 배운 화재(畵才)가 인정되어 화원으로 발탁된 천재화가였다. 마음에 맞지 않으면 누구의 명이라도 붓을 들지 않았다는 그는 '홍백매병(紅白梅屛)' 등 신운이 생동하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p. 284)

윤양호사건은 바로 일본이 꾸며 놓은 각본대로 연출된 연극과 같은 것이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서 다음해에 구로다를 특명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군함 3척, 운송선 4척에다가 약 800명의 육군을 거느리고 강화의 갑곶(甲串)에 상륙하여 협상을 강요하였다. 정부의 당국자들이 대부분 척왜로 일관하는 중에 역관 오경석이 우의정 박규수를 움직여 통상수교로 방침을 결정케 하였다. 정부는 신헌을 파견하여 구로다와 협상케 한 결과 드디어 수호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조일수호조규로서 흔히 병자수호조약 혹은 강화도조약이라고 하는 것이다. (p. 292)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人民平等)의 권을 제정하고, 사람으로써 관을 택하게 하고 관으로써 사람을 택하게 하지 말 것. '갑신일록(甲申日錄)' 중에서 (p. 302)

민(民)은 국가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국가도 잔약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밖으로 향제(鄕第)를 베출어 오직 홀로 온전할 방책만 꾀하고 헛되이 국록과 관직을 탐하는 것이 어찌 이치에 닿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의 유민이나 군토를 먹고 군의를 입고 있으니, 국가의 위망을 앉아서 볼 수는 없다. 팔로가 마음을 같이하고 억조가 묻고 의논하여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 삶을 같이할 맹서를 삼는다.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라운 일에 속하나 결코 두려워하여 동요하지 말라. 각기 민업을 평안히 하고 태평한 세월을 함께 빌며 임금의 덕화를 모두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일까 한다. _'동학 창의문의 마지막 대목' (p. 308)

조선에 있어서 친러세력이 대두하는 것을 일본은 물론 싫어하였다. 일본은 민비를 중심으로 한 궁중의 세력과 친러파를 축출하고 친일세력을 다시 부활시키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 방법으로서 일본은 비상수단에 호소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이노우에의 뒤를 이어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가 명성황후 민비를 살해한 소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고종 32년 1895년). 이리하여 일국의 왕후가 외국인 자객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당하게 되었다. 열국의 비난을 두려워한 일본은 미우라를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이란 이유로 무죄의 판결을 내려 버리고 말았다. (p. 317)

"목을 자를 수 있으나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 (p. 317)

광무 11년(1907)에는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가 조직되어 대대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에 의하여 교묘한 수단으로 빌리게 된 국채는 상당한 액수였고, 이것이 국가의 독립을 위협한다 하여 국민의 힘으로 이를 갚자는 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이를 처음 발기하기는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이었다. 그러나, 곧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번져 갔다. 특히,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황성신문', '만세보' 등 여러 언론기관이 의연금 모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담배를 끊고 돈을 절약하여 이를 의연금으로 내기 위한 금연운동이 전개되었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팔아서 이에 호응하였다. (p. 349)

오호, 애통하도다. 우리 2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기(檀箕) 이래 4천 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았는가. 애통하도다, 동포여. _'시일야방성대곡'의 마지막 부분 (p. 351)

이러한 사립학교의 설립에 열성인 것은 양반 출신이 아니라 평민 출신이었다. 또 피교육자도 평민 출신이 많았다. 교육의 내용은 주로 서양의 새로운 학문과 사상이었다. 역사, 지리, 정치학, 법학 등을 비롯해서 산술, 대수 등의 여러 과목이 교수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립학교들은 새로운 지식의 전달장일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근거지로서 또한 유명하였다. 교내에서 토론회, 웅변회를 개최하여 청년의 의기를 북돋워주었다. 나이 많은 사람이 학생으로 입학하는가 하면, 고급학교 학생이 하급학교의 교사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보수적인 층으로부터는 신교육이 못마땅하게 생각되기도 하였으나, 사립학교는 애국열과 함께 성해 갈 뿐이었다. (p. 354)

새가 새가 날아든다. 복국조(復國鳥)가 날아든다. 이 산으로 가며 복국, 저 산으로 가며 복국, 청산(靑山) 진일(盡日) 피나도록 복국 복국 슬피우니, 지사혼(志士魂)이 네 아니냐.

