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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4일 05시 51분 등록
[한국사신론] 사회변혁의 작용과 반작용

<한국사신론, 이기백, 일조각>

이 책은 역사의 큰 흐름과 변화를 쉽게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그것은 지배세력의 변천이다. 힘의 긴장관계를 통해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기 때문에 사건간의 인과관계, 그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와 문화적 양상들을 재미있게 파악할 수 있다.

지배세력의 긴장관계를 통해 단편적으로 암기되어 있던 인물, 작품, 사건, 조직 등이 등장하는 이유와 배경들을 서로 꿰맞출 수 있다. 이는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함을 의미한다. 이 책을 읽고나면 우리나라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겨 특정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더 나아가 역사적 사건의 장소도 견학해보고 그 때의 상황이나 숨결도 느껴보고 싶은 마음도 자극한다.

현재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한번쯤 읽어보았을 책이지만 앞으로도 역사를 잘 알고자 하는 사람들의 포탈 역사책으로 추천한다.


1. 저자에 대하여

E.H.카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첫 번째로 역사가에 대해 연구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저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자료를 찾고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에 대해 명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혼란스러웠다. 워낙 저자가 역사학자로 유명한 분이라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저자에 대하여 함부로 판단하여 기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판단을 유보하고 저자의 역사관처럼 객관적 사실에만 기초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고 이기백은 ‘풀무농원’을 설립한 농민운동가 이찬갑(1904~74)씨의 아들로 1924년 평북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나서 2004년 6월 2일 별세했다. 국어학계 원로인 이기문 서울대 명예교수가 저자의 동생이다. 3・1운동 당시 33인 대표의 한 사람인 남강(南岡) 이승훈(1864~1930)선생이 고인의 종조부(從祖父)이다.

1941년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뒤 42년 일본 와세다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45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다. 45년 광복이 되면서 소련군의 포로로 잡혀있다가 5개월 만에 석방되어 46년에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해 47년 졸업했다. 당시 서울대 사학과를 함께 졸업한 제1회 졸업동기생으로는 전해종 전 서강대 교수와 최근 타계한 고병익 전 서울대 총장이 있다.

배재중학, 용산중학을 거치면서 교사생활을 하다 6・25전쟁때 국군에 입대하여 육군종합학교 편찬과에서 복무하였다. 이후 육사 교관(52~56년)을 거쳐 이화여대(58~63년), 서강대(63~85년)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역사학회, 진단학회 대표를 맡기도 했다. 회갑을 넘긴 85년에 한림대로 옮겨 95년까지 강의했고, 한림과학원 객원교수와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자가 67년에 펴낸 ‘한국사신론’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때그때 학계의 성과를 반영해 몇 번이나 고쳐 개정판을 냈다. 이 책은 영어, 일어, 러시아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 판으로 번역돼 한국 역사를 세계에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 외 저서에 「국사신론」(1961),「고려사병지 역주」(1969),「민족과 역사」(1971), 「新羅정치사회사연구」(1974),「韓國古代史論」(1975), 「韓國사학의 방향」(1978), 「新羅사상사연구」(1986), 「한국사상의 재구성」(1991),「韓國고대정치사회사연구」(1996), 「한국사를 보는 눈」(1996), 「한국사학논집」(전11권, 1996) 등 主전공 분야의 저서를 포함하여 모두 19권의 책을 쓴 多作의 학자다. 1987년 9월부터 책임편집을 맡아 발간하기 시작한 「韓國史市民講座」가 현재 제29집에 이르고 있다.

한국사신론을 쓰게 된 배경이나 사관에 대해 고인이 된 저자의 생각을 인터뷰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보자. ([2001년11월호 월간조선 卷頭 특별 인터뷰] 韓國史新論의 著者 李基白 선생이 말하는 韓國史의 大勢와 正統 참조)

李基白은 1941년 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早稻田) 고등학원을 거쳐 1942년 가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식민지 청년이라면 법과나 의과 공부를 해야 취업하기 쉬웠을 터인데, 하필이면 사학과로 진학하셨습니까.

『아버지는 「우리말이 귀하다」면서 우리말로 씌어진 책이면 시집이건 소설이건 역사책이건 닥치는 대로 사 놓으셔서 집안에 읽을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申采浩(신채호) 선생의 「朝鮮史硏究草」(조선사연구초)를 열심히 읽었는데, 어려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책 속에 실린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이란 논문만은 감동깊게 읽었지요. 또 咸錫憲 선생이 「聖書朝鮮」에 연재한 「聖書的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부터도 역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死六臣이나 林慶業(임경업)에 대한 서술이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李贊甲은 늘 덴마크를 재건시킨 그룬티비그가 했다는 『그 나라의 말과 역사가 아니고는 그 민족을 깨우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해서 아들들에게 들려 주었다고 한다. 그 점에서 李贊甲은 韓國史學의 권위인 그의 장남 李基白, 韓國語學의 권위인 그의 3남 李基文을 통해 그의 꿈을 실현한 셈이다. 李基白의 동생인 李基文 서울대 명예교수는 1984년 『고구려어·백제어·신라어의 3國語는 扶餘韓祖語(부여한조어)에서 分化된 方言』이라는 학설을 세운 바 있다.


1946년 1월 압록강을 건너 귀향한 李基白은 두 달 동안 고향에 머물다가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 당초 계획했던 北京 유학은 중국의 國共內戰의 격화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李丙燾 선생을 찾아뵙고 상의를 드렸더니, 봄 학기 입학시험은 이미 끝났으니 가을에 시험을 치도록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해 가을에 서울大 사학과 3학년으로 편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강의를 들었습니까.

『李丙燾 선생의 韓國思想史와 「宋史」 高麗傳 강독, 孫晉泰 선생의 「三國志」 東夷傳을 중심으로 한 古代史연습 등이었습니다. 金庠基(김상기) 선생과 金聖七 선생은 중국사를 가르쳤고, 趙義卨(조의설) 선생이 西洋史를 강의하셨지요. 李相栢(이상백) 선생은 사회학과 교수였습니다만, 그의 조선시대사 연구는 우리 사학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학과 동기생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서울大 교수를 지낸 韓♥劤(한우근·故人)과 孫寶基(손보기), 서울고 교사로 재직 중 6·25 때 좌익에게 피살된 鄭泰旼(정태민), 서울大 졸업 직후에 「역사과학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던 李洵馥(이순복)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었습니다』

그러다 國大案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좌익의 선동 등에 의해 과거의 京城帝大와 전문학교를 합쳐 국립서울대학교로 만들려는 美 군정의 조치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 때문에 1947년 봄학기는 거의 휴강이었다.

『그래서 저는 京城女商(지금의 서울여상)에 강사로 취업해버렸죠』

―졸업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졸업논문을 내라고 해서 제출하니까 1947년 여름에 졸업장을 줍디다. 어떻든 졸업은 했으나 내 공부에는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 뒤 배재중학, 용산중학을 거치면서 고달픈 교사생활을 하다 보니 공부할 겨를이 더욱 없었어요』

1948년 定州에서 살던 李基白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동생 등 일가족 모두가 金日成의 토지 무상몰수 등에 견디지 못하고 38선을 넘어왔다. 그러다 6·25전쟁(1950)을 만났다.



―선생님의 첫 한국사 개설서인 「國史新論」은 이화여대 재직 중에 썼던 것입니까.

