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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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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4일 08시 43분 등록
책 :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 송건호, 진덕규, 백기완 외9)를 읽고

1. ‘내가 저자라면’에 대신해서 붙이는 글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에 있어서는 냉철하지 못했다.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굴욕과 고통의 현장은 눈을 감고 지나갔고 서정적 낭만성만 머릿속에 담았다. 이러한 편향성은 점점도를 더하여 우리 역사의 회피증세로 이어졌다. 굳이 연결지어 보자면 일종의 Mood Cela
Syndrome 이다. 이런 연유로 이 번 오월 4주 책읽기는 ‘우리 역사에 다시 접근하는 시간’이었다. 매일 일정시간을 째려보기 시간으로 정하고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역사 앞에서 냉철해지고 필자에게 예리하게 다가서기는 한계가 있었다. 서문에서도 잠시 언급이 된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중복되는 부분과 관점이 다소 다른 부분도 있는 터라 이 부분까지 소화해 내기에는 벅 찼다. 이러한 상황에서 객관적 사실에 주관적인 생각을 덧붙여 글을 쓴다는 것은 과정을 위한 형식적 절차라는 생각에 차라리 일정부분을 중점적으로 언급해 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지었다. 이 에 따라 ‘해방전후사의 인식’ 중 송건호, 백기완님이 쓴 글을 중심으로 전개해 보고자 한다.

- 우리 민족의 참 의지에 배반하여 전개되기 시작한 분단은 그 후 안팎의 요인이 서로 얽혀 날로 고정화 되는 현실이 아직도 우리들 앞에 있다. 우리는 민족사의 전진을 위해, 이 시대와 숙명적으로 대결하는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이 시대의 의미를 추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시대를 감정적으로 처리해 버릴 것이 아니라 냉철한민족사적 안목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현재의 역사를 의미하며 역사를 논의함은 바로 현재를 성찰하기 위해서라는 전제를 여기서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
.- p 8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펴내면서 中-

가 .해방 전후의 시대적 상황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를 한반도에 올려놓았다가 또다시 일본을 밀어내고 스스로 한반도 위에 자기 군대를 올려놓았다. 그것도 오랫동안 극동 진출의 야망을 갖고 있는 소련과 합작해서 38선을 경계로 해서 군대를 진주시켰다. p 342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라고 선언한 것은 과거의 일본은 일본 제국주의의 자기모순에 의하여 전쟁을 직접도발 하였지만, 2차 대전 이후의 일본은 전쟁 도발의 구조적 잠재 요인으로 존재하고 따라서 일본이야말로 전쟁이 아니면 자기 존립을 지속할 수도 전쟁의 잿더미로부터 부흥할 수도 없다는 것을 명쾌하게 지적한 것이다. p326

일본의 제국주의의 확장으로 미국의 동경만 침입에 굴복한 치욕을 한민족에게 강요하던 시기, 이는 다시 국제적으로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냉전의 전략단위로 이어져 우리 민족에게는 침략과 항쟁, 그리고 해방과 좌절, 또 다른 항쟁으로 이어졌던 시기.

나. 지도자들의 정치활동 (김 구, 이승만을 중심으로)

이승만의 정치 가반은 타협주의와 부일협력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의 연합 세력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p38

이승만의 단정의 길은 당시 이미 미. 소 간에 냉전이 시작되어 이 물결에 편승한 탓으로 순풍에 돛을 단 듯 추진되어 나갔으나, 이미 냉전의 물결에 거역 구실을 하게 된 김구. 김규식 등 민족자주연맹의 길은 좌절의 길일 수 밖에 없었다. p 42

임정요인의 생활은 실로 눈물겨울 정도였고 전차표 검사원으로 근근이 지내는 교포 집 등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p25

이승만과 김 구의 투쟁(반탁) 목표는 처음부터 달랐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승만은 아마 공산당과 같이 들어가는 통일정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정치적 의식이 더 강했으리라 짐작되지만 공산당과의 합작을 당초부터 굳이 반대 않는 김구의 반탁은 민족의 자존심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순수한 민족의식이 보다 더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승만이 치켜든 대동 단결론은 궁극적으로 민족 통일의 동질성을 확보할 그야말로 항일 세력의 통합이 아니라 분단된 조건하에서만 자기 생존을 구할 수 있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그리고 정치권력에만 눈이 어두운 분열주의자들만 거두어들이자는 것이다. p349