뻐꾸기의 뻐꾹뻐꾹 하는 울음소리를 나라를 회복한다는 뜻의 복국(復國)이란 말로 표현하여, 그 울음소리를 애국지사의 혼이 새가 되어 피나게 우는 걸로 이해한 것이다. (p. 359)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선명함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라,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지니라. _'독립선언문' (p. 363)

말산장려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즉, 1923년에 조직된 물산장려회는,

입자! 조선인이 짠 것을,
먹자! 조선인이 만든 것을,
쓰자! 조선인의 손으로 된 것을,

이라는 구호 아래 일제품을 배격하고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운동을 폈던 것이다. 이 운동은 서울, 평양 등의 도시로부터 시작하여 전국 각지로 번져 갔고, 청년회, 부인회, 소년단 등이 호응하여 단시일에 적국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p. 380)

해방의 날,
서울 장안에 태극기가 물결쳤다.

옥에 갇혔던 이들이
인력거로 츄럭으로 풀려나올 제
종로 인견은 목이 메어 울지를 못했다.

아이들은 새해 입을 때때옷을 꺼내 입고
어른들은 아무나 보고 인사를 하였다.

서울 장안을 뒤덮은
태극기 우리 기,
소경들이 구경을 나왔다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 윤석중, '해방의 날' (p. 394)

북한은 1950년 6월 25일에 불의의 남침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흔히 6.25동란이라고 부르고 있다. 최근 이를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외국인이 그렇게 부를 수는 있겠으나, 한국인 자신이 이를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p. 400)

4월혁명은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강압적ㅇ니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한국사상 최초의 혁명이었다. (p. 405)

민중이 직접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였다. 이 시기에 우선 주목해야 할 사건은 동학운동이었다. 농민을 중심으로한 이 사회운동을 일시나마 집강소를 통한 정치 참여로까지 성장하였다. 다음으로는 독립협회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대체로 도시의 지식층과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한 민권운동이었고, 국회를 개설하여 그들의 정치 참여를 주장하는 민족국가의 건설운동이었다. (p. 412)




'미래'의 달을 지나고 마주한 '역사'의 달 앞에서 나는 막막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어디로 나가야 할지 단서가 없었다. '한국사를 모르는 한국인'이라는 고민은 오래 전부터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발목에 매달린 족쇄마냥 내 생각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붙들어 매곤 했다. 역사를 모르고선 어디도 갈 수 없었다. 내 지식은 좁았고, 덕분에 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역사를 만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5월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이야기가 달랐다. 미래의 달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미래가 막연한 추측이었다면 역사는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한 것이었다. 미래를 이야기할 때는 불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사상과 풍경들이 역사 속에서는 누군가의 이름과 함께 살아났다. 가까이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전쟁터의 피비린내가 되살아났다, 승리의 감격이 가슴을 때렸고, 패배의 공포가 머리를 짓눌렀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과목 중에 하나가 바로 '국사'가 아니었을까? 시대 구분을 외우고, 왕조의 이름과 왕들의 순서를 외워야 했었다. 두 번째 연구원 수업에서 "태정태세문단세…"를 되짚어내는 누군가의 웅얼거림에 모두 함께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국사 교육이 여러 세대와 장소에 걸쳐 똑같은 모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국사'라면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내게 '한국사신론'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십여년 동안 한번도 떠올리지 않았건만, 역사 속을 치열하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름이며, 그들이 책으로 토해내고 삶으로 지켜낸 사상들이며, 무엇 하나 낯설지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서있던 자리를 말해주는 숫자들은 몽땅 잊혀졌지만 그것만 빼면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국사신론'을 읽어가는 갓은 그 선명한 이름과 사건과 사상들 사이의 빈칸을 채워나가는 과정이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국사 속에서는 사람도, 사건도, 사상도 모두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각자 서있었다. 그들 을 이어주는 고리는 사라졌고, 단지 그들이 살았던 년도를 중심으로 불분명한 관계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요약과 생략 속에 역사는 그 생명력을 잃었고 시름시름 시들어갔다. 국사책 속의 우리 역사는 국어책 속에서 '직유법', '은유법'이라는 빼곡한 메모와 함께 황홀함이 꺼져버린 시와도 같았다.