『교과서 집필이 한 계기가 되어서 개설서를 쓰게 되었죠. 저의 첫 개설서인 「國史新論」이 출판된 것은 이화대에 재직 중이던 1961년이었어요. 그러나 자신이 없어서 감히 序文을 못 쓰고 後記에 「금전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쓰게 되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지요』

―그런데 「韓國史新論」을 다시 쓰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유가 좀 있었어요. 무엇보다 「國史新論」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 학계의 통설에 따라 서술한 時代區分에 대해 저자인 내 스스로가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 하버드大 와그너 교수로부터 「國史新論을 영어로 번역하고 싶으니 (미국으로) 좀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나는 國史新論을 대폭 수정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터여서 「수정한 다음 영역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니까 그쪽에서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1966년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 하버드大 옌칭(燕京)연구소의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수정작업을 했습니다. 옌칭연구소는 한국사 관련 사료와 자료를 국내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어요. 그런 수정의 결과로 「韓國史新論」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빼어난 역사인식과 방법론이 어우러져 나온 傑作」

―東國大 사학과 李基東 교수는 『韓國史新論은 李基白 선생의 分身』이라고 말하던데,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내것다운 개설서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 개설서라면 時代區分에 있어 古代·中世·近代의 3분법을 당연한 것같이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韓國史를 世界史에 동참시키는 것으로 믿었거든요. 나도 처음에는 남에게 뒤질세라 「世界史의 기본법칙」이니 하는 책을 열심히 읽었고, 또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그러나 나는 끝내 어느 일정한 公式에 의존해서 우리 역사를 이해하려는 데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는 다원적인 방식에 의해 얼마든지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모든 역사적 현상이 하나의 굵은 끈으로 묶여 있는 일정한 시대를 일정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저는 특히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회적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에 기준을 두고 韓國史의 큰 흐름을 파악하려고 한 것입니다. 또 낡은 시대의 잔재들보다는 다음 시대의 새 요소들의 성장 과정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했죠』

서강大 洪承基 교수는 「韓國史新論」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보편주의적 史觀에 입각하여 쓰여진 개설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개설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 책에서는 더 나아가 역사적 사실들이 분야별로 체계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主導勢力을 연결고리로 삼아서 서로 밀접하게 이어져 있기도 하다. 그렇게 파악된 분야별 사실들은 다시 앞뒤 시대의 그것들과도 연관지워져 이해되고 있다. 이 책은 그의 빼어난 역사인식과 방법론, 진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남다른 자세,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서술이 한데 어우러져 나온 傑作이다』

韓國史에 대한 李基白의 시대구분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정리되어 있다.

<원시공동사회-城邑국가와 聯盟王國-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발전-전제왕권의 성립-豪族의 시대-門閥귀족의 사회-武人정권-신흥 士大夫의 등장-兩班사회의 성립-士林세력의 등장-廣作농민과 都賈(도고)상인의 등장-中人層의 대두와 농민의 반란-開化세력의 성장-민족국가의 胎動과 帝國主義의 침략-민족운동의 발전-민주주의의 성장>

―선생님의 時代區分에 대해선 비판도 많았죠.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時代區分을 비판하려면, 그 時代區分의 어디가 사실과 어긋난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막연히 世界史的 관점이 아니라든가, 어느 公式과 일치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지적만으로는 나는 내 관점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학문이 그 생명으로 삼고 있는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학자의 비판

―「韓國史新論」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출판되었지요.

『日本, 美國, 臺灣, 中國, 말레이시아, 아르헨티나(스페인語), 러시아에서 각각 현지어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외국 학자들의 평가는 어떻습디까.

『작년에 러시아어版이 발행되었는데, 러시아의 동방학연구소의 韓·蒙 과장인 유리 바닌 교수가 최근 서평을 발표했더군요. 그 분의 서평을 보니까 아직도 唯物論的 史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더군요. 그래서 아직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바닌 교수의 「韓國史新論」 書評에 답함」이라는 원고를 최근에 썼습니다』

李基白 선생은 매우 치밀한 학자다. 기자와의 인터뷰 중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몇 번이나 서재에 들어가서 관련 자료를 갖고 나와 펴놓고 답변했다. 李선생은 한글로 번역된 바닌 교수의 書評을 보여 주었다. 대충 훑어보니까 「韓國史新論」의 時代區分에 대한 비판이 主流를 이루고 있었다. 장문의 書評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에 띄었다.

<通史的 기준으로 판단할 때 韓國이 현대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과연 어떤 사회가 성립했는가? 통일신라, 고려, 조선과 같은 세 국가가 과연 어떤 고유의 성격을 띠며 서로 교체되었는가? 저자(李基白)가 주장하는 (토지의 국유, 관료와 군인의 복무 代價로 祿邑과 祿俸을 지급, 신분제도 등과 같은) 특징들로 비추어보면, (당시의) 한국은 (고유한 특색을 지닌) 封建國家이며, 다른 국가와 비슷한 封建秩序의 태동, 발전, 쇠퇴 단계를 거쳤다>

이렇게 바닌 교수는 「韓國史新論」의 時代區分에서 封建社會를 설정하지 않은 데 대해 비판했다. 이에 대한 李基白 선생의 반론은 어떤가?

『바닌 교수의 지적과는 달리 한국에는 封建社會가 없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 근거는 통일신라-고려-조선왕조 시대의 한국에는 封建領主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封建이 없는 봉건사회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封建制度는 국왕이 봉건영주에게 領地를 주어 그 통치에 全權을 행사하도록 하는 대신, 봉건영주는 국왕의 필요에 따라 병력 동원 등의 의무를 지는 국가조직입니다』


韓國史를 唯物史觀의 公式에 꿰맞춰서는 안 되는 까닭

―국내 학자들 중에도 「封建領主는 없었지만, 토지소유주의 농토를 경작하는 농민이 農奴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封建社會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시대는 차라리 農奴사회 또는 農奴制사회라고 불러야 정확한 겁니다. 「原始共同體사회-노예제사회-봉건제사회-자본주의사회로 時代區分을 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관습이니까 이를 굳이 고칠 필요가 없다」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명확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唯物史觀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그런 公式에 꿰맞추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만일 韓國史의 전개과정에 억지로 封建社會를 집어넣으려고 하면 그것은 아시아적 封建社會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결국 한국역사가 非전형적, 非정상적 혹은 변태적인 사회를 거쳐온 것으로 비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유럽 優越主義的 산물이며, 世界史的 관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한국역사상의 사회도 정상적인 인간이 살아온 정상적인 사회였지, 非정상적인 인간이 살아온 非정상적인 사회가 아닌 것입니다』

―「韓國史新論」에서는 독특하게도 支配勢力을 기준으로 한 時代區分을 했습니다. 그런 견해에 대한 반론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선, 저는 支配勢力을 기준으로 한 時代區分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방법이 한국사의 발전을 광범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선생님이 구사하신 「支配勢力」이란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그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제가 말하는 「支配勢力」은 支配階級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는 것이 싫어서 1990년에 낸 新修版 「韓國史新論」에서는 괄호를 치고 「主導勢力」이라고 附記했습니다. 支配勢力은 말 그대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주도적으로 이끈 세력을 말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新石器시대의 原始共同體사회의 지배세력은 氏族社會의 구성원 전체이며, 近代에는 민중이 支配勢力으로 등장했습니다.