다. 김 구의 과 외 실

김 구가 이승만 보다 더 결렬하게 반탁의 선봉에 서서 미. 소 협조에 의한 유일하고도 마지막일 통일에의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고 이미 미 . 소 냉전이 격화된 새로운 국제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러한 냉전 상황을 배제하고 민족 자결에 의한 통일을 달성하려고 한 것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판단한 투쟁노선이 못 되었다.

국민당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광복군을 육성만 하려다가 중국 국민의 싸움의 현장을 같이 하지 못하는 바람에 중국인의 싸움의 현장도 잃고 조국에서의 싸움의 현장도 동시에 잃어 이른바 연합군에 의한 타율의 해방을 맞고야 말았다. p 339

그러나 당시 참으로 필요했던 통합 대상은 국내외의 광범위한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항일 세력, 그 중에서 무장 항일 세력을 중점 대상으로 삼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p 340

미국이 비록 임정의 옷을 강제로 벗기기는 했지만 우리의 주적이었던 일본을 몰아낸 해방 우군이니“그들이 돌아가는 날까지 모든 편리와 수요를 제공해야 한다.”고 능히 말할 수 있다.하지만 ‘그들이 돌아가는 날까지“하고 미군의 한반도 진주를 수동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이러한 언사는 백범 해방 직후의 인식논리 즉 외세에 의한 조국분단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단적인 증거다.

그러나 백범이 반탁을 취함으로써, 그의 애국적 자의식 속엔 그의 탁치 반대 의사가 외세의 간섭에 대한 저항으로 느껴졌겠으나 외세를 배척하는 또 하나의 방법인 외세를 이용하는 전략은 잃어버린 셈이다. 따라서 가장 뼈아픈 치명타는 일찍부터 관용과 포용, 통일의 주체로서의 백범이 탁치안을 놓고 담당해야 할 과제 즉, 탁치 안을 앞에 둔 모든 항일 세력의 단합을 도모할 지반을 스스로 파괴할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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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는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내재적 요구가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작동되었던 시기다. 일본의 침략과 지배가 그렇고 전후 냉전적 상태유지를 위한 38선이 그렇다. 즉 강국의 점령정책이 자주국을 대신했던 것이다. 책의 서두에도 언급되었듯이 단일한 기획아래 집필된 것이 아니기에 내용에 있어서 중복되는 부분과 같은 상황을 보는 관점도 다소 다른 시각으로 언급되는 곳도 있었다. 어찌했던 본 서는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냉철히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송건호의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 부분을 비롯해서 진덕규의 ‘미군의 정치사적 인식’등에 나타난 미국의 ‘의도’를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누가 누구를 탓하고 배척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명확한 인식에 바탕을 둔 냉철한 자기 판단과 결단에 따른 실천성에 그 중점을 있다고 할 것이다.

한 개인이나 국가, 민족성 또는 국민성을 이야기 하는 경우에는 개인사나 민족사의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함이 당연한 것처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점은 나아갈 방향 찾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우리 민족이 해방 전후로 한 피지배의 형태와 그에 따른 우리의 다양한 반응은 그 자체를 놓고 옳고 그름을 넘어서 새로운 방향 모색의 시발점이 되어야 할 것임을 재차 덧붙인다.

이런 측면에서 본 서는 나에게 두 가지 측면의 개인사적 발전적 시발점을 제공해 주었다.