저자는 한글판 머리말에서 '한국사신론'을 저술하면서 가장 뜻을 둔 바는 크게 둘이었다고 말한다. 그 중 첫 번째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구체적 사실들의 시대적, 사회적 연결관계를 찾아서 이를 체계화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시대적, 사회적 연결 관계가 더해지니 역사 속의 그들이 자기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울먹이는 소리로 들려주었고, 실학을 연구했던 남인 학자들은 자신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던 서러움을 토로했다. 일제 시대를 살아낸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일본 제국의 끔찍한 만행들을 증언했고, 해방과 독립의 감격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죽어 있던 사건들이 하나하나 다시 살아 일어났다. 역사가 책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학문의 이상은 진리를 찾아서 이를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데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 진리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값어치를 지닌다. 진리를 저버리면 학문은 곧 죽는 것이며, 죽은 학문은 민족을 위하여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의 역사관에 대해 식민사관이라고 비판을 퍼붓는 이들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그의 묘비명을 어떻게 해석할까? 실증사학을 딛고 서서 진리지상주의를 주장한 그의 민족사학자 같은 묘비명은 이율배반적이지만 인간적이다. 자신의 사관에 대한 비판을 향해 "10세기 뒤에 보라"고 외치는 저자의 당당함에 박수를 보낸다. 저자의 사학연구가 넘고 극복해야 할 산인지, 도달해야 할 목표인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의 의문으로 남겨두어야 하겠다.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작한 역사의 달, 5월의 끝에서 나는 또 조금 달라져 있었다. 무엇이 사실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 사실들의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를 찾아보게 되었다. 오래된 어두운 창고에 틀어박혀 있던 역사를 밝은 햇살 아래로 불러낼 수 있었다. 잔뜩 쌓인 먼지를 훅훅 불어 털어냈고 이리저리 만지고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경이로움 장면들을 만났고, 가슴이 떨렸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미래를 꿈꾸었다.

혁명사를 전공하고 싶어했던 변화경영전문가. 나는 사부님께서 혁명사를 전공하고 싶어하셨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고는 조금 의아했다. 지금은 혁명과 변화가 마치 두 개의 이름을 가진 한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처음엔 둘 사이가 낮과 밤이라도 되는 양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사를 모르는 내게 혁명은 피비린내 풍기는 처절한 광경을 떠올리게 했고 그와는 달리 변화는 평화롭지만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귀여운 도전과 반항 정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은 변화를 꿈꾸고 변화의 욕구는 혁명을 깨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작은 변화조차도 혁명의 비장함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떨림은 언제나 '변곡점'에 존재한다. 차가운 것에서 뜨거운 것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발을 내딛는 그 순간에 경이로움이 피어난다. 그 자리에 새로운 문명이 떨쳐 일어나고, 서로를 모두 태워버릴 듯한 전쟁이 터진다. 이것은 혁명이고 새로운 역사다. 그 가운데 많은 것이 변할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변하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변한 것은 잊혀지고 전해진 것은 기억될 것이다. 가슴 떨리는 오늘 하루만이 과거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떨리는 가슴으로 좀더 멀리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이번엔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담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사신론'은 여전히 국사교과서의 모태라는 느낌이 강해서인지 이런저런 희망사항과 불만을 펼쳐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간혹 아쉬운 부분이 발견되어도 이런 류의 역사 책은 의례 그러려니 하는 생각에 불만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간단히 살펴보자면, 치우침 없는 저자의 태도는 신뢰감을 주었고, 지배 세력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대의 구분은 신선하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읽었던 '가자, 아메리카로!'와 '역사, 위대한 떨림'에 비해 내용이 딱딱하고 읽는 맛이 덜했습니다. 대신 우리 역사라는 친숙함이 이 부분을 일부 보완해주었습니다.

끝으로 임팩트가 강한 서문이 책 전반에 걸쳐 강한 신뢰감을 형성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책을 쓸 때, 서문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설득력 있는 제목과 더불어 이 부분에도 많은 공을 들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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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04 14:59:35 *.99.120.184
고민을 제공한 이는 언급도 못했는데 정리를 아주 잘 버렸네. 수고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부드럽게 써내려가는 필력을 조금이라도 흉내를 내보려고 하지만 힘드네.
혹시 방법이 있으면 조금만이라도 귀뜸해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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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04 20:36:53 *.72.153.12
저자에 대한 논쟁 통째로 갖다줘서 고마워. 잘 봤어. 역사책처럼 읽고나서 지금 기억하는 것은 거의 없지만 느낌은 남았네. 책에서 놓친 저자 이기백님의 다른면을 보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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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6.04 22:13:21 *.83.227.162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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