물론 古代국가가 형성된 이후 근대 이전까지의 긴 세월 동안에는 귀족이 支配勢力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 身分制사회의 지배세력이 귀족이었다고 해서 「韓國史新論」에서 귀족에 대해서만 서술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중간계층이라든가 농민·노비 등에 대해서도 支配勢力과의 관련 하에 서술했습니다. 그래야만 사회의 全體像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KBS TV는 北韓 지역의 문화유산 답사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소위 檀君陵(단군릉)도 소개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北韓 당국은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 동남쪽 사면에 위치한 고구려 양식의 半지하 돌칸 흙무덤, 즉 石室墳(석실분)이 틀림없는 檀君(단군) 무덤이며, 거기서 발견된 남녀 각 1개체 분의 뼈가 檀君과 그 부인의 유해이며 檀君의 유해를 측정한 결과 1994년 현재 5011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檀君이 기원 전 31세기에 古朝鮮을 세웠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성립될 수 없는 얘기지요. 국가가 형성되려면 적어도 靑銅器(청동기)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靑銅器시대는 최고로 올려잡아도 기원 전 1200년경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古朝鮮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비파형 銅劍이 그 시대의 것입니다. 그 전에는 新石器시대인데, 세계 어떤 민족도 新石器시대에 국가를 형성한 사례가 없습니다』

―왜 新石器시대엔 국가가 형성될 수 없습니까.

『新石器시대의 주거지인 서울 강동구 암사동 유적지에 한 번 가 보세요. 움집들로 이뤄진 聚落(취락)의 규모가 아주 작습니다. 그때는 돌칼이나 돌화살촉을 사용하던 시댑니다. 靑銅器시대가 되어야 날카로운 청동기 무기가 등장하여 씨족 간, 부족 간에 정복전쟁이 일어나 국가가 형성됩니다』

―「三國遺事」에는 檀君과 중국 古代의 堯(요) 임금이 동시대 인물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南韓에서도 광복 후 1960년대 초반까지는 이것을 근거로 하여 檀君이 古朝鮮을 세운 연도를 기원 전 2333년으로 삼지 않았습니까. 그 계산대로라면 서기 2001년은 檀紀로는 4334년이 됩니다. 그런데 北韓에선 檀紀를 오히려 700년 쯤 더 올려 잡았어요.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檀君 뼈」의 나이는 6개월에 걸쳐 ESR(전자상자성공명연대)측정법으로 수십 번 측정한 결과 5011년 전으로 얻어졌다고 하는데, 그런 발표를 믿을 수 있습니까.

『ESR측정법은 대략 10만년 이전의 舊石器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해 응용되고 있으며, 5000년 전 정도의 「나이 어린 뼈」를 試料(시료)로 한 분석에서는 정확한 연대측정을 기대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李鮮馥(이선복) 교수는 5000년 전 정도의 뼈라면 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한 측정이 보다 정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터인데, 북한측에서 굳이 ESR측정법을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즉, 탄소연대측정에서 고구려시대 정도의 「어린 뼈」가 나왔기 때문에 아직 개발단계에 있어서 측정결과의 조작을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ESR측정법을 내세운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神話 속에서 민족적 자존심 찾는 시대는 지나갔다

―北韓 당국은 「檀君陵」 안에서 金銅冠(금동관)의 파편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주장은 기원 전 3000년 무렵 평양 일대에서 靑銅器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금술이라는 놀라운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반도에서는 黃河유역에서 靑銅器를 만들기 시작한 때보다 1000년 이전에 이미 고도의 청동금속문명이 등장했음을 의미하며, 그야말로 세계문화사를 새로 써야 하는 大발견인 것입니다. 李鮮馥 교수는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면서 그 金銅冠은 서기 500년 무렵의 고구려式 금동관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檀君신화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天帝의 아들인 桓雄(환웅)이 곰에서 여자로 변한 熊女(웅녀)와 결혼하여 檀君을 낳았다는 기록은 역사가 아니라 神話의 세계입니다. 神話는 神話대로 그것이 창조된 이유가 있게 마련이므로,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입니다.

神話 속에서 민족적인 자존심을 찾아야만 했던 시대는 지나간 지 이미 오랩니다. 또 역사가 오래여야 자랑스런 민족이 되는 것만도 아니고, 고유한 神話를 정신적인 왕좌에 모셔야만 민족을 위하는 의식이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檀君神話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해서 檀君朝鮮의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국가의 건국에는 으레 그런 神異한 신화로 물들어 있습니다. 檀君朝鮮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나 로마의 건국신화를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하여 그리스나 로마의 건국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억지입니다』


古朝鮮의 건국연대는 기원 전 10세기경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古朝鮮의 건국연대를 언제로 판단하십니까.

『靑銅器시대 이후여야 하므로 기원 전 10세기경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의 얘기를 들으면 在野 민족사학계에서 발끈하겠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新石器시대에 국가를 세웠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고, 학교에도 가고, 장가도 들었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 주장을 하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죠. 그것은 우리나라를 학문적 미개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中國의 黃河유역, 印度의 인더스강 유역,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등 세계 4大 문명발상지의 靑銅器시대는 우리보다 좀 빨랐지요.

『印度 문명의 기원지로서 현재는 파키스탄 영토가 된 모헨조다로 遺跡를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만, 거기선 기원 전 2500년경에 이미 靑銅器문화를 개화시켰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靑銅器문화도 비슷한 시기에 전개되었지요. 문명의 시기가 빨랐다는 게 무슨 민족적 훈장은 아닙니다.

오늘날 印度, 中國, 이라크, 이집트는 모두 후진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北韓에서는 대동강 유역을 세계 5大 문명발상지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北韓이 그런 주장을 들고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平壤을 民族史의 중심으로 설정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民族史의 정통성을 檀君朝鮮-고구려-발해-고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다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사의 정통성은 지리적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민족사가 전개해온 올바른 방향과 일치하는 정치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黃長燁씨는 「南北대결의 핵심은 민족사에 있어서의 正統性을 놓고 벌이는 타협 불가능한 권력투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민족사의 正統이고, 누가 민족사의 異端입니까.

『독재국가는 韓國史에서의 正統性을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독재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이른바 「주체사학」은 韓國史學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北韓의 「朝鮮全史」나 「朝鮮通史」에서는 고구려가 우리 역사상 中世 봉건시대를 열고 이끌어간 나라, 즉 삼국시대의 主役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4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화하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삼국통일을 위한 통일의지의 표현이라 되어 있는 반면, 백제나 신라의 북진정책은 反통일적인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3國 중에서 고구려가 선진국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고구려가 당연히 3國을 통일할 자격이 있는 나라요, 백제와 신라는 당연히 고구려에 병합되어야 할 나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가 선진국가였다고 해서, 세계가 당연히 그들에 의해서 통일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이 잘못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는 독재정치에 의해서 국가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패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백제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에 반해 신라는 약간의 시련이 있기는 했지만, 국내의 단결이 굳건해서 통일의 기반이 어느 나라보다도 강했습니다』


통일은 민족의 理想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의미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新羅가 唐과 동맹한 것을 反민족적 事大主義라고 비난하는 데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문제가 있는 시각입니다. 3·1운동을 事大主義라고 규정한 日帝 어용학자의 억지 주장과 마찬가지인 겁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하기를 원했지만, 고구려가 거절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唐과 동맹을 했던 것입니다.