첫째는 대상에 대한 어설픈 이해는 판단에 있어서 오류를 가져오며 이를 바탕으로 한 이론제기나 행동적 지향 점은 결코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청년기에 노동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본 경험이 있다. 새벽 같이 시작되어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육체적 노동이었으며 일요일을 비롯한 휴일에도 그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되돌아보니 그 열악한 노동현장과 그야말로 쥐꼬리만한 급여가 나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잠시 머물다 떠날 것이라는 것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뒹굴 장소가 아니었기에 상황이 절실하게 와 닿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노동의 현장을 개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거니와 개선이나 발전지향적인 시각을 가질 수는 더더구나 없는 셈이다.
나(我)나 우리는 굳이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라다크에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그곳에 대한 찬미와 우려를 나타낸 것처럼 상황에 심각하게 뛰어들어야 함은 아니다. 그러나 개선을 향한 목표지향점을 가졌다면 냉철한 상황이해는 출발선상에서 필수불가결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는 우리 역사 인식에 대한 새로운 출발선상에 섰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역사 앞에서 조금은 냉철해 질 수 있다. 미군정의 실상이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 사실을 회피할 필요가 없으며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가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뿐일 것이다.”- 본문 중- 가 현재에도 적용될지라도 분개로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냉철한 상황인식에의 접근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물론 단기간에 우리 역사 전체를 이해하고 우리 또는 내가 나갈 지향점을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 부분에서의 정확한 인식은 전체를 바라보는 냉철한 이해의 지침돌이 될 것이다. 과제의 경중을 떠나 내 자신이 우리 역사 앞에서 감정을 잠재울 수 있었다는 점이 큰 수확이다.

--덧붙이는 글 --
〈일본을 읽다.〉

가방 하나 달라 메고 일본 곳곳을 돌았다. 일본 전체를 보자는 욕심은 버리고 역사속의 일본과 현대 속의 일본을 비교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박물관을 비롯한 신사, 사찰, 그리고 Sony 전자회사 본사를 방문했었다. 내가 가진 일본에 대한 어설픈 선지식은 최대한 버렸지만 그렇다고 내가 객관화 된 눈을 가졌었다고 장담할 순 없다.
타국들과 비교해서 말하건데

일본 선조들의 예술성은 기본점 이하.
최첨단을 자랑하며 그들의 현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Sony를 바라본 눈은 ‘과연’ 이었다.
(얼마 전 기업평가에서 나타난 소니의 저조한 실적전이 방문한 내용임을 전제함)

빈약한 정신문화에서 거대한 현대가 탄생한 것은 어디에 연유한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작가 이인화님은 글을 쓰기 전에 철저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그 자료들을 완전히 자기화 한 후 글쓰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김 훈 님은 과감한 주관적 글쓰기를 시도하고 그 뒤에 오는 매 맞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자료 수집의 철저함은 물론 자료를 다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관도, 객관도 아닌, 둥글둥글한 글쓰기에서 탈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2. 저자에 대하여

백기완
재야운동가.

1960년대 중반 한일협정반대운동을 계기로 통일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3선개헌 반대와 유신철폐 등 1970년대 제3공화국하 민주화운동에서 남다른 역할을 했다. 1974년 '유신헌법철폐 100만 명 서명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제1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최초로 구속되어 징역 12년, 자격정지 12년 형을 받고 복역 중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사건'을 주도하고 그 위원장을 맡아 계엄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80년 4월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복역중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민주화운동 외에도 1972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1980년 해체될 때까지 소장직을 맡으면서 〈백범어록〉 등을 출간했다. 1984년 다시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직을 맡아 자신의 저작과 통일 및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책자들을 발간하고 있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후보로 추대되었으나 선거 이틀 전 후보를 사퇴했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민중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약력
1932년 황해 은율 출생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로 제 이름을 바꿈
1987∼92년 대통령 후보
1988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1990년 전노협 고문
1992년 제14대 대통령 후보
2000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1999년~현재 계간지 발행인 .

저서
- 자주고름 입에불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 나도 한때 사랑을 해본 놈 아니오
- 백기완의 통일 이야기 장산곶매 이야기
- 배두산 천지
- 통일이냐 반통일이냐

개인적인 접근
- 회색 두루마기에 빗은 듯 빗지 않은 듯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사상에 대해 관심을 별로 가지지 않았던 터에 그가 무슨 마을 하는지 귀를 기울인적은 없지만 대학 시절 잠시 ‘ 자주 고름 입에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를 들고 치구랑 맣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실이 새삼스럽다.

송건호(1927-2001)

언론인.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생.
19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3년 《조선일보》 외신부기자를 시작으로 1958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으나 1975년 《동아일보》기자 집단해고에 반발, 사임한 후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작업에 참여,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언론 30년사》, 공저로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이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언론인 송건호 선생에 관해서는 무지한이었다. 도서관을 비롯한 인터넷 사이트 몇 몇 곳을 기웃거린 결과 선생에 대한 무지의 내가 죄스러우을 느꼈다. 한 블로그에는 ‘ 고단했던 시기에 늘 회망을 말했던 송건호’ 라는 글귀가 있었고 송건호 기념사업회 등에서 나타난 그의 생전 행한 업적은 굳이 그가 금관문화훈장을 비롯한 한국언론상, 호암언론상, 및 정일형 자유민주상
을 받았다고 언급하지 아니해도 그의 언론사적 업적은 결코 간과 할 수 없음을알수 있었다.

그 외 본서에 논문을 게제한 몇몇 필자 중에는 그 분의 강연에 직접 참여한 적도 있는 익숙한 분도 있고 생소한 몇몇분도 있었다. 어찌했건 이 번기회에 다양한 인물들의 ‘헤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주제 아래 많은 학자들의 의견을 동시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또한 우리 연구원들이 매주 하는 읽기 작업과 그 후속 조치와의 관계성도 찾아낼 수 있는 기회였다.

3. 내마음에 들어온 글귀

해방전후사의 인식
〔20〕이 글은 8.15가 주어진 타율적 선물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이 강대국에 의해 얼마나 일방적으로 요리되고 혹사당하고 수모 받았으며 이런 틈을 이용해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을 짓밟고 일산의 영달으 fdnl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켰는가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22〕토착 항일 세력으로서 또 하나 간과 할 수 없는 것이 좌파공산주의 세력으로써 박헌영 일파였다.

〔22〕해방을 앞두고 지도층이 이토록 한심한 상태에 있을 때 이제와 차원 높은 접촉을 하고 있던 여운형만이 해방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24〕송자문은 마침내 루즈벨트에게 “한국인은 너무 파쟁이 심해 효과적인 힘의 결속을 하지 못한다.”고 부정을 보고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1943년 4월 루즈벨트와 영국 이상 이든은 워싱턴에서 만난 자리에서 이미 한국의 신탁 통치 실시에 의견을 같이 했던 것이다.

〔25〕임정 요인들의 생활은 실로 눈물겨울 정도였고 전차표 검사원으로 근근이 지내는 교포 집 등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26〕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미 본토에서나 중국에서나 망명 투사들의 항일전에의 기여는 연합국 측으로부터 별로 인정을 못 받고 역사가 증명하듯8.15 후의 한반도 문제, 한민족 문제는 미. 소 나라에 의해 일방적으로 분단 점령되어 한민족은 해방을 맞았다는 바로 8.15 그날부터 수난이 시작된 것이다.

〔27〕미군정은 한국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전적으로 일본인들에 의존하여 일을 처리해 나갔다.
〔30〕미군정 3년이 한국의 자립경제 체제 확립을 위해 결과적으로 어떠한 영항을 미쳤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군정 3년간의 결산은 인플레의 격화, 대중생활의 파탄, 부정. 부패의 만연 치안의 난맥뿐만 아니라 정부재정의 막대한 적자, 사회 불안은 손을 댈 수가 없을 정도였다.

〔32〕8.15를 맞이한 우리 민족에 민중을 이끌어 나갈 만한 혁명 주체 세력이 없었다는 것은 일제 의 식민 통치 탄압이 그만큼 철저하고 집요하고 악랄해서 지도에 의한 투쟁이 남아날 여지 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이승만이 친일 세력 쪽으로 기울어 진 것은 그의 정치적 체질이 그것을 요구한 것이지 좌파에 대항할 힘이 부족한 때문이었다고 보 수 없다. 하여간 이승만이 자기의 정치 기반으로써 친일 세력을 감싸고 나선 것은 그 후의 민족 운명과 대한민국의 성격과 진로와 통일 문제 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33〕첫째 그(이승만)는 입으로 민주주의를 말했으나 자신이 왕족이라는 관념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귀족적, 따라서 반민중적 정치인이었다.
둘째, 친일파를 보호, 자기의 권력기반을 굳힌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지주들에게 유리하게 실시하여 지주층을 권력 기반으로 삼는데 성공했다.