설마 新羅더러 비록 망하더라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게 옳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요. 더욱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신라는 唐과 치열한 전쟁을 하여 唐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라는 독립정신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金大中 대통령이 지난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金日成의 6·25 남침을 신라의 삼국통일,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이은 세 번째의 「통일 시도」라고 발언한 바 있습니다. 이런 역사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통일은 민족의 理想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의미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민족의 理想은 자유와 평등의 실현입니다. 북한에서는 6·25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무력 통일의 시도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전쟁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었던 6·25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부과된 임무라고 봅니다』

―「三國遺事」에는 檀君朝鮮은 첫 임금 檀君王儉(단군왕검)과 마지막 임금 否王과 準王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중간의 임금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왜, 一然은 기록을 누락시켰을까요. 바로 이 점 때문에 檀君朝鮮의 실상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학자들이 많은 것 아닙니까.

『檀君과 否王·準王 사이에 어떤 어떤 임금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在野 민족사학계에서 곧잘 인용하는 揆園史話(규원사화)나 桓檀古記(환단고기)와 같은 책이지요.

거기엔 고조선 47대 왕의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20세기에 들어와 만들어진 僞書(위서)로 봅니다』


古代史에 대한 日本人들의 劣等感

―日本의 국수주의 학자들은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라는 식민기관을 설치하여 한반도의 南部를 경영했다는 說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새 역사교과서 만드는 모임」의 회장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교수는 1998년 그런 내용 등을 담은 「國民의 歷史」를 써서 일본 국내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었고, 금년 들어서는 「國民의 歷史」를 母本으로 하는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일본 文部省의 검정을 통과함으로써 韓·日 양국 간에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선생님께서는 「任那日本府說」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任那日本府라는 용어 자체가 허구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任那日本府가 설치되었다는 주장하는 당시에는 일본열도엔 「日本」이란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때 나라 이름은 倭(왜)였지요. 당시의 倭는 선진 鐵器문명을 갖고 있던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을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日本이란 국명이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7세기 말엽이었어요』

―「三國史記」를 보면 신라 초기에 倭의 침략을 받았다는 기사가 자주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倭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對馬島 또는 규슈(九州) 지역의 倭라고 봅니다. 그들이 伽倻와 연합하여 게릴라式으로 신라의 변경을 칠 수는 있는 겁니다』

―가야의 시조 金首露王(김수로왕)의 탄생 신화와 倭의 始祖 니니기 탄생 신화는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 점에서 양자 간에는 親緣性 또는 혈연적 고리가 있는 것 아닙니까.

『일본 天皇家의 발상지인 규슈에는 우리 고대의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것과 모양이 같은 고인돌도 널리 분포되어 있어요. 그런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선진문명을 가지고 그곳으로 건너갔다는 얘기입니다』

―日帝 때 金海金氏의 족보가 禁書가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金首露王과 許皇后 사이에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한 사람은 駕洛國의 후계왕이 되고, 또 한 사람은 許황후의 희망에 따라 金海許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아들들은 구름을 타고 동쪽으로 날아갔다는 전설을 실었기 때문입니다. 구름을 타고 동쪽으로 날아갔다는 것은 伽倻의 유력자들이 한반도 남해안에서 규슈로 흐르는 구로시오(黑潮)를 타고 규슈로 건너갔다는 사실의 古代式 표현법이거든요. 그런데도 日本 국수주의 학자들이 韓日關係史를 왜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古代史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최근 日本의 한 고고학자가 일본 곳곳을 파헤치기만 하면 세계 最古級의 舊石器유물을 발굴하여 의심을 받다오다가 결국에는 조작의 꼬리가 잡혀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죠.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舊石器시대 유물을 꺼내어 슬그머니 파묻다가 TV카메라에 포착되었거든요.

『역사는 사실을 기초로 쓰여져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한 日本의 왜곡 역사교과서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주체사학」과는 절충할 수 없다

―금년 초에 역사교과서 파동이 일어나자 우리 정부에선 부랴부랴 교육부 차관을 책임자로 하는 대책반을 설치했습니다. 그 대책반의 회의자료를 보니까 南北韓이 日本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韓日關係史를 공동 연구하겠다는 대목이 있던데,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서강大 鄭杜熙(정두희) 교수가 쓴 「하나의 역사 두 개의 역사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사를 서술하는데, 남쪽의 역사학이 있고, 북쪽의 역사학이 따로 있다는 내용입니다. 北韓의 주체사학은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므로 우리 歷史學과 절충할 수가 없습니다』

―民族史에 있어서 삼국통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역사의 시초부터 이미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또 그것이 하나의 국가로 형상화되고 있었다는 낡은 사고방식이 아직도 잔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처음에는 滿洲와 한반도에 걸쳐서 수없이 많은 씨족공동체가 산재해 있었고, 靑銅器시대에는 각기 독립된 수백 개의 城邑國家 혹은 部族國家들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복과 동맹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로 통합 정리되어 삼국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신라의 통일에 의해 민족의 틀이 거의 완성된 것입니다』

―新羅의 삼국통일은 민족의 再통일이 아니라 최초의 통일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선생님의 「韓國史新論」에서는 統一新羅와 渤海가 병립하는 南北朝時代를 설정해 두었더군요.

『우리 역사에서 渤海는 여러 각도에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高句麗 유민인 大祚榮(대조영)이 세웠고, 大祚榮의 후계자인 渤海 武王 스스로가 고구려의 後身임을 밝혔으니까 南北朝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渤海를 우리 민족사에서 統一新羅와 대등한 위치로 놓은 것은 어색하지 않습니까. 渤海 멸망 후 高麗로 넘어온 渤海 유민은 10만명 정도로 추산될 따름이거든요.


발해는 民族史의 支流

『渤海는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수의 靺鞨族(말갈족)을 통치했던 나라입니다. 만약 말갈족이 현재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다면 그들에게 渤海史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靺鞨史로 서술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로서는 高句麗 유민이 통치했던 만큼 渤海를 당연히 韓國史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統一新羅가 우리 민족사에서 大勢를 차지했고, 발해는 支流라고 할 수 있습니다』

―高句麗의 附庸(부용)민족이었던 말갈은 원래 肅愼(숙신)이란 종족으로서 고려 때는 女眞族, 조선왕조 때는 滿洲族으로 불렸습니다. 女眞族이 세운 金나라는 北宋을 멸망시키고 中國대륙의 절반을 차지했고, 滿洲族이 세운 淸나라는 중국대륙의 전부를 차지하여 300년 간 통치했습니다. 中國에서는 金나라와 淸나라를 정통왕조로 취급하고 있는데, 말갈의 後身이 세운 이런 征服王朝(정복왕조)들을 우리 역사에선 어떻게 취급해야 합니까.

『金나라를 세운 阿骨打(아골타)가 羅末麗初에 황해도 지방에서 살다가 滿洲로 이주한 金씨의 후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金史世紀」에는 阿骨打의 7대 조인 函普(함보)가 金나라의 始祖로 되어 있고, 「滿洲源流考」에는 函普(함보)가 新羅宗姓인 金氏이므로 국호를 金으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金나라나 淸나라를 우리 민족사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史學界에선 民族主義史學, 社會經濟史學, 實證史學으로 나눠져 치열하게 대립해 왔습니다. 먼저 民族主義史學의 공헌은 무엇입니까.