〔37〕해방에서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만 3년간의 역사는 그 후의 30년사에 못지않은 중요한 민족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3년간이야 말로 그 후 30년간의 민족사의 향방을 결정지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3년간의 민족사적 성격은 한마디로 이승만과 김 구의 관계로 상징되며 그 후 30년사는 김 구 노선에 대한 이승만 노선의 승리의 소산이라고 보아 잘못이 없을 것이다.

〔37〕이승만의 정치기반은 타협주의와 부일협력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의 연합세력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미군정의 정신사적 인식 - 진덕규

〔45〕미군정은 불과 3년 미만에 걸쳐서 한국사회를 지배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미친 영향은 단지 그러한 시간적인 것으로만 설명되어질 수 없다. 미군정은 3년이라는 시간상의 문제가 아니라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있어서도 하나의 중요한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정치적 면에서 미군정은 한국 정치 사회의 권력구조기반을 어느 정도 설정해 주었으며 경제적 면에서는 경제 체제, 즉 자본주의의 시장 경제 제도를 수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문화적인 면에서는 이른바 ‘양키 문화’가 전통적인 한국 문화와의 이질감을 조성시켜서 마침내 한국 사회에 ‘양키 문화’의 무비판적인 수용이라는 문화 구조적인 표류의 한 시발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처럼 미군정이 미친 영향은 정치에서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과도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속에 모든 사상이 침몰됨으로써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문제 삼으려는 관념조차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50〕초기 미국에게 한반도는 일본군과의 전투의 전개지로서일종의 군사적 점령지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 일본식민지의 통치 구조를 그대로 지속시켰고 일본인 관리들을 그대로 집무하게 하였다.


김구의 사상과 행동의 재조명

〔325〕백범은 한마디로 누구인가.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는 태어나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전생애를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항일 투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추모란, 그의 뜻이 이 역사적 현실에 실현된 부분에 대한 실천적 계승과 평가라는 뜻이 있을 때에만 제값을 차지하는 것이다.

〔326〕과거에 있어서 전쟁응 애호한 자는 파시스트 강도군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326〕이것은 오늘날 일본의 역사적 존재, 이러한 일본의 복잡다단한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인식 논리를 그의 전생애를 통한 항일 투쟁 경험을 통해 한마디로 농축시킨, 고도의 논리적 인식이 직관화된 교훈이라고 할 것이다. 이 교훈은 백범의 교훈이자 동시에 오랫동안 외침에 맞서 싸운 우리 민중의 흔들릴 수 없는 지혜요 행동 강령이다.

[327] 그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던 반제국주의 항일 민족 투쟁 시기에 그야말로 창백한 지식인으로서 물 위에 떠다니는 기름처럼 비록 자기 자신이 싸우지는 못하나 반드시 해방의 그날은 올 거라며 일제 때 유행하던 이른바 시국론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백범을 다만 역사 반전의 합법칙적인 방법론에 입각함여 평하려 드는 고압적 자세이다.

[328] 분단을 최고의 가치로 조직화한 현상과 질서이다. 분단된 현실을 안정화하려는 물질적 관계들과 분단 장치를 철저화하려는 국내외의 물리적 작폐들 내가 분든을 둘러싸고 어느새 굳어져 버린 현상 유지 정책, 그 속에서 몸부림치는 생명들의 저항을 분단의 안정화에 대힙하는 것으로 억제하는 이 참담하게 황폐된 자유의 영역이 곧 실천하는 주체의 싸움터이다. 여기서 백범처럼 생명을 내대고 싸우는 자라야만 감히 백범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29]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백범은 1876년 7월 11일에 세상에 태어나서 1949년 6월 26일 분열주의자의 하수인에게 무참히 저격됨으로써 불행하게도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싸움의 문턱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329] 백범의 일생을 특징짓는 묏덩어리는 제1기 동학혁명기 제 2기 중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거점으로 하는 항일 무장 유격전 시기, 그리고 제 3기 8/15 이후 귀국하여 조국 분단의 강요에 저항하여 싸운 반외세 통일 운동시기 등으로 헤아릴 수 있다.

[330] 이런 점에서 백범을 생각하면 우리 근대사엔 백범 외에도 항일 민족 투사로서 평가되어야 할 지도층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백범처럼 동학에서 몸을 일으켜 8/15 이후까지 역사와 함께 싸운 이는 드물지 않을까한다. 이와 같이 백범이 동학에서 몸을 일으킨 점은 그의 초기 사상을 평함에 있어 가장 주목할 점이 된다.

[331] 동학에 몸담으면서부터는 민중의 역사의 발전과 함께 그의 인식과 사상을 발전시켜 가는 인간상으로 변했다는 것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항일 반제 투사로서 무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범이 동학혁명에서 참패한 그다음 해부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즈음 백범은 비록 병사를 잃은 소년 장국이었으나 동학에서 불붙여 온 적개심으로 왜놈 장교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의기의 남아로 폭발한 것이 그것이다.

[332] 그러나 젊은 날의 백범의 이와 같은 적극적 항일 투쟁 노선은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적극적 복수심의 전개라는 측면에서는 민중적이었으나 민중의 보편적인 염원을 조직화한 것이 아니라 항일 의병 투쟁이 고조되던 그 당시에 한낱 일개 개인의 적극 항일 투쟁으로 시종했다는 것은 젊은 날의 백범의 항일 의식의 한계였으며 백범의 의식의 발전이란 이러한 자기 의식의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었다.

[335] 백범의 무장 유격전은 항일 반제 민족 전선에서 하나의 전략 단위로 평가할 수는 있어도 주체적 맥락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1930년대의 식민지적 상황은 식민지적 갈등, 즉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피압박 상태에 있었던 우리 민족과의 대립, 모순이 그 어느 때보다도 첨예화하여 피압박 민족의 실체인 농민, 노동자 그리고 의식 대중인 학생층이 주동이 된 광주학생봉기, 6/10만세, 원산 총파업, 그리고 무장한 소작 쟁의가 일고 있었으며 한만 국경지대에서는 1920년대 이래로 조직적인 무장항쟁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338] 한편 민족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으려는 몽양 여운형이 국내에서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비밀리에 결성하여 대일 무력 항쟁도 불사하리라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따라 전국 도처에서 특히 경기도 가평 일대와 황해도 은율 일대에서는 애국 청년들이 비밀리에 사제무기를 만들고 무장 항쟁의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339] 국민당 정권과의 관게 속에서 광복군을 육성만 하려다가 중국 국민의 싸움의 현장을 같이하지 못하는 바람에 중국인의 싸움의 현장도 잃고 조국에서의 싸움의 현장도 동시에 잃어 이른바 연합국에 의한 타율의 해방을 맞고야 말았다.

[339] 당초 항일 투쟁에 가담하려는 백범의 가본 태도는 심부름꾼의 자세였다.

[339] 열화같은 열정, 인간적 성실성, 한 번 정하면 흔들릴 줄 모르는 신념과 결단력, 여기에다 깊고 뜨거운 인간애와 애국심은 금세기 최고의 관용과 양보, 포용과 통일의 주체다운 면모가 있었다.

[340] 그러나 그 당시 참으로 필요했던 통합 대상은 국내외의 광범위한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항일 세력, 그 중에서도 무장 항일 세력을 중점 대상으로 삼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통합 방법도 임정을 정점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항일 반제라는 기본 목표에 입각하여 형식상으로는 연합, 내용상으로는 통일을 가져다주는 신축성의 모형을 지향했어야 했다.
[340] 왜 못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관용과 통일의 주체로서의 백범이라는 개인과 백범이 자리하고 있었던 항일 투쟁의 구체적 기반과의 갈등을 헤아리는 지혜를 동원해야 할 줄 안다. 즉 백범이 자리하고 있었던 중국 그 중에서도 중국국민당 정권과의 관계는 그것대로 임정 존립의 한 조건을 고 있었으나, 그 조건이 바로 관용과 통일의 주체로서의 백범의 시야와 활동 범위에 제한을 주었고, 따라서 임정 자체의 구성 인자와 전통적 분위기도 동학에서 몸을 일으킨 본질을 올바로 발전시킬 토양은 못 되었다.