『민족주의史學의 의의는 무엇보다 민족의 역사적 발견에 있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日帝下에서 우리 민족의 자각, 민족의 독립운동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공헌을 했습니다』

―그 문제점은 어떤 것들입니까.

『문제는 그들의 민족관념이 지나치게 고유성을 강조한 데 있습니다. 특히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 申采浩 선생은 역사를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으로 보았는데, 오늘날 그것을 비판없이 추종할 경우 우리 민족을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우려가 있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의 결점은 또한 역사적인 발전에 대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민족주의 사학에서 가지고 있던 역사의 시간적 인식은 민족의식의 强弱과 투쟁의 勝敗에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또한 객관적인 타당성보다는 주관적인 신념을 중요시하는 경향도 두드러졌습니다』

―社會經濟史學은 어떻습니까.

『社會經濟史學은 세계사적인 발전과정에 비추어서 한국사의 체계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미 日帝시대부터 우리 사회 일각에서조차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폐해도 컸습니다.

社會經濟史學의 대표적 존재로 공인되다시피한 인물은 「朝鮮社會經濟史」(1933)의 저자인 白南雲 前 연희전문 교수입니다. 그는 植民史觀과 민족주의사관, 즉 그가 말한 특수사관을 비판하고, 그 대신 받아들인 것이 一元論的 역사발전법칙, 곧 唯物史觀의 公式이었습니다.

그는 이 公式을 한국사에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그의 체계는 구체적 연구에 입각한 歸納的(귀납적)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이 학계 일각에서 높이 평가되어 온 데서 韓國史學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韓國史學이 겪고 있는 고민의 하나가 이런 데서 싹텄던 것입니다』


實證史學은 史觀이 뚜렷하지 못하다는 비판받아

―그러면 實證史學은 어떻습니까.

『實證史學은 가정된 법칙이나 公式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역사연구에 있어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현재의 韓國史學이 일정한 학문적 수준을 어떻게든 유지해 가고 있다면, 그것은 일제시대에 「震檀學報」(진단학보)가 보여 준 수준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實證은 역사학의 기초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역사 자체일 수 없다는 것도 自明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實證史家들은 개개의 사실 위에서 일반적인 의미를 구체화하는 작업에 거의 의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史觀이 뚜렷하지 못한 역사학은 학문이기를 그만두고 취미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현대 한국사학이 혼미해진 원인의 하나가 이러한 유산을 물려받은 데 있는 것입니다』

―實證史學이라면 李丙燾 선생이 이끌던 震檀學會를 연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성격의 학회였습니까.

『震檀學會가 조직된 것은 1934년의 일이었습니다. 발기인 중에는 李允宰·文一平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사회경제사에 관심을 가졌던 朴文圭·金台俊 등도 끼어 있었어요. 또 진단학보에는 都宥浩·韓興洙·金錫亨·朴時亨 등 唯物史觀 계열 학자들의 논문까지 실렸습니다. 진단학보에서 논문을 선정하는 기준은 작성자의 史觀보다 그 눈문의 학문적 수준이었습니다.

―金錫亨·朴時亨이라면 북한의 대표적 역사 이데올로그(理論陣)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북한의 소위 「檀君陵 발굴 학술보고집」에도 글을 실었더군요. 특히 金錫亨의 「주체 방법론을 지침으로 하여 단군조선 력사를 체계화하는 데서 나서는 몇 가지 문제」라는 글의 서두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신화로만 전해 오던 단군이 실재한 인물로 밝혀짐으로써 우리나라의 고대력사를 새롭게 체계화할 수 있는 휘황한 길이 열려지게 되었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을 과연 역사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慶山의 부잣집 아들로서 京城帝大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 金錫亨은 1947년 월북 당시 신진 학자였지요. 金錫亨과 朴時亨은 김일성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는데, 1960년대 이후 북한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최고 원로가 되었죠. 이 두 사람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학자라고 생각합니다만, 북한의 경직된 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정치가 학자를 타락시킨 본보기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金日成-金正日의 북한은 朝鮮王朝보다 후퇴한 체제

―6·25를 전후하여 적지 않은 남쪽의 역사학자들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참여하겠다고 월북했는데, 당시로는 사회주의의 虛像이 드러나지 않았던 만큼 결국은 줄을 잘못 선 것 아닙니까.

『金日成·金正日의 북한은 민족사 차원에서 보면 크게 퇴보한 체제입니다. 북한의 근·현대사는 金日成·金正日 개인 집안의 역사입니다. 「朝鮮王朝實錄」이나 「承政院日記」를 보면 임금에 대한 신하의 言路가 놀랄 정도로 트여 있었습니다.

東獨이 붕괴되기 전의 일입니다만, 韓國史를 전공하는 괴텔 교수가 한국에 온 적이 있습니다. 한림대학에서 만났는데, 그의 말로는 북한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북한은 조선왕조보다도 더 전제적이라고 해야겠지요.

金日成·金正日이 교시한 「주체적 입장과 방법론」을 역사연구에서 일관되게 견지하여야 할 유일한 지침으로 삼는 이른바 「주체사관」은 이미 학문의 세계가 아니라 정치적 도구입니다』

―북한의 「朝鮮全史」를 보면 金日成의 증조부 金膺禹(김응우)가 대동강을 침범한 미국의 무장상선을 「불배 공격」으로 침몰시켰고, 3·1 독립운동의 중심은 평양이고, 그 주역이 金日成의 아버지 김형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조작한 것을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의 참 모습을 밝히는 작업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진리의 탐구입니다. 그러므로 학문의 목표는 진리의 탐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당연한 일이지만, 거짓이 아닌 것입니다』

이같이 李基白은 「진리」라는 말을 즐겨 쓴다. 서강大 사학과 洪承基 교수는 李基白을 「보편주의적 관점에서 진실의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가」라 평가하면서 『그에게 있어서는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일이 학문의 임무로서 가장 중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의 학문세계에 큰 영향을 준 분은 누구입니까.

『李丙燾 선생으로부터는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고, 孫晉泰 선생으로부터는 역사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孫晉泰 선생은 6·25 전쟁 때 납북되었지요.

『孫선생은 광복 후 新민족주의 사관을 제창했고, 우리나라 초대 내각에서 문교부 차관으로 활동했는데, 6·25 전쟁 때 漢江을 건너지 못해 북한으로 끌려갔어요. 그곳에서 그들의 눈 밖에 난 것인지, 박물관 수위로 강등되어 고생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李丙燾 선생은 왜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日帝 때 朝鮮史編修會(조선사편수회) 참여, 李完用의 친척이란 점이 李丙燾 선생에 대한 비난의 줄거리였습니다. 광복 후 李丙燾 선생과 그 문하생이 한국사학계를 주도한 데 대한 묘한 반발심리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李基白 史觀은 무엇입니까.

『학문이란 것은 전통이 중요한데, 그것을 계승하려 하지 않고 파괴하려고만 해요. 民族主義史觀, 唯物史觀, 實證史學에서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버려야 하는데, 자기 비위에 안 맞으면 무조건 배격해 버리는 풍토는 고쳐야 합니다. 역사는 여러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란 보편성을 띤 여러 법칙에 의해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多元的 普遍主義 發展史觀이라고나 해야 할는지요. 저 자신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 史觀의 장점을 會通하는 것이 선생님의 史觀이라 할 수 있겠군요. 한국사의 발전 방향은 어떤 모습입니까.

『統一新羅 이후 우리 역사는 支配勢力의 저변이 점차 확대되어 오는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신라 말기에 이르면 중앙에서는 六頭品이, 지방에서는 豪族의 세력이 등장하더니 , 드디어는 이들이 신라의 金氏王族 중심의 骨品制를 무너뜨리고 高麗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후삼국시대를 亂世라기보다는 매우 역동적인 시기라고 말합니다』

―高麗는 어떤 사회였습니까.

『高麗는 왕족뿐만 아니라 6두품과 호족 출신의 문벌귀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사회였습니다. 이렇게 지배세력이 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科擧와 같은 관리등용시험을 필요로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文臣 중심으로 짜여 있던 고려사회의 지배세력은 武人정권 시대에 武臣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고려 후기에는 鄕吏 출신의 士大夫 세력의 진출이 눈에 띄게 됩니다』

―신흥 士大夫 세력이 대두한 朝鮮왕조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역사발전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조선은 士大夫 중심의 兩班사회였지요. 따라서 高麗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支配勢力의 수적 증가를 보였습니다. 士林派가 등장하면서 이런 大勢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朝鮮朝 말기에 이르면 兩班의 신분적 특권은 점점 무너지고 중인, 서리, 상공업자의 사회적 참여가 증대됩니다.

西洋의 새로운 지식에 흥미를 갖고 開港 정책을 이끌어낸 것도 이들입니다. 한편 농민층도 점점 성장하여 이들이 東學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3·1 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운동도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역사발전 이룩

―오늘의 한국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먼저 한 가지 사례를 들겠습니다. 초기에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분의 부친은 노비였습니다. 이렇게 身分制가 부정되고 온 국민의 사회 참여가 보장되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한국은 출발부터 대단한 역사의 발전을 이룩한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민주국가의 건설이야말로 민족사적 이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의 大勢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李선생은 필자에게 점심을 사겠다면서 외출을 위해 한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사이 필자는 李基白 선생의 서재를 둘러보았다. 40여 평짜리 집의 방마다 역사 관련 책과 자료가 쌓여 있었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 놓인 원고지들은 그가 집필을 계속해 오고 있다는 흔적이었다. 그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그의 선친이 구입했다는 茶山 丁若鏞의 「與猶堂全書」(여유당전서)도 눈에 띄었다.

그러면 李선생이 평생 모은 책들은 장차 누구에게 갈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李선생 스스로가 먼저 말을 끄집어 냈다. 『둘째(아들)가 東洋史를 하니까 필요한 건 그에게 넘기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李선생의 장남 仁星(49세)씨는 서울大 불문과 교수, 차남 仁哲(45세)씨는 서강大에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李선생은 습관적으로 「휴」 하고 한숨을 짓는 바람에 오랜 시간의 대화가 원로학자의 건강에 무리를 주는 것은 아닐까 하여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杞憂(기우)였다. 음식점으로 동행하면서 보니 짙은 회색 양복 차림의 그는 의외로 옷맵시가 있었고, 자세도 꼿꼿했다. 늦은 점심이어서인지, 매우 왕성한 식욕을 보이기도 했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3]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지리가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민족성이 역사의 산물인 것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4] 문화는 근본적으로 보편성을 기반으로 하고 성립한다.

[4] 민족문화는 인류 문화의 보편성을 근거로 하고 자기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적합하도록 창조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적 노력의 성과를 한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7]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이며, 한국사는 곧 한국인의 역사이다.

[7] 군주이건 영웅이건 간에 개인 중심의 역사관은 청산되어야 한다.

[8] 사회세력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재인식은 한국사를 생명력이 넘치는 역사로 만들 것이다.

[8] 한국민족도 결국은 인류의 한 구성원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인류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또 차이점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민족의 역사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하나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의 인식은 다른 말로 한다면, 그 보편성과 특수성의 인식이 되겠다.

[9] 역사에 적용하는 법칙은 다원적인 것이지만, 그 여러 법칙들은 어느 민족에게나 다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다만 많은 법칙들이 어떤 민족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에, 그 결합하는 양상이 다른 민족의 경우와 같아질 수 없고, 그것이 곧 그 나라 역사의 특수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작용하는 보편적인 여러 법칙들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 깊을수록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는 말이다.

[10] 이 책에서 시도된 시대구분의 기준은 사회적 지배세력(주도세력)에 놓여 있다. 즉, 사회적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에 기준을 두고 한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해보려고 한 것이다.


[168] 북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으로서 성장한 몽고의 가장 중요한 정복대상은 남쪽 농경민족이었다. 그것은 농경민족들이 지니는 풍부한 생산품이 그 구미를 돋우어 주었기 때문이다.

[169] 최이는 몽과의 항쟁을 결의하고 서울을 강화로 옮기었다(고종 19년, 1232). 이것은 바다를 두려워하는 몽고의 약점을 찌른 것이었다.

[170] 농촌이 황폐해지면 농민들의 생활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도(강화)의 정부는 농민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대책을 서둘기보다는 오히려 가혹한 수취로 그 생활을 더욱 곤란케 할 뿐이었다. 이러한 귀족들의 수취는 농민들의 정부에 대한 반항심을 조장시킬 뿐 아니라 몽고에 대한 항쟁 의욕을 꺾어 주었다.

[178] 몇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려 국왕은 독립왕국의 군주로서의 지위를 끝내 유지하였다. 이것은 무인정권에 의한 대몽항쟁의 산물이었다.

[180] 권문세족은 개인의 이익을 확대시킴으로써 국가의 제도를 통한 지배층 전체의 공동 이익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183] 원이 한족인 명의 흥기로 인하여 북방으로 쫓겨가는 원・명 교체기에 즉위한 공민왕(1351-1374)에 의하여 개혁이 어느 정도나마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차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 공민왕의 개혁이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억압이라는 양면성을 띠고 있는 까닭도 이 같은 사정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184] 무명의 승려인 신돈을 중히 쓴 것도 개혁정치의 실시가 권문세족과는 인연이 없는 인물을 등용해야만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186] 전제개혁은 신흥사대부에 의한 경제적인 면에서의 구질서의 파괴요, 신질서의 수립이었다.

[188] 고려 후기 유교의 특징은 성리학을 받아들였다는 데에 있다. 성리학은 처음 <소학>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윤리를 중요시 하는 면에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하는 철학적인 국면이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193] 고려에서는 초기부터 도서관 시설에 관심이 커서 허다한 서적을 수집하여 보관할 뿐만이 아니라, 이를 등사하여 두게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에는 수만 권의 진기한 서적이 비장되고 이를 송에서조차 구하여 가는 형편이었다.

[197] 이렇게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는 양반은 자연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다.

[217] 역사는 정치의 거울이라는 관념이 이에 대한 국가의 관심을 크게 하였다.