[341] 그런데 이렇게 유구한 간섭의 역사를 더듬으면 미국이 한국에 이익을 가져다준 실례는 최소한 8/15 전까지는 한번도 없었다. 병인양요로 통칭되던 때엔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명백한 침략자로 등장하였다. 또한 한일합방이 사실상 미국의 극동 정책의 소산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사실을 들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342] 대단히 까다로운 문제인 듯하였으나 백범에게는 아주 선명한 해답으로 나타났다. 즉 해외망명생활 30년만에 그리던 조국 땅에 돌아오려는 백범에게 당시 미국은 임정 간판을 앞세우고는 환국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첫 번째,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쨰로는 항일 반제 투쟁 당시의 우리 민족의 승리의 기득권을 전연 인정하기 않겠다는 것이다. 끝으로 한국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상태로서의 문제이지 자주적인 해방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민족의 독립의 연속성이다 자율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342] 그 법통에 대하 s평가 그리고 그 기능을 8/15 후의 민족사 전진에 수렴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의 자결권에 속하는 문제였지 외세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었다.

[343] 지금 우리 국토를 구분점령하고 있는 미 소 양군대는 우리 민족을 해방해준 은혜깊은 우군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잘 협조하여 왜적의 잔재세력을 철저히 숙청하는 동시에 그들이 회국하는 날까지 모든 편리와 수요를 제공해야 합니다.

[343] 미국이 비록 임정의 옷을 강제로 벗기기는 했지만 우리의 주적이었던 일본을 몰아낸 해방 우군이니 “그들이 돌아가는 날까지 모든 편리와 수요를 제공해야 한다”고 능히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가는 날까지”하고 미국의 한반도 진주를 수동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이러한 언사는 백범의 해방 전후의 인식 논리 즉 외세에 의한 조국 분단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단적인 증거이다. 그것은 38선에 의한 조국의 분단이 미국의 내재적인 요구가 규정한 세계 전략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었다는 말로 퇴풀이될 수 있겠다.

[344] 미국정 포고령 제 1호는 “한반도에 있는 일본 사람에 대해서는 한국 사람은 하나도 손대서는 안된다”는 대목이 특히 주목되었다.

[345] 참으로 몽양을 평가해야할 기준은 그가 민족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기 위하여 8/15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것이었으나 미군정은 건준을 가차없이 해체시키고 말았다.

[345] 이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8/15 이후에 새로운 체제를 구성함에 있어서 국내에서의 모든 자율적인 운동을 미국정에 종속시키든가 그리하지 않으면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냉전의 기본 구조로서의 분단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세력은 첫판부터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345] 이 때문에 백범은 일찍이 건주의 해체에서 국내 세력과의 상관 관계만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분단을 매개로 한 미국의 세계 전략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대응할 자세, 그리고 애당초부터 미국에 의한 조국의 위임 통치론자로서의 이승만의 본질을 신속히 규정,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백범이 이 점에서 석연하지 않았던 것은 지금 생각하더라도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을 정도로 애석한 일이었다.

[346] 해방 이후 백범 앞에 들이닥친 제 2의 도전은 신탁 통치 문제였다. 신탁 통치 문제는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통일, 독립을 가져다 줄 목적으로 결의된 것으로 통일, 독립의 유예기간으로서 미/소가 5년 동안 위임 통치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347] 여기에서 애국자가 선택해야 할 길은 ‘탁치문제’를 앞에 놓고 어떤 일이 있어도 민족의 분열을 막는 것이었다. 따라서 탁치안을 앞에 놓고 이에 대하여 흑백논리로 빠져 들어간다는 것이 조국의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의 함정이라는 것을, 38선 획정의 기본 논리에 따라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347] 백범은 일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싸운 애국자이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 네 소원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 소원은 첫째로 둘째도 그리고 셋째도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이라고 대답할 것임을 신조로 하고 있는 분이었으므로 그의 이러한 신념 그리고 그의 격렬한 독립주의 노선은 형식논리로 보아도 이러한 탁치안과 일치될 리가 없었다.