[237] 청 태종은 인조 14년(1636)에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하여 오게 되었다(병자호란). 이때 왕자와 비빈을 먼저 강화로 피난시켰으나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산성에는 군량이 적은데다 기다리는 구원병도 도착하지를 않았다. 게다가 강화가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은 포로가 되었다. 이에 인조는 최명길 등 주화파의 주장을 쫓아서 항복을 결심하고 삼전도(송파)의 청 태종 진영에 나아가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239] 족보는 종으로는 혈통관계를 밝히고, 횡으로는 동족 관계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 족보가 이때에 널리 만들어지게 된 것은 그것이 여러 가지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양반의 신분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또 동족 인사와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족보에 의해서 자기 동족중의 유명 인사를 알아두는 것을 필요로 했다. 즉, 족보를 외는 보학은 양반이 지녀야 할 하나의 필수적 지식이었던 것이다.

[244] 탕평책에 추진에 힘입어 붕당간의 날카로운 대립 항쟁은 잠잠하여졌다. 그 반면에 양반사이에는 적당주의, 무사안일주의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런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보다는 개인의 이익만을 도모하려는 공리적인 경향이 일어나서 드디어는 세도정치로까지 치달아가게 되었다.

[248] 상당히 넓은 면적의 토지라도 이를 혼자서 경작하는 소위 광작이 크게 보급되었다. 대체로 광작하는 농민들은 부농이었으며, 이들은 이미 자신의 소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으로 팔기 위하여 생산하는 기업농이었다.

[249] 쟁기질의 개량이나 이앙법의 보급으로 인하여 농촌사회는 광작을 하는 부농과 토지를 떠나는 이농자의 양자로 분화하는 현상을 나타냈다고 하겠다.

[250] 양반과 상민의 관계는 비록 그 구분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재부에 토대를 두고 크게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255] 실학의 탄생은 정치와 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정권 담당자들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권 담당자의 일부에서도 현실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말한다면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측에서 그러한 노력이 더 많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들 중에서 실학자가 많이 나게 되었다.

[255] 실학자들의 연구방법은 실증적이었다.

[255] 그들이 관심을 가진 현실이 바로 조선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학문은 민족적 성격을 띤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조선의 학문은 새로운 비약을 하게 되었다.

[256] 경세치용의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는 정조・순조 때의 정약용이었다. 그는 순조 원년(1801) 신유사옥으로 인하여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당시 조선사회의 현실에 대하여 직접적인 분석과 비판을 가하는 많은 저서를 남기어 실학 최대의 학자로 불리고 있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중앙의 정치조직에 관한 의견을, <목민심서>에서는 지방행정에 대한 개혁을, <흠흠신서>에서는 형정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 3부작 이외에도 <탕론>, <전론> 등에서 그의 사회 개혁사상을 발표하였다.

[259] 이 시대에 만주사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사실을 기어해야 하겠다. 가령 이종휘는 <동사>의 지에서 고구려에 대하여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방면의 대표적 저작은 아무래도 유득공이 정조 8년(1784)에 지은 <발해고>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한 것이고 북쪽에 발해가 있었으므로 이는 응당 남북국이라 불러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같이 한국사의 무대가 반도와 만주에 걸치는 것이었다는 생각은 실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며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는 가하는 의견도 종종 나타나 있다.

[261] 서학 신봉자들은 서양 선교사들의 전도에 의해서보다도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천학초함>등의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자발적으로 이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까닭은 소수 벌열의 집권으로 말미암은 사회적・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서학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는 성리학과는 반대로 서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고 하는 인간원죄설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261] 서학이 유행한다는 것은 벌열중심의 양반사회, 성리학 지상주의의 사상적 질곡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264] 이들은 요컨대 실증적인 태도로 유교의 경전들에 접근하여 주자가 아닌 공자의 본뜻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공자의 본뜻을 실증적으로 찾아보자는 입장에서 경서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학자로는 정약용이 있었다.

[268] 이 같은 속화의 유행은 양반의 유교주의에 대한 예술면에서의 항의였고 인간주의의 표방이었다.

[279] 몰락한 양반 출신의 학자인 최한기는 철종 11년(1860)에 완성된 그의 대표적 저술인 『인정』속에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하여는 인재를 옳게 등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사, 농, 공, 상의 구별없이 인재를 뽑아 교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역사는 앞으로 진보한다는 생각에서 장차 인류가 문명세계 속에서 생활할 수 있으리라는 밝은 전망을 가지고, 쇄국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열어 세계의 여러 나라와 호흡을 같이할 것을 주장하였다.

[281] 신분이 높은 사람보다 낮은 사람, 유식한 사람보다 무식한 사람, 부유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천주교의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주로 서울과 그 부근에 신자가 집중되어 있어서, 천주교가 농촌의 종교이기보다는 도시 중심의 종교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이 천주교에 이끌린 것은 우선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천주의 자녀라는 평등사상에 공명한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인이나 상민들이 천주의 자녀로서 양반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천주를 예배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281] 천주교가 서울을 중심으로 퍼져 갔다고 하면 동학은 농촌속에서 자라났다.

[315] 갑오경장은 한국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실로 다방면에 걸친 대개혁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일본이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평탄한 길을 닦아 놓는 구실도 하였다.

[337] 유학자들의 지휘 밑에서 의병을 구성한 주요 병력은 농민이었다.

[348] 민족산업이 부진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무력을 수반한 일본의 정치적 침략을 배경으로 한국의 금융계를 일본인의 은행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55] 지식층의 정치운동이나 교육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기독교였는데 특히 신교가 그러하였다.

[355] 이들은 전도의 한 수간으로서 의료 등의 사회사업을 경영하여 사회적으로 이바지한 바도 컸거니와 사상적으로 자유주의를 고취하고 민족의식을 앙양하는 데도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361] 민족자결의 원칙은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민족에세 열광적 환영을 받았음은 물론이었다. 이제 세계는 바야흐로 ‘위력(威力)의 시대’가 끝나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온 것으로 믿게 하였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한국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민족운동을 일대 독립운동의 전개로 몰아갔던 것이다.

[363] 민족 대표자들은 이 독립운동이 학생을 비롯한 온 국민의 운동이 되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370] 일본은 한국을 식량공급지 이외에 또 상품시장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1920년에 일본과 한국과의 관세제도가 철폐됨으로써 일본의 독점시장으로서의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371] 1920년에 총독부는 회사령을 철폐하였다. 이로 인하여 회사의 설립은 허가주의에서 신고주의로 변하였다. 이제 회사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허가를 받지 않아도 설립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의 민족자본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그것은 성장하는 일본의 자본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경기를 지나고 난 뒤 유리한 투자시장을 한국에서 발견한 때문이었다. 한국을 단순한 제품의 판매시장이 아니라, 투자 시장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 임금의 절반밖에 안 되는 싼 것이었다.

[372] 군수공업의 일방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화한 것이다.

[382]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사회주의와의 연결이었다. 마침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레닌은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주장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서 1921년 상해에서 이동휘를 중심으로 고려공산당이 세워졌고, 레닌으로부터 상당한 자금의 원조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383] 일제 식민통치하에서의 한국 민족운동의 특이한 양상의 하나는 그것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독립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388]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교육방침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즉, 일본은 교육즉생활주의를 표방하고 일본어와 실업의 교육에 치중하였다. 이것은 군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적어도 일본어를 해득하고, 또 어느 정도의 기술을 가지는 노동자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388] 한국인이 근대적인 사상이나 학문을 발전시킨 것은 결국 사립학교나 유학을 통한 교육에 힘입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경성제국대학에 대항하여 민립대학을 세우려는 운동이 전개된 것은 이러한 민족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운동이었다고 하겠다.

[403] 외국원조 등에 의하여 산업이 동란 전보다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득을 본 것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소수의 특정기업체들이었다. 이들은 은행귀속주를 불하받아 금융기관마저 차지함으로써 그 토대를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405] 4월 혁명은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강압적인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한국사상 최초의 혁명이었다. 그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학생이었다.

[405] 민주정치하에서 여러 계층의 갖가지 욕구가 일시에 분출하여 각종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국민 여론의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민주정치가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혼란으로 규정하고, 이 혼란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일어난 것이 1961년 5월에 있은 5․16 군사 쿠데타였다.

[408] 통일신라기를 분기점으로 하고 지배세력은 흥미있는 변화를 해왔다. 즉 점점 축소되어 가던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이 통일신라기 이후에는 반대로 점점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도록 이 확대되어 가는 추세는 그치지 않고 있다.

[409] 이 같은 지배세력의 변천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된 것인가. 거기에는 어떤 법칙성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이 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주목된다. 즉 대체로 말해서 처음에는 지배층을 형성한 여러 세력을 중에서 보다 유력한 세력이 독점적으로 권력을 향유하는 방향으로 좁혀 들어갔다. 그것이 통일신라기 이후에는 지배세력의 바로 밑 계층이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곤 하여 점점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이 확대되어 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410] 집권자는 지배세력 안에서 선택된 지배세력의 대표자였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가 없는 관계에 있었다.

[411]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목아래 모든 집권자가 무조건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 그들이 한국사의 큰 흐름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구실을 하였는가 혹은 후퇴시티는 구실을 하였는가에 따라서 그들의 역사적 위치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의 대세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11] 과거에 민중은 지배세력에 참여하지를 못하여 왔다. 사회의 기층세력이면서도 주인의 구실을 못하였고, 다만 때로 불만의 표시를 나타낼 수가 있을 뿐이었다. 그 불만이 나타난 구체적 표현은 소극적으로는 지배기구의 테두리 밖으로 유망하는 것이었고, 적극적으로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중의 반항은 종종 지배세력의 재편성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곤 하였다. 즉 반항을 통하여 민중 자신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기보다는 역사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곤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민중은 한 발짝씩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였다. 이시기에 주목해야 할 사건은 동학운동과 독립협회 운동이었다.


3. 내가 저자라면

E.H.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을 중시해야 하는 생각에서 사회적 지배세력(주도세력)의 변천과정에 기준을 두고 한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였다. 그래서 시대구분을 기존의 고대, 중세, 근대 3분법으로 구분하지 않고, 원시공동체 사회, 성읍국가와 연맹왕국,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발전, 전제왕권의 성립, 호족의 시대, 문벌 귀족의 사회, 무인정권, 신흥사대부의 등장, 양반사회의 성립, 사립세력의 등장, 광작농민과 도고상인의 성장, 중인층의 대두와 농민의 발란, 개화세력의 성장, 민족국가의 태동과 제국주의의 침략, 민족운동의 발전, 민주주의의 성장으로 구분하였다.

이 같이 역사의 흐름을 힘의 긴장관계로 파악하면 흥미로운 변화가 관측된다. 처음에는 지배층을 형성한 여러 세력들 중에서 보다 위에 있는 유력한 세력이 독점적으로 권력을 향유하는 방향으로 좁혀졌다가 통일신라기 이후에는 반대로 점점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이 아래로 확대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도록 이 확대는 더 커지고 있다. ‘지배세력의 변천방식에서 어떤 법칙성을 발견할 수 없을까’라는 저자의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 힘의 작용과 반작용 법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932년에 첫 출판된 리오 휴버만이 쓴 <가자! 아메리카로>와 비교하여 보면,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깨닫게 된다. 첫째는 공통점으로 <가자! 아메리카로>와 <한국사신론> 두 책 모두 역사의 흐름을 ‘무엇이 일어났는가’라는 관점보다는 ‘왜 일어났는가’라는 관점에서 서술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차이점으로 <가자! 아메리카로>는 민중을 중심으로 쓴 반면에 <한국사신론은> 지배세력 중심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두 책 모주 민중의 지배세력의 지배대상이었지만 지배세력의 재편성을 초래하거나 사회의 중심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 것에 대해서는 일치하였다. 동학운동, 독립협회, 그리고 민주화운동 등 한국사를 보면, 농민이나 학생들이 역사의 전환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책을 읽다 보면 두 가지 점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첫째,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혔고 개선하려고 많이 노력하였지만 고유명사나 한자용어로 인해 한글세대들은 사전을 옆에 두고 읽어야 한다. 용어에 대한 해설을 각주로 편집하여 설명하면 독자들이 훨씬 편히 읽을 수 있겠다.

둘째는 장점이면서 단점일 수도 있는데 지배세력의 중심으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다보니 중요한 사건이 인물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였다. 흐름중심으로 이해하면 역사를 꿰는 통찰력을 얻겠지만 변화를 이끈 사건에 대해서는 부족한 면은 여전히 남는다. 이 두 부분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기술할 수 없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 독자들에게도 한국사를 이해하는 첫 번째 책으로 권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책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저자는 이 책 이전에 <국사신론>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책을 내고도 시대구분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차에 미국 하버드대 와그너 교수가 영어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참에 저자는 <국사신론>을 대폭 수정하여 책을 낸 것이 <한국사신론>인 것이다. 지금은 영어 외에도 일어, 러시아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판으로 번역돼 한국 역사를 세계에 소개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역사는 변한다’는 E.H.카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아쉽지만 민주화 이후 역사를 포함하여 계속해서 개정되고 내용이 추가되어 역사의 흐름처럼 이 책도 누적되고 변화되는 생명력을 지속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IP *.211.6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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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6.04 13:41:45 *.114.56.245
지하철에서 차분히 다시 읽어보아야겠네요. 전 다른책을 읽었거든요.
한자 실력이 글의 맥을 끊을까 염려스러운데 ---

아무튼 좋은 글 씹으면서 읽어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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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04 14:28:13 *.99.120.184
도대체 잠은 언제 주무시고 일은 언제 하세요.
저도 해방전후사를 읽고 싶었지만 분량때문에 포기하고 이 책을 읽었죠.
소화력이 떨어져서 5월은 요령만 늘었습니다. 요령 피우면 소화가 되더라도 뼈나 살로 안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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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04 21:22:28 *.72.153.12
저자와의 긴---------- 인터뷰 감사합니다.
그리고,저자의 독창적인 시대구분이 어떤 것인지 몰랐는데... 리뷰를 보니, 책의 목차 그대로가 시대구분었군요.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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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2007.06.07 00:37:24 *.128.229.230
그대는 이 인터뷰와 그의 책을 읽고 저자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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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6.07 09:06:25 *.99.241.60
긴 인터뷰 잘 보았습니다.
이기백 교수님의 혼돈의 시대를 살아오시면서
한국사 한가지에 대한 평생의 연구가 가슴에 많이 남더군요.
또 학문이란 있는 그대로 공부하는것이 아닌 자기만의 시각과
원래의 것에 새로운것을 보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역사와 문명의 발전은 바로 이런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저자와의 대화는 어떤 결론이 내려졌는지
이번주에 얘기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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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07 17:28:28 *.99.120.184
선입견을 갖지 않기 위해 힌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더 조심스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책을 읽은 후에 오히려 이병도 선생의 사관이 어떤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야 비교나 비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은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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