[349] 이승만의 반탁 운동 전략은 바로 이러한 자기 운동 원리를 밀고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 단적인 증거로 백범이 한창 반탁 운동의 미몽과 좌우 합작을 통한 민족의 통일로 민족 진로의 방향을 잡으려던 시기인 1946년 6월 3일 한국의 남단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은 불가피하다”는 폭탄적인 선언을 해버린 것으로 뒷받침되었으며 이러한 이승만의 발언은 또 이 발언이 있기 한 달 전 “미군정 당국은 남조선만에 의하여 조선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는 미국연합통신사 보도가 뒷받침하듯이 미국의 점령 정책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던 시기였다.

[350] 그러니까 백범의 반탁 투쟁의 궁극적 목적이 항일 세력의 통합으로 외세에 의한 분단을극복하는 데 있음일 이 성명 한 장으로 재확인하고 있으면서도, 백범이 갖는 대중적 영향력은 반탁 전선을 빙자하혀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이승만의 계략권, 즉 분단의 함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이것은 백번을 고쳐 생각해도 해방 이래 백범이 걸어간 길의 또 한번의 실패였다.

[352] 명쾌한 언어로 된 백범의 이 성명이 뜻하는 것으로 보아 그 때 백범에 대립되는 적은 단순히 한민당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그 한민당의 전신인 친일 지주 세력 및 해방 후의 모든 분열주의와 그것이 떠받들고 있는 미국정 체제를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좌우간 이러한 공방전으로 말미암아 외세에 의한 조국 분단의 현실은 비로소 국내 세력의 민족 노선의 쟁점으로 드러난 셈이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백범의 생애로 보아 그의 마지막 싸움이자 항일전보다 더 격렬한 대결이었다.

[353] 백범의 이러한 논지는 “미소 양군은 철퇴하라”는 딱부러진 말로 적시되었으며, 이 점에서 백범의 노선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에 대립한 최초의 아시아적 표현의 하나였고, 따라서 그의 품격은 이승만 정도가 왈가왈부할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질서의 태동이라는 측면에서만 올바른 평가를 가져다 줄 수 있다.

[353] 하지만 백범은 이러한 인식 논리를 미국과 소련에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한 인식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을 해방 우군이라고 밎는 바람에 정확한 논리에 앞서 동맹자라는 현실적 이해와 심정적 파악이 조국을 두 동강 낸 강대 세력을 적으로 설정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것이 앞에서 지적한 바처럼 민족 해방 이래 백범의 의식을 점한 혼돈이었다.

[355] 이러한 백범의 사상적 본직이 단독정부 수립을 목전에 둔 중대한 고빗길에서 터져 나왔으니 우리 민족의 통일적 발전과는 일치할 수 없는 일체의 외세, 일본 제국주의와 여타의 제국주의는 모두 물러가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백범의 단정 반대 투쟁은 그의 군정 반대 투쟁과 함께 동서 양극질서에 반기를 든 선도적인 민족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355] 그렇다면 분단의 합법화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치란 말인가. 불문가지로 분열주의자들의 이익에 속한다. 이 때문에 백범은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면서 단독정부 수립은 분열주자들의 자기 이익을 위한 정권 수립임을 명백히 하였다.

[358] 그러면 무슨 뜻인가.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 통일된 나라를 쟁취하려는 진정한 애국심, 그리고 참다운 인간이 양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라는 것이다. 아니 항일 반제 세력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일 때 그 생존과 생존의 발전이 있는 것이지 둘로 나뉘면 죽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 통일의 대원칙을 놓고서는 이를 권력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통일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문제가 아니니 모든 양심세력은 다투어 나서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두 개의 한국이 하나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만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는 대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이 위대한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고, 따라서 그 죽음으로써 그는 오늘에 다시 살고 있음을 필자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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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04 14:33:12 *.99.120.184
우리나라 역사 중에 그래도 저에게 흥미로운 부분은 해방전후사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김구선생님이 등장하시거든요.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책을 읽고 다시 한번 리뷰을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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